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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감정교육

김애란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을 위한 노트

 

 

권희철 權熙哲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인간쓰레기들을 위한 메시아주의」 「노아의 방주로부터 대홍수를 구출하기」 등이 있음. northpoletrain@gmail.com

 

*이 글은 웹진 『뿔』에 게재한 「기쁜 슬픔, 슬픈 기쁨」(2011.7.11)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1.

 

『두근두근 내 인생』에 대한 비판적 독해들은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싶어하는 것 같다. 『두근두근 내 인생』이 보여주는 고통은 (삶과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예술적으로 장식되어 있거나 농담으로 처리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진짜 고통’은 완화되고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순화되며 삶의 참다운 비극성은 은폐되고 만다. “고등학생 부모, 조로증 환자가 겪는 삶의 고통을 그렇게 ‘시크’하고 ‘쿨’하게 표현해도 되는 걸까”1) 혹은 “심지어는 고통을 참고 있는 그의 부모들마저 이 소설 속에서는 그저 실없이 웃고 떠들면서, 상황의 비극성을 회피하고 있는 것인지”2) 묻거나 “김애란은 이 고통과 아픔을 기분 상하지 않을 정도의 규모로 축소”하며 “약간의 눈물과 적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애잔함, 그리고 키치적 아름다움으로 이를 순화시켜 제시한다”3)고 지적하는 독해들. 이는 마치 『두근두근 내 인생』이 충분히 고통스럽지 않다는 점에 불만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두근두근 내 인생』의 결함이 텍스트의 실상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좀더 따져봐야 할 것 같다. 예컨대 ‘슬픔의 자리를 대신한 키치적 아름다움’의 대표적 사례로 제시된 다음의 문장들은 과연 삶의 비극성을 은폐하는 것일까.

 

아버지는 자기가 여든살이 됐을 때의 얼굴을 내게서 본다.

나는 내가 서른넷이 됐을 때의 얼굴을 아버지에게서 본다.

오지 않은 미래와 겪지 못한 과거가 마주본다.4)

 

아버지가 아들에게서 보는 오지 않은 미래, 여든살의 자신의 모습이란 무엇인가.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보는 겪지 못한 과거, 서른넷의 자신의 모습이란 무엇인가. 아들 한아름은 조로증에 걸려 불과 열일곱의 나이에 여든살의 육신이 되어 죽음을 예감해야 했고, 그런 아들이 젊음을 누려보지도 못한 채 자신보다 빠른 속도로 늙고 죽어가는 순간을 아버지 한대수는 서른넷의 얼굴로 목격해야 했다. 여기에 세부적인 에피소드들이 첨가될수록 이 기묘한 마주봄은 이들 부자가 겪어야 하는 육체적 통증이 되고, 타인의 시선과 경제적 압박 등 고통스러운 삶의 세목들까지 거느리게 되어 더욱 아프게 되풀이해서 환기된다.

김애란(金愛爛)은 앞의 인용문에 뒤이어 “열일곱은 부모가 되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서른넷은 자식을 잃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고 물었는데 프롤로그 이후의 『두근두근 내 인생』 전체를 이 물음에 대한 답변처럼 읽을 수도 있겠다. ‘열입곱이어서, 서른넷이어서가 아니라, 도무지 부모가 된다거나 자식을 잃기에 적당한 나이란 있을 수 없다. 그 적당하지 않음이 우리의 삶을 관통할 때의 고통의 디테일이 『두근두근 내 인생』이다.’ 그러므로 김애란의 저 문장들에서 삶의 비극성과 거기에 따르는 곡진한 슬픔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될 수도 있겠다.

