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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신용목 愼鏞穆   시인.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가 있음. 97889788@hanmail.net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평론집 『소설의 고독』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이 있음. myosu02@hanmail.net

 

최원식 崔元植  문학평론가. 인하대 명예교수. 저서로 『민족문학의 논리』『한국근대소설사론』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문학의 귀환』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등이 있음. ps919@hanmail.net

 

 
 

정홍수 벌써 올해 마지막 좌담이네요. 오늘은 최원식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지난 세기 70년대부터 한국문학 현장을 가까이 또는 멀리서 지켜온 선생님께서는 최근 작품들을 어떻게 보고 계신지, 선생님의 혜안과 고견에 기대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최원식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겨우 통독한 형편이라 두분 말씀을 경청하고 혹 보탤 게 있으면 보태는 식으로 하려고 합니다.

 

 이하석 시집 『연애 間』

 

문초_연애 間_fmt

정홍수 이하석(李河石) 시인은 동년배이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최원식 또래를 만나서 우선 반갑고, 여전히 시에 정진, 이만한 규모의 시집을 낸 점에서 감사한 생각이 들었어요. 더구나 시에 분노가 있어요. 보도연맹 학살을 다룬 「가창댐」이나 동경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을 다룬 「붉은 강」, 옛날 일만이 아니고 요즈음 쟁점인 4대강을 비판한 「낙엽서」 「야적」 같은 시들이 그렇습니다. 그 연세에도 여전히 분노가 살아 있다는 점이 고마웠어요.

 

정홍수 그런데 전체적인 시의 정조로 보면 ‘분노’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최원식 따듯한 연민도 있어요. 몸이 불편한 할머니가 용왕님께 기도하려고 절벽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실사구시로 그린 「태종대 굿당」에는 시인의 눈매가 선하게 떠오릅디다. 일생 밭일하던 어머니께 시를 한수 배우는 「별밤」도 재밌어요. “와, 여긴 별들이 많네요.” 했더니 “시인이 어째 그 정도밖에 안돼?” “아이고 무시라 별밭이네!” 하시는데, 느낌의 현재에서 발화하는 시적 순간이 절묘합니다. 민중으로부터 시적 영감을 길어올리는 하방을 기꺼이 수행한 7,80년대 민중시의 전승과 해후하는 기쁨이 저로서는 각별합니다.

 

정홍수 예, 저도 그런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매화우(梅花雨) 서사」는 재개발 이야기가 나도는 도시 한가운데의 섬 동네를 꽃비처럼 떨어져내리는 매화우를 전경화화면서 그려내는데, 그네들의 고달픈 삶에 다가가려는 애틋하고 따뜻하고 때론 익살맞은 시어 하나하나의 정감이 너무 생생합니다. 그런데 민중시의 속 깊은 서정을 충분히 품고 있으면서, 3연의 “온 동네에/매화/우 매화우가,/덧정 없이,/내린다.”에서 보듯 짧은 행과 행갈이의 묘미를 통해 시라는 것을 흠뻑 다시 맛보게 하는 진경을 펼쳐냅니다. 매화우 내릴 때 “순이가, 그만, 죄, 죄, 하며/발끝 오므린다.”의 ‘죄, 죄’도 그렇지만 시집 곳곳에 “팽창팽창” “첨벙!” “굴신굴신” “수북수북” “으앙!” 등등 의성어나 의태어의 돌연한 솟구침 하나로 시를 확 열어젖히는 대목들도 너무 좋더군요.

 

신용목 처음에는 세계의 폭력성에 맞물린 개인의 서사가 그려진 5,6부에 눈이 갔는데요. 나중에 뒤에서부터 다시 읽기 시작하니까 「사람들」 같은 시가 새삼 달리 느껴졌어요. 흐린 영상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상처와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 근대사의 자궁”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끝내 왜 그런지, 당사자와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아 처음엔 좀 의아했는데, 이야기하되 호명하지 않는 방식을 통해 심연을 만들어내는 저력이 느껴졌어요. 이제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투명함 속에 아주 맑은 ‘시대의 독’ 같은 것을 응축시키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고, 대립과 대결을 통해 부각하기보다는 폭력성 자체를 무화시키는 방식으로 그것을 자연으로 되돌려놓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정념이 포착하는 구체성의 세계가 결국 보편적인 세계로 치달아 함몰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안타까워했다가, 나중에는 그 무화된 세계에 각기 다른 배후가 스며 있는 것 같아 좋았어요. 「엉겅퀴」나 「수북수북」 같은 시에도 그 단서가 있고 「빈집」도 마찬가진데, 유추할 수 있는 역사가 있고, 유추할 수 있는 고통이 있겠지만 그것의 실체를 표면으로 불러들여 특수화하지 않으려는 태도? 궁극적으로 이름을 삭제함으로써 이름을 환기시키는 효과를 내는 것 같았어요. 앞서 말씀하신 말을 운용하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는데, 그게 가장 직접 드러나는 시가 「봄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홍수 정말 그렇죠. 「봄색」에서 봄의 갖가지 분홍에 가닿고자 하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아이처럼 맑아서 빙그레 웃었습니다. “달콤맵싸레연두비스무리분홍 밭머리.”라니요. ‘비스무리’라는 말이 이렇게 절묘하게 시에 들어올 수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시어의 한계랄까 표현의 한계를 어쩔 수 없이 수락하는 마음 한편으로 시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같은 것도 느껴졌습니다.

 

신용목 「새5」나 「달」은 짧은 시인데, 하이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정홍수 「수달」은 짧지는 않은 시지만, 마지막 연을 “첨벙!/첨벙!”으로 끝내는 지점에서 그런 느낌을 받게 되더군요. 행이 짧은 시들이 많은데, 말을 아끼고 행과 행의 여백을 품으면서 시의 진실에 도달하려는 마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 가운데 “나도 그렇게 비탈에 서 있음을.”(「나무」)이나 “검은 생각의/수면 위에/멍하니 떠 있는 배의”(「배」) 같은 구절에서 느껴지는 시인의 자기 좌표 점검이 떠밀린 기억들과 회환 속에서 밀도 높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최원식 이하석 시인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 그중에서도 후자에 더 가까운 시인으로 기억됩니다만, 이번 시집에서는 그 사이에서 슬그머니 이탈하여 서정시의 본령에 쓱 들어선 듯해요. 무심한 듯 유심히 시인의 감각과 사상에 무늬지는 삶의 결들에 자신을 너그럽게 열어두고 있어요. 이 양반도 확실히 은퇴한 것 같아.(웃음) 그중에 저는 「봄날」이 특히 좋았어요. 황사 속에 핀 꽃 한송이에서 봄의 핵심을 파악한. 이 시는 거의 지용(芝溶)이 재림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서정시의 명편입니다. 뭐 하나 더하고 뺄 수 없는, 침투 불가능한 그 자체로 완벽한 세계가 그대로 툭 출현했어요.

 

정홍수 특히 마지막에 “그 소리의 언덕을 넘어가는//갈기 수런대는 말.”은 ‘말’의 이중적 의미를 충분히 살리면서 시인이 그 ‘갈기 수런대는 말’들과 함께 넘어가고 싶은 생의 어떤 진경, 시의 어떤 언덕을 깊은 울림으로 환기합니다. 정말 절창이죠.

