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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F. R. 리비스의 소설론

 

 

김영희 金英姬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과 교수. 저서로 『비평의 객관성과 실천적 지평리비스와 레이먼드 윌리엄즈 연구』 『세계문학론』(공저) 등과 역서로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공역) 등이 있음. gnosisi@kaist.edu

 

  

1. 들어가는 말

  

21세기의 F. R. 리비스(Leavis)라니? 20세기 영문학 연구 및 비평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나, 그간 진행되어온 문학에 관한 다각도의 이론적 ‘의식화’를 통해 이미 극복된 과거의 인물인 그를 지금 다시 들추어내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사실 리비스는 20세기 후반 영문학연구에서 ‘이론’이 부상하면서 중요한 대결상대로 설정되었지만, 이제는 문학주의적 발상과 꼼꼼히 읽기라는 구태의연한 비평방법을 대표하는 이름 정도가 되어버린 형국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겠다. 작품에 충실한 읽기를 중시하고 문학의 ‘창조성’이니 작품의 ‘위대한 성취’를 강조하는 리비스는 문학이라는 이데올로기나 작품에 담긴 이데올로기의 무반성적인 추수에 머물고 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리비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새로운 이론적 읽기들이, 작품을 이론의 방증자료나 아니면 이론을 통해서 은폐된 의미나 이데올로기를 드러내야 하는 ‘텍스트’로 다루는 것인 한, 그가 처음부터 맞서고자 하였던—작품의 성취를 가늠하는 비평적 시선이 탈각된 채 작품에 관한 지식의 축적이나 작품의 분석과 주석에 머무는—‘강단적’(scholarly) 경향의 악화 양상이라고 보였을 법하다.

이것이 단순한 ‘문학적’ 문제가 아니라는 의식은 양편 다 공유하는 바일 터이다. 문학의 이데올로기를 거론하는 논자들이 결국은 근대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재생산, 전파, 강화하는 문학의 기능에 초점을 두었듯, 리비스에게도 작품의 ‘성취’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문학적’ 가치평가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을 통해서만 가능한 방식의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대응을 살려나가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개개 작품들, 나아가 문학이라는 형식과 지배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가 양편에 전제되어 있는 셈이다.

이런 거친 대비로 다양하고 나름의 의미있는 문제의식을 담은 이론적 고투들이 다 포괄될 수는 물론 없고, 새로운 이론적 탐구들이 주관과 객관의 이원론 극복을 지향하는 만큼은 리비스와 만나는 대목도 없지 않다. 그러나 리비스에 개입하는 측면에 국한한 것이라면 크게 무리한 정리는 아닐 것이다. 리비스와 리비스를 비판하는 이론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부딪치게 되는 중요한 물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리가 문학을 굳이 왜 하고 읽는가, 혹은 하고 읽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인데, 리비스가 처음부터 이 문제에 정면으로 맞닥뜨리면서 문학으로만 가능한 경지를 밝히면서 나름의 강력한 ‘답’을 제출하는 데 비해, 이론들은 그 점에서 아무래도 취약해지는 것 같다. 문학텍스트를 이론의 적용대상 정도로 취급하는 경우는 물론이고, 이데올로기 재생산을 넘어선 문학의 잠재력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그 의미와 가능한 조건들을 별도로 해명해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으며, 이 문학적 잠재력이 이론적 사유조차 넘어서는 차원인지 아닌지가 애매해지기 십상이다. 어떤 점에서는 이론의 과잉에 대한 피로의 기미조차 엿보이는 21세기 영문학연구의 곤경 또한 이런 ‘맹점’과 맞닿아 있다고 보이는데, 그렇다면 리비스의 사유는 이 시점에서 새로운 절실함을 띨 수 있다. 전지구적으로 자본주의 근대문명이 그 모든 분식(粉飾)을 떨쳐버리고 적나라한 형태로 현상되는 현재의 국면에서, 근대문명에 대한 근원적 비판의식을 소설논의와 결합시킨 리비스의 작업을 상기해볼 필요가 그만큼 커진다. 이런 가능성들을 염두에 두면서 이 글에서는 그의 소설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문명이 인간의 창조적인 삶에 가하는 위협에 대한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출발한 리비스에게 근대문명의 이런 진상을 드러내며 그럼에도 면면히 존재하는 삶의 창조성을 구현하고 증거하는 근대의 가장 중심적인 문학 형식은 바로 소설이었던 것이다.1)

