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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누가 여성인가

박근혜 시대와 여성주의 정치

 

권김현영・권미혁・이유진・황정아 ©송곳

권김현영・권미혁・이유진・황정아  ©송곳

 

권김현영 權金炫伶

여성학자. 공저서 『성의 권리, 성의 정치』 『남성성과 젠더』 등이 있음.

 

권미혁 權美赫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 역임.

 

이유진 李侑珍

한겨레 문화부 기자.

 

황정아 黃靜雅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영문학. 역서로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등이 있음.

 

 

황정아(사회) 이번호 대화에서는 박근혜(朴槿惠) 시대가 여성주의 정치에 어떤 물음과 과제를 던져주는가 하는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여성 대통령’이라는 대선 캠페인 구호에서 당선 이후의 ‘통치 스타일’이나 지지도에 이르기까지 박근혜정권에서 여성이라는 범주가 상당히 핵심적으로 동원되고 또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누가 여성인가’ 하는 여성 대표성에 관한 질문을 비롯하여 여성운동에 전과는 다른 종류의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오늘 대화의 배경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자리에 세분을 모셨는데 박근혜 시대 여성운동이라는 주제를 아주 풍부하게 조명해주실 분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종의 워밍업 차원에서 각자 자기소개를 해주시고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최근에 어떤 생각으로 살고 계신지 편하게 말문을 열며 시작하면 좋지 않을까 싶네요.

 

權美赫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 역임.

權美赫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 역임.

권미혁 저는 여성운동 영역인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성연합)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창비에서 이렇게 여성문제를 다뤄주셔서 반갑습니다. 근래에 여성 관련 의제가 대중은 물론 지식인들의 관심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경향이 안타까웠거든요. 여성운동은 현장에선 어떤 영역보다 이론적 쟁점이 많은 곳인데도요. 오늘의 주제에 대해서는 여성운동이야말로 할 이야기가 정말 많죠. 실제 여성연합 2013년 총회 정책토론 주제가 박근혜 여성 대통령과 관련된 것이었고 저는 후에 여성학회 월례포럼에도 참여해 ‘18대 대선을 통해본 여성주의 운동의 딜레마’라는 주제의 발표를 했었죠.

 

권김현영 저도 지난 4월 같은 포럼에서 박근혜 시대의 여성정치에 대해 발표했는데, 아마 그 때문에 여기 참여하게 된 것 같습니다. 드디어 여성이 국가의 최고통수권자가 되었다는 것은 여성에게 가로막혀 있던 장벽이 무너졌다는 상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돌아보면 한국사회에서 여성과 남성 사이의 차별, 권리, 평등의 문제 같은 의제가 1990년대에 부상했다가 이제는 역차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성평등이 실현되었다고들 생각하는데, 다들 아시겠지만 비정규직 문제와 여성빈곤화라든가 여성혐오 따위의 현상을 보면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한명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습니다. 이것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李侑珍 한겨레 문화부 기자.

李侑珍 한겨레 문화부 기자.

이유진 저는 『한겨레』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고,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했습니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정부 때 상당기간 여성가족부를 출입했고, 대선 때도 보건복지 분야와 여성 분야를 맡았습니다. 대선 때는 특히 기자로서 자괴감이 컸죠. ‘여성 대통령’에 관한 자격 논쟁이 여성계 내부에 머물렀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민주당의 대응은 비판조차 민망한 수준이었고 여성공약 역시 막연한 내용 탓에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았죠. 정책경합 자체가 안됐어요. 권미혁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성운동 진영에서 박근혜 담론에 대해 많은 논의를 했는데 각을 세우기엔 아쉬움이 컸어요. 지금은 정책보다 여성대중의 관심과 생산-소비자 주체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문화부에서 패션과 스타일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황정아 권미혁 선생님께서 창비에서 여성문제를 오랜만에 다뤄서 반갑다고 하셨는데, 저 개인적으로도 그 ‘오랜만’에 일조했던 게 아닌가 반성하게 되네요. 오늘의 대화가 어떤 분명한 해결책이나 방향을 제시하기는 어렵더라도, 말문을 트고 앞으로 여러 다른 논의를 계속 끌어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침묵에 방조해온 저는 주로 세분 말씀을 열심히 경청하는 입장이 되지 싶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얘기를 시작해야 할 텐데, 아무래도 지난 대선과 ‘여성 대통령’ 박근혜의 등장을 돌아보는 데서 출발해야겠지요.

  

‘여성 대통령’ 시대, 여성은 어디에 있나

 

권미혁 우선 에피소드를 하나 말씀드리고 싶어요. 지난 대통령선거 때 여성연합의 회원단체인 포항여성회 활동가를 만나 들은 이야기예요. 포항이 워낙 보수적인 동네여서 김형태(金亨泰) 사건(20124월 총선 과정에서 제수 성추행 혐의가 제기된 새누리당 포항남구 김형태 후보가 시민사회단체의 사퇴 압박을 받았으나 결백을 주장하고 당선됨. 이후 새누리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국회의원 신분을 이어가다 결국 선거법 위한 혐의로 20137월 의원직을 상실함편집자) 같은 여성인권 사안에 대한 대응조차 힘들다고 얘기했던 곳이거든요. 그 활동가가 박근혜를 지지하는 자기 시아버지에게 물어본 거예요. “아버님은 여자가 밖에서 활동하는 걸 그렇게 비판하시면서 왜 박근혜가 정치하는 건 용인하세요?” 그러니까 이렇게 대답했다는 거예요. “박근혜는 여자가 아니잖냐.”(웃음) 두 사람의 대화에 오늘 우리 얘기에 시사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첫째는 과연 박근혜가 여성 대통령 후보였다고 할 수 있나. 둘째는 대중이 박근혜 후보를 여성 대통령으로 인식했다면 그 이유가 뭘까. 셋째로 이번 대선에서 여성 이야기가 많았지만 과연 여성 의제가 그만큼 활발한 쟁점이었나. 제 경험에 비춰보면 최근 몇차례 대선 중에서 여성 의제나 정책에 대해서는 가장 관심이 없던 선거였고, 그러다보니 우리 사회에서 여성 대통령이 갖는 의미에 대해 진지한 논의도 없었죠.

 

權金炫伶 여성학자. 공저서 『성의 권리, 성의 정치』 『남성성과 젠더』 등이 있음.

權金炫伶 여성학자. 공저서 『성의 권리, 성의 정치』 『남성성과 젠더』 등이 있음.

