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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진보교육감 시대, 무엇을 해야 하나
이기정 李基政
서울 미양고 교사. 저서로 『학교개조론』 『내신을 바꿔야 학교가 산다』 『국어공부 패러다임을 바꿔라』 『교육을 잡는 자가 대권을 잡는다』 『교육대통령을 위한 직언직설』 등이 있음. gaedong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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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을 말하는 것은 너무 거창할 수 있겠다. 교육감선거라고 해봤자 지방자치선거의 한 부분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올해 치러진 6·4교육감선거의 시대정신을 묻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아이들의 행복은 현 교육감들이 선거에서 내세운 제일 중요한 가치의 하나였다. 그들이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선거공보와 선거공약서에는 ‘행복’이란 말이 빠짐없이 등장했다. 이것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나타난 현상이었다.
행복한 학교 특별한 교육(김석준 부산교육감) / 모두가 행복한 교육이 시작됩니다(이청연 인천교육감) / 경쟁보다 아이들의 행복이 먼저입니다(장휘국 광주교육감) / 아이도 선생님도 부모도 모두 행복해지는 미래 세종교육 프로젝트(최교진 세종교육감) / 오늘 행복한 아이가 내일 성공합니다(이재정 경기교육감) / 뿌리 깊은 나무처럼 행복교육도 흔들려서는 안됩니다(민병희 강원교육감) / 아이들이 행복해지면 세상이 행복해집니다(김병우 충북교육감) / 아이들에게 희망과 행복과 미래를 물려줄 수 있는 새교육이 필요합니다(김지철 충남교육감) / 행복한 학교생활을 위한 김승환의 약속(김승환 전북교육감) / 행복한 학생, 열정 있는 교사, 즐거운 학교(장만채 전남교육감) / 1등도 꼴찌도 행복한 창의적인 학교(박종훈 경남교육감) / 최고의 교육가치는 아이들의 행복입니다(이석문 제주교육감) / 대구 교육, 행복 꽃 피다(우동기 대구교육감) / 깨끗하고 품격 높은 행복교육 도시 울산(김복만 울산교육감) / 안전하고 행복한 학교를 만들겠습니다(이영우 경북교육감)1)
행복이 6·4교육감선거를 지배한 중요한 가치가 된 데는 세월호사건의 영향이 컸다. 세월호의 비극이 없었다면 교육감들은 아이들의 행복에 대해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행복이란 가치가 느닷없이 부각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도 중요한 교육가치였다.
새누리당 박근혜(朴槿惠) 후보가 2012년 7월 17일 발표한 ‘기다려온 변화, 박근혜가 바꿉니다’라는 제목의 대선교육공약 맨 앞에 나오는 말이 무엇이었던가. “꿈과 끼를 끌어내는 행복교육을 만들겠습니다”였다. 당시에 ‘행복교육’은 상당히 파격적인 말이었다. 당위적 차원에서야 흠잡을 데 없이 좋긴 하지만 우리 교육이 처한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위선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박근혜 후보는 그것을 교육공약의 핵심가치로 제시했다. 그리고 그 말은 대통령선거와 동시에 진행된 서울시교육감 보궐선거에서 보수진영 문용린 후보에 의해 그대로 사용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에서 교육공약의 핵심가치로 행복을 내세운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육에 대한 국민의 가장 큰 욕망을 입시에서의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그것과 완전히 대립되는 듯싶은 말을 공약의 전면에 내세우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물론 진실성을 의심할 수는 있다. 당시 박근혜 후보와 그의 교육참모진은 득표에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에 그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말의 진실성 여부가 아닐 수 있다. 눈여겨볼 점은 그들이 행복이란 말을 득표에 도움 될 것으로 생각했다는 사실 자체다. 그들은 국민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욕망의 미묘한 변화, 즉 아이들의 행복에 대한 바람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포착했던 것이다.
이렇게 행복이란 가치는 2012년 대선에서 이미 중요하게 부각되었다가 2014년 6·4교육감선거를 맞이하여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6·4교육감선거의 시대정신은 단연코 아이들의 행복이었다.
