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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소설에서 현실 만나기

 

조금은 기묘한 ‘전형’ 개념의 역사

 

 

김동수 金仝洙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발자끄와 리얼리즘: ‘리얼리즘의 승리’를 다시 생각한다」 「아름다운 것들의 사라짐 혹은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 미셸 우엘벡의 『지도와 영토』」, 역서로 『아미엥에서의 주장』 등이 있음. donnard@hanmail.net

 

 

변증법적 통일?

 

1980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입에 달고 다니던 말 중에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 어구는 서로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차원들이 극적으로 합일을 이루게 되는 경지를 뜻하지만, 실상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도 그 구체적인 통일의 경로를 알지 못한 채 막연한 당위 내지 공허한 구두선(口頭禪)으로 일컫는 적이 적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가 다루게 될 ‘전형’이라는 개념이 상당부분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리얼리즘 문학 이론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해온 ‘전형’ 개념과 관련하여 루카치(G. Lukács)는 “현상과 본질의, 개별 경우와 법칙의, 직접성과 개념의 대립이 해소되어 양 측면이 예술작품의 직접적 형상 속에서 자발적인 통일성으로 통합되어 나〔간다〕”1)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러한 당위적인 요구들이 자동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님은 80년대의 민족문학을 평가하는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형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된 개별화에 함몰하여 그 개별성이 보편성에 이어지지 못하여 전형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와 보편성에 경도되어 개별성을 희생하여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보편성만을 드러내어 전형화를 이루지 못한 경우가 있다. 최근 우리 민족문학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지배적이다.”2)

사실 민족문학 혹은 노동소설의 도식주의의 문제는 1980년대에 새롭게 제기된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1930년대의 카프(KAPF) 시절에도 이와 유사한 문제가 있었고, 그 배후에는 사회주의리얼리즘의 창작방법을 두고 쏘비에뜨연방에서 벌어진 ‘세계관과 방법’ 논쟁이 자리잡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물을 그려내면서도 그 인물의 운명을 통해 한 시대의 본질적인 경향을 포착해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일 텐데, 그때마다 동원된 것이 엥겔스(F. Engels)의 유명한 전형 개념이었다. “내 생각에 리얼리즘이란 세부의 진실성 이외에도 전형적인 환경에서의 전형적인 인물을 진실하게 재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3) 그러나 숱한 논의를 거쳐 전형에 대한 논의들이 일정한 이론적 진척을 거두었음에도 그것이 구체적인 비평과 창작의 결과로 잘 이어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를 단순히 외적 환경이나 작가들의 무능 혹은 비평의 권위적인 작풍에서 비롯된 문제로 치부할 일은 아니며, 오히려 전형 개념 자체에 내재한 모호성과 난점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전형’ 속에서 보편과 개별이 통일된다는 생각은 리얼리즘 이론 진영에서 자명한 진리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실제로 이 용어의 통상적인 의미가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우선 일상생활에서 ‘전형적’이라는 표현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경우와 대립하여 반복적이고 심지어 상투적이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된다(“그건 전형적인 정치공세입니다!”). 심지어 문학교육에서도 ‘전형적인 인물’은 개성적인 인물과 대립되어 개념화되기도 한다.

 

집단의 성격을 대표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전형적 인물과 개성적 인물로 구분하는 경우이다. 전형적 인물은 보편적 전형과 시대적 전형으로 구분된다. 보편적 전형에는 수전노, 서로 사랑하는 남과 여, 충직한 하인, 방랑자와 같이 인간의 어느 한 속성을 대표하는 유형이 있다. 이들은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인물 유형이다. 이에 비해 시대적 전형은 어떤 특정한 지역과 시대 안에서 이루어진 인간 유형을 말한다. (…) 훌륭한 소설은 전형과 개인을 적절하게 조화시켰을 때 창조된다고 볼 수 있다.4)

 

우리는 이와 관련된 개별적인 쟁점에 대해 평가를 내릴 위치에 있지는 않다. 다만 전형 개념 자체 속에서 보편과 개별의 통일이 당연하게 전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전형에 관한 세세한 쟁점들을 다루기보다는 ‘전형’ 개념이 어떤 맥락에서 출현했고 어떤 내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는지 조명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전형 개념이 가지는 의미를 막연하게나마 측정해보고자 한다.

