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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중편 특집
권여선 權汝宣
1965년 경북 안동 출생. 1996년 장편 『푸르른 틈새』로 상상문학상을 받으며 등단.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비자나무 숲』 『안녕 주정뱅이』, 장편 『레가토』 『토우의 집』 등이 있음. puruntm@empas.com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2002: 반바지
나는 오래전 어느 경찰서 조사실에서 있었던 장면을 상상한다. 상상한다고 해서 꾸며내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직접 본 것도 아니니,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몇가지 단서, 내 경험을 가지고 그날의 장면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이 장면만이 아니다. 나는 ‘미모의 여고생 살인사건’이라 불렸던 그 사건에 얽힌 세부, 장면, 정황 들을 14년 동안 꼼꼼히 생각하고 쓰다듬고 세공해왔다. 그러다보니 머릿속에 각인된 그 상황들이 내가 직접 보거나 겪었던 상황인 것만 같은 고통스런 착각에 빠져들 때가 종종 있다. 상상도 실제만큼이나 고통스럽다. 아니, 실제보다 더 고통스럽기도 하다.
소년은 십분 넘게 조사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테이블과 의자 네개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다. 벽에 액자도 걸려 있지 않고 테이블에 꽃병이나 재떨이도 놓여 있지 않았다. 뭘 해도 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소년이 그랬다.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앉은 그의 눈빛은 졸린 듯 흐릿했다. 시선을 둘 곳이 없어 더 그랬을 것이다. 카메라 렌즈가 흰 평면 위에서 초점을 못 잡고 흔들리듯이.
형사가 들어와 소년의 맞은편에 앉았다.
“한만우!”
나지막하지만 상냥하지는 않은 목소리였다. 학생주임이나 담임이 처벌해야 할 학생을 호명하는 식의 딱딱한 말투. 그 호명은 단단한 적의가 되어 그의 가슴 한복판을 향해 날아갔다. 그 소리가 정확하게 실현될 참혹한 운명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학교 친구들은 한만우를 그런 식으로 부르지 않았지.
‘할망구’라고도 부르고 ‘만우절’이라고도 불렀지만 그의 가장 빛나는 별명은 ‘한오백년’이었다. 그 노래의 1절은 한만우로 시작한다는 게 아이들의 생각이었다. 하안만우우우 이 세상 야속한 임아, 하는 식으로. ㄴ 발음만 애매하게 처리하면 완벽했다. 그 별명의 호소력이 너무 강렬해서 만우절이나 할망구는 점점 도태되고 그를 부를 때면 다들 하안만우우우 하며 명창이 목 푸는 소리를 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나는 그의 존재를 몰랐다. 그는 고3이었고 나는 고1이었으니. 그럼에도 기억을 되짚어보면 학교 복도 어디쯤에서 그의 이름을 불러대는 애절하고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가끔 들은 적이 있다. 그 유장한 부름 속에는 단단한 적의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일어난 후부터 그는 더이상 그렇게 불리지 못했다.
나는 가끔 예전 식으로 그를 불러본다. 하안만우우우,라고. 그러노라면 과연 이 한 많은 삶에 의미 같은 것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추상적인 삶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의 삶에 말이다. 그의 삶에도 의미 같은 것이 있었을까. 아니, 없었지. 없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삶에도 특별한 의미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삶에도, 언니의 삶에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거라고.
형사는 소년에게 자기 말을 잘 들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이번은 지난번과 다르다고, 묻는 말에 잘 생각해보고 대답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네게 아주 불리해질 거라고. 소년은 형사를 쳐다보았지만 그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했다. 소년은 둔하다. 하지만 첫번째 조사 때보다 왠지 형사가 더 무섭게 변했다는 것만은 느낀다.
“지난번 조사에서 진술한 내용을 확인하겠다.” 형사는 볼펜으로 탁자를 신중하게 찍으며 물었다. “이천이년 유월 삼십일 십팔시경, 그러니까 오후 육시경, 스쿠터를 타고 치킨 배달을 가다 신정준의 차 옆을 지나갔다. 맞지?”
“아닌데요.”
“아니라고?” 서류를 확인한 형사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치떴다. “그렇게 진술한 걸로 돼 있는데?”
“배달 끝나고 들어가는 중이었는데요, 배달 가는 중이 아니고.”
형사의 눈이 제자리를 찾았다. 별거 아니군.
“근데 왜 여긴 배달 가는 중이라고 돼 있지? 아무튼 치킨 배달하고 들어가는 중에 신정준의 차 옆을 지나갔다. 그래서 차종이 뭐였다고?”
“네?”
형사는 소년이 일부러 자기 말을 못 알아들은 척한다고 생각했다.
“차종! 차가 무슨 차였냐고?”
“무슨 찬지는 모르고요. 찐한 회색 같은 건데, 뻔쩍뻔쩍하는 빛이 나고. 다 얘기했는데요, 저번에.”
“그러니까 저번, 아니 지난번 진술내용을 확인하는 중이잖아? 뻔쩍뻔쩍한 진회색 차량?”
“네.”
형사는 서류 속에서 사진을 한장 꺼냈다.
“이런 차 맞아?”
소년이 고개를 내밀어 사진을 들여다보고 형사를 보았다.
“맞는 거 같기도 하고.”
“딱 이 차는 아니어도 이런 종류 맞냐고?”
소년은 다시 한번 사진을 보고 형사를 보았다.
“맞는 거 같아요.”
“맞아?”
“네.”
“좋아. 잘하고 있어.”
형사가 사진 한장을 더 꺼냈다. 소년은 다시 사진을 보고 형사를 보았다.
“이게 니가 타는 스쿠터 맞아?”
소년은 곧바로 맞는다고 대답했다.
“좋아.” 형사는 서류를 들추는 시늉을 하며 결정적인 시간을 늦추었다.
“이제 중요한 대목, 확인 들어간다. 그때 신정준의 차 조수석에 김해언이 타고 있는 걸 봤다. 맞지?”
“네.”
“차림새가 어땠다고? 머리는 어떻고 옷은 뭐 입었고?”
“머리는 풀렀고요.”
“머리는 풀렀고, 그러니까 머릴 풀었다고. 안 묶고.”
“네.”
“또? 옷은?”
“옷은요…… 나시에다 반바지 입었다고……”
“나시에다 반바지 입었다고?”
형사가 말꼬리를 슬쩍 올렸다.
“네, 그랬다고……”
“음, 그랬다고? 색깔은?”
“네? 색깔요?”
도대체 한번에 제꺽 대답하는 법이 없다고 형사는 생각했다.
“옷 색깔! 나시하고 반바지 색깔.”
“몰라요 그건.”
“기억 안 나?”
“모르겠어요.”
형사는 소년의 말투에서 뭔가 숨기는 듯도 하고 애매하게 흐리는 듯도 한 기미를 감지했다. 드디어 낚아챌 때가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이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왜 그래?”
“나 가야 되는데 지금.”
“뭐?”
“몇시예요? 나 알바 가야 되는데 지금.”
소년이 탁자 위에 양손을 얹고 곧 일어날 듯한 자세를 취했다. 형사는 그런 소년을 말없이 쏘아보았다. 그때 형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새끼구나 싶었을까. 탁자 위에 놓인 소년의 꽉 쥔 주먹을 내려다보며 벽돌 같은 걸로 사람의 머리를 내려치기에 적당한 손인지 가늠해보았을까. 신정준보다는 억세 보이는 손이지만 글쎄, 하고 고개를 저었을지 모른다. 윤이 흐르는 매끈한 머리칼을 가진 소녀의 동그란 머리를 내려치는 데 엄청난 악력이 필요하진 않으니까. 오히려 체격은 신정준이 더 좋았다. 신정준은 운동으로 단련된 근육질이었고 한만우는 중키에 왜소한 몸집이었다.
형사는 목을 가다듬고 지금부터 자기가 하는 말을 잘 들으라고 했다.
“니가 진술한 내용이 말이 안되는 게, 이거 보라고.”
형사는 두장의 사진을 소년 앞으로 돌려놓았다. 중요한 건 신정준의 차가 일반 세단이 아니라 렉서스 RX300, 즉 에스유브이 차량이라는 거다. 스포츠 차량이라 좌석 높이가 높다. 당연히 차창 높이도 높다. 그런데 네가 타는 배달용 스쿠터를 봐라. 네가 스쿠터에 앉아서 볼 수 있는 시야각은 렉서스의 차창과 평행하거나 조금 낮다. 여기까지 얘기한 형사는 이게 무슨 뜻이냐, 하고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형사가 친절하게 그 뜻을 알려주어야 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너는 그 땅딸보 스쿠터에 앉아서 절대 조수석에 앉은 김해언이 반바지를 입었는지 긴 바지를 입었는지 볼 수 없다는 거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형사는 절대 볼 수 없는지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저 짐작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놀란 얼굴을 보자 세게 한번 밀어붙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그러니까 너는 신정준의 차에 탄 김해언이를 본 게 아니고, 차에 안 탄 김해언이를 본 거야. 그러니까 반바지 입었다는 걸 아는 거지. 신정준이 김해언이를 내려주는 걸 봤거나 아니면 그후에 봤거나, 어쨌든 너는 차에 안 탄 김해언이를 봤어. 얘기가 그렇게 되면……”
소년은 눈을 껌뻑이며 형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형사의 말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은 이해하지 못했다. 형사의 입가에 치명적인 적중을 앞둔 자의 긴장된 미소가 감돌았다.
“김해언이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은 신정준이 아니라 바로 너, 한만우가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
소년은 형사를 보았다. 형사는 소년이 또 자기 말을 못 알아들은 척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면 좀더 효과적인 충격을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너는 김해언이를 둔기로 내리쳐 살해한 유력한 용의자가 되는 거라고.”
소년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네? 왜요?”
무엇을 해도 자연스럽지 못한 그의 제스처는 형사의 눈에 어색한 연기로 보였다. 못하는 놈은 뭘 해도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요라니? 너 지금까지 무슨 얘길 들은 거야? 니가 김해언이를 죽여놓고 신정준이 죽인 것처럼 목격자 행세를 했다, 이런 얘기 아냐?”
“아니에요. 내가 왜요? 내가 왜 죽여요 걔를?”
“그건 니가 알겠지.”
“난 말도 한번 안해봤어요 걔랑. 걔가 원래 말이 없대요.”
“누가?”
“다 그래요 애들이. 말 걸어도 대답 안한다고. 난 말도 안 걸어봤는데.”
이 말은 사실이었지만 형사는 그런 사실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웬 횡설수설이야? 야, 한만우! 그럼 김해언이 반바지, 이거 어떡할 거야? 봤다면서? 니가 나한테 설명 좀 해주라, 반바지 입은 거 무슨 수로 봤는지?”
형사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 녀석이 뭐라고 할 것인가. 스쿠터를 렉서스에 바짝 붙이면 혹시 하의를 볼 수 있었을까. 한참 만에 소년이 먹은 걸 토해내듯 힘겹게 말했다.
“봤는지 몰라요……”
소년이 말끝에 뭐라고 우물거렸지만 형사는 승리감에 도취해 듣지 못했다.
“봤는지 모른다? 하, 이제 와서 봤는지 어쩐지 모르겠다?”
“그게 아니고요.”
“그게 아니야?”
“봤을 거 같아요…… 걔도.”
형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걔……도?”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한 것마저 도로 삼키고 싶었다.
“너 상황이 지금 얼마나 심각한지 몰라서 그러나본데 얼렁뚱땅 둘러댈 생각하지 마. 지금까지는 너 혼자 봤다고 했어. 근데 또 누가 봤을 거 같다는 거야?”
“혼자 봤단 말은 안했어요.”
“혼자 봤단 말은 안했다? 좋아. 그럼 누가 또 같이 봤는데?”
“말해야 돼요? 말 안하면 안돼요?”
소년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그애가 뒤에서 살짝 붙들었던 허리 언저리에 느꼈던 따스함이 생생했을 것이다. 그 감촉을 상상하고 소년은 그때 형사 앞에서도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을까.
“이게 진짜 미쳤나?” 형사는 소년의 오이지 같은 면상을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너 똑바로 대답 안해? 지금 너, 지난번 진술을 뒤집고 있는 거야. 혼자가 아니면 누가 또 같이 봤다는 거야?”
소년은 윗입술을 실룩거리고 무슨 말인가를 할 듯했다.
“나……”
형사는 귀를 기울였다. 나…… 나씨 성을 가진 놈이란 말이지.
“가야 되는데…… 진짜.”
형사는 힘이 쭉 빠졌다. 소년에게는 상대방을 답답해 미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이 녀석, 생각보다 저능인가, 아니면 저능 흉내를 내는 건가.
“너 똑바로 대답 못하면 오늘 중으로 못 나가. 아니, 내일도 모레도 못 나가. 영영 못 나갈 수도 있어.”
“안돼요. 우리 사장님 혼자 그 일 다 못해요. 가야 돼요 지금.”
“그러니까 누가 또 같이 봤냐고?”
소년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이름을 말했다. 형사는 이번엔 귀를 기울이는 대신 윽박지르는 쪽으로 갔다.
“이 자식이, 크게 말 안해?”
“태림……이.”
소년의 입에서 작은 침방울이 튀었다.
“태림……이?”
“윤……태림.”
“윤태림? 윤태림이 누구야?”
“삼반 애 있어요. 해언이랑 같은 반요.”
“여자야?”
소년이 대번에 그를 무시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여자죠. 여학생반인데, 삼반은요.”
형사는 억울했다. 자기가 3반이 여학생반인지 남학생반인지 무슨 수로 알겠는가. 그러다 아, 김해언이랑 같은 반이랬지, 하는 생각이 나자 더 화가 치밀었다.
“근데 왜 그런 얘길 지금 해? 그럼 너 지난번에 위증한 거야. 위증죄로 확 집어 처넣는 수가 있어. 지금부터라도 똑바로 대답 안하면 혼난다. 그날 너하고 윤태림이 같이 있었어?”
“네.”
“왜?”
“태림이가 태워달랬어요.”
“뭐를? 스쿠터를?”
“네.”
“아, 미치겠네. 그럼 스쿠터를 너 혼자 타고 간 게 아니었어? 배달 가는, 아니, 배달 끝나고 들어가는 길이었다면서?”
“배달 끝나고 들어가는데요, 길가에서요 태림이가 손을 막 흔들면서 세우더니 태워달라고요. 자기 좀 급하다고 그래가지고요.”
“그래서 둘이 타고 가다가 신정준이 차를 봤다?”
“나는 정준이 찬 줄 몰랐어요. 아니, 정준이 누나 차랬어요. 쌤삥인데 정준이가 몰고 다닌다고, 태림이가 막 가라고 앞으로.”
“막 가라고 앞으로?”
“신호등에 걸렸을 때 그때 태림이가 가서 서라고 앞에.”
“어디 앞에?”
“정준이 차요.”
“왜 가서 서래 앞에?”
“몰라요 그건.”
“그래서 가서 섰어 앞에?”
형사는 슬슬 짜증이 났다. 소년의 이상한 도치법이 신경에 거슬렸고 자기 말조차 꼬이는 느낌이었다.
“네.”
“그래서?”
“그러니까요.”
“뭐가 그러니까야?”
“태림이도 봤을지 모른다고요.”
태림이도 봤을지 모른다. 이 말에서 형사는 소년의 위증을 확신했지만 나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날 윤태림은 신정준의 차에 누가 타고 있는지 궁금해서 한만우의 스쿠터를 타고 뒤쫓아가 그 앞에 가서 서라고 했을 것이다. 이 얘기는 그의 머리로는 도저히 지어낼 수 없는 미묘한 진실을 품고 있다.
“너 근데 왜 지난번에는 윤태림이 얘기 안했어?”
“그냥…… 싫은 것 같아서요.”
“뭐가 싫어?”
“스쿠터가요.”
“스쿠터가 싫어?”
“그니까, 태림이가요.”
“태림이가 왜 싫어?”
“스쿠터 탄 거요.”
“태림이가 니 스쿠터 탄 게 싫다?”
“네.”
“그럼 왜 태워줬어?”
“태림이가 태워달랬어요. 손 막 흔들면서. 내가 태워준다고 안했어요 먼저.”
“그래, 니가 태워준다고 안했어 먼저. 그건 알겠는데 그런 얘길 왜 처음부터 안했냐고?”
“아저씨는 몰라요. 걔는 절대 안 타요 그런 거.”
형사는 이쯤에서 미치고 싶었다.
“그러니까 니가 싫은 게 아니고, 태림이가 스쿠터 싫어한다, 스쿠터 같은 거 안 탄다 그 말이야?”
“안 타요 절대. 배달 스쿠터 같은 거. 태워달랬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그때도 빨리 내려달래서 내려줬어요. 싫은 거잖아요 그건.”
“빨리 내려달래서 내려줬다? 그럼 급한 일은 뭐였대?”
“급한 일요?”
“막 세워서 급하다고 태워달랬다며?”
“안 물어봤는데요 그건.”
이런 얼간이를 보았나, 하고 형사는 생각했다. 얼간이 형사는 몰랐겠지만 스쿠터 타는 걸 창피해하는 여자애가 얼간이 소년의 배달 스쿠터를 얻어타고 신정준의 차를 추월하라고 한 다음 얼마 안 가 내렸다면 그애의 급한 일은 명백한 것 아닌가. 신정준의 차에 누가 함께 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 그리고 태림은 언니가 타고 있는 걸 확인했다.
형사는 고개를 저었다. 윤태림이란 애를 끌어들여 관심을 분산시켜보려 하지만 결국 이 골 빈 녀석은 여전히 제가 묻힐 땅을 열심히 파는 중이라는 생각이었다.
“근데 한만우. 너, 이것도 거짓말이야.”
“아니에요, 거짓말. 근데 나 가봐야 되는데 진짜.”
“아니긴 뭐가 아냐? 이거 백프로 거짓말 맞다고. 내가 윤태림이 불러서 조사는 해볼 건데, 거짓말을 하려면 앞뒤가 맞게 해야지. 너도 못 보는 걸 윤태림이 무슨 수로 보냐? 머리 풀어헤친 거랑 나시 입은 건 봤다 쳐도 윤태림이 걔, 여자애 키가 뭐 너보다 더 커? 더 커도 못 봐. 걔도 너랑 똑같이 반바지 못 본다고.”
소년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나 가봐야 돼요 진짜.”
“이 자식이 내가 하는 말을 똥구멍으로 듣나? 백번 말하지만 니 난쟁이 땅딸보 스쿠터에 앉아서는 무슨 수를 써도 반바지 못 본다니까?”
“네.”
“뭐? 네? 하, 이 새끼 봐라. 너도 못 본다는 건 인정하는 거지?”
형사는 마침내 강력한 확신을 얻었다.
“모르겠어요. 근데요……”
형사는 귀를 기울였다.
“자꾸 난쟁이 땅딸보, 그런 말 하지 마요.”
형사는 헛웃음을 웃었다.
“뭔 소리야? 내가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묻겠어. 너도 봤으니까 윤태림이도 봤을 거다, 그 얘기지?”
“네.”
“조사해보고 아니면 넌 죽었어.”
“가도 돼요 인제?”
“가봐, 가봐.”
형사는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하고 운동화를 직직 끌면서 조사실을 나가는 뒷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서류를 탁탁 탁자에 두드려 모를 맞추며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나는 형사에게 그런 버릇이 있다는 걸 안다. 꺼진 볼펜으로 탁자를 딱딱 찍는 버릇이 있다는 것도, 형사의 말투와 표정, 고릴라처럼 어깨가 올라붙은 자세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형사가 여러번 우리 집에 찾아오기도 하고 엄마와 내가 경찰서에 찾아가기도 했으니까.
