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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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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成碩濟

1960년 경북 상주 출생.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로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인간적이다』, 장편소설 『왕을 찾아서』 『위풍당당』 『단 한 번의 연애』 등이 있음. songsokze@hanmail.net

 

 

 

장편연4(마지막회)

투명인간

 

 

역사에 기록될 엄청난 일과 역사책에서 절대로 볼 수 없는 신기한 일이 내 집에서, 내가 보는 중에 일어나다니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기로 예정된 날짜를 일주일가량 앞두고 수도방위사령부 특공부대에서 두명의 병사가 탈영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군 보안사령관 출신으로 하극상의 꾸데따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한국의 대통령과 그의 정권에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수도권 일대 군부대에 삼엄한 비상경계태세가 갖춰진 상황에서 특공부대의 특등사수였던 하사관이 상병 하나와 함께 개인화기와 실탄,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채 부대를 빠져나온 것이다.

그들은 소풍이라도 나온 듯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가다가 우리 동네에서 산을 하나 사이에 둔 계곡의 유원지에서 내렸다. 택시기사가 신고를 할 것에 대비해서 지체없이 산속으로 들어갔고 산중턱에 있는 무속인의 집 빨랫줄에서 옷을 훔쳐 입은 다음 산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어서 새벽에 계곡을 따라 내려와서는 우리 동네의 여관에 잠입했다. 여관 주인은 오전에 보일러실에 들어갔다가 잠이 들어 있는 그들을 발견하고 여관을 뛰쳐나와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이런 사실을 나는 물론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대한민국 99.99퍼센트의 국민처럼 그들이 탈영한 사실조차 몰랐다.

신고를 받은 관할 경찰서 기동타격대 오분대기조가 십이인승 승합차에 나눠 타고 출동했다. 오분대기조가 탄 차량은 비상등을 켜고 싸이렌을 요란하게 울리며 여관 앞 대로까지 달려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차들은 정상적으로 도로를 통행하고 있었고 도로변 이층에 있는 우리 식당에는 손님들이 네댓명 있었다. 싸이렌 소리에 창가로 가서 내려다보던 손님이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옴마야, 저기 뭐꼬! 총이다, 총!” 하고 외쳤다.

뭡니까? 왜 그래요?

내가 창가로 다가서자 처음 듣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려왔다. 기동타격대의 승합차가 길에 서 있었고 운전석의 문이 열려 있었는데 거기서 뛰쳐나온 운전자가 낮은 포복으로 도로 건너편으로 기어오는 게 보였다. 총탄은 무차별적으로 도로와 거리, 골목을 가리지 않고 쏟아졌다. 상당수는 기동타격대의 차량에 집중됐다. 몇명이 총에 맞았는지 도로 바닥에는 기다란 핏자국이 나 있었다. 지나가던 차량들은 물론 행인들도 순식간에 모두 사라졌다. 총소리의 계엄령이 지배하는 시공간은 순식간에 새 한마리 날지 않는 부동의 세계로 변했다.

계단에서 구둣발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식당 안으로 정복 차림의 경찰관 예닐곱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손님을 모두 내보낸 뒤 여관이 가장 잘 바라다보이는 곳이라는 이유로 우리 식당이 대책본부가 되었다고 내게 통보했다. 내가 얼떨떨해할 사이도 없이 다시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경찰관들이 들고 있는 무전기에서 쉴 새 없이 말이 쏟아져나왔다.

과장님, 지금 서연대 정문에서 미하나께서 꽃잎들이 대열을 지어서 정문으로 엄청나게 하나여섯 중인데 탈영병 난동 때문에 통신 마비된다고 정보과 기동대 제외하고 무기 채널을 에프엠투로 바꾸라고 난립니다.

아, 여긴 또 어쩌라고. 지원병력은 더 안 오나? 본서고 파출소고 할 것 없이 전부 다 지원 요청해.

지금 여유병력은 하나도 없습니다. 거의 다 차출돼서 학생들 시위 막으러 갔습니다. 교통과도 다 나갔는데요.

이것들은 탈영을 했으면 좀 멀리라도 가지 하필이면 우리 관할로 와, 오기를.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구만.

우왕좌왕하던 경찰들은 별을 세개 단 장군이 십여명의 장교를 거느리고 들이닥치는 바람에 조용해졌다. 이어 소총만 한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들어왔고 식당의 탁자와 의자가 한쪽으로 밀어붙여졌다. 바깥의 스피커 달린 차량에서 미리 준비를 해둔 듯 탈영병들의 어머니와 애인이 탈영병을 설득하는 선무방송이 시작됐다.

학수야, 보고 싶은 학수야. 너 거기서 왜 그러고 있니. 온 식구들이 다 걱정한다. 제발 자수해라. 나오기만 하거라. 네가 총을 버리고 나오기만 하면 아무런 죄도 묻지 않고 집으로 보내준다고 군단장님, 사단장님, 연대장님, 대대장님이 모두 약속하셨다. 내가 보는 앞에서 맹세를 하셨다. 학수야, 제발 이 늙은 에미를 살려다오. 네 동생들하고 몸이 아픈 아버지를 생각하거라. 어린 동생들이 불쌍하지 않으냐. 네가 그리 좋아하는 막내 영주가 오빠 보고 싶다고 그렇게 운다. 학수야, 학수야, 제발 이 에미를 살려다고. 살려다고. 나오너라. 제발 총을 버리고 나오너라.

이어서 젊은 아가씨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신의 마음이 변한 게 아니고 오직 당신만을 영원히 사랑할 것이니 어서 나오라고 상병을 설득했다. 여관 쪽에서는 잠시 방송에 귀를 기울이는 듯 총소리가 멎었다.

그러는 동안 삼성장군을 비롯, 두명의 장성과 영관급 장교에 경찰 간부가 포함된 군경 대책회의가 즉석에서 열렸다. 최대한 빨리 탈영병을 제압하는 방법이 토의됐다. 수도군단 사령관인 삼성장군이 공병대를 불러서 여관 전체를 폭약으로 날려버리는 방안부터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정복에 무궁화 셋을 달고 있는 경찰은 입을 떡 벌렸다. 별 두개짜리 사단장이 조심스럽게 공병대 부르는 데 시간이 다소 걸릴 거라고 난색을 표했다. 중고생이나 쓸 육두문자가 사령관의 입에서 쏟아져나왔다. 한미 두 나라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날파리만도 못한 탈영병 둘 때문에 무산되게 생겼는데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사령관의 군홧발이 부하들의 정강이를 강타했다. 먼저 정강이를 맞은 장군들이 아픈 정강이를 어루만지면서 물러서자 그 아래 영관급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관등성명을 대며 정강이를 차이기 위해 사령관 앞에 다가들었다. 그들은 차인 정강이를 어루만지지도 못했다. 경찰들은 돌아서서 못 보고 못 들은 척했지만 웃음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마침내 대령 한사람이 나서서 자신의 예하부대에서 탈영한 병력들이니 자신들이 무조건 책임을 지겠다고, 이미 준비를 마친 특수요원을 투입하겠으니 기회를 달라고 했다. 이 모든 과정이 꽉 짜여 돌아가는 연극처럼 느껴졌다.

내 옆에는 전경 하나가 무전기를 든 채 서 있었다.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군인들처럼 그 또한 풀빛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김만수’라고 명찰에 새겨진 흔한 이름과 견장의 작대기 네개짜리 계급장은 검은색이었다. 눈짓으로 누구냐고 묻자 그는 교통계 소속이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황을 파악해 무전기로 보고하는 듯했다.

잠잠하던 여관 쪽에서 다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방향을 정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연발사격을 가했다. 탈영병이 수류탄을 던진 듯 개천에서 엄청난 물보라가 일었다. 이어 천둥 치는 듯한 폭음이 연속으로 들렸다.

생난리구만. 전쟁 난 거 같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쟤들 쓰고 있는 총이 최신형 케이투 같은데. 명중률이 우리 군대 있을 때 쓰던 씩스틴하고 비교가 안된다고 하더라고. 소리가 다르잖아.

수방사에서도 백발백중의 저격수 출신이야. 맘만 먹으면 다 쏴 죽이겠구만.

무장탈영하면 순서가 다 정해져 있는 거 아냐. 저렇게 난리치다가는 살아남기 힘들지. 죽은 놈은 말이 없잖아. 시기적으로나 사안으로 보나 잡혀서 시간 끌다 총살당하느니 화끈하게 끝내는 게 낫지. 쟤들도 충분히 알고 있을 거야.

창문이 있는 벽에 기대앉은 기자들이 낮은 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찬밥 신세가 된 경찰 중에서도 제일 계급이 높은 늙수그레한 교통과장은 바깥을 살피다가 신음 소리를 냈다.

저기 하천 건너편에 주민들 완전히 사선에 노출돼 있잖아. 뭔 구경이 났다고 목숨 걸고 저러고들 있나.

별 하나짜리 장군이 교통과장에게 쏘아붙였다.

어이 경찰 나부랭이들, 거기는 비 맞은 뭐마냥 쭝얼대지 말고 민간인들이나 철저하게 막아. 도대체 뭐 하고 자빠져 있는 거야? 당신네들이 등신짓 할수록 우리 책임만 커진다고. 병력 있으면 오합지졸 같은 민간인 통제를 하란 말이야. 새끼줄이라도 치고 못 나오게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라고.

여관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다리 건너 주택가 골목에 사람들이 나와 있는 게 보였다. 여관에서 직선거리로 이백 미터쯤 되는 거리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특등사수의 조준사격 범위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십여명의 남자들은 각자의 군대 시절 경험을 돌아가며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고 예닐곱명의 여자들도 고개를 내밀고 각자의 호기심을 채우느라 부산했다. 그들 중에는 내 식당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도 있었지만 당장은 눈앞에 있는 위험을 알릴 방법이 없었다. 식당과 그들 사이의 도로는 차도 사람도 볼 수 없게 씻은 듯이 깨끗하니 그곳을 지나가다가는 곧바로 탈영병들의 먹잇감이 될 게 분명했다. 그들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서는 또다른 다리가 있는 상류쪽을 한참 우회해서 건너가야 했으나 그전에 그들에게 총알이 날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한마디로 대책이 없었다.

그때 전경이 밖으로 소리없이 빠져나갔다. 대책회의를 열던 사람들은 지도에 열중했고 침투루트를 짜느라 전경의 존재와 움직임 자체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기자들은 카메라의 줌렌즈를 끼웠다 뺐다 하며 신형 기종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골목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수다를 떨거나 팔짱을 낀 채 바깥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식당과 골목, 탈영병이 있는 삼각점 사이 공간에는 고압선 주변의 공기처럼 엄청난 전하의 위험이 채워져 있는 듯 했다.

나는 보았다. 여관의 삼층 계단실에서 반짝하고 빛나는 총신을. 그건 분명히 골목 안에 있는 사람들을 알아챘다는 신호였다. 나도 모르게 서쪽 창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 뻔했다. 어떻게 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이 어떤 위험에 처해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내가 정말 고개를 내밀었더라면 탈영병의 총구가 식당을 향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순간에 나는 스스로를 제어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전경이 골목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식당에서 내려간 뒤 저격수들의 시선에 몸을 노출한 채 곧바로 차도를 따라 달려가지 않고는 다다를 수 없는 시간이었다. 하천의 상류에 있는 다리로 우회해서 갔다면 최소한 십분은 걸렸을 것이었다. 그동안에도 총소리는 계속 나고 있었으니 도대체 어떻게 무사히 거기까지 갈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경이 총알보다 빨랐거나, 투명인간이라도 되었다면 몰라도.

그는 주민들에게 집 안으로 들어가라고 설득하는 듯 무전기를 든 팔을 휘두르며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전경의 제지를 뚫으려고 몸을 더 앞으로 내밀었다. 그 바람에 전경의 몸이 바깥으로 밀쳐지며 골목 바깥으로 완전히 노출됐다. 철판을 쇠끌로 긁을 때처럼 까까가가가각, 하며 연발사격으로 긁어대는 총소리가 났다.

나는 보았다. 전경의 몸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몸이 펄쩍 솟아오르는 것을. 이어 소리도 없이 바닥으로 무너져내리는 것을. 그의 군복의 등 부위 빛깔이 짙어져가는 것을. 그제야 사람들은 썰물처럼 골목에서 빠져나갔다. 남자들은 포복으로 재빨리 기어갔고 여자들은 팔을 휘저으며 미친 듯 달아났다. 전경은 그들 뒤에 혼자 쓰러져 있었다.

저 개자식들 저거, 전경 애 보고 저희 잡으러 온 줄 알고 쏜 거 아냐? 무기라고는 무전기 하나밖에 없는 앤데. 쟤 죽은 거야?

사진기자 하나가 줌렌즈를 늘였다 줄였다 하며 말했다. 목숨이 걸린 줄도 모르고 구경하던 사람들을 목숨 걸고 뜯어말리다 총에 맞은 전경은 땅바닥에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그러는 사이 진짜 특수부대의 진짜 요원들이 도착해 작전에 들어갔다. 그들은 각자 개머리판이 없는 짧은 소총 하나를 몸에 바짝 붙인 채 시가지 전투의 모범을 보이듯 몸을 은폐해 여관으로 접근했다. 전경이 쓰러지고 나서 다시 선무방송이 시작됐다. 탈영병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였다.

요원들이 여관의 계단으로 사라지고 난 뒤 선무방송은 중단됐다. 다시 끈적한 적막이 공간을 채운 듯했다. 식당 안에서는 물론이고 바깥에서조차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도로의 횡단보도 신호등이 푸른빛에서 붉은빛으로 또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잠시 뒤 투타타타, 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이어 이삼분 동안 침묵이 이어지더니 옥상에서 수십발의 총탄이 발사됐다. 소리로 보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게 분명했다. 신형 소총의 날카로운 총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장군의 옆에 선 무전병의 무전기로 침투한 요원으로부터 짤막한 보고가 날아들었다.

상황 종료.

모든 사람들이 한숨을 내쉬고는 악수를 나누고 각자의 서류를 챙기고 일어서던 그 순간, 나는 골목 끝에 방치돼 있던 전경의 손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변소에 달려 있는 오촉짜리 작은 전구가 깜빡이듯 손은 보였다 말았다 했다. 마치 손이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날숨 때는 사라지고 들숨 때는 나타나는 식이었다. 그렇게 멀리서 그렇게 작은 부분이 어떻게 그리 세세하게 보였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살았구나. 개죽음은 면했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선무방송을 하던 차가 자리를 떠나는 것과 함께 구급차가 달려왔다. 전경은 가장 늦게 구급차에 실렸다.

다음 날 신문에는 수도권 일대를 휘젓고 다니던 탈영병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노라는 짤막한 기사가 났다. 누가 얼마나 죽고 다쳤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었다. 목숨 걸고 사람들을 구하고 대신 총에 맞은 전경 하나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형은 군대에 간다고 집을 떠나간 지 여섯달 만에 첫 휴가를 나왔다. 그런데 전경 월급이 고시 출신 고위 공무원 수준이라도 되는지 시퍼런 돈다발을 가지고 왔다. 그뒤로 형은 수시로 집에 들러서는 돈을 놓고 갔다. 내게 앞으로 생활비 걱정은 안해도 된다고 했다. 옥희에게도 열심히 공부해서 꼭 대학에 가라고, 뒷바라지는 책임지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돈만 주고 간 게 아니었다. 삼수 끝에 대학에 합격한 내게 축하한다며 수제 클래식 기타를 사주었고 옥희에게는 학원이나 교회에 다닐 때 입고 다닐 사복을 사주었다. 동네 슈퍼 뚱뚱이 아줌마한테 돈을 맡겨놓고 양식과 반찬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잘 보살펴달라고도 했다. 웃겼다. 웃지는 않았다. 모르는 체했다.

가장 웃긴 건 교통경찰을 보조하면서 ‘삥땅’을 쳐온 돈으로 우리들을 월세방에서 전셋집으로 옮겨가게 한 것이었다. 날림으로 지은 연립주택이긴 했지만 방이 세개였고 좌변기가 있는 화장실에서 ‘순간 온수 가스보일러’로 데운 물로 샤워를 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신혼집처럼 티브이와 세탁기, 전기밥솥, 전기다리미까지 들여놓았다.

어릴 때부터 집 밖에서는 쉽게 용변을 볼 수 없는 증세가 있어서물론 거름이 될 똥오줌을 반드시 집에다 눠야 한다는 아버지의 강요 때문이다연립주택으로 이사를 가기 전에 나는 대학에 가서도 아침마다 대문간에 있는 재래식 변소를 썼다. 여름에는 파리와 구더기가 기어나오는 변소에서 용을 쓰다 나오면 학교에 가서는 내 몸과 옷에 밴 냄새가 걱정되어서 여학생들과 멀찌감치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이사를 하고 나서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세탁기로 빨래하고 ‘짤순이’(탈수기)로 물을 뺀 뒤 다리미로 빳빳이 줄 세워 다린 옷을 입고 머리에서 레몬 향이 나는 샴푸 냄새를 풍기면서 마음껏 캠퍼스를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실 최고였다.

