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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임화의 문학사 인식논리

 

 

임형택 林熒澤

성균관대 명예교수, 실학박물관 석좌교수. 저서로 『이조시대 서사시』(전2권) 『한문서사의 영토』(전2권) 『문명의식과 실학』 등이 있음. lim1767@skku.edu

 

*본고는 제5회 임화문학심포지엄 ‘임화 시대의 지식인들’(2012.10.12)의 기조발제문을 조금 줄여 정리하면서 일부 보완하기도 했다.

 

 

1. 문학사가로서의 임화

 

나는 오래전부터 임화(林和)에 대해 가진 의문점이 하나 있었다. 그의 개설 신문학사를 읽어보면 담긴 견해가 탁월할 뿐 아니라, 학적인 방법론과 체계가 자못 정연하다. 학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절감하는 바지만, 근대 학문의 글쓰기는 결코 재주만 가지고 되지 않고 상당기간 제대로 훈련을 받아야 가능하다. 그런데 임화의 학력을 보면 중등과정 5년이 전부이고 학문제도에 입문한 기간은 보이지 않는다. ‘가방끈’이 짧아도 한참 짧은 그가 어떻게 손색없는 학술적 글쓰기를 수행할 수 있었을까?

임화 전공자들을 만나면 이 문제를 화제로 떠올려보았으나 신통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이 풀리지 않는 의문점의 해답은 다른 어디가 아니고 임화 그에게서 찾을 도리밖에 없지 않은가 한다. 그 자신 평론적 글쓰기로 벼린 두뇌와 솜씨가 학문적 글쓰기로 전용될 수 있었던 것이 주체적 조건이 되었을 터요, 마침 1930년대 조선학이 발흥하였던 사실이 객관적 조건이 되지 않았을까.

문학에 대한 역사적인 조사 연구가 바야흐로 착수되면서 조선문학=국문학이란 개념을 사고하게 되었다. 이 초창의 과정에 그는 처음부터 참여했던 것은 아니고 학적 성과가 차츰 제출되는 것을 보고 뛰어들었다. 그가 남긴 신문학사의 저작을 읽어보면 학습능력이 비상한 사람임을 짐작케 한다. 그토록 학습효과가 고도로 발휘될 수 있었던 데서 보듯 내면에서 필시 학습의욕이 불탔을 것이다.

그 시절엔 요즘 흔히 연구와 비평을 겸업으로 하는 것과는 사정이 달랐다. 임화가 박사학위를 받아 교수가 되려고 열심히 신문학사를 썼겠는가. 당시는 조선학=국학의 첫 출발과 더불어 우리 문학에 대한 학적인 접근이 시도되는 단계였다. 당대문학을 두고선 누구도 학적 대상으로 돌아보지 않았다. 좌파문학의 현장이론가인 그가 문학사로 시선집중을 한 데는 무언가 각별한 동기와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문학사 관련 작업은 1939~42년 사이에 이루어졌다.1) 앞서 1935년에 「조선신문학사론 서설」이란 표제의 글을 발표하는데 첫 장이 ‘문학사적 연구의 현실적 의의’다.

 

우리가 문학사적 사업에 요구하는 과학적 엄밀성은, 일층 가혹하고 또 고도의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오늘날에 있어서 처해지는, 근소한 과학적 부정확성은, 명일에 볼 수 있는 우리의 문학적 창조에 있어 실로 금일에 앉아 상상키 어려운 심대한 결과를 초래할, 출발점이 되는 때문이다. (『임화문학예술전집』2권 『문학사』 374면)2)

 

현실에서 문제의식이 발단한 것이다. 자신이 취한 좌파 이론가의 논법으로 지금의 창조적 현실에서 내일을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다. 문학사 작업의 ‘과학적 엄밀성’은 문학의 실천적 방향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일임을 더없이 강조한 논리다. 당대현실을 그는 어떻게 진단한 때문일까?

 

현재 우리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어떠한 조건하에 있으며, 또 그외의 건전한 문학 전반이 미증유의 심각한 역사적 국면 위에 서 있다는 것은 다언을 요치 않을 것이다. (같은 책 375면)

 

193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프로문학이 어떤 조건에 놓여 있었으며, 그밖의 ‘건전한 문학’이라고 지칭한 것이 어떤 미증유의 심각한 국면에 있었던지 그는 “다언을 요치 않는다”고 했지만, 오늘의 우리에게는 설명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다.