그러나 13명의 진보교육감 당선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진보도 놀랐고 보수도 놀랐다. 사실 교육감선거는 보수의 프레임이 유리하게 작동하는 선거다. 그것은 오랫동안 우리 국민의 가장 강렬한 욕망이 입시에서의 성공이라는 데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대다수 국민은 자신의 자녀가, 자기 지역의 학생이, 모교의 후배가 입시경쟁에서 승리하기를 강하게 원한다. 이러한 욕망의 실현을 가지고 다툴 때 대다수 국민은 보수진영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어쩌면 보수진영이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교육감선거 때마다 진보진영은 단일화를 잘 이루는데 보수진영은 왜 그렇게 못했는가? 굳이 단결하지 않아도 승리할 것 같은 선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상황은 조금씩 변했다. 국민의 마음속에 또다른 욕망, 즉 아이들의 행복을 바라는 욕망이 서서히 자라났다. 그리고 그 욕망은 세월호의 비극을 통해 현저히 더 커졌다. 아직 그 절대적인 크기에서는 입시경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욕망에 미치지 못하지만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아이들의 행복에 대해서 진보와 보수 어느 쪽이 더 충실할 것으로 보이는가? 국민은 대개 진보진영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의 행복과 관련한 진보의 이미지는 긴 세월에 걸쳐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한 진실을 담고 있다. 물론 박근혜 후보가 선구적으로 행복을 얘기했고, 보수진영의 문용린 교육감이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사용했지만, 그 몇가지 행위로 수십년에 걸쳐 축적된 진보진영의 자산이 단번에 보수의 자산으로 바뀔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13명의 진보교육감 탄생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아이들의 행복을 6·4교육감선거의 시대정신이라 생각하면 진보교육감 시대의 도래는 필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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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감의 1차적 소명은 아이들의 행복 증진이다. 그것은 국민이 6·4교육감선거를 통해 진보교육감에게 부여한 시대적 사명이다. 그런데 그것의 실현은 아주 어렵고 힘든 일이다. 학생들의 행복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대학입시경쟁의 완화일 것이다. 조희연 서울교육감이 선거공보에서 사용한 말을 빌려 얘기하면 ‘무모한 경쟁교육을 중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학입시경쟁의 완화는 사회가 바뀌어야 가능한 일이다. 입시경쟁의 치열함이 대부분 사회문제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왜곡된 정치·경제제도와 인센티브 시스템, 지나친 학력(學歷) 숭배문화, 과도한 중앙집권주의, 강고한 대학서열 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쟁의 치열함을 완화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렇게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정부의 힘을 총동원해도 어려운 일이다.
입시제도의 개선을 통해 경쟁의 완화를 꾀하는 것은 어떤가? 그러나 오랫동안 지켜본 대로 그것은 성공하기 어렵다. 그것은 이쪽의 경쟁을 저쪽의 경쟁으로 옮겨가게 만들 뿐 경쟁 자체를 완화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입시제도의 변경은 매우 손쉬운 일이라 이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것은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그래서 역대 정부가 하나같이 이 유혹에 빠져들었다. 조희연 교육감 또한 대입제도의 개선을 중요한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대입제도의 개선으로 경쟁의 완화를 이룰 수는 없다. 예컨대 수시모집은 학생부, 정시모집은 수능 중심으로 단순화하겠다는 공약부터가 그렇다. 논술시험의 폐지를 염두에 두는 것 같은데 논술시험이 사라진다고 해서 입시경쟁이 완화되지는 않는다. 설사 속마음이 수능시험까지 없애거나 수능시험을 자격고사로 전환하는 데 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논술과 수능에서의 경쟁이 내신경쟁으로 그대로 옮겨가 학교성적을 둘러싼 경쟁이 한결 격화될 뿐이다.
물론 입시제도의 변경은 경쟁의 형식과 내용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온다. 하지만 그것이 아이들의 행복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진보진영이 애착을 갖고 시도하는 정책이 오히려 아이들의 행복에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대학입시를 완전히 내신 위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의도와는 다르게 학생들의 고통이 더 심해질 수 있다. 물론 내신 위주 입시가 갖는 장점은 적지 않다. 논술고사나 수능시험 위주의 입시에 비해 부(富)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아 교육에서의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다. 특히 지역적 불평등의 완화에 공헌할 수 있다. 특목고(특수목적고등학교)나 자사고(자율형사립고)에 비해 일반고에 유리한 입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신 위주의 입시는 입시경쟁의 질을 더 비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다. 내신의 주된 경쟁자는 같은 학교를 다니고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친구다. 반면에 수능시험이나 논술고사에서의 경쟁자는 주로 얼굴을 모르는 다른 학교 학생이다. 어떤 경쟁이 학생들에게 더 큰 고통을 주겠는가? 어떤 경쟁이 학생들의 인성에 더 부정적 영향을 끼치겠는가? 내신 위주의 입시가 갖는 긍정성은 아무런 댓가 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쟁의 성격을 더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나서야 얻어지는 것이다.2)
사회의 흐름에 따라, 교육적 필요에 따라 입시제도의 변경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은 버려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학입시제도를 변경하는 것은 교육감의 권능을 크게 벗어난 일이다. 그것은 대부분 교육부가 독점한 권능이다.