그날 형사는 소년의 오이지 같은 얼굴과 신정준의 말끔한 얼굴, 소년의 싸구려 월드컵 티셔츠와 신정준의 아이비 버튼다운 셔츠, 홀어머니와 회계사 아버지, 반에서 20등과 전교 10등, 이쪽과 저쪽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 사람들의 신뢰도 격차 등을 따져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범인이 누구인지보다 누구를 족쳐서 범인으로 만들어야 하는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나는 오랫동안 레고 블록을 조립하듯 한만우의 두번째 조사 장면을 상상 속에 구축해왔다. 그는 총 일곱차례의 조사를 받았는데 그중 두번째 조사에 사건의 진실과 이후의 사태 전개 방향이 암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두번째 조사장면을 상상할 때마다 번번이 디테일한 과잉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아주 작고 쓸데없는 레고 조각 하나가 불쑥 끼어드는 식이다. 그건 한만우나 형사와 무관한, 나 자신의 문제이다.
이번의 상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형사가 소년의 꽉 쥔 주먹을 보면서 ‘윤이 흐르는 매끈한 머리칼을 가진 소녀의 동그란 머리’를 내려치는 데 엄청난 악력이 필요하진 않으니까,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썼다. 윤이 흐르는 매끈한 머리칼, 대체 왜 이런 불필요한 내용이 섞여들었는지 모르겠다. 동그란 머리는 그렇다 쳐도 윤이 흐르는 매끈한 머리칼 같은 것은 벽돌로 가격당하는 데 있어 어떤 변수도 발생시키지 않는 조건 아닌가. 형사가 조사실에서 용의자를 취조하면서 이런 생각을 할 리는 없지 않은가. 물론 형사의 머릿속에 범행과 무관한, 언니의 시신이 지닌 눈부신 자태가 불현듯 떠오르지 말란 법은 없다. 실제로 그랬든 말았든 상관없다. 문제는 내가 상상한 취조 장면 속에 그런 종류의 과잉이 슬쩍 끼어든다는 사실이다. 나는 형사의 생각을 빌려 내 감각, 내 욕망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도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가. 14년이 지나서도 그 희고 매끈하고 불필요한 조각에서. 내 얼굴을 조각보로 만든 그 과잉된 미의 조각에서.
언니는 누구나 한번 보면 잊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무 내용 없는 텅 빈 형식의 완전함이 주는 황홀. 하물며 열아홉이었음에랴. 그 아름다운 형식을 파괴한 자는 누구인가. 한만우인가, 신정준인가. 아니면 제3의 인물인가. 나는 이제 안다. 14년 전의 살인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누가 아닌지는. 아니다. 살인자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그런 짓을 했을 것이다.
2006: 시
해가 설핏 넘어가는 중이었다. 나는 도서관 옆 계단으로 내려오다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베이지색 블라우스에 노란 스커트를 입은 여학생을 보았다. 전날 종일 내린 비로 널찍한 시멘트 계단은 햇빛을 받지 못한 가장자리 쪽이 짙은 회색으로 젖어 있었다. 젖은 계단가로 올라오는 여학생을 보고 나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보았다. 시선을 피한 것도 다시 본 것도, 나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여학생은 몹시 말랐고 피부가 노리끼리했는데 노란 옷을 입어 더 그렇게 보였다. 가까이에서 보니 블라우스에 스커트 차림이 아니라 아래로 갈수록 노란빛이 짙어지는 원피스였다. 그러나 나를 사로잡은 건 그녀의 옷이 아니라 얼굴, 아니 표정이었다. 표정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녀는 딱히 표정이라고 할 만한 것을 짓고 있지 않았으니.
그 무표정한 얼굴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독특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젊은 여자의 얼굴에서 그토록 이상한 이미지들이 마구잡이로 혼합되어 있는 표정을 본 적이 없다. 그녀의 얼굴은 낯익으면서 낯설었다. 오래전에 본 얼굴이면서 한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고,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얼굴이었으며, 피하고 싶기도 하고 들여다보고 싶기도 한 얼굴이었다. 여학생의 얼굴은 못생기거나 흉측하지 않았다. 예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노란 옷을 입은데다 그녀 뒤편에 불그레한 노을이 지고 있어 그녀는 거대한 불꽃의 심지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이미지 뒤편에 미처 마르지 못한 계단 가장자리처럼 축축한 잿빛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시선을 느낀 여학생이 나를 쳐다보았다. 알은체하고 싶지 않다는 눈빛이 스쳐지나갔다. 그렇다면 나를 안다는 뜻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내려오던 계단을 되짚어 올라갈 뻔했다. 그러나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더 컸다. 나는 널찍한 계단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그녀 쪽을 향해 갔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순간 내 입에서 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다언이구나!
날 알아보네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정말 다언인 것인가. 해언의 동생 다언. 그녀의 말투도 얼굴만큼이나 낯설었다. 그럼, 알아보지,라고 대꾸는 했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다언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아닌데요 하면 얼른 내 실수를 사과하고 계단을 내려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진짜 많이,라고 내가 말했을 때 순간적으로 다언의 얼굴에 무슨 말을 할지 다 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급히 말을 바꿨다. 말랐구나.
다언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상희언니는 옛날 그대로네요.
언니라는 말과 옛날이라는 말이 나를 슬프게 했지만 가장 슬픈 건 다언의 옅은 미소였다. 다언은 이렇게 웃는 아이가 아니었다. 몇년 전만 해도 입을 활짝 벌리고 맑은 고음을 내며 언덕길을 내려가는 자전거의 종처럼 당당당당 웃던 아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바쁘지 않으면 어디 가서 차나 한잔하자.
다언이 경계하듯 몸을 움츠리는 순간 손바닥에 팔꿈치 뼈의 느낌이 전해져왔다. 수술용 메스처럼 뾰족했다.
아버지가 군에서 예편했을 때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아버지가 몇달가량 집에서 쉬는 동안 집안 분위기는 점점 어두워졌다. 왜 이렇게 되는 노릇이 없느냐고, 엄마는 툭하면 중얼거렸다. 김을 굽다가도 밥을 푸다가도 되는 노릇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내가 반에서 1등을 놓친 걸 알자 엄마는 손뼉을 치며, 대학 보낼 돈도 없는데 외려 잘됐구나, 하면서 누구 들으란 듯이 모진 소리를 쏟아냈다. 다행히 아버지가 수도권 소재의 중소기업에 취직한 덕분에 우리 가족은 강원도에서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11월말에 나는 흥분과 기대를 품고 서울의 한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남녀공학이었지만 학급은 남녀가 분반되어 있었다. 내 흥분이나 기대와 관계없이 나는 반 아이들과 친해질 기회를 갖지 못했다. 바야흐로 2학기가 끝나갈 즈음이었던 것이다. 체육부장인 담임은 나 같은 전학생을 배려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들은 바로는 주식투자에 미친 인간이라 했다. 아이들은 서로 단단히 약속이라도 한 것 같았다. 어떻게 단 한명의 아이도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뚫고 들어갈 여지없이 단단하게 굳어진 관계의 성벽 밖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나는 어느새 예전에 살던 동네와 학교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관사에서 학교로 내려가던 길, 잿빛 함석지붕을 무겁게 인 집들과 마당가 빨랫줄에 꽂힌 색색의 빨래집게들, 바람이 불면 바람개비 통이 방정맞게 돌아가던 파란 풍향계, 마을 중앙에 서 있던 커다란 떡갈나무와 그 오른쪽 가지에 어두운 솜뭉치처럼 걸려 있던 새집까지.
나는 떠돌이처럼 외로웠으나 오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공부에만 열중하는 포즈를 취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 공부에만 열중하는 포즈를 취하는 게 불가능했으므로 나는 실제로도 공부에만 열중했다. 그해 겨울 혼자 등하교하던 서울 거리의 추위는 내가 겪어본 것 중에 가장 혹독했다. 나는 빨리 새 학년에 올라가고 싶었다. 틀이 잡혀 굳어지기 전의 말랑하고 유동적인 관계의 반죽 속에 뒤섞여 나만의 친교를 차근차근 맺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겨울방학이 끝나고 3학년 진학을 앞두었을 때 반 아이들이 호들갑을 떨며 친구와의 작별을 슬퍼하는 모습을 유쾌하고 냉담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새로 배정받은 3학년 3반 교실에 혼자 동그마니 앉아 둘씩 셋씩 모여 속닥거리는 아이들을 보고서야 나는 왜 이렇게 되는 노릇이 없나 하는 절망감에 빠졌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지난 2년 동안 맺어온 관계의 밑천이 있었다. 나 혼자만 무일푼이었다. 하릴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한 아이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눈이 크고 눈꼬리가 비스듬히 놓인 아몬드처럼 치켜올라가고 입술이 꽃잎처럼 붉은 아이였다. 그애의 예쁨은 보통의 예쁨이 아니라, 뭐랄까, 앵앵거리며 달려가는 구급차의 싸이렌처럼 다급하고 위태로운 예쁨이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나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이가 날카로운 눈길을 보내고 있는 다른 아이를 보고서였다. 눈길의 대상이 된 아이는 줄곧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무심히 교실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그 순간 옆모습에서도 언뜻 엿보였던 아름다움이 나를 향해 활짝, 그야말로 낙하산이 펴지듯 활짝 펼쳐졌던 것이다. 나는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한 작렬감에 휩싸였다. 그것은 결코 쉽사리 직면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었기에 교실이란 공간이 갑자기 허구나 마법의 장소로 변해버린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놀랍고 어리둥절하여, 이 학급엔 온통 이런 애들뿐이란 말인가, 하고 주변을 돌아본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그게 다였다. 더는 아니었다. 충격적인 아름다움을 경험한 직후라 그런지 다른 아이들의 얼굴이 매우 조악하고 우중충하고 불균형해 보였다. 다행히 그 잡동사니 같은 평범함이 나를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도록 이끌었다. 나는 혐오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그들을 바라보았는데, 그들 역시 나를 동일한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담임을 맡은 늙은 수학교사가 들어올 때까지 우리는 무언가 핵심적인 것이 결여된 나머지들, 여집합 같은 존재감으로 우울하게 기가 죽어 있었다. 입술이 붉고 눈이 아몬드처럼 생긴 윤태림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림이 예쁜 것은 분명했지만 해언의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아름다움 앞에서는 그애나 우리나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해언의 동생 다언도 그해 우리 학교에 입학했다. 해언이야 원래 학교 안팎으로 유명한 아이였지만 금세 다언도 교내에서 떠들썩한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해언의 동생이어서가 아니라 둘이 너무 상반되는 자매였기 때문이다. 해언은 꿈꾸는 듯한 얼굴에 피부가 희고 키가 크고 늘씬하며 길쭉한 팔다리를 가진 데 반해, 다언은 평범한 얼굴에 키도 작고 조금 통통한 편이었다. 해언이 외모에 특별한 은혜를 받은 대신 학업성적은 중하 정도였다면, 다언은 입학할 때 신입생 대표로 선서를 하고 들어온 전교 1등의 수재였다. 해언이 무심하고 냉담하고 말도 없고 잘 웃지 않는 반면, 다언은 호기심과 열정이 넘치는데다 매사에 싹싹하고 야무졌으며 무엇보다 전교에서 제일 자주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였다.
자매의 역할 또한 전도되어 늘 다언이 해언을 동생처럼 챙겼다. 다언은 등교할 때면 교문에 도착하기 전에 해언을 세워놓고 복장에 불량한 점이 없는지 앞뒤로 돌아가며 살피곤 했는데 정작 흰 블라우스에 볼펜자국이나 흘린 자국이 있는 쪽은 다언이었다. 1학년이라 수업이 일찍 끝나는데도 다언은 늘 우리 반 복도에 서서 기다렸다가 종례가 끝나면 해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해언은 다언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편이었지만 때로 뭔가 수틀리는 게 있으면 다언을 따돌리려고 기를 썼는데, 그럴 때면 여신처럼 희고 매끈한 팔다리로 우아하게 도망치는 해언과, 언니를 붙들려고 소리를 지르며 짐승처럼 전속력을 다해 질주해가는 다언의 모습을 복도나 운동장에서 볼 수 있었다. 그 광경은 교사나 학생 모두에게 웃음을 자아냈다. 다언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다. 비현실적이고 압도적이며 차갑기까지 한 해언의 아름다움을 우리 쪽 현실로 끌어내려 웃음 속에 용해시키는 생생하고 발랄하고 따스한 힘이.
나는 다언과 따로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일이 있었는데, 그건 문예반 활동을 통해서였다. 앞서 말했다시피 2학년 2학기 말에 전학 온 나는 특별활동반을 문예반으로 선택했다. 문예반을 맡은 젊은 국어교사는 꽤나 열성적이어서 뒤늦게 들어온 내게도 관심을 기울였고 내가 쓴 시를 칭찬하거나 아이들 앞에서 열정적으로 낭송하기도 했다. 고3이 되면 특별활동을 면제받을 수 있었지만 국어교사는 크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내가 문예반 활동을 계속하기를 원한다고, 대입에 자주 출제되는 시와 소설을 뽑아서 함께 읽고 토론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기꺼이 1학기까지는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다. 고3이 되어 처음 문예반에 갔을 때 1학년 신입생들이 들어와 있었다. 거기에 산골소녀처럼 뺨이 둥글고 발그레한 다언도 끼여 있었다. 다언의 시는 참신하고 기발한 데가 있었지만 다언 스스로도 뼈저리게 자각하다시피 결정적인 예리함이나 파괴력이 부족했다. 다언은 때로 남의 말을 하듯, 이쁘지도 않은 게 이쁘게 쓰려고 기를 쓰기는, 하고 투덜거리거나 태어나서 시에 대해 배운 모든 걸 싹 다 딜리트해버리고 싶다!며 절규하거나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통통한 주먹으로 제 머리를 쥐어박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나는 그 답답함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천재적인 시인의 모습 중에 다언의 그런 제스처보다 더 먼 이미지를 찾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비록 같은 반에서 반년 가까이 함께 생활했지만 누가 내게 해언이 어떤 아이였느냐고 묻는다면, 매번 볼 때마다 크고 작은 충격을 안겨주던 그 지독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고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번 문예반에서 한시간 남짓 함께 지냈던 다언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아주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두살밖에 차이가 안 났지만 그 당시 나는 다언을 볼 때마다 과연 나도 고1 저 나이에 저토록 파릇파릇하게 팡팡 살아 있었던가 하는 회한에 젖곤 했으니 말이다.
그해 유월에 한일 월드컵이 열렸다. 한국팀의 계속된 선전으로 고3인 우리조차 그 열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월드컵 폐막식날인 6월 30일에서야 나는 내일이면 벌써 7월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겁을 했지만 여름방학 동안 죽어라 보충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것 외에 다른 수가 없었다. 월요일인 7월 1일이 월드컵 임시공휴일이었으므로 우리는 7월 2일에 등교했다. 그날 비어 있던 해언의 자리는 졸업 때까지 계속 비어 있었다. 7월 1일 오후에 해언은 인근 공원 화단에서 둔기로 머리를 가격당해 살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학교는 발칵 뒤집혔고 월드컵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여름방학이 되기 전까지 우리는 누가 물어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정보와 소문을 듣고 해석하고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교사들이 아무리 통제를 해도 막을 수 없었다. 소식통을 자처하는 아이들이 칠판에 그림을 그리거나 수치를 적어가며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 교육의 효과로 ‘두부 손상’이 으깨진 두부처럼 손상됐다는 뜻인 줄 알았던 무식한 아이조차 얼마 지나지 않아 전문적인 범죄용어를 들먹이며 범인을 추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에 강력한 용의자는 신정준이었으나 곧 그 혐의는 해소되었다. 해언의 사망시각은 내가 방에서 탁상달력을 들여다보며 이제 7월이 되었다고 초조해하던 그 시각, 6월 30일 밤 10시에서 7월 1일 새벽 2시 사이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정준은 그 시각 전후의 알리바이가 확실했다. 6월 30일 오후 6시경 정준이 해언을 자신의 차, 정확히 말하면 새로 뽑은 누나의 차이긴 하지만, 그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한 건 사실이지만 그는 7시쯤 그녀를 내려주고 평소에 자주 어울리는 친구들, 주로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었는데, 그들과 저녁을 먹으며, 그것도 가격이 장난 아닌 초밥집 룸에서 비싼 술을 곁들여 마시며 브라질과 독일의 월드컵 결승전을 보고, 10시쯤 물 좋기로 유명한 모 호텔 나이트클럽으로 자리를 옮겨 춤을 추고 양주를 마시며 밤을 지새운 후, 새벽에 건너편 해장국 골목에서 해장국을 먹고 해장술까지 마신 후 헤어졌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초밥집 종업원과 나이트클럽 웨이터와 해장국집 주인의 증언이 그의 말을 뒷받침했다. 물론 그 일로 정준은 무면허운전으로 과태료 처분을, 퇴폐업소 출입으로 정학처분을 받았다. 정학 기간이 끝난 후에도 정준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는데, 정학처분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자퇴를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내린 정학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신정준 다음으로 떠오른 강력한 용의자는 한만우였다. 우선 그가 목격자로서 진술한, 김해언이 신정준의 차를 타고 가는 걸 봤다는 증언내용 중 몇가지 세부사항이 매우 의심스럽고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만우의 위증에 대해서는, 만우가 어리숙해서 횡설수설했다는 둥, 만우는 제법 용의주도하게 말을 잘 꾸며댔는데 머리가 좋은 형사가 그 증언의 모순을 잡아냈다는 둥, 그게 아니라 윤태림이 만우의 증언을 뒤집는 증언을 했다는 둥 여러 얘기가 떠돌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는 만우의 알리바이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만우는 6월 30일 밤 11시까지 치킨집에서 알바를 뛴 후 11시반쯤 집에 돌아가 잠을 잤다고 했는데, 그것을 증명해줄 사람이 여동생 하나뿐인데다, 여동생은 그 시간에 자고 있었다는 것이다. 잠결에 오빠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했지만 경찰은 그 진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우는 범행을 자백하지 않는다고 두드려 맞기도 하고 협박과 회유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가 없고 살해동기가 미약해 결국엔 풀려났다. 풀려난 후에도 심심하면 형사들이 그의 집을 방문해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뭔가를 묻고 따지고 다그쳤다고 했다. 아이들은 범인이 신정준이냐 한만우냐를 놓고 두편으로 나뉘었는데, 한만우 쪽이 더 많았다. 그쪽 아이들 목소리가 더 크고 의견표명이 거침없었기에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신정준 쪽 아이들은 왠지 태도가 조심스럽고 목소리도 작고 낮았다. 한만우 역시 여름방학이 끝나고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는데, 학교 측에서는 만우가 자퇴했다고 밝혔다. 그게 만우의 선택인지 학교의 종용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해언의 동생 다언도 전학을 갔다. 아주 먼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그 사건과 연루된 아이들 중 학교에 남아 있는 아이는 입술이 붉고 눈꼬리가 아몬드처럼 치켜올라간 윤태림뿐이었다.