1920년대가 전지구적으로 희망과 진보의 시대라면 30년대는 불안과 퇴행의 시대였다. 당시 태풍처럼 휩쓴 대공황으로 1차대전의 종결과 함께 약동했던 ‘해방의 신기운’이 종식되고 파시즘이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는 그 직격탄을 맞았다. 20년대에 사상문화운동이 비록 식민지 억압 아래였지만 제법 활발하여 신간회운동으로 역량이 집결되는가 싶었으나, 이마저 실패하고 군국주의의 진군에 짓밟히고 일체의 진보적인 사상문화운동은 금지된 것이다. 위에서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어떤 조건하에 있으며”라 함은 카프의 조직이 일제관헌에 의해서 해체되고 프로문학이 더는 존립할 수 없게 된 사정을 뜻하는 것임이 물론이다.

프로문학이 일제의 물리적 탄압에 의해 퇴장하게 된 이 시기는 문학사에서 대개 ‘예술파의 득세’로 특징짓고 있거니와, 프로문학 진영 내부에서도 “잃은 것은 예술이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식의 투항주의적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예술이기를 포기한 속화·타락 현상이 만연하였다. 임화는 그런 현상을 ‘근대문학의 위기’로 진단했던바 위에서 “건전한 문학 전반이 미증유의 심각한 역사적 국면에 서 있다” 함은 바로 이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그가 가장 심각하게 우려한 것은 이른바 ‘복고주의의 탁류’였다.

그는 1936년 초두에 「조선문학의 신정세와 현대적 제상(諸相)」이란 제목으로 주목되는 평론을 발표한다. 곧 「조선신문학사론 서설」을 기고한 그해의 문학적 현황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내용이다. ‘복고주의의 탁류’란 이 평론의 한 장인데 보자.

 

이병기, 최남선, 정인보, 한용운 씨 등의 동녹이 슨 유령들은 더불어 새삼스러이 논할 것도 없지만, 그들 없이는 그 연대의 찬연한 신문학을 상상할 수도 없는 김동인, 이광수, 이은상, 윤백남, 김동환, 김억 등 제씨의 근황이야말로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의 가히 교훈 받을 바이다. (『평론 1557면)

 

위에서 정인보(鄭寅普)・한용운()까지 싸잡아서 옛날에 관심을 두었다고 “동녹이 슨 유령”이라고 타기(唾棄)한 것은 무분별이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당시 그가 복고주의적 경사(傾斜)에 얼마나 민감했던지 십분 짐작케 하는바 우리 신문학의 건설자인 이광수(李光洙)·김동인(金東仁)·윤백남(尹白南)이 통속적인 역사물로 퇴행한 사실을 고발한 다음, 이렇게 질타한다.

 

이들(이광수·김동인·윤백인용자)은 모두 문학자, 예술가로부터 대도예인(大途藝人)=야담사로 타락하고, 김동환, 김억 씨 등은 시인으로부터 창가사(唱歌師)라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러 이미 문학비평의 권외에 선 것이다. (같은 책 557면)

 

“대도예인=야담사로 타락”했다는 인물은 주로 김동인과 윤백남에 해당하는데 이들의 타기시된 행적도 침을 뱉을 일만은 아니라고 여겨진다.3) 어쨌건 임화의 안목에 당시 팽배한 복고주의적 경향은 심각한 정도를 넘어서 침통하게 비친 것이다. “부르주아 문학의 복고주의는 근대로부터 중세에의, 문명으로부터 야번(野蕃, 비문명의 ‘야만인용자)에의 후퇴”(앞의 책 554면)로 판단한 것이다. 복고현상을 그는 “카프운동 조락(凋落) 후 대두한 공연(公然) 또는 은연(隱然)한 후퇴운동의 일 결실”(복고현상의 재흥, 『평론 1』 781면)로 간주했다. 지금 논의선상에 올려놓은 「조선신문학사론 서설」은 ‘이인직으로부터 최서해까지’라는 부제가 명시하듯 프로문학을 목적지로 잡고 있으나, 근대문학의 전반적 위기로 정세판단을 하고 변증법적 논리에 입각해서 근대문학 전체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서두른 것이다. 그 결과가 신문학사 저술로 제출되었다.

임화의 신문학사는 이후 70년이 경과하여 허다한 연구물이 퇴적된 현재 우리가 다시 읽어도 저자의 학문에 대한 열정이 느껴질 뿐 아니라 통찰력과 탁견이 곳곳에서 번득인다. 생명력과 현재성을 잃지 않은, 부정적인 측면까지 포함해서 문제적 저작이다. 나는 그 인식논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려 한다. 우리의 근대문학에 대해 논하는 데서 나아가 근대 다시보기가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2. 신문학사의 인식논리와 문제점

 

우선 먼저 임화가 쓴 신문학이란 개념을 거론해야 할 것 같다. 신문학이란 근대문학의 동의어로서 구문학에 대칭되는 말이다. 그의 특허품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보편적으로 사용했으니 후스(胡適)·루쉰(魯) 같은 근대문학의 주역들이 직접 나서서 성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 『중국신문학대계(中國新文學大系)』였다. 우리 역시 대개 관행적으로 써왔는데 이 개념으로 사고하고 사적(史的) 체계를 수립한 것은 임화다.