또는 “세상에서 제일 웃기는 자식이 되고 싶어요”(173면) 같은 문장을 두고 ‘웃을 수 없는 상황에서 웃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유머의 과잉’(이명원)이라 읽는 것 또한 납득하기 어렵다. 세상에서 제일 웃기는 자식이 되고 싶다는 것은 철없는 아이의 우스꽝스러운 소망이 아니라, “건강한 것. 형제간에 의좋은 것. 공부를 잘하는 것. 운동을 잘하는 것.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 결혼해서 아기를 낳는 것. 부모보다 오래 사는 것”(같은 면) 가운데 어느 하나도 이룰 수 없는 조로증에 걸린 소년의 절망이며, 동시에 그런 절망을 숨긴 채 부모에게 내줄 수 있는 선물을 찾아내려는 소년의 분투이기 때문이다. ‘웃기는 자식’이 되고자 하는 저 유머가 눈물겨운 것임을 알아보고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아마도 『두근두근 내 인생』에 대한 비판적 독해를 그대로 따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보다는 이 작품을 지배하는 정서가 깊은 슬픔이라고, 그리고 그 슬픔이 다만 슬픔 안으로 침몰하지 않도록 분투하는 것이 『두근두근 내 인생』에 걸려 있는 내기라고 보는 편이 실상에 더 가까울 것 같다. 자신 때문에 잃어버린 부모의 청춘을 되돌려주기 위해 마련한 선물, 『두근두근 내 인생』의 마지막에 첨부된 한아름의 소설 「두근두근 그 여름」조차도 순수한 기쁨의 순간들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때 우리는 그걸 했어. 그때 우린 그걸 한번 더 했어. 그때 우린 그걸 계속했어. 그리고 우리는 그게 몹시,

‘좋았어.’

바야흐로 진짜 여름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352면)

 

한아름의 상상 속에서 자신이 막 잉태되고 있는 이 장면은 순수한 기쁨의 순간처럼 보이지만, 이 대목이 한아름의 임종의 순간에 읽혀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작가는 이 점을 환기시키고 싶었던 것인지 인용문의 바로 앞에 또 이렇게 써놓기도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나무에게로— 어머니에게로— 아버지에게로—

바람은 그들 주위를 오랫동안 맴돌며 주저하다 사라졌다. 먼 훗날 그 자리로, 다시 올 걸 알고 그러는 듯했다. 쏴아아— 큰 바람이 불자 수면 위로 잔물결이 일어났다. 그것은 무수한 잔주름을 드러내며 처량하게 웃는 누군가의 얼굴 같았다. 이윽고 한창 입맞추고 있던 어머니가 고개 들어 먼 곳을 바라봤다.

“왜 그래?”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대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을 털어내려는 듯 부드럽게 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곤 다시 아버지와 입술을 포갰다. 바람은 ‘아무것도 아닐’ 리 없는 그들의 사연을 가늠하며, 여름의 미래를 예감하며, 이미 지나온 자리로 다시 돌아가 두사람의 머리를 가만 쓰다듬었다. 두사람은 서로의 숨결에 정신이 팔려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바람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351~52면, 강조는 인용자)

 

이 장면을 연재본과 비교해보면, 여기서의 바람이 「두근두근 그 여름」을 쓰고 있는 작가이자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청춘들의 슬픈 미래, 한아름의 개입이라는 점은 손쉽게 확인된다.5) 바람은 웅덩이의 수면 위에 잔물결을 일으키는데, 이 잔물결이 “무수한 잔주름을 드러내며 처량하게 웃는 누군가의 얼굴”처럼 보인다. 여기서 이 누군가를 늙은 소년 한아름으로 읽는 것은 자연스럽다. 순수한 기쁨의 순간에 이미 슬픔으로 얼룩진 미래가 사랑에 빠진 청춘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나중에 어머니가 될 17세 소녀 최미라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어떤 불길함을 감지한다. 그것이 이 가족이 감당해야 할 “‘아무것도 아닐’ 리 없는” 고난이라는 것, 바람이 예감하는 “여름의 미래”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이 때문에 사랑스런 동화처럼 보이는 「두근두근 그 여름」을 읽을 때조차 독자들은 순전한 기쁨만이 아니라 애틋함과 안타까움을 함께 맛봐야 한다. 순수한 기쁨처럼 보이는 거의 모든 장면들에서 약간의 주의를 기울이면 작가가 주입해놓은 깊은 슬픔의 울림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2.

 

슬픔이란 무엇인가? 스피노자(B. Spinoza)에게 물으면 일목요연한 대답이 주어진다. 우리의 신체와 영혼은 자신만의 고유한 조직을 갖고 있으며, 이 고유한 결합성은 다른 신체나 관념과 만나 약해지기도 하고 반대로 강해지기도 한다. 약해지는 경우의 감정을 ‘슬픔’이라 하고, 강해지는 경우의 감정을 ‘기쁨’이라 한다. 슬픔이란 주어진 상황을 우리의 신체와 영혼에 유리한 방향으로 제어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속하는 감정이며, 기쁨은 정확히 그 반대다. 우리 신체와 영혼의 기준으로 보건대 슬픔은 나쁜 것, 기쁨은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우선 이런 것이다. 어떻게 슬픔에서 벗어나 기쁨의 극한에 도달할 것인가.6)