권김현영 저도 에피소드 한가지를 말씀드릴게요. 201110월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朴元淳) 후보가 나왔을 때 우익단체 할아버지들이 ‘서울시장 여자가 웬말이냐’라고 쓴 현수막을 걸려다가 박원순이 남자라는 걸 알고 깜짝 놀라 취소했다는 얘기가 있어요.(웃음) 필요할 때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격하고 아닐 때는 여성을 지우는, 그런 게 우파의 일관된 태도였죠. 아니, 우파라고도 하기도 뭐한 부정부패집단인데, 어쨌든 편의에 따라 여성이라는 기호를 사용하는 게 반복됐어요. 여자는 집에서 살림하고 애 키우면 된다던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본인의 딸 얘기에선 말을 바꾸는 식이었죠. 성평등 가치에 대한 일관된 합의 없이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쉽게 말이 달라졌습니다.

2011년에 노르웨이에서 테러사건이 있었잖아요. 한 극우주의자가 노동당 캠프를 습격해 80여명을 죽이는 어마어마한 참사가 벌어졌죠. 그 범인이 노르웨이의 성평등이 문제고 한국과 일본처럼 가부장제 국가, 민족주의가 돌아와야 노르웨이가 제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하면서 이민정책과 성평등정책을 비판했어요. 그때 대부분의 노르웨이 시민언론정치인들은 그의 말에 대해서, 이민정책과 성평등정책은 우리의 핵심 가치이자 정체성이며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우리 사회가 전혀 수용할 수 없다며, 행동방식도 그렇지만 내용도 그렇다며 선을 딱 그었거든요. 반면 한국에서는 2010년 강용석(康容碩) 당시 한나라당 의원의 성희롱 발언이 문제가 됐는데, 국회의장을 비롯해 상대편 민주당에서도 몇몇 남자의원들이 편드는 발언도 하고, 심지어 한 민주당 의원은 “로맨티시즘이 없는 정치는 너무 쓸쓸하지 않냐”는 글을 본인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했어요. 강용석은 공식적으로 징계를 받았지만 비공식적인 남성 네트워크를 통해서는 상당한 동정을 얻었죠. 공식・비공식 차원의 의견 차이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드러날 정도로 기본적인 합의가 안되어 있는 것, 이게 현재 한국의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가 아주 상식적인 수준의 가치도 수용하지 못한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성평등을 추구하는 여성정책은 평소에는 누구나 수긍하는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이해되지만, 공천할당제처럼 본인의 이해관계와 관련되거나 정치적 지위를 위협하는 문제가 되면 엄청나게 갈등적인 정치적 이전투구의 이슈로 만들어 성평등 가치를 여성 권력자들의 집단적 음모로 만들어버리죠. 이미 이런 현실에서 새누리당이고 민주당이고 따질 거 없이 모두 여성을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는 카드로 사용하고 있어요. 성평등이라는 여성정치의 목표와 여성이라는 기호가 이렇게 분리되었기 때문에 새누리당에서 ‘박근혜 여성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사용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나 싶어요.

 

黃靜雅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영문학. 역서로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등이 있음.

黃靜雅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영문학. 역서로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등이 있음.

황정아 선거에서 ‘박근혜 여성 대통령’이란 구호는 있어도 여성정책에 대한 토론은 없었다는 것, 여성이 일종의 기호처럼 분리되어 떠돌면서 필요에 따라 전유되는 것, 이 둘을 보면 여성을 말하면서도 여성에 대한 실질적 논의는 묻어버리는 역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군요.

 

‘큰딸’과 ‘맏형’의 대결에서 소비된 여성

 

이유진 여성이라는 단일한 기호가 분리됐다기보다 실제론 그것이 다면적이고 중층적으로 결합돼 있는데 그 일부들이 각각 다르게 전유됐다는 식으로 보는 게 맞겠죠. 지난 대선 때 박근혜 후보의 선거홍보물을 보면 이런 점을 알 수 있어요. 우선 첫장부터 ‘여성 대통령’이라는 문구가 있는 것이나, 통상 급진성을 상징하는 빨간색도 우리 사회에선 새누리당 말고는 쓸 수가 없는 색깔이었죠. 마지막 페이지에는 어머니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아버지의 군복을 입은 채 휴전선 이북을 바라보는 여성 대통령의 이미지 등이 전략적으로 아주 풍부하게 사용됐죠. 여자도 남자 못지않게, 또는 남자와 똑같이 잘할 수 있다는 새누리당의 주장은 성차(性差)를 무화시키는 초창기 페미니즘의 주장과 유사합니다. 초기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했던 바가 대중이 알아듣기 쉽게 정리된 셈이죠. 이와 함께 싱글 여성으로서 박근혜 후보의 이미지가 한 집안의 가장이자 맏형, 특전사 출신이라는 문재인(文在寅) 후보의 낙후된 이미지와 대비를 이루면서 오히려 더 진보적이고 새롭게 보일 수 있었죠.

 

권김현영 재미있는 건 문재인의 전략과 박근혜의 전략이 비슷했다는 점이에요. 둘 다 일종의 ‘가족정치’를 했다고 생각해요. 가족정치라는 프레임에서 성별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볼 필요가 있어요. 그 틀에서 보자면 박근혜는 철저하게 박정희(朴正熙)의 큰딸이라는 이미지,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고 아버지의 유지를 받드는 큰딸의 이미지를 활용했어요. 그리고 이 큰딸은 어머니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죠. 며느리나 아내가 아닌 오직 큰딸이라는 위치 하나거든요. 문재인은 가족정치의 틀에서 맏형의 위치를 취했으니 맏형과 큰딸이 붙은 거죠.

 

황정아 ‘아버지의 딸’이라면, 부재하지만 여전히 강력한 아버지라는 꽤 편리한 존재를 환기할 수가 있지요. 하지만 맏형의 경우는 아버지를 대체하지만 그보다 못한 존재라는 느낌이 앞서구요.