나는 진저리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형이 준 돈으로 얻은 작은 편익에 감지덕지하는 내게, 주인이 던져준 뼈다귀를 허겁지겁 핥으며 꼬리를 흔들어대는 강아지처럼 반응하는 나라는 종자에 대해. 어느때부터인가 내가 만수를 형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게 증거 중 하나였다.

대학에 입학해 만난 나이 어린 선배들을 형이라고 부르는 일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을 무렵, 만수를 형이라고 부르는 게 만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호칭에 있어서만큼은 유아기 상태에 머물러 있는 나를 적당한 자리로 가져다줄 거라는 생각을 하긴 했다. 논리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가족관계, 특히 어린 시절부터 한핏줄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아웅다웅 싸워가며 만들어진 동기간의 미묘한 감정에는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나는 되도록이면 만수를 부르지 않았다. 아예 부를 일이 없게 했다.

그러던 것이 군대에 간 만수가 휴가 때에 돈다발을 들고 금의환향함으로써, 툭하면 외박을 나와 돈봉투를 두고 가게 되면서, 근처 지나가는 길에 수시로 집에 들러 밥을 먹은 뒤 가계부에 만원짜리 지폐를 끼워놓고 가면서 완전히 상황이 바뀌었다. 조건이 인간을 바꾼다. 돈이 이십년을 끌어온 버릇도 고친다. 호칭 역시 조건이다.

형, 그냥 가지 말고 다시 앉아봐. 할 말이 있어.

돈봉투를 방바닥에 내려놓고 일어서서 가려는 만수를 내가 부르자 만수는 놀라고 당황해했다. 제복에서 사삭, 소리가 나게 빨리 앉더니 모자를 벗고는 땀을 닦았다. 내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손바닥을 방바닥에 문지르면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 상처의 딱지를 떼낼 때처럼 잔인하고 강렬한 쾌감이 느껴졌다.

‘그냥 한번 불러봤다. 자식, 형이라고 한번 해주니까 거 되게 좋아하네. 네가 나한테 형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너 자신을 그렇게 몰라?’

이런 식으로 또다시 ‘형’이라는 단어가 내 입으로 발음되는 걸 듣기 위해 귀를 곤두세우고 있는 만수에게 지옥을 경험하게 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만수를 ‘형’이라고 불러줌으로써 그의 희열과 감동을 경멸하는 정도로 그치기로 했다. 그 또한 조건이 내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형, 내가 그동안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않은 거, 미안했어. 내 마음 알지? 내가 형을 좋아하고 존중하지만 버릇이 잘못 들어서 그랬다는 거. 앞으로는 계속 형이라고 부를게.

만수의 눈이 빨개졌다. 눈에 물기가 돌았다. 몸이 앞으로 확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팔이 내 어깨를 감싸안았다. 이런 젠장.

고맙다.

만수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나는 속으로 이건 아니라고 외쳤다. 이런 개떡 같은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나 또한 만수를 마주 감싸안고 말았다. 만수의 실팍한 어깨와 가슴에서 전해지는 떨림,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내 마음의 현을 진동시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생똥을 밟은 기분이었다.

바로 그 형이 완전히 돌아왔다. 제대를 서너달 앞두고 총에 맞아서 의병(依病)제대를 할 뻔했는데 사회 나가면 불이익이 있을까봐 경찰병원에 누워서 만기전역을 맞았단다. 세상에 교통경찰 보조를 하던 전경이 총에 맞다니.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맞서다가 돌에 맞고 화염병에 맞았다면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총에 맞았고 입원치료를 받았다고 할 뿐, 어디서 누구에게 왜 총을 맞았는지에 대해서는 보안서약을 해서 말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아무튼 총알이 머리를 뚫고 들어간 건 아니고 장기를 상하게 한 것도 아니며 팔다리를 못 쓰게 만든 것도 아니고 다소간의 출혈 끝에 치료를 받아서 후유증도 별로 없을 것이라고 했다. 쉽게 말해 형은 총에 맞은 것과는 아무 상관 없이 입대 전처럼 세차장에서 다시 일을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금희 누나가 자기 멋대로 결혼을 하고 우리를 떠나간 뒤 우리 남매들의 생계조차 막막해졌을 때 형이 제대로 된 일을 하기 시작한 곳이 세차장이었다. 은행에 다니던 주인집 아저씨가 소개해준 세차장은 은행 지점 바로 곁에 있었다. 무역을 하든 중소기업체를 운영하든 사업하는 사람들이 은행 같은 금융기관에 돈을 빌리러 갈 때는 과시용으로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가게 마련인데, 은행에 가기 전에 반드시 세차장을 거쳐갔다.

형은 뭔가를 씻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씻다보면 점점 물이 맑아지는 게 좋다고. 집에서도 우리 세 남매의 옷 빨래와 청소, 설거지를 도맡아했다. 제가 좋아서 한다니까 말릴 일도 아니고 거들 일도 없었다. 그렇게 씻는 걸 좋아하더니 결국 세차장 아르바이트가 형이 전문학교에 다니는 동안 주업이 되었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형의 손은 늘 세차 일로 불어 있거나 부르트고 갈라져 있었다. 언젠가 지나가던 중에 형이 세차를 하는 것을 몰래 지켜본 적이 있었다. 바깥만 깨끗이 하는 게 아니라 엔진 룸이며 트렁크까지 말끔하게 청소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타이어의 바람을 넣고 엔진오일 빛깔까지 살폈다. 헐거워진 부분을 찾아서 조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닥의 염분, 녹을 제거하기도 했다. 결국 간단한 정비까지 해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차를 돌봐주면 내가 차 주인이라도 팁을 주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형은 세차장 주인이 불안해할 정도로 손님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형이 제대하고 나서 세차장으로 돌아가자 과거의 단골손님들이 형을 다시 찾아왔다. 형이 곧 자동차부품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고 하니까 세차장 주인은 그깟 공장에 말단 사원으로 가봐야 쥐꼬랑지만한 월급 가지고 동생들 공부시키고 장가가고 하겠느냐고, 세차장 규모를 두배로 늘리고 중소기업 과장 대우를 해줄 테니까 함께 일하자고 했단다.

군부독재정권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삼저호황을 맞아 수출이 매년 급격하게 증가하고 국민소득 또한 높아지고 있었다. 몇년 있으면 어중이떠중이들까지 차를 사서 타고 다닐 가능성이 있긴 했다. 세차장 사업은 그만큼 전망이 밝았다. 하지만 형은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에 들어가 평범한 부속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군대 시절 알게 된 상관인지 경찰 간부인지가 자기 친구인 자동차부품회사 사장에게 소개해줬는데 은혜가 고마워서 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 잘난 회사가 주는 월급은 많지 않은지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계속했다.

세차든 회사 종업원이든 결국 씨스템 하부에 예속되는 종노릇을 하는 것이다. 나는 죽었다 깨나도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정당한 실력으로 경쟁해서 위로 올라가 세상에 군림하고 싶다. 그렇게 되는 과정에 드는 비용을 대기 위해 형이 세차를 하든 공장의 부속품이 되든 남의 뒤를 닦아주든 상관없었다. 형에게 타고난 노예근성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 형이 있다는 건 나의 운이다.

 

내가 나온 공고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똑똑한 공돌이들이 모인다는 공립이었고 웬만한 인문계 고등학교보다 커트라인이 훨씬 높았다. 그래서 아이들 자부심도 대단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뭔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삼학년 때 동계전형으로 대학에 가는 걸 완전히 포기하고 나서 방황을 좀 하다보니 성적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동기들이 잘나가는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것을 초조하게 지켜보다가 마지막에 얻어걸린 게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이었다. 말이 중소기업이지 생산라인 근무인원만 오백명이 넘었고 대졸 사무관리직과 경영진 등을 합치면 육백명 가까운 사원이 있었다. 게다가 자동차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전기 분야의 전문부품을 독과점적으로 생산하고 있으니 회사의 전망은 밝았다.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도 쇳덩어리처럼 단단한 회사라고 사장은 설명했다.

사장이 내가 다닌 공고를 이십년 전에 졸업한 선배이고 회사 전체가 생산을 중심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기술직, 생산현장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생산라인에서 나 같은 일류 공고 출신은 군대의 사관학교 출신처럼 엘리트 대접을 받았다. 대기업보다는 이런 데서 더 빨리 출세할 것이라는 기대도 생겼다.

회사의 소유주는 회사에서 생산하는 부품을 전량 납품하는 자동차회사의 설립자 딸이라고 했지만 먼발치에서 몇번 본 게 고작이었다. 그 설립자는 사장의 첫번째 직장 상사이기도 했고 십여년 전 자동차회사가 경영난에 빠졌을 때 회사를 남의 손에 넘긴 지 삼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내가 사장, 회장 될 것도 아닌데 그런 거야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에게 맞는 곳이면 되었다.

회사에서는 제때 월급 나오고 추석, 설, 김장철, 연말 해서 일년에 네번 보너스를 주었다. 돈을 받아봐야 특별히 쓸 데도 없고 집에서는 장가갈 때를 대비해서 저축을 하라 했지만 나는 월급의 대부분을 입고 먹고 마시고 노는 데 썼다. 공장에서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돈까스 먹고 맥주 마시고 청바지, 운동화 같은 걸 사는 것으로 풀었다.

주말에는 공단 바깥의 디스코텍이나 나이트클럽에 가서 발바닥에 땀나게 뛰고 놀았다. 잠깐씩이라도 여자들을 만나려다보니 술값, 밥값, 옷값이 또 만만찮게 들어갔다. 입대 전에 이런 식으로 먹고 마시고 입고 놀고 하다보니 돈이 모일 수가 없었다.

군대에서 만기제대하고 회사에 돌아오니 전에는 못 보던 김만수라는 친구가 있었다.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오년제 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와서 나보다 나이가 한살은 많았지만 나는 생산직 4급인데 그 녀석은 같은 4급이라도 관리직이었다. 그것도 생산관리부 소속이라서 품질관리니 공장 새마을운동이니 노사협의회니 하는 현장의 안건 때문에 안 볼 수 없었다.

만수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디 하나 똑 부러지게 하는 것도 없이 희멀건 죽 같은 평범한 인상이었다. 실력이 있는 것도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 사람 아니면 안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며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그런 평균 수준 이하의 인간이 어떻게 4년제 대졸 출신이 대부분인 관리직으로 들어오게 됐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무슨 연줄이나 있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같은 제복을 입고 근무해도 생산직과 관리직은 각자 따로 놀고, 나이가 비슷해도 어중간한 인간은 비슷한 인간들끼리 어울리는 법이고 나처럼 엘리트 의식이 있는 부류는 또 우리끼리 어울리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만수 이 인간은 어쩐 일인지 관리직보다는 생산직, 그것도 나이가 있는 현장의 조장, 반장 같은 고참들하고 형, 동생 하며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관리직 사이에서 전문학교 출신이라 개밥의 도토리 취급을 받아서 그런가. 이렇든 저렇든 간에 싫으면 모른 체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회사 앞 자주 가는 단골식당에서 친한 사람들과 함께 온 만수를 만났고 생산직 고참 선배들의 강요로 소주잔을 한번 박고 말 까는 친구가 되었다. 만수하고 같이 온 품질관리과 계장이 한마디 거든 게 두고두고 생각났다.

이름이 하나는 김만수, 하나는 이재수라 성은 달라도 어째 무슨 형제 같은 인연이 있지 싶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두사람이 생산현장하고 관리직을 대표해서 잘 협조해가지고 회사를 발전시켜봐라.

자기는 형제 같은 생산직 사원이 없어서 그 나이에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면서 회사에 빌붙어 있는 건가. 아무튼 그날 그 식당에서 만들어 내온 안주가 돼지 두루치기였다. 비계가 달린 돼지고기를 두툼하게 썰어서 채소와 갖가지 양념을 넣고 매콤하고 달착지근하게 지지고 볶아서 먹는 것 말이다. 고기가 두툼하고 씹을 때 입에 반쯤 차게 푸짐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국물도 좀 있는데다 고기 양도 많고 해서 배도 부르고 술안주로도 제격이었다. 결정적인 건 세상에 이런 음식이 있었나 싶게 맛이 있었다는 것이다. 공장 구내식당에서 군대 짬밥 같은 맛없는 밥을 먹는 게 고역이었는데 그다음부터는 그 식당에 이틀이 멀다 하고 가게 되었다. 거기서 만수와 마주치는 바람에 몇번 바가지를 쓴 적이 있었다. 하도 맛있어서 그렇게 아깝지는 않았다.

만수하고 여기저기서 수백끼를 같이 먹었지만 나는 만수가 지갑을 먼저 꺼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좋게 보면 근검절약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속이 밴댕이 소가지라 십원 한장에도 발발 떠는 인간이었다. 처음에는 ‘짠돌이’로 불리다가 결국 주변까지 황폐화시킨다는 의미에서 ‘염전’으로 정착했다. 염전은 웬만하면 하루 세끼를 모두 구내식당에서 해결했다. 회사의 관리직들은 대부분 도시락을 싸오거나 바깥의 식당에서 사먹는데 만수는 생산직 사이에 섞여 밥을 타먹는 건 물론이고 한술 더 떠 남은 반찬을 얻어서 집에 싸가기까지 했다.

회사에서는 물론 출퇴근할 때 복장도 회사에서 지급한 점퍼 차림이었다. 공장장을 제외하면 대다수 관리직들이 양복을 입고 근무했다. 만수는 그런 사람들한테서 회사 마크가 찍힌 옷을 공짜로 얻어서 번갈아가면서 입는다고 하면서 이런 얘기도 했다.

구두 한켤레를 계속 신으면 이년을 신기 힘들지만 두켤레를 번갈아가면서 신으면 두배가 아니라 세배는 더 신을 수 있다고. 직장인이라면 반드시 알아둬야 할 상식이지.

내가 공장의 십여개 생산라인 가운데 최연소 생산반장의 물망에 올랐을 때 만수는 여전히 관리직 평사원이었다. 만수는 언제나 물렁해서 문제가 생겨도 늘 어정쩡하게 웃으며 대충 수습하고 넘어갔다. 그런 걸 두고 ‘인간성이 좋다’느니 ‘천생 양반이다’ ‘인간관계는 김만수가 최고다’라고들 했다. 웃기는 건 내가 불량이 나지 않게 아득바득 라인을 챙기고 연장근무까지 해가며 올려놓은 생산성을 어물쩍하게 나눠먹는다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실력과 노력의 차이가 있는데 결과가 비슷하다면 공평하지 않았다.

다시금 무능한 만수가 어떻게 관리직으로 입사해서 생산관리 일을 하게 되었는지 의심이 뭉게구름처럼 일어났다. 술집에서 작정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걔는 전문학교 나왔잖아. 대한민국에서는 전문학교라도 나와야 관리직이 될 수 있는 건데 뭘 복잡하게 생각해.

막 결혼한 임청 선배가 대답했다.

전문학교도 전문학교 나름이죠. 만수 나온 학교 이름이나 들어봤어요? 그런 똥통은 돈 주고 가라고 해도 안 가요. 그런 학교 나와서 어떻게 우리 회사를 들어왔겠냐고요.

여기 있는 사람들 월급봉투 까봐. 같은 월급이 하나도 없어. 한사람도 나랑 같은 조건으로 입사한 사람 없다고. 개인 회사라는 게 다 그런 거지. 무슨 빽이든지 썼겠지. 나는 하나도 안 궁금해.

만수와 자주 어울리는 회사 십년차 이백호 직장의 대답이었다. 결국 그들은 혼자 힘, 자기 실력으로 세상을 헤쳐나가기보다는 서로를 봐주고 각자의 약점과 비밀을 모른 체한다는 점에서 한통속이거나 적어도 서로를 같은 편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만수 또한 나처럼 육남매 중 하나고 아래로 동생이 둘인데 남동생은 다른 데도 아닌 서울 국립대에 다니고 있으며 여동생 또한 그 국립대생들의 미팅 파트너인 명문여대의 재학생이라는 것이었다. 만수가 염전이 된 것은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대학에 다니는 두 동생 때문이었단다. 똑똑한 동생들을 위해 허리띠 졸라가며 일하고 디스코텍 한번 가지 않고 절약하며 인생을 바치고 있다는 감동 스토리에 감명받아 무릎을 꿇을 나는 아니었다. 만수에게 그런 인내력이 있다는 것, 또 그런 것을 내게 한번도 내색하지 않았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만수가 나보다 더 나은 점이 있다는 게 아팠다. 그놈을 질투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놀랍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나는 군대에는 절대로 가고 싶지 않았다. 어린 시절 백수 형이 군대에 가서 죽었다는 게 내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군대에 가면 나 또한 죽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다. 만수 형 또한 총에 맞아 죽을 뻔했다. 우리 형제들에게 군대와 어떤 악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누구처럼 바보가 아니고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입대 연기가 가능한 대학생활도 끝이 보이기 시작하니 점점 초조해졌다. 행정고시와 외무고시를 준비하고는 있었지만 졸업하기 전에 합격을 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대학원에 가든가 군대로 가야 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군법무관으로 군대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방향을 전환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합법적으로는 방위산업체에 들어가 오년인가 근무하면 대체복무로 인정받았다. 그나마 이공대를 나와야 가능했다. 만수 형처럼 전경이 되는 건 꿈도 꾸기 싫었다. 시위를 주도하는 등의 학생운동을 하다가 검거되어서 징역형을 받으면 군 복무기간과 형기를 맞바꿀 수 있긴 했다.

