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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정홍수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 문학동네 2014
소설의 자리와 ‘정치’
류수연 柳受延
문학평론가 suyoun_cat@hanmail.net
‘톺아보다.’ 평론가 정홍수(鄭弘樹)의 글쓰기에 대해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작품의 섬세한 결을 하나하나 훑어 살피며 그 의미를 되짚어내는 그의 글쓰기는, 비평이 그 무엇보다도 성실한 독자의 책무임을 깨닫게 한다. 동시에 그렇게 드러난 의미 각각에 시대적 좌표를 부여하는 일에도 그는 결코 게으르지 않다.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에는 주로 그가 2010년대에 집필한 비평들이 실려 있다. 40년이 넘는 창작활동으로 이미 우리 현대문학사를 대표하는 이름이 된 황석영(黃晳暎) 같은 작가에서부터 2000년대 이후 등단한 젊은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그는 날카로운 비평적 안목으로 한국문학의 현재를 일구어내고 있는 다양한 작가와 작품에 관심을 아우른다. 그럼에도 그는 세대론이나 기왕의 문학사적 관습, 문법, 익숙한 수사에 함몰되지 않는다. 오직 성실한 독해와 치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개별 작품이 가진 독특한 미적 형상화를 추적해 들어갈 뿐이다.
정홍수에게 있어 시간이란 한 작가의 ‘몸’에 축적된 기억에 가깝다. 가령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문학동네 2011)을 논하면서 그는 거장에게 부여되는 그 어떤 후광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오직 난지도라는 공간을 꿰뚫는 작가의 날카로운 통찰력이다. 그것은 그가 이제 막 첫 소설집을 낸 김금희(金錦姬)의 작품을 읽으며 그의 “소설의 기원, 원점의 풍경”(254면)으로 인천을 짚어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세대 어떤 작가에게 그곳은 몸이 아는 땅”(30면)일 수 있음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간 역사라는 “몸이 모르는 시간”을 그려내야 하는 젊은 작가들의 고뇌에 대해서도 충분히 포용적이다. 이들 작품이 지닌 필연적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자신의 언어에 반성적으로 기입하는 순간”(144면)을 포착하는 데 인색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정홍수가 바라보는 2010년대 소설의 현재는 어떠한가? 그는 무엇보다도 “‘사회’라는 매개항”이 상실된 현실의 비극적 재현을 최근 소설의 한 경향으로 포착한다. 그럼에도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폭력적이고 비정한 세상의 시스템”과 “무력한 개인”(188면)이라는 대립을 그대로 현실과 일치시키는 착시에 대해서는 분명히 경계한다. 자기파괴적 경쟁이 일상화되고 타자의 자리를 존중하는 최소한의 공공성마저 사라진 오늘의 대한민국이라는 조건하에서는 이러한 서사적 절망이 도출될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에 공감하면서도, 그것이 자기연민의 과잉으로 이어지는 병리적 현상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하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이 전망 없는 세계에서 문학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로서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그의 염원은 뜻밖에 강렬하다.
그러나 그것은 문학이 이념과 정치의 선봉에 섰던 이전 시대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엄밀히 말해 그는 문학에 부여된 ‘이념의 시대’라는 것이 과연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쪽에 가깝다. 그는 “80년대 문학에 가해졌던 특별한 정치적 열망과 이념적 중압”이 1980년 광주를 둘러싼 죄의식의 소산일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한국소설의 주체성은 그 자신의 조건과 가능성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모색하는 시간”(141면)을 거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점에서 본다면 그가 회복하고자 하는 정치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하는 공론의 장으로서의 정치, 즉 타자의 부재를 인지함으로써 그를 잉여나 소외의 상태로 남겨두지 않는 의미에서의 정치에 가깝다. “세계의 실패를 감당하는 ‘속죄양의 침묵’”이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187면)으로서 기능한다면, 오늘의 소설이 감당해야 할 자리는 그 침묵하는 부재에 목소리를 더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공공성이 회복될 때, 비로소 문학은 사회적 지평을 일구어내는 ‘정치’ 위에 정립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다시 “‘너’를 부르는 자리가 비어 있고, 그 비어 있음이 소설의 윤리를 생성시키는 힘”(262면)임을 기억하는 것, 문학의 정치를 바라보는 정홍수의 위치도 바로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박배일(朴培日) 감독의 다큐 「밀양전」(2013)에 대한 그의 논평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이 작품을 ‘할매’들이 “투사가 되면서 그네들 스스로도 망각하고 살았던 인간적 자긍과 위엄을 되찾고, 지혜와 정의, 사랑과 행복을 나누는 이야기”(425~26면)라고 말한다. 그가 밀양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 속에서 진정한 승자는 밀양의 할매들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을 바꾸었기 때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할매들은 스스로를 바꿈으로써 다른 지향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의 폭력과 개입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조”(426면)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패배하지 않았다. 정홍수가 바라는 오늘, 문학의 자리도 바로 그곳 밀양에 있다. 훼손된 세계 위에서 불안과 무기력에 흔들릴지라도 잊을 수 없는 것. 모든 선의는 “미약하고 종종 무능”(199면)함에도, “엉터리 세월과 엉터리 삶들에 대한 변명조차” “자신의 몫으로 감당”(371면)하는 이름 없는 그들이 보여주는 뜻밖의 환대와 연대를 잊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문학이 감당해야 할 ‘정치’임을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홍수가 때로 길항하고 때로 연대하며, 2010년대를 동행하고 있는 작가는 권여선(權汝宣)과 황정은(黃貞殷)으로 축약될 수 있을 것 같다. 무의식의 발로이든 의식적인 개입이든, 정홍수의 평론 곳곳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나 오늘의 시대에 대한 가장 정밀한 독해를 요구하는 곳마다 두 작가의 작품들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욕의 인간학”(66면)으로부터 야기된 권여선의 내밀한 정치성과 “우리 시대의 빈곤을 가난한 언어로 응시”(201면)하면서도 고립된 사람들끼리의 작은 환대를 잊지 않는 황정은의 조심스러운 연대 사이 어디쯤에서, 정홍수의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은 오늘의 소설이 완성할 내일의 ‘정치’를 읽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