그는 “신문학이란 개념은 그러므로 일체의 구문학과 대립되는 말일뿐더러 형식과 내용상에서 질적으로 다르고, 새로운 문학을 의미하는 하나의 개념이 될 수 있다”고 전제한 다음, “따라서 신문학사는 조선에 있어서의 서구적 문학의 이식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문학사』 16면)고 주장했다. 임화의 문제적인 ‘이식사관’은 신문학 개념에 논리적으로 직결되어 있다.

동아시아 지역은 주지하는바 개항으로 근대세계에 진입했으며, 서구의 압도적 영향 아래서 근대사회·근대문화가 형성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이전의 일체를 구문학으로 돌린 나머지 신문학이란 개념이 성립하게 되었다. 임화는 이런 객관적 사실을 접수하면서 신문학 개념을 구사한 것이다. 다만 임화적 특성이라면 거기에다 이식사관을 도입한 인식논리다.

임화적 이식사관을 전통단절론 내지 종속논리라고 마구 폄훼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신두원의 주장대로 ‘이식과 창조의 변증법’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4) ‘이식’으로 규정한 임화의 인식논리에 문제점이 없지 않다고 본다. 나는 이 점을 기왕에 지적했던 터이기에 재론하진 않겠으나,5) 논의하는 과정에서 아무래도 언급이 나오게 될 것이다. 이제 임화가 세운 우리 문학사 전체의 구도로 들어가보자.

임화가 시선을 집중한 곳은 20세기로 들어와서 전개된 근대문학=신문학이지만, 이 신문학사를 응당 우리 문학사 전체 속에서 구도를 잡아야 했다. 신문학의 전사(前史)가 되겠는데, 원래 우리 문학은 존재형태가 어떠했던가? 우리가 알다시피 종래의 문학이라면 외래적인 한문으로 쓴 한문문학과 자국어로 쓴 국문문학이 병존해왔다. 조선문학=국문학=한국문학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지을 것이며, 신문학과 사적인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우리 문학에 대한 학적인 접근이 시작되면서 제기된 일대 쟁점사안인데 임화 역시 이 문제를 깊이 사고하여 내린 결론이 있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조선문학 전사(全史)는 향가로부터 시조, 언문소설, 가사, 창곡에 이르는 조선어문학사를 중심으로 하여 강수, 김대문, 최치원으로부터 강추금, 황매천, 김창강 등에 이르는 한문학사와 우리 신문학사를 첨가한 삼위일체일 것이다. (『문학사』 20면)

 

우리 문학의 개념 범위를 설정함에 당해서 한문학을 제외시킨 것이 국문학 연구사에서 1970년대에 이르도록 주류적 견해였다. 그런데 임화는 일찍이 한문학을 우리 문학으로 인정하는 쪽으로 사고하여 우리 문학사의 체계를 세우고 있다. 물론 이렇게 가닥을 잡기까지 그 자신 여러모로 고심하고 궁리하였을 텐데, “그렇지 않으면 조선반도에 사는 수천년간의 역사를 가진 한 겨레의 문화로서의 문학의 역사는 기대할 수 없”(앞의 글)음을 신중하게 고려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제시한 도표가 있다.

 

159_임형택

 

이 도식에 임화는 “신문학사는 신문학의 선행하는 두가지 표현형식을 가진 조선인의 문학생활의 역사의 종합이요 지양(止揚)이다”는 해석을 붙이고 있다. 이상의 도식과 해설에 의거해서 말하면 신문학사는 선행의 언문문학사와 한문문학사의 통일이라는 것이 임화의 인식논리이다.

나는 임화의 위 문학사 인식논리가 당시는 물론 그 이후의 학계 상황에 비추어 특출한 고견이라고 자신있게 주장한다. 이렇게 평가하는 이유는 두가지인데 하나는 우리 문학의 범위 설정에서 일대 난관이요 쟁점이었던 한문학의 처리문제를 일거에 해소한 점이고, 다른 하나는 전체 문학사의 체계에서 근대 이전과 이후의 단층을 무난히 극복한 점이다.