나 또한 일이학년 때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경찰서 유치장에 끌려간 적도 있었다.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가담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조직에 들어가서 커리큘럼에 따라 공부하고 시위를 주도하고 감옥에 갔다가 노동현장에 투신하는 등의 민주투사 코스를 착실하게 밟아가는 친구들을 알고는 있었다. 그런 일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 가치관, 세계관과 달랐다는 것뿐이다.

나처럼 재수, 삼수하며 죽어라 공부해서 국가에서 돈을 들여 최고의 엘리트를 양성하는 국립대에 들어왔으면 고시를 통해 관료가 되든 정치가가 되어서 사회를 바꿔나가는 게 효과적이다. 젊은 시절 사상공부며 학생운동으로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으리라 순진하게 생각하고 어설프게 행동에 옮기려 하다 패가망신하는 건 내 할아버지로 충분했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면 되었다.

숙고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일단 공장에 가서 ‘공활’을 하면서 시간을 벌어보자는 것이었다. 나중에 내가 정계에라도 입문했을 때 기자가 ‘대학 다니던 이십대에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면 ‘그 엄혹한 시절의 산업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잠시라도 고통과 눈물을 맛보았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옥희까지 대학에 입학한데다 정부에서 대학생 과외를 금지하는 바람에 경제적 압박이 커져 있다는 것도 계기가 됐다.

공장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같은 재수학원 출신이고 이미 공단에 투신한 지 오래인 친구 오세호가 주선을 해주었다. 자동차에 들어가는 전선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비숙련 노동자도 큰 어려움 없이 일할 수 있었다. 임금은 공단 전체에서 평균을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평생을 노동현장에서 운동에 헌신할 사람과 달리 내가 잠깐 있다가 갈 것임을 세호 또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괜찮은 일자리가 얻어걸린 것이었다.

나는 월급 받아 저축을 할 생각도 없었고 집에 돈 부쳐줄 일도 없었다. 내가 버는 것을 오로지 나를 위해 쓰기로 작정했다. 첫달치 월급을 받고는 곧바로 매일밤 회합에 토론에 학습이 이어지는 세호의 방에서 독립해 나와 월세방을 하나 얻었다. 그러고는 마치 운명이 예정해둔 것처럼 한인혜를 만났다.

인혜 역시 대학을 다니다 공장에 들어와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다. 세호의 방에서 벌어지는 토론에 자주 참석해 얼굴은 알고 있었다. 활동에 적극적이지도 않고 어딘지 그늘이 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학 삼학년이던 한해 전에 공단에 들어와 나름대로 경력은 인정받고 있었으나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에 대해 회의하고 있었다고 나중에 말했다. 그녀의 발목을 잡은 것은 쁘띠부르주아 출신의 순응적 사고와 서구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대 앞 클래식 음악다방에서 불어판 원서를 보며 까푸치노를 마시는 게 어울릴 유형이었다. 어쩌다가 알게 된 운동권 남자를 따라 공단생활을 하게 됐지만 남자가 떠난 후에는 더이상 공활을 이어갈 이유도 없고 체질에도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독약 같은 회의(懷疑)를 심중에 품고 있는 사람들끼리는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법이다. 세호에게서 독립한 뒤 저녁마다 혼자 맥줏집에서 프로야구 경기를 보며 생맥주에 통닭을 먹던 나는 어느날 신호등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인혜를 보고는 말을 걸었다. 생맥주 오백 씨씨 서너잔에 잔뜩 취한 그녀를 자취방으로 데리고 왔고 자연스럽게 몸을 섞었다.

인혜와 함께 살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본색이 드러났다. 내가 국립대에 다니다 왔고 군대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안 뒤로는 둘이 결혼해 평온한 일생을 꾸려나갈 것을 희망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 결혼은커녕 오래 함께 살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단지 힘든 공단 생활을 위로해줄 섹스파트너일 뿐이었다.

방아쇠 당기는 집게손가락 한마디만 잘라. 그럼 군대에 안 가도 되잖아. 요새 단순한 손가락 절단은 공단 병원에서 수술해서 접합할 수 있으니까 당신 공장에 있는 고속 그라인더 같은 데 넣어서 아예 수술이 불가능하게 갈아버리는 게 좋을 거야. 눈 딱 감고 손가락을 집어넣기만 해. 몇초면 끝날 거야.

그녀는 섹스가 끝나고 난 뒤 나른한 여운을 즐기고 있을 때에 무슨 대단한 생각이라도 해낸 듯이 속삭이곤 했다. 내가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애착이 있었다면 그런 끔찍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입을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오늘도 그냥 온 거야? 왜 그렇게 결단을 내리지 못해? 나 사랑하잖아. 단 몇초야. 그것만 참고 견디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함께할 수 있어. 내일은 꼭 해야 돼. 약속! 안 그러면 오늘 그냥 떨어져서 잘 거야.

그녀는 내 오른손 검지 한마디가 자신의 젖가슴에 돋아난 사마귀라도 되는 듯 쉽게 말했다. 나는 그녀와의 섹스를 위해 다음 날에는 반드시 그라인더에 손가락을 집어넣겠다고 약속했다. 그녀의 몸은 형편없는 상상력, 음식 솜씨에 비하면 썩 괜찮았다. 빨리 달아올랐고 절정에 도달한 뒤에도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열심히 애무를 해주곤 했다. 그외에는 모든 면에서 평범하고 단순한, 천상 여자였다. 내게는 배우자로서든 애인으로서든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녀가 내게 가르쳐준 유일한 진실은, 남녀 간의 열정과 사랑은 쉽게 식어버리지만 육정(肉情)이 각인되면 쉽게 헤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혜는 몇십년을 살을 맞대고 살아야 알 수 있는 진실을 몇달 만에 깨닫게 해줬다. 운명의 그날, 그 일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녀를 떠나려고 했다.

시위가 끝난 자리는 태풍이 덮치고 사라져버린 듯 황량했다. 투석전에 쓰려고 깨놓은 보도블록이 발에 채였고 공기에는 매캐한 최루가스가 섞여 있어서 가만히 있어도 눈물, 콧물이 줄줄 흘렀다. 전경 기동대 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고 갑충을 연상케 하는 진압복 차림의 기동대 병력들이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갑호 비상령이 내려진 경찰은 시위 군중에 맞먹는 병력을 동원해 시위를 막는 데 성공했다.

보도건 차도건 광장이건 가릴 것 없이 바닥은 삐라와 구호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교통표지판에도 지하철 환기구에도 죽은 새처럼 종이가 걸려 있었다. 종이에 적힌 구호는 민주주의 회복, 독재 타도, 악법 철폐, 노동자의 해방을 외치고 있었다. 내가 국민이고 노동자인데도 그 구호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대통령을 향해 독재라고 하는 게 주제넘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노동자의 해방이라는 건 용어부터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돌이, 아니 그냥 근로자라고 불러주고, 노예도 아닌데 해방은 좀 그렇고 월급이나 올려준다고 하면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데서 네 동생 찾을 수 있겠냐? 남대문에서 김서방 찾기보다 힘들겠다.

길거리 가게의 깨진 유리창 뒤에서 불안하게 밖을 내다보고 있던 사람이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몸을 감췄다.

미안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만수는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왜 하필 나를 데려온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만수가 여동생을 찾으러 데모가 한창인 시내로 간다고 했을 때 따라나선 건 나였다. 공장 구내식당에 있는 티브이에서 이제는 일상 풍경이 된 시위를 하는 모습을 보던 중이었다. 뉴스를 진행하던 아나운서가 사회적 혼란을 조성하고 불법시위를 일삼는 대학생을 비롯한 불순세력의 시위를 엄단하겠다는 치안관련 부처 장관 합동담화를 앵무새처럼 읽고 있었고 배경화면으로 난장판인 시위 현장이 비춰졌다. 그때 만수가 갑자기 “으헉!” 하고 비명을 지르며 눈을 크게 뜨더니 내게 사무실로 가서 생산관리 과장한테 조퇴한다고 말해달라고 하면서 식판을 반납하고는 뛰쳐나가려 했다. 마침 근무 교대를 하고 난 다음이었던 나는 만수를 붙들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구르는 현장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수와 함께 시위 현장으로 전철을 타고 가면서 나는 만수에 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마디로 ‘어벙해 보이는 놈이 알고 보니 당수 팔단’이다.

만수가 생산직 고참보다 못한 월급에 관리직에는 거의 없는 야근, 휴일근무를 자청해 받은 수당까지 한푼도 쓰지 않는다 해도 대학생 둘을 학교에 보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퇴근하고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입사 후에 하루 네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뒷바라지를 해왔던 남동생이 온다 간다 말도 없이 가출을 하는 바람에 만수가 그 녀석 대신 다니던 대학에 가서 휴학 수속을 밟았다고 했다. 만수는 자신이 동생 아니면 어떻게 대한민국 천재들만 간다는 국립대에 들어가볼 수나 있었겠느냐고, 가슴에서 북처럼 쿵쿵 소리가 나고 손발이 다 떨리더라고 했다.

에라이 병신아. 너는 쓸개도 창자도 없냐? 그런 이기적인 동생 놈 뼈 빠지게 대학 공부 시켜봐야 나중에 첫 월급 받아서 내복이라도 하나 사들고 올 것 같아? 내 분명히 이야기하는데 그런 종자들은 아무리 한지붕 밑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우리하고는 종류가 달라. 그놈이 판검사, 장차관, 대기업 사장으로 출세를 한들 네가 죽을 끓여먹는지 밥을 끓여먹는지 상관도 안할 거다. 정신 좀 차려라, 제발.

내가 만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은 절대 아니었다. 좋은 부모 만나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머리 잘 굴려서 일찍 출세해가지고 결국 우리 같은 공돌이, 서민들 위에 군림하며 우리의 명줄을 좌지우지할 부류의 인간들이 그냥 싫었다.

그런데 만수보다 다섯살 어리다는 막내 여동생 옥희는 제 바로 위 오빠처럼 아주 싸가지가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만수가 혹시 시위 현장에서 마주칠지 모르니 얼굴을 봐두라고 보여준 사진 속 옥희의 얼굴은 바로 내가 꿈꾸던 이상형 그대로였다. 예쁘고 당차고 똑똑해 보이고 부지런하며, 무엇보다 사람 마음을 잘 이해해줄 것 같은 인상이었다. 갑자기 만수가 훌륭하고 존경스러워 보였다. 잘하면 처남 매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문제는 그 옥희가 며칠 전부터 가출 중이고 시위 현장에 있는 것이 티브이로 확인됐다는 것이고 옥희의 친구가 전화로 형사들이 집을 덮칠지도 모르니 집에 있는 불온한 문건이나 서적을 미리 치워두라고 했으며 실제로 형사들이 집에 쳐들어와 집 안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는 것이었다.

만수는 넓고 넓은 시내 한복판, 전쟁이 지나간 듯한 바닥을 헤집고 다니며 여동생의 흔적을 찾았다. 회색빛 제복의 넓은 등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땀으로 젖어 몸에 달라붙었다. 아직 남아 있는 최루가스 때문인지 동생 걱정 때문인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시위대가 끌려가고 도망치며 바닥에 떨어뜨리고 간 신발이나 가방 같은 것 중에 제 동생의 것이 없는지 살피면서 만수는 걷고 또 걸었다. 그런 게 있을 리 없고 있다 해도 명찰이 달린 것도 아닌데, 참 답이 없는 바보짓이었다. 다리가 아픈 건 둘째 치고 코와 목이 따갑고 눈물이 나고 피부가 따끔거려서 견딜 수 없었다.

야, 그만 가자. 아무 소용도 없다니까.

내가 몇번을 말해도 만수는 황소처럼 씩씩거리며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내가 “에이 씨발, 난 이제 때려죽여도 못 가” 하고 바닥에 주저앉자 그제야 내게 와서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막내 찾아가야 돼. 걔 못 찾으면 나는 사는 의미가 없어. 시골 있는 부모님 뵐 면목도 없고. 너는 상관도 없는데 따라다니기 힘들 테니까 먼저 들어가라. 차비는 있냐?”고 했다.

데모한다고 며칠씩 집에 안 들어오고 티브이로 데모 하는 거 찍힌 대학생 애들이 한둘이겠냐? 그런데 왜 너 혼자 미친놈마냥 이러느냐고? 다른 사람들은 식구도 없고 집도 없대냐?

갑자기 만수가 “맞다!” 하면서 내 어깨를 쳤다. 빗장뼈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만수는 어두워오는 길거리에 여기저기 주저앉아 식판에 배급받은 밥과 반찬을 먹고 있는 전경들에게 다가갔다. 제정신인가 싶었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다 언제든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회사 마크가 새겨진 점퍼에 작업복 차림이라 전형적인 생산직 사원, 근로자로 보이는 만수가 전경버스 안으로 끌려들어가 얻어터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경들은 밥을 먹다 말고 만수의 말을 듣고는 일어서더니 얘기 끝에 어딘가를 가리켜 보였고 만수는 따로 떨어진 지프차로 다가가 거기에 있는 군복 차림의 지휘관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십여분 넘게 담배를 나눠 피우고 마주보고 크게 웃기까지 하는 걸 보니 어이가 없었다. 만수는 지휘관과 함께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내가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현장에서 만수가 인간관계 좋다고 하던 게 다시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나 참, 너라는 놈은 안면에 철판을 깔았냐, 성격이 사교적이라고 해야 되냐. 네 여동생을 잡아다가 개 패듯 팼을지도 모르는 애들하고 대화가 돼? 너는 경찰이 성고문했다는 얘기도 못 들어봤냐?

어, 내가 원래 전경 출신이거든. 저기 있는 애들 다 내 후배 기수야. 내가 가서 수고 많다, 나 몇기라고 이야기하고 뭐 좀 물어보자고 하니까 지휘관한테 데려다주더라고. 애들 선배한테 참 친절하네.

그래서 뭐라는데?

지휘관이 자기들은 뒤에 와서 잘 모르는데 잡은 애들이 너무 많아서 대학별로 분류해서 관할 경찰서로 보냈대. 그러니까 우리 막내는 서대문서나 마포서에 가 있을 거래. 서대문서는 아까 그 지휘관이 파출소장 시절에 있어봐서 아는데 유치장 시설이 있을 만할 거라네. 별일 아니니까 훈방될 거 같다고도 하고. 근데 걔가 콘택트렌즈를 끼고 댕기는데, 세척액을 안 챙겨갔으면 눈이 안 보여서 며칠 고생할 텐데.

콘택트렌즈? 멋 낼라고 안경 쓰기 싫어하는 기집애들이 쓰는 거? 비싼 거?

응. 돈이 없어서 투과율 좋은 거 못해준 게 마음에 걸리네. 꼭 이럴 때 이런 일이 생겨. 속옷도 갖다줘야겠고.

참 나 기가 막혀서. 야 이 좆 같은 놈아. 넌 정말 쓸개도 없냐? 오빠라는 게 뼈 빠지게 일해서 대학공부 시켜주는 것만 해도 오감하지 뭐 멋 낼라고 콘택트렌즈 사달라는 기집애한테 좋은 거 못해줘서 미안해? 그렇게 멋 부리는 것들이 데모는 지랄한다고 해?

만수는 내가 씨근벌떡 소리치는 것을 한참 바라보고 있더니 또 미안하다고 하면서 경찰서에 같이 가줄 수 있겠냐고 했다.

내가 미쳤냐? 너희 바퀴벌레 같은 남매들끼리 잘 놀아봐. 너희한테는 인생이 장난 같지? 한번 죽어봐. 나는 간다, 이 씨부랄놈아.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잘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있었다. 내가 만수만 못한 게 또 있었다. 여동생은 내게도 있었지만 내 인생을 희생해서라도 무엇이든 다 해줄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만수는 자신의 시간과 노력이 동생들, 제가 사랑하는 가족에게 투입되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 가족의 강력한 결속에 내가 끼어들어갈 틈은 전혀 없었다. 나는 뼛속까지 공돌이고 노동자였다. 그놈은 곧 죽어도 관리직이었다.

 

결국 군대에 끌려왔다. 총 한방 쏘지 않아도 되고 훈련도 받지 않고 보초도 서지 않는다. 시키지도 않는다. 형식적인 반성문이나 일지, 편지를 쓰면서 편하게 군대생활을 하고 있다. 무언가를 쓰는 일은 살아온 날을 돌이켜볼 수 있게 해준다. 어떤 사람에 대한 생각, 감정이나 어떤 순간을 문장으로 표현하면 그게 좀더 선명하게 보이고 정리되고 객관적으로 보게 만든다. 이게 다 인혜 덕분이다. 뼈에 사무치게 고맙다. 만난다면 뼈가 으스러져라 껴안아주고 싶다. 그다음에는 눈을 마주보며 천천히 심장에 칼을 박아넣을 것이다.