 

권김현영 한국의 정치현실이나 사회현실에서는 잘난 맏형을 건사하기 위해 온 집안이 희생했어요. 그런데 맏딸은 온 집안을 일으키는 능력자이자 희생자였어요. 이렇듯 가족정치 안에서 젠더가 어떻게 사용됐느냐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권미혁 ‘준비된 여성 대통령’ 이라는 구호가 나왔을 때 여성운동 내부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죠. 여성운동 입장에서 보면 분명 박근혜 후보는 스스로를 여성 대통령으로 내세울 마음도 없었고, 자임할 처지는 더욱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작년 820일쯤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결정된 이래로 11월까지는 ‘여성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박후보 스스로 받아들이지도 내세우지도 않았다고 알고 있어요. 들리는 바에 의하면 ‘여성 후보’라는 규정을 내키지 않아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대통령이면 국방도 책임져야 하는데 여성 후보임를 부각시키면 너무 약해 보일까봐서였다고 해요. 어떤 의미에서 여성 대통령 구호는 새누리당의 선거전략인 측면이 컸던 것이라고 봐야죠. 그러던 박후보가 여성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시작한 것은 지지율의 하락과 문재인 안철수(安哲秀) 두 후보의 단일화 이슈로 인해 국면의 주도권이 야권으로 넘어가면서부터죠. 실제 여성공약만 봐도 양이나 내용이 다른 후보에 비해 무척 부실했어요. 단적인 예로 1997년부터 한번도 거르지 않고 해왔던 ‘대통령후보 초청 여성정책 토론회’가 박후보의 거부로 무산됐어요. 이 행사는 KBS가 전국에 생중계하는 거의 유일한 시민사회 주최 후보 토론회인데다 여성연합과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등 여성계 대부분이 참여하여 차기정부 5년간의 여성정책을 공방하는 중요한 자리거든요.

여성운동에선 그동안 여성이라고 무조건 여성정치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여성주의적인 가치를 체화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여성정치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박후보가 이런 과정 없이 이미지로 여성 대통령으로 불리는 데 우려가 많았어요. 박근혜 대통령이 혹시 정치에서 실패한다면 지금 같아선 아마 여성이어서 실패했다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거예요. 실제 그 사람이 여성주의적인 정치를 추구했는지는 상관없이요. 그런 의미에서도 어떤 내용을 갖추고 여성 대통령이 되었는가가 중요한데 박후보가 체화했던, 나라가 어려울 때 천막당사에서 당을 구한 구원의 여신상, 육영수(陸英修) 이미지, 모성정치 등은 바로 여성주의가 극복하려는 지점이었죠. 이런 현실을 넘지 못하면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우리 사회에서 여성 대통령을 다시 보기 어려울지 몰라요. 한번 써먹은 여성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는 더이상 대중에게 신선하지 않을 테니까요.

 

황정아 그런데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훨씬 자유롭게 활용하는 이런 방식이 그동안 여성성과 진보정치를 연결해오던 여성운동의 입장에 상당한 고민거리를 안겨준 것 아닌가요.

 

 5060 여성들이 박근혜를 지지한 이유

 

이유진 저는 특히 50~60대 여성들이 박근혜에 대해 생각하는 게 정말 남다르다고 생각해요. 두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하나는 대선 당일 저희 동네 아주머니들, 할머니들이 투표장에서 나오자마자 젊은이들 보란 듯이 큰 소리로 “문재인 그놈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면서 잘난 척하고, 변호사 출신에 떵떵거리고 잘 살았으면서 자기가 서민이라고 주장하는 거짓말쟁이”라며 격한 어조로 비난하더군요. 새누리당의 선전효과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못 배우고 자기주장 뚜렷이 내세우지 못했던 여성들이 박근혜 후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대선 토론회에서 박후보는 민주당이 승세를 잡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을 못하고 밀리는 양상이었는데 오히려 그걸 보면서 중장년 여성들이 위기에 처한 여성 동지한테 몰표를 던져주는 방식으로 반전된 거죠. 또다른 에피소드는 얼마 전 등산을 마치고 내려온 중년 남녀들이 모여 앉은 장면인데, 남북 경색국면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어요. 여러명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전쟁 직전까지 끌고 간 박근혜의 리더십을 공격하는 마당이었는데 여자 한명이 끝까지 “여자인 게 뭐가 문제냐”며 맞서고 있었어요. 저는 이런 50~60대 여성들의 박근혜에 대한 지지가 쉽사리 철회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운동의 비판대로 여성정책이 준비되지 않았다, 진정한 여성 대표자가 아니다, 오히려 여성을 탄압했다 같은 주장은 정작 그들에게는 힘을 전혀 못 썼거든요.

 

권미혁 바로 그게 여성운동의 큰 고민이었죠. 선거 직후 이와 관련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박근혜 후보가 아니라 페미니즘을 열심히 실천하고 여성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다른 여성정치인이 나왔더라도 국민이 그렇게 지지했을까요? 이 말은 한편 박정희의 딸이라는 점이 정말 강하게 작용했구나 하는 확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여성이라는 사실 자체에서 신선함과 진보성을 본 측면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여성운동이 말하는 여성주의적 사유와 실천,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탄생하는 여성 리더라는 주장이 너무 앞서갔던 건 아닌가, 대중의 현재 정서와 괴리된 것 아닌가 심각하게 자문해보았던 것이죠.

 

이유진 역설적으로 지금까지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이 여성 대중의 감성에 불을 지른 효과도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여자도 남자 못지 않다”며 기회균등을 외쳐온 초기 여성운동가들의 얘기가 억눌렸던 중장년 여성층 안에 잠복해 있다가 평등 감수성을 자극하며 몰표로 이어진 건 아닌가 싶더군요. 박근혜 후보와 비슷한 시대에 태어나 평생 가정에 봉사하고 희생해왔는데 사사건건 남편과 ‘배운 자식’ ‘배운 며느리’에게 무식하다, 뭘 모른다는 식으로 무시당해온 데 대한 설욕전의 성격이 있다는 거죠. 본인은 가부장제와 젠더위계에 복종했지만,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요즘 며느리와 자식들에게 여전히 밀리는 50~60대 여성들의 감성을 자극해 똑똑하고 배운 남자/젊은이에 대한 반감과 불만으로 집단 분출된 게 아닌가 싶거든요. 거기다 여성학자 임옥희 선생님이 “젠더 불안의 역설”이라고 말한 것처럼, 여성이 엄마 역할을 안하겠다고 집 밖으로 나가는 이 시대에 박근혜라는 대통령이 나와서 대중에게 안정감, 일관성, 돌봄에 대한 이미지를 어필해 성공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황정아 사실 박근혜를 찍은 이유 중에서 여성이라는 측면이 정확히 얼만큼이었나를 짚어내는 건 쉬운 문제가 아니겠죠. 어쨌거나 지금 문제는 박근혜가 여성 범주를 성공적으로 전유한다는 것이고 그게 여성운동이나 여성주의에서 이야기해온 여성의 이해나 권리와는 사뭇 다른 방식이라는 사실인 것 같아요.