김애란이라면 아마도 스피노자의 설명을 조금 비틀어놓고 싶어할 것이다. 우리의 신체와 영혼을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시켜야 하는 과제는 언제나 옳다. 그러나 기쁨과 슬픔의 이행이 반대 방향으로 쪼개져서, 각각 ‘더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과 ‘더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으로 배당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참된 기쁨은 슬픔 속에서, 참된 슬픔은 기쁨 속에서 각각 자신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서 슬픔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순수한 기쁨 속에 머무는 것은 신경증자의 도피적 환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오히려 ‘어떤’ 슬픔은 참된 기쁨을 일깨우고 우리 자신을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시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런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어떻게 참된 기쁨을 일깨울 것인가. 우리 자신을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시킬, 슬픔에 삽입된 기쁨의 얼룩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두근두근 내 인생』이 성취하는 과제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희귀병에 걸려 죽어가는 소년의 비극을 상연하는 것만도 아니고, 지혜롭고 착한 소년이 죽음에 이르는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사랑과 희망과 유머를 잃지 않았다는 감동의 드라마인 것만도 아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우리 삶에서 결코 제거할 수 없는 슬픔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서 어떤 기쁨을 발견하는, 슬픔과 기쁨의 풀리지 않는 꼬임을 찾아내는, 감정교육으로서의 소설이다. 이때 『두근두근 내 인생』의 정언명령은, 예컨대 이런 문장으로 압축적으로 제시된다.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 그러니까 너는, (…) 자라서 꼭 누군가의 슬픔이 되렴.”(50면)

 

이 문장의 발화자인 아버지 한대수가, ‘슬픔’을 마치 타동사처럼 쓰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슬픔은 한대수 자신의 아픈 감정이기에 앞서, 한아름의 아픔과 슬픔에 대한 공명(共鳴)이자 한아름의 아픔-슬픔을 아파함-슬퍼함이다. 타동사로서의 슬픔, 한아름의 슬픔을 슬퍼함은 자기연민의 나르시시즘적인 폐쇄성과는 무관하게도, 한대수와 한아름 두 존재를 연결하고, 이 연결이 한대수의 영혼의 고유한 결합성을 확장시킨다. 그것이 저 역설적인 ‘기쁨’의 근거다.

다음 인용문에서 ‘슬픔 속의 기쁨’이라는 역설적인 자리를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가 묻는다.

더 나은 것이 많은데, 왜 당신이냐고.

나는 수줍어 조그맣게 말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로 태어나, 다시 나를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아버지가 운다.(7면)

 

한대수는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되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가장 노릇을 해왔다. 그가 겪은 생활의 어려움이 어떠했을까. 게다가 그의 아이는 조로증에 걸려 너무 아프고 그가 아버지가 된 나이까지 살아내는 것조차 힘겹다. 그가 겪은 마음의 고통이 어떠했을까. 이 어려움과 고통이 한대수의 영혼의 고유한 결합성을 약하게 만들었음은, 그것이 그의 슬픔임은 자명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근두근 내 인생』은 슬픔을 그같은 방식으로 처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여기서 슬픔은 언제나 타동사처럼 사용되기 때문이다. 슬픔은 한대수가 자신에 대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그의 아비에게 느끼는 것이다. 인용문에서 뚜렷한바, 아버지로 다시 태어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이의 의지이며 욕망이다. 아버지의 슬픔 속으로 뛰어들어 그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마음을 아버지의 마음으로까지 확장해 풍성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슬픔이 되는 것은, 그리고 누군가를 나의 슬픔으로 느끼는 것은 퇴폐적인 자기연민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달아나고 있는가. 그것은 나의 삶을 다른 삶에 연결시켜 확장하고 고유한 결합성을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므로 기쁜 일이다. 그것은 나의 삶의 바깥에서 또다른 삶을 연거푸 겪는다는 점에서, 한번의 삶 속에서 여러번 다시 사는 일이다.