그런데 여기에 적잖은 의혹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제기한 문학사의 체계는 자신이 제기한 이식사관과 논리적으로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 “조선인의 문학생활의 역사의 종합이요 지양이” 다름 아닌 신문학사라고 규정했으니, 이식사관과는 배치되는 논법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바로 이 점에 유의하고 싶다. ‘이식의 극복’이란 창조적 변증법은 임화에게 있어 신문학사에서 실천된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의 방향이었으며, 현실의 신문학사는 의연히 수입되고 이식된 역사다. 임화의 입장에서 돌아보면 ‘이식의 신문학사’를 냉철하게 인식하고 이를 극복할 창조적 변증법을 고민했다. 거기에는 불가피했던 시대적 한계와 함께 인식론상의 문제점이 있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임화가 실제로 지면을 대폭 할애해서 기술한 신문학사는 위에서 언급했듯 1900년대이다. 이 단계를 그는 ‘과도기’로 설정하고 있다. “과도기란 항용 어느 하나의 시대가 몰락하고 다른 하나의 시대가 발흥하는 중간의 시기”라고 명확히 규정짓는다. 따라서 과도기는 “독립되고 완결한 일 시대이지 못하고 두 시대가 교체”(『문학사』 132면)하는 지점이다. 임화는 과도기로 이 시기를 파악함에 당해서 이웃의 일본, 그리고 중국과 비교 검토를 수행했다면서, “평범한 과도기란 용어를 사용함은 (…) 객관적으로 이 시기를 보고자 하는 미의(微意)가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 있어서) 개화기라 함은 구시대를 몽매기라 하여 그것이 문명개화됨에 중대한 역할을 연()한 서구 외래문화를 중히 평가한 데서 온 결과 같고, (중국에 있어서) 문학혁명이라 함은 신문학에 주관적 입장을 설정하여 구문학을 개혁했다는 의미에서 이 시기를 보아, 새 문학의 탄생과 구문학의 몰락에 있어 서구 외래문화의 큰 역할을 몰각(沒却)한 것 같아 취()치 아니했다. (앞의 책 134면)

 

동 시기를 일본의 경우 ‘개화기’로, 중국의 경우 ‘문학혁명기’로 표현하고 있는데 자기의 견해로는 양자 모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지적에 나는 각각 다른 차원에서 덧붙일 말이 있다. 일본이 채용한 개화기에 대해 임화는 구시대를 몽매기로 자인하는 듯하여 꺼려진다는 것이다. 임화가 이렇듯 부적절하게 본 개화기라는 용어가 이 시기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오늘날까지 널리 통용되고 있으니 솔직히 한심한 느낌마저 든다. 중국에 대해서는 임화에게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다. 문학혁명기는 중국문학사에서 5·4운동(1919) 전후를 지칭하며, 그 전 시기에는 적용하지 않고 있다. 어쨌건 임화는 ‘새 문학’의 탄생을 혁명적 변화의 측면에서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신문학사에서 쓰는 과도기라는 말은 육당의 신시(新詩)와 춘원의 새 소설이 나오기 이전 그리고 한문과 구시대(이조적인)의 언문문학이 지배권을 상실한 중간의 시대를 지칭하는 좁은 의미에 한정된다. (앞의 책 133면)

 

이처럼 임화는 신문학사의 본격적인 출발선을 최남선(崔南善)의 신시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이광수의 ‘새 소설’ 『무정』으로 잡는다. 교과서적 통설로 굳어진 그것이다. 그 이전에서 갑오경장까지가 과도기에 해당한다. 이 과도기를 임화는 단연 이인직(李人稙) 중심으로 파악하고 있다. “신소설 시대의 작가 중에서도 가장 현대문화에 가깝고 또한 현대문학의 생탄을 위하여 직접의 산모가 된 이인직 같은 작가는 초기에 가졌던 절충성을 종합적·통일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켜온 것이다.”(『문학사』 318면) 그렇기에 “현대소설의 건설자인 이광수가 계보적으로 연결되는 사람은” 오직 이인직이라고 단정하게 된다.

 

(이인인용자)는 그의 소설에서도 볼 수 있듯 사상적으로 개화주의자였고 정치적으로는 친일당(親日黨)이었다. (앞의 책 183면)

 

임화가 이인직을 신소설의 최고봉으로 치켜든 논거는 소설의 형식과 사상 양면 모두였다. 그의 이인직 평가에서 ‘사상적 개화주의’가 당연히 높은 점수를 받도록 했거니와, ‘정치적으로 친일당’이었다는 사실 또한 감점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인직이 “한일합병에 적지 않은 공로”(같은 글)가 있었다고 그의 매국적 행각을 적시하면서도 별로 괘념하지 않고 있다. 왜일까? 다른 어디가 아니고 그 자신의 과도기를 바라보는 시각에 왜곡현상이 일어난 결과가 아닐까. 임화는 당시 신교육이 발흥한 상황을 소개하면서 총독부 시학관을 역임한 일본인6)의 기록을 전재하고 있다.