 

 

2. 영국 소설의 ‘위대한 전통’

 

리비스의 『위대한 전통』(1948)을 여는 “위대한 영국소설가란,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헨리 제임스, 조지프 콘래드다”2)라는 문장은 정전주의를 대변하는 발언으로 악명 높다. 사실 리비스가 앞서 시()에서 수행했던, 진정으로 의미있는 전통 구축작업을 이 책에서 소설로 확대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는 ‘정전’(canon)의 재구성이 이 책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더욱이 여타 소설가들 위에 군림하는 ‘위대한’ 영국소설가를 따로, 그것도 단 네명만 (혹은 총론 격인 제1장 말미에서 덧붙인 D.H. 로런스까지 포함하여 다섯명만) 꼽는 것은 정전 구축 중에서도 매우 배타적인 문학적 ‘권력’ 행사의 시도라고 보일 소지를 갖는다. 리비스 자신도 이 파격적인 모두(冒頭) 발언이 편협하다고 비판받거나 오독될 위험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같은 분명한 비평적 판단이 소설에 관한 의미있는 토론을 촉진하는 최선의 길이므로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는 리비스가 그러한 파격적인 호명을 통해 개별 소설가의 평가만이 아니라 소설을 보는 기본발상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가 말하는 위대한 전통에 속하는 작가들은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지니거나 어떤 한 부분에서 ‘고전적인’ 위상을 이룩한 작가가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시대 속에서, 그 시대에 대해 생생하고 민감하게 반응”(51면, 강조는 리비스)하는 가운데 “예술이 지닌 가능성을 바꾸어놓을 뿐 아니라 인간적 각성, 즉 삶의 가능성들에 대한 의미심장한 각성을 일으킨다는 점”(20면)을 ‘위대한 전통’의 요건으로 내세우는데, 이 기준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비스가 말하는 ‘시대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란 무엇인가? 조지 엘리엇이나 제임스를 논할 때 좀더 표나게 거론되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작가들에서 그가 일관되게 읽어내는 것은 일종의 문명적 천착과 추구이다. 즉 이들은 저마다 다른 절실한 개인적 고민을 붙들고 씨름하는 가운데 근대자본주의 문명의 진상에 다가가며, 좀더 온전한 삶에 대한 강한 열망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사회 내지 문명에 대한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모색과 하나가 되는 진경을 보여주는 작가들인 것이다. 이 변별의 기준에는 문학만이 아니라 문명의 성격과 그 진로에 대한 판단이 깔려 있다.