내 입을 통해 이름이 불려지고 그 때문에 정보기관에 끌려가 학생운동,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에 주도, 참여, 동조, 호응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열몇명 가운데 가장 오래 실형을 살게 된 친구가 징역 이년이었다. 삼년을 썩어야 하는 군대보다는 감옥에서 보내는 이년이 짧긴 하다. 결과적으로 나처럼 군대 때문에 고민하던 친구들을 내가 도와준 셈일 수도 있다. 그들이 고마워하든, 원수로 생각하든. 물론 그중에는 군대를 다녀왔거나 안 가도 되는 친구들도 있다. 어느쪽이든 더이상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내가 그들처럼 감옥에 가지 않고 군대에 온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감옥에 갈 만한 잘못, 범법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방에서 불온 유인물 몇장과 그들이 금서로 분류한 서적이 몇권 나오긴 했지만 경찰도 나처럼 깨끗한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 깨끗함이 입증이 될 때까지의 한달 가량의 시간은 형기에도 군 복무기간에도 산입되지 않았다.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도 있지만 그 한달 동안은 그때까지 살아온 내 인생 전체보다도 길다는 느낌이었다. 지워버리고 싶은 날들이다.

그들은 내가 인혜가 동거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나를 인혜의 전 애인과 같은 거물급 운동권 핵심 총책으로 간주했다. 내가 한번도 그들의 수사선상에 오른 적이 없다는 게, 신선한 요릿감이라는 게 그들의 식욕을 돋우었다. 인혜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차마 기억하기조차 싫은 고문을 당했다.

불문곡직 나를 끌고 간 경찰은 집회, 시위나 학생운동을 담당하는 정보과 형사들이 아니라 대공과 소속이었다. 공산주의나 공산당, 공산국가에 공히 들어가는 그 ‘공’을 상대하는 ‘대공(對共)’이라면 나는 간첩 혐의를 받았거나 국가보안법 사건에 연루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활동을 하던 친구들이 아는 나는 고시에 합격하고 엘리트 코스를 걸으며 부잣집의 외동딸과 결혼하는 식으로 신분상승을 바라는 평범한 속물일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함께 신명을 바쳐 민주화운동을 하자고 설득할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내가 공활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세호가 몇번이고 “진심이냐” 하고 확인한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런 나를 국가보안법에 얽어넣으려는 것 자체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됐다. ‘하면 된다’는 위대한 제5공화국의 슬로건대로.

그들은 스스로의 조직을 ‘회사’라고 했다. 계급에 따라 사장, 전무, 부장, 과장 등이 있었다. 물론 그들은 제복 같은 건 입지 않았다. 사장은 만나지도 못했다. 내가 모든 것을 털어놓고 전폭적으로 협조를 하게 되어 한식구처럼 행동하게 된다면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차장이 해준 말이었다. 좋은 사람도 있었다. 과장이었다. 그는 남쪽 어디의 농고인지를 나온 것 같았는데 자신이 들어본 적도 없는 까마득한 산골 출신인 내가 다른 곳도 아닌 국립대학의 단과대 수석으로 합격해서 만점 가까운 학점을 받아온 것에 대해 감탄하고 칭찬했다. 그나마 나를 사람으로 봐준 건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나를 때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아픈지, 힘든지 견딜 만한지 확인하기 위해 나를 살폈다. 전문적인 고문 기술을 사용하는 부장이 내게 가한 혹독한 고문에 혹 내가 미쳐버리거나 치명상을 입지나 않을지 가장 신경 쓰는 사람도 그였다.

고문 가운데서도 가장 비용이 덜 들고 쉽고 효과가 좋은 방식은 몸을 매달아 자체 무게로 고통스럽게 만드는 ‘통닭구이’ 같은 종류다. 주먹과 발길질로 때리고 차는 방식은 거의 쓰지 않는다. 고문하는 사람이 힘이 들고 감정적으로 동요하거나 흥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몽둥이찜질, 젖은 한지를 얼굴 위에 덮어서 숨을 못 쉬게 하는 것,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은 전통적인 방식이면서 효과 면에서는 중간 정도 되었다. 전기고문, 관절빼기처럼 전문적인 도구와 기술을 사용하는 전문가들은 상대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그럴 때는 내가 인간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성이 아닌 본능만 남아 그들이 하라는 대로 광란하고 울부짖고 길들여지고 복종하고 시키는 대로 다 하는, 세뇌가 되는 짐승이었다.

그들은 지하실에 들어가자마자 옷부터 벗게 했다. 감옥이나 군대에서는 수의나 군복으로 갈아입게 하지만 그곳에서는 갈아입을 옷을 주지 않았다. 알몸으로 있는 게 기본이었다. 나는 땅을 기어다니는 이차원의 곤충이 된 것 같고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신처럼 느껴졌다.

너에게 이곳에서 지켜야 할 규칙에 대해 알려주겠다. 밥은 준다. 숟가락 젓가락은 없다. 인간이 아니니까. 밥 먹을 때 수갑을 풀어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배고프면 개처럼 아가리로 처먹어라. 개도 처먹으면 싸야지? 변기는 없다. 저기 라디에이터가 보이나? 저건 너에게 난방을 시켜주려고 설치한 게 아니다. 네가 오줌을 싸면 저기서 말리라고 놔둔 거다.

그나마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가장 인간적이었다. 고문 전문가들은 과묵했다. 욕설도 퍼붓지 않고 비웃지도 않았다. 잘 작동되는 기계처럼 고문을 수행했다. 그들에게서 나는 어떤 요구도 받지 않았다. 하기는 비명을 지르고 무조건 잘못했다 빌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바빴다.

나는 고문을 받기 전부터 이미 그들이 원하는 말은 무엇이든 할 준비가 돼 있었다. 내가 그들이 만족할 만한 과거 행적이며 활동, 사상, 인맥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또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 건지, 왜 나를 데리고 왔는지 몰랐으므로 자백하고 인정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기초적인 구타에서 신경이 마른 실뿌리처럼 하얗게 타버리고 내가 소멸하는 듯한 전기고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의 폭력을 모두 겪어야 했다. 나중에는 내가 기억하는 게 뭔지, 그게 맞기나 한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와 함께 동거하고 나서 두달쯤 된 어느날 인혜는 자신과 한때 연인 관계이자 동지였던 이정남이라는 자의 연락을 받는다. 이정남은 5공 호헌조치 철폐와 직선제 개헌을 위한 투쟁을 계기로 대세를 장악할 결정적 시기가 다가왔다고 하면서 공단에 지금까지 비축한 모든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모월 모일 모처에서 열릴 노동자・학생・지식인・민주화단체 등을 망라한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에 참가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미 부르주아적 세계관으로 회귀해 나와의 행복한 앞날을 꿈꾸는 인혜에게는 이정남의 지시를 수행할 의지가 부족했다. 인혜의 변화에 이정남은 내 존재를 알아채고 나를 버리고 와서 과업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으면 내가 어떤 식으로든 처단당하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단순한 인혜는 나를 위한답시고 이정남에게 갔고 그의 명령에 따라 화려하게 차려입고 핸드백 속에 중요한 문건을 넣어 지하철로 운반하던 중에 불심검문에 체포된다. 범국민대회를 앞두고 운동권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경찰과 검찰, 안기부 등 관계기관은 이정남을 체포하기 위해 출동하지만 이미 이정남은 간발의 차이로 도주하고 난 뒤였다. 어떻든 당일의 범국민대회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정남과 인혜에 의해 나는 대공용의를 가지고 있는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고문을 받으면서 나는 나라는 인간의 밑바닥, 뱃속까지 그들에게 까발려 보였다. 극한의 고통과 수치감과 두려움, 무력감에 나는 울었다. 무릎을 꿇다 못해 바닥을 기어다니며 그들의 구두 밑바닥을 핥았다. 빌고 또 빌었다. 완전히 항복했다. 무엇이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썼다. 마음으로부터 진실하게 그들에게 살려줄 것을 애원했다. 나는 매일 지나온 삶을 반성했다. 민주주의와 역사에 대한 어설픈 이해, 국가와 사회에 대한 이유 없는 불신, 민중과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얄팍한 동정심이 나를 거기까지 오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다시는 철없는 짓으로 사회의 혼란을 조성하는 일에 한발짝도 들여놓지 않을 것임을 진심에서 우러난 간절한 언사로 다짐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철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불순한 세력, 존재에 대해 조금도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 가는 부분까지 진술했다. 그들은 내가 말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잡아와 조사했고 그중 몇몇은 나보다 훨씬 양질의 정보를 토해냈다. 그 정보에 의해 또다른 빙산 하부가 발견되었다. 바깥세상은 직선제와 민주화로 방향을 틀었다는데 고문과 밀실의 세계는 그와 무관하게 돌아갔다.

그들은 나의 밑바닥까지 철두철미하게 조사했다. 내가 살던 모든 장소, 고향집은 물론 학교, 만수형이 다니는 공장과 회사, 옥희의 고등학교 시절까지 샅샅이 다 뒤지고 흔들고 털어봤다. 일제 때 할아버지가 불온사상 때문에 재판을 받은 것까지 다 나왔을 정도였다.

그들의 조사는 역설적으로 나의 결백을 증명해주었다. 다만 학생 신분으로 공장에 가서 위장취업을 한 것은 해명해야 했다. 내가 별게 아니라는 게 밝혀지자 그들은 오히려 실망하는 눈치를 보였다.

너도 이때까지 공단에서 한 짓이 있으니까 한두달 고생한 게 그렇게 억울하지만은 않을 거다. 이참에 군대나 갔다 와라. 옛날에는 녹화사업이니 뭐니 해서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반성문이나 쓰고 정신수양이나 하면 된다. 국립 휴양소에서 삼년 동안 편안하게 먹고 자고 쉬고 나온다고 생각해라. 마음먹기에 따라서 조용히 책이나 읽으면서 지낼 수 있을 거다. 여기서 살아 나간 사람들하고 우리는 정말 형제나 식구처럼 친하게 지낸다. 너처럼 좋은 학벌에 머리 좋고 사상이 제대로 교정된 친구는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을 거다. 너는 앞으로 평생 우리하고 같이 간다. 우리는 언제나 너를 지켜보고 있을 거고 한가족이 되는 거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우리를 찾아와라. 너 같은 인재가 우리들한테도 꼭 필요하다. 곧 다시 만나자.

전무가 회사를 나서기 전 해준 말이었다. 나는 목이 메는 것을 느꼈다. 그의 따뜻하고 두꺼운 손이 내 손을 잡았을 때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전무님, 감사합니다. 정말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들은 나의 순진한 사고와 가치관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주었다. 세상이 뭔지 알게 해줬다. 가족처럼 너절하고 오래 묵은 것들에 대한 애착,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추억과 과거에서 떨어져나오지 못하고 마른 젖을 빨고 있던 어린아이 같던 나를 현실의 어른으로 만들어주었다. 이제 나는 시골집의 울타리며 가족처럼 선천적인 족쇄로 작용하는 것들에 속박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선택한 새로운 가족은 함께 발전하고 함께 미래를 만들어갈 사람들이다. 나는 전역을 하고 나서 낡고 누추한 새둥지 같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가족이 나를 맞아주고 내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국가와 사회와 법의 영원성과 평안과 항상성을 훼손하는 불순한 세력, 끊임없이 준동하는 벌레와 바이러스를 척결하는 면역씨스템의 일원이 될 것이다. 나는 인혜 같은 하찮은 바이러스 때문에 재수없게 똥물이 튀긴 채로 살아가지 않겠다. 나는 과거의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영광에 둘러싸일 것이다. 살아남으리라. 살아남아 빛을 내리라. 맹세한다. 나는 매일 맹세로 하루를 시작하고 맹세한 뒤 잠이 든다.

 

수도권에서 가장 큰 K수출공단에서 가장 알짜기업으로 이름난, 그러면서도 87년 노동자대투쟁 시기에도 노조결성을 하지 못할 정도로 노동운동이 자리잡지 못한 회사에 출근한 지 한달, 창립기념일을 맞아 전직원이 야유회를 간다고 했다. 명목은 생산현장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직선제 쟁취 투쟁과 대선 정국의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직원들을 회유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하지만 공장을 하루 쉬면서 버스까지 대절해서 야유회를 간다는 데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야유회 가는 버스에 오르자 옆자리에 김만수가 앉았다. 노사협의회니 뭐니 하는 가짜 노조를 비롯해 노사 관련 문제를 전담하기 위해 인사부에서 새로 분리된 노무부 소속이라 주의하던 인물이었지만 나란히 앉아서 몇시간 동안 서로 이야기를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만수는 관리직으로는 특이하게 생산직하고 사이가 좋았다. 그런 점 때문에 노무부 창립 멤버가 되면서 대졸 공채직원보다 빨리 초급 간부로 승진했을 것이었다. 그래도 전처럼 여전히 생산직 사원들하고 형, 동생 하며 지냈다. 구내식당에서 생산직하고 섞여 밥을 먹고 식사 뒤에 족구도 같이 했다. 일반 관리직 사원들은 물론이고 공장장도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다. 사측 입장에서 김만수는 그만큼 이용가치가 크다는 얘기였다.

김만수는 노무부 내에 경조사 전담팀을 만들어서 예식장, 장의사와 연계하여 당사자를 대신해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씨스템을 갖췄다. 주말에 서너건씩 결혼식이 있었고 장례식은 그보다 더 잦았는데 만수는 언제나 그런 자리에 있었다. 심지어 부모의 회갑연, 아이들 돌잔치까지 대부분 참석했다. 어떤 때는 벙글벙글 웃은 얼굴이었고 어느 때는 제 부모라도 죽은 표정이었다. 초상집에서 항용 벌어지는 고스톱 판에서 가장 화투를 잘 치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잃거나 따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어떤 자리에서 진짜 실력을 보이는 걸 누가 봤는데 손놀림부터 잃고 따는 게 자유자재인 게 프로나 다름없다고 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이삼십분간은 고향이 어딘지, 군대는 어디를 갔다 왔는지 하는 한국 남자들이라면 흔히 하는 대화로 흘러갔다. 무슨 이야기 끝에 해가 바뀌면 있을 올림픽 이야기가 나왔다. 묻지도 않았는데 김만수가 자신은 88올림픽을 유치한 이후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모든 선거에서 계속 여당을 찍어왔다고 하는 것이었다.

김대리, 아니 만수씨, 나이가 몇이요? 솔직히 나보다 더 많은 것 같지는 않아서 그래요. 내가 네댓살 위구만. 미안하지만 내가 말 좀 편하게 할게. 싫으면 싫다고 해요.

아닙니다. 안 그래도 꼭 제 큰형님 같아서 아까부터 그러시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말씀 낮춰주세요. 강철 형님.

느낌이 시골 출신에 순박하고 말 잘 듣고 정이 많은 스타일이었다. 감정 표현이 직선적이고 사고가 단순한 현장 노동자들에게 신망이 갈 만한 인물이었다.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그거 방송에서 맨날 떠들어대는 말이잖아. 솔직히 말해봐. 88올림픽이 누구를 위한 건지, 만수씨 본인한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는 일인지. 그거 유치할 때 얼마나 많은 돈을 뿌렸는지 알고 있어? 군부독재정권이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스포츠 같은 데로 돌리고 저희들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재벌이고 안기부고 외무부고 가리지 않고 총동원해서 유치를 한 거라고. 아시안게임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같은 세계적인 행사가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건 좋은 거 아닙니까? 우리나라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세계에 보여주고 하면 국가 이미지도 좋아지고 수출도 잘될 거고 그러면 우리 회사도 발전하고…… 월급도 올라갈 거 같은데요.

만수의 이야기는 회사 노동자들의 평균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회사가 이웃한 다른 회사나 동종업체에 비해 조금 더 많은 급여와 복지를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현장 노동자의 개혁, 투쟁 의지는 마비되고 순치되어 개인주의로 빠져들고 있었다.

전두환이가 팔십년에 체육관선거에 단독출마해서 99.9퍼센트 득표를 해가지고 대통령이 된 건 알지? 그때 통일주체국민회의인가 뭔가 하는 허수아비들 이천오백스물다섯명이 딱 한명만 빼고 다 전두환을 찍었지. 그 한명은 반대를 한 게 아니라 어디 찍는 줄 몰라 실수를 해서 무효표가 된 거고.

그런데 어떻게 그런 숫자를 다 외우세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만수는 내가 ‘전두환’이라고 할 때마다 끔쩍끔쩍 놀라면서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냥 듣고만 있어. 대답하지 말고. 그때부터 컬러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했지. 쓰리에스가 뭔지 아나? 스포츠, 섹스, 스크린이야. 컬러텔레비전으로 프로야구 중계하고 야간통행금지도 해제하고 밤새도록 디스코텍에 술집이 영업하고 「엠마뉴엘」 같은 영화는 심야극장에서 할리우드 직배도 했지. 그런 게 다 국민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우민정책이야. 올림픽 유치한 게 바로 스포츠로 국민들 관심을 돌리려고 한 거라고.

저는 집에 텔레비전이 없는 채로 있다가 군대를 가가지고 텔레비전은 잘 못 봤습니다. 프로야구는 안 좋아하는데요. 축구는 좋아합니다. 사실은 우리끼리 하는 족구가 제일 좋고요.

만수는 묘하게 논점을 흐렸다. 직면하기 싫은 것인지도 몰랐다. 버스가 밀리기 시작했다. 앞에서 무슨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그로부터 서너시간 가까이 버스는 제 속력을 내기는커녕 걷는 것보다 조금 더 빠른 정도로 가다 서다 움찔거렸다.