 

차등(此等) 사립학교는 명()을 학교에 적()했으나 조금도 그 실()이 무()하고 부질없이 청소년들을 모아 유희(遊戱), 조련(調練)을 일삼고, 정치와 교육을 혼동하여 불량한 교재를 사용하고 불온한 사상을 주입하여 써 학생 생도의 전도(前道)를 그르침이 파다하여…… (앞의 책 65면)

 

당시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사립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출현했으며, 위 논자가 지적한 대로 부실한 학교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신랄한 어조로 비꼰 부분은 뒤집어 읽어야 할 내용이다. “청소년들을 모아 유희, 조련을 일삼”는 것은 체력과 기상을 향상시키려는 취지였고, “불량한 교재를 사용하여 불온한 사상을 주입”한다는 것은 신지식과 함께 애국적인 정신을 고취하였음을 말한다. 임화는 식민지 교육관료의 글을 인용하고서 “사립학교 교육의 대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고 액면 그대로 접수하는 태도였다. 당시 활발했던 애국계몽운동에 대해서는 간과하거나 아니면 착시를 범한 셈이다.

임화는 신구문명이 혼효·착종해서 문명적 갈등을 일으킨 과도기적 상황의 리얼리티를 읽어내지 못하고 일본 제국주의에의 병탄으로 귀결되고 만 사실만을 결과론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리하여 친일 개화주의로 도색된 이인직의 신소설을 과도기의 중심에 놓고 신문학의 선구자로 치켜세웠다. 이 문제점은 따지고 보면 임화만의 것이 아니고 식민지시기에 주도적이고 일반화된 논조였다. 실은 한국의 근대 상황이며, 지금껏 여기서 벗어났다고 보기도 어렵지 않은가 싶다.

다음에 3·1운동 이후 문학의 동향을 임화가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자. 이 지점은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신문학, 다시 말하면 한국적 근대문학의 양식이 수립된 단계이다. 우리의 3·1과 중국의 5·4는 시기적으로 합치하지만 양쪽이 제각기 문화운동으로 연계되었던 점에서도 역사적 상동성을 갖는다. 한국의 신문화운동은 중국의 신문화운동처럼 혁명적 형태로 전개되진 못했으나(기본적으로 식민지 치하라는 현실적 제약이 있었으므로), ‘문화열’이라 일컬을 정도로 대단히 활발했다. 임화는 역시 이 지점을 중요한 고비로 인식하면서도 당시 출현한 문학의 성격을 자연주의로 규정한다. 물론 평가절하한 것이니 요컨대 3·1운동 이후로 “민족 부르주아지가 그 역사적 진보성을 포기한” 데 기인한 것으로 임화는 판단하고 있다.

 

사실 이 시대에 있어 기미(己未, 1919인용자) 전의 고조되었던 정치열은 급작히 문화열 내지 산업열이란 것으로 변형되어 전후 양자의 차이는 실로 당목(瞠目)할 바 있었다. 이곳에는 단지 조선 사람의 문화적 성각(醒覺)이란 피상적 관찰을 불허하는 한 개 본질적 내용의 것이 있다. 그것은 기미 대풍을 중심으로 민족부르 계급이 역사적 도정(道程) 가운데서 연()하는 바 역할과 차지한 위치의 근원적인 변화가 내재한다. 다름 아니라 그것은 기미에 이르기까지 이 계급은 다소간이나 진보적이었고 전진운동의 일우(一隅)에 처하여 있었음에 불구하고 대풍은 그들을 곧 이 반대자로 전화시킨 것이다. (앞의 책 398~99면)

 

임화는 3·1운동 이후 일어난 ‘문화열’과 ‘산업열’을 ‘정치열’의 변질된 모습으로 단정하여 여지없이 매도한다. 까닭은 민족 부르주아지가 진보적 역할을 포기했다는 데 있다. 3·1의 대풍이 그들을 “반대자로 전화”시켰다고 보는, 곧 반동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그는 당시의 문화열풍을 환멸하면서도 상당한 점수를 준다.

 

결국 자연주의는 이인직, 이해조 등의 정론적·계몽적인 문학 이래 이광수에 이르기까지 근대적 발전이란 이상만을 추구하여 질주하던 문학에게 비로소 현실을 보라! 소리친 문학이요, 실제로 부정의 면을 확대 제시함으로 편벽되게나마 현실을 그려 보인 문학이다. (「『백조』의 문학사적 의의, 『문학사』 471면)

 

3·1 이후의 단계를 자연주의로 인식한 것은 그의 지론이었다. 그가 규정한 바 3·1 이후의 자연주의는 이인직으로부터 이광수를 거쳐서 발전한 신문학의 궤적이다. 그렇긴 한데 그가 붙인 자연주의라는 표지판은 한계가 분명하다. 앞서 인용한 「조선신문학사론 서설」이 ‘이인직으로부터 최서해까지’라고 부제를 붙였듯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라는 목적지로 향해 가는 중간지점이며, 거기에는 결함을 내포한 문학이라는 부정적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3·1 이후 신문학의 성과를 과연 자연주의로 폄하할 수 있을까? 실상이 자연주의적 성향을 띤 작품도 없지 않으며 감상과 퇴폐로 흐르기도 했다. 그러나 염상섭(廉想涉)·현진건(玄鎭健)의 우수한 소설작품을 싸잡아서 자연주의로 평가절하하기 어렵다는 점은 긴 설명을 요하지 않을 터다. 그럼에도 왜 임화는 무리하게 자연주의로 단정하였을까?