리비스가 보기에 16세기부터 시작되어 17세기에 분명한 출발을 보인 자본주의 근대문명은 가차없는 기술혁신의 추진과 모든 것을 양적 가치로 추상하는 자본논리의 관철을 통해 삶의 모든 부면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 속성을 지닌다. 민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긴밀한 연계의 파괴로 드러나는 유기적 공동체의 소멸과 노동의 소외 및 삶으로부터의 분리를 핵심으로 하는 이러한 변화는 이후 산업화과정에서 더욱 가속화되며, 자본주의의 전일화가 최소한 서구 혹은 영국 사회에서 완성단계에 이르는 20세기에는 그간 그나마 문화를 지탱해오던 ‘교육받은 공중(公衆)’마저 사라져버린다. 근대문명은 이처럼 근본적으로 문화에 적대적인 속성을 갖는 점에서 전례없는 문명이라 할 수 있는데, 근대문명의 진전은 고도의 개인적 작업이면서도 만인이 공유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예술로서 문학의 위기가 가중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처럼 근대자본주의 문명이라고 해도 시공간의 차이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마련이고, 따라서 작가들이 진정 ‘자기 시대’에 민감하게 반응했다면 시대 반응에서도 각 국면에 따른 차이를 보여야 마땅할 것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 다루어진 몇 안되는 작가들에 대한 리비스의 논평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근대문명의 진전 및 그 문제의 심화를 보여주는 일종의 서사를 감지하게 된다. 그가 내세운 이 위대한 전통의 구성원인 다섯명의 소설가 가운데 20세기 초의 작가인 콘래드에 대해서 언급한 것처럼 “고도로 의식적인 개인을 고립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반대 과정을 과제로 삼았던 제인 오스틴으로부터 한참 멀어진 셈”(51면)이라는 그의 발언에는 18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역사적 변화와 그 문학적 포착을 추적하는 서사의 일단이 드러난다. 비교적 앞선 작가인 제인 오스틴이나 조지 엘리엇이 경험했던 사회나 문명이 그 제한된 배타성과 그로 말미암은 특정 계층 및 개인에 대한 억압성을 내장한 대로 세련된 가치와 기준의 담지자인 공동체로서의 적극적 구속력을 아직 지니고 있었다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제임스와 콘래드는 각기 개인적인 특별한 정황이 개재한 대로 ‘뿌리뽑힌 자’로서, 일체의 유의미한 공동체가 와해되고 그 허울만 남은 20세기를 선취해 보여주는 대표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작가 로런스에 이르면 전통적인 인물과 서사의 해체에 가까운 형식실험까지 감수하면서야 비로소 인간과 삶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되살아날 만큼 근대문명의 은폐와 파괴 작용이 한층 더 전면화된 셈이다.3)

이처럼 각기 당대의 구체적 현실에 충실히 반응함으로써 변화하는 근대자본주의 문명의 역사를 담아내는 작품들에 주목하는 리비스의 소설 전통은 무슨 초역사적·보편적 진리나 ‘예술적 가치’의 담지물들로 구성된 ‘죽은 박물관’과도 같은 정전질서와 오히려 정면으로 충돌한다. 리비스에게 ‘전통’은 어디까지나 현재에 ‘살아 있는’ 전통이다. 과거의 문학이든 당대의 문학이든 비평이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그것이 “현재 속에서 갖는 생명”4)이니, 지금 여기에 살아 있지 못한 과거 문학이란 죽은 지식의 대상일 뿐이다. 리비스의 ‘위대한 전통’이 통상적인 문학사와 다른 독특한 구성을 지니는 것은 문학과 문명에 대한 이같은 치열한 현재적·실천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런 만큼 그가 말하는 전통 스스로도 향후 역사적 변화에 따른 재조정과 해체에 열려 있는 역사성을 내장하는 것이다.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을 분별해내는 작업은 소설이 보여주는 ‘위대함’의 성격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게 마련인데, 과연 리비스는 이 책에서 개별 작가나 작품에 대한 평가를 통해 소설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을 시도한다. 그가 보기에 당시 영국의 소설비평은 대개 풍성한 사건과 살아 있는 인물, 생생한 묘사를 기대할 뿐인데, 이는 소설에서 이룩되는 삶과 사유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 무관심하거나 그것을 은폐함으로써 창작과 비평을 오도하는 ‘불행한 전통’이다. 이에 맞서 리비스는 소설이 시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요소들이 어우러진 총체적 의미를 구축하는 창조적 예술임을 보여주는 가운데, 소설적 성취에 관건이 되는 것으로서 ‘지성’ 혹은 ‘감성과 하나인 지성’과 삶에 대한 헌신과 함께하는 도덕적 열정을 강조한다(31면). 여기에는 예술과 사유를 대립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나 예술성을 무슨 형식적 완결성으로 환원하는 통념에 대한 비판이 개재되어 있다.