너무 슬픈 이 기쁨과 함께 어떤 앎이 함께 도착하기도 한다. 자기연민을 이겨낸 슬픔, 타인을 향해 방향지어진 슬픔은 몰이해와 편견의 자기확신 그리고 여기에 뒤따르는 증오 또한 이겨내고 타인의 마음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엄마, 나는…… 엄마가 나한테서 도망치려 했다는 걸 알아서, 그 사랑이 진짜인 걸 알아요.”(143면)라고 말할 때, 한아름은 자신을 버리고 가출한 적이 있는 엄마를 ‘용서’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불안과 두려움으로 동요하는 사랑을 ‘안’ 것이다. 증오를 모르는 이 슬픈 앎은 슬픔으로 구축된 두 사람 사이의 연결을 강화하며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이 따뜻함을 슬픔에 삽입된 기쁨의 얼룩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슬픔을 타동사처럼 활용하며 역설적인 슬픔과 기쁨의 꼬임을 발견할 것, 이를 통해 한번의 삶 속에서 여러번 다시 살 것, 이것이 『두근두근 내 인생』이 함축하는 ‘감정의 윤리’의 정언명령이다.

 

 

3.

 

한아름의 투병기이자 종생기(終生記)인 『두근두근 내 인생』은 그의 단편소설 「두근두근 그 여름」의 집필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리고 말에 대한 한아름의 섬세한 감각과 함께 ‘이야기’와 ‘거짓말’에 대한 관념이 자주 노출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두근두근 내 인생』을 메타소설의 일종으로 읽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그런 점에서 『두근두근 내 인생』의 디테일들을 섬세하게 점검하면서 이것을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로 읽고자 한 차미령(車美怜)의 논의7)에는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많다. 그러나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로서의 『두근두근 내 인생』은 다시 ‘감정교육’과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점 또한 충분히 강조되어야 할 것 같다.

한아름이 쓰는 이야기(혹은 소설)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그것과 한아름의 삶이 서로를 비추며 ‘감정의 윤리’를 연습해나간다는 점이고, 그 가운데 슬픔과 기쁨의 역설적 꼬임으로 이루어진 감정의 실핏줄들이 『두근두근 내 인생』을 촘촘하게 채워나간다는 점이다.

 

(A) 이윽고 어머니의 둥근 배 위로 총 다섯개의 손이 올려졌다. 모두 희고 고운 게 불가사리처럼 앙증맞은 손이었다. 다섯개의 손바닥은 일제히 숨죽인 채 내 존재를 느꼈다. 나 역시 내 머리 위에 얹어진 다섯 소녀의 온기를 느끼며 꼼짝 않고 있었다. 아주 짧은 고요가 그들과 나 사이를 지나갔다. 어머니의 배는 둥근 우주가 되어 내 온몸을 감쌌다. 그리고 그 아득한 천구(天球) 위로 각각의 점과 선으로 이어진 별자리 다섯개가 띄엄띄엄 펼쳐졌다. 부드럽고, 따뜻하며, 살아 있는 성좌들이었다.(40면)

(a) “엄마?” (…) “배 한번 만져봐도 돼요?” (…) “…… 일부러 숨긴 거는 아니야.” “응, 알아요. 그러니까 엄마, 언젠가 이 아이가 태어나면 제 머리에 형 손바닥이 한번 올라온 적이 있었다고 말해주세요.”(321~22면)

 

(A)는 한아름이 부모의 삶을 토대로 창조한 이야기의 한토막으로,8) 자신이 태아 시절에 겪었으리라고 상상된 체험을 기술한 것이고, (a)는 한아름이 실제로 한 행동이다. 뱃속 아기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는, 두 장면 사이의 유사성을 확인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설명을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A)에서 볼 수 있듯이 한아름은 뱃속 아기의 머리 위에 펼쳐진 살아 있는 성좌들의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창조했다. 이야기의 차원에서 자신의 잉태에 내려진 축복을 확인한 셈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나르시시즘적인 상상의 차원에서 멈추지 않는다. 여기에서 확인된 축복은 한아름의 상상을 넘어 (a)의 현실에서 반복되며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동생에게까지 전달된다. 한아름이 17세 소녀 최미라의 삶의 한 대목을 자신의 소설 속에서 창조적으로 반복한 뒤, 그것을 자신의 실제 삶에서 또다시 반복하며 타인과의 감정의 연결을 이어나가고 또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아름은 자신이 죽어가는 시점에서 동생을 잉태한 부모에게 “왜 지금이냐고, 조금만 참다 갖지 그러셨느냐고, (…) 아무도 모르게 원망하고 서운해”(322면)하며 슬픔 속으로 침몰한 채 생을 마감하는 대신에 축복을 내리는 자들의 대열에 자신을 합류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의 동생 또한 언젠가 이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해서 저 ‘살아 있는 성좌들’의 연결망은 계속해서 확장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아름에게 이야기하기(혹은 소설 쓰기)란 스스로에게 제공하는 감정교육(LÉducation sentimentale)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두근두근 내 인생』의 감정교육이 이야기하기(혹은 소설 쓰기)를 매개하여 한아름의 삶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빈자리를 채우고 또 지워버릴지도 모를 동생을 시기하기보다, 죽음 직전에 동생의 이마에 손을 올려 축복하는 한아름의 행동이 너무 ‘쿨’해서 작위적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바로 이 점을 놓친 탓인지도 모르겠다. 한아름은 자신이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이마에 부드럽고 따뜻하게 올려져 있었다고 상상하면서, 이 상상 속에서 스스로에게 감정교육을 제공하고 또 이를 통해 타인을 향한 감정의 연결망을 힘겹게 구축했다는 것.

