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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변형윤진호 대담 『냉철한 머리, 뜨거운 가슴을 앓다』, 지식산업사 2012

경제민주화의 선구자, 한국 경제학의 산 역사

 

 

류동민 柳東民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rieudm@cnu.ac.kr

 

 

2108지은이를 알면 책을 읽지 말 것이며 책을 읽었으면 지은이를 만나지 말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굳이 그 잠언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학현(學峴) 변형윤(邊衡尹) 선생은 한국 경제학계의 원로일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학부생 시절의 지도교수이니, 이 책에 대해 내가 논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나마 다행으로 저술이 아닌 대화록의 형식 안에 한국 경제학의 산 역사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경제학계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나로서도 한두마디 덧붙일 수는 있을 듯싶다.

학현 선생의 삶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그리고 군사정권 시절 지식인들의 민주화운동을 떼어놓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경제학 연구자로서 학현 선생의 삶을 바라볼 때 가장 중요하면서도 독특한 점이라 평가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걸어온 학문의 궤적이다.

일제시대에 본격적으로 수입된 한국의 경제학은 한편으로는 일본 경제학계의 특수한 사정을 반영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의 무기’로서의 역할 때문에, 주로 농업경제학이나 경제사라는 외관을 띤 마르크스 경제학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 책에서도 1946년 이른바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으로 새롭게 개편되는 서울대 상대에서 “좌익계 교수들이 스스로 교수직을 사직하고 그 대신 우익계 교수들이 대거 취임하면서 (…) 마르크스 경제학 과목들은 모두 사라지고 우익 쪽 교수들의 과목으로 대체”되는 사정이 술회되고 있다. 남북분단이라는 냉전적 상황 탓에, 이후 한국 경제학계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은 시민권을 잃고 만다. 물론 마르크스 경제학 자체도 이식된 근대의 산물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였으나, 이러한 사건은 한국 경제학계에서 일체의 비주류적 사고가 배제되는 역사적 원체험에 해당하는 셈이다.

사실 한국의 경제학자나 경제관료가 미국 경제학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으며 따라서 우리의 현실을 고려한 ‘한국적 경제학’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이미 1970년대에도 심심찮게 제기되었던 바다. 그러나 지금은 경제원리의 시공간적 보편성이 강조되면서 그같은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일본이나 독일식의 경제학 교육을 받은 관료들이 남아 있었으며 경제계획을 통해 후진상태를 벗어나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소명의식이 있던 개발연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국 경제학의 이데올로기적 지배는 일상적이고 견고한 것이 되었다. 웬만한 대학 경제학과의 교수진은 물론이거니와, 고시 출신의 경제관료도 어떤 형태로든 미국유학의 경험을 거친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이데올로기의 ‘모국’ 격인 미국의 경제학 자체도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근본적인 시장중심주의로 기울어졌다. 주류경제학자 중에도 드물게나마 60대 이상, 즉 1970년대까지 미국에서 유학을 한 이들이 오히려 젊은 세대에 비해 개방적인 사고를 갖는 경우가 있는 것도 그러한 사정 때문일 것이다. 교육이건 의료건 어떠한 문제를 갖다 대더라도 추상적인 ‘시장논리’만으로 재단해버리고, 학술논문은 초일류의 국제학술지에 실으면서도 실제 현실정치나 정책입안에 참여해서는 쉽게 극우보수적인 흐름에 편승해버리는 경제학자들도 많다.

그런데 학현 선생은 어떻게 보면 통상적인 한국 경제학의 변화경로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당초 서울대 상대에서 고등수학과 통계학, 계량경제학을 가르치는 데서 출발했으나 이후 경기변동과 경제발전에 대한 관심을 거쳐 1980년대 해직기간을 계기로 종속이론이나 마르크스 경제학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반주류의 경제학』(편역, 1981)이나 『분배의 경제학』(1983) 같은 저서가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1987년에 비주류경제학자들의 집결체인 한국사회경제학회의 초대 회장을 역임했던 것이나 1989년 서울대 유일의 마르크스 경제학자였던 김수행(金秀行) 교수의 영입에 적극적으로 기여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그는 이와 동시에 주류경제학의 총본산인 한국경제학회의 회장도 지냈고 1989년에는 한국계량경제학회를 창립하여 회장을 맡았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전통이 매우 강한 일본의 경우에도 주류경제학자와 마르크스 경제학자는 오랫동안 별도의 학회를 운영하면서 지적 교류를 별로 하지 않는 실정이다. 두 학회의 회장 및 대표간사를 동시에 역임한 예외적인 인물이 세계적인 마르크스주의 수리경제학자 오끼시오 노부오(置塩信雄)였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더라도 학현 선생의 학문적 편력은 특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흔히 오해되는 것과는 달리, 경제학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것이 반드시 한국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 교류가 많았던 대표적인 제자 중의 하나인 박현채(朴玄埰)의 ‘민족경제론’에 대해서도 학현 선생은 “‘민족’ 개념은 그것이 가진 모호성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이러한‘계급’이나 ‘계층’으로 표현되인용자 문제의 해결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평가한다. 이것은 그의 학문적 입장이 생각보다 매우 유연하고 폭넓은 것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학현 선생 자신은 결코 ‘좌파’ 경제학자는 아니며, 말하자면 ‘따뜻한 보수’라 할 수 있는 앨프리드 마셜(Alfred Marshall)을 역할모델로 삼고 있다. 그는 수업시간에도 자주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이라는 마셜의 말을 인용했으며 1992년 정년퇴임 강연의 제목도 ‘A. 마셜의 경제기사도에 관하여’였다. 마셜이 케임브리지의 학생들에게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먼저 런던의 빈민가부터 가보라고 했던 것처럼, 학현 선생도 늘 “여유가 있는 사람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 빈곤한 사람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핵심적 과제”임을 강조하여 왔다. 언론에서 말하는 ‘학현학파’의 구성원들이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부터 주류경제학에 이르는 다양한 경향을 보인다는 것, 학현 선생 스스로 말하듯 그것은 ‘학파’라기보다는 한국사회를 더욱 정의롭고 민주적으로 만드는 데 공통적 관심을 갖는 연구자들의 울타리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이 울타리는 한국 경제학계의 매우 중요한, 그러나 안타깝게도 점점 사라지고 있는 자산이다. 더욱이 학현 선생 자신의 필생의 연구과제이기도 한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으로 요구되는 지금, 이 대화록은 개인의 회고담을 넘어 한국 경제학계 전체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