 

최원식 이 시집 최고의 작품입니다.

 

정홍수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다룬 「가창댐」을 보면 “애비로서의 죽음을/그 아들딸로서 거두는 한”이라는 표현이 연마다 거듭 나옵니다. 얼핏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는 문장인데, 이념적인 차원에 기대지 않고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장식이나 과장 없이 담으려는 마음이 무척 힘있게 다가왔습니다. 아까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분노’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시인이 자기 자신만의 눈, 생각, 언어를 오래도록 묵히고 담금질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신용목 이하석 시인이 예전에는 대상을 내면으로 포획하는 시 쓰기를 했다면, 어느 순간에 대상을 그것이 떠나온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시집이 그 성공적인 사례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원식 그럼에도 불만을 얘기한다면, 분노·연민의 작품들과 「봄날」 같은 서정시 사이에 부조화가 있어요. 다시 말하면 전자가 「봄날」수준의 시적 성취를 이룬 것 같지는 않다는 거지요. 이 정도의 시력(詩歷)을 가진 시인이라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무언가 묵직한 게 다가와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보이네요. 마치 일기 쓰듯이 시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힘 빼고 그날그날의 감각에 충성하는 것도 소중한 작업이긴 하지만, 대구에서 시 쓰는 중진시인의 다른 안목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면 더 좋지 않았을까 욕심이 납니다.

 

정홍수 시집에서 많이 나오는 표현이 ‘어둠’ ‘바래다’, 시간으로는 ‘황혼’ 같은 것인데요, 「하얀 어둠」을 보아도 어둠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 시인에게 특별히 중요한 무게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하나 완전히 어둠 속으로 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하얀 어둠’ ‘흰 어둠’이란 표현도 단순히 이미지의 차원에서 그려진 게 아니라 모종의 경계에서 모순과 맞서고 있는 시인의 현재적 긴장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불만을 느끼신 지점이 이쪽도 보고 저쪽도 보는 그 경계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을 듯 싶은데요. 「대구탕」이라는 시가 있잖습니까. 대구라는 지역과 대구탕이 묘한 맥락을 갖고 시의 밑그림을 이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뭔가 어정쩡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사회적·개인적 좌표, 거기서 생겨나는 우울 같은 게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더군요. 진솔하게 느껴졌습니다.

 

© 송곳

 

신용목 최선생님께서 그런 문제제기를 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대체로 젊은 시인들이 시집 전체를 하나의 주제나 방법론으로 기획하고, 그렇지 못한 채 심상을 수집한 듯한 시집에 대해 곤란함을 말하곤 해서요.(웃음) 한편 시에 있어서만큼은, 우리 삶이 맥락을 가진 것 같지만 사실 불균질성 속에서 이어지듯이, 물론 세계를 일관된 인식의 흐름으로 포착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높게 살 만하지만, 의도적인 것보다는 자기 앞에 도착한 세계를 그리는 것이 더 마음을 움직이는 게 아닐까 합니다.

 

최원식 예전에 소설가 한남철 선생이 해준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한선생이 어느날 종로에서 이형기 시인과 해후했는데 봄이었대요. 한선생은 참여파고 이시인은 순수파니까 뭐 자별한 사이도 아닌데 이시인이 모처럼 만났는데 그냥 헤어질 수 없다, 우리가 앞으로 봄을 몇번이나 더 맞이하겠느냐, 어디 다방에 가서 차라도 마시고 헤어지자고 해서 두분이 다방에서 잠깐이나마 회포를 푸셨다는데 뭉클했어요. 아마도 그런 심경들이 『연애 』이라는 시집에 담긴 것 같아요. 시간의 바퀴를 의식하면서 새삼 나와 세상을 다시 겪는 어떤 즉물성이 신선합니다. 모쪼록 인상주의의 심화과정에서 이 시인만의 새로운 시적 경지를 보여주실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함기석 시집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문초_힐베르트 고양이 제로_fmt

정홍수 함기석(咸基錫) 시집은 어떠셨어요?

 

최원식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예요.(웃음) 원래 시 읽기는 중노동인데 젊은 시집은 각오를 단단히 해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요. 쉬엄쉬엄 읽어나가다가 3부 「광주에서」와 「작은 새: 김남주를 추모하며」에 이르러 이 시인도 80년대 민중시와 연결되는구나 싶어서 일단 안도했어요. 그런데 그 분노가 왜 이렇게 표현되고 있는가, 더 솔직히 얘기하면 왜 이렇게 왜곡되는가 싶었습니다. 고봉준 형이 함기석의 시는 “언어의 권력을 향한 시적방화”라고 해설했던데, 혹시 이 반란이 정치혁명의 불가능성에 부딪히면서 언어혁명으로 내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어요. 평소 젊은 시인들 시를 읽으면서 그 언어적 급진성이 어디에서 왔을까 궁금했거든요. 이번에 함기석 시를 집중적으로 읽으며 그게 현실이 아니라 언어에 불을 지르는 거구나 했습니다.

 

정홍수 함기석 시집에는 단지 상징적 차원에만 그치지 않는 죽음에 대한 예민한 자의식이랄까 감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사적 아픔이나 가난의 이야기도 구체적인 시의 맥락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내적인 언어혁명의 지향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이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물음을 괄호 친 자율적이고 폐쇄적인 움직임에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파괴를 위한 파괴는 아니고, 해체나 파괴의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해도 그다지 전위적이거나 실험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점에서는 덜 세련된 부분마저 있지 않나요. 오히려 좋았던 시편들은 현실의 그림자, 아픔이 투명하게 드러나거나, 적절한 시적 우회로와 맞물린 경우였습니다. 이 시인 특유의 수학적·기하학적 상상력이 뭔가 불가피하고 간절한 흐름을 얻은 시편들 말입니다.

 

신용목 이번 시집에는 서정시를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의미론으로 치환할 수 있는 작품이 많았어요. 그동안 함기석 시가 기호를 동원하는 등 초현실적인 느낌 속에 형식미학적 도전이 과하게 표출되어 있다고 느꼈는데, 이번 시집을 보면서 그전까지 왜 그런 작업을 해야 했는지 한꺼번에 이해되기도 했어요. 세계를 외면하거나 기발함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모든 시가 그렇기도 하겠지만, 말로는 충당할 수 없는 이미지가 그에게 생각보다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앞부분 몇편의 시들에 그런 우주적인 이미지의 기미가 있는데요,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기표가 아니라 기표 자체가 세계의 본질일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것은 기표가 만들어내는 절대적인 시공간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일 텐데요, 말하자면, 세계도 혁명도 인식의 차원에서 애초부터 다르게 구조화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시인이 추구하는 절대성이 개개의 상대성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이어지고 있는 듯해서 많이 아쉬웠는데, 오히려 이번 시집에서는 한발 편히 내려선 느낌이 들어서 좋았어요. 좋았던 시들은 기호학적인 시선과 서정성이 묘하게 만나는 시들인데, 「양배추는 날 뭐라 생각할까」라든지 「아내가 내온 육면체 큐브」 같은 시들이 그렇습니다.