올림픽하고 아시안게임을 유치한 뒤부터 경기장 짓네 도로공사 하네 하면서 얼마나 생돈을 썼어? 결국 국민이 낸 세금이지. 그 돈을 번 놈들은 또 누구냐고. 호텔이나 건설회사 가지고 있는 재벌들 아가리로 다 들어갔지. 재벌들은 그 돈을 노동자들한테 나눠준 게 아니고 저희한테 일감 몰아준 권력자들한테 몇백억씩 갖다바쳤지. 군부독재 후계자들은 그 망할 놈의 올림픽을 업적으로 해가지고 역사적인 반민주, 반민족의 중대범죄에서 축재 같은 파렴치한 범죄까지 지금까지 저지른 무슨 죄든 다 빠져나가려 하고 있지. 심지어 정권을 더 연장해서 평생을 국민 위에 군림하려고 하고 있는 게 지금 현실이야.

예예, 그렇게도 정리가 되네요. 확실히 이해는 못하겠지만요. 저는 서울서 학교 다니는 동생들 공부 시키고 시골 부모님 먹여살리느라고 그런 일에 대해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거든요. 그냥 나라가 발전하니까 좋은 일이다 싶었지요.

만수는 자신의 판단과 가치관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았다. 상대 논리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버리는 자기 나름의 대응법을 가지고 있었다.

몇년 전에 역사상 최초로 무역 흑자가 났다고 난리쳤잖아. 전두환이 무슨 성군이나 되는 것처럼 박정희도 못한 수출 흑자를 달성했다고 지랄발광을 다 떨었지. 지금 우리나라가 수출이 잘되는 이유가 뭔지 알아? 박정희, 전두환 덕분이 아니고 삼저현상 때문이야. 국제적으로 저환율, 저유가, 저이율의 삼저현상이 나타난 건 일본하고 서독을 견제하려고 미국이 달러 환율을 엔화나 마르크화에 비해서 확 낮춰버린 플라자합의 때문인 거고. 경제대국들끼리 치고받는 와중에 새우처럼 중간에 낀 우리가 콩고물 같은 이익을 조금 본 거야. 그리고 수출을 뭘 가지고 해? 우리 노동자들이 저임금에 살인적인 작업환경에서 제대로 못 먹고 못 입고 못 자고 타이밍 먹어가면서 만든 제품들이야. 재벌이나 군바리 출신 독재자들이 제 머리 깎아서 가발 한개 조립해봤냐고. 민주화도 노동자, 학생, 넥타이부대, 시민이 해냈지. 우리가 죽고 다치고 불구되고 잡혀가고 고문당하고 하면서 이런 환경을 만들어놓은 거야. 인간답게 살자고 외치는 선량한 노동자, 학생, 지식인을 때리고 고문하는 놈들은 우리 월급에서 떼간 세금으로 잘 먹고 잘살고.

그러자 만수는 내게 팔뚝을 걷어올렸다. 그러지 않아도 더운 날씨에도 왜 긴팔 옷을 껴입고 있는지 궁금해하던 차였다. 만수의 팔목에서 어깨까지 문어발의 흡반처럼 뭔가로 지진 자국이 여러개 나 있었다. 그는 작은 소리로 자신이 어떤 기관에 끌려가 담뱃불과 전기로 고문을 받았는데 국립대에 다니는 동생 때문이라고 했다. 회사에서 그걸 다 알았으면서도 자신을 자르지 않았다고, 자신은 회사에 충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 내 목소리를 만수와 비슷하게 낮추고 주변에 들리지 않게 속삭이게 되면서부터 조금씩 이야기가 트이기 시작했다.

강철 형님이 아는 게 많은 분이시니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육십년대말에서 칠십년대에 월남에서 미군이 밀림에 있는 풀하고 나무 제거한다고 무차별적으로 뿌려댄 독한 농약이 있다는데요. 그걸 살포하면 풀이고 나무고 벌레고 싹 다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그게 뭔지 혹시 아세요?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 말이군.

야유회 장소인 속리산 계곡 입구에 수십대의 버스가 멈춰섰다. 십리는 되는 국립공원 끝자락의 계곡에 우리 회사 사람들만 빼곡하게 들어차 앉았다. 노무부 주관으로 모든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부서별로, 생산라인별로, 친한 사람끼리 자리를 만들어 앉았다. 미리 준비한 삼겹살에 소주에 쌈과 된장, 쌀까지 합쳐 굽고 찌고 밥을 지어 먹고 마셔가며 겉보기로는 한식구 같은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적게는 대여섯명에서 많게는 이십여명으로 이루어진 자리가 칠팔십개 가까이 되었는데 만수는 그 모든 자리에 가서 술을 한잔씩 받아 마시고 고기를 한점은 얻어먹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노래를 부르든가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그게 노무부의 일개 대리가 하는 일이었다. 계곡 최상류의 마지막 자리에 사장과 임원들, 부장들이 앉아 있었다. 거기에 만수가 이르렀을 때 목은 쉬었고 받아 마신 음식으로 배가 농구공처럼 튀어나왔다. 한 자리에서 소주 한잔씩만 받아 마셔도 열병이 넘을 것이었다. 만수는 그 자리에서 사장과 임원들이 주는 잔을 다 받아 마셨다. 쓰러지지 않은 것만으로 감탄스러웠다. 사장이 자리를 둘러보며 말했다고 한다.

이게 바로 임원급 대리야. 보고 느끼는 게 없나?

 

유학을 가기로 결정하고 나니 아기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유학 비용을 대주는 대신, 결자해지라 하여 아기를 애 아빠에게 데려다주고 오라는 조건을 달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유학을 가기로 한 프랑스는 한국에서 입양아를 가장 많이 받아들이는 유럽 국가지만 내 아기를 입양 주선기관에 맡기고 싶지도 않았다.

감옥에서 아기를 낳고 나서 대통령 특사로 가석방되었다. 아기의 아버지인 김석수는 입대를 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제대할 때도 지났지만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하기는 그의 얼굴을 마주 보려면 나 또한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으므로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친형인 김만수 씨의 직장을 알게 됐다. 미리 전화로 연락하고 아기를 안고 공장 앞에 가서 기다렸다가 근무가 끝나고 나오는 그를 만났다. 깔끔하고 신경질적인 석수와는 전혀 다르게 수더분하고 착한 인상이라 형제인 것 같지도 않았다. 아기의 아버지가 김석수라고 밝혔을 때도 전혀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살아야겠기에 이렇게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 같지 않은 부탁을 드려요. 제가 유학에서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아기를 맡아주세요. 아기 아버지는 저를 만나려고 하지도 않을 것 같네요.”

만수씨는, 어쩌면 내 시아주버니가 되었을 수도 있는 그 사람은 아무 걱정 말라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첫번째 손주가 되었다고, 아기가 할아버지를 꼭 닮아서 자신은 금방 알아봤다고도 했다.

“제가 이름을 지어서 출생신고를 하긴 했어요. 한태준, 아니 김태준입니다. 사생아로 호적에 올라가 있고 성은 한씨로 되어 있지만요. 아기가 젖을 아주 많이 먹어요. 똥도 많이 싸구요. 하지만 아직 배탈이 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애가 욕심이 좀 많은 것 같아요. 누구를 닮았는지.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마치 가슴에서 젖이 방울져 흘러내리듯이.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에 내 표정은 웃고 있었으리라. 문득 꼭 한번만 석수를 보고 싶었다. 아기를 품에 안고 어르며 벙글벙글 웃음 짓는 이런 형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래도 가슴에 뜨거운 심장이 뛰고 있을 것 같았다.

 

강철 형님 덕분에 난생처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하고 있는 노동의 의미와 가치가 뭔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노동법 해설서에 밑줄을 쳐가며 공부하고 노트에 옮겨적은 뒤 저녁 모임에서 토론을 했다. 결론이 미진하면 강철 형님이 따로 보충을 해주었다. 요점은 이랬다.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노동삼권은 어떻게 보면 자본가나 권력자 같은 강자에게는 불공평해 보일 수 있는 법조항이다. 노동자는 자본가에 대항해서 노조를 만들 권리가 있고 단체교섭을 하고 조건이 맞지 않으면 쟁의행위를 할 수가 있다. 그 과정에서 그들에게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자본가와 사용자의 편이어야 할 법이 노동자에게 이런 권리를 보장해주고 있는가. 노동자들이 너무도 안 좋은 작업환경에서 살인적인 장시간노동을 하며 이들에게 착취를 당한 나머지 노동력을 상실하게 됐는데, 그들을 보충할 노동자마저 씨가 말랐던 거다. 노동자가 없으면 자본주의도 없다. 그래서 국가가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법적 권리를 마련해주게 된 것이다. 절대로 자본과 권력이 노동자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게 아니며 우리가 억지를 쓰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 투쟁을 하는 것은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다. 저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맞다. 우리가 옳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법으로 정해진 우리의 권리조차 다 찾지 못하고 있다.

내가 가족과 친구들한테 자랑스럽게 소개하던 내 회사, 내가 청춘을 바쳐 땀 흘려 일하던 산업현장이 철두철미하게 가진 자들 편에서 가난한 사람과 못 배운 사람과 무지한 사람을 착취하는 수용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 노동의 양과 질에 비해 형편없는 월급을 받아가며 가난과 헐벗음을 운명으로 알고 살아가도록 세뇌당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잘되면 회사 덕이고 못되면 우리 탓’을 하던 이유를 알고 나니 허탈했다. 내가 나의 권리를 쟁취하지 않으면 쳇바퀴 속의 다람쥐가 되어 던져주는 썩은 도토리를 먹으면서 죽을 때까지 무한반복의 착취구조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요새 바빠? 잘 안 보이네.

이따금 만수와 마주치면 빠뜨리지 않고 인사를 건네왔다. 받아주려고 해도 보는 눈들이 있었다. 그놈은 다른 데도 아닌 노무부 소속이었다. 실력도 없는 오년제 공전 출신이 대리가 된 건 사장에게 얼마나 잘 보였길래 그럴까.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건성으로 지나쳤다. 이젠 갈 길이 전혀 다른 인생이었다.

구내식당에서 일부러 나를 쫓아온 만수와 한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으면서도 노조와 조직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옆에서 밥을 먹는 만수의 입에서 나는 소리는 아무 생각 없는 돼지가 구유에서 주인이 던져준 먹이를 먹을 때처럼 시끄러웠다. 쭈걱쭈걱, 쩝쩝, 후루룩후루룩, 슈릅슈릅, 으드득으드득…… 식판을 내동댕이치고 일어서고 싶을 정도였다. 추접스러웠다.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공부하고 토론하며 앞일을 계획할 때에는 방귀 냄새도 향기로웠다. 정당한 절차를 차근차근 밟아서 노조 설립신고서를 작성했다. 제일 위에 내 이름이 들어갔다. 공장에서 일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을 때보다 훨씬 더 뿌듯했다. 개가 집 잘 지킨다고 주인이 쓰다듬어주었을 때 느끼는 기쁨과 내가 인간임을 자각하고 나와 내 친구들, 동지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때의 보람은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공돌이가 된 이후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87년의 ‘629 선언’을 가져온 ‘민주항쟁’ 이후 7월부터 전국, 전지역, 전산업에 걸쳐서 공장마다 파업, 가두시위, 공장 점거 농성 같은 노동운동이 화염처럼 번져나갔다. 그때도 우리 회사는 노조가 만들어지지 않고 ‘무사히’ 지나갔다. 만수 같은 인간이 사용자의 개가 되어서 꼬리를 흔들고 다니며 현장 노동자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조직 결성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우리와 경쟁관계인 다른 회사들이 파업과 가두시위 같은 쟁의행위를 하느라 일을 제대로 못하는 사이 우리 회사의 몫은 더 커져갔다. 그래서 회사에서 감사와 격려 표시로 보너스를 주기도 했다.

노조 설립신고서를 노동위원회에 제출하기로 정한 디데이 사흘 전에 만수가 나를 찾아왔다. 근무 끝나고 회사 앞 단골식당서 조용히 둘이만 만나자는 것이었다. 노조 설립은 어차피 결정된 일이고 무슨 소리를 할지 궁금해서 한번 나가봤다.

부장님이 그러시는데 외부에서 노동운동 하는 인물들이 회사에 잠입하고 선동하는 바람에 거기에 부화뇌동해서 노조 설립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너는 그거하고 아무 관계 없지?

식당에 먼저 와 있던 만수가 방에 들어가자고 하더니 문까지 닫고는 심각하게 말했다. 사장이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했는데 그 자리에서 사장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고 한다.

지금 회사가 망하느냐 마느냐 하는 비상상황이다. 공장 문을 닫으면 닫았지 노조한테 내줄 수는 없다는 게 회장님의 방침이다. 노조 설립을 추진하는 핵심인물과 외부에서 잠입한 불순세력을 찾아내서 회사 방침을 분명히 전달하고 노조 설립을 철회하지 않으면 사업장을 폐쇄하겠다고 하라.

아무리 회장이라고 해도 회사가 제 집도 아닌데 멋대로 문을 닫네 마네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똥줄이 타긴 하는 모양이었다. 어떻든 노조는 합법적인 것이고 설립 절차도 법에 따른 것이며 트집거리가 될 만한 일도 전혀 하지 않았다. 노조 설립을 이유로 회사 문을 닫는다는 게 명백한 불법이었다. 사장, 회장, 간부가 그렇게 무식한 인간들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그 무식한 자들의 개가 되어 뭘 염탐하려고 코를 벌름거리며 귀를 세우고 있는 만수를 보니 한심하다 못해 웃음이 나왔다.

너는 뭔데? 네가 뭔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느냐고?

그냥 물어보는 거야. 우리는 친구잖아.

친구끼리 뭘 물어봐. 다 알면서. 그냥 알고 있어. 네가 다치기 싫거든.

나는 네가 다칠까봐 그러는 건데. 내 마음을 모르냐.

지금 내가 하는 일을 너한테 하나하나 보고하라는 거냐? 그리고 나 몸보신하라고? 이 새끼 이거 중간에서 박쥐처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간첩질이나 할라구 나를 보자고 했구나. 꺼져, 가서 네가 그렇게 섬기는 사장인지 회장인지 하는 여자 구두 바닥이나 핥아라. 혓바닥 조심해라. 뾰족한 하이힐 굽에 뚫릴 수도 있으니까.

재수야.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야. 나는 회사도 너도 나도 우리 모두 잘되는 쪽으로 좋아졌으면 하고 이러는 거야.

병신아, 그렇게 다 좋은 게 어디 있냐. 우리가 응당 챙겨야 할 권리를 저쪽에서 떡 주듯이 주네 마네 하고 있는데. 노조 설립한다고 하니까 회사 문 닫는다고 하는 꼬라지 봐라. 지금 우리가 정당한 우리 권리 찾아서 부자 되자는 거냐. 작업환경 바꿔서 산재 발생하는 거 줄이자는 게 우리 몸 아끼자는 거냐. 최소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사람답게 살아보자는데 저놈들은 제 자식새끼 자가용 태워서 학교 보내지 못할까봐 우리를 싹수부터 작살내려고 하는 거잖아. 내가 마지막으로 충고할게. 네 손바닥을 봐. 하도 비벼대서 투명하지? 너처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면서 살다가 양쪽에서 씹다 만 껌 신세가 되는 거 순식간이다. 그러니까 너는 네 길을 가. 네 이쁜 여동생하고 똘똘한 남동생 데리고. 걔들이 너 호강시켜줄 때까지 뒤를 철저하게 잘 닦아주면서. 가보라고, 가.

만수 여동생 이야기를 하고 나니 어째 속이 탔다. 나는 작은 소주잔을 엎어버리고 물잔에 소주를 따라 마셨다. 다시 술을 시켰다. 네병째부터는 그냥 나발을 불었다. 만수는 술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할까 말까 눈을 껌벅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들었다가, 한숨을 쉬다가 결국 갔다.

많이 속상하셨나봐요. 그래도 좀 천천히 드세요.

젓가락도 대지 않은 채 식어버린 두루치기를 다시 데우고 소주를 쟁반에 담아 가져온 여자가 말했다. 주인아줌마의 친척인데 주방에만 있어서 잘 보지 못하던 얼굴이었다. 나이도 나보다 몇살 많아 보였다. 술김에 이름을 물었다. 박지숙이라고 했다. 가버린 놈 대신 술친구 삼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마구 쏟아냈다. 그날따라 식당에 손님이 없던 게 인연이라면 인연이 되었다.

일요일에 산에 같이 갔다. 지숙은 국산 청바지에 티셔츠였고 국산 운동화를 신었다. 그때 나는 뒷주머니에 말대가리가 그려진 진짜 명품 청바지 ‘조다쉬’가 아닌 닭대가리가 그려져 있어서 ‘쪼다쉬’라고 불리던 가짜 청바지를 입었고, ‘나이키’ 운동화의 번개 모양 상표를 거꾸로 그린 ‘사이키’를 신고 있었다. 그게 대비되면서 어쩐지 무안했다. 학원에서 정식으로 요리를 배웠다는 그녀가 계곡에서 구워준 삼겹살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술에 취해 빌빌거리는 나를 부축해서 산 아래까지 데리고 왔고 집에도 바래다주었다.