결국 대학입시제도를 통해 진보교육감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교육감의 권능을 벗어난 일이기도 하지만 설사 권능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교육부로서도 입시제도 변경은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측면이 더 크다. 사회적 논의를 활성화해 교육부를 압박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절망스럽기만 하다. 대학입시와 관련해서는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 어떤 큰 변화가 오기 전까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행복’은 허무맹랑한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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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말을 거창한 의미로서가 아니라 조금이나마 아이들을 덜 고통스럽게, 덜 힘들게, 스트레스를 덜 받게 만들겠다는 정도의 소박한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허무맹랑할 이유는 없다. 그조차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 정도의 목표라면 도전해볼 만하다. 구체적인 실천과제도 많이 있다.
첫째, 고교평준화의 강화를 통한 고교진학 단계에서의 입시경쟁 완화 및 폐지. 고교입시는 초·중학생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물론 학생들의 최종목표가 대학진학에 있기에 대학입시가 더 결정적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고교입시 또한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고교입시를 폐지하거나 최소화하면 초·중학생의 고통을 완화할 수 있다. 따라서 자사고와 특목고는 가급적 일반고로 전환하거나 선발과정에서 성적의 영향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리고 고교비평준화 지역은 가급적 평준화 지역으로 전환해야 한다. 물론 교육감의 권능으로 고교평준화를 온전히 실현할 수는 없다. 상당부분 교육부가 그 권능을 교육감과 나누어 갖고 있다. 결국은 권능의 부족으로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패하더라도 어떤 모습으로 실패하느냐가 중요하다. 실패를 하더라도 국민의 마음속에 고교진학 단계에서의 입시는 폐지하는 것이 교육적으로나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나 더 바람직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면서 실패해야 한다.
고교진학 단계에서의 입시경쟁을 폐지하거나 완화하는 문제에 대해선 다소 맹목적이라 보일 정도로 공세적 자세를 취해도 된다. 구체적 전술은 유연하고 다양해야 하지만 전반적인 태도는 거침없이 대범해야 한다. 비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다수 국민의 지지가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는다.3)
둘째, 학생에 대한 대폭적인 자율성의 부여. 정규교육과정은 학생에게 상당한 정도로 강제적이다. 소질과 적성을 살리기 위해 학생에게 교과선택권 등을 대폭 부여한다 할지라도 학생들이 어떤 선택이든 반드시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강제적일 수밖에 없다. 정규교육과정 상의 일정한 강제성은 불가피할 뿐 아니라 교육적으로도 정당하다. 하지만 정규교육과정 이외의 학교활동에서는 학생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예컨대 보충수업(방과후학교)과 야간자율학습 등에서는 참가여부를 온전히 학생의 자유의지에 맡겨야 한다. 학부모의 정서를 고려해 과도기를 거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분명한 원칙이어야 한다. ‘내신대비반’ 같은 성격의 보충수업은 참가여부 결정권과 상관 없이 아예 허용해선 안된다. 대개의 학교에서는 보충수업을 하는 교사가, 보충수업에 참가한 학생들이 보는 정규시험의 출제자이다. 내신대비 보충수업은 자신이 출제하는 정규시험의 성적을 올려주기 위해 학생을 모아 댓가를 받고 진행하는 방과 후 과외수업인 것이다. 이러한 수업은 통상의 비교육적인 정도를 넘어서는 범죄에 가까운 행위이다.
학생들에게 큰 고통을 주는 비교육적 행위가 입시를 빌미로 합리화되는 일은 진보교육감 시대를 끝으로 사라져야 한다. 그러한 행위들은 사실 입시에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입시경쟁은 어차피 제로썸(zero-sum)게임이기 때문에 모든 학생이 강제보충수업이나 강제자습을 하는 순간 그 변별적 효과가 사라진다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다. 그런 강제학습이 학생의 입시경쟁력을 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어떤 학생에게는 그것이 이로울 수 있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그것을 희망하는 학생들에게만 시행하면 된다.
