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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최정운 『한국인의 탄생』, 미지북스 2013

강한 한국인은 어떻게 창조되었나

 

 

김백영 金白永

광운대 교양학부 교수 rangzang@naver.com

  

 

촌평-한국인의탄생_fmt‘한강의 기적’과 압축근대화를 달성한 ‘다이나믹 코리아’의 강인하고 근면한 한국인, 이들이 불과 백여년 전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이 남긴 기행문 속에 ‘극동의 미개국 가운데서도 가장 게으르고 나약한 민족 중 하나’로 묘사된 사람들의 후예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책은 현대 한국인을 탄생시킨 19세기말~20세기 전반기 한국인의 내적 형질 전환과정에 대한 심층적 탐사를 시도한다. 이를 위해 저자 최정운(崔丁云)이 선택한 우회로는 소설문학 작품 속의 인물에 대한 분석인데, 600면에 육박하는 분량에, 정치학자로서는 최초로 근대 한국인의 정체성 형성이라는 진지한 연구문제와 정면으로 대결한 대작임에도, 시종 풍성한 이야기와 흥미진진한 해석이 버무려져 맛깔스러운 책읽기를 즐길 수 있다.

서론부와 결론부를 제외하면 이 책은 7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창조된 한국인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홍길동과 성춘향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하여, 이인직(李人稙), 이해조(李海朝) 등 신소설의 시대, 초기 민족주의의 두갈래 길을 보여준 이광수(李光洙)의 『무정』과 신채호(申采浩)의 『꿈하늘』, ‘강한 인간’에 대한 고민을 정식화한 김동인(金東仁)의 작품들, 대도시라는 새로운 생태계에서 서식하는 신인류의 출현을 그려낸 박태원(朴泰遠)과 이상(李箱)의 소설, 김동인이 제기한 문제에 해답을 제시한 이광수의 『유정』, 그리고 저항하는 한국 민중영웅의 완결판을 형상화해낸 홍명희(洪命憙)의 『임꺽정』에 이르기까지 그 탐문의 여정은 이어진다.

상당히 긴 시간대에 걸친 다양한 작가와 작품을 망라하고 있음에도 논의가 전혀 산만하게 느껴지지 않고, 누구나 익히 아는 익숙한 작품들을 다루고 있음에도 글이 전혀 지루하게 읽히지 않는 것은, 책 전체를 관류하는 저자의 질문이 그만큼 내재적 일관성과 다채로운 이론적 사유를 동시에 갖추고 있으며, 그 해답을 끌어내는 방식이 보기 드물게 참신하고 획기적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제기하는 질문을 거칠게 한마디로 정식화하자면, ‘홍길동과 성춘향으로 대표되는 전통시대의 두 주체저항하는 주체(민중)와 사랑하는 주체(개인)가 구한말과 식민지 시기라는 전면적인 사회해체와 민족위기 국면에서 어떤 변화를 거쳐 근대 한국인으로 재탄생했는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육중한 난문(難問)에 대해 저자는 소설작품을 통한 근대 주체의 탄생신화에 대한 분석, 즉 한국적 맥락에서의 돈 끼호떼와 로빈슨 크루소와 파우스트의 출현이라는 해석틀을 도입하여 분석함으로써 매우 독창적이고 논쟁적인 일련의 해답을 제시한다.

그 가운데서도 단연 백미는 신소설의 문학사적 지위에 대한 국문학계의 통념을 훌쩍 뛰어넘어 신소설을 ‘문학적 완성도가 결여된 미완의 소설’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결여에 대한 적나라한 리얼리즘의 산물’로 해석해내고, 더 나아가 신소설의 시대를 ‘홉스적 자연상태’로 설명하는 부분이다. 시대상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풍성한 자료를 활용함으로써 왕조 말기의 조선사회를 파멸적 상태에 놓인 사회, 즉 ‘지옥’으로, 대한제국 시기를 사실상의 ‘국가부재 상태’로 규정하고, 더 나아가 일진회(一進會)와 친일파와 개화민족주의자에 대한 발본적인 정치사적 재해석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부분은 진부한 민족주의사학의 도그마에 안주하고 있는 국사학계의 주류적 해석에 대한 발본적 문제제기로 읽힌다.