 

소시민의 문학으로서의 자연주의는 대시민층과 향배(向背)를 달리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생활이냐?’(염상섭 『만세전』, 원주)라고 한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적 작가 염상섭의 심히 히스테리컬한 부르짖음은 정히 이러한 기분의 표현이다. (앞의 책 469면)

 

임화의 논리에서 자연주의는 시민문학의 변형된 성격이다. 그가 조선의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손꼽은 염상섭의 대표작 만세전에서 임화는 소시민 문학으로 전락하게 된 뚜렷한 징표를 제시한 것이다. “이것이 생활이냐?”는 부르짖음은 극심한 스트레스의 표출임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이 언표를 자연주의적으로 읽고 말 것인가? 그것은 ‘묘지’로 상징했던 식민지 조선의 현실, 봉건적 유제로 얼룩진 조선인의 삶의 리얼리티의 절박한 부르짖음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자연주의로 폄하한 까닭은 이 지점을 목적지로 가는 도상의 한낱 디딤돌로 본 때문이다. 지식인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역사적 ‘조급증’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앞의 애국계몽기에서 이인직에 대한 과대평가가 근대주의적 편향이었다면 뒤의 3·1 이후 신문학운동에서 『만세전』에 대한 과소평가는 진보주의적 편향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모순을 일으키면서 인식상의 오류와 왜곡을 범한 것은, 각기 역사단계에서 역동적 실상의 의미를 그 자신이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때문이었다고 보겠으나, 결국 서구중심주의에 매몰된 정신현상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4. 임화의 ‘구문학’에 대한 관심

 

임화의 문학사 작업은 근대문학에 국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근대 이전의 문학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지만, 의외로 관심의 폭도 넓고 경청할 발언도 없지 않다.

임화에게 있어 근대 이전의 문학은 신문학의 대척점으로서 구시대의 문학, 즉 구문학이다. 이식사관의 입장에서 부정의 대상일 뿐이었다. 반면 위에서 주목했듯 그는 ‘언문문학’과 ‘한문문학’의 종합이자 지양으로 신문학이 위치한 문학사 체계를 그려냈다. 임화가 구도한 문학사 체계는 분명히 신·구문학이 통일되어 있는 형국이다. 그 자신의 인식논리 내부에서 모순을 일으키고 있는데, 구문학에서 어떤 존재의미를 발견했는지 살펴보자.

“우리에게 있어 전통은 새 문화의 순수한 수입과 건설을 저해하였으면 할지언정 그것을 배양하고 그것이 창조될 토양이 되지는 못했다.”(앞의 책 57면) 이처럼 구문학을 부정적으로 치부한 것은 그 자신이 취했던 관점에선 당연한 귀결이다. 하지만 이 현상을 ‘행복’으로 여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 불행은 어디서 왔느냐 하면 그것은 결코 우리 문화전통이나 유산이 저질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근대문화의 성립에 있어 그것으로 새 문화 형성에 도움이 되도록 개조하고 변혁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자주정신이 미약하고 철저히 못했기 때문이다. (같은 곳)

 

우리 근대에서 문화적 불행을 초래한 요인은 전통이나 유산에 원죄가 있어서가 아니요, 그것을 “개조하고 변혁해 놓지 못했기 때문”이라 한다. 결국 그가 과도기로 설정한 20세기 전후의 시점에서 잘못된 것으로 간주했다. 이 대목에서 아주 흥미롭게 여겨지는 점이 있다. 임화는 구문학에서 역사적 가능성을 들여다본 것이다.

 

아무도 시조류(時調類), 고소설, 잡가 등속을 당당한 국민문학이라고 떠받칠 용기는 없을 것이며, 또 『춘향전』, 그 타() 대표적인 문학작품도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근대 조선소설의 한 개 단초에 지나지 않는다. 그곳에는 명확히 상업자본의 발달에 인()한 시민적 의미의 인생관이 표시되었는 것으로, 이것 등은 과학적으로는 조선문학사 서론에 기재될 것이다. (『평론』 1 543~44면)

 