 

 

‘사회적 전형’의 등장

 

엥겔스의 리얼리즘 구상은 상당부분 발자끄(H. Balzac)의 소설관, 특히 『인간희극』의 「서문」(Avant-propos)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하크니스(M. Harkness) 양에게 보내는 엥겔스의 편지에 출현하는 ‘세부의 진실성’ ‘전형’ ‘미래의 인간’ 등의 핵심적인 용어들이 발자끄가 「서문」이나 다른 작품들에서 사용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발자끄는 전형이라는 개념을 의식하고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가였다.5) 그리고 여러 작품의 서문을 통해 스스로 일정한 전형이론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는 이전에 나온 서문들의 완결편에 해당하는 『인간희극』 전체 「서문」에서 전형을 그가 그리고자 하는 ‘풍속의 역사’(lhistoire de moeurs)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계기로 제시한다.

 

프랑스 ‘사회’가 역사학자가 될 것이었고, 나는 단지 그 비서가 되는 것으로 충분했다. 선행과 악행의 목록을 작성하고, 정념들의 주요한 사실들을 한데 모으고, 성격들을 묘사하고, ‘사회’의 주요한 사건들을 선택하고, 동질적인 여러 성격의 특징들을 모아 전형들을 구성함으로써, 아마도 나는 역사학자들이 잊어버린 역사, 바로 풍속의 역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었다.6)

 

발자끄가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전형은 같은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의 여러 특성이 한 인물에 집약된 것을 말한다. 전형은 “자신 속에 자신과 다소간 닮은 모든 사람의 특징적인 특성들을 요약하고 있는 인물”이며 “그는 이러한 종류(genre)의 모델”7)이라는 것이다. “동질적인 여러 성격의 특징들을 모아 전형들을 구성”한다는 진술은 문학적 창조과정이 현실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요소들을 차용하고 해체, 재구성하는 것임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전형은 이렇게 확보된 대표성을 통해서 구체적인 한 인물의 운명이 그가 속하는 집단의 운명을 예시하게 만드는 중요한 문학적 수단이 된다. 『농민들』(Les Paysans)에 등장하는 ‘소농의 전형’ 꾸르뜨뀌스의 운명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영주의 산지기였던 꾸르뜨뀌스는 영주와 척을 진 마을의 부르주아에게 협조하는 댓가로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려 조그만 땅을 구입하게 된다. “실상 꾸르뜨뀌스는 바슐르리의 땅을 사면서 부르주아로 통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자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쇠똥을 주우러 돌아다녀야 했다! 그녀와 꾸르뜨뀌스는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거름을 잔뜩 준 밭에 곡괭이질을 했고, 수확도 제법 거두었다. 그렇지만 리구에게 빚진 잔금에 대한 이자를 지불하는 데도 허덕였다.”8) 발자끄는 꾸르뜨뀌스의 경우를 예로 들어 땅을 가지고자 하는 농민들이 고리대금업자를 비롯한 마을의 부르주아들에게 종속되는 사정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문」을 곰곰이 살펴보면 전형 개념의 기원이 단순하지 않으며, 실상 구별되는 두가지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발견된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서문」의 초반에 ‘사회적 종’과 ‘동물 종’을 비교하는 대목에서 등장하는 일종의 사회학적인 관념이다. 발자끄는 ‘구성의 단일성’ 이론을 제기하면서 동물의 다양성을 기술하는 ‘박물학’에 비견하여 인간세계에 대한 소설적 재현이 가능함을 암시한다.