만난 지 두달만에 우리는 여관에 들어갔다. 숨을 헐떡이며 나란히 누워서 손을 잡고 있던 그대로 불심검문을 당했다. 주황색의 낡은 베니어판 문짝이 불쑥 열렸고 정복을 입은 경찰관이 다짜고짜 들어오더니 휴지통을 뒤져서 정액이 든 콘돔을 찾아냈다. 이어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옷을 입으라고 했다. 기가 막혔다.

경찰이면 다요? 영장 좀 봅시다.

내가 항의하자 노조 설립신고 뒤부터 나를 따라다니던 사복형사가 등장했다. 정말 무슨 삼류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 쓰레기 같은 상황의 주인공이 나라는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야 이재수, 너는 영장 있는 줄은 알아도 경찰직무집행법이 있는 줄은 모르지? 우리한테는 다 그럴 권한이 있단 말이다. 노조 만들고 노동운동 한다는 투사께서 대낮부터 여관에서 낮거리로 떡이나 치고 있구만. 니들 노동운동 한다는 놈들은 다 그러냐? 동네방네 다 퍼뜨려줘?

이것 보세요! 이건 노조하고 전혀 상관없는 사생활이에요.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요. 대한민국에서 청춘남녀가 여관에 들어가면 안된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 자식이 입만 살아가지고는. 미싱으로 주둥이를 확 박아버릴까보다. 보자, 우리 사랑스러운 박지숙 씨, 당신 결혼했어, 안했어? 젊은 놈하고 바람피우느라 바빠서 남편이 사우디에서 돌아온 것도 모르지?

지숙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남편과 별거 중이라고 했다. 어쨌든 법적으로 유부녀인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정말 겁내는 것은 법적인 처벌이 아니라 같은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갈 수치스러운 소문이었다. 그들은 나의 약점을 정확하게, 확고하게 잡았다.

이틀 뒤 나는 더이상 노동운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서약서와 사표를 쓰고 풀려났다. 나는 인생의 패잔병이 되어 내 이십대를 집어삼킨 회사와 공단을 떠났다.

단 한사람, 만수가 나를 전송했을 뿐이었다. 만수만이 내 사정을 모두 이해해주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지기(知己)’라고 한다고 들었다. 만수는 내 이십대의 진정한 지기였다. 우리는 말없이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울면서 천천히 걸어 거대한 문어발 같은 공단오거리를 빠져나갔다.

 

담배를 많이 피우나? 용돈이 많이 들 텐데. 건강에도 안 좋을 거고. 내가 담배를 안 피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담배 피우는 사람이 정신적으로도 약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

만수 오빠를 만나기 전에 나는 정형철에게 단단히 준비를 하게 했다. 오빠가 셋인데 하나는 죽고 하나는 행방불명이고 남은 오빠가 집안의 기둥이라는 것, 시골 사는 부모님을 대신해 서울에서 부모 역할을 하고 있으며 오빠를 설득하지 못하면 우리 두사람은 절대로 결혼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오빠의 성격, 말투, 버릇, 직장 등에 대해 세세하게 일러주었다. 하지만 형철은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야학에서처럼.

그는 대학 삼사학년짜리 야학 교사들에게서 노동법이든 민주화에 관한 것이든 하나를 배우면 서너가지를 더 아는 것 같았다. 한 학기가 지나지 않아서 그는 야학 교사들에게서 ‘형님’ 소리를 들어가며 오히려 그들에게 노동현장의 현실이 어떤지를 가르쳤다. 그는 야학 교사들을 순진한 맹탕이라고 불렀다. 대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낭만적이고 현실성 없는 이론을 철저하게 까부쉈다. 지방에서 농고를 중퇴했다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하기는 지방이니 서울이니 편을 가르고 고졸이니 중퇴니 하는 학력에 얽매이는 것 자체가 순진한 발상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의 명석함과 유창한 논변에 호감을 가졌다.

하지만 형철은 경양식 식당에서 만수 오빠를 처음 대면했을 때 입도 벙끗하지 못했다. 평소에 그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기껏 애꿎은 담배만 피워댔다. 내가 오빠에게 담배를 피워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하기는 했다. 형철이 세대째 담배를 피워물자 만수 오빠가 꺼낸 말이 그것이었다.

형님, 보잘것없는 저의 건강까지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아니 이 자리에서부터 칼같이 담배를 끊겠습니다.

형철은 말을 끝내자마자 피우던 담배를 동강을 내서 재떨이에 버리고 탁자 위에 있던 담뱃갑도 비틀어서 안에 들어 있던 담배를 모조리 부러뜨렸다. 오빠가 입맛을 다셨다.

그것도 돈인데. 좋아하는 사람한테 갖다주지 그러나. 어쨌거나 끊고 맺는 게 분명해서 나는 좋구만. 내가 그러지 못해 그런가.

내가 형철에게 매력을 느낀 부분이 그런 거였다. 내가 아는 남자들은 대체로 심약하고 생각이 많았다. 형철은 생각보다는 행동이 먼저였다. 그것도 파격적이었다. 그는 분위기가 됐다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형님, 저는 이런 단순한 인간입니다. 형님, 이 시간부로 담배를 끊은 저한테 옥희 씨를 평생 반려자로 모시고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비록 불알 두쪽밖에 없는 놈이지만 제 한 몸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옥희 씨 절대로 고생시키지 않겠습니다. 세상 사람들 다 부러워하도록 알콩달콩 잘 살겠습니다.

거기까지는 정말 진심인 것 같았다.

아니 내 말은 담배가 건강이나 가정경제에 해롭다는 말이지, 자네를 한식구로 받아들이겠다고 이 자리에서 결단한 게 아니라네. 너무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게. 그러나저러나 두 사람은 어디서 만났나?

단벌뿐인 오빠의 양복은 소매가 반질거렸고 와이셔츠 칼라는 낡아서 보풀이 일어나 있었다. 직장생활 칠년 차인데 아직 넥타이를 매는 게 익숙지 못해서 넥타이를 처음 산 곳에서 적당한 길이로 묶어달라고 한 뒤에 매듭을 풀지 않고 계속해서 사용한다고 했다. 하나뿐인 여동생으로서 그런 건 내가 돌봐줘야 했겠지만 나는 오빠가 다 알아서 할 걸로 생각했다.

새 식구가 된 태준이 돌보기부터 청소, 음식, 설거지, 빨래처럼 보통은 여자들이 집안에서 하는 일을 나는 거의 다 오빠에게 맡겼다. 오빠는 내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대학생이 되고 나서 마지막에 가출을 할 때까지 엄마처럼 주부처럼 살림을 다했다. 아버지처럼 가장처럼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왔고 식구를 부양했다. 오빠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런 일을 해왔기 때문에 그냥 관성적으로 지나쳤다. 나는 그저 내 생각, 내 할 일에만 골몰했다. 새삼스럽게 미안했다.

우리, 야학에서 처음 만났어요. 오빠, 기억나요? 내가 대학 들어갔을 때 하비루교회에서 하던 야학에 들어간 거요. ‘하비루’가 성 바깥에 사는 사람, 신분이 낮고 천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거기서 ‘히브리’라는 말이 나왔다고요. 그때 이 사람하고 야학 교사를 같이 했거든요. 교사들끼리 야유회도 가고 농활도 가고 하면서 친해진 거예요.

고맙고 미안한 마음은 속에 묻어둔 채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형철은 야학에 나온 지 일년이 지났을 때부터 야학에서 알게 된 노동자들과의 알음알음을 연결선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각 기업의 노조를 지역과 업종, 투쟁 방향에 따라 종횡으로 조직하고 현장교육을 맡았다. 그런 그에게 월급을 줄 기업은 없었다. 어떤 노조에도 소속되지 않았으니 지원도 없었다. 신분을 잘 감춰오긴 했지만 국민 세금으로 월급 받으며 국민이 사람답게 살고자 벌이는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것을 보람으로 아는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였다.

그러면 앞으로 뭘 하면서 우리 옥희를 잘 모시고 살 텐가? 우리 형제 중에서는 저 애가 막내라서 특별하기도 하지만 난 내 평생 가장 소중한 여자가 바로 우리 옥희라고 생각해. 어머니나 할머니한테는 죄송스럽지만, 그분들은 지는 해고 옥희는 떠오르는 해 아닌가. 그래, 앞으로 무슨 좋은 계획이 있는가? 그걸 들어보고 내가 부모님한테 잘 말씀을 드릴 테니.

만수 오빠는 정말 미래의 장인이 사위를 닦달하듯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때 나는 형철의 눈에서 빛이 반짝하는 것을 보았다. 어딘가에 켜져 있는 불이 비친 것이겠지만 그건 내게 그와의 첫 만남을 연상시켰다. 나를 보며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그 반짝임이 그를 남자로 의식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이었다. 그랬다. 내가 혼자 며칠째 지독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병문안을 하러 왔다면서 설렁탕을 냄비에 담아 왔다가 죽은 듯 잠들어 있던 나를 덮친 그를 용서한 것은. 외로웠다. 힘들었다. 무서웠다. 무릎 꿇고 비는 인간이 의지가 될 정도로.

형철은 노동 관련 단체 몇군데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고 고르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이후 달라진 국내외 정세와 환경에 맞춰서 적절한 운동을 모색 중이라고도.

뭐 나도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갈 첨단산업인 자동차 관련 회사에 다니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고 또 내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는, 역사적인 발전을 이뤄냈다는 자부심이 있지. 이때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우리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거대한 역사의 전진에 동참할 수 있었겠어. 조상님들하고 부모님들한테 정말 고마운 일이야. 우리 옥희는 나하고는 또 차원이 달라요. 엘리트 지식인으로서 자신과 전혀 다른 처지인 공장 근로자의 권익을 지켜줘야겠다, 민주화에 기여해야겠다 해서 과감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뿌리치고 운동의 전선에 뛰어들었거든. 아무리 막내 여동생이고 어리다 해도 참 존경스러울 뿐이야.

나는 온몸이 조그맣게 줄어드는 것 같았다. 형철은 자신의 페이스에 오빠가 끌려오는 것에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만큼 만수 오빠는 남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아니 만수 오빠 말대로라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 여동생의 말이니 믿었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니까 형철을 믿었다.

자네는 아직 한창 젊으니까 어떤 분야든지 성실하게 부지런히 살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게.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고. 그게 다 경험이고 성공의 디딤돌이 되거든. 긍정적으로 쉼 없이 전진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길을 활짝 열어주지. 두사람이 서로를 깊이 신뢰하고 목표를 향해 손잡고 전진하면 못 이룰 게 없을 거야.

형님, 구구절절 맞는 말씀입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명언으로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형철은 이미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만수 오빠는 내게 윙크를 해 보였다.

아, 오빠, 난 사실 자신 없어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구요. 그냥 지금은 저 사람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네요. 느닷없이 모든 걸 다 그만두고 결혼을 하려는 건 한번뿐인 제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 나도 알아요. 저 사람 아이를 가졌어요. 이번이 처음도 아니지만 더이상 아이를 지우고 싶지도 않아요. 저 지쳤어요. 나도 결국 어머니, 할머니, 할머니의 어머니의 딸인가봐요. 그냥 내가 믿고 있던 것들이 허물어지고 쓰러지고 내가 알던 사람들이 떠나가는 게 허탈하고 허망해서 그러는 건지도 몰라요. 오빠, 사람은 꼭 앞으로 나가기만 해야 될까요? 그냥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 가치가 세상과 어긋난다 하더라도 그걸 가지고 그냥 살면 안되는 것일까요? 오빠도 어서 좋은 분 만나서 가정을 이루시기를 바라요. 오빠의 기대를 배반하면서 염치는 없지만 제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에요. 오빠, 정말 고마웠어요. 미안합니다.

형철이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구겨진 담뱃갑을 들고 일어서고 난 뒤 만수 오빠가 내게 “너 정말 저 친구가 좋으냐? 결혼하고 싶으냐? 네가 좋다면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성사시켜주마” 했을 때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없이 다정한 오빠의 눈길과 목소리에 나는 차마 나의 황폐한 속마음을 보여줄 수 없었다.

네. 좋아요. 좋아해요, 오빠. 고마워요. 고마웠어요. 늘 감사해요.

나는 울음을 삼키며 되도록 짧게 말하려 애썼다.

 

속이 상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막내딸을 웬 천둥벌거숭이 같은 본데없는 사내 녀석에게 넘겨주는 게 나라고 마땅했을 리 없다. 그렇다고 아예 그 먼 곳까지 인사하러 온 사윗감과 딸을 보려고도 하지 않고, 또 기왕에 다 정해진 혼사인데 결혼식장에 가지 않겠다고 뻗댈 것까지 있는가. 남편이 내놓은 이유는 아직 장가도 가지 않은 제 오빠들을 놔두고 어린 막내 딸년이 그렇게 빨리 시집을 못 가 난리냐, 처녀가 애라도 배지 않았으면 무슨 까닭이 있길래 그러느냐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보면 모든 게 트집거리가 될 뿐이다. 맏딸을 결혼식장에 혼자 들여보냈더니 이번에는 막내딸까지 그리하게 생겼다. 일찍부터 허리가 꼬부라진 시어머니에게 낯빛부터 심술궂은 남편이며 제 동생 시집가는 것도 보러 가지 못하게 정신이 없는 딸을 맡기고 가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울로 가는 데는 이제 버스를 한번만 타면 된다고 했다. 그 버스터미널은 맏아들 백수가 중학교 때부터 타고 내리던 버스 차부가 있던 곳이다. 속이 상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러 가던 백수를 마지막으로 전송한 곳이다. 가슴이 대바늘로 꾹꾹 찌르듯이 아파와서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요즘도 백수 생각이 들기만 하면 그냥 제자리에 앉은 채 한동안 꼼짝할 수가 없다.

터미널의 변소는 수세식으로 바뀌었다는데 재래식일 때보다 훨씬 더 더러웠다. 재래식일 때와 다른 건 벽을 다 차지하는 거울이 걸려 있다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백발의 노파가 나인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속상했다.

버스는 절반 가까이가 국도를 우회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빠르고 편한 고속도로로 타고 갈 수 있다고 했다. 버스가 구불거리는 고개를 오르내릴 때, 생각할수록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기구하며 박덕한가 눈물이 쏟아졌다. 손님이 가득 차다 못해 서서 가는 사람까지 있었지만 아는 얼굴 하나 없었다. 식구가 많으면 뭐하고 경사가 있으면 뭘 하는가. 나는 어찌 이리 혼자 외로이 막내딸을 시집보내러 가고 있는가. 어디서 그렇게 많은 눈물이, 콧물이 숨어 있었는지 모르게 내내 소리 없이 흘러나왔다. 아무도 없다면 내 서러운 눈물과 통곡으로 버스 하나를 가득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결혼식장은 만수가 예약한 서울 변두리의 커다란 예식장이었다. 금희가 제 남편을 데리고 왔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몸에 꼭 끼는 양복을 입은 맏사위는 내게 구십도로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만수와 악수를 나누었다. 금희에 비해 키가 작았지만 사람은 성실해 보였다. 여전히 트럭을 몬다고 했다. 그러면 뭘하나. 애를 업고도 보름달처럼 훤한 맏딸이 아까웠다.

어디 근본도 없는 인간인지 신랑 하객은 아주 가까운 친척을 합해서 열명도 되지 않았다. 신랑이 민주화운동인지 노동운동인지로 오래도록 수배를 받았고 쫓겨다니느라 친구들과의 연락이 거의 끊어져서라고 했다. 남 탓할 것도 없이 신부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도 오지 않았다는 걸 알 텐데도 사돈 쪽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게 고마웠다. 하지만 무정한 남편의 말이 맞긴 맞았다. 만수의 팔을 잡고 식장에 입장하는 옥희의 배는 처녀의 배가 아니었다.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신부의 곁에 섰을 때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옥희의 결혼식에 온 하객은 같은 예식장의 다른 결혼식에 온 사람들의 두배 가까이 되었다. 거의 전부가 만수의 회사와 회사와 관계된 곳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손님이 너무 많아서 식장의 자리가 모자랐고 준비한 식권이 부족하다고 입씨름을 벌일 정도였다.

부조금은 대부분 신부 몫으로 들어왔다. 그 돈을 신부에게 주어서 신접살림을 사는 데 보태게 할 것이라고 했다. 결혼하면서 신랑 측에서 준비한 것은 보증금 이백만원에 십오만원짜리 월세방을 빌린 것뿐이었다. 그 보증금마저도 만수가 빌려준 것이라고 했으니 부조금이 아니었으면 두사람은 신혼살림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게 뻔했다. 말을 듣고는 속이 상할 대로 상했다. 내 배 아파가며 낳은 세 아들 발꿈치에도 못 미치게 생긴 신랑이 꼴도 보기 싫었다. 남편이 오지 않아서 폐백을 혼자 받을 수 없다 핑계하고 나와버렸다. 어딘지도 모르게 걷다보니 만수가 태준이를 업고 허둥지둥 따라왔다.

어머니, 기왕 오셨으니 며칠 주무시고 가셔야지요. 집에 담요, 이불까지 다 깔아놨습니다. 우리 태준이 많이 컸지요?