셋째, 학교규율체계의 합리적 재구성. 상당히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학교규율체계는 아직 상당히 엉터리다. 작은 일에 대해서는 엄격하면서 큰 잘못에는 상대적으로 관대하다. 학교규율은 엄한 것이 바람직한가, 아니면 관대한 것이 바람직한가는 본질적 질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행위에 관대해지고 어떤 행위에 엄격해져야 하느냐이다. 타인과 자신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규율을 현저히 완화하거나 아예 규율을 적용하지 않아야 하고, 타인에게 큰 피해를 주는 일에 대해서는 규율을 엄하게 해야 한다.
타인과 자신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 행동을 규제하느라 학교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학생을 괴롭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어느 학생의 머리카락이 길다고 남들이 조금이라도 피해를 받는 일은 없다. 머리카락이 긴 학생 자신에게도 아무런 손해가 없다. 이런 것들은 개인의 자유의지에 완전히 맡겨두어도 된다. 교복을 늘이거나 줄여 입는 등 취향에 해당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가급적 규율을 아예 적용하지 않아야 한다.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후로 상황이 현저히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진보교육감의 시대에는 더 뚜렷한 개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타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일은 얘기가 다르다. 예컨대 학교폭력 행위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더 엄한 규율을 적용해도 된다. 수업의 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학생인권조례 시행 등을 통해 자신과 타인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 행위에 대해 학생에게 더 많은 자유를 준 것은 역대 진보교육감들이 잘해온 일이다. 하지만 타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일에 대해 안이하게 대응한 것은 진보교육감들이 잘못해온 일이다.4)
타인에게 큰 고통을 주는 행위에까지 너무 관대해지면 선량한 다수의 학생이 고통을 겪을 수 있다. 실제로 대다수 학생은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제법 엄한 규율을 원하고 있다. 교사의 타당한 지도에도 막무가내인 일부 학생의 행태에 대해서도 많은 학생이 엄격한 규율을 요구한다. 그래야 학교의 평화가 유지되고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심각한 일탈행위를 막기 위한 학교규율의 강화에는 진보교육감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퇴학 같은 엄한 처벌도 과감히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퇴학을 비교육적인 조치로만 볼 것이 아니다. 타인에게 큰 피해를 주는 잘못된 행위를 하면 엄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학생이 깨닫게 하는 것까지도 학교의 정상적 교육으로 생각해야 한다.5) 물론 이를 위해서는 교육청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개별 학교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퇴학 처분을 내리더라도 다른 차원에서 이 학생들을 지속적으로 교육하고 감싸안아주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교육청이 나서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넷째, 다섯째, 여섯째, 그리고 또……
교육에서도 관료주의의 폐해는 심각하다. 어쩌면 그 어느 분야보다 심각할지 모른다. 우리나라 교사는 학교에서 교육자답게 생활하지 못하고 거대한 교육관료체제의 말단관료처럼 지내고 있다. 교육청이 학교 위에 군림하며, 학교의 조직체계는 아예 행정업무를 기본으로 한다. 교사는 교사로서의 본질을 잃고 각자의 업무부서에서 업무담당자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교사로 하여금 교육자로서의 본질을 잃게 만드는 이러한 학교 제도와 문화는 오랫동안 우리 교육을 망쳐왔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주는 것을 막아왔다. 물론 이 문제를 교육감의 권능으로 온전히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교육감이 펼치는 정책이 학교문화에 작은 변화를 줄 수는 있다. 그리고 교육감의 태도와 자세가 교사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혁신학교의 성공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혁신학교는 그에 대한 다양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재학생들이 느끼는 만족감이 대체로 큰 편이다. 혁신학교의 성공은 교육의 발전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물론 섣부른 욕심은 금물이다. 혁신학교의 실패는 진보교육감의 실패로 귀결될 수 있는 만큼 성공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하지만 양적 확산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지금의 학교 제도와 문화 속에서, 혁신학교의 질적 성공을 다수의 학교에서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번 학기부터 경기도교육청에서 9시 등교를 시행하고 있다. 꼭 9시가 아니더라도 등교시간을 얼마간 늦추는 것은 바람직하다. 등교를 조금 늦게 하면 성적이 떨어질까? 외국의 경우엔 등교시간을 늦췄더니 오히려 성적이 올랐다는 사례가 많다. 우리나라 언론에도 꽤 많이 보도된 내용이다. 등교시간을 늦추면 하교시간이 그만큼 늦춰지기 때문에 조삼모사에 불과한 정책이란 비판은 적절한 비판이 아니다. 동일한 시간이라도 아침 한시간과 오후 한시간이 아이들에게 주는 영향은 현저히 다르다. 그리고 아침시간에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강제적 자습시간을 없애면 늦추어진 등교시간만큼 하교시간을 늦추지 않아도 된다. 일찍 등교하고 싶어하는 학생은 어떻게 하느냐고? 간단하다. 그 학생들은 일찍 등교해 원하는 일을 하면 된다. 학생들의 전체적인 행복지수는 분명히 올라간다.6)
진보교육감이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할 일은 그밖에도 많다. 그중에는 국민이 알 수 있는 커다란 일도 있지만 대개는 알기 어려운 아주 작은 일들이다. 큰일을 성공시키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작은 일을 여러개 잘 해내는 것 또한 중요하다.