 

‘사회’는 인간에서 출발하여, 그의 행동이 전개되는 환경에 따라, 동물학에서 종이 다양한 만큼이나 상이한 인간들을 만들어내지 않던가? 군인, 노동자, 행정가, 변호사, 게으름뱅이, 학자, 정치인, 상인, 선원, 시인, 가난한 자 그리고 사제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비록 포착하기는 좀더 어려울지라도, 늑대, 사자, 당나귀, 까마귀, 상어, 물범 그리고 암양 등을 구분하는 차이들만큼이나 크다.9)

 

요컨대 발자끄의 포부는 사회의 상이한 계층이나 직업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전형’을 통해 제시하겠다는 구상으로 읽히는 것이다. 하나의 원형이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종으로 분화한다는 논리는 조프루아 쌩띨레르(Geoffroy Saint-Hilaire)의 생물학적인 ‘유형’(type) 이론을 차용한 논란 많은 발상이지만, 이를 통해 발자끄는 새로운 소설 유형에 대한 모델을 제시할 수 있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각 계층 내지 계급을 총체적으로 재현한다는 발상으로 후대의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일종의 ‘사회소설’(roman social)의 원형을 구축한 것이다. 발자끄의 이러한 소설적인 구상이 19세기 리얼리즘 소설의 중요한 전범이 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소설 속 등장인물이 사회의 각 계층을 대표한다는 ‘사회적 전형’ 개념이 출현한다.

물론 「서문」에서 인간 유형들은 주로 직업적인 분류를 통해 구별되고 있지만, 좀더 일반화할 경우 사회적 계급의 차원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발자끄는 「황금 눈을 가진 소녀」(La Fille aux yeux dor)라는 독특한 단편의 도입부에서 빠리 시민을 구성하고 있는 각 사회계급의 직업, 행동과 사고방식을 파노라마처럼 제시한다. 이때 신분상승을 갈망하는 빠리 시민들은 노동자, 소시민, 대자본가, 귀족이라는 네 층위로 나뉘어 취급된다.10) 여기서 발자끄가 기술하고 있는 각 계급에 대한 압축적인 묘사는 그 자체로 잠정적인 ‘전형’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정도로 제법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발자끄는 당시 막 태동하던 사회학과 유사한 관점에서 인간집단을 구분하는 관점을 선보인 것이다.

이제 이런 맥락에서 엥겔스의 전형이론을 다시 위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엥겔스의 이론은 기본적으로 발자끄의 ‘사회적 전형’이라는 관념을 특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엥겔스는 발자끄의 전형 개념을 일정하게 굴절시킨다. 그는 사회집단을 사회계급으로 환원하는 경향이 없지 않은데, 예를 들어 ‘지킹엔 논쟁’ 와중에 라쌀레(F. Lassalle)에게 보내는 편지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라. “당신의 「지킹엔」은 전적으로 올바른 궤도에 올라서 있습니다. 주요 인물들이 특정 계급들과 방향들의 대표자들이며, 따라서 그들 시대의 특정 사상들의 대표자들입니다.”11) 또한 역사에 일정한 방향을 설정하는 진화론적인 면모가 감지되기도 한다. 가령 하크니스 양에게 보내는 편지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환경’이라는 개념은 발자끄의 것이라기보다 엥겔스의 고유한 개념으로 판단된다. 발자끄에게는 ‘전형적인 국면(phase)’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는 대체로 인생의 한 단계를 가리키는 것이지 엥겔스가 거론하듯이 시대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발자끄에게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급의 역관계나 풍습이 변화한다는 발상이 있지만, 엥겔스에게서처럼 역사주의적 함의가 뚜렷한 것은 아니다. 필자는 이미 발자끄에 대한 엥겔스의 독법이 졸라(E. Zola)에게 의존하였거나 최소한 공명을 이룬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졸라의 진화론이 엥겔스의 독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완곡하게 지적한 바 있다.12)

 

 

‘현대적 전형’

 