이같은 구조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시 한번 확인할 수도 있다. 다음의 인용문을 읽기 위해서 우선 『두근두근 내 인생』의 줄거리를 환기하기로 하자. 감당하기 어려운 병원비 때문에 한아름은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그것을 계기로 이서하라는 소녀가 한아름에게 이메일을 보내온다. 그녀는 한아름과 동갑내기이며 백혈병을 앓고 있어 한아름처럼 병원에서 살아야 하는 처지다. 조숙한 소년 소녀는 금세 서로를 알아보고 이메일을 교환하는 사이가 되며, 소년은 소녀를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이서하는, 불치병을 앓는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작품화하려는 어느 씨나리오 작가가 한아름에게 접근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임이 곧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아름이 절망에 빠졌음은 물론이다. 그는 더이상 이서하가 아닌 이서하에게 세번 묻는다. 이메일을 통해, 또 꿈속에서, 그리고 자기 병실에 찾아온 아마도 그 씨나리오 작가가 분명한 어떤 사람에게, ‘누구세요?’ 하고 반복해서 묻는다.

 

(B) “여자친구 하나만 만들어주세요, 네? 여자친구 하나만. 응?” (…)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엄청난 물보라와 함께 골짜기에 첨벙— 소리가 울려퍼졌다. 거짓말처럼, 정말, 하늘에서 뭔가 뚝 떨어진 거였다. (…) 조금 전 큰어른나무에게 소원을 빈 바 있는 아버지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나무와, 어머니와, 다시 나무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고는 수면 위로 고개만 쫑긋 내민 채 가까스로 한마디했다. “누구세요?

(…)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아는 한대수. 그 이름 아름답군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아는 최미라. 그 이름 아름답군요.”(339, 341~42면, 이하 강조는 인용자)

(b1) 그애에게 메일을 보냈다. 메일에 쓴 문장은 하나였다. ‘누구세요?(276면)

(b2) “여자친구 하나만 만들어주세요! 네?” 그러자 하늘에서 ‘텀벙’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떨어졌다. (…) “누구세요?” (…) 이윽고 저쪽에서 한없이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 “그러니까 너도 아무것도 아니지……”(291면)

(b3) 숨죽인 채 상대의 반응에 집중했다.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하지만 그도 긴장했는지 어느 순간 꿀꺽— 하고 침 넘기는 소리를 냈다. 나는 누군가 분명 곁에 있음을 확신하고 용기 내어 물었다. “누구세요?

(…)

“서하니? (…) 맞구나. 그럴 줄 알았어. (…) 너와 나눈 편지 속에서, 네가 하는 말과 내가 했던 얘기 속에서, 나는 너를 봤어. (…) 그리고 내가 너를 볼 수 있게, 그 자리에 있어주었던 것, 고마워.”(306~9면)

 

한아름의 실제 삶에서 반복된 ‘누구세요?’(b1, 2, 3)라는 질문은 사랑이라고 믿었던 무엇인가로부터 배반당한 소년의 고통과 증오와 공포로 뒤덮여 있다. 그런데 그는 이 일을 겪기 전 자신의 소설 속에서 같은 질문을 이미 마련해두었으며9) 여기서 ‘누구세요?’(B)는 한대수와 최미라가 만나는 동화적이고도 극적인 순간을 표시한다. 이 질문에 이어서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단순한 노래가 끝없이 계속된다. 자신의 이름을 말하기 위해서라도 상대방에게 누구냐고 자꾸만 묻는 이 노래 속에서 한대수와 최미라의 만남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나는 한대수라고 답해야만,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와 함께 반대로 누구냐고 묻고 또 최미라라는 이름을 들을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이 물음은 끊이지 않고 서로를 부르고 서로에게 대답하며 찬미하는 아름다운 원을 그려 보인다.10)