 

정홍수 「아내가 내온 육면체 큐브」 정말 좋죠. 가난한 부부의 ‘묵’ 먹는 이야기. 묵을 육면체 브라고 부르고 거기서 가난과 울분의 음악과 살덩이를 감각하는 상상력, 접시에서 고요히 요동치는 혁명을 꿈꾸는 상상력은 이 시인만의 특권적 영역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최원식 맞아요. 이 시집 최고의 시지. 이 작품은 나중에 시선집에 들어가도 좋을 가편입니다.

 

신용목 이 작품도 기호학적 시선으로 대상에 접근하는데, 그 형식이 내면과 만나면서 만들어내는 진경이 완전히 현실적이지도 완전히 비현실적이지도 않은 세계를 포착하고 있어요. 그런 식의 시 쓰기 방법을 가장 잘 감지할 수 있는 시가 「첫 데이트」인데요. ‘4’라는 숫자를 중심으로 시를 풀어가면서, ‘네 시를 향해 가고 있다’라는 말 속에 시간성과 더불어 공간성을 부여합니다. 말하자면, ‘네 시’라는 추상에 어떤 실물을 제공하면서 묘한 감정까지 엮어내려는 시작 태도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문제는 오히려 정반대의 시작 방법으로 씌어진 시편들이 아닐까 합니다. 이를테면 「백발의 고독이 마루에 혼자 앉아 있다」라든지 「종이비행기」 같은 시들은 서정적인 언어로 시를 완성하려다 지나치게 퇴보된 듯한, 우리 서정시가 이미 다 거쳐와 조금은 뻔한 언어들을 구사하고 있어 안타까웠습니다.

 

정홍수 그러고 보니까 어떤 시들은 너무 단정해지면서 동시 풍으로 물러나버린 느낌마저 있습니다. 다만 말씀하신 「첫 데이트」에서 “네 시”는 ‘너의 시’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고, 「호른 속에 사는 사람」에서 ‘호른’이라는 단어가 반복되다가 ‘어른’으로 이어지는 지점 등을 보면 말놀이의 느낌도 있죠. 음악적 회화적 측면을 포함해서 시어를 폭넓게 사용하고 열어놓으려는 노력으로 보였습니다.

 

신용목 「첫 데이트」는 시 자체로 뛰어나다기보다는 시인이 시를 써나가는 방법적인 면이 가장 잘 요약돼 있는 시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체적으로 뛰어난 명편도 많지만, 한편으로는 가벼운 낭만성을 드러내는 시들도 눈에 띕니다. 「허공의 장례」나 「얼굴」도 그렇고, 「수직선수평선」 같은 시들은 대상에 접근하는 방법도 좀 나태할뿐더러 쉽게 감상성을 노출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정홍수 저는 어느 면 좀 정형화되어 있다는 느낌도 받았어요. 물론 시인만의 자기 스타일일 수도 있는데, 시를 구조화해가는 일정한 패턴 같은 게 감지되더라고요. 함기석 시인은 자기만의 언어, 상상력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시인이고, 아까 최선생님이 말씀하신 ‘시의 갱신’을 소화해낼 충분한 역량이 있는 시인인 듯한데, 방법적인 측면의 추구가 분리되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경계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원식 매너리즘이랄까, 그런 경향이 없지 않은 듯해요. 초현실주의나 입체파 등 그런 사조의 그림이나 음악 들에서 온 인상을 우리말로 옮긴 듯한 작품들이 적지 않은데 시적 방화라기보다는 오히려 기시감이 컸어요. 이 점에서 우리 셋이 이구동성으로 찬탄한 「아내가 내온 육면체 큐브」가 재밌어요. 이 시에서도 묵을 육면체 큐브로 추상한 데는 시인의 독특한 감각이 감지되지만 번역을 넘어 발견으로 진전했습니다. 아내가 내온 묵을 보며 “아내가 잃은 자유”를 사유하는 시인의 자기비판이 예리합니다. 자신의 ‘혁명적’ 작업도 아내의 침묵에 의해서 보호되고 있다는 점에 대한 뼈아픈 자기비판이 있잖아요. 박노해의 「이불을 꿰매면서」의 새로운 버전인데, 자신 또는 자신의 작업 자체를 상대화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적 자유가 생동합니다. 자기확신이 너무 센 사람은 괴로운 법인데, 특히 문학하는 사람에게는 쥐약이죠. ‘언어적 방화’라는 자기 시학, 자기확신을 풀고, 아내로 표상되는 소수자, 약자, 타자를 받아들이는 시적 사유의 전개가 팽팽합니다. ‘시적 방화’를 너무 의식하면 분노가 언어로 치환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분노가 사라지는 역설도 발생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자기 시학을 세우되 현실과 마주세워 끊임없이 점검할 때 좋은 시가 나오는 훌륭한 예증일 겁니다. 아마도 이 시집에 좋은 시와 진부한 시가 병존한다면 이유는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아요.

 

정홍수 올 한해 좌담에 참여하여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읽으며 계속 의식하게 되었던 문제이기도 한데요, 좀더 철저하게 언어체로서의 시 안에서 세계를 구조화하고 타자성과 부딪히려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하나의 흐름인 듯합니다. 진부한 동일성의 서정을 깨뜨리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나름의 정당성도 갖고 있고요. 그런데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지점이 있는 듯해요. 텍스트 바깥은 어떻게 해도 존재하는 것이고, 바깥 현실과의 긴장은 여전히 문제로 남는 것 같습니다. 함기석 시인의 경우도 여러가지 시적 실험을 하고 있지만, 가령 「그녀의 뒤뜰」에 나오는 “고아원 뒤뜰 같다 그녀의 등은”이나 “고아원 뒤뜰에 몰래 쌓이는 눈 같다 죽음은” 같은 표현은 그 현실의 시간 안에서 흘러들어온 흔적이랄까 꼬리표를 분명히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좋은 의미의 ‘낯설게 하기’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좋은 시란 결국 이런 시간, 이런 언어를 포착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어의 내파라는 것도 이런 차원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겠고요.

 

신용목 저도 젊은 시인들 시를 읽으면서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는데요. ‘무언가를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시를 쓴다’는 절실함보다 ‘어떻게 써야 새롭게 쓸까’라는 방법론적 고민이 많아지면서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아내가 내온 육면체 큐브」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2부에 배치되어 있는 ‘아픈 아이’에 대한 감각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약속」 「조약돌」 「튜브」 「찡찡공주가 잠든 봄밤」 등은 모두 실질적인 주변인 또는 아이의 고통과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겪으면서 씌어진 시들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그것이 타자나 자신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실감을 시 속으로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보았습니다.

 

정홍수 「저녁의 비행운」은 바로 그 아픈 아이, 가난의 현실이 직접 등장하는 시죠. 옆집 무화과나무 아래 상추를 만원짜리 지폐로 보고 “저 싱싱한 지폐에 구름과 삼겹살을 싸 배터지게 먹고/돼지가 되고 싶은 날이다”라는 날것의 발언이 오히려 군더더기 없는 시가 됩니다. 특히 “사람의 문장보다 아픈 저녁이다”라는 대목은 시인이 우리가 오늘 느낀 일말의 우려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표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최원식 그런데 뜻밖에 난 또, 1930년대 김기림 모더니즘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어요. 특히 『기상도』 시절의 뿌리 없는 국제주의에 기초한 느닷없는 명랑성 있지? 현대회화나 현대음악을 시 속에 담는 취미도 그것과 연결되는 것 같은데, 그런 것들도 다 방화를 해버려야 하는 거 아냐? 방화를 하려면 더 철저하게 해야지요. 앞으로 방화 자체도 방화하는 그런 경지로 나아갈 것을 기대합니다.

