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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 『장기 비상시대』, 갈라파고스 2011

비상시대, 분석과 경고를 넘어서

 

 

이필렬 李必烈

방송대 교수 lprlso@gmail.com

 

 

16649장기 비상시대(The Long Emergency, 이한중 옮김)는 석유결핍시대에 우리에게 닥칠 고통과 변화를 미국사회를 대상으로 분석한다. 변화는 모든 영역에서 일어난다. 석유와 전기라는 혈액을 공급받지 못하는 거대 도시가 작동을 멈추고, ‘괴이’하게 생긴 초고층 현대 건축물들이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해 기능을 상실한다.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대규모 농업과 축산업이 파산하고, 유행과 디자인을 좇는 상품소비문화가 몰락한다. 세계시장과 금융자본이 붕괴하고, 대형할인점들은 내리막길을 달리다 사라진다. 미국 주택시장의 거품이 터지면서 지금까지 미국 중산층의 보금자리로 여겨졌던 교외의 시대가 종말을 맞는다.

이것만이 아니다. 교육, 정치, 도덕 같은 영역도 큰 변화를 겪는다. “사실상 성인”을 “위한 탁아소” 같은 고등학교가 무의미한 곳이 되고, 많은 대학이 문을 닫게 되며, 어린 시절을 ‘왜소화’하고 낭만화하는 경향도 줄어든다. 농사나 목공처럼 몸을 쓰는 진짜 기술의 위상이 높아지고, 변호사 같은 소위 전문직의 지위가 몰락한다. 삶은 훨씬 실제적이고 생존지향적인 것이 되고, 따라서 안일하고 사치스러운 삶은 설 자리를 잃는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당연히 ‘합의된 최면상태’에 빠져 현재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다. 고통은 혼란을 가져오고, 국가는 통치 자체가 어려워지며 무질서가 판친다. 지구화도 석유시대의 종말과 함께 사멸하고 “세계는 다시 넓어”진다.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 사람들은 체념과 낙담에 빠져 종교적 광분으로 치닫고, 성장이 벽에 부딪친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과 유사한 정치적 혼란이 벌어진다.

석유의 끝과 함께 세상의 끝이 온다는 종말론적인 외침처럼 들리지만, 저자는 이에 대해 예언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분석가의 태도로 이야기한다. 그의 분석은 역사적 사건과 현재의 상황을 종횡으로 엮어내는 방식으로 치밀하게 전개된다. 그의 논지는 “화석연료로 인한 풍요는 인류에게 딱 한번만 허락된 사건”이고, 이미 석유부족시대가 시작되었으며, 그로 인한 비상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으로 수렴된다. 석유시대의 특징이란 현재를 위해 미래를 희생하는 것이다. 물론 이 시대의 사람들은 미래에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석유는 풍부하게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또는 조금 양보해서 그 대체물이 풍부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그 가정이 틀린 것이라면 미래는 없다. 따라서 이를 꿰뚫어보는 저자에게 현재의 풍요는 ‘환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저자는, 인류문명이 장기 비상시대 후에도 지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낙관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정만 하는 것이 아니며, 종말적 상황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만 골똘하게 생각하는 ‘생존주의자’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암울한 내용의 글을 쓴 이유에 대해 “많은 이들이 몽유병 행진에서 깨어나 인간문명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꽤 깊이있는 분석이 곁들여진 경고를 통해 행동에 나서도록 설득하고 그럼으로써 무언가 희망적인 결과를 얻어내려 한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저자의 시도는 성공한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가 바라는 ‘건설적인’ 행동이란 무언가 희망의 빛이 보여야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희망에 대해 그는 암시 수준에서조차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태양에너지 등의 재생가능 에너지가 개발되어도 장기 비상시대가 오는 것을 결코 막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석유가 없으면 태양전지판, 배터리, 풍력터빈, 수력터빈을 제작할 수 없고, 그것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콘크리트, 철근, 크레인 등도 조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이오매스는 고려 대상도 될 수 없다. 석유나 가스를 이용해 거둔 곡물이나 그 부산물을 가공해 얻은 화석연료 대체물의 양이 원래 투입된 에너지를 모두 합한 것보다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보기에 재생가능 에너지에 기반한 에너지 씨스템으로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장기 비상시대의 도래는 필연적이다.

평자는 이러한 진단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에너지 씨스템의 전환이 불가능한 이유에 대한 분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전환은 가능하다.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분산적이면서도 네트워크로 연결된 재생가능 에너지의 이용을 늘려가면 된다. 기후변화와 에너지 고갈로 인한 미래의 파괴를 염려하는 수많은 사람이 이러한 에너지 전환에 동참하면 저자가 필연적인 것으로 가정하는 장기 비상시대는 막을 수 있다. 개별 국가 차원에서는 실제로 이런 식의 에너지 전환이 진행되고 있다.

독일의 경우 에너지 소비는 지난 20년간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1차에너지의 수요가 20% 이상 줄어들었고, 재생가능 에너지의 생산량은 지난 10년 동안 300%나 증가했다. 그 결과 전체 전기 소비 중에서 재생가능 전기의 비중은 20%로 늘었다. 2022년 원자력발전소가 모두 폐쇄될 때는 이 비중이 40%로 증가하고, 2050년에는 80%가 된다. 전세계의 국가가 모두 석유의 공급감소율만큼 재생가능 에너지의 비중을 늘리고 에너지 효율을 높여나가면 장기 비상시대의 파국적인 결과는 오지 않는다. 그때는 사람들이 교외가 아니라 작은 도시와 타운에 모여살고, 장인들의 ‘진짜’ 기술이 대접받고, 금융은 당연히 보조적인 위치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세상은 지금보다 더 좋아지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바라는 세상인데, 그는 이런 세상은 장기 비상시대라는 심한 혼란기 후에 올 수도 있지만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는 많은 사람이 그런 미래를 염원하며 행동을 통해 세상을 바꿔나간다면 혼란기를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은 독자는 저자의 의도와 달리 ‘석유중독’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보다는 체념하거나 ‘생존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번역에서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모든 단위가 미국식이라는 것이다. 피트, 마일, 화씨, 파운드, 제곱인치, 갤런, 야드 등은 대다수의 한국 독자가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양이다. 어떤 의도로 미국식 단위를 그대로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미터, 섭씨, 킬로그램, 제곱미터, 리터로 환산해주었더라면 독자의 불편함은 크게 줄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