 

 

3. 극시로서의 소설

 

『위대한 전통』에서 리비스가 제시한 소설에 대한 사유는 그의 비평적 생애를 통해 계속 심화 발전해가는데, 소설과 관련한 그의 강조들을 집약하며 이같은 발전을 추동하는 하나의 화두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극시로서의 소설’(the novel as a dramatic poem)이라는 발상이다. 이 표현이 산문으로 된 소설에서 시적이고 극적인 성취에 방불한 것이 이룩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리비스가 소설을 일종의 시로 환원하거나 혹은 극과 시라는 두 장르의 결합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이 표현에 담긴 리비스의 소설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리비스가 말하는 ‘소설’이라는 용어부터가 단순한 기술(記述) 차원을 넘어서 가치판단적 성격이 강한 말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5) 그에게 ‘소설’은 모든 ‘산문서사’를 포괄하는 명칭이라기보다 ‘예술로서의 소설’을 가리킨다. 그는 또한 모든 소설작품에서 나타나는, 시나 극 등 여타 장르들과 다른 공통분모를 찾아내는 류의 ‘장르론’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 근대문명의 진단 및 극복이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당대 및 과거의 문학적 성취를 점검해가는 과정에서 소설이라는 형식이 근대의 가장 중요한 대응 양식임을 발견하였던 것이며, 따라서 소설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런 면이다. 물론 소설이 근대의 핵심 장르로 부상한다는 판단에는 소설 형식 고유의 ‘특수성’에 대한 관심이 수반될 수밖에 없지만, 리비스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특수성들을 통해 위대한 시나 극과도 통하는 언어예술적 성취가 이룩된다는 점이다. ‘극시로서의 소설’은 소설이 언어예술로서 갖는 공통점과 차이를 두루 담아내는 명명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 극시론이라는 발상을 촉발한 중요한 단서 중 하나는 T.S. 엘리엇의 감수성 분열론에서 주어졌다. 엘리엇은 「형이상학파 시인」(The Metaphysical Poets)이라는 서평에서 “16세기 극작가들의 계승자인 17세기 시인들은 어떤 종류의 경험이든 집어삼킬 수 있는 감수성의 기제”를 갖고 있었으나 17세기에 감성과 지성의 상호 분리가 일어났고 영시는 그 분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엘리엇의 감수성 분열론은 리비스가 영시의 전통을 가늠할 때 그랬던 것처럼 『위대한 전통』에서부터 소설을 생각하는 중요한 화두가 된다. 소설가이자 지성인이던 조지 엘리엇을 다루면서 가장 명시적으로 언급되기는 하지만, 위대한 소설들에서 이룩되는 ‘탈개인성’(impersonality)의 경지는 절실하고 충만한 정서와 사심없는 지성의 결합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는 발상이 이 책을 일관하는 일종의 배음(背音)이 되고 있다. 그러나 『위대한 전통』에서 리비스가 소설에서도 시적 성취가 가능함을 밝혀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면, 특히 디킨즈와 로런스의 진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셰익스피어의 진정한 계승은 시가 아니라 소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근대의 가장 핵심적 성취를 담보하는 형식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이때 ‘극시로서의 소설’은 소설을 시나 극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설의 독특한 성취를 규명하는 방편이 된다.

극시로서의 소설관이 『위대한 전통』에 일종의 보론 형태로 실린 디킨즈의 『어려운 시절』(Hard Times)론에서 처음 등장한다는 것은 이런 면에서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리비스는 이 책에서 디킨즈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위대한 흥행사(entertainer)일 뿐 창조적 예술가에는 미달하는 작가로 보는데, 다만 ‘도덕적 우화’(moral fable)에 해당하는 『어려운 시절』에서만큼은 “전체에 스며들어 수미일관한 전체를 조직해내는 어떤 포괄적 의미”(346면)가 두드러지며, “셰익스피어 극에서 연상되는 압축적이고 유연한 삶의 해석”(368면)을 보여준다고 본다. 리비스가 말하는 ‘극시’는 누구보다도 셰익스피어를 염두에 둔 것으로, 근대 장편소설이 셰익스피어의 계승자라는 판단은 여기서부터 이미 그 단초를 드러내고 있다. 사실 셰익스피어는 『위대한 전통』에서 다른 작가들을 다룰 때에도 거듭 거론되는 이름이다.