 

안희연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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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최근 황인찬 시집이 젊은 독자들로부터 각광받고 있는데요. 그의 시는 시선을 축소시키면서 행간을 벌려 그 휴지(休止)를 통해서 시적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거기에는 깊이에 대한 사유보다는 표면에서 미끄러지는 어떤 아우라가 배어 있어요. 세련된 시작법이고 분명 매혹적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창작방법을 가진 시들의 함정은, 쓰면 쓸수록 자신의 장점이 스스로를 깎아내린다는 데 있는 것 같아요. 그 아우라가 병렬적으로 축적될 뿐 내면의 치열함과 맞물려 새로운 운동에너지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쉽지 않은데요. 안희연(安姬燕)의 경우는 그 반대편에서 시를 쓰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타일이나 유행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곳에서 세계를 뜨거운 실재로 대면하려고 노력하는 시인입니다. 물론 잔혹동화 속 애절하고 애잔한 주인공 같은 이미지가 들어 있기도 하지만, 세계의 복판에 자신을 세워둔다는 점에서 이 시인의 작업을 눈여겨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원식 시가 언어의 놀이다, 언어 바깥은 없다, 텍스트 바깥은 없다는 데리다의 말처럼, 젊은 시인들은 확실히 그런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함기석 시는 그래도 언어의 방화 쪽으로는 좀 작위적인 인상도 받는다면, 안희연은 더 악화된 건지 심화된 건지 아주 내장적이야. 말하는 그대로 그냥 방화가 되는 시야, 안희연 시는.

 

정홍수 시라는 장소 안에서 어떻게든 버티고 있겠다는 절박성에서 안희연의 시는 좀더 특별한 느낌을 줍니다. 이게 이들 세대의 공통감각일 수도 있겠죠. 밖에서 보면 언어 안에서의 난해한 놀이 같겠지만, 우리에게는 여기뿐이라는 절실성 말입니다.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은 어떤 세대선언 같은 느낌도 들잖아요. 실패가 내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달리 어쩔 수 없다는. “그러나 우리에겐 노래할 입이 있고/문을 그릴 수 있는 손이 있다/부끄러움이 만드는 길을 따라/서로를 물들이며 갈 수 있다”는 대목은 감동적입니다. 그럴 때 시 안에서 말하고 그리는 법뿐 아니라, 시의 주체조차 계속 찾고 발명해가야 할 테죠.

 

신용목 말씀에 한가지만 보태자면, 물론 언어의 세계를 드나들고 있지만, 현실의 고통과 상처를 고스란히 동반한 채 진입하고 있어요. 그곳은 말씀처럼 다른 공간일 테지만 현실과 무관한 지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믿음이 갑니다.

 

최원식 안희연의 시는 고뇌와 언어가 하나로 응결돼 즉물적이고 즉각적이어서 안과 밖이 없는 것 같아요.

 

신용목 전통적 관점에서 시를 바라볼 때의 개념과 최근의 젊은 시인들이 생각하는 시에 대한 개념이 다른 것 같아요. 이렇게 바뀐 게 아니라 애초부터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는 거죠. 함기석 시인까지는 기존 문법에 대한 대타 언어로서, 반()언어로서의 시를 썼다면, 이제 안희연 세대에 오면 그런 반작용조차도 없이 전혀 새로운 장르를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게 2000년대 이후 우리 시의 가장 큰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홍수 「백색 공간」이라는 같은 제목의 시가 여러 나오는데, 쉽게 말해 시를 쓸 장소도 도구도 다 새로 장만해야 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종이도 없는 거죠. ‘이누이트’ 이야기가 나오는 동명의 시에서 “나는 이곳이/완전한 침묵이라는 것을 알았다//종이를 찢어도 두 발은 끝나지 않는다/흰 개의 시간 속에 묶여 있다”고 할 때 그런 맥락으로도 읽혔습니다. 가슴이 아리더군요.

 

최원식 불행한 세대야. 우리는 전혀 그런 고민 안했잖아요. 문학이 서점에 그냥 있었고, 원고지도 문방구점에 언제나 있었지. 물론 돈은 문제지만.

 

정홍수 그런데 이런 단절감에 과장은 없나요. 가령 이하석 시인과 같은 윗세대로부터 건네받을 수 있는 게 없진 않잖아요.

 

신용목 그 에너지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문법을 가져오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80년대의 당대적 진보성을 가지고 시대와 맞선 에너지와 정신은 받아오되, 그 당시의 진보성을 35년이 지난 지금에까지 그대로 적용한다면 그건 오히려 보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진보는 어느 시대에 빚지는 게 아니라 어느 시대와 결별하는 것이란 생각이 드는데, 문학도 조금은 비슷한 맥락이 있는 것 같아요. 전통적인 문법의 시들이 지금 시대에 유효하냐, 저도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지금 세대는 다른 식의 문학적 저항을 실천하고 있을 텐데, 저는 안희연의 시들에 그런 고민이 녹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스타일리쉬한 시인들의 시집에는 잔뜩 기대하면서 들어갔다가 갸우뚱거리면서 빠져나왔다면, 안희연의 시집에는 무심코 들어갔다가 많은 것들을 받아안고 나오는 기분니다. 일단 밀도가 아주 높은 시들이고, 그래서 가독성이 떨어지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시가 생산해내는 프랙탈 속으로 빠져들면 헤어나오기 힘든 어떤 것들을 제공합니다. 말씀하셨듯이 시 전체를 관통하는 시는 「백색 공간」 같은 시이지만, 이 시집을 읽는 설명서 같은 시는 「액자의 주인」이나 「프랙털」 「입체 안경」 등인데, 이 작품들은 모두 겹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그것은 쓴다는 행위처럼 백색 공간 안에서 출발하지만, 그것 내부와 외부에 다른 시공간의 가능성을 부여하고, 그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인간과 삶의 실체에 대한 물음을 조각나기도 하고 녹아내리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 ‘덩어리’의 물질성으로 바꿔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홍수 이런 세대의 도착은 단지 시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죠. 시집을 읽으며 자그마한 희망의 기운 같은 것 앞에서도 계속 고개를 젓거나 더 단호해지려고 하는 시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더군요. “하루해가 저물 때까지 한 사람을 완성하는 일”(「입체 안경」), “하루치의 슬픔을 배당받고/걷고 또 걸어 제자리로 돌아온다”(「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 오늘 이야기할 조해진의 소설에도 30분짜리 생애를 사는 인물이 나오죠. 인생의 서사가 하루치로 축소된 세대라고 해야 하나요. 밀도 이야기를 하셨는데, 간혹 맥락을 따라가기 어려운 대목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에도 언어의 밀도가 전해주는 긴장만으로 무언가를 버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신용목 그것이 전망을 가지든 안 가지든, 세계를 사유하지 않는 것이 절망이지, 세계를 사유하는 것은 비록 진공상태를 그리더라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 시집에는 ‘벽’ ‘나무’ ‘새’ 이 세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벽’과 ‘흰색’이 묘하게 맞물리기도 하는데요, 밀폐된 공간을 만들고 있지만, 비슷하게 꼭 폐쇄성만은 아닌 게, 거기에서 날개가 돋아난다고 말해요. 가령, 「벽」에서 “테두리를 버리려는 구름의 습관” “벽을 담이라고 발음하는 발목이/이쪽으로 넘어온다”라고 하거나 「가능한 통조림」에서 “새들은 새장 속에 있을 때 가장 멀리까지 날아가고”라고 말한 것처럼, 역설적으로 그 폐쇄성 때문에 가장 멀리까지 사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벽’과 ‘흰색’은 자신과 시의 외피이면서 가능성의 대상이죠. 시인이 ‘벽’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가상의 유토피아로 빠지지 않고 현실의 힘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리고 「화산섬」 「히스테리아」 「줄줄이 나무들이 쓰러집니다」에 등장하는 ‘나무’와 더불어 ‘새’가 벽에서 태어나서 벽 바깥으로 날아가는 그 상징성이, 슬픔으로 가득 찬 곳에서 희망을 드러내는 방법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최원식 시집 전체가 세월호에 바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우리 시대의 묵시록, 세월호를 하나의 문학적 사건으로 전유하는 고투가 장관인 시집입니다. 특히 침몰하는 선실 안 아이들의 모습을 재구성한 「상상 밖의 모자들로 가득한」은 상상이 그대로 현실인 듯, 가슴이 먹먹할 정도예요. 대단한 신인입니다.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라는 시집 제목도 의미심장해요. 자신을 문제삼는 거잖아요. 김남천이 1930년대 카프계 시를 비판하면서 마치 전차가 궤도를 왔다갔다 하는 것같이 나를 통과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는데, 그런 경향이 예언자적 카리스마가 서정적 주체로 설정되곤 한 7,80년대 민중시에도 보였습니다. 이에 비해 오늘날 젊은 시인들이 언어부터 점검하는 것만큼 자기를 문제삼는 것, 다시 말하면 그 어떤 것이라도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돌이켜보면 모두가 가엾다”는 후기의 발언도 이와 연관될 듯해요. 나를 타자로도 놓아보고 타자를 또 자기로도 놓아보는, 타자성에 대한 이해가 자기에 대한 이해로 되는 순환이 아름답습니다. 연민으로 분노를 둥그렇게 감싸면서 분노가 더욱 깊이 스며 육체화한달까, 더구나 언어로 직조하는 솜씨도 훌륭해서 기대가 됩니다.