아이는 제 큰아버지 품에서 떨어지려 하지를 않았다. 내가 할머니라고 해도 눈길 한번 주고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첫 손자라는데도 정이 가지 않았다. 이게 무슨 경우인가. 정작 맏아들은 죽고 없고 맏이가 된 둘째아들은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어디 가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동생의 아들을 키우며 맏손자요, 하고 있으니. 콩가루 집안이요, 소 덕석처럼 너덜너덜한 꼬라지. 눈물이 돌았다.

일없다. 소여물도 줘야 하고 닭들 살쾡이 밥 안되게 닭장에 모아들이기는 누가 하며 개밥은 누가 주겠나.

어머니, 집에 사람이 몇인데 그러십니까.

사람이라도 다 사람이더냐. 옳은 사람이 사람이지.

만수가 싱긋이 웃었다.

어머니도 학자십니다. 꼭 할아버지처럼.

역정이 났다.

여기서 네 잘난 할애비는 왜 나오는 거냐. 그 어른 아니었으면 내가 일찍이 팔자를 고쳤을 것을.

그런 수작을 하느라 시간을 괜히 끌었던가보았다.

엄마! 엄마! 잠깐만요, 기다려요!

기어이 옥희가 긴 한복 치마를 질질 끌며 쫓아나왔다. 허우대만 멀쩡한 사위가 갑자기 길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옥희가 부른 배를 하고 땅바닥에 주저앉고는 같이 절을 올렸다. 배 속의 아기가 어찌 될까 겁이 나서 길바닥에서 절을 받으면서도 속상했다. 눈물이 흘렀다.

장모님, 제가 이제 평생 장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겠습니다. 아들이다 생각하고 불러주세요. 형철아, 하고 불러보세요. 어서요.

막 사위가 된 인간이 나를 업고는 빙글빙글 돌면서 말했다. 본 지 얼마나 된다고 그리 곰살맞게 구는지 도리어 의심이 들 뿐이었다. 나는 “빨리 내려놓으소, 지발 좋은 일 하시느라고 날 내려놓으소!” 하고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사람들이 구경거리라도 난 듯 모여들었다.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큰사위가 자신의 차례라며 소매를 걷고 있었다. 아, 눈물이 났다. 태준이를 무동 태운 채 만수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상처에서 나는 진물처럼 눈물이 흘렀다.

 

수민이를 낳고 나서 남편의 고향에 혼자 살던 시어머니를 모셔왔다. 시어머니는 스무살에 결혼해서 마흔살에 남편을 잃었다. 시아버지는 월남한 분이었고 시어머니보다 스무살이 더 많았으며 이북에 이미 처자가 있었던 터에 이산가족 방송 이후 속병이 나서 환갑 잔치 치르기 직전 세상을 버렸다. 남긴 것은 방 두칸짜리 집이었는데 남편이 십대에 집을 떠난 이후 그 집을 담보로 빚을 내서 생활하던 끝에 알뜰히 다 들어먹고 난 뒤에 우리의 결혼을 계기로 아기를 봐주겠다고 합류를 하게 된 것이었다.

만수 오빠가 준 돈으로 얻은 신혼집, 신혼살림에 보태 쓰라고 준 부조금이 달아나는 데는 일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남편은 일할 곳을 찾아보기는 했지만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했다. 노동현장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서 일이 될 만한 게 없었다. 노동운동하다가 대학 나온 여자와 결혼했으니 체면이 있지 전처럼 공장에서 전자부품 조립하는 생산직은 못하겠다고 했다. 키만 삐죽 컸을 뿐 정작 몸이 약해서 건축현장에 하루 갔다 오면 사흘은 앓아누웠다.

네 잘난 오빠래 그리 좋은 회사 다닌다면서 매제 자리 하나 알아봐주지 못하간? 경비도 좋고 수위도 좋단다.

시어머니는 남한 출신이면서도도 굳이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고향 평안도 사투리를 썼다. 듣기에 어색한데 내용은 직설적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거침없이 하는 성정이었다. 그 말 때문은 아니지만 살길이 참 막막하다 싶어 만수 오빠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공장 앞 커피숍에서 만수 오빠와 마주 앉고 보니 차마 입에서 취직자리를 부탁한다는 말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엉뚱한 말이 나왔다.

오빠 회사 일도 바쁘고 총각 살림에 태준이 보기 힘들 텐데 아기 맡는 집에 보내는 셈 치고 저한테 맡기세요. 세 식구가 다 놀고 번갈아 보면 되니까 바쁠 것도 없어요. 수민이하고 똑같이 잘 키울게요. 주말에 데리러 오시면 되고요.

만수 오빠는 반색을 했다. 그러지 않아도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 태준이에게 신경을 많이 못 써서 미안해하던 참이라고 했다.

시어머니는 내가 수민이를 업고 태준이까지 혹처럼 안고 둘째를 밴 불룩한 배를 하고 집으로 들어오자 눈이 커다래졌다.

아새끼 봐주는 게 공짜는 아닌 건 알고 있네? 식구 사이에서도 계산은 잘해야 하는 법이니까니.

시어머니로부터 들었던 말 가운데 가장 가슴 아픈 말은 그것이었다. 당신이 아기들을 봐줄 것도 아니면서, 한번도 아기를 웃는 눈으로 본 적이 없으면서.

다음 날부터 독하게 마음먹고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긴 다음 집 근처에 있는 골목시장 좌판에 나갔다. 근처 산이며 들에서 뜯어온 나물이며 채소를 비닐봉지에 담아서 파는 노점부터 시작했다. 그래도 몸뚱이가 젊고 눈이 밝아서 그런지 같은 푸성귀라도 조금 더 낫고 많고 야무지다 해서 갖다놓는 족족 잘 팔렸다. 옆에서 안 팔리는 채소를 내게 부탁하기 시작하면서 바빠졌다. 수현이를 낳고 나니 아이 셋을 장사하며 감당할 수 없었다. 남편은 아이 보는 일 말고는 시어머니 말마따나 누진뱅이(게으름뱅이)가 다 되었다.

새벽에 찬거리를 사러 나온 아줌마들과 십원 가지고 옥신각신하며 깎는다 못 깎는다 하고 때 묻은 돈을 만지던 손을 씻지도 못한 채 아기를 안아들고 젖을 물리고 양푼에 열무김치와 밥을 비벼먹던 그때가 그래도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시절인 것 같다. 이러려고 대학까지 가고 이론을 배운다며 원서 복사해 읽고 실천방안 토론하고 농활 떠나고 야학을 하고 공장에 들어가고 했는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내 품에서 배부르게 젖을 먹고 방긋 웃으며 잠든 아기 얼굴을 보면 만가지 시름이 다 녹는 기분이었다. 그리 오랫동안 이론이고 실천이고 떠들어봤자 머리에 아무것도 들어간 게 없는, 한심한 여자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초등학교도 못 나온 우리 엄마, 산골짝에서 화전을 일구며 여섯 남매를 키운 엄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토록 힘들고 모진 삶을 꾸려간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은 짧았다. 남편이 경찰에 잡혀가던 날, 할머니와 아버지가 한날 돌아가셨다.

 

나는 결혼에 한번 실패했고 만수 씨 친구와 사귀는 바람에 함께 만수 씨를 만난 적도 몇번 있었다. 그때 만수 씨는 나를 ‘제수씨’라고 불렀다. 두사람은 나이도 비슷하고 회사 입사도 비슷하고 형제처럼 친했다. 그 인간이 경찰에 잡혀간 이후 갑자기 연락도 끊고 사라지고 나는 나대로 식당 그만두고 이혼까지 당하는 바람에 서로 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 몇달 동안 속을 끓이다가 그래도 사람 사는 게 이런 게 아니지 싶어 만수 씨를 찾아갔다.

만수 씨 덕분에 회사 구내식당에서 일하게 됐다. 한달 월급 삼십만원에 의료보험밖에 안되는 자리였지만 그것도 어려운 일 있으면 찾아오라는 만수 씨의 말대로 한 덕분에 얻어걸린 자리였다.

만수 씨는 사장의 신임을 받고 있어서 말 많고 탈 많은 구내식당 운영까지 책임지고 있었다. 그때는 구내식당 분위기가 참 좋았다. 음식 가지고 절대 장난을 못 치게 콩나물시루, 두부 몇판 들여오는 업자들에게서 한푼도 뇌물을 받지 않았다. 음식 재료를 실으러 시장에 트럭을 가지고 갔다가 봉투를 들고 뒤쫓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골목을 급히 빠져나오다 접촉사고를 낸 적이 있을 정도였다. 재료가 좋고 근무환경이 좋으니 음식이 맛있고 푸짐했다. 맛있다고 소문이 나서 이웃의 공장에서도 밥 먹으러 오면 안되겠느냐고, 공장 바깥에 식당을 내고 음식을 팔라고 하는 요청까지 들어왔다. 먹는 게 맛있고 좋으면 노사문제 절반은 해결된다고 했다. 그래서 회사 분위기도 아주 좋았다. 노조가 있긴 했지만 분규 한번 없었다.

만수 씨는 명절날 들어오는 구두표 같은 상품권은 사양하다 못해 받아서는 자신은 가지지 않고 구두 많이 닳은 사람부터 순서대로 나눠줬다. 그것도 평소에 사람 하나하나를 잘 지켜보지 않으면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구내식당 아줌마들이나 여직원들 사이에서 만수 씨는 노총각에 사람 좋고 하니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공장 전체 인원 중 여자는 서른 명도 안되는데 그중 삼분의 일이 구내식당에 있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여자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났다. 만수 씨와 내가 전부터 사귀던 사이이고 둘 사이에 아기가 있는데 그 아이를 만수 씨가 키우고 있다는 식이었다. 내가 딴 남자하고 바람이 나서 아기를 버리고 떠나갔다가 그 남자한테 싫증이 나자 다시 만수 씨에게 빌붙어 피를 빨아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문이라는 게 원래 어처구니없는 것이지만 해도 너무한다 싶었다. 건드리면 더 커질 것 같아서 아예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달이 지나기도 전에 소문은 온 공장 안에서 기정사실이 되었다. 여자들 모두가 나를 질투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내 칫솔에 똥이 묻어 있기도 하고 면도날이 국냄비 속에 들어 있기도 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만수 씨를 찾아갔다.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오해를 받아서 많이 괴로우신 걸 잘 압니다. 제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이 의심을 더하니까 어쩔 수가 없네요. 좀 잠잠해질 때까지 다른 데 가 계시면 어떨까요. 제 여동생이 결혼하고 나서 저 사는 동네 중학교 앞에서 분식집을 합니다. 거기를 좀 도와주세요. 월급은 지금보다 많이 드리라 할게요. 부탁합니다.

만수 씨는 그렇게 말했다. 오래도록 생각했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사실 나는 만수 씨를 좋아했다. 만수 씨를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하고 있었다.

오빠가 그 여자를 데리고 와서 음식 솜씨가 기가 막히다고 주방에서 쓰라고 했을 때는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튀김, 오뎅, 떡볶이 같은 아이들 주전부리 음식 파는 가게 크기라는 게 어른 세사람만 서 있어도 꽉 차는데 어떻게 사람을 더 들이라는 것인가. 아무리 호텔 주방장 출신이라도 해도 떡볶이나 오뎅에 무슨 솜씨를 부릴 일이 있는가. 어린 학생들 코 묻은 돈 받아서 월급을 주고 월세 내고 나면 남는 게 뭐가 있을 것인가. 내가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오빠가 점퍼 안주머니에서 적금통장을 꺼내놓았다. 그동안 나온 월급을 모은 것이라며 건물 주인한테 이야기해서 가게를 키워가지고 제대로 된 식당을 해보자고 했다. 이제까지 무슨 생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웠고 그다지 고맙지도 않았다. 오빠가 그 여자 앞에서 보라는 듯이 그러는 것도 싫었다. 오빠는 내 심정이 어떤지 아랑곳하지 않고 마냥 들떠 있었다.

그 여자는 손에 주렁주렁 검은 비닐봉지를 매달고 왔다. 그렇게 주방에 들어가서 뚝딱 만들어 내온 것이 제육볶음이었다.

내래 평생에 이렇게 희한하게 맛난 제육볶음은 처음 먹어보누만. 새댁 음식 솜씨가 덩말 보통이 넘는구나야.

부르지도 않았는데 내려와 있던 시어머니가 품평을 하고 나섰다.

사돈어른, 이거 돼지 두루치깁니다. 지숙 씨가 우리 회사 앞 식당에서 만든 메뉴인데 회사 구내식당에서도 정말 인기가 좋았어요. 사실 제가 회사 앞 식당에서 처음 이거 먹었을 때 천국에서 이런 걸 먹나 싶더라고요. 이분 요리학원에서 음식 하는 법을 제대로 배웠대요. 요리사 자격도 있고요.

두루치기면 어떻구 제육볶음이면 어더래. 맛만 있으면 됐지. 새아가 새로 식당 내는 데 이거를 만들어 팔면은 식당이 불같이 일어나겠구만기래. 돼지고기 싫어하믄 조선 사람이 아니디.

탄광 같은 데서 힘든 노동 하는 사람들이 돼지비계가 중금속 씻어낸다고 더 좋아하지요. 운전기사들도 좋아하고.

그렇게 해서 ‘정다운 24시 기사식당’이 태어났다. 우리 식당의 제육볶음은 택시기사들이 끼니때가 되면 일부러 우리 동네 오는 손님을 골라 태우고 올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 여자는 주방 일을 했고 나는 밖에서 써비스를 했다. 택시가 많이 오니 차량 정리를 해야 해서 낮에는 사람을 쓰고 밤에는 오빠가 그 일을 했다.

오빠는 시간이 나면 틈틈이 그 여자를 주방 밖으로 불러내 “일이 힘들지는 않으냐, 도와줄 건 없느냐” 하고 물었다. 주부습진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연고를 사다주기도 하고 어릴 때 배운 것이라면서 약초를 캐다 찧어서 꿀에 갠 것을 쥐여주기도 했다. 회식이 있는 날에는 술 냄새를 풍기면서 장미를 사온 적도 있었다. 오빠는 회사 사정이 좋지 않다느니 경영진과 종업원들 사이에서 힘들다는 등등의 이야기까지 그 여자에게 털어놓았다. 그럴 때 뭔가 짜릿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그 여자는 정말 석녀일 것이다. 이런 걸 나는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공장에 남은 건 일곱명이었다. 우리는 일곱명을 ‘최후의 칠인’이라고 불렀다. 영화 「새벽의 칠인」도 있었고 유흥으로 청춘과 재산을 탕진하는 철없는 재벌 2세들이 만들었다는 ‘칠공자 클럽’도 있으니 사업주가 버리고 간 공장을 지키면서 혹시 그들이 돌아오지 않을까 기다리는 일곱명, 속도 없고 대책도 없고 정신머리도 없는 일곱명을 ‘최후의 칠인’이라고 부르거나 말거나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그렇게 불렀다.

회장이라는 여자는 진작 딴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명목이야 회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전망과 경제성이 뛰어난 신규 산업으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사업 다각화라는 말도 썼다. 그러면서 뒤에서 증권 투기며 부동산 투기를 했다.

우리 회사에서 생산한 부품을 납품받던 자동차회사가 분수에 맞지 않는 과잉투자, 과잉생산으로 위기에 몰렸다가 결국 비상 긴축경영 체제에 들어갔다. 재고를 줄여야 하니 당장 납품 물량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우리 회사처럼 계열사가 아니면서 중요한 협력사들은 자동차 회사 주문에 따라 생산시설이며 물량을 크게 늘렸었다. 이 역시 과잉투자로 몰렸고 빚이 대폭 증가했다.

그러자 회사는 생산현장 노동자를 자르고 임금을 깎으려고 했다. 어림도 없는 수작이었다. 가만히 있을 바보는 없었다.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피해를 우리가, 우리만 봐야 하느냐 말이다. 회사 설립 이후 처음으로 쟁의를 시작했다. 연장근무를 거부하고 태업을 하는 것으로는 별 효과가 없어서 회사 문을 때려잠그고 사무실에서 농성을 했다. 그렇지만 생산시설은 한번도 세우지 않았다. 한번 서면 새로 가동하는 데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회장이라는 여자가 회사 재산에서 당장 돈이 되는 것만 쏙 빼가지고 날라버렸다. 그냥 가지 않고 이제 한국에서는 고임금과 노사분규 때문에 제조업을 하기가 힘들게 됐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남겼다. 결국 쟁의는 원하는 사람을 퇴직시키고 수당을 조금 줄이는 선에서 타협되면서 끝났다. 그런데 회사가 정상궤도로 돌아오자마자 금융권에서 대출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유동자산이 급격히 줄어들고 월급 지급이 늦어졌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게 누구의 눈에도 보였다.

재주 좋은 인간들부터 떠나기 시작했다. 일부는 동종업체에 취직을 하고 새로 생긴 부품업체에 스카우트되기도 하면서 사람들은 하나씩 침몰하는 배에서 뛰어내렸다. 노조에 가입한 사람들 중 일부는 벌써 블랙리스트에 올라 공단 내의 다른 공장에는 취직하기 힘들 거라고 했다. 챙겨서 딴 데로 갈 수 있는 인간들은 쑥쑥 다 빠져나가버렸다.

