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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고은 『바람의 사상』, 한길사 2012

고은과 유신 시대, 증언과 전율

 

 

박래부 朴來富

새언론포럼 회장,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parkrb78@hanmail.net

 

 

160_촌평_바람의사상_fmt민주주의가 일시적으로 후퇴하는 시대도 있다. 그러나 1970년대의 유신 때만큼 커다란 낙차를 보이며 추락한 경우는 없다. 박정희 대통령이 어느날 갑자기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왕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 나라가 민주주의체제에서 별안간 봉건주의·전체주의 국가로 전락한 것이다.

시인 고은()1973~77년 일기 『바람의 사상』은 현대판 ‘난중일기’다. 야만의 시대, 포악한 권력 아래서 겪은 아픔이자 전율이며, 끊기지 않는 희망가다. 40년 만에 일기를 통해 드러나는 시인의 내적 진실, 광기 어린 폭음, 문단의 현실 등이 새삼 놀랍다. 아직도 통점(痛點)으로 남아 있는 유신이라는 이름의 시대적 절망과 암흑도 어제의 상처처럼 선명하다.

그의 일기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대취’ ‘연일 대취’ ‘술집 한 구석에서 쓰러져 잤다’로 이어지는 날도 일기는 빠짐없이 쓰였다. 출판된 4년간의 일기가 1천페이지를 넘는다. 웬만한 사람이 쓴 평생의 일기가 될 것이다. ‘하루에 원고지 100장, 200장은 일도 아니다’는 그는, 또 긴 일기를 남겨놓은 것이다. 무엇이 그의 창작과 집필의 욕구를 들끓게 했던가. “이 식민지시대 분단시대의 영혼적 영양실조를 감연히 거부하는 것이 나의 창작욕망이다. 나는 위고와 괴테 아니면 간에 차지 않는다.”(704면)

아직 유신 초기였던 1973년 그의 화곡동 시절은 수많은 원고청탁과 강연요청을 받는 일부터 폭음과 의기투합 등 비교적 낭만적인 분위기로 채워진다. 그의 이채롭고 새로운 감수성과 광대한 상상력이 명석하고 남성적인 문장과 더불어 폭발하듯 분출되던 시기이다. 그는 찬사를 받으며 문단에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의 부조리와 유신의 폭력성이 표면화하면서 그는 점차 투사로 변모해간다. “전태일이라는 청년의 분신자살. 그 평화시장 시멘트 바닥의 불덩어리. 어둠. 빛이란 거짓이다. 인간은 어둠이다.”(20면) “김대중. 어제 낮 1시 일본 동경에서 실종되었다. 다섯 놈이 데리고 사라졌다 한다. 트로츠키를 생각했다.”(70면)

악정에 저항하는 이들이 투옥되고 고문당하거나, 공산주의자로 몰려 사형되거나, 강제해직돼 거리를 헤맬 때 시인은, 지식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고은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죽음 앞에서』를 구해서 읽기도 한다.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했다가 처형된 목사이며 신학자다. 그는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미친 사람이 대로로 차를 몰고 간다면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가족을 위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차에 뛰어올라 미친 사람의 운전대를 빼앗아야 하지 않는가?”

일기는 조작된 문인간첩단사건, 인혁당사건으로 8명 처형, 민청학련사건으로 180명 구속기소, 김지하(金芝河) 재구속, 천주교 주교 체포, 동아투위의 고난, 장준하(張俊河) 피살, 김상진(金相鎭) 할복자살, 동일방직 여공 300여명 반나체 시위 등 엄청나고 살벌한 사건으로 얼룩진다. 그는 예술지상주의에서 현실 속으로, 정치사회의 불구덩이 속으로 나아갔다. 그전까지 『창작과비평』과는 거리를 두어오던 그가 창비 쪽으로 기울었다. 암흑과 폭력에 대한 침묵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창비와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투쟁의 선명한 상징을 갖게 된 것이다.

대신 그는 정보부와 형사의 끊임없는 감시와 연행, 가택연금, 구속 협박을 당했을 뿐 아니라 강연과 집필을 제약받아 “거지 되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적기도 했다. 또 가끔 ‘겁난다’고 고백한다. “신경림이 나더러 제일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CIA 여러 사람이 고은 그 사람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겁이 났다.”(643면) 그러나 그는 자신이 시대에 던져졌음을 느끼며 신변을 정리하고 한사코 거리로, 광장으로 나간다. 대학생 김상진이 할복자결한 다음날은 “아 나도 언젠가 배를 가르든지 몸을 태우든지 해야 할 것”(444면)이라고 비장한 구절을 남기고 있다.

당시는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세계의 문학』 등 사회·문학적 성격을 달리하는 계간지들이 정립돼가던 때로 문학사상적으로 의미가 큰 시기였다. 고은은 소설가 박태순(朴泰洵)에게 “『문학과지성』 쪽은 이미 체제 내이고 『창작과비평』은 체제 밖이나 그들의 한계는 어슷비슷하다”(811면)고 말하기도 한다. 평론가 백낙청()·김우창(金禹昌)·유종호(柳宗鎬)의 『세계의 문학』 창간 정담도 소개된다. 고은의 부탁으로 백낙청이 좌담에 응했다. “백과 김 사이의 논리 갈등이 만만치 않았다. 유는 조정 역할보다 은근히 참여 쪽을 견제했다.”(828면)

이 일기가 끝난 지 2년 반 후, 박정희가 암살되어 유신도 종말을 맞는다. 다른 몇해 동안 쓴 일기는 열번도 넘게 가택수색을 당하면서 증발되었다고 한다. 애석한 일이다. 독재와 위협 앞에서 보여준 그의 인간적인 고뇌와 이를 떨치고 일어서는 당당함, 당시 주요 문인들의 문학관과 처세 행태 등을 돌아보고 연구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고은은 어머니와 동생 등 가족과 고향 친구, 제주도서 사귄 문인 등에 대해서도 각별한 애정을 기록하고 있다. 선승의 기풍을 간직한 그는 부친과 스승 효봉(曉峰)의 제사, 명절 차례도 정성껏 모셨다. 특히 추석날 기특한 가정부 숙자도 참여시키고 이시영(李時英), 송기원(宋基元)과 함께 세 사람의 아버지와 장준하, 김상진, 인혁당사건으로 처형당한 원혼들의 지방 앞에서 축문을 읽고 차례를 지내는 장면은 눈물겹다.

일기를 쓰는 문인은 많지 않다. 포악한 야만의 시대를 폭넓게 증언할 수 있는 인물도 극히 드물다. 끊임없이 성찰하고 모색하는 사람만이 이런 일기를 쓸 수 있고, 또한 쓰게 된다. 그는 여기서 뜨거운 문학과 차가운 정신, 또 성속을 오가는 민망하기조차 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문단 원로인 그가 일기를, 그것도 가장 위험하고 첨예한 시기에 쓴 일기를 펴낸 것부터 대단한 경사다. 문학사적으로도 문학적·사료적 가치가 높은 희귀자료가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