만일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어놓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당신은 이서하가 아니며 그래서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라고 미리 판단하고 있다면, 저 물음의 원환은 끊어지고 상대방의 이름을 들을 수도 없다. 서로 부르고 대답하는 원환 속에서, 상대방이 이름 없는,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면, 나 역시 이름을 말할 기회를 잃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너도 아무것도 아니지.”(b2)) 그래서 (b3)의 ‘누구세요?’에 뒤이어 한아름은 ‘너는 이서하가 아니야’라는 결론을 비껴가면서 저 물음의 원환이 끊기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 더이상 이서하가 아닌 이서하에게 던지는 ‘누구세요?’(b1, 2, 3)는 한대수가 최미라를 처음 대면할 때 던진 ‘누구세요?’(B)의 반복이다. 따라서 (B)의 동화적이고 극적이며 뜨거운 힘이 (b1)으로부터 미세한 변화를 만들고 (b2)와 (b3)로 나아가 한아름은 고통과 증오와 공포로부터 빠져나와 애틋했던 서신교환을 떠올리며 이서하에게 고맙다고까지 말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한아름이 한 일은 그저 씨나리오 작가의 범죄적 행각을 용서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한아름은 자신이 소설 속에서 창조한 ‘누구세요?’의 아름다운 기쁨의 원환이, 점점 뜨겁고 단단해지는 어떤 관계가, 자신의 삶에도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란 것이리라.

아마도 이 대목은 논쟁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한아름의 간절한 바람은 보기에 따라서는 현실로부터의 도피라고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증오 속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허비하는 것이 더 옳았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소설 쓰기를 통해 스스로에게 부여한 감정교육이 한아름에게 증오를 모르게 했고, 증오를 모르는 한아름은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또 그러한 열림을 열망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됐다는 것.

 

 

4.

 

3절에서 제시한 사례들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은 한아름의 ‘소설 쓰기’와 한아름의 ‘삶을 살아가기’가 서로에게 빛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아름은 소설에서 부모의 삶을 반복하며 그 안에서 그들을 향한 슬픔을 기르고 이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타인의 마음에 연결해 자신의 영혼을 확장하며 한번의 삶 속에서 여러번 살기를 실행한다. 또한 거꾸로 한아름은 자신의 소설에서 완성시킨 어떤 모티프들을 다시 그의 삶에서 반복하며 슬픔을 경유한 기쁨, 증오를 모르는 앎을 만들어낸다. 소설과 인생이 서로에게 빛을 던지는 가운데 벌어지는 일들을, 우리는 감정교육이라고 불렀다. 두근두근 내 인생의 감정교육, 슬픔을 타동사처럼 활용하며 슬픔이 자기연민 안에서 침몰하지 못하게 하는 것, 우리 영혼의 확장을 상상하며 슬픔이 자기 안에서 역설적인 기쁨을 발견하게 하는 것. 『두근두근 내 인생』을 소설에 대한 소설로 읽는다면, 이 작품은 소설이 감정교육의 효과를 발휘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갈 수도 있을까. 만일 루쏘(J.-J. Rousseau)처럼, 연민의 한계가 곧 사회의 경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리고 루쏘의 ‘연민’을 우리의 문맥에 맞춰 ‘슬픔과 기쁨의 풀리지 않는 꼬임’이자 ‘마음의 연결 혹은 영혼의 확장’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두근두근 내 인생』의 정언명령 속에서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구성하는 하나의 방법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 두근두근 내 인생이 함축하는 감정교육에는 분명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삶을 펼쳐나갈 수 있게 하는 어떤 상상력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 김애란이 단행본 두근두근 내 인생의 출간을 앞두고 수정작업을 마무리할 무렵 떠올리고 있던 것이 여기서 멀지 않다.