항암치료를 받은 적 있던 조우현 조장 말마따나 “내 머리카락 빠지는 것보다 애들 나가는 게 더 빠르네”였다. 사장은 회사를 붙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었다. 나가고 싶어도 갈 데가 없는 사람이거나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체념을 한 사람들만 남았다. 그것도 자꾸 줄어들었다.

우리 회사가 망한다면 이건 완전히 흑자도산입니다. 우리 회사를 한번 둘러보세요. 장부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로 우리 회사는 자산이 빚보다 몇배 더 많아요. 빚도 우리 회사 잘못으로 생긴 게 절대 아니죠. 흑막이 있습니다. 회사를 똥값으로 만들어서 거저먹으려는 세력이 있어요. 새로 자동차 산업에 진출한 T그룹 말이죠. 그런데 걔들도 우리 없으면 당장 제대로 된 차는 생산하기 힘들어요. 수입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단가나 납기 때문에 오래 못 버텨요. 우리 회사는 망한 게 아니에요. 잠시 생산을 중단하는 거죠. 지금 무책임하게 가버린 오너 말고 다른 확실한 자본을 끌고 오면 회사는 금방 정상화됩니다. 물주가 한국에 없으면 일본, 미국, 유럽 어디에서든지 모시고 옵니다. 그때까지 여러분이 공장을 사수하면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부탁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사장은 마지막에 정문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맹세까지 하더니 허리를 구십도로 굽혀 절을 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운전사가 모는 그의 검은 쎄단이 천천히 정문을 빠져나가고 난 다음까지 조 조장이 박수를 쳤다.

절하는 거 처음 보니까 대가리에 소갈머리가 없는 게 나나 그이나 매한가지더구만.

그게 이유였다. 박수를 쳤든 안 쳤든 사장의 연설 이후 떠나는 사람은 썰물처럼 늘어났다. 끝까지 남은 사람이 일곱명이었다. 임시로 공장 관리인을 뽑기로 했다. 회사가 멀쩡했을 때 직급으로 최상급자는 김만수였다. 관리직 출신도 김만수 단 한명이었다.

채권단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경비는 돌아가며 다 같이 다 서기로 했다. 채권단이 우리를 쫓아내기 위해 용역깡패라도 보낸다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겠지만 공장에 불이라도 싸지를 각오였다. 정문을 용접해서 못 열게 막아버리고 주방의 가스통을 가져다 사제 화염방사기를 만들어두기까지 했다. 몇번 변호사인지 뭔지 하는 인간들이 몰려왔다가 화력 시범을 보이자 무슨 종이쪽지를 정문에 붙여놓고 가긴 했다. 즉시 짝짝 찢어서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자동차산업 자체가 전반적으로 불황이어서 그런지 중국에다 새로운 공장을 세웠는지 우리 회사나 생산시설에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루 세끼 밥을 모두 공장에서 해결했다. 주방은 유일한 여자이면서 요리사 자격이 있는 박지숙 누님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때 우리 회사 구내식당에서 일하다 나가서 식당에서 일을 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공장 점거농성에 들어가자 그 식당을 때려치우고 우리에게 합류했다.

만수 형님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지숙 누님 아니었으면 몇백명 삼시 세끼를 어떻게 댔겠수. 그때는 정말 대단했지. 회사에서 간 버스하고 승용차가 그 시골 동네를 완전히 포위하고 모자라서 읍내까지 길가에 대놨잖어요. 경찰서장까지 나와서 교통정리하고 여기 무슨 장차관 초상이라도 난 거냐고 물으러 오고. 우리가 할 때는 확실히 한다 이거죠. 만수 형님이 우리한테 무슨 일 났을 때 해준 거 반만 하자, 그거였잖어. 그때 화투 삼백목 준비한 거 다 나가고 육개장 하루 천그릇씩 끓여댔지.

그때 만수 형님, 우리는 허벌나게 고생하는데 자기 혼자 정말 동작 빠르게 아버지 이름으로 된 화전밭하고 시골집을 등기 옮기고, 어머니하고 누나 짐 싹 챙겨서 다 모셔오고.

그러면 뭐하냐고. 그게 다 합쳐서 오백이 돼, 천이 돼. 씨부랄. 한방에 이 지랄인데.

어쨌든 우리의 대장은 김만수였다. 지리산의 빨치산을 소설화한 베스트셀러 『남부군』을 본떠서 ‘보급투쟁’이라고 부르던 음식재료 구해오기부터 조리, 식사, 족구, 스케줄 정리까지 모두 대장이 하자는 대로 하면 틀림이 없었다. 대장의 말대로 하면 뭔가 질서가 잡힌다고 해야 할지, 그런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그래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었다. 우리가 공장을 빼앗기지 않고 잘 지키고만 있으면 언젠가는 사장이 돌아올 것이라는. 채권단이며 새로운 투자자를 설득해서 공장을 다시 돌리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큰 만큼 다른 공장에 취직한 사람들도 잠깐 들러서 주스나 라면 박스, 족구용 배구공 같은 걸 놓고 가기도 했다. 하지만 여섯달이 되고 일년이 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공장은 일곱명이 아니라 칠백명이 팔 벌려 지키기에도 넓었다. 공장 마당에는 깨진 콘크리트 사이로 잡초가 고개를 내밀더니 사람 키만큼이나 자랐다. 설비에는 녹이 슬었고 복구 불능상태로 망가져갔다. 건물 천장에서 물이 새고 곰팡이가 무섭게 번지더니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자 말라서 흔적만 남고 사라졌다. 전기와 공업용수 공급도 끊어졌다. 회사를 되살려낼 이유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다시 일년이 지나갔다.

이제는 오기가 생겼다. 공장에서 같이 생활하는 게 집처럼 편안했다. 일은 많았다. 사람이 제 한 몸 건사하는 데 드는 품이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의식주는 기본이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빨래만 해도 그랬다. 꽁꽁 언 물에 손을 담그고 풀리지도 않은 빨랫비누를 문지르다보면 한숨과 눈물이 났다. 각자의 가정경제를 어떻게 꾸려가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안 봐도 뻔했다. ‘최후의 칠인’은 칠형제처럼 친해졌다.

우리는 최후의 칠인, 죽어도 같이 살고 살아도 같이 산다! 한번 하면 끝을 본다!

그 구호를 외치다보면 가슴이 다 쩌릿쩌릿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한창 일할 나이, 한창 돈 벌 나이, 한창 출세할 시간은 집어치우고라도 한창 기반을 닦을 나이의 우리에게 금쪽같이 귀한 삼년이 흘러가버렸다. 우리는 정말 대책 없는 사람들이었다.

 

교도소 문 앞에서 아내가 들고 온 비닐봉지 속의 두부 한모를 다 먹고 버스 타고 집에 돌아오니 옛날의 집이 아니었다. 처남 살던 방 세칸짜리 전셋집에 어머니와 아내와 아이들 셋, 만수 형님과 장모님, 정신이 없는 처형까지 있었다. 방 하나에 어머니와 수민, 수현, 태준이가 들어가고 방 하나를 장모, 처형, 아내가 쓰고 나머지 문간방에 집주인인 처남과 내가 기거하게 됐다. 하룻밤을 자보니 집보다 감방이 넓었지 싶었다.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처남은 망한 회사의 공장을 지킨다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회사에 나갔다. 삼년 동안 다리가 두번 금이 가고 부러지고 해서 목발에 깁스를 했다. 한번은 채권단 측 변호사들이 쳐들어오는 걸 보고 계단으로 급히 내려오다가 넘어져서, 한번은 족구를 하다가. 농성이 길어지고 먹는 게 부실하니 뼈가 많이 약해져서 그런다는데 같이 농성하던 사람 중에 다리가 부러진 사람은 처남밖에 없었다. 그것도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면 그 방면에서는 세계신기록일 것이다.

아내는 처남과 담판을 지으라고 했다.

어디서 누군지도 모를 여자를 하나 끌고 와서는 돈 봉투 안겨주고 기사식당을 하라고 하더니, 죽어라 고생해서 식당이 좀 될 만하니까 그 여자를 도로 끌고 나간 거예요. 아무도 없는 공장에서 농성하는 사람들 밥해줘야 한다고. 식당 손님들이 맛이 달라졌다고 다 떨어져나갔어요. 할 수 없이 내가 공장까지 쫓아가서 사정사정 빌어가지고 도로 모시고 왔는데 유세가 보통이 아냐. 보통 여자가 아니라고요. 그 여자 때문인지 식당은 불난 집같이 잘됐는데 돈은 어디로 가는지 구경도 못해요. 애들 우유값도 오빠한테 말을 해야 주고.

왕년에 운동권에서 잔 다르끄 소리를 듣던 여자가 펑퍼짐한 몸에 몸뻬를 입고 파마머리를 한 게 식당 사장이 다 되어 있었다. 아니 사장이 아니라 부엌데기에 심부름꾼에 불과했다. 내가 감옥 들어간 뒤에 살림 합치자고 하더니 그 모양이라고 했다. 열이 뻗쳤지만 일단 처남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두루치기와 막걸리를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그래도 이렇게 먹고살 만하지 않은가. 아이들도 별 탈 없이 잘 크고 있고 자네도 이제 자유의 몸이라서 걱정 안해도 되고 어머니 두분도 정정하시고. 문민정부가 들어섰으니 정치도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나아질 거야.

형님, 문민정부 들어서고 육해공에서 다 대형사고 났죠? 기차가 전복되고 비행기 떨어지고 서해상에 페리 가라앉고 지하철 가스 터져서 지나가던 애먼 사람들 얼마나 죽었습니까?

우리는 별 탈 없이 살아 있잖아. 그게 어딘가.

그거야 우리는 그 멀리까지 안 가고 못 가서 그런 일 안 겪은 거죠.

아무튼지 간에. 안 아프고 안 죽었으면 그래도 복 받은 거라고 생각한다고. 우리만 착하고 열심히 살면 다 잘 풀릴 거야.

아니 형님 다니던 회사가 형님이 게으르고 일 안해서 망한 겁니까. 망해도 그렇지, 자본가라는 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그놈들이 형님네처럼 아무것도 없이 나갔겠냐고요. 지금도 홍콩이나 하와이 해변 같은 데 가서 빼돌린 돈 가지고 떵떵거리면서 잘살고 있어요.

처남이 착하다는 건 인정했다. 성실하기도 했다. 그런데 방향이 틀렸다. 같이 해야 할 일은 같이 하지만 싸울 일은 싸워서 해결해야 하지 않는가. 또 싸울 때도 상대를 제대로 골라서 싸워야지 제 편, 제 식구에게 피해를 입혀가며 제 살 깎아먹기 식으로 하는 건 나부터 용납할 수 없었다. 그냥 놔두니까 처남은 계속 주절주절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굶기를 밥 먹듯 하던 때를 생각해봐. 나는 원망하는 사람이 없어. 내 팔자가 그런 걸 뭐. 또 원망해서 뭐해? 그 사람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고. 그 사람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냐고. 부도내고 싶어 부도내는 회사가 어디 있겠어? 나는 이렇게 가난하지만 소박하게, 우리 나름의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걸로 생각하네.

그런 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나부터 살길을 찾아야 했다.

지금 저 주방에 있는 아줌마 하고는 무슨 사이인 겁니까?

지숙 씨? 우리는 같이 싸우고 있어. 투쟁.

뭐 때문에 투쟁하시는데요? 누구하고요?

우리가 공장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다보면 사장님이 투자자를 데리고 돌아오실 거야. 그럼 채권단한테 빚도 갚고 공장이 다시 돌아가는 거지. 우리는 희망이 있어. 희망 때문에 싸우는 거야.

그런데 수민이 엄마가 저 아줌마하고 앞으로 어쩔 거냐고 자꾸 그러는데요.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왜 지금처럼 밥할 때에는 공장에 갔다가 끝나면 여기 와서 일 하고 하면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면 되지.

우리 식당 하루 스물네시간 돌아가는 뎁니다. 누구는 하루 서너시간 파트타임으로 하고 누구는 혼자 하루 스물네시간 꼬박 일하고 있는데, 수민이 엄마가 무슨 죄를 졌습니까. 돈이나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집도 그렇지요. 지금 애들 자꾸 크니까 교육 문제도 그렇고 집을 옮겨야 되고 하는데 돈 생기는 데는 식당밖에 없잖습니까. 그런데 그 돈을 형님이 다 통장에 집어넣고 꼭 움켜쥐고 있다고……

아니, 그건 아닌데. 여기 재료비하고 인건비, 월세 제하고 나서 또 우리 공장에서 같이 투쟁하는 식구들 먹고 자고, 각자 가족들 있으니까 최소한 앞가림은 해야 하고 그러느라고 다 썼지. 내가 뭘 쥐고 있겠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이들이 좁아터진 집 안에서 열대야가 기상관측 이래 신기록을 내고 있는 한여름에 온몸에 땀띠가 나서 잠을 못 자고 울고 아내는 손이 불어터지도록 설거지하고 일해서 번 돈을 엉뚱한 데 처넣어왔다는 말이었다.

형님, 도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 이렇게 제 식구 생고생 시켜가면서 남 좋은 일 하는 거요? 형님은 좋아서 한다고 하고 우리는 뭡니까? 우리 새끼들은 또 뭐고요? 지금 이건 아니잖아요. 말이 안되잖습니까?

어, 그래도 우리는 못 먹고 못 입는 거 아니잖아. 잘살지는 못해도. 정말 우리 아니면 굶어 죽을 사람 생각도 해야지.

그걸 왜 우리가 책임져야 해요? 그 사람들이 우리 가족이에요? 부모 형제라도 되느냐고요?

언제부터인지 아내가 팔짱을 낀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야, 옥희야! 짐 싸라! 씨발, 우리가 나가자.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냐. 더럽고 아니꼬와서. 허파 뒤집어져서 죽는 거보다는 낫겠다. 빨리, 짐 싸! 씨발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그러자 처남이 나를 주저앉혔다.

아니, 그러지 말고. 안 그래도 내가, 우리가 나갈라고 했어. 우리 식구 넷이 자네 식구들한테 얹혀서 폐만 끼치고 하는 게 영 마음에 걸려서. 이제는 식구도 더 늘 거거든. 나 지숙 씨하고 결혼할 거야.

그러자 아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저 사람 우리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요. 절대로.

처남은 당당했다.

살아도 내가 산다. 벌써 결정했다.

아주 훌륭하고 위대해 보였다.

왜 오빠 식당에서 일만 하는 나는 자격이 안돼서? 엄마, 언니들 다 오라고 해서 물어봐요. 내가 모를 줄 알아요? 이 남자 저 남자 걸치던 헌 여자가 어딜 감히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그래요.

어디선가 꺽꺽, 하고 고장난 하수도에서 물 빠지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그 여자였다. 그 여자는 상으로 달려와 털퍼덕 주저앉더니 가족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울면서 말했다. 방바닥을 두드리며 대성통곡을 하는데 처남은 그 여자의 어깨를 쓰다듬고 있었다. 신파극도 아니고 웃기지도 않았다. 당사자가 아니면 참 재미있는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식사를 하고 난 손님들이 구경을 하느라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 사람은 나하고 결혼해도 애를 안 낳겠다고 하더라. 우리는 태준이를 정식으로 호적에 입적하기로 했다. 우리 태준이, 어떤 애보다 잘 키울 거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엄마가 되어줄 거야. 이렇게 착한 사람이다.

나는 조건을 제시했다. 기사식당의 두루치기를 만드는 요리법을 주방에 충분히 가르쳐서 그 여자가 있든 없든 지금과 똑같은 맛이 나도록 할 것, 다른 데 그 요리법을 가르쳐주지 말 것, 곧 죽어도 가까운 데서 식당 같은 건 차릴 생각 하지 말 것. 아내는 한동안 생각하더니 분가를 한다 해도 몸이 아픈 어머니 대신 장모가 아이들을 돌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처남은 그러겠다고 했다.

나는 원래 가진 게 하나도 없었잖아. 지금은 부자야. 애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전셋집이라도 살 집이 있고. 나는 괜찮다. 옥희야, 네 신랑 고생 많이 했다. 잘해 줘. 부디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해.

처남은 그 여자와 결국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 결혼 때와는 대조적으로 하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같이 일하고 경조사에 함께했던 사람들이 수백, 수천명이지만 오고 싶어도 미안해서 못 오는 거라고 최후의 칠인인지 떨거지인지 하는 사람 중 한사람이 말했다. 알기나 하는지, 관심이나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떡볶이집에서 기사식당으로 확장하고 나서부터 거기서 나온 수입이 웬만한 집 한채 값이 넘었겠지만 우리는 축의금 조로 형님에게 준 것으로 하기로 했다.

그때 그렇게 하길 정말 잘했다. 결혼식을 하고 나서 몇달 뒤 형님한테 엄청난 빚이 핵탄두처럼 떨어져내렸다. 채권단에서 공장과 시설에 대한 명도소송과 불법점거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삼년 걸려 결과가 나왔는데 최후의 칠인이 십칠억원인가 하는 금액을 배상하도록 판결받은 것이다. 그중에서도 형님이 불법행위를 주도한 사람이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책임이 컸다. 어차피 죽었다 깨난다 해도 물어줄 수 없는 금액이긴 하지만. 우리가 분가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을 경우 채권단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기사식당 보증금이든 주방설비든 뭐든 차압을 붙일 수 있을 것이었다. 같이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