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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계몽의 한계와 대중지성의 전개
3・11 이후 일본 지식사회의 지형 변화
김항 金杭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저서로 『말하는 입과 먹는 입』, 역서로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근대초극론』 『예외상태』 『정치신학』 등이 있음. ssanai73@gmail.com
1.
“허를 찔렸다.” 일본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 타까하시 테쯔야(高橋哲哉)는 최근의 저서에서 후꾸시마 원전사태와 마주했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1)무슨 뜻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연구자로서 나는 (…) 일본의 전전・전중(戰前・戰中)의 ‘야스꾸니’의 시스템을 전형으로 하는 국가와 희생의 문제를 고찰해왔다. 그럼에도 원전에 대해서는 그것이 거대한 리스크를 동반한 시스템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또한 특히 히로시마・나가사끼의 참화를 알고 있는 일본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의문을 느끼고 비판을 해왔지만, 원전 자체를 테마로 하여 추구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허를 찔렸다는 감각이었다. 아차, 방심하고 있었다는 감각, 무엇보다도 먼저 이 감각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2)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철학 연구자인 저자가 원전문제를 다룰 필연성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저자는 방심했고 허를 찔렸다고 느꼈다. 아마 이 다소 뜬금없는 감각이야말로 일본의 지성계가 3・11 이후에 공유하는 실감일 것이다. 정치학, 사회학, 철학, 문학, 역사학 등 수많은 분야의 지식인들이 얼핏 보면 자기 분야와 상관없어 보이는 원전 문제를 사고하지 못했음을 한탄한다. 그 까닭은 패전 후 일본에서 추진된 원전정책이 에너지나 환경 차원에서 폐해를 야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곧바로 일본의 전쟁책임과 연동되는 전후 국가의 기만적 발걸음을 응축하는 문제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일본에서의 원자력 개발, 원자로 건설은 전후의 파워 폴리틱스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키시 노부스께(岸信介)에게 ‘평화이용’이라는 조어는 철갑 위에 두른 옷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튼 2차대전에서 토오조오 히데끼(東條英機) 내각의 각료를 역임했고 A급 전범으로 체포된 키시의 이 발언,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받은 피해에 대해서는 떠들면서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가해의 역사는 외면하는 일본이 키시의 이런 발언을 허용하고 있었음을 동아시아의 민중은 어떻게 생각할까?3)
야마모또 요시따까(山本義隆)가 문제삼고 있는 키시의 발언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핵의〕 평화적 이용과 군사적 이용이란 종이 한장 차이다. (…) 평화적 이용이라 아무리 말해도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이것을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4) 이는 1959년 일본 참의원 예산심의회에서의 발언으로, 1954년부터 추진되어온 일본의 원전정책이 결국 잠재적 핵무기 보유능력을 키우기 위함이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패전 직후부터 전개된 일본의 복구 정책과 담론이 전쟁책임에 대한 철저한 망각 위에서 이루어졌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군 통수권자인 천황을 법적으로 면책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문화인들이 자발적으로 히로히또(裕仁)를 군국주의자에게 협박받은 가련한 군주로 표상했다. 또한 A급 전범 키시 노부스께가 우여곡절 끝에 수상이 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15년 동안 아시아・태평양 전쟁 수행에 핵심 역할을 한 군부, 관료, 재계 인사들이 거의 대부분 상처를 입지 않고 전후 일본의 주류를 형성했음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냉전 대립에 힘입어 패전 후 일본은 손쉽게 전쟁 전의 국가위상을 회복해나갔다. 1954년 국회에 제출된 원자력 예산, 이듬해 성립한 원자력기본법은 이처럼 전쟁 전 기득권세력이 국가위상을 회복하려는 시도의 핵심을 차지하는 정책이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위력은 국제정치를 핵무기 경쟁으로 밀어넣었고, 패전 후 복구의 길을 모색하던 일본의 주류세력은 잠재적으로라도 핵무기 보유능력을 갖추는 것이 국가위상 회복에 필수적이라 간주했던 것이다. 즉 원자력발전소 건설정책은 전쟁책임의 망각과 흔들림 없는 부국강병 노선 유지를 꾀하던 일본 주류세력의 전후 복구 프로그램이었던 셈이다.
타까하시 테쯔야의 “허를 찔렸다”는 말은 바로 이런 역사과정에 대한 무감각을 나타낸다. 원자력발전소가 그저 에너지정책의 일환으로 건설된 것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국가체제의 근원적 문제성을 응축하는 괴기스러운 복합건축물임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3・11 이후의 일본 지성계를 바라볼 때 이 감각을 확인해두는 일은 좀더 넒은 맥락에서 일본 지식사회의 지형 변화를 추적하기 위한 출발점을 제공해준다. 이 감각은 결국 전후 민주주의를 견인해온 비판적 지식인의 계몽이 한계를 맞이했음을 알려줌과 동시에, 지식인과 대중의 분리와 위계화를 기초로 해서 형성된 일본 지식사회가 이른바 ‘대중지성’의 전개를 통해 서서히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이런 계몽의 한계와 대중지성의 전개를 살펴보기로 하자.