 

하지만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 혹은 부족한 것은 (…) 선()에 대한 상상력이 아닐까. 그리고 문학이 할 수 있는 좋은 일 중 하나는 타인의 얼굴에 표정과 온도를 입혀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니 ‘희망’이란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용기있는 사람들이 발명해내는 것인지도 모르리라.11)

 

타인의 얼굴에 표정과 온도를 입혀보는 것, 타인의 슬픔을 슬퍼하며 우리의 마음을 타인의 마음에 연결하고 또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영혼을 확장시키는 것, 그것이 용기있는 사람들이 발명해내는 희망이고 또한 선()의 방법론이다. 그러므로 두근두근 내 인생을 두고 우리와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어낸 어떤 독해는 단지 진술의 순서를 바꾸는 것으로 작가의 메시지에 근접할 수 있게 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우리는 어떤 책임을 느껴야겠지만, 우리의 값싼 동정과 연민이 타인의 삶을 침해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12)가 아니라, ‘우리의 동정과 연민이 타인의 삶을 침해할 수도 있으리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타인의 고통에 간섭해서 침투하고 그들의 슬픔을 슬퍼하며 더이상 타인들과 우리 자신을 홀로인 채로 남겨두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다’라고.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떠오르는 이상한 생각. ‘너무 슬퍼서 참 좋다’가 그저 부적합한 관념(슬프기 때문에 좋다고? 매저키스트가 아닌 경우에도 그런 것이 가능한가?)인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김애란이 성공적으로 구체화시킨 ‘슬픔과 기쁨의 풀리지 않는 꼬임’과 ‘감정의 윤리’, ‘소설에 대한 소설’이 우리의 마음에 새긴 흔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감정교육은 한아름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일 뿐 아니라, 김애란이 우리에게 부여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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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에 엇갈린 시선」, 『경향신문』 2011.8.7에서 심진경의 말.

2) 이명원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그 명랑함에 묻는다」, 『프레시안』 2011.7.15.

3) 서희원 「키치적 구원과 구원 없는 삶」, 『문예중앙』 2011년 가을호 395, 399면.

4)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창비 2011, 7면. 이하 이 작품을 인용할 경우 본문에 면수만 표기한다.

5) 연재본의 해당 장면은 다음과 같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판에 손을 얹는다. 그러고는 17년 전, 나와 동갑이었을 아버지에게 마음속으로 알은체를 한다. ‘대수씨!’ 쏴아— 바람이 불자, 아버지의 이름이 골짜기를 타고 무수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 ‘네?’ (…) ‘행운을 빌어요.’ (…) ‘근데……’ (…) ‘누구세요?’”(「두근두근 내 인생」, 『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 211~12면, 강조는 인용자)

6) 질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2001, 42~47면.

7) 차미령 「이야기꾼의 탄생과 진화 1」, 『문학동네』 2011년 가을호.

8)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A)는 마치 객관적인 과거 사실에 대한 회상 장면처럼 처리되어 있지만 약간의 주의를 기울이면 이것이 한아름의 단편소설 「두근두근 그 여름」의 저본이 될, 삭제된 원고 가운데 일부임을 알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차미령의 앞의 글이 상세하게 논증하고 있다. 어느날 한아름은 최미라가 자신을 낳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는 화가 나서 그동안 써왔던 원고를 삭제해버리고, 나중에 이서하와 메일을 주고받게 된 이후 새롭게 원고를 써나간다. 「두근두근 그 여름」이 이 두번째 원고이고, 첫번째 원고는 『두근두근 내 인생』 안에 흩어져서 제시되어 있다. 한아름이 과거를 회상할 때, 그 내용이 매번 그가 알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한다는 점에서 특히 1부의 회상장면을 한아름이 창조한 이야기, 삭제된 첫번째 소설 원고라고 읽을 수밖에 없다.

9) (B)가 삽입된 단편소설 「두근두근 그 여름」이 씨나리오 작가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전에 이미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아름은 이서하와의 만남을 계기로 「두근두근 그 여름」을 쓰기 시작했고 이서하가 가공의 인물임을 알아차린 뒤 깊이 절망한 탓에 이 작업을 중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0) 여기서의 찬미의 근거는 상대방의 우월한 속성에 있지 않다. 두 사람이 “그 이름 아름답군요”라고 말할 때, 이 둘은 서로를 부르고 대답하며 서로에게 연결되는 행위에 근거해서 서로를 찬미한다. 약간의 변경이 허락된다면 우리는 이 구절을 “그 이름〔〕 아름답군요.”가 아니라 “그 이름〔〕 아름답군요”라고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11) 「두개의 물소리」(「물속 골리앗」 작가노트),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1, 51면.

12) 조강석 「타인의 고통」, 『문예중앙』 2011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