그렇지만 『인간희극』의 「서문」에는 이와 다른 맥락에서 전형 개념과 관계되는 발상이 있다. 전범이 되는 허구적 인물이라는 관념이 그것이다. 발자끄는 일반 역사와 대비되는 풍속의 역사를 위해서 구체적인 인물들을 등장시킬 필요성을 제기한다. “하지만 하나의 ‘사회’가 제시하는 3~4천명의 인물들로 이루어진 드라마를 어떻게 흥미롭게 만들 것인가?”13) 이에 대한 대답으로 발자끄는 서구 역사에 존재한 소설 주인공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이같은 인물들을 가지고 ‘호적부’와 경쟁하겠다는 야심을 표명한다. 그 목록에는 고대소설의 주인공인 다프니스와 클로에, 중세 로망스 문학의 롤랑과 아마디스, 르네쌍스 시대 문학의 파뉘르주와 돈 끼호떼, 그런가 하면 근대 영국문학의 클라리싸와 러블레이스, 로빈슨 크루소, 토비 삼촌, 아이반호우, 독일문학의 베어터, 프랑스문학의 마농 레스꼬와 르네 등이 포함된다. 발자끄는 “우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유명한 이야기꾼들이 한두명의 전형적인 인물을 창조하는 데 그들의 재능을 써버렸다”며 아쉬워하고 그에 비해 다양한 전형을 제공한 월터 스콧(Walter Scott)를 높이 평가한다.

 

우선 거의 항상 이 인물들—그들은 자신이 태생적으로 속한 세대보다 훨씬 길고 훨씬 진정한 삶을 영위하는데—은 현재의 위대한 이미지가 된다는 조건에서만 살아남는다. 그들은 비록 그들 세기(世紀)의 뱃속에서 배태되었지만, 인간의 모든 심정이 그들의 외피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그 속에는 종종 온전한 철학 하나가 숨겨져 있다.14)

 

발자끄가 인용하는 소설의 주인공들은 구체적인 서사를 함축하고 개별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인간 속성의 일면을 특화시킨 이른바 ‘보편적 전형’과는 다르다. 이러한 의미의 보편적 전형이란 실상 전형이라기보다 ‘유형적 인물’(stock character)로 분류된다.15) 이러한 유형적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os)에게서 집대성되는데, 그는 아첨꾼, 구두쇠, 의심 많은 사람, 겁쟁이 등 30여가지 스테레오타입을 분류했고, 이것이 고전주의적인 ‘성격’ 이론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브뤼예르(La Bruyère)가 테오프라스토스의 책을 번역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성격론』(Les Caractères)을 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7세기 고전주의에서는 전형이라는 개념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설령 사용했다고 해도 그것은 고정적인 성격을 가진 정형화된 인물의 틀을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서구에서 대체로 18세기까지 전형 개념은 개별성과 대립되는 일반성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그런데 어원적으로 따진다면 전형과 개별성을 대립시키는 어법은 그다지 놀라울 게 없다. 전형을 뜻하는 영어 type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typus는 원래 눌러서 흔적을 남기는 활자 같은 것을 뜻했으니 말이다. 예술적인 맥락에서 전형은 일정 유형의 인간을 대표하는 허구적인 인물을 뜻하게 되었는데, 예를 들면 무모한 행동주의적 인간형을 돈 끼호떼에, 반대로 쉽사리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고뇌하는 인물형을 햄릿에 비유하는 식이다. 그런 점에서 일차적으로 전형은 일반명사처럼 바뀐 고유명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형이 어쩌다가 개별성을 함축하는 개념이 되었을까?