그런 한편으로, 리비스가 디킨즈의 본격 장편소설이 아닌 이 작품만을 높이 산다든가 두번째 극시로서의 소설론이 역시 ‘도덕적 우화’인 헨리 제임스의 『유럽인들』(Europeans)론이라는 것을 보면, 적어도 이때만 해도 ‘어떤 종류의 경험이든 집어삼킬 수 있는’ 잡식성을 특장으로 하는 활달한 장르로서 소설의 특성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는 미달했던 듯하다. 그러나 리비스는 머지않아 로런스의 두 주요 본격 장편 『무지개』(Rainbow)와 『사랑하는 여인들』(Women in Love)을 극시로 읽는 작업에 돌입하며, 로런스의 소설 및 소설론은 리비스의 극시론이 소설 고유의 강점을 포함한 진면목에 좀더 포괄적이고 방불한 접근을 하는 데 또 하나의 긴요한 단서가 된다. 가령 리비스가 보기에 똘스또이의 『안나 까레니나』(Anna Karenina)는 “최고의 유럽소설(the European novel)” “근대문명 최고의 소설”로, 장편소설이 “인간이 발견한 섬세한 상호관계성의 최고의 형식”(11면)으로서 망원경보다 위대한 발명이라는 로런스의 소설론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니, “셰익스피어에게 엄청난 빚을 진 소설 전통”(15면)에 속하면서도 극형식의 속박에서 풀려난 자유롭고 활달한 장르로서 소설만이 갖는 강점들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리비스가 염두에 둔 것은 포괄적 총체성과 관계성의 형식으로서 소설의 특성이라 요약할 수 있겠는데, 리비스는 로런스에 기대어 소설의, 그리고 똘스또이 작품의 이런 특성을 설명해간다. 예컨대 “소설에서는 (…) 모든 것이 모든 다른 것에 상대된다. (…) 여기에 바로 소설의 위대함이 있다. 소설은 당신이 교훈적 거짓말을 늘어놓고 설복하는 꼴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12면)라는 로런스의 말을 인용하며 『안나 까레니나』가 중대한 문제들에 대한 깊은 탐구이되 ‘해답’의 유혹을 끝내 견뎌내고 얻어낸 성취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그 나름의 ‘기율’이다.

소설이 인간 삶의 성격과 의미, 근본문제들을 사유하는 최고의 형식이라는 『안나 까레니나』론은 극시라는 발상을 통해 리비스가 궁극적으로 도달한 소설론의 면모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리비스는 19세기에 이르면 영어의 시적 창조력이 산문소설로 이동하며 위대한 소설가들은 셰익스피어의 계승자로서 문학사상 유례없는 성취를 이루어낸다고 본다.6) 소설이 근대의 중심적 성취를 담아내는 형식이자, 근대소설의 발전에 영국소설—혹은 미국작가를 포함한 영어소설—이 막중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리비스가 극시로서의 소설론을 전개해가는 가운데 그가 애초에 내세웠던 위대한 소설가의 목록이 영국소설의 경계를 넘어서 유럽소설로 확장되며 궁극적으로는 장르의 경계를 넘어선 ‘창조적 전통’의 구축으로까지 진전되는 면은 매우 흥미롭다. 리비스는 호손, 멜빌, 트웨인을 포함한 영어소설의 위대한 전통으로, 이어서 똘스또이를 포함한 ‘유럽소설’로 시야를 확대해가며 이런 가운데 가령 디킨즈의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 역시 위대한 ‘유럽소설’로 다시 자리매김된다.7) 사실 『위대한 전통』에서도 이미 제임스를 포함한 멜빌, 호손이 형성하는 미국 특유의 전통을 거론한 바 있고(204면) 영국소설의 특징을 플로베르나 발자끄와 비교하여 부각시키기도 하였지만, 이제 그의 사유는 유럽 근대소설을 아우르는 시야를 확보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장르간의 경계마저 넘어서 셰익스피어, 블레이크, 디킨즈, 로런스로 이어지는 영국문학의 ‘창조적 전통’을 구축하기에 이르는데, ‘극시’라는 발상에 장르간 구분의 해체 충동이 내장되어 있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극시로서의 위대한 소설 전통은 장르를 넘나드는 새 전통이 구축되는 와중에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근대문학 전체의 창조적 흐름 속에 좀더 유기적으로 자리잡게 된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듯하다. 장르를 넘나드는 ‘창조적 전통’의 새로운 제시가 디킨즈를 극시로 읽는 책(Dickens: the Novelist)에서 이루어진다는 점부터가 이 둘이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긴밀히 연결됨을 말해준다.