2학기가 되면서 학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해졌다. 다른 반은 모르겠다. 신정준의 반이나 한만우의 반이 어땠는지, 또 김다언의 반이 어땠는지는. 다만 우리 반은 그랬다. 물론 종일 쥐 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조그맣게 속살거리거나 장난을 쳤다. 그러다보면 웃음소리가 높아지고 고함도 지르게 되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웃음과 고함의 파문은 널리 퍼져나가는 대신 그대로 응결되어버렸다. 웃거나 고함을 치던 아이가 소리를 뚝 그치는 순간 기분 나쁜 정적이 교실 전체에 무겁게 드리웠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죄의식에 사로잡혔고 교실은 진공관처럼 조용해졌다. 이상한 우울과 불쾌가 우리의 미간을 둔중하게 때리고 지나갔다.
나는 한동안 교실 창가의 빈자리를 보거나 문예반 앞을 지날 때면 해언과 다언 자매가 사라진 자리에 투명한 형태의 공간이 생겨나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교실과 복도와 운동장에서 그들 자매의 텅 빈 점유를 발견하거나 보이지 않는 움직임과 기척을 느끼고 당혹감에 사로잡힌 적도 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눈앞에 임박한 시험의 생생하고 폭력적인 부담감이 모든 정서적 충격을 녹여버렸다. 그래, 몇명이 유학을 가고 전학을 가고 이런저런 이유로 떠난 것뿐이야. 그래도 우리는 여기 그대로 남아 있잖아? 죽을 맛이야.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사는 게 이게 뭐냐. 이게 사는 거냐. 그런 식으로 그 사건은 우리에게서 끝이 났다. 우리는 대입시험을 치르고 졸업을 했다. 졸업식 날 본 태림은, 해언과 비교되지 않아 그런지, 한창 피어날 때라 그런지, 예전보다 훨씬 강렬하게 예뻐진 것처럼 보였다. 마치 흡착기로 뭔가를 쏴아아 빨아들이듯.
우리는 도서관 까페로 갔다. 내가 무엇을 마실지 묻자 다언은 아무것도 마시지 않겠다고, 그냥 물이나 한잔 달라고 했다. 나는 레모네이드와 아메리카노와 물 한잔씩을 가져와 다언 앞에 물과 레모네이드를 놓고 마주보는 자리에 아메리카노를 놓고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다언은 제법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대학 선배로서 가능한 한 평범한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무슨 과인지, 앞으로 진로는 어떻게 잡았는지 하는 것. 인기있는 강좌나 동아리, 주변의 맛집이나 술집에 대한 정보 같은 것. 일단 내가 4학년이었으므로 2학년이지, 하고 물었더니 뜻밖에도 1학년이에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재수했느냐고 물었더니 고등학교 때 1년을 쉬었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언니가 살해당했는데 살해 이유도 밝혀지지 않았고 범인도 잡히지 않았다. 누군들 태연히 학교에 다닐 수 있겠는가. 더구나 해언을 동생처럼 보살피고 돌봤던 다언으로서는 그 고통이 이루……까지 생각했을 때 다언이 내 감상을 깨트리듯 툭 말을 던졌다.
그때 한 거예요.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대번에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 고통이 이루…… 이루…… 그랬구나.
한번 하니까 계속하게 되더라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계속하게 됐구나. 해언의 사진을 가져가서 똑같이 해달라고 했겠지. 다이어트도 병행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평범한 대화를 나누려던 애초의 의도와는 멀어지고 말았다.
하니까 좀 괜찮아졌니?
괜찮아져요? 뭐가요? 뭐가 괜찮아졌냐는 거예요?
성형사실을 무람없이 털어놓기에 나도 편하게 질문을 던졌다가 적잖이 당황했다.
아니, 내 말은, 마음이, 마음이 뭐랄까 좀, 하기 전보다……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나는 내 눈과 귀를 의심했다. 다언이, 아, 하는 신음과 함께, 지겨워 죽겠네 진짜,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표정 또한 진절머리가 나서 견딜 수 없어 보였는데 성형 후유증 때문인지 피부가 어색하게 뒤틀리면서 얄궂게 상스런 표정이 되었다. 나는 다언이 이토록 꼴사납게 변한 게 안타까웠다. 이런 무례한 태도를 참아줘야 하는지 맞대응을 해야 하는지 초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표표히 사라져야 하는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 있는데, 다언이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남학생들 셋이 상당히 큰 목소리로 두시간 뒤에 열릴 한국과 세네갈의 월드컵 평가전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다언이 지겨워한 것은 내가 아니라 축구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4년 전 월드컵과 해언의 사건은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어 하나를 끌어당기면 다른 하나가 딸려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언은 남학생들 쪽을 외면하고 어떤 얘기도 듣지 않겠다는 자세로 노란 갑각류처럼 딱딱하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다언이 행한 성형의 결과는 어떤 식으로든 해언을 떠올리게 했지만 결코 똑같지는 않았다. 똑같을 수가 없었다. 돌이킬 수 없이 늙고 망가져버린 해언을 상상할 수 있다면, 지금 다언의 모습은 그런 해언을 무리해서 억지로 복원시켜놓은 모습 같았다. 다언은 예전의 해언과 망가진 해언 사이에 놓인 중간존재처럼 보였다.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없는. 그렇다면 다언은 어디로 간 걸까.
다언이 나를 힐끔 보더니 웃었다. 아니, 찡그리듯 입가를 움직였다.
그러니까 상희언니, 괜히 왜 이런 데를 오자고 해요?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데가 어떤 데를 말하는 건가. 도서관 까페에서 남학생들이 월드컵 얘기를 하고 있을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설령 다른 까페에 갔더라도 거기에 월드컵 얘기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리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특히 오늘같이 중요한 평가전이 있는 날엔.
이런 데 오면, 하고 다언이 말을 이었다. 내가 언니 언니 하면서 괴로운 마음을 털어놓을 줄 알았어요? 그럼 짠한 얼굴로 위로도 해주고 격려도 해주고 언제든 힘들면 연락하라고 토닥토닥, 그렇게 언니노릇 하고 싶었어요?
다언은 여전히 웃는 듯 입가를 찡그려 올리고 있었다. 나는 핑 도는 현기증을 느꼈다. 아마 다언의 말이 맞을 것이다. 내가 원한 게 바로 그런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다짜고짜 다언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내게 조금 으르렁거렸다는 이유로 아픈 개를 발로 차듯, 옳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도 나는 다언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을 퍼붓고 싶었다. 다언이 그랬으니 나도 그래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가만있자,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다언은 그 사건 이후로 나 같은 사람을 많이 만났을 것이다. 위로해주려고 다가왔다가 그녀의 공격성에 놀라 당황하거나 분개하는 사람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관두자고 생각했다. 어떤 말을 내뱉든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될 뿐이었다.
다언이 물을 한모금 마시고 백을 집어들었다. 물컵 가장자리에 붉은 립스틱 자국이 남았다. 내가 사온 레모네이드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다언이 일어나려다 말고 물었다.
참, 윤태림은 연락돼요?
나는 반창회에서 가끔 보긴 한다고 대답했다. 다언이 백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럼 언니 연락처 좀 줘요.
나는 바보처럼 멍해졌다.
누구…… 나? 태림이?
다언이 입가를 살짝 찡그렸다. 저게 웃는 것이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태림이 왜 언니예요? 언니가 언니지.
나는 고분고분 휴대전화 번호를 불러주었고, 다언이 그걸 입력하는 동안 얌전히 두 손을 맞잡고 있었다. 다언이 고개를 들었다.
상희언니, 아직도 시 써요?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안 써,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 그렇군요. 다언이 레모네이드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고 말했다.
레몬……과자.
내가 말했다.
베티번……씨.
다언의 눈이 빛났다. 그 눈빛에서 나는 예전의 다언에게서 풍겨오던 싱싱한 생기를 엿보았다. 내 눈빛에서 다언도 뭔가를 엿보았을까.
기억나요, 언니?
기억나네.
나는 언니가 계속 시 썼으면 좋겠어요.
나는 왜,라고 물으려다 말았다.
상희언니랑 우리 언니가 바뀌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 한 적이 있었어요. 언니하고 얘기하는 게 너무 좋았어요.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언은 백년을 산 여인처럼 말했다.
미안해요 언니. 나중에 연락할게요.
이 말을 남기고 다언은 갔다. 긴 머리카락에 노란 원피스, 흰 백과 흰 구두. 나는 사라지는 그것들을 보았고 도서관 까페에 혼자 남아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월드컵 본선에서 토고를 잡기 위해 이번 세네갈과의 평가전에서 누구를 선발로 내세워야 하는지를 놓고 설왕설래하던 남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커피를 다 마시고 레모네이드를 마시기 시작했다. 조명은 그대로일 텐데 밖이 캄캄해 그런지 까페는 한결 어둑해진 듯했다. 문득 서울로 전학 와 혼자 지내던 시절이 떠올랐다. 아무도 말을 건네지 않아 혼자 밥을 먹고 혼자 공부하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던 그 겨울의 추운 날들.
한때 내 시에 열광했던 다언이 아직도 시를 쓰느냐고 물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나는 시를 그만두었다. 이제껏 내게 시를 쓰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다언은 내가 계속 시를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다언만이 뭔가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나 또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더 문제가 되는 쪽은 나였는데, 다언은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 끊임없이 자각하고 있는 데 반해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다언을 보고 이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저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며 관대하게 고개나 끄덕이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자문했다. 나 또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조이스에 빠져 「레몬과자를 파는 베티번씨」라는 시를 쓰던 그 시절로.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인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시의 첫 연을 기억한다.
오늘도 과자가 탔다
되는 노릇이 하나도 없군요 우리 베티번씨
다언은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했지만 연락하지 않았다.
내가 다언을 다시 만난 건 작년 11월, 국립도서관 1층 가방보관함 앞에서였다. 대학 도서관 계단에서 만난 지 9년반 만이었다. 돌이켜보면 다언과 나는 문예반 교실 아니면 도서관 같은, 언어를 매개로 한 공간에서만 만난 셈이다. 나도 그녀도 뭔가를 쓰거나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그녀는 참회록 비슷한 글을 쓰고 있다고 했는데 그게 어떤 종류의 글인지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딴 데 정신이 팔려 물어보지 못했다. 내가 다언에 대해 아는 건 오직 한가지, 한일 월드컵이 있던 그해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이 결코 그녀에게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뿐이다. 끝없이 계속되리라는 사실뿐이다. 끔찍한 무엇을 멈출 수 없다는 것, 그 무엇이 끝없이 진행된다는 것, 그게 한 인간의 삶에서 어떤 무게일지 나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2009: 레몬
내 고등학교 졸업식과 대학 졸업식에 우리 가족 중 누구도 참석하지 못했다. 아빠와 언니가 참석 못한 건 당연했지만 엄마가 그런 건…… 생각해보면 그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참석하지 않았다.
언니가 죽은 후 우리는 경기도 신도시로 이사했고 나도 그곳 고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이전 학교와 달리 공학이 아닌 여고였다. 처음엔 나도 엄마도 매우 느린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떨어지고 있는 줄도 몰랐다. 엄마는 꼬박꼬박 일을 하러 나갔고 나도 꼬박꼬박 학교에 나갔다. 엄마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나는 점점 어리둥절해졌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언니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하는 의혹에 빠졌다. 그건 무척 슬프고 괴로운 의혹이었다.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하는 것. 과거형이라 이제는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것.
어느 순간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물방울만 하게 맺혀 있던 공백이 풍선처럼 훅훅 부풀어올랐다. 세상이 점점 멀어지고 흐릿해지다 아예 사라져버리는 일이 생겨났다. 엄마와 나는 순식간에 추락했다. 엄마는 다니던 샵을 그만두었고 나는 학교를 휴학했다. 우리는 며칠씩 잠만 자거나 며칠씩 잠을 못 잤다. 먹는 것을 잊었고 씻는 일은 엄두도 못 냈다. 어떻게든 위로 기어올라가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오랫동안 우물 같은 축축한 어둠 속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돌이켜보면 차라리 그때의 완전한 무기력 상태가 더 편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때 나는 오직 언니에 대해서만 생각했고 세상에 그보다 절박한 일은 없다는 듯 언니와 관련된 희미한 기억 하나를 떠올리기 위해 몇날 며칠을 거기에 붙들려 있곤 했다. 아마 엄마도 그랬으리라 짐작한다.
원래 언니의 이름은 혜은이었다. 김혜은. 엄마가 그렇게 지었고 아빠도 동의했다. 공교롭게도 엄마가 지독한 산후 몸살을 앓는 통에 출생신고가 한달여간 지체되었다. 그동안 경상도 출신이라 발음이 분명하지 못한 아빠가 언니를 해언아 해언아 하고 불러대는 통에 엄마도 세뇌가 되어 해언이란 이름도 의외로 괜찮구나, 혜은보다 해언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 어차피 혜은이라 지어도 아이 아빠가 계속 해언이라 불러댈 테니 차라리 그쪽으로 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언니는 김해언이 되었다.
만약 언니가 혜은이었다면 나는 다은이 되었을 것이다. 다은과 다언, 어느 게 더 나은지 모르겠다. 내 경우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언니의 경우는 달랐다. 엄마는 언니가 죽은 후 혜은이라는 이름에 강하게 집착했다. 이름이 바뀌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결국 죽은 언니는 혜은이 되어 엄마에게 돌아왔다. 이건 비유가 아니다. 언니가 죽고 나서 10년 뒤, 실제로 살아 있는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혜은이 되었으니.
아빠는 언니를 끔찍이 사랑했다고 한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예쁜 아기였을 것이다. 나는 아기였을 때의 언니를 상상해본다. 아기란 원래 무심하고 제멋대로이고 본능에만 충실한 짐승이니 어쩌면 언니는 아기였을 때 자신에게 꼭 맞는 삶을 살았다고도 할 수 있다. 언어를 몰라도 괜찮던 시절, 관계를 맺거나 감정을 공유하는 법을 몰라도 흠이 되지 않던 시절, 그 시절의 언니는 최고로 빛나는 피조물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언니를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다. 언니를 본 사람은 누구나 서슴없이 자신의 평생을 걸고 이보다 예쁜 아기는 본 적이 없노라고 단언했다.
아빠가 언니의 죽음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었던 건 행운이었다. 아빠는 종종 새 담뱃갑에서 첫 개비를 뽑다 실수로 뚝 부러뜨리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얼굴이 벌게지도록 화를 냈다. 아빠는 벌컥 화를 낼 일이라고는 그 정도밖에 없는 평범한 삶을 살다 갔다. 언니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해에, 그러니까 언니가 일곱살, 내가 다섯살이었을 때, 아빠는 동료 직원과 지방출장을 갔다가 삼거리 교차로에서 교통사고로 즉사했다. 운전은 동료 직원이 했고 아빠는 조수석에 타고 있었다. 마치 신정준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언니가 타고 있었듯이. 그들의 차는 T자 모양의 교차로 아래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다 신호가 바뀌자 좌회전을 했다. 그때 오른쪽에서 맹렬히 달려오던 트럭이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그들의 차를 박아버렸다. 차는 중동이 부러진 담배처럼 꺾였고, 앞문이 휘어 아빠를 구조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빠는 차 밖으로 끄집어내지기도 전에 죽었다. 강한 타격에 의한 두부 손상으로 인한 사망. 언니의 사인과 같았다.
친척들은 그후로 엄마가 변했다고 쑥덕거렸다. 회사와 보험사에서 꽤 많은 보상금을 받았을 텐데도 저렇게 돈에 무섭다고들 했다. 엄마는 친구의 샵에 돈을 벌러 나가면서 집안일은 맏딸인 언니에게 맡겼다. 그건 애초에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집안은 엉망이 되었다. 아빠의 죽음과 엄마의 변화로 언니는 상처를 받았을까. 아마 조금은 받았을 것이다.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언니의 성격이 변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언니는 바위처럼 단단해 쉽게 바뀌지 않는 사람이었다.
집안일은 내가 떠맡게 되었다. 나는 여섯살에 청소기와 세탁기 돌리는 법을 익혔고, 일곱살에 엄마가 불 쓰는 일을 허락해 쌀을 씻어 전기밥솥으로 밥을 하고 가스레인지에 두부와 참치를 넣은 김치찌개를 끓였다. 거의 하루종일 같이 지냈지만 나는 언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언니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언니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위하지 않았고 아무도 해하지 않았다. 누구의 눈도 의식하지 않았고 누구에게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간섭받지 않고 무위한 상태로 있을 때 제일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존재였다. 가능한 한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의도된 책략이 아니었음에도, 그런 책략을 쓸 만큼의 용의주도함과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언니에게 그보다 더 훌륭한 책략은 없었다. 말없이 상대방을 응시하거나 짤막한 대답만을 던지고 무심히 고개를 돌리는 절제와 우아함이 언니의 미모를 빛나는 위엄으로 감쌌다.
언니는 몸의 물질성에 대한 자의식이 느슨하고 희박했다. 육체가 가진 육중한 숙명을 이해하지 못했고 외모가 주는 기쁨과 고통을 몰랐다. 언니는 자기 신체의 아름다움을 우연히 해변에서 주운 예쁘장한 자갈 정도로 취급했다. 사람들에게 내보였을 때 유리한 점이 많다는 건 알았기에 때로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외모가 지닌 진정한 가치는 몰랐다. 진주와 자갈의 차이를 모르는 어린애처럼.
언니는 무심했고 무욕했다. 나는 언니와 먹을 것이나 장난감을 놓고 다툰 기억이 없다. 그런데 그게 좋기보다 서운하고 불안했다. 나는 늘 언니에 대해 심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언니는 식탐이 전혀 없었으므로 평소에 나는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언니가 배고파지면 상황이 달라졌다. 언니는 역지사지나 감정이입이 불가능한 존재로 변했다. 최소한의 룰이나 배려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 때 나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기다려야 했다. 자기 배를 채울 수 있다면 언니는 굶주린 아이와 노인의 빵도 태연히 빼앗아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럴 때 언니는 짐승처럼도 보였고 저능처럼도 보였고 심지어 싸이코패스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초탈한 성자처럼 보였다. 속옷도 입지 않고 편안하고 헐렁한 잠옷 원피스만 입고 무릎을 약간 벌려 세운 방심한 자세로 앉아 있거나 드러누워 허공을 응시하는 언니의 모습은 아름다웠지만 또 근심스러웠다.
그렇게 자주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엄마는 언니를 때렸다. 작정하고 매를 드는 게 아니라 갑자기 터지는 재채기처럼 느닷없는 매질이었다. 집에서의 게으름과 학교생활의 불성실함 탓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 큰 계집애가 속옷을 잘 챙겨입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어느날 엄마는 브래지어는커녕 팬티도 입지 않고 학교에 다녀온 언니를 후려갈기려고 손을 쳐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허망하게 손을 내렸다. 엄마는 마치 처음 보기라도 한 듯 중학생이 된 언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어떤 희망의 빛을 발견하고 얼굴이 환해졌다. 엄마는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누군가에게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봤지? 이건 드물고 귀한 거야. 귀한 건 늘 돈이 되는 법이지.
그후로 나는 집안일을 챙기듯 언니의 속옷을 챙겨야 했다. 집을 나서기 전에 언니를 세워놓고 앞뒤로 돌아가며 뭘 빠트리고 안 입었는지 점검했다. 언니와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교문 앞에서 한번 더 점검해야 마음이 놓였다. 고3인 언니는 이미 다 큰 처녀였으니까.
그해 월드컵 기간 내내 나는 심한 여드름으로 그야말로 얼굴이 ‘붉은 악마’인 상태로 지냈다. 피부과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발진은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붉은 월드컵셔츠와의 조화를 위해 일부러 얼굴을 시뻘겋게 놔두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다녔다.