우리는 전형 개념의 역사적 전개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르네 웰렉(René Wellek)의 간단한 요약을 참조하면, 19세기 초반에 이 개념과 관련하여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웰렉에 따르면 전형이 문학비평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것은 독일의 철학자 셸링(F. Schelling)을 통해서이다. 셸링은 햄릿, 폴스타프, 돈 끼호떼, 파우스트 등을 예로 들면서 전형 개념을 “신화적 규모의 위대한 보편적 인물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16) 그리고 웰렉은 바로 이러한 전통이 샤를 노디에(Charles Nodier)의 「문학에서의 전형들에 대하여」(Des types en littérature, 1832)라는 논문을 거치면서 프랑스로 유입된다고 첨언한다. 이 논문에서 노디에는 “창작된 어떤 성격도 이러한 독창적이면서도 감동적인 개별성의 표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전형이 되지 못할 것”17)이라며 전형이 성립하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으로 개별성(individualité)을 포함시킨다. 그런데 발자끄의 전형 개념과 관련하여 노디에의 이 글은 각별한 중요성을 가진다. 여기에서 노디에는 고전적인 전형을 반복하는 고전주의와 새로운 전형들을 창조하는 낭만주의를 대조하면서 후자의 입장에서 ‘현대적 전형들’을 창조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게다가 셸링이 언급하는 주인공들이 주로 연극 분야에 치중된 반면 노디에는 ‘현대적 장르’로서 소설에서 전형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촉구한다. 발자끄가 전형 개념을 주요한 소설적 수단으로 채택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실제로 발자끄는 노디에의 써클을 드나들던 후배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소설을 헌정할 정도로 노디에에게 존경심을 표한다. 그리고 노디에가 열거하는 소설적 전형의 예와 발자끄가 나열한 이름이 상당부분 겹친다는 점도 발자끄의 전형 관념이 노디에에게서 유래한다는 심증을 굳히게 만든다.

 

 

상징과 알레고리

 

이상이 우리가 추적해본 ‘조금은 기묘한 전형 개념의 역사’이다. 요약하자면 18세기까지 대체로 단순한 ‘유형’의 의미로 개별성과 대립적인 의미를 가졌던 전형 개념이 19세기초 독일에서 개별성과 보편성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변화한 듯이 보이고 노디에를 거쳐 발자끄에게 유입된다. 하지만 발자끄는 이 개념에 ‘사회적인 전형’이라는 특징을 부과하는데, 이것이 엥겔스를 거치면서 계급론적인 색채를 띠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사용하는 전형이라는 개념은 아직도 저 19세기초의 미학적 맥락의 전형 개념과 19세기 후반의 사회학적 맥락의 전형 개념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전형의 생산을 최상의 예술적 과업으로 생각하는 전자의 전통과 현실사회의 변화에 착목할 것을 요구하는 후자의 전통이 착종되면서 전형 개념이 우리의 상상력을 질곡에 빠지게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아닌가?

물론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이러한 간극을 극복하려는 부단한 시도들이 있었고, 특히 독일철학의 전통에 조예가 깊었던 루카치는 맑스주의의 관점으로 이를 종합해내는 데서 탁월한 성과들을 거두었다. 그는 헤겔의 변증법 등 맑스주의 이론에 익숙한 고전적 유산을 활용하여 졸라 식의 실증주의적 자연주의와 차별화된 리얼리즘 이론을 만들 수 있었다. 특히 전형과 관련하여 그가 전형성을 평균성과 날카롭게 구분한 것은 두드러진 업적 중의 하나일 것이다.

 