 

권김현영 저는 여성이라는 기호는 누구나 전유할 수 있다고 봐요. 여성을 어떤 본질적인 정체성으로 묶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왜 박근혜는 성공했는데 다른 쪽에서는 실패했는가 하면, 그건 다른 쪽에서는 ‘여성 대통령’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똑같은 걸 해봤는데 이쪽은 되고 저쪽은 안됐다는 게 아니라 이쪽은 아예 안한 거예요. 그러니까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도 당연히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황정아 이쪽에서 사용하지 않은 것이 문제다, 이런 말씀인가요?

 

권김현영 그보다는 박근혜가 성공적으로 사용할 줄 몰랐다,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이 패착이라고 생각해요. 여성 기호를 진보에 부착시키려고 계속 노력했을 뿐이지 실제로 부착된 것은 아니었는데, 이제 상대방이 가져다 쓰면서 ‘안될 건 뭐 있어, 나도 여잔데’라는 말에 사람들이 훨씬 쉽게 설득됐다는 거예요. 상대방이 성공적으로 가져다 쓴 것에 당황하고 충격을 받은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되고, 또 그걸 분석하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쓸까 묻는 것도 당연하겠죠. 박근혜와 다른 종류의 정치적 지향을 가진, 우리가 지지할 만한 여성이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대중에게 그 여성을 찍어달라는 얘기를 저들이 했던 것보다 더 성공적으로 할 수 있을까. 이게 고민이죠. 그런데 사실 박근혜처럼 기가 막히게 쓰긴 어려울 것 같아요. 이게 열패감과 무력감, 분노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듯해요. 외국에서는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 파키스탄의 첫 여성 총리,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전 파키스탄 대통령의 부인)나 이사벨 뻬론(Isabel Peron,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안 뻬론 전 아르헨띠나 대통령의 부인)같이 처음엔 남성정치인의 아내나 딸로 등장한 이들이 굳이 여성계를 동원하지 않고도 대통령이나 총리가 됐죠. 그러니까 박근혜가 있었다고 해서 이후에 다른 진영에서 여성 기호를 가져다 쓰면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지금까지 상상할 수 없던 젠더 정치의 지형이 등장했고 그 위에서 박근혜를 지지했던 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 어떤 언어와 접근법이 필요한지를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만약 이유진 기자의 말대로 대중에게 잠복해 있던 평등 감수성이 폭발하면서 몰표로 이어졌다면 그건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겠죠. 하지만 어떤 식으로도 박근혜가 자기 삶을 선택하고 기획하는 현대 여성처럼 보이지는 않잖아요. 평등 감수성이 폭발했다기보다는 그동안 고생하면서 입 다물어온 중장년층 여자들의 보상심리가 박근혜에게 투사되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권미혁 물론 박근혜 후보가 그런 접근법을 성공적으로 썼기에 당황한 면도 있죠. 어쩌면 성공적으로 쓸 수 있다는 걸 우리도 인정한 셈이에요. 문제는 박근혜 후보의 접근법과 우리의 접근법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여성 대통령이라는 내용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는 점을 드러내면서 경쟁했으면 했는데 선거과정에서 쟁점이 안 만들어졌던 거예요. ‘여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여성은’ 이야기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일단을 보게 된 것이죠. 또다른 예가 민주당의 대응이에요. 문재인캠프의 모 대변인은 박후보에 대해 “출산과 보육 및 교육, 장바구니 물가에 대해 고민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가 새누리당으로부터 ‘성차별적 발상’이라는 맹공을 받았죠. 거기에 대한 민주당의 대응은 두가지였는데요, 하나는 키워드를 ‘대한민국 남자’로 가져가면서 여성의 대척점에 남자를 내세우는 것이었고요. 다른 하나는 ‘여성’이라는 키워드에 일절 대응하지 않고 무시하는 전략이었죠. 그런데 중요한 여성정책의 대부분은 진보정권에서 만들어낸 것이고 민주당의 여성공약도 풍부했어요. 이런 면을 하나도 부각하지 않은 거죠. 심지어 대선 패배 직후 있었던 민주당의 선거평가에서 ‘여성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거의 없었어요.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진보라고 자처하는 곳조차 여성과 관련해서는 보수적이거나 담론적으로 취약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황정아 사정이 그러하지만 여성운동과 진보를 가르는 논법이 일반인들에게는 그다지 다가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필요한 여성정책을 제출하는 것과 함께 저쪽에서 유사 여성정치를 발동했을 때 이쪽은 어떤 종류의 여성정치로 맞설 것인지 그때그때 구체적인 대응책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겠습니다. ‘박근혜 여성 대통령’이란 구호가 그런 문제를 제기해준 셈이군요.

 

이유진 여성을 강조한 구호에 대한 담론경합 자체가 생각보다 너무 안됐다고 보는데, 언론의 입장에서 보면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의 문제제기 방식이 전혀 새롭지 않아 기삿감조차 안됐습니다. 성폭력범 전자발찌나 화학적 거세처럼 여성주의와 무관한 대책을 마치 여성을 위한 것처럼 포장해온 여당의 전력이 있었지만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꺼낼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데다, 그렇게 힘을 얻을 줄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유신의 공주’ ‘국가 가부장의 화신’ 같은 진보진영이나 야권의 대응전술은 이미 예견돼 있었고, 반전도 안됐고,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등 모든 패를 다 깐 상황에서 전략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었죠.

 

황정아 결국 지난 대선은 그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이 대표되고 재현될 수 있다는 게 확인된 사건이었고, 여성에 대해 고민한 이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를 던져준 면이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네요. 그동안 한편에서는 여성운동이 규범적이고 한정된 방식으로 여성을 재현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랄까 저항과 함께, 다양성을 포괄하면서도 여전히 ‘여성’으로서 재현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두가지 경향이 다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현실정치를 비롯하여 문화적 지형에서 여성의 재현은 계속해서 확장되어왔지요. 여성 대통령 이야기로 시작한 김에 여성 리더에 대한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주목할 만한 점에는 어떤 게 있을까요?