위 글은 약간의 해설을 요한다. 논의의 초점이 된 “『춘향전』, 그 밖의 대표적 문학작품”이란 판소리계 서민소설을 가리키며, ‘과학적 의미의 문학사’란 근대문학사, 임화적 개념으로 신문학사에 해당될 것이다. ‘국민문학’ 역시 근대문학의 특성을 지칭할 텐데 일반적인 시조·소설·잡가 등은 국민문학이라고 내세우기 도저히 곤란하다고 본다. 반면 『춘향전』 같은 작품은 조선의 근대문학사의 서두로 잡아도 좋다는 것이 그의 소견이다. 이렇게 평가하는 근거는 춘향전에 “명확히 상업자본의 발달에 인한 시민적 의미의 인생관이 표시”된 데 있다. 임화는 분명히 춘향전에서 근대성을 착안한 것이다. 이러한 춘향전 해석은 조선소설사로 국문학을 개척한 김태준(金台俊)의 견해에 닿아 있다.

임화의 글은 1936년초에 발표한 「조선문학의 신정세와 현대적 제상(諸相)」의 한 대목이다. 바로 전해에 김태준은 「『춘향전』의 현대적 해석」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사적 유물론을 적용해 우리 고전을 해석한 첫 사례로서 연구사적 의의를 갖는 논문이다. 김태준은 『춘향전』에 묘사된 생활실태를 분석해서 “의식기완(衣食器玩)이 호사를 다한 시민들의 손에 근대적 소유관계의 맹아를 보게 되는 것이요, 이러한 의식기완도 다소 종래보다 개량된 기계로 다소 상품적 전제하에 가공하는 수공업의 맹아도 보게 되는 것이다”고 천명했다. 상품경제에 기반한 신흥세력의 등장을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춘향전』의 문학적 성격을 “종래의 봉건적 형식을 전수하여 집대성한 저수지를 이뤄서 다음 시대의 중계적 역할을 한 것”이라고 규정짓게 된다. ‘다음 시대’란 곧 근대이다. 즉 춘향전의 문학사적 위상을 근대 이전과 이후의 문학을 연결하는 가교로 보았다. 임화는 김태준의 『춘향전』 해석을 수용한 것이다.7) 김태준과 임화는 1930년대에 문학사를 사고하면서 근대문학의 자생적인 싹을 발견한 셈이다. ‘자본주의 맹아’란 표현을 직접 쓰진 않았으나, 두 문학사가는 『춘향전』에서 근대로의 길, 근대문학의 가능성을 읽어냈다.

비서구사회가 자기발전의 논리에 의해서 역사적 ‘근대’로 진입할 수 있는가? 그 당시에는 실제로 사례가 없었고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고들 생각했다. 우파건 좌파건 불가능하다고 보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좌파 쪽이 오히려 이론적 장애가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서 벗어난 것은 1960년대에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론’이 제기되어서다. 1930년대에 선각적으로 자생적 근대를 감지한 것은, 당시 발흥한 조선학에서 최고의 창조적 대목이 아닌가 싶다. 거기에는 조선학의 기원으로서 실학이 존재했다.

임화 역시 실학을 신문학의 태반(胎盤)으로 중시한다. 실학자를 “조선 신문화를 건설한 급진적 인텔리겐차의 선구”, 실학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개화문명 사상과 실증정신의 모태”(앞의 책 32면)라고 높이 평가한 것이다. 요컨대 그는 실학사상을 ‘새로운 시대의 정신적 준비’로 인식하고 있다.

 

실사구시의 정신은 단순히 청조 고증학의 모방이 아니라 성리에 대립하여 사실을 신성시하는 만큼 당연히 과학정신, 과학적 진리탐색의 길에까지 미치는 것으로 지나와 내지(內地, 일본을 가리인용자), 구미 등으로부터 유입하기 시작한 근대 서양과학에 대한 무한한 흥미와 호기심과 동경과 학득욕(學得欲)을 감추지 못하였다. (문학사 50~51면)

 

여기서 실학의 실사구시 정신은 성리학에 대립되는 학문자세로 이해된다. 실사구시를 “과학적 진리탐색의 길”이라고 간주한 것은 과잉해석으로 여겨지는바 이는 “사실을 신성시”한다는 데서 도출된 논리이다. 실증주의라는 혐의가 없지 않다. 그리고 앞의 인용문에서도 비치지만 실학이 서학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과도하게 인정한 것은 더 큰 문제점이다.