월드컵이 끝난 다음날은 임시공휴일이었다. 그날 저녁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욕실에서 골똘히 생리대 날개를 붙이고 있었다. 계속 울리는 전화벨 때문에 나는 대충 팬티를 올리고 생리통으로 허리를 잘 펴지 못한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김해언의 보호자를 찾는 전화였기에 나는 엄마가 일하는 샵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욕실로 돌아와 검붉은 피로 물든 생리대를 보는 순간 갑자기 호흡이 가빠져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왜 언니의 보호자를 찾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팬티를 내리고 생리대의 위치를 바로잡으려다 문득 고개를 들고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 곪기 직전의 발진으로 울긋불긋한 얼굴과 피에 젖은 아랫도리의 검은 털이 비쳤다. 그건 정말 추악한 붉은 마녀의 꼬락서니였다.
잠시 뒤에 엄마가 전화를 걸어와 언니가 집에 있는지 확인해보라고 했다. 나는 언니 방과 안방, 내 방까지 다 둘러보고 나서 집에 없다고 말했다. 엄마는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어디 나가지 말고 문 꼭 잠그고 집에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다. 그날 밤 늦게 엄마는 비에 흠뻑 젖어 돌아왔다. 밖에 비가 오는 줄도 몰랐던 나는 엄마가 젖은 몸으로 거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는 걸 보고 걸레부터 집어들었다.
혜은이가 죽었다!
그때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엄마가 ‘혜은’이라고 분명히 발음하던 그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이상한 것이, 전날 밤 언니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도 엄마도 몰랐다. 나는 그날 언니가 하루종일 집에 있는 줄로만 알았다. 언니는 월드컵 따위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나는 혼자 브라질과 독일의 결승전을 보고 라면을 끓여먹으며 폐막식 중계를 보았다. 샵에서 늦게 돌아온 엄마는 아파트의 현관문이 잠겨 있지 않은데도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딸들을 불러 주의를 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언니가 전날 오후 5시반쯤 왜 집을 나갔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언니는 산책 같은 걸 하지 않았고, 지갑을 가지고 나가지 않았으니 뭘 사려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더 이상한 건 언니가 신정준의 차에 탔다는 사실이다. 언니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요구에 억지로 응할 사람이 아니었다. 언니가 강제로 그 차에 타지 않았다는 건 세탁소 아주머니의 증언으로도 입증되었다. 언니는 왜 세탁소 앞에서 신정준의 차를 탔을까. 그걸 타고 어디로 가려던 것이었을까. 그리고 7시쯤 신정준의 차에서 내려 어디로 간 걸까. 돈이 없으니 버스나 지하철도 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섯 정류장이나 되는, 자신의 시신이 발견된 그 공원까지 걸어간 건가. 거기서 누구와 만났는가. 누구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가.
우물처럼 어두운 시절이 끝나는 때가 왔다. 어느날 엄마가 물건들을 집어 가만히 들여다보다 그걸 어딘가로 옮기거나 어딘가에 집어넣고 있었다. 한참 지켜본 후에야 나는 그게 청소라는 걸 알았다. 엄마는 청소를 하고 있었다. 나도 곁에 놓인 물건을 집어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길쭉하고 목 부분이 휘고 파란 뚜껑이 달린 통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통을 쥐고 있었다. 이걸 어디에 두어야 하나.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시원한 것인가 끈적한 것인가. 통에서 은은하게 풍겨나오는 싸한 향을 맡고서야 나는 그것을 붉은 십(十)자가 그려진 약통에 넣는 데 성공했다. 물파스를 딱풀과 한참 헷갈렸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때만 해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벗어났다고. 이제 살아났다고. 엄마는 다시 지인의 샵에 출근하기로 했고 나는 방학이 끝나는 대로 학교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제대로 돌아온 게 아니었다.
엄마는 언니의 이름을 바꾸려고 가정법원을 찾아갔다. 딸의 이름을 바꾸고 싶다고 하자 직원은 신청서류를 주고 첨부해야 할 서류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집에 돌아온 엄마는 개명 신청서류에 반듯한 글씨로 언니의 성명을 쓰고 대리인인 엄마의 성명과 주소, 인적사항 등을 썼다. 개명 취지에는 원래 이름이 김혜은이었는데 출생신고가 잘못되어 지금이라도 바로잡고 싶다고 적었다. 엄마가 가정법원에 서류를 접수하러 가자 직원은 첨부서류를 요구했다. 엄마는 딸아이가 죽어서 가족관계증명서를 뗄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직원은 경악하며, 개명하려는 사람이 죽은 사람이라고요, 하고 물었다. 엄마는 담담하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직원은 사망자의 개명은 불가하다고 말했다.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산 사람 이름 바꾸는 것과 죽은 사람 이름 바꾸는 게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그거 하나 해주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냐고 따져물었다. 직원은 그건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설사 개명허가가 난다 해도 개명된 이름을 어디 신고할 데가 없지 않느냐, 사망자는 소속이 없어 기재할 서류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엄마는 그건 상관없다고 했다. 그냥 개명 허가만 내달라고 했다. 직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망자의 개명은 불가합니다. 직원은 이렇게 말하고 엄마가 인지대로 낸 천원을 사각의 접시에 얹어 돌려주었다. 천원짜리 지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엄마는, 애가 죽었는데 그거 하나 못해주나, 그거 하나,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혼자만 사탕을 받지 못한 어린애처럼 울먹이며 지폐를 집어들고 돌아섰다.
그후로 엄마는 사적인 개명작업에 착수했다. 자기 힘으로 언니의 이름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언니의 교과서와 참고서, 노트와 수첩에 적힌 이름을 바꿔 적고, 앨범에 있는 언니의 사진을 하나하나 찾아내 뒷면에 굳이 혜은이라는 이름을 적어넣었다. 아빠가 죽은 후부터 쓰기 시작한 가계부를 모조리 꺼내 언니의 항목으로 소비된 지출을 수정액으로 지우고 이름을 바꿔적었다. 해언의 체육복과 운동화와 학용품은 모두 혜은의 것으로 바뀌었다. 느이 언니 혜은이 말이다, 하고 언니 얘기를 할 때 엄마는 늘 ‘혜’라는 발음에 유의했는데, 그게 과하여 때로는 훼나 회, 켸나 셰처럼 들리기도 했다.
어느날 자다 문득 눈을 떴을 때 나는 엄마가 내 곁에 앉아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눈을 떴는데도 엄마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없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건 마치 깊이 박힌 거스러미를 억지로 뜯어낸 손톱에서 피가 배어나오는 걸 지켜보는 듯, 지극한 고통을 견디는 표정이었다. 나는 엄마가 내 얼굴이 아닌 다른 얼굴을 찾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 다른 얼굴을 원하고 있었다. 내가 보고 싶던 얼굴은 어디로 갔지? 이 자리에 왜 네 얼굴이 있는 거지?
아주 오래전 어느날 언니의 얼굴을 보며 희망에 불탔던 엄마의 눈빛과 정반대의 눈빛이 있다면 바로 그때 나를 들여다보던 그 눈빛일 것이다. 나는 우리가 현실로 돌아오지 못했음을 알았다. 비틀린 경로로 우회하지 않고는 다시는 현실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자기 자신을 놓칠까봐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머리를 흔들거나 눈을 깜빡이는 불안증 환자들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행하고 취소하고 반복하는 경련의 삶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엄마가 엄마 스스로를 바꾸지 못해 언니의 이름을 바꾸려 했다면 나는 언니의 그 무엇도 바꾸지 못해 나 스스로를 바꾸기로 했다. 엄마가 말렸더라도 나는 감행했을 것이지만 엄마는 말리지 않았다. 말리기는커녕 부추긴 것이나 다름없다. 그토록 돈에 무서운 엄마가 선뜻 수술비를 대주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나는 이곳저곳의 성형외과를 전전했다. 처음엔 눈과 입술을, 이어서 이마와 코를 성형했다. 마지막으로 광대뼈와 하악, 턱끝을 깎는 안면윤곽수술을 세차례에 걸쳐 받았다. 수술의 고통은 내게 마약과 같았다. 코에 부목을 대고 있는 동안, 퉁퉁 부어오른 광대뼈 위로 눈물을 흘리는 동안 나는 언니처럼 평온할 수 있었다.
언니가 죽고 2년반이 흐른 뒤에야 나는 그 공원에 가볼 용기를 냈다. 신도시에서 전철을 타고 예전에 우리가 살던 아파트 근처 역에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들어갔다. 공원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중앙 산책로에서 왼편으로 휘어지는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외딴곳에 갈색의 나무 벤치가 있었다. 벤치 왼편에는 배선함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여행용 가방 크기의 알루미늄 함이 세워져 있었고, 그 뒤편으로 사람 키 높이의 초록색 공원 철책이 둘러쳐져 있었다. 잡풀이 말라붙은 땅은 철책 쪽으로 비스듬히 경사가 져 있었는데 공을 굴리면 빠르게 굴러내려갈 정도였다.
나는 나무 벤치와 배선함과 철책이 납작한 삼각형을 이루는 비탈진 지점에 섰다. 언니의 시신이 발견된 곳이었다. 맑은 초겨울 날이라 빛이 쨍하고 사방이 환해 뻥 뚫린 공간처럼 여겨졌지만 6월말에는 달랐을 것이다. 나무와 풀이 무성했을 테고 경사까지 져 한낮이 아니면 시신이 발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언니는 오후 2시경에 산책 나온 노부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속옷이 탈의되어 사라졌으나 강간이나 성폭행을 당한 흔적은 없었다.
그후로 나는 자주 그 공원에 갔고 나무 벤치에 한참 앉아 있다 돌아오곤 했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종종 나는 그 공원에 있었다. 언니는 민소매의 노란 면 원피스를 입고 나무 벤치에 앉아 있다. 숱 많고 까만 머리칼을 풀어내린 언니는 숲 속의 요정처럼 꿈꾸는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본다. 아니, 아무 데도 바라보지 않는다. 언니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어느 순간 뒤편 어둠에서 손이 튀어나와 언니의 머리통을 내려친다. 몇번이고 계속해서 내려친다. 노란 원피스에 핏방울이 떨어져 붉게 물든다. 언니가 쓰러진다. 손이 언니를 어둠 속으로 끌어당긴다. 꽃이 지듯 언니는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그때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서 보고 있는가.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나는 내 시점을 알지 못한다.
한번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나는 푹 젖은 채로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어떤 때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인 경우도 있었다. 나는 거실 소파 위에 무릎을 벌려 세우고 앉아 있었다. 소파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펜과 메모 상자와 리모컨 따위의 잡동사니들이 놓여 있었다. 뭔가가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 왼쪽에 놓인 두루마리 휴지의 구멍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슬쩍 피하는 것 같다가도 내가 다시 정면을 향하면 절골술을 받은 지 얼마 안되어 붓기가 빠지지 않은 턱의 왼편을 빤히 응시하는 휴지의 외눈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도저히 그 시선의 정체를 알 수 없었는데, 조금 지나서는 그것이 나에 대한 조롱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휴지를 바닥에 놓고 통째로 꾹 눌러 밟았다. 휴지는 납작해졌고 휴지의 외눈은 감겼다. 휴지가 죽었다. 내가 죽인 것이다. 휴지는 언니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했다. 우리 자매는 죽었다. 나는 더이상 다언이 아니다. 채언 또는 타언, 그런 비슷한 것일 수 있겠지만 다언은 아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시신처럼 납작해진 휴지를 손에 들고 울었다. 우는 게 누구인지 모르면서 울었다. 앞으로 내가 누구로 살게 될지 모르면서 울었다. 휴지를 뜯어 눈물을 닦았다. 누군가 봄을 잃은 줄도 모르고 잃었듯이 나는 내 삶을 잃은 줄도 모르고 잃었다.
나는 어디에서나 내 얼굴에 달라붙는 끈끈한 시선을 느꼈다. 그것은 때로 사람들의 시선이기도 했지만 사물의 시선일 때가 더 많았다. 사물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시선을 견디느라 내 신체는 경직되었다. 혼자 있을 때에도 항상 몸의 한 부분, 또는 많은 부분에 힘을 주고 버티는 버릇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한껏 힘을 주고 있다가 어느 순간 견디지 못하고 폭발했다. 나는 사물들을 누르거나 밟거나 던지곤 했다. 다행히 그 사물들은 보드랍고 물렁하고 깨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 이유는 내가 부딪치거나 깨지는 소리를 도저히 듣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콱, 퍽, 와작 하는 소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끔찍한 공포에 휩싸였다. 나는 그 소리를 귀로 들을 뿐 아니라 눈으로 보았다. 무엇인가 단단한 것이 단단한 것과 부딪쳐 깨지는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눈에 힘이 들어가고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파열음과 굉음 들이 만들어내는 타는 듯한 지옥도를 보는 내내 피처럼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학 졸업식 전날 오후부터 나는 고열에 시달렸다. 목이 갈라지고 얼굴이 따가웠다. 엄마는 샵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붉은 십자가 그려진 약통에서 약을 꺼내먹고 뜨거운 소금물로 가글을 했다. 거울 속에 붉게 달아오르고 수술자국을 따라 선명한 열선이 그어진 얼굴이 비쳤다.
새벽에 깨어 다시 약을 먹었다. 오래 잠을 자고 오후 늦게 일어났다. 엄마는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 졸업식도 끝났을 터였다. 나는 냉장고에서 계란 두개를 꺼내 삶았다. 계란이 삶기는 동안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다 다시 공원의 환각에 사로잡혔다. 노란 프리지어처럼 나무 벤치에 앉아 있는 언니, 퍽하는 소리, 피에 젖은 검은 머리칼, 생리혈에 젖은 아랫도리의 털, 검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노랗고 붉은 꽃, 시뻘겋게 달아오른 누군가의 얼굴이 어지럽게 겹쳐져 조각나고 흩날렸다. 가스 불에 물이 넘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스레인지로 가서 불을 끄고 계란을 찬물에 담갔다 꺼내 가져왔다. 탁 소리를 내지 못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손으로 살살 눌러 껍질을 깠다. 거실 통유리로 쏟아져들어온 늦은 오후의 햇살에 테이블 위 얇게 깔린 먼지의 층이 보였다. 반쯤 깐 계란을 한입 베어먹자 쫄깃한 흰자와 파삭한 노른자의 맛이 섞였다. 나는 노른자의 단면을 내려다보았다. 햇살을 받은 흰자 속의 노른자가 영롱한 샘처럼 빛났다. 아름답구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무엇인가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 지가 아주 오래되었다. 몇해 전에 우연히 만난 상희언니에게 아직도 시를 쓰느냐고 물었던 기억이 났다. 레몬…… 동그란 노른자의 선명한 빛이 내게 다시 시를 쓰고 싶게 했다. 흰자에 포근하게 감싸인 노른자를 보고 있는 동안 나는 외롭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다. 요람에 든 아이처럼 편안했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의식의 거대한 부분이 느린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하안만우우우……
그를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 생각이 계시처럼 나를 찾아왔다. 아직은 무디고 둔중하지만 곧 빠르게 핑핑 피돌기를 할 뜨거운 에너지 덩어리가 슬그머니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를 찾아갈 때가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였다. 그 이외엔 없었다. 나의 오랜 상상 속 어둠에서 튀어나오는 범인의 손은 언제나 그의 손이었다. 언니가 나시에 반바지를 입었다는 거짓증언에 목숨을 건, 어리석은 만큼 교활한 인간. 그날 밤 11시 30분에서 12시 사이, 그는 우연히 공원에 있는 언니를 보았을 것이고 어떤 이유에선지 몰라도 언니를 살해했을 것이다. 언니의 머리를 내려치고 시신을 경사진 아래쪽으로 옮겨놓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재빨리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자신이 집에 왔다는 표시를 여기저기 냈을 것이고, 잠에 취해 있던 여동생은 시간을 확인하지도 않고 제멋대로 오빠의 알리바이를 증언했을 것이다.
두번째 계란을 테이블에 살살 눌러 껍질을 까 한입 베물었다. 그를 만나야겠다.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야겠다. 그후에 내가 누구로 살지, 어떻게 살지를 결정짓겠다. 그를 만나야 내가 살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나를 휩싸고 내 안을 흥분의 물결로 채웠다. 오랫동안 열리지 않던 문이 열리고 노란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져들어오는 듯했다. 노란 천사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레몬,이라고 나는 의미 없이 중얼거렸다. 복수의 주문처럼, 레몬, 레몬, 레몬이라고.
2009: 끈
여보세요, 도움천사 일공공사(1004)죠?
제가 지금 시간에 상담을 예약한 사람인데요.
접수확인이요? 제 아이디는 크리스트고요. 씨, 에이치, 알, 아이, 에스, 티. 크리스트(christ). 지저스 크라이스트 할 때의 그 크리스트요. 나이는 26세고 미혼이에요.
확인됐나요? 상담사 선생님 연결해주신다고요? 네,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크리스트라고 합니다. 네, 처음이에요, 이런 상담. 저는 지금부터 선생님께 아주 힘들고 긴 얘기를 털어놓으려고 해요. 이 얘기를 누군가에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어요. 요즘 잠도 잘 못 자고 환청도 들리고 이상한 것도 보이고 미칠 지경이에요.
그런데 상담하기 전에 꼭 한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이게 지금 녹음이 되고 있나요? 되고 있다고요? 녹음을 안할 수는 없나요? 상담내용은 반드시 녹음하도록 되어 있다고요? 그럼 제가 여기서 한 얘기가, 그러니까 녹음된 얘기가 절대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는다고 약속해주실 수 있나요? 그렇군요. 그건 안전하군요. 그것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삭제되고요. 그럼 안심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삭제되기 전에 말이죠, 혹시 수사에 필요하다거나 경찰 같은 데서 정보가 필요하다고 요청이 들어오면 어떻게 되나요? 제가 한 얘기가 새어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녹음된 내용이 전부 제공되는 거 아닌가요? 그런 일은 거의 없다고요? 네, 설사 그렇더라도, 일단 환자의 발화이고, 또 뭐라고요,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는 상태에서의 발화 내용은, 범죄사실의 고백이라 하더라도, 당사자, 그러니까 환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그렇게 되어 있다고요? 일단 그렇다면…… 저는 문제가 안되겠군요.
네? 뭐가 문제가 안되냐고요? 아, 잘 안 들리는데요.
선생님, 지금 뭘 드시고 계신가요? 커피요? 커피 마시고 계시는군요. 무슨 커피인가요? 쿠바산이요? 그렇군요. 전 위장이 안 좋아져서 끊은 지 오래됐어요. 그때 다 없애버렸죠. 벨기에산 그라인더는 제가 무척 아끼던 거였는데 그것마저 버렸으니까요. 누굴 주지도 않고 그냥 버려버렸어요. 그래야 완전히 끊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지금은 무척 커피가 마시고 싶군요. 커피향이 그리워요. 딱 한모금만 마셨으면……
그건 그렇고, 한가지만 더 여쭤볼게요. 제가 만약 다른 사람, 다른 누군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어떻게 되나요? 그것도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는 상태에서의 발화, 아까 발화라고 하셨죠, 그런 발화라서 증거 채택이 안되거나 증거로서의 효력이 없나요? 아니에요, 이해해요, 애매할 수 있다는 그 말씀. 법이란 게 원래 애매한 거 아닌가요? 저는 법학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정외과를 나왔거든요. 그래서 어느정도 법의 적용이나 운용에 대해서는 아는 편이죠. 만일 법에 애매성과 융통성이 조금도 없다면 정치나 외교 같은 게 왜 필요하고 또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흔히들 법은 하나다, 법 앞에선 누구나 평등하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들을 하는데, 자기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소리죠. 법이 기계도 아니고 또 법을 다루는 인간도 기계가 아닌데 어떻게 법이 매번 똑같이 균등하게 적용될 수 있단 말이에요? 저는요, 법은 어쩌면 신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요. 우리 같은 미약한 인간이 어찌 신의 의지를 헤아려볼 수 있겠어요. 법도 그런 심오한 것 아닐까요. 측량할 길 없고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힘, 의지, 그런 것…… 혹시 선생님, 예수님을 믿으세요? 신실한 크리스천은 아니더라도 교회엔 다니시진 않나 해서요. 그러시군요. 저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에요. 그래서 아이디도 크리스트로 한 거고요.