대학입시가 존재하더라도 학생들은 지금보다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덜 불행해질 수는 있다. 어른들이 조금만 더 지혜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학생들의 고통 중 상당부분은 분명 치열한 입시경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다른 일부는 교육계와 우리 사회가 가진 시대착오적 낡은 생각, 고루한 인습, 입시공부에 대한 무지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행복을 희생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진실의 전부가 아니다. 끝없이 불행하기만 한 학생들은 도중에 지쳐서 입시경쟁이란 마라톤을 완주하지 못할 수 있다. 학생들을 적절히 행복하게 하는 것은 입시경쟁력의 향상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학생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또는 불행지수를 낮추는) 길은 입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존재한다. 진보교육감은 그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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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감이 아이들의 행복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까? 교육감직선제가 갖는 ‘어떤’ 위험성을 생각하면 이러한 질문은 아주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교육감직선제의 중요한 단점은 교육감직선제가 학생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점차 커져가고 있긴 하지만 아이들의 행복을 향한 국민의 욕망은 아직 강고하지 못하다. 여전히 입시경쟁에서의 성공이라는 욕망에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무리 진보교육감이라 해도 입시를 향한 지역주민의 욕망을 무시하기란 어렵다. 이 사실은 그들의 선거공보에도 잘 드러나 있다.
2013년 수능성적 표준점수 평균 전국 1위, 상위권 표준점수 1~4등급 비율 전국 1위, 최하위인 표준점수 8~9등급 비율 전국 최하위(장휘국 광주교육감)
대입 수능성적 전국 상위권, 2013학년도 수능성적 분석결과 8개도단위 1위, 16개 시·도 중 4위(김승환 전북교육감)
2012, 2014학년도 수능시험 원점수 만점자 배출(장만채 전남교육감)
이러한 표현은 김복만(金福萬) 울산교육감의 선거공보에 나온 “서울대 합격자: 2012년 83명→2013년 92명” “수도권 주요대학 합격자: 2012년 314명→2013년 576명” 등의 표현보다는 덜 노골적이긴 하다. 하지만 진보교육감조차 입시경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을 보여주는 데는 충분하다. 입시에 대한 지역주민의 욕망에 더 강하게 부응한 쪽은 영남의 보수교육감들임이 분명하지만 호남의 진보교육감들도 지역의 입시성과에 상당히 얽매이는 모습을 보인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입시경쟁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아이들의 행복에 대한 욕망이 입시경쟁에서의 승리라는 욕망을 넘어서지 못하는 현실에서 입시에서의 성공을 향한 학부모의 욕망과 교육감직선제가 잘못 만나면 가뜩이나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학생들을 더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입시경쟁은 제로썸 게임이다. 어느 한쪽의 승리는 반드시 다른 쪽의 패배를 불러온다. 어느 한 교육청의 승리는 반드시 다른 교육청의 패배를 불러온다. 개인 간의 입시경쟁과 학교 간의 입시경쟁만으로도 버거운데 여기에 교육청 간의 입시경쟁이 더해진다고 생각해보라. 우리 현실에서 교육감직선제는 이런 가능성을 상당하게 내포하고 있다.