또 한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식민지 시기를 단순히 좌절된 민족사의 암흑기로만 바라봐서는 안되며 ‘강한 조선인’을 만들어내기 위해 분투했던 주체적 시기로 파악해야 한다는 일관된 문제의식이다. 저자는 새로운 한국인을 형상화하기 위한 노력을 개화민족주의와 저항민족주의, 우파적 길과 좌파적 길, 개인의 탄생과 민중의 탄생의 양대 계보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는데, 그 대미를 장식하는 두 작품이 『유정』과 『임꺽정』이다. 이광수가 낯선 수입품인 ‘사랑’을 토착화시켜 한국인의 내면에 장착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욕망과 이성의 내적 모순을 무한한 동력원으로 하는 새롭고 강인한 인간형을 주조해냈다면, 홍명희는 홍길동이라는 고전적 영웅 모델에 서구적 개인주의와 아나키즘을 결합시켜 임꺽정이라는 인물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음으로써 서구는 물론 동아시아 다른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사회 고유의 끈질기게 저항하는 민중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특히 『임꺽정』을 『파우스트』의 서사구조를 통해 해석해내는 대목은 실로 탁월하다.

물론 이 책이 장점과 미덕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특정 작가의 특정 작품이 그 시대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할 수 있는지, 또 그것을 특정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묻는 방법론적 정당성의 문제에 결코 만족할 만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사랑’이 과거 한국의 전통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서구 문명의 발명품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대목이나 ‘새롭고 강한 한국인의 창조’를 ‘춘원의 획기적 업적’으로 (과대)평가하는 부분은 다소 의아스럽고 불편하게 읽힌다. 이상의 『날개』를 대니얼 디포(Daniel Defoe)의 『로빈슨 크루소』에 빗대어 설명한 것은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라고 생각되지만, 대도시라는대단히 감각적이고 자극적인새로운 공간적 장치가 식민지 인텔리와 맺는 관계에 대한 분석은 너무 소략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아쉬운 점은, 식민지 시기에 대한 서술 전반에 있어서 구체적인 사회적 환경이나 역사적 조건의 변화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빈약하다는 점이다. 이는 저자의 분석이 주로 소설 속 등장인물의 심리적 갈등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식민지 시기 한국인의 변화를 당시 사회상의 변화(가령 1910년대와 1930년대의 차이)와 거의 무관한 고독한 개인의 내면적 자아 형성사로 서술하는 점은 쉽게 공감하기 어렵다. 또한 『임꺽정』에서 표출된 반()지성주의를 오늘날 한국 교육과 정치의 고질의 역사적 연원으로 설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지만, 전쟁과 분단 이후의 격동에 대한 설명이 누락된 상황에서는 다소간 논리적 비약으로 읽힌다(반면 이는 해방 이후 시기를 다룰 저자의 후속작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한계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어떤 국학자도 설득력있는 해답은커녕 공감할 만한 문제설정 방식조차 제시하지 못했던 한국학의 오랜 수수께끼에 대해, 정치학자가 문학사를 종횡무진하며 새로운 문제틀과 해석틀을 벼려내고 주옥같은 발견을 쏟아냈다는 사실은 경이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15년 전 『오월의 사회과학』(풀빛 1999)에서 빛을 발했던 분석의 날카로움과 정치(精緻)함은 세월의 침식과 풍화에 다소 무뎌졌을지언정, 저자 특유의 섬세한 관찰력과 탁월한 공감의 능력은 여전히 건재하며, 사유의 깊이와 통찰력의 폭은 훨씬 더해졌음을 실감한다. 이 책의 등장으로 향후 한국 근현대 사회문화 변동 연구가 한층 입체적이고 역동적으로 전개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