얘기가 딴 데로 흘렀네요. 죄송해요. 제가 워낙에 깊고 내밀한 부분까지 얘기하려다보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범죄라는 극단적인 예를 들어본 것뿐이에요.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범죄나 불법, 그런 쪽하고는 관계된 적이 없어요. 그런 쪽 인간들을 만나본 적도 없고요. 때로는 그게 유감스럽기도 해요. 영화 같은 데 보면 총이나 마약, 레지스탕스 그런 것, 은근히 매혹적이잖아요? 어이없으신가요? 제가 어린애처럼 이렇게 철이 없답니다.
그럼 제 얘기를 시작할까요? 저는 요즘 결혼을 앞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어요. 결혼할 사람은 저하고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던 남자친구인데요, 고3 때 미국으로 유학 갔다가 올봄에 돌아왔어요. 한국에 오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곧바로 저를 찾아왔더군요. 다짜고짜 자기하고 약혼을 하자는데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제가 쉽게 허락을 안하고 망설이니까 그 사람이,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거래 아니냐, 하더군요. 물론 농담이죠. 농담으로 한 말이죠.
그 사람 직업이요? 지금 유명한 회계법인에서 일하고 있어요. 시아버님 되실 분도 그 회계법인에 오래 계셨거든요. 대를 이어 회계사 집안이죠. 어머님은 또 저하고 대학 동문 되시고요. 그 사람 집안도 크리스천 집안이에요. 저는 원래 다른 교회에 다녔는데 어머님이 권하셔서 지금은 그분들 다니시는 교회로 옮겼답니다. 거기엔 대법관 지낸 분도 계시고 법조계 분들도 계시고, 국회의원이나 장차관 하시는 분들, 대학교수나 예술가 분들도 계시고 아, 그리고 연예인들도 많이 봤어요. 직접 보고 실망한 연예인도 많아요. 키도 작고 왜소하고, 어딘가 좀 꼭두각시 인형 같다고나 할까요. 화면에서 보는 것하고는 많이 다르더라고요. 어머님도 그러셨어요, 웬만한 여배우들보다 제가 훨씬 예쁘다고요.
네? 제 고민이요? 아, 제가 그 사람과 결혼해도 될까 고민하는 이유는, 일단 우리가 결혼하기엔 나이도 너무 어리고 또…… 그 사람이 저를 구속할까봐 두려워요. 이해하시겠어요? 그 사람이 저를 꽁꽁 묶어두려고만 할까봐 겁이 나요. 선생님도 잘 아시겠지만 그런 남자들이 있잖아요. 사랑한다는 이유로 여자를 묶어놓고 가둬놓고 그러는 남자들이요. 물론 이 사람이 그렇게까지 철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자기도 옛날에 호된 일을 한번 당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더 무서울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자기가 그런 끔찍한 일도 당했는데 이 정도야 뭐, 그런 식으로 거침없이 나오면요.
그 일이요? 그 일은 말하고 싶지 않은데요.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에요. 아, 제가 방금 끔찍한 일이라고 했나요? 뭐 그 사람한테는 그런 셈이죠. 끔찍하다면 끔찍하고……
네? 제가 지금 뭘 하고 있냐고요? 지금 선생님과 상담하고 있잖아요? 아, 손에 뭘 들고 있냐고요? 머리끈이요. 머리 묶는 끈이요. 초록색이고 반짝이가 섞여 있어요. 그냥 손에 감았다 풀었다 그러고 있는데요. 자주 그러냐고요? 자주는 아니고 가끔 그러는 것 같아요. 아니, 자주 그러나? 잘 모르겠네요. 그런데 왜요? 이게 무슨 안 좋은 증상인가요? 그게 좀 복잡하다고요? 네, 그럼 나중에 말씀해주세요. 역시 선생님은 날카로우신 데가 있는 것 같아요. 왠지 믿음이 가요. 선생님을 믿고 모든 걸 털어놓고 싶어요.
그럼 말할게요. 말하고 싶어요. 간단히라도 말씀드릴게요. 아니, 가능한 한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그 일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시작은…… 그 사람과 저는 한때 깊이 사귀던 사이였어요. 모두들 우리가 잘 어울린다고 했죠. 모두요? 그건…… 당연히 친구들이죠. 그 사람 친구들, 제 친구들 모두 그렇게 생각했죠. 다들 우리를 부러워했다는 걸 저는 알아요. 우리는 정말 순수하고 완벽한 사랑을 했거든요. 우리가 정말 그렇게만 지냈다면…… 누구보다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갑자기 다른 애, 아니 다른 여자가 불쑥 끼어든 거예요. 그래서 저는…… 당황했죠. 믿을 수 없었어요. 그 여자를 사랑했냐고요? 그 사람이…… 그애를 사랑했냐고요…… 사랑했냐고요……
아니요! 사랑하지 않았어요. 절대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애가 그냥 중간에 불쑥 끼어든 거예요. 그 사람은 처음엔 그냥 재밌어했죠. 장난감처럼 갖고 놀고 싶어했다고나 할까. 남자들이 그런 짓궂은 데가 있잖아요. 어쩌면 제 질투를 불러일으키려고 그랬는지도 모르죠. 다시 말씀드리는데요, 그 사람은 절대 그애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단 한순간도.
그애는 그렇고 그런 애였으니까요. 저하고는 너무 다른 애였어요. 공부도 얼마나 못했는지, 머리가 텅 빈 백치나 다름없었어요. 얼굴 반반한 것만 믿고 뻔뻔스럽게 도도한 척하는 멍텅구리…… 그러니까 죽이고 싶었겠죠. 네? 제가요? 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요. 그 사람이 그애를 죽이고 싶어했다니까요. 왜냐고요? 글쎄요. 우리의 순수하고 완벽한 사랑이 훼손된다는 느낌, 그런 것 아니었을까요? 그애가 속옷도 안 입고, 글쎄 러닝이나 브라뿐만 아니라 팬티도 입지 않고 그 사람을 유혹하려고 했다니까요. 그래서 죽였냐고요? 아니에요,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에요. 그 사람은 그애를 죽이지 않았대요. 아니, 죽이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죽인 게 아니에요. 그애가 자살한 거예요. 왜냐고요? 왜냐니요? 그건…… 유혹하려다 실패하니까…… 수치스러워서…… 그래서 자살해버린 거죠. 네, 실제로 일어난 일이에요. 그애는 자기 머리를 벽에 부딪쳐서…… 두부 손상…… 두부 손상으로 사망했어요.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아, 정말…… 끔찍해…… 어떻게 열아홉살짜리 여자애가…… 머리를 욕실 벽에 부딪쳐서…… 대리석 타일이 깨지도록 그렇게…… 죽을 때까지 부딪쳐서 그렇게…… 아무리 묶여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독하게…… 아…… 무서워…… 미친 거야…… 제정신이 아닌 거야……
네, 선생님? 뭐라고요?
묶여…… 있었다고요?
누가요? 그 여자가 묶여 있었다고요? 아니에요. 걔가 왜 묶여 있어요? 전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선생님이 잘못 들으신 거예요. 아니라니까요. 그런 말 안했다니까요. 안했어요. 난 아무 말도 안했다고요.
내가 그런 말을 왜 해? 안했어. 안했다고. 뭐? 끈? 무슨 끈? 당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안 묶여 있었다는데 끈은 무슨 끈이야? 당신 미쳤어? 내가 지금 무슨 끈을 갖고 있다는 거야?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래? 그 사람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알고 이러는 거야, 당신?
여보세요? 여보세요?
선생님? 전화 끊으셨어요? 이 전화 끊어진 거야?
안돼요! 아직 얘기 안 끝났어요. 난 잘못한 거 없어. 난 정말 반바지 못 봤다고. 못 봐서 못 봤다고 한 것뿐인데 뭐가 잘못됐어? 난 진실만을 말했어. 그건 하나님께 맹세할 수 있어. 나 때문에 피해 본 사람도 아무도 없어. 걔도 금방 풀려났다고. 그럼 된 거잖아?
아…… 거기 아무도 없어요?
흥! 뭐? 거래?
이 자식이 감히 거래라고 했겠다. 거래 좋아하고 앉았네. 걸레 같은 자식, 날 뭘로 보고. 나 아니었으면 니가 그때 어떤 꼴을 당했을지 알기나 해? 변태새끼! 천사 같은 애를 죽게 만든 악마새끼! 살인자!
아, 주님! 사랑하는 주님!
그 새끼를 용서해주세요…… 아니, 용서하지 마세요…… 눈물로 기도드리오니 제발 저를 용서해주세요…… 저는 티끌만 한 죄도 없사오니 부디 제가 헤쳐나갈 길을 열어주시고…… 우리가 나아갈 제 사망의 골짜기에 빠지지 않도록 굳건히 지켜주시고…… 지혜를 간구하나이다 저에게 분별의 지혜를 내려주시고……
아…… 거기 정말 아무도 없어요?
2009: 무릎
언덕을 올라가니 2층에 교회가 있는 상가 건물이 있었다. 창문마다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다. 1층 왼편에 작은 구둣방이 있었는데 문짝 하나씩에 구두, 수선,이라고 적혀 있었다. 구둣방이 다 있구나, 하고 모퉁이를 도는데 ‘금니빨 금수저 삽니다’라는 세로글씨 팻말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금이면 노란색이 더 어울릴 텐데 눈에 잘 띄라고 검붉은 글씨로 써놓았다.
상가 뒤편 자투리땅에는 좁고 길쭉한 형태의 오층짜리 연립주택 두 동이 서 있었다. 그의 집은 오른쪽 건물인 A동 301호라고 했다. 치킨집 사장이 말해주었다. 걔가 아주 성실하고 일머리가 있었는데. 보기완 다르게 일머리가 있었어. 착하고 일도 잘하고, 참 그런 애가 없었는데. 치킨집 사장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에 대해 여전히 좋은 인상을 갖고 있는 듯했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 301호의 벨을 눌렀다. 누구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 목소리였다.
“한만우씨 댁이죠?”
잠시 뒤 그가 문을 열었다. 한눈에도 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위었고 머리숱이 빠져 늙어 보였고 무엇보다 양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고 있었다.
“누구……세요?”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알아보기를 바란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긴 머리칼을 풀어 늘어뜨렸고 결정적으로 노란 민소매 원피스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무슨 일이신지?”
나는 시선을 끌기 위해 긴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김해언!”
“김해언?”
몇초가 흐른 뒤 그가 흠칫 놀라 내 얼굴을 보았다.
“난 김해언 동생 김다언이에요.”
“김다언?”
“얘기할 게 있어서 왔어요. 들어가도 될까요?”
내가 한발 내딛는 순간 그가 기계적으로 한발 물러섰다. 물러서는 다리의 한쪽 바짓단이 헐렁해 보였다. 나는 여름용 슬리퍼를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른편으로 좁은 거실에 텔레비전이 켜져 있고 맞은편에 낡은 소파가 있었다. 소파 위에는 방석 대신 담요가 펼쳐져 있었는데 조금 전까지 그가 앉아 있었는지 가운데가 눌려 있었다. 왼편 주방 입구엔 4인용 식탁 하나와 의자 세개, 접힌 휠체어가 놓여 있었다. 집에는 그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왼편 식탁 의자를 잡아당겨 앉았다. 그가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끄고 내 맞은편으로 와 목발을 벽에 가지런히 세우고 앉았다. 그의 뒤로 싱크대 위에 붙은 작은 창문이 보였다. 문득 그가 신을 직직 끄는 버릇이 있다는 말을 형사에게서 들은 기억이 났다. 다친 다리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중인지, 다시는 신을 끌지 못하게 회복불능이 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설사 후자라 해도 이 정도의 징벌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다.
“사고당했어요?”
아니, 그건 아니라고 그가 말을 얼버무렸다.
“그럼 왜 그래요?”
“수술받아서.”
“무슨 수술이요?”
“병이 있어서 그냥.”
“절단했나요?”
그가 말없이 고개를 늘어뜨렸다. 그 얼굴이 피곤하고 슬퍼 보여 나는 내 속에서 증오감을 북돋울 만한 지독한 말을 내뱉고 싶었다.
“당신, 천벌받은 거야!”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냥 병이야. 그래서 군에서도 의병전역을 시켜준 거고.”
뜻밖에 튀어나온 의병전역이라는 낯선 말에 나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아무튼 나는, 지금 그 병이, 그냥 이대로는 안 끝날 거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숙이고 그게 뭐가 됐든 빨리 끝나주기만을 바라는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를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이거 봐요.” 나는 그를 자극하기 위해 내가 입은 노란 원피스를 가리켰다. “이 옷 기억나죠?”
그가 고개를 들어 내 옷을 보았다.
“이런 옷 그때 봤죠? 언니가 입은 거.”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도 언니가 나시에 반바지 입었다고 우길 생각이에요? 언니가 원피스 입고 있었던 거 다 알면서?”
그의 작은 눈에 놀라는 빛이 담겼다.
“반바지가 아니라고? 왜 아니라는 거지?”
나는 오래전의 형사처럼 반바지 타령을 하는 그의 오이지 같은 면상을 후려치고 싶었다.
“죽어라 반바지라고 우기면 빠져나갈 수 있을 줄 알아요? 우리 언니가 입지도 않은 반바지를 봤다고? 그러니까 당신인 거야. 그래서 당신인 거야. 당신 맞지? 당신이 우리 언니 죽였지?”
“안 믿어주겠지만,” 하고 그가 어눌하게 입을 뗐다. “나는 그날 아무것도 못 봤어. 해……”
그는 잠시 주저했다. 언니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게 두려운 것 같았다.
“타고 있는 것도 못 봤어. 앞만 보고 있었어. 언제 신호 바뀔지 몰라서. 태림이가 말해준 거야, 다.”
“거짓말! 태림이는 언니가 차에 타고 있는 건 봤지만 반바지는 못 봤다고 증언했대. 형사도 못 본 게 당연하다고 했고.”
“그 말이 맞아. 맞을 거야 형사 말이.”
“뭐라고?”
“태림이도 못 봤을 거야. 근데 그때 반바지 입었다고 얘기하긴 했어. 내 허리 붙잡으면서.”
그가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소름이 끼쳤다. 지금 이 인간이 웃고 있어.
“그때 막 신호가 바뀌어서 내가 시동 거는데, 태림이가 내 허리 붙잡으면서, 나시에 반바지 입었네, 그랬어. 분명히 기억나 그건.”
그는 또 웃었다. 나는 그가 왜 자꾸 웃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말이 안되잖아?”
“나도 이상해서 물어봤어. 반바지 입은 게 보이냐고. 그랬더니 바보야, 하면서, 무릎 세우고 벌리고 앉아 있으니까 반바지지, 그랬어.”
순간 나는 멍해졌다.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식탁과 벽 사이에 놓인 약통과 약봉지를 노려보았다. 무릎! 무릎이라고 했다. 언니가 무릎을 세우고 벌리고 앉아 있었다고. 나는 그 자세를 잘 알고 있다. 소파에 발을 올리고 무릎을 벌려 세우고 앉는 그 자세. 엄마와 내가 가장 끔찍해하는 그 자세. 그때 언니가 우리 집 소파에서처럼 그렇게 앉아 있었다면, 자동차 좌석 위에 발을 올리고 무릎을 벌려 세우고 앉아 있었다면…… 차창을 통해 그런 자세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니가 반바지를 입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태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무슨 말인가를 했지만 나는 듣지 못했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가 혼잣말을 하듯 웅얼거리고 있었다. 태림이 얘기는 죽어도 안하려고 했어. 형사 아저씨가 자꾸 정준이 차에 해…… 걔가 탄 거 진짜 봤냐고, 착각한 거 아니냐고 몇번이나 물어보니까 그래서 태림이가 해준 얘길 한 거야. 머리 풀르고 나시 입고 반바지 입었다고. 그런데도 자꾸 잘못 본 거래. 잘 생각해보라고, 잘못 봤을 거라고. 신정준이 처음엔 그 얘길 안했나봐. 해…… 태운 거. 그러다 반바지 봤냐 못 봤냐, 형사 아저씨가 날 쪼아대니까 태림이 얘길 안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한 건데 괜히 한 거지.
“그럼 무릎 얘긴 왜 안했어요?” 내가 물었다. “직접 본 게 아니고 들은 거다, 태림이도 추측으로 말한 거다, 그런 얘긴 왜 안했어요?”
“모르겠어 왜 안했는지. 태림이가 하겠지 했어.”
“태림이가 무릎 얘기도 안하고 반바지 얘기도 안한 거 몰랐어요?”
“알았어. 형사 아저씨가 얘기해줬어.”
“그런데 왜 가만있었어요?”
“태림이가 안했으니까.” 그는 또 웃었다. “그냥 이유가 있겠지 했어. 나중엔 여자들이라 그런가 했고.”
“여자들이 뭐요?”
“모르겠어 나는. 태림이도 이유가 있었을 거 아냐? 그래서 나도 안했어. 태림이도 시달렸대 많이. 형사가 자꾸 해…… 탄 거 정말 봤냐고 물어보니까. 그래서 나시 색깔이 노란색인 것까지 얘기했더니 그때부터 가만 놔두더래.”
“그때…… 태림이를 만났어요?”
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만났어.” 그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딱 한번, 태림이가 치킨집에 왔었어. 이건 그때 형사 아저씨한테도 얘기 안한 건데……”
그가 공모하듯 나와 눈을 맞추었다.
“내가 일 끝나고 나가니까 태림이가 삼십분 넘게 날 기다렸다고 했어.”
그의 얼굴이 사뭇 밝아졌다. 눈빛도 또렷해지고 주름살도 펴진 것 같았다.
“그때 태림이가 그랬어. 여자들이 무릎 얘기 그런 거 못한다고. 무릎 세우고 벌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 얘기 잘 못한다고. 그러니까 그건 끝까지 얘기 안해줬으면 좋겠다고 태림이가. 그래서 아 그렇구나 했지.”
태림이, 태림이, 태림이…… 태림에 관한 얘기를 할 때의 그는 조금도 오이지 같지 않았다. 해맑고 길쭉한 참외 같았다. 그러자 아기 참외같이 동그랗던 언니의 무릎이 생각났다. 그가 손으로 내 옷을 가리키며 물었다.
“근데 정말 치마 입었다고? 반바지가 아니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언니가 치마를 입고 그런 자세로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굳이 그에게 확인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도 더는 묻지 않았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놀란 듯이 나를 보았다.