2.
3・11 이후 출판된 많은 저서들은 대부분 원자력발전소가 메이지유신 이후의 근대국가 일본의 본질을 응축한 건축물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모두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데 대해 반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전문제가 에너지정책이나 환경문제에 국한된다거나, 인간문명의 오만함에 대한 자연의 경고라는 추상적 수준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 아님은 어느정도 지성계의 상식이기도 하다. 원전문제는 궁극적으로 역사와 정치와 국가와 자본주의의 문제임을 일본의 비판적 지성계는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3・11 직후에 출판된 카이누마 히로시(開沼博)의 ‘후꾸시마’론: 원자력 마을은 왜 태어났을까?(「フクシマ」論: 原子力ムラはなぜ生まれたのか, 青土社 2011)는 이런 인식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은 원래 3・11 이전 토오꾜오대학 대학원 정보학환(情報學環, 정보학 분야의 학제연구・교육기관) 과정에 제출된 석사논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원전마을 후꾸시마의 탄생을 통해 패전 후 일본의 고도 경제성장이 내장하고 있는 검은 커넥션의 실태를 고발한다. ‘원자력 마피아’라 할 만한 국회의원, 지역 유력자, 토건족, 이들을 엮어주는 국가관료는 자신의 이익을 공고히 챙김과 동시에, 패전 후 일본이 국제 사회에서 전쟁 전과 같은 지위를 회복하도록 노력한다는 자부심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와 뒤틀린 역사의식이 후꾸시마 원전마을을 탄생시켰고, 이는 결국 근대국가 일본이 내장한 근원적 폭력성의 응축이라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따라서 후꾸시마 원전사태에 대한 비판은 평화헌법 및 교육기본법과 더불어 전후 민주주의의 한 축을 형성했던 ‘비핵 3원칙’(핵을 보유하지도 제작하지도 반입하지도 않겠다)이 원전 건설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점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즉 자위대의 존재가 평화헌법을 실질적으로 무력하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전이 비핵 3원칙을 무의미화했다는 비판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전후 민주주의를 옹호하던 비판적 지식인들이 헌법이나 비핵 3원칙이라는 원리적 슬로건에 매달려 윤리적으로 옳은 비판을 되풀이하는 이면에서, 그런 비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원전 건설을 통해 주류세력은 자신들의 역사관과 국가관을 실현해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3・11은 패전 후 비판적 지식인들의 윤리적 비판이 얼마나 표피적이고 무력한 것이었는지를 말해주는 사태다. “허를 찔렸다”는 자기고백은 스스로의 무력함에 대한 갑작스런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이는 전후 민주주의를 지탱해온 비판적 지식인들의 계몽이 근원적인 한계를 노정했음을 알려주는 표식이기도 하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로 대변되는 패전 후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앞에서 말한 전쟁책임의 망각과 구체제의 부활에 대해 저항하면서, 패전 후 일본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시민 개개인의 계몽된 의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설파해왔다. 이후 물론 내용도 가치관도 방향성도 상이하지만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민주주의체제의 외연 확대와 정신적 심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공론장을 형성했다. 전후 일본에서 만개한 비판적 잡지의 의제설정 능력은 이런 지식인들의 노력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나 3・11 이후 이런 계몽은 한계를 드러냈다. 3・11 직후에 출간된 사상으로서의 3・11(思想としての3・11, 河出書房新社 2011)은 이를 증명해준다. 이 책은 일본 지성계에서 내로라하는 사상가와 평론가들의 기고문을 모은 것이다. 요시모또 타까아끼(吉本隆明), 쯔루미 슌스께(鶴見俊輔), 카또오 노리히로(加藤典洋) 등 저명 필자들이 참여했고, 원고마다 편차는 있지만 저마다의 3・11에 대한 감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인터넷상의 정보라 한계가 있겠지만, 이 책에 대한 평가에서 눈에 띄는 점이 있다. 물론 책 자체에 대해서는 호평도 혹평도 있지만, 혹평을 한 대부분의 평자들은 이 책이 너무나도 기존 출판계의 관행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일본 출판계에서는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 때 저명한 평론가들에게 짧은 원고를 청탁하여 한달 만에 책을 내놓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특히 ‘무엇으로서의 무엇’이라는 제목의 책은 현실의 사태를 지성계가 전유하는 전형적 방식이다. 부정적 평가의 대부분은 이 책이 3・11이라는 미증유의 사태를 마주하고서도 기존 출판계와 평론계의 관행에 따라 ‘인스턴트 책’을 출판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마치 출판계와 평론계의 임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의 논점으로 삼고 있다.