 

존경받는 여성 리더십을 어떻게 만들까

 

이유진 새로운 여성 리더상을 논하기 전에 말씀드리면, 요즘 한국사회엔 여성 리더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팽배한 경향이 특징적으로 나타납니다. 최근 담론의 흐름을 보면 여성 상사/지도자가 가진 단점, 불안하고 변덕스러우며 결단력이 약하다는 얘기가 계속 나오는데, 사실 그건 변화 속에서 좌고우면(左顧右眄)하는 리더들의 원래 속성이지 여성만의 특이한 성질이 아니거든요. 남성들 가운데도 유능한 리더와 무능한 리더가 있듯이 여성 또한 그렇기 마련인데, 여성 리더라면 흔히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상()이 만들어지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구성원들을 혼돈스럽고 당황하게 하면서도 자기는 여성으로서 누릴 것 다 누리며 특권을 얻고 사는 골칫거리로 보는 것이죠. 대통령 시대를 맞아 여성이 약진하고 있는 인상을 주지만 한편으로 그 속에선 부정적인 여성 리더상만 유독 강조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권김현영 여성 리더라는 현상은 사실 20세기초부터 여성이 사회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있어왔죠. 사실 제 관심사는 여성 리더가 지금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선 몇몇 영역의 여성 리더들이 왜 재현되지 않는지예요. 예를 들면 지난 2012년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 영국인들이 자국 역사를 쭉 보여줬잖아요. 그때 제가 감동받은 건 여성참정권 운동부터 시작한 장면이었어요. 영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여성참정권 시위장면의 퍼레이드로 그려내고, 여성 간호사들과 함께 공장노동자들이 등장해 무대를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게 바로 영국의 역사다’라며 세계에 선언하잖아요. 브라질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f)나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도 그렇지만 사실 해외에선 여성운동에 기반을 두거나 페미니즘 정치에 오랫동안 관여해온 여성 지도자들이 존경받는 리더십을 가지고 성공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사례를 한국에는 찾기 어려워요. 하지만 저는 그럴 만한 분이 없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민주화투쟁에서 시작해서 페미니즘 운동까지, 사회민주화든 국가발전이든 간에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해온 여성 투사들이 단순히 정치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오염됐다고 하는 인식 때문에 심지어 한명숙(韓明淑)처럼 대표적인 여성계 인사가 정치권에 들어갔어도 그의 대표성이 희석되어버렸어요. 여성운동에 오래 헌신해온 인물로 최초의 여성부장관이 됐다는 사실 자체가 존경받을 만한 리더십을 갖춘 셈인데, 정치인으로서는 오히려 그런 대표성을 희석시키면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식이었죠.

상당수의 여성운동가들이 현실정치 영역에 들어갔지만 존경받는 여성 지도자의 이미지가 좀처럼 만들어지지 못한 이유는 뭘까요? 앞서 거론한 지우마 호세프는 브라질 노동당 룰라 정부의 부정부패 사건이 터지자 그 다음 주자로 나왔는데, 반대진영으로부터 룰라가 저지른 잘못을 덮으려고 나온 거 아니냐고 공격받았죠. 그리고 국교가 가톨릭인 나라에서 낙태는 개인의 선택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바람에 거의 악마처럼 찍히고, 브라질 여성들이 얼마나 예쁜데 너처럼 못생긴 여자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는 저급한 비난까지 당했어요. 그런데 이에 대해 브라질 시민들이, “우리는 지우마가 16살부터 게릴라 무장투쟁한 걸 알고 있다, 역사의 현장에서 행동하는 게 브라질 여성의 아름다움이다”라고 말하면서 여론이 반전했거든요. 어떤 순간에 감추면 절대 성공할 수 없어요. 힐러리도 계속 자신을 감췄지만 결국 그녀가 복잡한 심경을 다 드러내면서 솔직하게 등장하자 대중이 수용했거든요.

 

이유진 저는 역사적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브라질 여전사의 무장투쟁 경험, 그리고 미국의 여성참정권 투쟁이라는 역사적 인정과 축적된 경험이 있으니 그런 반전이 가능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은 여성의 투쟁경험을 인정하지 않는 측면이 유독 강하고, 견제세력 속에서 여성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은 ‘운동가로서의 여성’이란 정체성을 숨기는 것이 오히려 유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치 영역에선 자기 경험을 삭제한 여성한테만 ‘시민권’을 줬고, 이 경험을 외면해야 마치 그가 공정한 플레이를 하는 것 같은 구도를 만들어준 측면도 있었죠. 여성정치인이 ‘대의’ 앞에 여성문제를 양보해야 대범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승인받는 식으로요. 진보진영 또는 시민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성운동의 성과나 공로를 인정하는 데 인색한 건 비슷하다는 생각입니다.

 

황정아 그와 관련해서 여성운동 내부에서 여성 리더십 문제를 치고 나가는 면이 부족했다는 느낌도 드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권미혁 정치권 진출로만 이야기한다면 지방선거를 포함해 선출직에 여성후보를 대거 내보내서 당선시켰던 경험이 여성운동에 있죠. 당시의 전략은 여성은 깨끗하고 소신있다, 살림살이하듯 지역살림을 꼼꼼히 챙길 수 있다는 등으로 여성을 진보와 부착하려 했고 일정 정도 유효했다고도 보지만, 돌이켜보면 과연 ‘여성〓진보’라는 의미화에 성공했던 것인지, 그저 ‘여성’이라는 의미만 전달되었던 것인지는 평가해봐야 할 것 같아요.

 

권김현영 저는 오히려 공공을 위해 헌신하는 여성이라는 이미지가 한국사회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봐요. 새마을운동이나 박근혜 같은 우익 쪽에서 말고는 왜 그게 안 만들어지는지 안타까워요.

 

황정아 여성운동이나 사회운동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집단으로서의 여성에 대해서는 얘기가 되는데 정치인이라든가 지도자를 얘기할 때는 오히려 여성임을 가급적 덮어버리는 측면도 있지 않을까요?

 

권미혁 외부에서 보기에는 여성연합이 대표성을 많이 고민하는 것 같겠지만 여성운동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집단의 성과를 개인이 혼자 가져가는 데 거부감이 있죠. 그러다보니 그동안 정치에 진출한 이들도 부채의식이 있을 거고요. 정치에 진입해 살아남으려면 개인을 드러내야 되는데, 당당하게 리더로 자리매김하고 스스로 정치적 돌파를 감내하는 데 마음의 부담도 있었겠다 생각해요. 그리고 정치권에서도 ‘여성’을 드러내면 못 살아남는 것 같아요. 남성들이 보기에 용인할 수 있는 여성 리더십이 중요하지,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리더십은 삭제되어버려요. 그러다 보니 여성주의 정치를 못한다는 지적을 후배들로부터 끊임없이 받는 거죠. 그들도 이런 지적은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한편으론 국회에 들어와 보니 너무 어렵다고들 이야기해요. 여성들이 정치권 내에 의미있는 수가 안됐을 때 여성주의 정치를 실현하기란 요원한 거죠. 물론 다른 시각도 있어요. 정치인으로서 경력을 쌓는 것, 가령 국회의원이라면 재선하고 삼선하려고 하니까 그러는 거지, 여성주의 정치가 뭔지 보여주겠다 작심하면 다르지 않겠냐는 거예요. 물론 현실은 더 복잡하겠지만요.