 

정홍수 너무 칭찬 일변도라 한마디 덧붙이면, 기시감이 느껴지는 대목들도 없지 않았어요. 안희연 세대의 문화적 참조물들을 알려주는 시들도 많았고요. 완전한 ‘백색 공간’은 아닌 셈이죠. 그렇긴 해도 “장갑은 손처럼 생겼지만 손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나에게는 없는 손을 장갑 속에서 발견한다면/얼마나 부끄러워질 것인가”(「하나 그리고 둘」) 같은 데서 그에 대한 예민한 자의식도 동시에 엿본 느낌입니다. ‘하나 그리고 둘’도 유명한 영화 제목이고, 요즘 많이들 읽는 뽀르뚜갈 작가 뻬소아에 기대어 쓴 시도 있습니다. “문득 손이 뜨겁다 손끝에서 이름이 돋아날 것 같다”고 하려면 자기 세대의 현실을 너무 특권화하고 싶은 유혹도 이겨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용목 ‘잘린 발’ ‘없는 발’의 이미지가 계속 출현하기도 하는데요, 자기 발로 도달할 수 없는 것을 내면에서 극복하려는 시들이 많다보니 약간 상투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 같아요. 시집 전체의 함의를 포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목에서부터 이 시들이 감상적으로 소비될 가능성도 있는 것 같아 우려됩니다.

 

최원식 나도 아쉬운 점을 얘기한다면, 뭔가 모험이 정형화되어 있는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읽다보면 솔직히 지루한 감도 좀 있거든요. 그리고 요새 젊은 시인들이 한국시의 맥락으로부터 너무 단절되어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최근 한국문학은 다시 해외문학파시절로 돌아갔어. 작가도 그렇고 평론가도 그렇고 독자도 그렇고, 모두 외국문학·외국이론에만 매달려요. 일종의 내국망명이. 한국사회가 진화된 것의 반영이겠지만, 우리 언어를 다루는 시인이나 소설가 들이 의식적으로라도 다시 현실로 굴을 뚫어야, 통로를 뚫어야 된다고 생각해. 지금 우리 젊은 시인들은 너무 다른 세상에서 소요하고 있어서 걱정이에요. 거기서 아무리 용맹정진해도 누가 알아먹겠어요. 일본시처럼 되지 않을까 두려운데, 일본에 가니 시인들의 고립이 심각하더군요. 좀 과장하면 시는 외계어고 시인들은 그 암호를 해독하는 고독한 수신자라고 할까. 우리 시인들한테 꼭 말씀드리고 싶어. 의도적으로라도 통로를 뚫어야 한다, 이 상태가 방치된다면 일본시처럼 될지도 몰라요.

 

신용목 아직 새로운 통로를 만들진 못했지만 그래도 그 통로를 뚫기 위한 굴삭기를 만드는 정도로 봐주실 수 없을지요.(웃음) 근데 빈말이 아니라 저는 이 시인의 시에서 고정희 시인도 느껴지고 허수경 시인도 느껴져요. 무엇보다도 세계 속에서 몸부림치는 모습이 보였거든요. 그 몸부림이 말씀하신 우려를 극복할 에너지가 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문학청년들에게 스타일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세계와 치고받는 가운데 뿜어져나오는 자신의 언어에 주목하고 또 그 안에서 절망하는 시인의 시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최원식 첫 시집이죠? 첫 시집부터 볼 게 없으면 정말 문젠데, 이만한 첫 시집도 드물지 않을까? 앞으로 어떤 굴삭기를 만들어 어떻게 우리 시의 암흑면을 개척해갈지 지켜볼 작정이에요.

 

조해진 장편소설 『여름을 지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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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수 최근에 집중적으로 한국소설을 읽을 기회가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떠셨는지요. 오늘 작품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전체적인 소회 같은 걸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최원식 최근 모 문학상 심사를 하면서 예심에서 뽑아 올린 8권의 장편을 통독했습니다. 올해 소설이 흉작에 가깝다는 예심평 말마따나 눈에 확 띄는 작품이 잘 안보이더군요. 그래도 지식인소설에서 대중세상으로 가는 회로를 마련하려는 작업에 골몰한 권여선의 『토우의 집』과 조세희의 ‘난쏘공’을 새롭게 잇고 있는 황정은의 『계속해보겠습니다』를 만난 것은 행운이지요. 그런데 이 장편들도 궁핍해요. 전자는 아직 이월중이고, 후자는 위생처리된 납작함을 연상케 하는 그 문체 및 동화적 분위기와 그 내용 또는 현실 사이의 괴리가 여전히 커요. 새로운 시대 상황에 즉해 형식의 앙가주망조차 성취한 새로운 물건이 나와야 하는데 시에 비해서 소설이 좀 덜하네요.