물론 이 책의 서두를 장식하는 사사끼 아따루(佐々木中)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이런 관습을 비판한다. “지금 최악의 사태 속에서 가장 비참한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을, 굳이 말하면 ‘소재’로 삼아 ‘이용’하여 말하는 것을 우리가 강요받고 있다면 그 사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 예를 들어 지진 재해를 화젯거리로 삼은 소설이 차례차례 출판되거나 ‘9・11에서 3・11으로’ 등을 제목으로 뽑은 사상・비평의 게임이 전개되겠죠. ‘자, 축제다. 일대 이벤트, 게임의 시작이다. 소재는 대지진과 원전 사고다. 누구 머리가 제일 좋은가?’라고요.” 5)사사끼가 이렇게 말하는 이벤트와 게임이란 사실 전후 민주주의를 지탱해온 비판적 지식인이 전형적으로 전개하던 담론활동이다. 패전 후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거대 출판사와 연계하여 형성한 ‘공론장’을 경제적으로도 장사가 되는 지식사회로 형성해왔고, 정치-경제-문화 영역에서의 여러 사태들은 모두 ‘무엇으로서의 무엇’이라는 형식 안에서 ‘소비’돼왔던 것이다. 물론 비판적 지식인들의 활동을 폄훼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사끼의 지적대로 패전 후 형성된 일본 지식사회의 문법이 ‘이벤트와 게임’이라는 형태로 냉정하게 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냉소하는 사사끼의 언설마저도 여전히 그런 문법이 만들어낸 저서에 담겨 표출된다는 점은 더할 나위 없는 아이러니지만 말이다.
그래서 타까하시 테쯔야와 재일조선인 원로작가 고사명(高史明) 사이에 오간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일본의 존재방식 그 자체가 의문시되고 있다’는 제하의 대담에서 타까하시는 일본이라는 국가체제뿐 아니라 그 국가체제를 비판해온 지식의 존재방식도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6)이는 ‘허를 찔린’ 지식인으로서 자기반성을 넘어서 지식생산의 형식과 메커니즘이, 그것이 아무리 비판적이라 주장해도, 결국은 원전사태를 방치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원전의 근원적 폭력성을 인지하지 못한 지성의 태만을 반성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비판적 지식의 존재방식이 뿌리 깊은 곳에서 근대적인 과학 합리주의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직시하는 일이며, 앞으로 그런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지식사회의 권위적이고 진리독점적인 시스템을 어떻게 변형시킬지에 대한 고민이다. 현재 일본의 ‘지성계’에서 과연 이런 변형의 시도가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이런 지식사회의 권위적 속성과 진리독점적 시스템을 비판하고 해체하려는 움직임은 지성계 바깥에서 전개되고 있다. 바로 인터넷으로 소통하며 자발적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통해, 국가와 자본과 과학이 권위적으로 독점해온 진리를 불신의 늪으로 빠뜨린 일련의 ‘대중지성’적 활동들이다.
3.
3・11 이후 토오꾜오전력(東京電力)과 원전 마피아들은 원전 재가동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토오꾜오전력은 일본 내 3대 광고주이며 원전연구를 주도하는 주요 대학에 거액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슈퍼 갑’이다. 그래서 원전 옹호파는 토오꾜오전력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미디어를 중심으로 원전의 안전성을 여전히 설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좀처럼 결실을 못 맺었을 뿐 아니라 2012년 3월 26일 현재 전체 원전 54기 중 1기만이 가동중이며, 5월 5일을 기점으로 모든 원전이 가동을 중단할 예정이다. 그런데 원전 옹호파의 이런 노력이 무산된 이유는 앞에서 말한 비판적 지식인의 힘이라기보다는, 시민운동 및 인터넷 공간의 ‘비전문가들’이 시민에게 적극적으로 정보 및 지식을 제공했고 현재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계몽하는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지성계가 아니라 게릴라적 지식의 유통이 거대한 시스템에 맞서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지금 일본에서 전개되고 있는 ‘대중지성’은 바로 이 게릴라적 지식생산 활동이며,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례들 중에서 몇가지만 소개해보자.