 

황정아 앞에서 여성이라는 범주가 더 자유롭게 유통되면서도 실제로 필요한 논의는 묻히는 역설을 언급했는데요, 여성문제와 관련해서는 유독 그런 식의 역설이랄지 이중성이 많이 작용하는 것 같아요. 여성 주체와 여성 재현이 다양해지는 한편 전통적인 성역할이 마치 다양성의 한 측면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는 면도 있지 않나요?

  

여성정책의 제도적 진전과 가족주의 강화라는 역설

 

이유진 ‘여성부’가 ‘여성가족부’로 바뀔 때부터 판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성은 곧 가족이라고 오해할 정도로 정책이 보수적으로 급선회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죠. 지금은 ‘일・가정 양립’이나 ‘모성보호’ 같은 구호가 진보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은데, 여성이 모성만으로 환원되는 것은 가부장적 사고죠. 생리휴가도 아이 낳는 여성의 몸, 즉 모성보호의 측면에서 접근되고, 일・가정 양립도 여성정책이라지만 가족 중심으로 사유하는 것이라 교착상태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건강가정기본법도 부모와 자녀를 중심으로 한 ‘건강가정’을 상정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점을 비판하자 참여정부가 내놓은 것이 ‘다양한 가족’을 인정해야 한다는 거였죠. ‘다양한 가족’이라는 것이 실은 미혼부모, 1인 가구, 다문화가정 같은 소외된 이들을 위한 정책 용어였지만 나중엔 별 의미 없는 것이 됐다가 이명박정부에서 다문화가족 지원책을 중요하게 갖고 가면서 그야말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가동됐죠. 그러자 가족중심 정책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 됐고, 지금은 국가가족주의라고까지 할 만한 형편이죠. 여성이 모성으로, 여성문제가 가족문제로 계속 환원되는 거예요.

 

권미혁 일・가족 양립이 처음에 제기될 때는 성평등의 측면이 있었어요. 즉 여성을 좀더 일 쪽으로, 남성을 좀더 가족과 생활 쪽으로 이동하자는 것이고, 이를 통해 성별 권력관계를 무너뜨리자는 것인데, 막상 이 제도가 마련된 근거인 ‘저출산 기본계획’이나 ‘여성인력활용 계획’을 보면 그야말로 저출산 대책이나 여성인력 활용계획에 그쳤던 거예요. 현실에서 이 정책이 효과를 가지려면 여러가지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하죠. 남성이 육아휴직이나 출산휴가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중요하고 무엇보다 근로시간 자체가 단축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지금 대부분의 남성들이 육아휴직이나 출산휴가를 쓸 수가 없거든요. 우선 회사의 눈치가 보이고, 그걸 썼을 때 소득대체율이 낮아 월급의 40%가 줄어들어요. 육아휴직급여의 상한이 100만원이에요. 이런 환경에선 제도가 있어도 활용할 수가 없죠.

 

이유진 제 문제의식도 비슷하지만, 저는 남성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겪는 어려운 문제는 제도적으로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리라고 봐요. 그런데 남성과 여성의 경우가 좀 다른 게, 남성은 근로시간이 줄면 휴식시간이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여자들은 근로시간이 줄어도 휴식시간이 늘지 않습니다. 근로시간이 줄면 여자는 회사일 대신 집안일을 더 많이 한다는 거죠. 이런 구조가 바뀌지 않는데 일・가정 양립이 과연 성평등 정책이냐, 이런 의문을 갖게 되는 거예요.

 

권미혁 맞아요. 심지어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에서도 한국의 일・가정 양립이 과연 누구를 위한 정책이냐, 도리어 성역할의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정책이 아니냐고 했을 정도고, 일부에서는 기업을 위한 정책이라고도 보죠. 노동을 계속 유연화하는 거니까요. 실제 수혜자가 누구인지 따져보니 실상은 성평등적인 성격이 많이 약화되어 고민이에요.

 

권김현영 제 생각도 두분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성평등을 추구하려던 대부분의 정책이 결과적으로 가족주의를 강화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되기 직전에 2004년 건강가정기본법이 만들어졌어요. 이 법에서는 명백하게 핵가족을 정상적이고 건강한 가족이라고 규정하고 있죠. 저는 건강한 가정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아동학대와 가정폭력에 대한 단호한 대응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 법은 이혼조정과정에 개입하여 가정폭력 위기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했고, 2008년에 이혼숙려제가 도입되면서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죠. 또 저출산-고령화라는 정책 프레임은 처음에는 여성에게 육아 부담이 전가되는 현실이 국가 존폐의 위기로까지 나아간다는 점을 보여줄 거라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저출산 현상이 여성들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식으로 여성혐오가 심각해지고 유명무실했던 낙태에 대한 형사처벌이 부활되는 등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더욱 악화되는 결과를 낳았죠.

한편 저는 현상에 대한 진단부터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출산・고령화 현상 같은 경우, 이것이 일・가정 양립이 안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여기고 대책이 만들어졌어요. 하지만 저출산 문제는 결혼한 여자들이 아이를 돌보기 힘들어서 생긴 게 아니거든요. 지금도 혼인한 여성의 출산율은 OECD 평균이에요. 문제는 결혼 자체를 안하거나 늦추고 있다는 건데, 이걸 일・가정 양립 정책으로 푼다니 말이 안되는 거죠. 오히려 일・가정 양립 정책이 대두되면서 시간제 일자리가 정당화되고 재택근무가 대안으로 등장하는 등 여성 노동의 불안정성이 더욱 심화되었어요. 2000년 중후반부터 여성운동의 큰 성과들이 제도화되고 정책에 반영되면서 기본적인 평등 조치가 어느정도는 마무리됐다고 판단하던 시점에 상황이 자꾸만 원래 의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다면 현상 분석과 진단 자체를 다시 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부정적 이월효과라고 할까요. 낙태 단속, 불안정 노동시장 강화, 사회양극화 같은 식으로 점점 더 나쁜 흐름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성주류화’라는 틀을 통해 새 판을 짜보자고 기획한 건데, 이제는 뭐가 잘못돼서 이렇게 부정적 이월효과가 심각해지고 있는지 전체 구도 자체를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여성가족부 문제도, 여성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부처를 만들고 예산도 따오고 했더니 정작 가족 업무를 많이 맡는 식이 된 거죠. 이게 모든 영역에서 계속되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황정아 여성과 관련된 문제들이 여전하고 또 한편에서는 더 첨예해지는데도 좀체 가시화되지 않고, 또 무엇보다 사람들이 지겨워하고 있다는 게 여성운동이 안고 있는 큰 과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문제를 우리 사회에서 부각시켜 토론하고 싶은 이슈로 만들어낼 방법은 무엇일까요? 지금의 난관을 직시하면서 어디서부터 풀어갈 것인지를 함께 생각해보아야 할 텐데요.