임화가 주시한 실학자는 이 땅에 신문화를 건설한 인텔리겐차의 선구요, 실학의 학풍은 개화사상의 모태였다. 그런데 임화는 이 실학의 결정적 계기를 서학의 유입에서 찾은 것이다. “이것(서인용자)은 봉건조선에 최초로 그러면서도 가장 뿌리깊이 내리박힌 근대정신의 대철추다.”(앞의 책 32면) 물론 그 특유의 과장적 수사지만, 그런 과장적 수사를 구사할 만큼 ‘근대’를 서양의 절대적 영향으로 사고하고 있었다. 그 결과 실학의 성립에 미쳐서도 서양의 영향을 과다하게 인정한다. 인식론적으로 서구중심주의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임화는 왜 자기의 인식논리 내면에서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면서까지 이식사관을 철회하지 못했을까? 요컨대 20세기 전후, 근대계몽기의 신구문명이 혼효·착종하는 과정의 창조적 혼돈을 간파하지 못한 때문이다. 하여 그는 한국 근대문화의 전통단절이라는 ‘불행’을 일으킨 단초를 이 단계에서 잘못한 데 있다고 단정했다. 당시 애국계몽운동이 결과적으로 무위로 돌아가고 식민화된 다음, 일제하의 어두운 민족현실이 그의 시야를 제약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임화의 이식사관에는 자신의 인식론상의 문제점과 함께 시대적 한계가 있었다고 평했던 것이다.

 

 

5. 끝맺음

 

본고는 임화의 신문학사를 비판적으로 읽은 것이다. 그의 문학사 인식논리는 당시 학계의 눈높이에 비추어 대단히 탁월하면서도 적잖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나 자신 한국문학사를 공부하면서 임화의 신문학사는 오랫동안 접할 수 없었다. 분단체제하에서 금기시된 때문이다. 만약 이 저술들을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읽고 논할 수 있었다면 국문학의 인식수준 자체가 현저히 달라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임화 신문학사를 어떻게 계승, 극복하느냐는 과제는 한국문학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사안의 하나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임화의 인식논리에서 문제점으로 거론된 면들은 대체로 오늘에 이르도록 해결되지 못했거나, 심지어 문제점이 증폭되기도 했다. 특히 두가지를 들어둔다. 하나는 근대주의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이다. 그 자신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입장이었지만 결국 정신적으로 근대주의 내지 서구중심주의에 포획된 상태였다. 다른 하나는 진보적 입장의 문제점이다. 진보를 관념적으로 사고하여 현실에서 실사구시를 못하고 조급증세를 드러낸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제 임화가 문학사를 사고했던 시점에서 70여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지금, 이 두 문제점은 지식인들의 정신현상처럼 되어서 사고와 행동에 부단히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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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朝鮮新文學史論 —李人稙으로부터 崔曙海까지」, 조선중앙일보 1935.10.9~11.13; 「槪說 新文學史」, 조선일보 1939.9.2~10.31; 「新文學史」, 조선일보 1939.12.8~29; 「續新文學史」, 조선일보 1940.2.2~5.10; 「槪說 新文學史」, 『人文評論』 1940.11~1941.4(4회 연재); 「新文學史方法」, 동아일보 1940.1.13~20(연재시 제목은 「朝鮮文學硏究文學史方法論」이었는데 그의 『文學의 論理』에 수록하면서 바꾼 것임); 「『白潮』의 문학사적 의의—轉形期의 문학」, 春秋 1942.11.

2)임화문학예술전집』은 임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9년 소명출판에서 발간한 책으로, 전8권으로 기획되어 현재 다섯권이 나와 있다. 그중 제2권 『문학사』는 임규찬(林奎燦)이 책임편집을 담당했고, 제4권 『평론 1』은 신두원(辛斗遠)이 담당한 것이다.

3) 1920년대 말부터 일어난 야담의 부활을 지칭하는 것이다. 야담운동은 김진구(金振九)가 시작했는데 윤백남이 『월간야담(月刊野談)』, 김동인이 『야담』이란 전문잡지를 발간했다. 야담가들이 대중을 상대로 직접 야담을 구연하기도 했던바 ‘대도예인’이란 이에 대한 비아냥거린 투의 표현이다. 필자는 「야담의 근대적 변모」(『한국한문학연구』 창립 20주년 특집호, 1996)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4) 신승엽 「이식과 창조의 변증법: 임화의 ‘이식문학론’」, 『창작과비평』 1991년 가을호.

5) 임형택 「민족문학의 전개와 그 사적 전개」, 『민족문학사강좌 1』(창작과비평사 1995). 『새 민족문학사강좌 1』(창비 2009)에 개고 수록.

6) 다까하시 하마끼찌(高橋濱吉)라는 인물인데 『朝鮮敎育史考』(帝國地方行政學會 朝鮮本部 1930)를 저술했다. 임화는 이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7) 김태준의 「『춘향전』의 현대적 해석」은 동아일보에 1935년 1월 1일부터 10회에 걸쳐 연재된 것이다. 임화는 1939년 문학사를 집필. 연재하는 한편, 따로 문고를 기획. 발간하였는데(학예사의 조선문고) 그 제1부 제1책이 『춘향전』이었다. 임화가 춘향전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짐작케 한다. 이 책에 권두논문으로 「『춘향전』의 현대적 해석」을 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