 

 

4. 리비스 소설론의 비평적 함의

 

극시로서의 소설양식에 대한 문제의식이 리비스에게는 일관된 것이지만, 그는 장르론을 포함하여 체계적인 소설이론을 세우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다. 소설의 언어예술적 성취를 통해 구현되는 사유가 다른 어떤 추상적 담론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라 보는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달 수도 있다. 물론 그가 작품의 ‘실제비평’에만 관심이 있고 ‘이론적’ 추구를 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에게는 참된 ‘이론적’ 혹은 ‘원론적’ 탐구와 개별 작품이나 작가의 구체적 성취에 면밀한 관심을 갖는 비평작업이 애당초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소설을 포함한 문학작품을 제대로 읽는 작업은 ‘거시적’인 문제의식을 자연스럽게 추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리비스에게 영국소설에 대한 성찰은 결국 반드시 영국만이 아니라 전유럽 그리고 잠정적으로는 지구적인 차원의 문명과 그 속에서의 인간의 삶에 대한 사유의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 이후 세계를 지배해온 자본주의 근대문명은 삶 본연의 창조적 가능성을 소진시켜왔는데, 위대한 문학은 근대의 인간이 부딪치는 곤경을 통해 그들이 경험하는 삶의 왜곡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살아 있는 삶의 본모습을 어떤 식으로든 담아낸다. 셰익스피어에서 로런스에 이르는 창조적인 작가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삶에 대한 근원적 사유를 수행해가는 것이다.

르네쌍스시대에 이룩된 극문학의 성취가 빅토리아시대의 소설적 성취로 재연되고 있다는 것은, 말하자면 ‘창조적 전통’의 연속성을 지시하는 동시에, 근대사회에서 소설이 가지는 특별한 위상과 의미를 환기시킨다. 동시에 이처럼 소설론이 소설 영역을 벗어나 셰익스피어를 시원으로 하는 창조적 성취 쪽으로 나아가고 또한 민족단위의 문학을 넘어서서 국제적인 문학의 양상으로 넓어지는 것은 리비스의 소설론이 근대문명 전체에 대한 성찰이자 이 문명이 제기하는 근원적 삶과 예술의 문제, 사유와 창조성의 문제에 대한 천착임을 말해준다. 실제로 리비스가 극시로서의 소설론을 발전시키면서 근대문학의 성취를 셰익스피어에서 로런스로 이어지는 창조적 흐름 속에서 바라보는 과정은 근대적 사유를 지배하는 현실, 언어, 사유에 관한 데까르뜨적 이분법적 발상의 극복 노력과 맞닿아 있다. 이는 또한 문학이 ‘삶’에 대한 어떤 것으로도 대치될 수 없는 사유라는 깨달음이 심화되는 것과 하나인 과정이다.