그 집을 나와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무릎이 덜덜 떨렸다. 무릎…… 그건 내가 한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언니는 교복치마를 입었을 때는 꽤 조심하는 편이었지만 다른 때는 거의 조심하지 않았다. 의식조차 하지 않았다. 밖에 나가지 않고 주로 집안에만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언니는 그날 반바지가 아니라 집에서 입는 헐렁한 노란 민소매 원피스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속옷을 입지 않았다. 그러니까 신정준은 보았을 것이다. 무릎을 벌려 세우고 앉아 있는 언니를…… 언니의 그것까지를…… 나는 아찔해서 눈을 감았다. 소리를 지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엄마가 충동적으로 냅다 손을 들어 언니를 후려치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그후로 나는 그를 두번 더 찾아갔다. 이미 물었던 말을 묻고 또 묻고, 이미 들었던 말을 듣고 또 들었다. 나중엔 그가 한 말을 외울 지경이라 그가 머뭇거리거나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미리 일러주거나 정정해줄 정도가 되었다. 아무 말 없이 그와 마주앉아 있기도 했다. 더 알아낼 것이 없는데도 나는 자꾸 그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를 찾아내기만 하면 말끔히 해결될 줄 알았는데, 나는 여전히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했다.
내가 네번째 찾아갔을 때에도 그는 순순히 문을 열어주었다.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오빠 누구야, 하는 쨍한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동생이었다. 유일하게 그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준 사람이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그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여동생의 얼굴이 부엌 쪽에서 나타났다. 얼굴이 동그랗고 쌍꺼풀이 짙었다. 얼굴이 길고 눈이 작은 그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 우리 자매처럼 서로 전혀 닮지 않았다. 여동생은 오빠에게 내가 누군지 묻는 눈빛을 보내다 곧바로 눈치를 챘다.
“왜 또 왔어요?”
나는 머뭇거렸다.
“왜 또 왔냐니까?”
“구두 고치러 왔다가……”
“구두를 고쳐? 구두를 왜?”
여동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 구둣방이 있어서……”
“아, 구둣방…… 근데 우리 집엔 왜 왔냐고요?”
“싸우러 온 거 아니에요. 그냥 얘기 좀더 하고 싶어서 왔어요.”
내가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여동생이 내 앞에 버티고 섰다. 키가 아주 작았다. 키가 작은 내가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무슨 얘기요? 오빠는 할 얘기 다 했다는데요.”
“그 얘기 말고 다른 얘기요.”
“웃기시네. 다들 그랬어요. 엄마랑 나한테 와가지고 딴 얘기 하는 척하면서 우리가 무슨 얘기 하면 하나하나 의심하고 나중에 따지고 들고. 말도 안되게.”
“난 경찰이 아니에요.”
“경찰처럼 조사하러 온 거잖아요? 뭔가 찾아내서 엮으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나는 한숨을 쉬고 참외 봉지를 내밀었다.
“과일 좀 사왔어요.”
“우리 이딴 거 필요없거든요.”
“너무 힘들어서 그러는데 좀 앉아도 될까요?”
여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몸을 조금 비켜주었다. 나는 왼편 부엌 쪽 식탁 위에 참외 봉지를 올려놓고 의자를 잡아당겨 앉았다. 처음 이 집에 온 날부터 나는 줄곧 이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 부엌 싱크대 위에 달린 작은 창문이 보였다. 왈그닥달그닥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그릇을 닦는 여동생의 머리가 창틀 아래에 닿을락 말락 했다.
나는 아주 잠깐 졸았던 것 같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고, 착란에서 깨어날 때 느껴지는, 겉은 차고 속은 뜨거운, 싸늘한 열기가 온몸에 퍼졌다. 퍼뜩 깨어보니 여동생이 내 앞에 서 있고,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왼편 팔걸이에 목발을 나란히 기대놓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를 먹었냐고요?”
여동생이 물었다.
“왜요?”
나는 나도 모르게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살이 찌지 않기 위해 매일 점심을 걸렀는데 그날은 참지 못하고 오뎅을 하나 사먹었다. 국물도 두컵이나 마셨다. 뭔가를 먹은 날은 오후 내내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뭘 그렇게 놀라요? 사람 미안하게.”
“아, 안 먹었는데, 조금밖에.”
“우리는 지금 막요, 계란 부쳐 먹으려던 참인데.”
“계란말이요?”
“아니, 계란 후라이요.” 여동생이 거실 쪽을 향해, 오빠 두개 먹을 거지, 하자 응,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하나는 반숙에 소금 뿌리고요, 하나는 완숙에 케첩 뿌려요. 우리는 맨날 그렇게 먹어요.”
나는 침을 삼켰다.
“나도 먹어도 돼요?”
“진짜요? 몇개요?”
“나도 두개 먹을래요.”
여동생이 씩 웃더니 몸을 돌려 가스레인지 위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불을 켰다. 몸을 돌려 냉장고 손잡이를 잡으며 물었다.
“그럼 먹는 것도 우리랑 똑같이 먹을 거예요?”
“네, 똑같이요.”
“오케이, 그럼 셋 다 똑같이!”
여동생이 힘을 주어 냉장고 문을 열고 작은 손에 계란을 두개씩 쥐어 세번에 꺼냈다. 애틋한 연갈색 타원형 계란 여섯개가 막 구를 자세로 식탁에 누웠다. 여동생은 그 옆에 케첩도 꺼내놓았는데, 통에 담긴 게 아니라 패스트푸드점에서 주는 납작한 비닐에 든 일회용이었다. 그것도 세개였다. 그러니까 셋이 하나씩 뜯어 똑같이 뿌려 먹으면 될 것이었다.
여동생이 작은 찻상에 찻잔 셋을 얹어 가져왔다. 여동생은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더니 내게도 가까이 와 앉으라는 눈짓을 했다. 내가 다가앉자 그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찻상에서 찻잔과 찻잔접시를 내려놓았다.
“오빠, 난 진짜 그 언니 장난 아니었다고 들었거든.”
“으응, 그, 그랬지.”
“오빠는 어땠어?”
“나는 뭐……”
그가 조금 웃었다. 내가 오기 전에 그들끼리 하던 얘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접시에 받쳐 내온 찻잔 세트를 내려다보며 그들과 함께 먹은 계란프라이의 맛을 만족스럽게 음미하고 있었다. 처음에 여동생이 숟가락으로 계란을 탁 깰 때 나는 움찔했다. 귀를 막을까도 생각했고 잠시 욕실로 피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두번째 세번째 계란이 탁 탁 깨졌다. 나는 여섯번째까지 견뎌낸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정말 오랜만에 먹는 계란프라이였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보는 구닥다리 찻잔이었다. 한 세트라는 걸 증명하듯 양각으로 도드라진 찻잔의 붉은 꽃무늬가 접시의 가장자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찻잔 둘레와 접시 안쪽은 금빛은빛 실선으로 테두리 지어져 있었다. 엄지와 검지로 사뿐히 잡지 않으면 안되는 호리호리한 손잡이는 초식동물의 새끼처럼 나를 향해 섬세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이 집은 모든 게 이런 식이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낡고 가난하고…… 정말 오랜만인 것들로 가득했다.
“근데 동생인 이 언니도 되게 이쁘다, 그지?”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찻잔 손잡이를 놓칠 뻔했다. 그러니까 앞의 얘기는 언니 얘기였고 지금 얘기는 내 얘기였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찻잔 손잡이를 검지로 문질렀다. 진짜 장난 아니었지, 우리 언니는. 그런데 여동생은 나더러도 되게 이쁘다고 했다.
여동생이 참외를 가져와 깎았고 한만우가 텔레비전을 켰다. 참외가 말간 속살을 드러냈다. 텔레비전을 보는 그의 얼굴이 왠지 자신감에 가득 찬 듯, 어딘가 뻐기는 듯 보였다. 그건 자기 곁에 여동생이 있어서이기도 한 것 같았고, 여동생은 모르는 우리 언니의 미모를 자기는 알고 있어서이기도 한 것 같았다. 둘 중 무엇이어도 상관없었다. 여동생이 참외 접시를 그와 나 사이에 놓으며 말했다.
“먹어요, 오빠! 언니도!”
한만우는 약을 먹고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여동생이 텔레비전을 끄고 내게 자기 방으로 가자는 눈짓을 했다. 그녀의 방은 정말 작았다. 그녀가 거실에 있던 찻상을 옮겨왔다. 참외 접시는 그대로였고 찻잔 세트 대신 유리컵이 두개 놓여 있었다. 그녀가 병맥주와 오프너를 가지고 돌아와 방문을 닫았다. 큰 상자 속에 둘이 숨어든 느낌이었다.
“시원하게 맥주 한잔해요, 우리.”
맥주는 정말 시원했다. 우리는 참외를 아작아작 씹어먹으며 맥주를 마셨다.
“언니!” 여동생이 쌍꺼풀진 큰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언니가 없어가지고요, 언니 하고 부르는 게 이상한데도 좋아요.”
그녀는 나보다 세살 아래였고 이름은 선우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형마트에서 판매직으로 일하는데 지난 사년 동안 다섯번이나 자리를 옮겼다고 했다.
“이쪽 일은 이상하게 자꾸자꾸만 사정이 생겨요. 우리 입장에서는 진짜 안 좋은 거거든요. 교육도 새로 받아야 되고, 붕 떠 있는 동안 돈도 못 받고, 노는 날도 맨날 바뀌고. 근데 언니, 내가 말이죠, 이 얘기는 꼭 해야겠어요.”
나는 그 얘기구나 짐작했다.
“그때 그날 말이에요, 밤에 내가 자고 있긴 했는데요, 오빠가 열한시반쯤 들어온 거 진짜 맞거든요. 꽈배기 사가지고요.”
“꽈배기요?”
나는 또 침을 꼴깍 삼켰다. 신기하게도 이 집에 들어온 뒤로는 자꾸만 배가 고팠다.
“그 동네에 살 때요, 시장 모퉁이에 꽈배기 파는 집이 있었는데요, 오빠가 거기서 꼭 꽈배기를 사왔거든요. 내가 좋아하니까 먹으라고 여기 이 상에 딱 이렇게 놔두거든요. 내가 밤중에 일어나서 먹기도 하고요, 아침에 일어나서 먹기도 하고요. 내가 꽈배기를 디따 좋아하는데 그 집 꽈배기 진짜 맛있었거든요. 근데 거기가 열한시반이 넘으면 문을 닫아요. 그래서 오빠가 그거 사려고 꼭 열한시에 치킨집에서 나와요. 사장 아저씨도 그거 알아서 오빠가 일하고 있어도 빨리 꽈배기 사러 가야지 그러고 그랬거든요. 그때 그다음 날 아침에 꽈배기가 여기 이렇게 딱 있었거든요.”
나는 한손에 동생에게 줄 꽈배기 봉지를 들고 한손에 언니를 죽일 벽돌을 든 한만우를 상상해보았다. 그럴 수가 있을까 과연.
“근데 형사 아저씨는 그 말 안 믿었어요. 그런 건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대요. 살인마들이 살인도 하는데 그러면서요, 나보러 순진하다고요. 그런 거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미리 사다놓고 그럴 수 있대요. 나는 거기 이용당한 거래요.”
살인마라면 그럴 수 있나.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막 튀긴 설탕꽈배기가 든 봉지를 들고 누군가의 머리를 벽돌 같은 걸로 내려치는, 그런 일이 가능할까.
“나는요, 이해가 안 가는 게요, 무슨 계획을요, 사년 전부터 꽈배기 사오는 걸로 할 수가 있어요? 그럼 오빠가 중학교 이학년 때부터 살인마였다는 건데, 그건 말이 안되잖아요 진짜.”
선우가 맥주를 더 가져왔다. 내가 그의 다리에 대해 묻자 선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오빠가요, 무릎암으로 수술받았거든요.”
무릎암? 처음 듣는 암이었다.
“처음 듣죠? 그래서 왼쪽 무릎을 절단했는데요, 다행히 딴 데로는 전이가 안됐대요. 그러니까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뼈에도 다 암이 생긴대요. 내가 오빠 땜에 무지 공부했는데요, 뼈에 생기는 암을요, 육종이라고도 하고 골육종이라고도 한대요. 이게 주로 젊은 사람들한테 잘 생긴대요. 십대 이십대 그럴 때요. 그래서 아파도 잘 모른대요. 근육통 같은 걸로 헷갈려가지고요. 오빠도 군대 가가지고 갑자기 아파서요, 그렇게 아프다고 얘기했는데도요, 엄살 피운다고요, 그래서 혼자 디따 참았나봐요. 그러다 나중에 쓰러져서 군대 병원에 실려갔는데요, 검사해보더니만 집에 가라고, 집에 가서 큰 병원 가보라고, 그렇게 내보내준 거거든요. 그게 진짜 더럽고 치사한 게요, 내보내줄라면 일찍 내보내주던가 아니면 다 치료해가지고 내보내주던가 그래야 되는데요, 자기들한테 무슨 문제 생길까봐 쉬쉬하면서 뒤늦게 그런 거거든요. 제때 잘만 치료받았으면요, 다리 안 잘라도 됐을 거라고 의사쌤이 그랬어요. 근데 그딴 건 싸워도 안된대요. 군대는 못 이긴대요. 병원도 못 이기고요. 근데 이게 군대 병원 두개 다잖아요. 그래서 수술비만 받고 땡 쳤어요. 근데 언니 술 되게 잘 먹네요.”
선우가 또 맥주를 가져왔다.
“육종에도 종류가 있는데요, 오빠가 걸린 건 유잉육종이래요. 유잉은 사람 이름인데요, 처음 이 육종을 발견한 의사 이름이 제임스 유잉이래요. 제임스 유잉. 거기서 따가지고요, 유잉육종이라고 부르는 거래요.”
“유잉육종?”
“네, 유잉육종이요.”
나는 노래하듯 그 이름을 굴려보았다. 유잉육종…… 유잉육종…… 뭔가 예쁘장한 육종일 것 같았다. 뼈에 붙은 버섯처럼 귀여운 육종일 것 같았다.
그는 유잉육종에 걸렸다네 유잉유잉
왼쪽 무릎을 잘랐다네 유잉유잉
다시는 신을 끌 수 없다네 유잉유잉.
내가 그의 신 끄는 버릇에 대해 묻자 선우가 히죽 웃었다.
“어떻게 알아요? 신발이 작아서 그랬죠.”
신발이 작으면 끄나?
“어려서부터요, 신발이 작아지는데 안 사주니까요, 꺾어 신고 다녀서, 그래서 질질 끌게 된 거죠. 걸음 자체가.”
그래서 음, 걸음 자체가…… 신 끄는 걸음 자체는 이제 과거형이 되었다. 그는 직직이든 질질이든 다시는 신을 끌 수 없게 되었다.
“오빠는요 말을 잘 못하잖아요. 그니까요 그딴 식으로 오래……”
오빠는요, 말을 잘 못하잖아요. 그니까요 그딴 식으로 오래…… 취하니까 슬퍼지는구나. 오빠는요 나랑 아빠가 틀려요…… 여동생의 목소리가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아빠가 틀린데도 똑같은 거는요,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우리 아빠들은요, 둘 다 조용히 사라졌대요. 엄마는 그게 다 착해서 그런 거래요. 집에 돈을 못 갖다주니까 너무너무 미안해가지고 조용히 사라진 거래요. 도망갔다고 안하고 사라졌다고요, 우리 엄마는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새소리나 물소리처럼, 들리긴 하지만 들리지 않는 듯한 소리. 산들바람처럼 귓가를 스쳐가는 소리. 가슴이 저미도록 아름다운 소리. 귀 기울일수록 멀어지는 소리. 난요 오빠가 걱정돼 죽겠어요. 다리 아픈 거 그거는 진짜 아무것도 아니고요, 난요 오빠가 사라질까봐 겁이 나 죽겠어요. 집에 돈 못 갖다주니까 너무너무 미안해가지고 조용히 사라질까봐. 옛날에도 그딴 생각 했거든요. 오빠가 죽어라 돈 버는 게, 아빠들처럼 안되려고 그러는 거 아닌가, 안 사라질라고 그러는 거 아닌가, 그딴 생각요. 우리 오빠 어떡하나요 언니……
휴대폰 문자를 확인한 선우가, 엄마 온대, 하고 말한 순간 한만우의 표정이 변했다. 그가 취기에 몽롱해진 나를 휙 돌아보았다.
“가! 빨리!”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선우가 내 앞을 막아섰다.
“왜 가래?”
“엄마 온다며? 엄마 또 아프다고, 이런 사람들 찾아온 거 알면. 빨리 가!”
“그거는, 그거는, 그런 사람들 아니라고 하면 되잖아? 내가 아는 언니라고 하면 되잖아? 왜 이 언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꾸 가라고 그래?”
선우가 울먹이는 소리로 외쳤다. 순간 나도 공연히 서러워졌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더는 참고 싶지 않았다. 울어야겠다 작정도 하기 전에 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고 울상인 선우와 울고 있는 나를 번갈아 보았다.
“왜들…… 그래? 나도 몰라 이제.”
선우가 돌아서서 나를 안았다.
“언니, 안 가도 돼요. 울지 마요. 오빠 나빴어 아주.”
나는 어린애처럼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눈화장이 마구 번질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쓱쓱 문질렀다. 장애인 고용에 관한 법률에 대해 알아보자. 장애인 특별고용 업체에 대해 알아보자. 취한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하루종일 텔레비전만 보다 조용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려면 그가 집에 갖다줄 돈을 벌게 해주어야 한다.
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식당 주방에서 일한다는 그들 남매의 엄마는 난쟁이였다. 선우를 좀더 가혹하게 눌러놓은 것처럼 작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어디를 찾아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분명해졌다.
2014: 신
안녕하세요, 박사님?
박사님께 꼭 상담을 받고 싶어서 예약하고 많이 기다렸어요. 요즘 박사님께서 신문에 연재하시는 칼럼도 챙겨보고 있어요. 박사님 저서 중에 『애도, 아름다운 이별』 그 책 정말 감명 깊게 읽었어요. 그뒤로 박사님 팬이 되었죠. 팬이라니까 좀 경박한가요? 이런 표현 싫어하시나요? 너그럽게 이해해주시니 감사해요.
그럼 얘기를 시작할까요? 저는 삼년 전에 정말 힘든 일을 겪었는데…… 아, 박사님도 알고 계시나요? 미리 알고 계셨군요. 신문에도 나고 그랬으니까…… 아, 얘기를 들으셨다고요? 하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죠. 저는 그때 그 일을…… 그 일을 겪고……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 힘들었어요. 어떻게 힘들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런 일을 겪고 저는……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잠시만 이대로 놔두시면 돼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정말 좋아졌어요.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잠깐만요……
다시 얘기를 시작할까요? 저는 정말 좋아졌어요. 요즘엔 아침마다 시를 쓰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있어요. 제가 시 쓰는 건 모르셨나요? 정식으로 등단까지 했는걸요. 모르셨구나. 박사님이 다니시는 교회 주보에도 제가 쓴 시가 두번이나 실렸어요. 어떻게 알긴요. 박사님처럼 유명하신 분이 다니시는 교횐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요즘은 자주 안 나가시나요? 바쁘시면 그러실 수도 있죠. 그래도 조금만 신경쓰셔서 이번 주일엔 꼭 나가시길 바라요.