 

정홍수 현실과의 밀착이라는 점에서는 소설이 시보다는 더 부담이 많은 장르이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세상이 나아갈 방향이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데서 어려움이 가중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조해진(趙海珍) 소설에도 답답하고 아픈 현실이 넘치게 담겨 있습니다. 그 아픔을 바라보는 소설의 시선이 너무 착고 섬세해서 뭔가 딴지를 걸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최원식 말씀하신 대로 착한 소설인데, ‘빈 방’이라는 한 공간에 인물들을 몰아넣으려는 구성에 작위성이 드러납니다. 차이 밍량(蔡明亮)의 영화 「애정만세」가 생각나더라고. 90년대 중반에 이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어요, 한국엔 아직 도착하지 않은 포스트모던이 대만에는 이미 와 있구나 하는. 빈집을 전전하는 세 남녀가 등장하는 구도가 아주 비슷해요. 영화에서는 이들이 왜 아파트를 전전하는지 구구한 설명 없이 젊은이들의 생태를 즉물적으로 제시할 뿐으로 관객을 압도합니다.

 

정홍수 배제되고 밀려나는 사회적 약자들이 우연히 하나의 공간에 모이는 모티브 자체는 근자의 한국소설에 그리 드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애정만세」의 인상적인 설정도 선행 영화든 다른 텍스트든 영향 받은 지점이 있을 테고요. 문 닫은 가구점에서 쉴 곳을 찾는 인물들의 이야기 정도는 이제 우리 현실에서도 충분히 설득력있는 상상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조해진 소설은 나름의 섬세하고 독창적인 디테일을 갖고 있고요. 「애정만세」가 포스트모던한 단절감에 강조점을 둔다면, 조해진 소설은 젊은 세대가 겪는 사회적 곤경을 공동체의 윤리적 시선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는 차이도 있고요. 다만 이 소설의 작위성에 대해서라면, 다른 측면에서 지적할 부분은 분명 있는 것 같습니다.

 

최원식 아니 뭐 표절이라는 건 아니고,(웃음) 그래도 읽으면서 자꾸 영화가 떠올라서 방해가 돼요. 물론 이 소설은 영화와 달리 세 주인공의 이야기에 두터운 사회성을 입히지만, 난 그 점이 오히려 소설을 흐트러뜨리는 듯해요. 그리고 왜 그 방에 그렇게들 들어가는지 납득이 안돼요.

 

신용목 저희 세대에게는 그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납득되는 면이 있어요. 외부 세계 어디에도 설 곳이 없다는 인식에서 어딘가로 숨어들고 싶어하는 마음이랄까요. 작중 인물도 실패와 파멸 이후에 그런 행동을 하는데요. 이 시대가, 전인체로 일관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지 않고 오히려 인격 자체를 파편화시키고, 나조차도 어느 순간엔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를 정도로 불안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나의 지반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 같아요. 이제 ‘전형’은 없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예측 불가능한 사건의 당사자만 놓여 있지 않나. 그래서 가구를 통해서 장인의 숨결을 느끼는 순간이 민에게 매혹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충동적이고 우발적으로 하는 행동들, 가령 은희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민이 103호로 뛰어가서 에로틱한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나, 수가 연주의 지갑을 가져다주려다가 뜬금없이 돈을 훔치는 장면처럼, 갑자기 어떤 충동에 이끌려 극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대목도 저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불균형적이고 비연속적인 자아의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데 공감하는 바가 있을뿐더러, 그 느닷없는 순간을 소설로 포착해내는 재능이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다만 이런 점들을 ‘착한’ 사회적 요소 속에서 자꾸 환기시키려고 하는 것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정홍수 지금 이야기한 착한 사회적 요소를 소설 속에서 구현해내는 인물이 회계사 사무실을 그만두고 공인중개사 보조원으로 일하는 ‘민’이라는 여성인데요, 그녀의 행동과 선택이 쉽게 납득되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 한 인물에게 너무 많은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나 싶어요. 아까 최선생님이 말씀하신 작위성과도 관련되는 부분일 테고요.

 

최원식 내가 뭐 왕년의 리얼리즘을 고수하는 건 아닌데, 최소한의 사실주의적 기율은 소설의 기초지요. 과연 현실에서 이런 인물, 특히 민 같은 인물이 있을 수 있을까. 과장 진급을 앞둔 3년차 대리인 민이 약혼자 종우 때문에 직장을 때려치고 부동산 중개인 보조로 떠돈다는 게 이상하고, 끝에 민이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취직하는 것도 그래요. 요즘 같은 취직난에 민이란 여자는 ‘경단녀’인데도 취직도 잘하대. 민을 인물의 초점으로 삼으면 ‘몰()윤리적 휴일’(non-moral holiday)에 겪은 에피소드들을 느슨하게 묶은 이 소설은 일종의 삐까레스끄(picaresque)예요. 직장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한 여성이 빈 방들을 떠돌다가 결국 다시 직장을 구해 사회로 복귀하는 이야기가 축이니까.

 

정홍수 조작된 감사보고서 문제로 인한 종우의 실직과 파혼, 해고노동자의 죽음 등이 지금 민으로 하여금 소설 속의 낯선 여름으로 들어오게 한 계기인데요, 그렇긴 해도 지금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구멍은 잘 메워지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작가가 그때그때 민의 선택이나 동선을 세심하게 설명하려고 하는 것도 그런 점을 의식했기 때문일 테고요. 그러나 적어도 이 인물이 석달의 여름을 보낸 뒤,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지막엔 선배의 회계사 사무실에도 나가지 않기로 하지 않나요? 문제는 그 변화의 내용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 아닌가 합니다.

 

최원식 물론 이 소설의 ‘휴가’가 보통 삐까레스끄처럼 몰윤리적인 사기행각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약자들과 교감하는 윤리적 휴가지만, 기본 구도는 다시 돌아가는 거야. 그 점에서는 몰윤리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홍수 그런데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앞으로 이 인물이 세상을 좀더 아프게 감응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여러 경험을 겪은 것에 의미를 둘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다보니 제가 수비수가 되었는데요.(웃음) 현실을 너무 어둡게 그리면서 무력감을 과장하거나 인간 심성의 악마성을 과도하게 부각는 소설이 많다보니 이번 조해진 소설의 ‘착함’에 점수를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문학과 윤리의 문제에서도, 그게 현실을 그려나가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성찰의 대상으로 떠올라야지 선험적 가이드라인처럼 작동한다면 ‘윤리’의 차원에서도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가이드라인은 비평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요.