우선 ‘원전 어용학자 리스트’가 있다. 이는 토오꾜오대학 공학부, 토오꾜오공대 원자로공학부, 원자력안전위원회 등에 소속된 교수들의 리스트를 인터넷 공간에 올리고 토오꾜오전력으로부터 수임한 연구비 정보 등을 폭로하는 활동이다. 현재 인터넷에서는 수십종의 리스트가 유통되고 있으며, 초등학생도 원전 어용학자 5인방을 외울 수 있다고 한다(2012년 2월 연세대 국학연구원 국제워크숍에서 이께가미 요시히꼬池上善彦의 발언). 또한 한 네티즌이 제작한 ‘원자력 마을의 상관도’에는 원자력 마피아의 조직도가 매우 상세하게 도표화되어 있어 원전 건설 및 가동이 어떤 정치-경제적 메커니즘을 통해 이뤄지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7)
이런 폭로적 지식 외에 또다른 주목할 만한 움직임은 ‘계측운동’이다. 2011년 4월 21일 치바현(千葉県) ‘모유 조사, 모자지원 네트워크’ 조사 결과 모유에서 방사성 요소가 발견되었음이 발표되었다. 또 같은 달, 후꾸시마현 내 초등학교 홈페이지에 게재되던 일일 방사선 공간선량 수치가 현(県) 교육위원의 압력으로 게재 중지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즈음부터 인터넷에서 가이거 카운터를 구입하여 계측한 수치가 인터넷에 게재되기 시작한다. 가이거 카운터 계측방식과 방사선량의 이해를 위해 칸또오(關東) 지역 곳곳의 자율적 학습장이 만원을 이뤘으며, 수많은 조직이 형성되어 방사선 수치가 수시로 인터넷에 게재되었다.8)
이런 움직임은 개인이 방사선량을 계측함으로써 정부나 미디어 발표의 신빙성을 따지고 스스로 판단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국가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 흐름임에 틀림없다. 체르노빌 사태 때 개인의 가이거 카운터 사용이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과학 지식의 권위적 위계화와 진리의 독점체제가 국가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실제로 ‘유언비어’(일본의 맥락에서 이 말은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대학살을 상기시키며, 자주 쓰이는 말이 아니다)라는 용어를 써가며 개인의 계측 결과를 인터넷에 게재하는 것을 자제토록 권고하는 실정이니, 국가나 자본이나 과학기관이 느끼는 공포가 어떤지 가늠해볼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히 계측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민 스스로가 국가의 안전기준을 불신하고 국제적인 원자력자본 반대운동으로까지 나아가는 흐름을 이끌어냈다. 한 계측그룹의 표어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계측하고, 스스로를 지킨다’인데, 이는 정부나 미디어의 발표를 그대로 수용하는 수동적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의 안전을 스스로 확보하려는 ‘자연상태’의 개인이 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을 보도한 것은 일본의 미디어가 아니라 미국 미디어였다.이런 상황에서 대중지성의 발신자들은 국가나 미디어에 대한 불신을 넘어 비판적 지성계마저 불신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즉 비판적이고 공정한 의견이나 보도를 주도해온 미디어, 출판계, 지식인의 네트워크까지도 지식의 권위적 위계시스템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3・11은 ‘지배체제와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전후 일본의 대립구도 자체를 뒤흔든 사태다. 전후 일본의 지식이 무엇을 해왔는지 ‘허를 찔린 채’ 재검토하면서 충격에 빠진 이른바 ‘지성계’를 곁눈질하며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식의 조직화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체계적 조직화라기보다는 들뢰즈-가따리의 말을 빌리자면 ‘리좀형’ 지식의 생성이라 평가될 수 있다. 이런 지식생산 방식은 원전 어용학자의 계보화나 계측운동만으로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수없이 출간된 3・11에 관한 성찰적 서적들이 예전과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데서도 확인될 수 있다(일본에서 ‘식자(識者)’는 대학-미디어-출판계의 커넥션을 통해 권위를 유지해왔다). 물론 여전히 지성계를 지탱하는 시스템은 공고하지만, 지식사회 자체는 확실히 대중지성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듯하다. 한계가 명백해진 전후 민주주의적 계몽과 대중지성 사이에서 앞으로 일본 지식사회가 어떻게 변화할지 지속적으로 관찰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1)犠牲のシステム 福島・沖縄, 集英社 2012, 18면.
2)같은 책 17~18면.
3)をめぐって』, みすず書房 2011, 12면(국역본 후쿠시마, 일본 핵발전의 진실, 임경택 옮김, 동아시아 2011).
4) 같은 책 12면.
5)사상으로서의 3・11, 윤여일 옮김, 그린비 2012, 45~46면.
6)高橋哲哉・高央明 대담 「日本のありようがまるごと問われている」, 『世界』 2011년 8월호.
7) 이 ‘리스트’와 ‘상관도’는 다음 주소에서 볼 수 있다. http://www47.atwiki.jp/goyo-gakusha/pages/13.html; http://ameblo.jp/ijokcom/image-11199702943-11866194370.html.
8)http://new.atmc.jp/. 이 싸이트에서는 일본 전역의 방사선 수치를 알 수 있으며, 문부과학성의 데이터를 기초로 하여 각 지역 자체 계측수치와 비교 분석한다.
9)Hiroko Tabuchi, “Citizens’ Testing Finds 20 Hot Spots Around Tokyo,” New York Times, October 14,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