위대한 작가들이 전형적 인물들과 전형적 상황을 성공적으로 그려내는 데는 일상 현실의 정확한 관찰보다 훨씬 더한 것이 필요하다. 인생에 대한 심오한 이해는 결코 일상생활의 관찰에 국한되지 않는다. 작가는 먼저 자기 시대의 기본적 쟁점과 동향을 규명한 다음, 일상생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인물들과 상황들즉 그 능력이나 성향을 더욱 강렬해진 형태로 제시했을 때, 한 시대의 주된 모순과 동력들, 경향들을 밝혀줄 수 있는 그러한 능력과 성향을 지닌 인물 및 상황—을 창조하는 것이다.18)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루카치는 발자끄의 소위 낭만주의적인 측면을 ‘과도한 상상력’의 소산이며 ‘과장’이라고 비판하는 졸라에 대항해서 발자끄를 옹호할 수 있었다. 발자끄의 그러한 면모는 현실의 재현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적인 현상들 속에서 관찰되지 않는 시대의 심오한 본질적 경향을 파악하게 하는 유효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을 대표하던 자연주의에 의해 협소해진 문학적 판도를 생각한다면 루카치의 비평적 개입은 예술적 사유의 확장을 가져왔지 축소시켰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루카치의 리얼리즘이나 전형에 관한 이론을 정교하게 분석할 생각은 없다. 다만 자연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서 탁월했던 루카치가 현대문학의 새로운 조류들을 평가하는 데 그토록 인색한 이유가 어쩌면 고전미학 전통과 상당한 관련이 있지 않은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셸링과 노디에에 이르는 시기에 전형 개념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추정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아마도 독일의 괴테( J. W. von Goethe)에 의해서 숙성된 상징이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괴테는 실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상징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제각기 다양한 특색을 지니면서도 다른 수많은 것들의 대표자로 존재하면서 모종의 총체성을 함축하고, 일련의 다른 대상들에 대한 사유를 촉진하며, 나의 정신 속에 그와 유사한 것이나 다른 것들에 대한 사유를 촉발함으로써, 현실과의 관계에서 내면적으로든 모종의 통일성과 전일성을 추구하게 만드는 탁월한 사례들이지요.19)

 

이러한 괴테의 상징 개념은 루카치의 ‘전형’ 개념과 상당히 흡사한 면모를 보이지 않는가? 실제로 루카치는 말년의 저서에서 괴테를 원용하면서 상징이야말로 주술적 혹은 종교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알레고리와 달리 인간중심적인 예술을 구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20)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이 아무리 심오하고 위대하다고 해도 맑스주의의 철학적 사고와는 구별되는 것이고 또 그러한 구별 속에서만 맑스주의의 고유한 사유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알뛰쎄르(L. Althusser)의 인식을 받아들인다면, 저 풍부한 독일미학의 전통이 루카치가 세우고자 했던 독자적인 맑스주의 문예이론에 질곡으로 작용하는 측면은 없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괴테의 상징이론에 전면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는 사실이다. 상징과 알레고리에 대한 괴테의 구별은 다음과 같다.

 

시인이 보편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 특수한 것을 찾아내는가 아니면 특수한 것 속에서 보편적인 것을 직관하는가 하는 것은 판이하게 다르다. 전자에서 알레고리가 생겨나는데, 그 경우 특수한 것은 단지 보편적인 것을 예시하는 사례나 표본으로서만 그 의미가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가 본래 시문학의 본성이라 할 수 있는데, 시문학은 그 본성상 보편적인 것을 염두에 두거나 가리키지 않은 채 특수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바로 이 특수한 것을 생생하게 포착하는 시인이야말로 보편적인 것까지도 동시에 구현하거니와, 시인 자신은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21)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는 괴테의 이러한 논리를 이어받아 알레고리와 상징을 각각 ‘개념의 표현’과 ‘이념의 표현’이라고 정리한다. 하지만 벤야민은 이러한 규정이 알레고리와 상징에 대한 “근대의 근거 없는 담론”22)이라고 공박한다. 그는 상징 경험의 시간적 척도가 신비한 찰나인 데 반해서, 알레고리가 역사를 통한 변증법적 사유의 전개에 더 유리하다는 입장을 개진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평소에 자신과 다른 의견을 지닌 이론가들에 대해 상당히 고압적인 자세를 보이던 루카치가 벤야민에 대해서만큼은 “가장 중요한 전위주의 예술이론가”23)라며 정중하게 대접한다는 점이다. 따지고 보면 루카치가 벤야민을 그토록 후대하는 이유는 벤야민이 전위주의 예술의 양식과 기법을 알레고리에 대한 벤야민 자신의 철학적 사유로 환원시킨 덕분에 대립점을 뚜렷이 하는 데 용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다른 용어법을 사용하고 있는 이들 사유의 접점을 정확히 변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또 문학작품에서 철학적 결론을 이끌어내려는 이들의 시도에 너무 현혹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현실의 본질적인 연관을 발견하려는 루카치의 전형이론이 종종 총체성을 강조한 나머지 규범적으로 다가오는 측면이 있는 반면, 벤야민의 이론은 파편적인 현실의 단면들을 병치시키는 데서 진정으로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경향이 있다고 양자의 차이를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대목은 조금 다른 층위에 있다. 루카치의 총체성 이론이 인간의 자기해방이라는 역사적인 전망 속에서 일정한 낙관주의를 내포하고 있다면, 벤야민은 놀라운 솔직성을 가지고 “비관주의를 조직하는 것”24)을 현대 예술의 임무로 삼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벤야민의 난해하고 심지어 비의적인 이론들을 온전히 수긍하지는 못하지만, 역사에 대한 낙관주의적 견해와 제2인터내셔널을 지배한 경제주의적 관점의 상관관계를 지적한 통찰25)만큼은 지극히 소중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몰라 몰라, 전형이라니!