 

신용목 가구점이나 빈 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기만의 세계를 확보하려는 것일 수 있고, 그것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할 텐데요. 그곳에 ‘수’가 들어오니까 민이 쉽게 인간적인 관계를 허락하는데, 그것을 그 공간의 특수성만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이 소설이 가진 결함은 아닐까 생각했어요. 일종의 인간성의 안전지대 같은? 단절과 고립의 카테고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연대가 아마도 작가가 세계를 극복하는 의지일 텐데, 작가의 의도 속에서 상처와 그 극복 과정이 순서 없이 뒤섞여버렸다는 인상입니다.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현실의 참담함에 대답해야 한다는 어떤 강박 같은 걸 느꼈던 것 같아요. 지금 우리가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작품 외적 측면에서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정홍수 그런 면에서 ‘이연주’라는 인물은 좀더 살아 있는 느낌을 주지 않나요? 이 인물을 중심에 놓고 있을 수 있는 갈등을 좀더 부각는 쪽으로 소설을 진행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사실상 별 기대할 내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악바리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연주 같은 인물은 의외로 우리 소설이 놓치고 있는 지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연주를 보면서 아침 출근길 전철에서 우연히 핸드백 틈으손수건으로 싼 도시락을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최원식 맞아요. 사실 이연주 통해서 많이 배웠어요. 난 세상에 쇼핑센터 옥상의 놀이공원에 그렇게 힘들게 사는 젊은이들이 있는 줄 몰랐지. 이 소설 읽은 다음에는 백화점이나 쇼핑센터 옥상을 유심히 보게 되. 보람연립 대목처럼 부자연스런 계몽주의 부분은 덜어내고 민 대신에 이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면 좋지 않았을까.

 

신용목 실제로 만나면 지나치게 건강해서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짜증 한번 안 내고 뭐든 긍정적인 바탕 위에서 생각하는 사람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웃음) 그런 면에서 저는 되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제 주변에 다 우울한 사람만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웃음)

 

최원식 아무튼 조해진 소설은 요새 우리 소설이 직면하고 있는 곤경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평가받아야 할 곤경이지만요.

 

정홍수 조해진은 『로기완을 만났다』(창비 2011)에서 보여준 것처럼 작가 자신을 철저히 셈법에 포함시키면서 사회적 약자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언지 정공법으로 질문하는 작가인 것 같습니다. 이번 작품도 그 연장선에서 평가가 가능하지 싶고요. ‘작가의 말’을 보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쓴다는 건 공감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욕망이 아닐까, 아무것도 아니면서 글만 쓰면 되는 건가” 하고 자문하고 있는데, 이 질문을 계속 붙들고 나아가기를 기대해봅니다.

 

정용준 소설집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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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식 이 소설집을 보게 된 걸 감사하게 생각해요. 처음 읽은 작가인데, 초기 황석영을 연상케 하더군요.

 

정홍수 어떤 점에서 그렇게 읽으셨는지요?

 

최원식 이 소설집처럼 ‘아비’를 집중적으로 탐구한 경우는 많지 않을 거예요. 그 아비들이 생생하게 구체적인데, 한편 우의적이기도 해요. 아비는 결국 너덜너덜해진 특히 최근 한국 같아요. 아비 모르는, 키우던 어미마저 버려서 결국 유례 없는 살인마가 된 아들을 다룬 「474번」은 말법(末法)시대의 심화 과정에 나올 법한 괴물의 탄생을 냉철하고 건조하게 그려낸 디스토피아 소설입니다. 인류사회가 지금 이대로 쭉 가면 이런 괴물이 나올 법하지요. 「474번」에 부재한 아비가 아내를 죽인 살인자로 등장하는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그 아비와 해후한 아들의 이야기인데, 아들이 그 아비를 긍정하지 않지만, 또 부정하는 것도 아닌 특이한 곤경을 절묘하게 서사한 단편입니다만, 제목이 암시하듯 그 너덜너덜한 현실을 슬그머니 껴안는 거지요. 표제작이란 점에서도 재미있습니다. ‘한국이 싫어서’가 뜨는 세태에서 못난 아비를 아비로 인정하고 이 바닥에서 궁그는 이 작품의 낙관은 일종의 탈낙관주의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해요. 양부와 양자의 투쟁을 그린 「개들」은 ‘아비 살해’에 이르는 과정이 생동합니다. 더구나 양부의 어린 여자인 모란과 결합하는 결말에는 정통 희극, 탈춤의 취발이 과장을 연상케 하는 강력한 낙관을 묻어두었습니다. 이태준의 「오몽녀」의 새 버전입니다. 「안부」도 훌륭한 작품입니다. 아들 이준 소위의 의문사를 문제삼는 어미의 긴 투쟁을 그린 이 단편의 장처는 뜨거운 쟁점화 초기 이후, “사람들은 곧 다 잊을” 그 긴 고독의 시간을 파악한 데 있습니다. 이에 비해 유령의 복수를 그린 두 단편, 「이국의 소년」과 「내려」는 손색이 있어요. 마지막 작품 「새들에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네」도 좋았어요. 첩의 아들이 어미와 함께 죽은 누나의 아이를 키우는 얘긴데, 다문화가족의 어두운 실상이 드러난 세부도 뛰어나지만 ‘아들의 아버지 되기’라는 새 이야기를 실험한 점에서도 탈낙관주의가 그럴듯해요. 대단한 신예가 출현한 걸 기뻐합니다.

 

정홍수 아버지라는 테마를 다양한 서사적 변주 속에 넣고 소설적 질문으로 만들어가는데, 문제의식을 밀어붙이는 힘이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만 알레고리의 문제에 대해선 선생님과 생각이 조금 다른데요. 오히려 그간 한국문학 속의 아버지에게 그런 알레고리의 차원이 존재했다면, 정용준(鄭容俊)은 알레고리로 작동할 수 있는 부분을 걷어낸달까 해체하고 그냥 즉자적이고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그려보려 한 게 아닌가. 아버지란 존재를 거의 사물의 지점까지 끌어내려놓고선, 그때 남는 피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거슬러오르며 질문하는 방식이라고 할까요. 방법적으로 그런 시도를 한 게 아닌가, 그렇게 읽었습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그 아버지에게 지금 우리 시대의 사회적 맥락이 달라붙을 수밖에 없는 만큼, 결국은 알레고리로 해석할 지점이 생겨나겠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저에게는 이런 질문의 방식을 찾아낸 게 신선하고 의미있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조금은 작위적이고 서사적으로 무리다 싶은 작품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국의 소년」은 월남전을 배경으로 끌여들였는데 정용준 세대의 작가에게서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있구나 하는 반가움도 있는 반면, 짜맞춘 느낌도 없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군 의문사를 다룬 「안부」에서 주인공 어머니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어머니를 만나 그저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장면은 인물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상으로부터 나오는 자연스러움이랄까, 소설적 진실 같은 게 뭉클하게 느껴져 좋았습니다. 「474번」은 저로선 억지스럽고 인물의 사이코패스적 면모가 주는 소설적 함의가 무언지도 잘 모르겠더군요. 표제작이기도 한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말 그대로 피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나쁜 피’라는 게 신장투석 하듯 걸러질 수 있는 것인가, 그 딜레마를 그대로 받아 안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념적 후광의 상실이든, 가부장적 권위의 해체든 혹은 아버지의 자리의 실질적 붕괴든, 아버지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남는 문제가 있다면, ‘피’의 이야기일 텐데 그 지점을 잘 포착해낸 건 중요한 소설적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개들」은 얼마간 익숙한 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디테일의 묘사에서 보여주는 집요함은 대단하더군요. 가장 좋게 읽은 작품은 「새들에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네」였습니다. 이 작품은 ‘아버지 되기’란 무언가를 물어보는데, 아버지의 자리에 대한 다양한 탐색 뒤에 이 작품이 마지막으로 놓여서 그런지 울림이 더 크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에는 우즈베키스탄 이주 여성이 등장하는데, 그녀를 착취하는 한국인 남편의 형상이 별다른 직접적 진술 없이도 ‘아버지’의 문제와 관련된 여러 착잡한 국면을 환기해냅니다. 그런 세련된 소설적 처리 속에 정용준 세대에게 도착한 ‘아버지 되기’의 문제를 자연스럽고 정직한 방식으로 묻고 있는 게 좋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첫 소설집 『가나』(문학과지성사 2011)에 비한다면 좀더 현실을 향해 육박해온 힘있는 소설을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젊은 세대의 좋은 작가가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개인적 취향인지는 모르겠으나, 소설 안으로 녹아들어오지 못한 듯한 문장들이 간혹 걸리기도 하더군요.