  

달라진 환경・세대・경험 속의 여성운동

 

권김현영 얼마전 해병대 캠프에 참가한 고등학생들이 그렇게 죽어나갔는데, 이걸 보면서 과거 대체복무제를 포함해 군사문화에 대항했던 온갖 비판이 사회적 논의에서 깡그리 사라져버린 것을 깨닫고 새삼 놀랐어요. 군사정권 직후에는 절대로 불가능했던 병영체험이나 해병대 캠프가 지금은 커다란 인기를 끌면서 부활했는데, 그렇다고 군사주의가 부활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군대체험을 다양한 문화체험으로 순치해서 수용하게 되어서였죠. 그 비판적 논의가 사라져버린 시간이 있었다는 거고 결국은 이런 비극이 벌어졌죠.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병영캠프를 예로 든 건, 2000년대 이후 병역거부운동, 대체복무제, 군사주의에 대한 비판 등 군사문화나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급진적인 문제제기들이 있었는데 노무현정부 때 이런 문제제기를 일부 수용하면서 이것을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제로 여겼던 게 떠올라서예요. 예를 들어 대체복무제 도입 같은 사안을 두고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특정 종교 신도들의 신념을 존중하는 문제로 이해하는 등 차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임시변통으로만 대처했어요. 마찬가지로 결혼과 기존 가족제도 바깥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저출산 문제의 핵심인데, 여기다 대고 한부모가정을 사회적 소수자로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식으로 대응했죠. 차이를 자꾸 소수의 문제로 환원하고 그 범주를 유지한 채 관용을 베푸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차이가 만들어지는 방식 자체를 바꾸자는 문제제기로 이해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거죠.

 

권미혁 저는 병영체험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 보수적인 관념이 사회 곳곳에서 적극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느껴요. 과거에는 진보진영의 전유물이었던 역사에 대한 재해석을 이제는 보수진영에서도 하고 있고 그 성격이 보수적으로 대체되고 있어요. 마치 과거 민주화운동하던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를 민주화라는 시각으로 보면서 발언했던 것과 마찬가지예요. 또 하나는, 어떤 분이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이제 사람들이 체념한 것 같다는 거예요. 옛날처럼 졸업하고 취직해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노후를 보내는 삶의 패턴 자체가 무너졌죠. 거기에서 오는 불안과 절망이 많이 확산됐다는 거죠. 그런 토양에서는 과거 우리가 가진 소수자에 대한 관심 같은 것이 급격히 줄어들죠. 여성운동이란 결국 민주적인 토양에서 성장하거든요. 그래서 최근에 제게 여성연합이 정치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분들이 늘고 있어요. 물론 여성이슈, 여성운동, 정치운동이 분리된 것은 아니지만, 좀더 민주적 사회와 권력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것이지요.

 

이유진 제 후배 하나는 이른바 ‘촛불 아가씨’였습니다. 광우병 미국 소고기 수입반대 시위에서 많은 젊은 여성들이 예쁜 옷을 차려입고 조선일보를 하이힐로 밟고 경향신문이나 한겨레를 펼쳐보는 퍼포먼스를 했었죠. 그때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문화운동이라는 기분을 느끼며 연일 신나게 촛불 시위에 나갔다가 물대포를 실컷 맞고 물러났죠. 그게 후배한테는 너무 쓰라린 기억이었다는데, 성공의 경험과 추억을 가진 386세대와는 180도 다른 식의 경험입니다. 여성주의에서 이들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분석한 작업이 이제껏 많았고, 여기서 희망을 발견해야 한다는 얘기도 많았지만 정작 그들은 이번 대선을 겪으며 패배감이 짙었다고 하더라고요. 여성운동이 이런 새로운 여성 정치주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나아가 다양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진 여성 전체를 위해서, 아니면 특정한 누구를 위해서, 뭘 할 수 있을지 묻게 됩니다.

 

황정아 사실 지금이 마냥 신나게 운동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아요. 변화를 말하고 실현하려는 사람들은 예전과는 다른 방식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잖아요. 이게 어렵고, 뭔가 새롭지 않으면 내 생각을 말하기도 싫어지고, 그런데 그 변화 자체는 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닌 상황이죠. 그렇기 때문에 의외의 움직임이 색다른 반향을 불러올 가능성도 커지겠습니다만.

 

권미혁 요즘 학생들과 이야기해보면 성차별을 잘 못 느낀다고 하더군요. 그러다보니 대학에서 여성운동이 없어지고요. 제 주변 세대는 자라면서 겪은 차별의 경험 때문에 여성운동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물론 지금 학생들도 사회에 나가면 느끼는 게 다를 테지만요. 요즘 친구들은 꼭 여성하고 연관되어 있지 않은, 크게 보면 여성 혹은 성평등과 이어지긴 하지만, 본인을 여성주의자로 규정할 필요가 없는 다양한 이슈에서 흥미를 느끼더군요. 그런 움직임을 보면 지금까지의 여성운동 그룹이 너무 제도화되어서 무거워진 게 아닐까 싶죠. 그래서 기존 방식의 운동에 매력을 별로 못 느끼는 건데, 다만 희망이라면, 얼마 전 밀양 송전탑 문제가 불거졌을 때 산에 올라와서 투쟁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할머니들이었어요. 인터뷰에는 항상 할아버지만 나왔지만요.(웃음) 이처럼 최근에 크고작은 여성모임이 협동조합 형태로 조직되고 있고, 마을공동체 운동도 활발해요. 여성이 중심이 된 전국의 도서관 운동만 보아도 그 힘을 느낄 수 있죠. 앞으로 공유경제나 혁신경제 등 사회적 경제 분야에서 여성의 참여는 더 많아질 거예요. 얼마 전 여성노동자회가 협동조합을 출범시킨 데서 보듯 기존의 단체 내에도 이미 이런 활동이 많이 들어왔어요. 앞으로는 여기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훈련되고 리더가 될 거예요.