그러니까 저는 그 일 이후로…… 그 일 이후로…… 아, 내가 왜 이러지? 네, 저는 주님의 은혜를 받아 시를 쓰게 됐어요. 그게 처음에는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제가 아이를 낳고 심한 우울증에 빠졌답니다. 산후 우울증이었죠. 예민한 산모들 중에 그렇게 우울증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어요. 아이…… 아이요? 내 아기…… 예빈이…… 신예빈. 예빈이는 천사였죠. 정말 예쁜 아기였어요. 다들 예빈이처럼 예쁜 아이는 본 적이 없다고 그랬으니까요. 오죽하면 시부모님도 그러셨겠어요. 우리 아들 며느리도 어디 내놔도 안 빠지는 인물인데 예빈이는 청출어람이라고요.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예뻤어요. 그애…… 그애도…… 예뻤죠…… 그애도 아기 때…… 그렇게…… 예뻤겠죠……
그애요? 아, 제가 잠깐 정신이 혼란스러워졌네요. 그애…… 예빈이…… 예빈이 말이에요, 남편은 그애한테 완전히 빠졌어요. 제가 임신했다는 얘기를 했을 때도 별로 크게…… 기뻐하긴 했지만 보통 남자들 정도로, 그 정도였지, 정말 나중에 그렇게 광적으로 변할 줄은 몰랐어요. 예빈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백팔십도 변했죠. 어느 정도였냐 하면…… 아, 갑자기 그날, 그날 일이 생각나네요. 그이가 예빈이를 안고 재우던 날이요. 애가 여간 까탈스럽지 않았거든요. 안아주지 않으면 잠을 안 자고, 안고서도 아주 오래 흔들어줘야 겨우 잠이 드는 애였죠. 근데 그이가 그렇게 오래 흔들어 재우더라고요. 참을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아, 그이가 성질이 좀 급한 편이거든요. 그래서…… 예빈이를 재우더니, 아기 침대에 눕히려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그대로 멈추고 한참 동안, 아주 한참 동안 잠든 예빈이를 들여다보더라고요. 그이는 내가 보고 있는 걸 몰랐을 거예요. 몰랐으니까 그랬겠죠. 예빈이 이마에 입술을 갖다대더니 또 한참 동안 그러고 있더라고요. 그러다가, 그러다가…… 글쎄 울더라고요. 소리도 안 내고 울고 있더라고요. 대체 무엇 때문에 울고 있었을까요? 나는 그이가 우는 걸 처음 봤어요. 거기 어디에 울 일이 있나요? 그걸 보고 저는…… 끔찍했어요. 너무 끔찍했죠. 왜냐고요? 저는 그냥 끔찍해서…… 죽고 싶다 그런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왜냐고요? 몰라요. 그냥 죽고 싶었어요. 우울증이었으니까요. 죽도록 우울했으니까요. 벽에 머리를 쾅쾅 부딪쳐서 죽고 싶었다고요.
네, 심했죠. 심했어요, 박사님. 그렇게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으니까, 저를 도와주시고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려고 많은 분들이 심방해주셨어요. 그분들 중에 나이 드신 여류시인이 한분 계셨는데요, 제게 시로 마음을 치유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해주셨어요. 그분이 쓴 시집도 선물해주셨고요. 사실 처음에는 그분의 관심이 달갑지 않았어요. 그분이 웃을 때 보이는 푸르스름한 앞니 의치가 너무 거슬려서 밤이면 거기에 물어뜯기는 악몽에 시달린 적도 있으니까요. 정말 이제 그만 와주십사 하고 몇번이나 돌려서 말씀드려도 그분은 포기를 모르시더라고요. 심지어 다른 시인들까지 데리고 오셔서 번갈아 시 낭독을 해댈 정도였으니까요. 그땐 정말 치가 떨렸어요. 안 그래도 우울해 죽을 판인데 자꾸 내 안에서 시를 끄집어내라느니, 시를 쓰면 당신이 만드는 잡지에 실어주겠다느니, 자꾸 그렇게 괴롭히고 귀찮게 하고…… 그러니까 이건 뭐 내가 봉인가, 망조가 든 자기네 잡지를 살리려고 날 이용하나, 그런 의심도 들고 짜증도 나고, 또 그분이 쓴 시도 진짜 별로였어요. 그렇게 오래 쓰셨다면서 어쩜 그렇게…… 저는 계속 그분을 피했죠……
아, 그건 그렇고…… 네, 맞아요. 그러던 중에 그 일이 일어난 거예요. 그 멍청한 베이비시터, 어떻게 유모차에 애가 없어진 것도 모르고 끄덕끄덕 밀고 올 수가 있었을까…… 내가 정말 소리 안 나는 총이라도 있었으면…… 경찰들은 또 어떻고요? 수사는 제대로 하지도 않고, 원한이 어떻고 금전문제가 어떻고, 우리가 무슨 엄청난 비밀이라도 감춰놓은 것처럼 파헤치려고 하고, 우리 집안을 뭘로 보고 그런 얼토당토않은 질문들만 늘어놓고, 아, 지겹게 무능한 경찰들…… 그 얘기는 하지 않을래요. 다시 열이 오르는군요. 그 생각만 하면 이렇게 훅 열기가 끼쳐 올라온답니다. 모닥불에 얼굴을 들이댄 것처럼요. 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지 않았나요? 괜찮나요? 잠깐 화장실에 다녀와도 될까요 박사님? 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제가 화장실에서 문득 궁금한 게 생각났는데요, 냉혈한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박사님? 네, 냉혈한! 피가 차가운 사람, 감정이 메마른 사람, 감정이 없는 사람. 맞나요? 그런데 그런 사람은 원래부터 그렇게 태어나는 건가요, 아니면 자라면서 그렇게 되어가는 건가요? 두가지 다일 수 있다고요?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요? 아,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살다보면 주위에서 가끔 그런 사람을 보게 되는 것 같아서요. 네? 제 주변 가까이에서요? 아니에요. 제 주변 가까이에서는 아니고, 그냥 주위에 보면, 뭐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다보면 그런 오싹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 시인분이요? 아니에요, 세상에, 그분이 냉혈한이라니. 그분은 감정이 너무 흘러넘쳐서 탈이세요. 더구나 여자분이신데요. 아, 물론 여자가 냉혈한이지 말란 법은 없지만요. 남자들 중에 본 적이 있냐고요? 아니 꼭 남자라기보다, 아, 이런 얘기는 그만하고 싶어요. 자꾸 짜증이 나네요. 이런 얘기, 저한테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요. 편하게요? 뭘요? 냉혈한에 대해서 편하게 얘기해보라고요? 긴장하지 말고…… 침착하게…… 멀리 떨어뜨려놓고…… 그 특징 같은 걸……
네, 좋아요, 그럼 편하게 얘기해볼게요. 그 특징이라면…… 그 인간들은 우선 제 말을, 그러니까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있지 않는다는 느낌? 듣기는 듣는데 벽처럼 딱 막혀서 말이 그대로 튕겨나오는 느낌? 네, 그런 느낌 아시죠? 그리고 또…… 갑자기 생각하려니까 그런데, 아, 맞다, 자기 잘못을 절대 인정 안하는 거, 자기가 잘못해놓고 절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거. 누가 봐도 명명백백하게 지가 잘못한 건데 나는 잘못한 거 없다, 내 잘못 아니다, 우기고, 더 기가 막힌 건 니 잘못이다, 이러면서 저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요. 그럼 정말 미치고 팔짝 뛰죠. 이 인간이 아주 미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억지를 부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거기다 정말 소름끼치는 건, 여자를 아주 지 장난감 취급하는 거. 인형처럼 지 멋대로 움직이려고 아주, 시키는 대로 안하면 더럽게 못돼 처먹은 표정을 짓고 아주,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어요. 지는 감정이 없으니까 아무렇지도 않고 멀쩡하고, 나만 미쳐가게 만드는 거거든, 이게. 데리고 놀아도 꼭 어린 여자애들만, 열아홉 스물 그런 애들, 그애 또래인 애들하고만……
박사님, 왜 그렇게 보세요? 네? 아…… 누구 얘기냐고요? 누구 얘기는요…… 그냥 아무 얘기도 아니에요. 저는 냉혈한에 대한 느낌을 편하게 말씀드린 건데요. 일반적으로 그런 인간들…… 네, 물론이죠. 일반적인 얘기예요. 무슨, 절대 아니에요. 제 개인적으로 경험한 얘기가 아니고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느낌을 얘기한 거예요. 상상도 섞어가면서요. 아무래도 제가 시를 쓰다보니까 남들보다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죠.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직관 같은 것도 있는 편이고요.
네? 남편이요? 제 남편이요? 저는 정말 그이가 걱정돼요. 그이는 그애한테는, 예빈이한테만은 지극정성이었어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처음 알았죠. 아기를 별로 간절히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데 예빈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람이 그럴 수도 있을까 싶게 변하더니…… 아, 이 얘기는 이미 말씀드렸나요? 내 아기…… 돌도 안 지난 예빈이…… 이제 벌써 세살…… 아니 네살인가…… 사놓은 옷이랑 신발이랑…… 예빈이의 아기방은 아직도 그대로 있어요. 그이가 못 치우게 하니까요. 그이는 한동안 그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도 않았어요. 저는 정말 걱정이 돼요. 보니까 이 사람이 이제 일도 제대로 안하는 것 같아요. 정말 자기 일 하나에는 빈틈이 없던 사람이었거든요. 보란 듯이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몇년째 이런 식으로 손을 놓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고 있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자기 삶을 망가뜨리며 살 작정인지 걱정스럽다 못해 한심스러워요. 남편이 완전히 망가진다면, 폐인이 되고 만다면…… 아, 그럼요, 걱정이 되죠. 제가 왜 걱정이 안되겠어요? 남편을 이해하냐고요? 그럼요, 이해하죠. 왜 그런 걸 물으시죠? 제가 아니면 누가 그이를 이해하겠어요? 저는 그이를 완벽하게 이해합니다. 저는 시를 통해서라도 자기치유를 해나가는데 남편은 그럴 의지도 없어요. 요즘엔 교회에도 아예 나가지 않고 있어요. 박사님도 이번 주일엔 꼭 교회에 나가세요. 약속해주세요, 네? 약속, 안해주시는군요.
저는 그런…… 남편 같은 인간들,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 그들을 정말 가엾게 여겨요. 저는 구원받았으니까요. 시를 쓰고 시를 낭독하면서 저는 주님을 만나뵙고 평온과 충일함을 느낀답니다. 주님께서 그분, 앞니가 의치이신 그 여류시인분 말이에요, 그분을 통해 저를 구원하려고 최선을 다하셨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지요. 예빈이…… 그 일이 있어났을 때만 해도 제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아요. 그 일을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으니까요. 제게 일어난 모든 일 하나하나에 주님이 역사하고 계시다는 걸 이제는 알아요. 제게 시는 주님의 말씀이요, 주님의 말씀은 곧 시예요. 요즘 뵙는 분들마다 주보나 목회지에 시 하나만 써달라고 하도 청탁들을 하셔서 거절도 못하고 제가 아주 힘들어요. 그렇지만 제 시가 주님의 큰 사랑을 찬양하는 데 티끌만 한 힘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런 마음으로 항상 시를 쓰려고, 주님께 응답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문제는 남편이에요. 박사님께서 그이를 상담해주시면 좋겠지만, 그이는 절대 이런 데 오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그이는 앞으로 더 엉망이 될 거예요. 제겐 그런 확신이 있어요. 언젠가, 그때가 밤이었는데, 혼자 기도드리고 있을 때 주님께서 제게 글자로 쓰신 듯이 똑똑히 알려주셨거든요. 그이의 영혼이 사망의 골짜기에 이를 것이라는 걸요. 그날 밤 제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쓴 시를 암송해드리죠.
아이를 잃었음에 슬퍼하지 말라.
남편을 잃게 될 것에 두려워하지 말라.
모든 것을 잃더라도 분노하지 말라.
네 속에 내가 있으니
네 영성을 믿고 견디라.
그리하면 천국에 머물리라.
시시각각 영원히. 아멘.
박사님도 구원받으세요. 제가 매일 박사님을 위해 기도할게요.
2015: 육종
심포지엄이 끝난 뒤의 저녁식사 자리는 근처 삼겹살집이었다. 참가자들은 식탁을 길게 이어붙여놓은 자리에 차례차례 들어가 앉았다. 나는 중간쯤에 벽을 등지고 앉게 되었다. 종업원이 반찬과 그릇 들을 날라오자 다들 수저와 그릇과 잔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남자 대학원생이 달궈진 돌판에 삼겹살을 얹는 걸 지켜보았다.
맞은편 벽걸이 텔레비전에서 저녁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기를 찍어먹을 야채 소스를 버무리는 중에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뚫고 아나운서의 말 한마디가 내 머릿속에 와 박혔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화면 위에 타원형의 빙상을 빠르게 질주하는 선수의 모습이 비쳤다. 아나운서는 다소 비장한 목소리로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가 어깨의 악성 골육종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팔꿈치 부상을 치료하려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이 암은 육종 또는 골육종이라고 하는데……
육종. 낯설지만 언젠가 한번 들어본 적이 있는 병명이었다. 육종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주위가 조용해진 것 같아 둘러보니 모두들 나를 보고 있었다. 대각선 방향에 앉은 지도교수가 내게 뭔가를 물은 것 같았다. 내가 옆자리 강사를 보자 그가, 술이요, 뭐 마실 거냐고요, 했다. 다들 술잔을 채우는 시간이었다. 나는 소주잔을 들어 지도교수 쪽으로 팔을 뻗었다. 잔을 채운 후 건배를 했다. 지도교수를 보자 박사논문 중간심사가 머지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 순간 뱀처럼 이물스런 기억이 스윽 배를 밀고 들어왔다. 국립도서관. 다언.
작년 11월 중순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국립도서관 1층 가방보관함 앞에서 다언을 만났다. 다언이 먼저 나를 알아보고 상희언니, 하고 불렀다. 다언이 먼저 알아보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대학 도서관 계단에서 우연히 만난 후 9년반 만이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는 해도 다언은 또 한번 나를 깜짝 놀라게 할 만큼 변해 있었다. 짧은 파마머리에 안경을 꼈고 예전보다 훨씬 살이 올라 있었다. 가짓빛 파카에 검은 면바지 차림이었는데, 큼직한 파카는 진짜 가지라도 꾸려넣은 듯 울룩불룩했다. 운동화를 신어 키가 더 작아진 것처럼 여겨졌다. 언뜻 보기에 나보다 서너살은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화장도 하지 않은 피부가 뽀얗고 발그레했다. 아마 예전에 도서관 앞에서 우연히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나는 다언을 쉽게 알아보았을지 모른다. 산골소녀 같던 다언이 산골여인처럼 변했으니, 그사이에 쐐기처럼 박힌 노란 원피스의 기이한 이미지만 없었다면 나는 그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그때 다언이 왜 내게 육종이란 말을 했을까. 맥락을 짚어보려 했지만 오리무중이었다. 병에 대한 얘기를 나눈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도 육종이라고 말하던 다언의 엄숙한 표정과 목소리가 생생하게 기억났다. 누가 육종에 걸렸다는 얘기였을까. 다들 술이 오르면서 식당 안은 점점 시끄러워졌다. 볼륨을 제법 크게 해놓은 텔레비전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시끄럽다며 휴대전화 앱을 이용해 채널을 꺼버렸지만 시끄러운 건 여전했고 나는 더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뒤풀이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야 나는 다언과 만난 일에 대해 대부분의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날 나는 국립도서관에서 논문에 필요한 자료를 찾아 복사를 해야 했다. 가방보관함에 가방을 넣고 출입구로 들어가려다 나는 지갑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가방보관함으로 돌아가 가방을 뒤져보았지만 지갑은 가방 속에도 없었다. 내가 당황해서 코트 주머니를 뒤지고 있을 때 누군가 상희언니, 하고 불렀다.
뭐 잃어버렸어요?
다언은 우리가 계속 만나온 사이인 듯 물었다. 나는 지갑을 놓고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잃어버린 거 아니면 됐어요, 하더니 그녀는 내가 돈이 필요한 줄 알고 자기 지갑을 꺼냈다. 그게 아니라, 하고 나는 지갑 속에 도서관 이용증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럼 1일 이용증을 만들라고, 곧바로 만들 수 있다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거듭 그게 아니라, 1일 이용증을 만들려면 신분증이 필요한데 신분증도 지갑 속에 들어 있다고 했다.
아, 그렇구나, 하더니 다언이 웃었다. 웃음소리가 크고 맑아 나는 다시 놀라고 말았다.
들어가서 뭐 할 건데요? 내가 도와줄 거 없어요?
실은 내가 자료를 좀 복사할 게 있는데.
내가 해줄까요?
그게, 자료 찾기가 좀 복잡해서.
그럼 언니가 내 이용증을 갖고 들어가서 복사할래요?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다. 도서관을 출입할 때 바코드 인식기에 이용증을 찍기만 하면 달리 본인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내게는 매혹적인 제안이었지만 다언에게는 미안했다. 다언이 미안해할 것 없다며 자신의 도서관 이용증을 건네주었다.
그럼 내가 금방 하고 나올 테니까 어디 편한 데서 기다리고 있을래?
1층 휴게실에 있을게요. 천천히 하고 오세요.
그리하여 나는 다언의 이용증을 가지고 도서관에 들어갔다.
내가 복사물을 안고 돌아왔을 때 다언은 휴게실 창가에 서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언뜻 귀에 익은 이름이 들려왔다. 그것을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나는 다언이 기쁨에 넘치는 목소리로 혜은이는요, 엄마? 하고 묻는 것을 들었다. 그건 해언이는요,라고 묻는 것처럼도 들렸다. 혜은, 해언, 비슷한 이름이었다. 아, 정말, 하면서 다언이 크게 웃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다언에게서 물러섰다. 엿들을 의도는 없었지만 내가 그 이름을 들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눈치채면 안될 것 같았다. 막연하지만 선명한 두려움이 일었다. 다언이 통화를 마치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적절한 거리에서 그녀를 향해 다가갈 수 있었다.
다 했어요, 언니?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잘했다고 말하고 나는 이용증을 돌려주었다.
여기 오래 앉아 있다보니까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다언의 말에 주변을 돌아본 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 드뭇하게 놓인 소파에 앉아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자노인들이었다. 휴게실 안은 약간 숨이 가쁜 듯 갈갈거리는 목소리로 주고받는 대화와 석회냄새 비슷한 텁텁한 냄새, 은은한 남성용 화장품 냄새와 일회용 믹스커피 향으로 가득했다. 노인들은 대체로 점잖고 무기력한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다언은 그들에 대해 몇가지 일화를 얘기해주었는데, 이를테면 아주 점잖게 차려 입은 노인이 식당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반찬이 더 담긴 식판을 쟁취하려고 비틀거리는 척하면서 앞줄의 젊은이를 슬쩍 밀치고 새치기를 하는 주도면밀함이라든가, 노인들 사이에 종종 발생하는 논쟁에서 각자 내세우는 어이없는 궤변들이라든가, 요령부득으로 질질 끌던 논쟁을 어느 한순간 허무할 만큼 신속하게 봉합해버리는 뜬금없는 애국적 결론들 같은 것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는 왠지 그런 얘기들이 불편했다.
여기 자주 오나봐, 하고 내가 말을 돌렸다.
자주 오는 편이죠.
뭐, 공부하고 있니?
공부는 아니고…… 뭘 좀 쓰고 있어요.
뭐? 시 써?
다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언니. 시는 아니에요. 시는 도저히 쓸 수 없어요.
그럼, 하고 묻는 내 눈빛에 다언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참회록 같은 거랄까요, 했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더 묻기도 전에 다시 노인들 얘기로 돌아갔다. 그들의 꼬장꼬장함, 선병질, 사소한 것에 대한 집착에 대하여, 기계에 내장된 장치처럼 자동적으로 흘러나오는 어휘와, 조류들의 군무처럼 일사불란한 행위 들에 대하여. 다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이곳은 도서관이 아니라 박물관 같아요,라고 말했다. 집요한 시대정신의 단순성과 야만성을 생생히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란 말은 내게 박제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고 그러자 자연스럽게 염을 한 아버지의 시신이 떠올랐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우리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저런 노인들 중 하나가 됐을 거야.