 

신용목 단점부터 말하자면, 저도 문장이 걸렸어요. 너무 쉽게, 추상적으로 처리된 문장들이, 어디 논문 같은 데 있을 법한 문장이 가끔 보였어요. 비슷한 맥락에서, 어떤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단순히 사건을 둘러싼 공간적 배경의 전달이 아니라 작가가 포착한 세계의 특수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세계관이 배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어느 순간엔 그것을 너무 기계적으로 처리하고 만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서사의 힘과 어떤 질문의 집요함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설정하고 무언가를 배치하는 것이 불편할 때가 있는데,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살짝 다른 느낌이 있었어요. 뭐랄까, 그것을 서사에 활용하고 있다기보다는 어떤 문제의식을 환기하기 위해 작동시키고 있다는 느낌? 「474번」도 그런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애초에 이 작품은 리얼리티나 개연성과는 무관하게 씌어졌으니 그렇게 접근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다만 작가가 이런 설정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추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전체적으로 어떤 ‘원죄’를 둘러싼 존재론적 질문을 실존적 차원으로 끌어내려서 구체화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이를테면, 대타자로서의 아버지, 피의 문제, 혈연의 문제라는 숙명을 사회적 문제로 바꿔서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아닐지.

 

정홍수 저는 사회적인 차원을 특별히 부각지 않더라도 정용준 세대가 겪고 있는 현실 감각에서라면 아버지라는 존재는 훨씬 더 불편한 괴물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억지로 사회적 구도를 끼워넣으려 하지 않는 게 더 좋았겠다 싶은 거죠. 신용목 시인이 말한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내려」에서 경찰인 아버지가 소년을 죽이는 삽화나 「이국의 소년」의 월남전 배경은 다소 실패한 듯도 합니다.

 

신용목 가장 좋 단편을 대라면 저 역시 그런 요소들이 배제된 작품인데요. 「미들윈터」 「안부」가 좋았어요. 「안부」에선 인간과 인간의 연대무엇이고, 그 속에서 위로와 위안이 가능하다면 어떤 형식일까를 아리게 들여다보는 순간을 제공해줘서 좋았고, 「미드윈터」는 어떤 사건 이후에 한 인간이 그 체념의 시간을 어떻게 지나가는지를 담담하고 상징적인 장면들로 보여줘서 좋았어요. 소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여름에 물에 빠져 흘러가는 얼음 조각을 그린 부분에서 저는 저희 세대가 가진 삶과 사랑과 시대에 대한 상실감의 광경을 본 것 같아요. 거기 가만히 손을 얹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최원식 평론가 김동석(金東錫)은 「안회남론」에서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서 부정됨으로써 긍정되는 것이 역사의 순리’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우리 소설은 아버지를 제대로 그리기보다는 아비를 괄호에 넣기 일쑤예요. 아마도 아버지가 일제에 의해 살해된 점, 다시 말하면 근대가 식민지 근대로 귀결된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70년대 문학에 아버지가 귀환하는 대목이 흥미롭습니다. 역사 속에서 실종한 남로당 아버지들이 이문구 김성동 이문열 등 곳곳에서 부활합니다만, 근데 그건 아버지에 대한 투항이야. (정홍수 그렇죠. 아버지 자리가 성스럽게 부각되면서.) 아버지가 부재하는 것도 문제지만 투항도 마찬가지지. 그런데 정용준을 보고 제가 깜짝 놀란 게, 설정이긴 하지만 다양한 아버지들을 놓고 그 가상 대결의 여러 양상들을 편편이 실험한다는 점에서 괄목상대하게 된 겁니다.

 

신용목 정신분석학에서 많이 이야기되기도 해서, 저는 사실 ‘아비 부정’이나 ‘아비 살해’가 익숙한 주제라고 생각했거든요.

 

최원식 우리 소설에서는 뜻밖에 없어요. 뜻밖에.

 

정홍수 요즘 문화 전반에서 아버지라는 주제는 새로운 유행을 타고 있는 듯도 한데요. 정신분석학의 도식화된 틀에 기대거나, 과도한 폭력성을 덧씌우거나, 아니면 복고적 향수로 감싸거나 하면서 말이죠. 그런 흐름을 거슬러 진지한 소설적 질문을 만든 측면은 분명 높이 사고 싶습니다만, 그 질문들의 강렬함에 비해 아버지의 자리나 형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졌다는 느낌은 덜 받았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새들에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네」가 별다른 소설적 구도 없이 성취해낸 정직하고 진실한 풍경 쪽으로 작가가 더 많이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최원식 물론 정용준의 아버지작업이 아직은 미지(未知)의 발견보다는 기지(旣知)의 확인에 그친 면도 적지 않지만 나는 이 작업 자체가 우리 문학의 암흑면의 개척이란 점에서 지지를 보내고 싶어요. 더구나 성공 여부를 떠나서 이 소설집 어느 한편도 반복이 없어요. 소재에서 서술방법에 이르기까지 편편이 실험적이지요. 그만큼 아비문제를 도전적 과제로 여긴다는 반증인데, 아비는 지금 우리 사회의 아들들이 극복해야 할 현안 중의 현안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아비로 표상되는 나라 또는 권력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허약합니다. 너무 비약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우리 문학이 내국망명상태로 점점 독자로부터 멀어지는 현상 또한 이와 관련될지도 모르겠어요. 끝으로 작가 후기를 인용하고 싶어요. “소설이 세계를 바꿀 수는 없겠지. 하지만 사람은 바꾼다. 쓰는 자는 바뀐다. 이것은 내가 경험으로 깨닫게 된 유일한 믿음이다.”

 

정홍수 그럼 오늘 좌담은 이것으로 마쳐야겠습니다. 능력에 부치고 힘겹기도 했지만, 한해 한국문학 작품들을 따라 읽고 대화를 나누면서 많이 배우고, 많은 생각거리들을 얻은 느낌입니다. 선생님 오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신용목 시인한테도 정말 많이 배웠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최원식 저를 초대해주신 두분께 감사합니다. 두분이 뽑아준 3권의 시집과 2권의 소설을 집중적으로 읽음으로써 올해 문학계의 정수에 간편히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문학을 읽고 토론하는 일의 즐거움과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됐습니다. 작가들의 정진과 함께 우리 같은 독자들의 정진도 더불어야 함을 다짐합니다.

 

신용목 저야말로 아주 엄한 기숙학교를 졸업하는 기분입니다. 1년 동안 정홍수 선생님과 많은 선생님들, 그리고 좋은 작품들 덕분에 조금 더 자란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2015.10.28. 서교동 사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