리비스가 ‘리얼리즘’을 직접 거론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그의 소설론이 근본적으로 ‘리얼리즘’적 지향을 갖는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가령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을 논하면서 그 기록과 관찰의 힘을 말하는 대목도 그렇지만 리비스는 장편소설이 어떤 사회학자나 역사가도 능가하는 최고의 ‘사회사’라고 본다. 이는 디킨즈에게서 당대 사회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배운다는 F. 엥겔스의 진술과도 통하는 면이 있거니와, 산문서사가 지니는 총체적 현실 장악력, 분석력을 소설의 특장으로 지목하는 셈이다. 그렇지만 리비스가 말하는 ‘사회사’는 ‘문명의 본질적 역사’에 대한 천착으로서, 사회의 ‘총체적’ 파악을 필수적으로 동반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차원을 가리키고 있다. 달리 말하면 제대로 된 총체적 파악 자체가 있는 현실의 ‘반영’으로만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리비스가 블레이크, 디킨즈, 로런스를 숙독해가는 과정에서 얻어낸 ‘삶’과 ‘현실’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개입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은 덩그마니 주어져 있는 실체가 아니라, 사람들의 나날의 협동 속에 창조되고 갱신되어가는 것이며 따라서 현실파악에는 창조성이 개입하게 마련이며, 리비스가 말하는 ‘삶’은 바로 이런 ‘현실’을 발견하고 창조해가는 잠재적 에너지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또한 구체적인 개개인의 삶들 속에서 말고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삶이며, 동시에 개개인의 삶이란 어디까지나 관계 속의 삶이며 관계를 떠난 삶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리비스의 생각이다. 삶 자체가 고도로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인 성격을 띤다는 말인데, ‘상호관계성의 최고의 형식’인 소설은 이런 삶의 감각을 일깨우고 되살리며, ‘문명의 본질적 역사’도 그런 삶의 감각을 통해서만 비로소 이룩되는 것이다. 리비스의 ‘극시론’이 디킨즈와 로런스의 본격 장편소설을 통해 ‘도덕적 우화’를 넘어서서 총체성을 담지하는 긴 산문서사의 특성에 더 다가가면서도, 자본주의 대서사를 창조해낸 발자끄에게 리비스가 끝내 냉담했던 것도 발자끄에게 이같은 삶의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는 판단에서다.

리비스가 이론이나 체계보다 작품에 대한 면밀한 읽기를 추구하고 그의 비평문에 많은 인용들이 나오는 것도 문학에서 개진되는 사유가 다른 어떤 담론으로도 요약될 수 없는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리비스에게 문학적 사유는 결국 뛰어난 작품이란 추상적·논리적 사유보다 근원적인 사유이며, 어찌 보면 추상적·논리적 사유 자체가 이 근원적 사유에서 자립해나온 파생물이면서 근대에 이르러 사유의 자격을 독점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문학에서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사유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문학에나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문학은 지배이데올로기를 포함한 우리의 타성적 감성과 이해를 거스르고 해체하는 속성을 지닌다. 독서는, 그리고 비평은 작품에서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인식의 갱신을 동반하는 사유의 모험에 동참하는 과정이다. 문학 행위는 물론이고 비평 행위 또한 “전 존재를 건 씨름,”8) 김수영(金洙暎)이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쓴 표현대로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고투를 요구하는 행위인 것이다.

 

 

5. 나가는 말

 

리비스의 소설론을 제대로 논의하자면 거론된 소설가들의 작품에 대한 좀더 세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리비스는 소설에 대한 체계나 이론을 따로 세우기보다 구체적인 작품 논의를 통해 소설론을 개진해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한계가 있는 대로 ‘위대한 전통’ 및 ‘극시로서의 소설’이라는 리비스의 발상이 갖는 의미를 규명하고, 이 모든 작업이 그가 비판하고 또 그 대안을 모색하는 현대문명의 문제로 이어져 있음을 말하고자 하였다.