 

본 주제의 성격상 전형 개념과 관련하여 한국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이론적 진전들을 제대로 검토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26) 한국에서의 전형 논의들이 많은 경우 고전적인 상징이론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기왕의 전형 개념을 간단하게 용도폐기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처사가 아닐 것이다. 19세기 리얼리즘의 문학은 여전히 우리에게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오는 바가 적지 않고, 전형 개념은 거장들의 작품이 가진 풍요로움을 해명하는 유효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또 장편소설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시대 문제와 대결하는 개인들의 이야기는 우리처럼 근대문학의 전통이 짧은 나라에서 아직도 포기하기 힘든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우리의 비평이 전형을 일종의 강박처럼 받아들이는 풍토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박민규(朴玟奎)의 단편집 『카스테라』(문학동네 2005)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에 대해서 많은 평자들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그 속에 실린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같은 작품에 대해서는 상상력의 폭주를 의심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사실 『카스테라』에 실린 단편들은 발칙하고 터무니없는 상상력과 능청스러운 딴청, 언어유희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하류인생’들의 고달픈 생활에 대한 참신하고 생생한 묘사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인공들의 면면이나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핍진하게 그려내려는 태도는 그가 현재적 삶의 리얼한 감각에 그 누구보다 충실한 작가라는 사실”27)을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다. 반면에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의 경우엔 인물의 직업이나 이력 등 구체적인 정보도 거의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무 동력기를 타고 우주로 날아가 개복치 모양을 한 지구의 ‘실상’을 보게 된다는 황당한 구도를 그리고 있다. 그래서일까, 박민규의 우주적 상상력을 ‘개복치 우주론’이라고 이름 지으면서 “겉으로는 황당하고 터무니없어 보일 수는 있어도 아무런 의미 없는 말장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심리적 기원과 이유를 동반하고 있으면서 질서 아닌 질서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28)라고 평가하는 경우는 예외적이라 할 만하다.

이 작품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가벼운 유희정신이 실은 (어쩌면 벤야민적인 의미에서) 강렬한 비관주의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 비관주의는 현실과의 고투를 포기하는 체념적인 비관주의와는 상당히 다른 생산적인 비관주의라고 봄직하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이 세계가, 너무//그렇고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29)처럼 심드렁해 보이는 화자의 발언은 단지 ‘쿨한’ 냉소주의가 아니라 현실세계의 의미에 대한 치열한 물음의 반향으로 들리는 것이다. 이런 작품을 두고 누군가 별로 새롭게 갱신되지도 않은 ‘전형’의 잣대를 들이밀면서 폄하한다면 우리는 작가를 대신해서 이렇게 대꾸하고 싶어진다. 몰라 몰라, 전형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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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카치 「예술과 객관적 진리」, 『리얼리즘 미학의 기초이론』, 이춘길 편역, 한길사 1985, 52면.