다행히 이런 위험성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고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그 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는 교육감직선제의 필연적 귀결이 아니다. 직선제 초기부터 진보교육감이 소수나마 존재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진보교육감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교육감직선제가 지금처럼 아이들의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작동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직선제 초기부터 진보교육감들은 입시경쟁 프레임에 강력한 제동을 걸어왔다.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는 등 아이들의 행복에 기여할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교육의 상식으로 조금씩 자리잡아가고 있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복지’ ‘경제민주화’ 등 진보친화적 의제를 자신의 것으로 삼았듯이 다음 교육감선거에서 보수후보들이 진보친화적인 교육의제를 내세워 당선될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안타까워할 일이 전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행복이 증대되고 우리 교육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한발 더 나아가는 그 자체이지 그것이 누구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느냐가 아니다. 보수가 집권을 위해 진보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실현하려 한다면 바람직한 일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진보의 승리일 수 있다.
진보교육감 시대에 아이들은 더 행복해져야 하고, 아이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진보교육감의 가치와 정책이 사회적 상식으로 굳건하게 자리잡아야 한다. 교육청 사이의 경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입시를 둘러싼 경쟁이 아니라 아이들의 행복을 위한 경쟁이 되어야 한다. 진보교육감은 그것이 가능한 문화와 환경을 조성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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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금 우리 교육의 시대정신을 아이들의 ‘행복’이라 말하며 진보교육감의 사명을 찾았다. 하지만 행복의 증대를 교육감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는 것은 뭔가 부족하고 이상하다. 교육이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들어서는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교육의 존재이유가 아이들의 행복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학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학생들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지혜와 인성을 갖추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싫어하는 일도 할 수밖에 없다.
6·4지방선거에서 탄생한 교육감은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교육감이 해야 할 진짜 중요한 일은 따로 있다. 무엇보다 학교와 교실이 점차로 무너지면서 수업의 기본을 유지하는 일 자체가 어려워진 상황이다. 입시 위주의 수업을 넘어서느냐 마느냐를 따지는 것이 사치스러울 정도다. 지역과 학교에 따라 편차가 크지만 중·고등학교의 경우는 그 경향성이 뚜렷하다. 멀쩡한 학교도 적지 않겠지만 그것은 대체로 선발효과에 의한 것으로 모순을 다른 곳으로 전가함으로써 얻어진 경우가 많다.
무엇 때문에 교실이 붕괴하는가? 흔히들 얘기하듯 입시 때문만은 아니다. 사교육의 번성 때문만도 아니다. 둘과의 연관성은 크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교실붕괴는 상당부분 공교육의 무능으로 인해 발생했다. 교육과정의 획일성, 학교제도의 불합리성, 학교운영의 비효율성, 교육부와 교육청의 경직된 관료시스템, 교원승진제도의 불합리성 등 공교육의 수많은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다.
4년 후 다시 치러질 교육감선거에서는 시대정신이 바뀔 것이다. 아니 바뀌어야 마땅하다. 4년 후의 시대정신은 무너지는 학교와 교실을 되살리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교육감의 권능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일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교육감이 짊어져야 할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 그리고 어쩌면 무너지는 교실을 되살리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의 행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일일 수 있다. 설사 공부하기 싫은 아이라 할지라도 붕괴된 교실에서 행복을 느낄 수는 없는 일이다.
진보교육감, 아니 모든 교육감의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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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희연(曺喜昖) 서울교육감은 선거공보(선거공약서)에서 행복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오히려 누구보다 더 강하게 아이들의 행복을 말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우선 조교육감이 선거공보에서 표현한 “우리 아이들에게 삶을 되돌려주고 싶습니다”라는 말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단 뜻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는 선거기간 내내 “모두가 행복한 혁신미래교육”이란 말을 강조했다. 이는 현재 서울시교육청의 교육비전으로 공식화된 말이다. ‘행복’은 문용린(文龍鱗) 전 교육감 때부터 서울시교육청과 산하기관의 각종 공식문서에 계속 등장해왔다. 조희연 교육감이 선거공보에서 이 말을 직접 사용하지 않은 것은 대결상대이자 당시 현직 교육감이었던 문용린 후보가 그것을 오래전부터 사용(‘행복교육’ 등)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던 면이 크다.