그의 소설론은 근대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 및 이와 연관된 탈근대적 지향까지 포함하는 것으로서, 문화 및 문명 비판과 맺어져 있는 밀도에서 실로 만만치 않은 도전을 보여준다. 물론 작품의 창조적 성취와 그 수준을 따지는 리비스적인 비평이 평가를 상대화하거나 기피하고 체계에 따른 문학 이해를 앞세우는 현금의 비평풍토에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론의 득세로 인해 문학이 오히려 위기를 맞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도 하는 상황에서 현재의 대세를 거스르는 활동으로서의 리비스적인 비평이 갖는 의미를 다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우리 문학에서 과연 리비스가 말하는 의미에서 문명의 대세에, 그리고 사회의 모순에 살아 있는 창조력으로 맞서는 작품이 얼마나 산출되고 있는가를 비평은 물어야 할지 모른다. 리비스 스스로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을 세우는 데서 시작한 작업을 유럽으로까지 지역을 확장하고 장르의 구분도 뛰어넘는 사유의 모험을 선보였다. 리비스가 시야를 유럽으로 한정한 것은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리비스 당시나 이후에도 비서구권에서 산출된 창조적 성취들 가운데는 그가 말하는 극시로서의 소설의 성취에 근접하는 성과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사실 리비스도 이런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리비스는 똘스또이가 근대문명 최고의 소설을 산출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으로 당대 러시아가 근대와 전근대가 착종된 후발 자본주의국가였다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이는 곧 똘스또이가 근대문명의 정황들을 무슨 절대적 인간조건이 아니라 역사적 사태로, 살아있는 삶에 대한 실감과 함께 바라볼 수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감각, 삶의 감각이야말로 리비스가 문학을 읽는 정신이자, 위대한 작품이 수행하는 ‘삶에 대한 사유’에서 그가 내내 주목해온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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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비스가 이같은 의미를 부여한 소설에는 중단편도 제외되지는 않지만 그의 소설론에 주축이 되는 것은 장편소설(novel)인데, 우리의 논의에서도 ‘소설’은 대개 ‘장편소설’을 가리키는 약칭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2) 리비스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 조지 엘리엇, 헨리 제임스, 조지프 콘래드』, 김영희 옮김, 나남 2007, 16면. 원저 제목은 The Great Tradition: George Eliot, Henry James, Joseph Conrad으로 초판은 1948년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의 인용은 번역서를 기준으로 본문에 면수만 표시하되, 필요한 경우 번역에 손질을 가했다. 이 책의 부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본격적 점검에서 오스틴은 제외되는데, 리비스는 오스틴은 각별히 길게 다룰 필요가 있어서라고 적어놓았다(16면). 그러나 오스틴에 대한 미루어둔 본격적 점검은 끝내 시도되지 않는데, 리비스가 평생의 비평적 동반자였던 아내 Q. D. 리비스의 작업에 기대는 면도 있지만, 뒤에 가서 위대한 영소설의 전통을 말할 때 “디킨즈에서 로런스까지”라고 오스틴을 배제하는 듯한 표현을 이따금 쓰는 것을 보면 판단이 바뀐 것은 아닌가 하는 짐작도 하게 된다(English Literature in Our Time and the University, Cambridge UP 1969, 170면).

3) 리비스가 후에 영국문학의 진정 창조적인 흐름을 소설로 계승한 두명의 가장 중요한 소설가로 디킨즈와 로런스를 꼽을 정도로 로런스를 높이 보면서도, 그는 로런스 역시 20세기의 작가로서 ‘고립’의 댓가로 작품에 일정한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Anna Karenina: Thought and Significance in a Great Creative Work,” Anna Kareninaand Other Essays (Chatto & Windus 1967), 23면.

4) G. Singh이 리비스 사후에 편집한 Valuation in Criticism and Other Essays (Cambridge UP 1986)에 수록된 “Valuation in Criticism” 283면.

5) 이는 ‘시’나 ‘극’도 마찬가지다. 가령 리비스는 드라이든의 희곡은 시나 시극이라기보다 운문 극장물이라고 말한다. The Living Principle: ‘Englishas a Discipline of Thought (Chatto & Windus 1975), 151면.

6)Anna Kareninaand Other Essays에 수록된 “The Americanness of American Literature” (1952)에서 처음 나온 이 발언(145~46면)은 이후 Dickens: the Novelist (1970)에 이르기까지 거듭 등장한다.

7) English Literature in Our Times, 76면.

8) English Literature in Our Times, 12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