언니 아버지 돌아가셨어요?
다언이 놀라 물었다.
작년 봄에 간암으로,라고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잠시 뒤에 나는 아버지의 삶을 관통한 군인정신에 대해 얘기했고, 그 편협함과 단순성이 나를 얼마나 숨막히게 했던가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그런 이유로 내가 아버지를 미워한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고, 그렇다고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 적도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고 나는 말했다.
그게 아직도 나를 혼란스럽게 해.
이 말을 하고 나자 정말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다언이 도서관의 노인들을 보는 것과 한치도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아버지를 보아온 것 같았다. 아버지는 과연 그런 존재였던가.
돌이킬 수 없는 일 앞에서 혼란에 빠지는 건 당연해요,라고 다언이 어른스럽게 말했다.
그럴까, 하고 나는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결국 죽음은 죽은 자와 산 자들 사이에 명료한 선을 긋는 사건이에요,라고 다언은 말했다. 죽은 자는 저쪽, 나머지는 이쪽, 이런 식으로. 위대하든 초라하든, 한 인간의 죽음은, 죽은 그 사람과 나머지 전 인류 사이에 무섭도록 단호한 선을 긋는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라고, 탄생이 나 좀 끼워달라는 식의 본의 아닌 비굴한 합류라면, 죽음은 너희들이 나가라는 위력적인 배제라고, 그래서 모든 걸 돌이킬 수 없도록 단절시키는 죽음이야말로 모든 지속을 출발시키는 탄생보다 공평무사하고 숭고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다언은 책을 읽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래 다져진 땅 같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곱씹고 또 곱씹어 어떤 칼날도 들어가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노인들보다 더 무섭고 더 죽음에 가까운 듯 보였다.
죽음은 우리를 잡동사니 허섭스레기로 만들어요. 순식간에 나머지 존재로 만들어버려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퍼뜩 해언을 떠올렸다. 우리 모두를 나머지 존재로 만들었던 해언의 아름다움, 너무 압도적이어서 과연 그런 아름다움이 실제로 존재했던 것인지 의심스러워지기까지 하는 그런 아름다움을 생각하자 마음이 일렁였다.
누군가는 살아 있을 때도 우리를 나머지 같은 존재로 만들지. 예를 들어…… 나는 잠시 망설이다 그 이름을 말했다. 해언, 말이야. 해언 앞에선 정말 우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으니까.
다언이 웃었다. 오래전 도서관 까페에서 만났을 때처럼 음울한 찡그림이었다.
상희언니, 내가 그 얘기 했나요? 우리 언니 이름 바뀐 얘기.
내가 듣지 못했다고 하자 다언은 해언의 원래 이름이 혜은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빠가, 하고 다언이 얘기를 이어가는 동안 나는 비상한 주의력을 기울여 그녀의 얘기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조금 전에 엿들었던 다언의 통화중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혜은이는요, 엄마…… 해언이는요, 엄마…… 그때 다언이 발음한 이름은 어느 쪽이었을까. 혜은…… 해언…… 엄마…… 어느 순간 다언이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듣고 있다는 기색을 보이기 위해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어요. 아직도…… 말이에요.
이렇게 말하고 다언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엄마가 뭘 아직도 믿고 있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다언 모녀에게 또다른 혜은 또는 해언이 실존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참 으시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육종에 대한 얘기는 1층 휴게실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휴게실에서 나와 가방보관함에서 각자의 가방을 찾아 건물 밖으로 나왔다. 다언이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해서 우리는 흡연구역 벤치를 향해 갔다. 내가 저녁을 사주고 싶은데 시간이 되느냐고 묻자 다언은 좋다고 했다. 술도 먹느냐고 묻자 먹죠, 하며 웃었다. 술도 사줄게, 하자 다언은 또 웃었다. 언니는 그렇게 해주세요, 난 자꾸 웃을게요,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런 다언을 보면서도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다언이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계속 혜은 또는 해언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왜 갑자기 윤태림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예전에 대학 도서관 까페에서 만났을 때 다언이 내게 윤태림과 연락이 되는지 물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때 나는 반창회에서 가끔 만난다고 대답했었다. 다언은 내 휴대전화 번호를 알아갔지만 그후에 윤태림의 연락처를 알려달라든가 그밖의 다른 용건으로 내게 연락해오지 않았다.
다언은 담배 한개비를 다 피우고 나서 새 개비에 불을 붙였다. 흡연이 엄격히 제한되면서 이렇게 한번에 몰아 피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건 그렇고 다언은 언제부터 담배를 피웠을까. 아직도 윤태림의 연락처를 알고 싶어할까. 나도 태림을 본 지 오래되었다. 태림은 신정준과 결혼하기 전에 반창회에 나와 청첩장을 돌리고 간 후로 다시는 반창회에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게 우리 중 누구도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은 데 대한 원한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언은 여전히 담배를 맛있게 피우고 있었다. 몇년 뒤 나는 반창회에서 윤태림의 6개월 된 딸아이가 유괴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베이비시터가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잠깐 외출했다 돌아왔는데 집에 와보니 유모차 속의 아기가 사라지고 없었다고 했다. 유모차를 밀면서 아기가 없다는 걸 모를 수가 있을까. 베이비시터는 몰랐다고 했다. 유모차 커튼을 내려놓았고 아랫단에 이것저것 아기용품을 실어놓았고 또 유기농매장에서 산 우유며 과일이며 주스를 걸이에 걸어두었기 때문에 무게를 잘 가늠하지 못했다고 했다. 베이비시터의 동선을 추적하면서 경찰은 가장 의심스러운 장소로 유기농매장을 꼽았는데, 베이비시터는 유모차를 카운터 뒤편 구석에 세워놓고 직원과 잠깐 실랑이를 벌였다고 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하고 한 동창이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길게 선을 그으며, 여기가 카운터고 이쪽이 매장이야, 하더니 그 선의 반대편 한구석을 짚으며, 근데 요기쯤 유모차를 세워놓은 거지, 했다. CCTV는 매장 안쪽 카운터를 비추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바로 뒤편은 사각지대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때 누군가 유모차에서 아기를 빼내갔을 거라고 동창은 말했다. 그때 나는 심한 기시감이 들었고, 해언이 죽은 후 아이들이 칠판 위에 이런저런 그림을 그리거나 수치를 적으며 각자의 추리를 늘어놓던 장면이 겹쳐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지금 태림을 떠올린 것도 그 기시감, 그 오버랩 때문일까.
다언이 두번째 담배를 휴지통에 눌러 끄며 물었다.
언니는 신을 믿어요?
신? 하고 나는 물었다. 안 믿는 것 같아. 너는?
나도 아직은요.
그럼 믿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냐고 물었더니 다언은 아니라고 했다.
믿고 싶은데…… 믿을 수가 없어요.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이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신을 믿을 수 있어요?
그리고 다언은 도서관 휴게실에서 노인들에 대해 얘기할 때처럼 빠른 말투로 종잡을 수 없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이를테면 이 지구상 어딘가에 한 여자아이가 태어난다. 아이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늘 굶주리고 매를 맞고 쓰레기를 뒤지다 질병에 걸리고 눈이 먼다. 열두살 때 아이는 집단으로 강간을 당한 후 칼로 난자되어 살해된다. 그리고 자신이 평생 동안 먹을 것을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쓰레기장에 버려진다. 그런데도 신을 믿을 수가 있나?
다언은 잠시 진정하려는 듯 심호흡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이를테면 이 땅 어딘가에 한 남자아이가 태어난다. 난쟁이 엄마와 누이동생만 있는 가난한 집 장남이라 새 신을 사지 못해 신을 직직 끌고 다니고 열두살 때부터 푼돈을 벌며 학교에 다닌다. 열아홉살에 살인 누명을 쓰고 경찰에게 매를 맞고 이웃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학교에서도 쫓겨난다. 그러다 군대에 가서 육종에 걸려 다리를 절단하고—나는 이때 다언에게서 육종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의병전역을 하고 불구의 몸으로 세탁공장에 취직해 화상을 입으며 다림질을 하다 육종이 온몸에 퍼져 스물여덟살에 죽는다. 그런데도 이걸 신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나?
언니, 이 모두가 신의 섭리다, 망루가 불타고 배가 침몰해도, 이 모두가 신의 섭리다,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신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말할 수 없어요. 섭리가 아니라 무지예요! 이 모두가 신의 무지다, 그렇게 말해야 해요! 모르는 건 신이다, 그렇게……
그때 다언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걸려온 번호를 확인한 다언이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충분한 거리를 두고 통화를 했다. 나는 다언이 쏟아낸 말이 단순히 종잡을 수 없는 말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것은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어떤 의미의 과녁을 향하고 있었다. 열아홉살에 살인 누명을 쓰고…… 그건 혹시…… 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 전에 ‘한 많은 이 세상’으로 시작하는 노래를 먼저 떠올렸다. 그래, 한만우, 한만우인가. 육종에 걸려 죽었다는 그 남자는 한만우인가. 나와 동갑인 그가 스물여덟살에 죽었단 말인가.
어떡하죠, 언니.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다언이 말했다. 언니랑 꼭 한번 저녁 먹고 싶었는데 가봐야겠어요. 일이 생겼네요.
생겼다는 일이 나쁜 쪽은 아닌지 다언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그럼 언니, 하고 다언은 장난스런 미소를 짓더니, 신은 안 믿어도 시는요? 하고 물었다. 시는 믿죠?
시는 믿지.
나도 미소를 지었다. 다언이 내게 어떤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느냐고 물어서 30년대 시 창작방법론에 대해 쓰고 있다고 말했다. 시를 창작하는 방법론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다언이 물었다.
그럴 리가. 그럼 내가 시를 쓰게?
다언이 자전거의 종처럼 당당당당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흡연구역 벤치에서 웃으면서 헤어졌다. 나는 다언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사는 곳도, 연락처도. 물어도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후로 나는 국립도서관에 자주 갔고 아예 논문작업을 그곳에서 하기로 했다. 갈 때마다 다언을 찾았지만 자주 온다는 다언을 볼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저절로 알게 되었다. 다언이 나를 만난 날 이후로 다시는 도서관에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언니랑 꼭 한번 저녁 먹고 싶었는데,라고 다언은 말했다. 그때는 윤태림과 한만우 생각에 정신이 팔려 흘려듣고 말았는데, 돌이켜보니 그건 그녀가 나를 두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말이었다. 꼭 한번, 그리고 영영, 그런 뜻이었다. 그녀는 나를 피했다. 나뿐 아니라 오래전 그 사건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피할 것이다. 그래야 할 것이다. 자기 존재가 이 세상에서 고립되고 망각되길 원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살도 찌우고 안경도 쓰고 커다란 고치 같은 가짓빛 파카 속에 숨은 것일까.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목격자 때문에?
전철역에서 내리면서 나는 이 모든 상상이 어처구니없는 오해와 망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내 짐작이 모조리 사실이라면, 한일 월드컵이 개최된 그해에 일어난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어쩌면 다언의 삶이 끝난 후에도 오래.
2016: 사양(斜陽)
나는 한동안 한만우가 취직한 세탁공장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몇번이나 찾아갔지만 멀리서 감지되는 웅웅거리는 굉음 때문에 겁에 질려 발길을 돌렸다.
그날 용기를 내어 세탁공장의 열린 입구로 들어섰을 때 공장 내부는 습기와 열기로 가득했다. 통을 내려놓는 쿵쾅거리는 소리와 천들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는 퍽 짝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정도는 참을 만하다 싶어 몇걸음 더 안으로 들어갔다. 쇠북을 내려치는 소리, 고속으로 칼을 갈아대는 소리, 뾰족한 송곳으로 찔러대는 소리, 가쁜 숨이나 비명 같은 소리들이 점점 귀를 통해 증폭되고 눈으로 클로즈업 되면서 나는 더이상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레일 옷걸이에 걸려 돌아가는 옷들 사이로 한만우를 보았다. 그의 평온하고 길쭉한 얼굴을 발견한 순간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무시무시한 소리들이 잦아든 것이다. 아니, 잦아들었다기보다 소리의 형질이 변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함부로 찢긴 쇠붙이처럼 날카롭던 소리들이 한데 뭉쳐 구르면서 거대한 구름처럼 부풀어오르는가 싶더니 천천히 거품이 꺼졌다. 그리고 각각의 소리들은 그야말로 평범한 본래의 소리들로 돌아갔다. 세탁기가 웅웅거리며 회전하는 소리, 건조기가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소리, 타이머가 삐삑거리는 소리, 스팀다리미가 쉭쉭거리는 소리. 그것들은 더이상 나를 후려치듯 공격하는 굉음이 아니라 착착 정리된 공구함 속의 공구처럼 자기의 모양새를 획득한 소리들이었다. 나는 생전 처음 소리를 듣는 사람처럼 그 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소리는 이렇게 귀로 듣는 것이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지. 소리는 소리일 뿐이지.
하지만 여긴 정말 시끄럽긴 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좁은 통로로 들어섰다. 세탁물의 종류를 분류하고 오염도를 체크하는 노인들, 고무장갑을 끼고 오염 부위에 세제를 솔질해 바르는 늙은 여성들, 빙글빙글 돌아가는 마네킹 몸통에 재빨리 와이셔츠와 양복 상의를 입히는 중년 여성들을 지나갔다. 선우의 말에 따르면 한만우도 처음 공장에 취직했을 때는 이런 단순작업을 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마네킹들의 종착역 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네킹들이 입은 옷은 마네킹의 몸체가 음각된 형태의 스팀기계에 의해 양쪽으로 눌려 초벌 다림질된 후 차례로 벗겨져 한만우 앞에 놓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자기 앞에 도착한 와이셔츠나 양복을 한벌씩 대 위에 펼쳐놓고 스팀다리미로 구석구석 섬세하게 다림질했다. 치킨집 사장의 말대로 그는 일머리가 있었다. 오른손에 스팀다리미를 쥐고 왼손으로 옷의 깃과 소매, 앞단과 속지 등을 살짝살짝 들어올리며 다림질을 하는데 그 동작이 너무 사뿐하고 경쾌해서, 선우가 오빠의 손과 팔이 화상으로 인한 수포투성이라고 한 얘기를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에게 스팀다리미는 조금도 뜨겁거나 위험하지 않은, 오른팔의 자연스런 연장처럼 느껴졌다. 그의 손길을 거친 옷들은 옷걸이에 걸려 비닐이 씌워져 레일을 타고 빠져나갔다.
그는 잠시 뒤에 자리를 옮겨 시트를 다림질했다. 왼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고 오른손에 레일에 연결된 긴 스팀다리미를 장총처럼 쥐었다. 걸이에 고정된 시트가 팽팽하게 당겨지자 그는 절름거리는 잔걸음으로 조금씩 옆으로 이동하면서 스팀다리미를 뻗었다 당겼다 하여 시트 위에 왕복의 직선을 그렸는데, 그 다림질의 규칙적인 속도와 궤도의 정확성이 시트 위에 그대로 나타났다. 건조기에서 나온 잔주름 진 시트는 눈금자처럼 정확하게 횡으로 이동하는 속도와 종으로 왕복하는 스팀다리미의 움직임에 따라 완벽하게 매끈해졌다. 내 눈에 그는 시트를 다림질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트를 짜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오랫동안 그가 시트를 다림질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항암치료로 벗어진 그의 대머리는 스팀다리미에서 뿜어져나오는 흰 증기 너머에서 번쩍거렸고,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그의 동작들 하나하나에서 새롭고 눈부신 시트들이 끊임없이 탄생하고 있었다. 그가 죽은 후에도 나는 그 장면을 오래 기억했다.
나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선우와도 연락을 끊은 지 오래다. 그러나 때로 견딜 수 없이 그들 남매가 그립다. 그 집안에 배어 있던 돼지뼈 고는 냄새와 그 국물에 넣을 우거지를 짧고 뭉툭한 손가락으로 조물조물 버무리던 난쟁이 엄마도 그립다. 그들은 여전히 A동 301호에 살고 있을 테지만 나는 그 집에 발을 들일 수 없고 상가 모퉁이 작은 구둣방에 구두를 고치러 갈 수도 없다. 상가 2층 교회에서 흘러나오던 찬송가 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나는 그들을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들 모녀가 선의로 가득 찬 사람들이란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들 부부, 신정준과 윤태림이 오래전 그 사건을 경찰에게 얘기한다면, 나는 그들이 그러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경찰은 한만우의 가족부터 찾아갈 것이다. 그가 죽었으니 그들 모녀를 취조하고 감시할 것이다. 이런저런 유도 심문에 응하다보면 키 작은 모녀는 우연찮게 내 얘기를 할 수도 있다. 내가 그들을 언제 찾아왔는지, 어떻게 의심을 풀고 서로 친해졌는지에 대해 조금의 악의도 없이. 그리고 경찰은 나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궁금하다.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걸까. 그저 한만 남기는 세상인가.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 왼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고 오른손에 긴 스팀다리미를 쥐고 시트를 다림질하던 그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심지어 그의 폐에 퍼진 암세포보다 더 펄펄 살아 있지 않았던가. 아무 생각 없이 어떤 금지도 모른 채 소파 위나 자동차 시트 위에 발을 얹고 무릎을 약간 벌려 세우고 앉아 있던 우리 언니 해언도 곧 날아가버릴 새처럼 그렇게 따스하고 향기롭게 살아 있지 않았던가. 그것이 삶의 의미일 수는 없을까.
이제 그들은 죽고 없다. 한만우의 죽음을 경유함으로써 나는 언니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언니의 삶 또한 고통스럽게 파괴되었다는 것을, 완벽한 미의 형식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내용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면 그밖의 것은 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살아 있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엄마와 어린 혜은, 아무도 모를 죄책감과 기나긴 고독이 내 곁에 있다.
가끔 한만우를 처음 찾아가던 날의 뜨거운 증오를 생각한다. 그의 절단된 다리를 놓고 천벌받은 거라고, 그 병이 이대로는 안 끝날 거라고 앙칼지게 쏟아내던 저주를 생각한다. 작은 부엌 창문을 등지고 앉은 그가 무릎,이라고 말하던 순간을 생각한다. 자꾸 히죽대던 그의 웃음을 생각한다. 오이지 같은 그의 얼굴을 매끈한 참외처럼 해맑게 다림질하던 그 웃음, 한때 내가 맹렬한 혐오감을 느끼며 냉랭하게 바라보았던 그 웃음, 한 소녀에 대한 소박한 마음이 빚어낸 그 어리석은 웃음을.
나는 상상한다. 배달용 스쿠터를 탄 열아홉살의 소년이 교차로에 서 있다. 스쿠터 뒷자리에는 눈꼬리가 올라가고 입술이 붉은 소녀가 타고 있다. 신호가 바뀌고 스쿠터의 시동이 걸리는 순간 소녀의 손이 그의 허리 양쪽을 가볍게 붙든다. 소녀의 손은 깃털처럼 따뜻하고 부드럽다. 그의 주름진 두 뺨에 평생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낯선 희열이 깃든다. 그것은 공포의 다른 면이기도 하다. 그는 희열과 공포의 교차로를 가로질러 비상하듯 달려나간다. 환한 유월의 저녁 사양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