2) 성적이 아닌 학생들의 생활이나 인성을 입시에 반영하여 입시경쟁의 성격을 바꾸는 것은 어떨까? 추상적 차원에서 얘기할 때는 매우 바람직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실행되면 그 결과가 성적경쟁보다 더 나쁠 수 있다. 상황을 단순화하여, 예컨대 대학이 ‘착한’ 학생을 선발하려 한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진짜 착한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게 될까? 그렇지 않다. 의도한 것과 달리 실제로는 ‘위선적인’ 학생이 더 많이 입학할 가능성이 크다. 입학사정관제(현재의 ‘학생부 종합’)는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체 대학입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직 작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그 안에서도 성적 외적인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아직 절대적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도 입학사정관제가 보이는 부정적 모습은 염려할 수준이다. 폐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축소가 필요한 상황이다. 만약 입학사정관제가 입시의 주류로 등장하고 입학사정관제 안에서도 성적 외의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금보다 커진다면 상황은 크게 악화될 수 있다. 그로 인한 문제점은 성적 위주의 입시가 보였던 문제점이 아무것도 아닌 듯 느껴질 만큼 심각할 수 있다.
3) 현재 고교평준화와 관련해서 가장 큰 쟁점은 서울의 자사고를 일반고로 전환하는 문제다. 역시 저항은 만만찮다. 수많은 반대논리가 동원되고 있다. 정확한 논리적 대응이 필요하다. 전국 자사고의 절반가량이 집중된 서울의 경우, 일반고에 자사고가 끼친 부정적 영향은 특목고가 끼친 부정적 영향보다 훨씬 크다. 무엇보다 일반고의 성적분포가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특목고는 중학교의 최상위권 학생을 주로 선발하지만 자사고는 일반고에서 수업의 중심축이던 중상위권 학생을 집중적으로 선발한다. 자사고 등장 이후 서울 일반고의 성적분포도를 보면 중상위권 학생층은 현저히 얇아지고 하위권 학생층은 그만큼 두꺼워졌다. 학교마다 사정은 많이 다르지만 그것이 서울 일반고의 대략적인 상태다. 하지만 자사고의 폐지는 비단 일반고 살리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입시에 의한 진학을 어느 단계에서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입시에 의한 진학은 언제부터가 바람직한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존재한다. 대학진학 단계다. 1960년대까지는 중학교 진학 단계에서도 입시가 존재했지만 이제는 그 단계에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교입시를 주장하는 사람은 아직 있지만 아주 많지는 않다. 1970년대에 시행된 고교평준화제도에 대한 사회적 지지는 확고한 편이다. 대다수는 고교진학 단계까지는 입시가 없는 것을 더 바람직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며, 교육적으로 바람직하고, 아이들의 행복에 기여한다. 그리고 입시 없는 고교진학은 교육선진국의 보편적 현상이기도 하다.
4) 이런 점에서 학교폭력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었을 때 진보교육감들이 이명박정부와 대립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당시 이명박정부의 학교폭력 대응방안은 학교규율체계의 전체적 균형이란 측면에서 보면 큰 문제는 없었다. 강화해야 할 규율을 강화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바람직했다. 가해학생에 대한 징벌내용을 학생부에 기록(일정기간이 지나서 삭제)하도록 한 방안조차도 학교규율체계 전체를 고려하면 그다지 심한 처벌이 아니다. 늦잠으로 지각한 행위는 무단지각이란 이름으로 학생부에 기록되어 지워지지 않는다. 학교에 지각하는 학생은 대개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못 받는 경우가 많은데 학생부는 이들에게 평생의 낙인을 찍어온 것이다. 이에 비하면 학교폭력 가해로 인한 처벌내용을 일정기간 기록하는 것은 오히려 온건한 조치라 할 수 있다.
5)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한마디하면 나는 학생에 대한 퇴학조치를 무작정 강화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나는 흡연학생에 대한 퇴학처분 등에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우리나라 고등학교는 많은 경우 흡연횟수가 3~5회에 이르면 퇴학이라는 규칙을 갖고 있다. 그런데 퇴학은 현재에도 학교폭력 행위 중 아주 악질적인 경우에만 내려지는 처분이다. 이러한 규칙은 자신보다 약한 학생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행위가 담배를 피운 행위에 비해 그 나쁜 정도가 훨씬 덜한 것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예전에 비해 많아 나아진 면이 있지만 아직도 전반적인 학교규율체제는 학생에게 교육적으로 잘못된 신호를 주고 있다.
6) 청소년의 생체리듬상으로도 등교시간을 늦추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필요성과 실제로 등교시간을 늦춘 이후의 긍정적 효과에 대해 간단히 참고할 수 있는 기사로 EBS <뉴스G> ‘청소년들은 왜 아침잠이 많을까?’(2014.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