 

권김현영 저는 지금이 역사적인 사건을 기획하는 게 불가능해진 시대라고 봐요. 예전에는 무슨 사건이 터지면 대책위를 만들어 알리고 집중시키는 식으로 그걸 사건화했는데, 이제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그러면 여성운동이 할 수 있는 건 두가지인데, 아까도 언급했지만 90년대 초반의 성주류화 기획은 이렇게 신자유주의 폐해가 심각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나온 거예요. 이제 그에 대한 재진단이 필요한 것 같아요. 핵심은 공정하지 않다는 거죠. 고용이 다양화되고 불안정 노동이 늘어난 상황에서 성주류화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상관없는 문제가 되어버렸죠. 이런 현실 변화를 포함해 새로 구상되지 않으면 아무리 의미있다 할지라도 아주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인 거죠. 또 한가지는, 최근 젊든 나이 들었든 할 것 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구체적인 디테일이에요. 그러니까 가령 ‘그 조직은 말로만 대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의견이 달라도 끝까지 설득하더라’ 하듯이 신뢰를 쌓아가는 일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이런 작고 귀엽고 인간적인 디테일에 강한 조직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들이 봐도 ‘아, 그런 걸 해? 여성단체에는 그런 게 있어?’라고 주목하게 만들 만한 흥미로운 어떤 것들요. 예전에 어느 여성운동 모임에서 서로 별명을 지어 불렀더니 주변 사람들이 거기에 점점 의미를 부여해서 지금은 널리 퍼졌거든요. 거시적인 차원과 미시적인 차원 양자를 오가는 것이 필요하다 싶습니다. 사건을 만들고 뛰어들고 불타오르고 하는 시대는 아닌 것 같아요.

 

이유진 동감입니다. 일상의 정치가 굉장히 중요해졌죠. 지역의 여성주의 의료생협을 비롯한 생활협동조합 운동이 대중의 공감과 주목을 받고 있고요. 그런 데서 적극적인 사회변동이 가능할 것이란 기대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작은 움직임들이 언제 어떻게 거대한 물결로 이어져서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웃음) 자기 삶의 정치에서 운동을 시작하는 게 가장 정직하고 직접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희망이라면 여러 지역의 작은 시민운동, 생활정치에서 나타나는 색다른 시도와 도전을 보고 진보-보수를 떠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정말 신선하다, 저렇게 사는 게 맞는 것 같다, 어울려 놀고 싶다,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죠.

 

황정아 여성주의가 재현되지 않고 재미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삶과 운동을 조직해야 한다면, 그럴 때 여성이라는 범주는 어떤 변화를 더 겪게 될지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여성주의 정치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생각해보는 것으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생활운동과 정치운동의 결합에서 활로를

 

권김현영 대중의 상상 차원에서 여성을 대표하는 것은 오랫동안 미스코리아였는데 이제 여성 대통령이 됐죠. 이제는 걸그룹이 ‘여자 대통령’이라는 노래를 갖고 나오는 시대잖아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저는 한편으로는 이제 대표성에 대한 강박을 좀 벗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여자 대통령 그깟 거, 고두심도 연기하고 고현정도 있고 걸그룹도 들고 나올 수 있게 되었잖아요. 이제 어느 상징적인 자리에 대표성을 부여하고 거기에 진정성과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에 더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온 것 같아요. ‘여성적 가치가 무엇인가’라는 답이 나올 수 없는 질문에 답하려고 애쓰면서 여성이라는 기호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점점 부질없어지고 있어요. 그렇다고 여성이라는 말을 없애자는 게 아니라 계속 소멸과 생성, 분화와 확장을 반복하면서, 아무도 그 기호의 의미를 붙잡을 수 없지만 과정 중에 있는 상상적 개념으로 여성이 이해되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 가장 중요한 여성적 질문을 던진 집단 중 하나는 ‘줌마네’ 운동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줌마네 운동은 아줌마라고 하는 낙인의 이미지를 바꾸면서 한국사회에 아줌마의 힘이라는 메시지를 던졌는데, 이 아줌마라는 존재가 엄마와는 또 달랐거든요. 모성정치로 수렴되지 않은 살아 있는 주부 운동이면서 또 한편 주부로 환원되지도 않는, 그 낙인을 스스로 수용한 상태에서 그 에너지를 반동력으로 가져가는 방식으로 반전을 거듭하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운동이었어요. 그런 사례를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지역에 있는 여러 움직임들도 누가 여성을 대표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상상력이 넓어지고 있는 상황인 것 같아요. 범주의 확장일 수도 있고 재구성일 수도 있는데, 여성 대통령 박근혜라는 상징이 여성이라는 기호를 다 잡아먹지 않길 바라죠. 여성 대통령에게 어떤 열망이 모아졌을 때보다 오히려 여성 대통령이 되고 난 지금이 이런 질문을 던질 더 좋은 기회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권미혁 여성운동이 우리 사회 전체의 수준이나 흐름과 많이 연동되어 있다고 봅니다. 자신을 여성으로서 정체화하는 것이 기쁘고 거기서 힘을 얻어야 하는데 사회 전반에서 민주주의가 퇴보하니 그에 따라 여성운동도 후퇴하는 느낌이에요. 여성들은 다양한 차이 속에 있으면서도 정치적인 실천을 같이할 수 있는 지점이 있죠. 여성주의 운동이 기존 질서를 변화시키려는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활동임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제 지역에서 작은 주제를 갖고 생활에 밀착한 운동을 하는 건 이미 대세가 됐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도리어 여성연합이 좀더 큰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다 싶기도 해요. 작고 다양한 움직임들이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노력하는 거죠. 그리고 여성운동의 성과로 이루어낸 제도화된 영역 중 긍정적인 것은 더 지키고 부정적인 것은 더 강하게 압박하고 더 각을 세워야 합니다. 이렇게 각각의 운동들이 서로 조화롭게 만나야 하겠지요.

 

이유진 요즘 여성담론의 특징적인 경향이 여성은 대개 피해자와 권력자로 양분돼 인식된다는 거예요. 피해자는 주체성이 비가시화하면서 시혜의 대상으로 객체화되는 한편 사회적으로 어마어마한 복지 비용(세금)이 들어가는 ‘잉여’가 되고, 권력자로서 여성은 피해자 여성이나 대중 남성 모두의 위에 군림하는 여왕, 이기적인 존재가 되는 건데요. 그런 여성들만 있는 것이 아니죠. 이미 대세가 된 생활운동의 뿌리 위에서 정치운동을 통해 비가시화된 여성들의 목소리와 주체의 역량이 발휘될 것이라고 봐요.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도 있지만, 앞으로 더 정교하게 변화할 여성운동의 구실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거기서 어떤 변화의 실마리가 발견되지 않을까 합니다.

 

황정아 아직 하실 말씀이 많으시겠지만 시작하면서 나눈 얘기처럼 오늘 대화는 긴 토론의 시작이라 생각하고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해야겠습니다. 긴 시간 수고하셨습니다.(2013.8.3 세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