2) 김재용 「전형성을 획득하여 도식성을 극복하자」, 『다시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실천문학사 1992, 183면.

3) 엥겔스 「하크니스 양에게 보내는 편지」(1888). 백낙청 『현대문학을 보는 시각』(솔 1991) 189면에서 재인용.

4) 최웅 외 『문학(상)』, 청문각 2004, 157~58면. 이승준 「고등학교 교과서의 서사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2」, 『교육문제연구』 25집 (2006년 7월) 8면에서 재인용.

5) 『인간희극』에서 전형(type, types)이라는 명사나 전형적(typique, typiques)이라는 형용사를 검색해보면 200회 이상의 사례가 검출된다.

6) Honoré de Balzac, La Comédie Humaine, nouvelle édition publiée sous direction de Pierre-Georges Castex,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Gallimard 1976~81, (이하 Pl로 줄임) I, 11면.

7) Pl, VIII, 492~93면.

8) Pl, X, 224~25면.

9) Pl, I, 8면.

10)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발자끄가 빠리를 단떼의 ‘지옥’에 비유하면서 ‘원’(cercle)이라는 관념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인간희극’(La Comédie humaine)이라는 제목이 단테의 『신곡』(La Divina Commedia)을 염두에 두고 지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빠리 시민에 대한 계층적인 비유가 『인간희극』 전체의 구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11) 칼 맑스 외 『맑스주의 문학예술논쟁: 지킹엔 논쟁』, 조만영 편역, 돌베개 1989, 45면.

12) 졸고 「발자끄와 리얼리즘: ‘리얼리즘의 승리’를 다시 생각한다」, 『창작과비평』 2013년 겨울호 참고.

13) Pl, I, 10면.

14) Pl., t. I, 10면.

15) 이승준, 앞의 글 131면.

16) René Welleck, Concepts of Criticism, Yale University Press 1963, 242면.

17) Charles Nodier, Rêveries liettéraires, molrales et fatastiques, J. P. Méline, Bruxelles 1832, 45면.

18) Lukács, “The Intellectual Physiognomy in Characterizationin Writer and Critic, tr. Arthur Kahn, Merlin Press 1970, 158면.

19) 괴테 「쉴러에게 보내는 편지」. 임홍배 「괴테의 상징과 알레고리 개념에 대하여」, 『비교문학』 45호(2008) 97면에서 재인용.

20) 게오르크 루카치 『루카치 미학: 제4권』(반성완 옮김, 미술문화 2002) 13장 2절 ‘알레고리와 상징’ 참고.

21) 「쉴러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글 102면에서 재인용.

22) 발터 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 조만영 옮김, 새물결 2008, 211면.

23) 루카치 「전위주의의 세계관적 기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홍승용 옮김, 실천문학사 1985, 184면.

24) 벤야민 『역사 개념에 대하여/폭력비판을 위하여/초현실주의 외』, 최성만 옮김, 길 2008, 165면(용어는 일부 수정).

25) 벤야민, 같은 책 340~44면 참고.

26) ‘전형성’ ‘현실반영’ 같은 특정 기준들의 충족여부를 리얼리즘의 잣대로 삼지 않는 유연함을 보이면서도 상투적이지 않은 전형성의 의미를 찾아서 탐색을 거듭하는 백낙청의 이론적 태도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백낙청 「시와 리얼리즘에 대한 단상」,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및 「로렌스 소설의 전형성 재론」, 『창작과비평』 1992년 여름호 참고.

27) 차미령 「환상은 어떻게 현실을 넘어서는가」, 『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 266면.

28) 김영찬 「개복치 우주(소설)론과 일인용 너구리 소설 사용법」, 『비평극장의 유령들』, 창비 2006, 146면.

29) 박민규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카스테라』 9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