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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국의‘보수세력’을 진단한다 ④
한국의 재벌, 재벌의 한국?
송원근 宋元根
경남과학기술대 경제학과 교수. 저서 『재벌개혁의 현실과 대안 찾기』 『한국 사회, 삼성을 묻는다』(공저) 『사회경제민주주의의 경제학』(공저) 등이 있음.
신학림 申鶴林
언론인. 미디어오늘 대표이사. 전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
이원재 李源宰
여시재 기획이사. 전 희망제작소 소장, 한겨레경제연구소장 역임. 저서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 『아버지의 나라, 아들의 나라』 등이 있음.
이일영 李日榮
한신대 교수, 경제학. 저서 『새로운 진보의 대안, 한반도 경제』 『혁신가 경제학』 등이 있음.
이일영(사회) 『창작과비평』은 올 한해 동안 ‘한국의 ‘보수세력’을 진단한다’라는 기획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종교, 군대, 사회단체 문제에 이어 이번호에서는 ‘재벌’을 중심으로 경제계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재벌 그 자체에 대한 진단을 포함해 그들이 경제력을 어떻게 다른 분야로 확장해 ‘힘’을 확보하는가, 이러한 가운데 우리 사회가 대항력 내지 대안적 시스템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등으로 논의를 이어나갈 생각입니다. 세분을 모셨는데, 오늘의 주제와 관련해서도 각자 최근의 관심사가 조금씩 다를 것도 같습니다. 먼저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신학림 저는 경제를 깊이있게 공부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관심사가 재벌에 맞닿아 있긴 합니다. 대한민국 5천만 인구의 0.02퍼센트인 만명 정도가 한국사회의 이른바 실질적인 지배세력입니다. 저는 이들 사이의 관계, 특히 혈연에 대해 조사하고 있습니다. 지연이나 학연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언론에 보도가 되는데 혈연은 그렇지 않거든요. 공인이든 아니든, 분야가 어느 쪽이든 간에 이들이 어떻게 가문과 가문으로 연결돼 대한민국에서 돈과 권력과 명예를 독과점하는지를 십년 정도 쫓고 있습니다. 물론 이 안에는 재벌이 많이 포함되지요.
송원근 저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재벌을 주제로 했고 이후에도 계속 이 문제를 연구해왔습니다. 예전에는 30대 재벌이라는 얘기가 흔했습니다만, 2000년대 초반 지나면서부터 그 안에서 격차가 커지면서 10대 재벌, 5대 재벌 같은 식의 호명이 더 흔해졌죠. 그러다보니 언젠가부터 삼성 하나만 연구하는 것도 큰일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경제민주화를 화두로 기존에 해왔던 연구를 더 발전시키려는 중입니다. 지역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관련 강의도 하고요.
이원재 저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심을 두기 시작해서 사회적 기업, 사회적 경제, 공유경제, 협동조합, 소셜벤쳐까지 점차 대안에 해당되는 영역을 파고들게 됐습니다. 이런 것들이 잘되기 위해서 어떤 정책 환경, 생태가 필요한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것과는 조금 별개로 민간 싱크탱크를 잘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왔는데요, 그러면서 삼성경제연구소, 한겨레경제연구소, 희망제작소를 거쳐 최근에는 새로 출범한 ‘여시재’라는 민간 싱크탱크에 있습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재벌
이일영 창비가 애초에 이 기획을 이어나가게 된 문제의식은 박근혜정부가 ‘점진쿠데타’라고까지 부를 만한 행태를 보이는 상황에서 이른바 ‘보수세력’의 속살을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엄밀한 개념은 아니고, 흔히 수구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을 것들에 대해서 말이지요. 그렇게 이번 대화를 미리 기획해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였습니다만, 사실 요즘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시국에서 오는 충격이 다른 무엇보다 큽니다. 지난호에서 보수사회단체를 다룰 때도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의 돈이 이들 단체로 흘러들어가는 이슈가 있었습니다만, 미르, K스포츠 재단 설립에도 전경련이 결정적으로 개입되었지요. 얼마 전에 경제·경영학자들이 “권력에 기생하며 정경유착과 부조리한 행위를 반복하는 전경련은 자유시장경제의 걸림돌이 될 뿐이다”라면서 전경련 해체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까 전경련은 조연도 아니고 아예 엑스트라처럼 보여요. 앞으로 무슨 얘기가 더 쏟아져나올지 모르겠는데,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삼성, 현대자동차, LG, 롯데, SK 등 재벌 총수 및 최고위층 일곱명을 독대하고 직접 이 재단들 설립에 필요한 모금을 독려했다는 거예요. 이런 말이 국회에서 먼저 이야기되더니 뒤이어 검찰이 관련 자료를 확보했다고 합니다. 삼성의 승마 지원도 말이 무성합니다. 인기 종목에 대한 지원을 줄이면서 유독 승마에만 전폭적인 지원을 했는데, 권력의 비선실세 냄새를 맡는 삼성의 능력이 워낙 탁월한 것 아닌가 하는 감탄(?)도 나오는가봅니다. 최근 시국과 관련해서 나타난 재벌과 전경련의 행각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 잠시 짚고 이어나가보겠습니다.
이원재 일단 전경련은 해체되어야 하고, 해체될 것 같습니다. 전경련이 회원사들의 이익조차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회원사의 이익을 대변한다기보다 사실 청와대의 요구사항을 기업들에 전달하는 창구 역할, 즉 관치경제의 전달체계로 전락했다는 이야기지요. 이와 별개로 삼성의 승마 지원은 다른 각도에서 봐야 합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제3자 뇌물공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미르재단과 승마 지원 등을 통해 최고권력자의 관심사에 자금을 댄 기업은 부정청탁을 위해 뇌물을 공여한 행위를 한 것이라고 보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신학림 저도 전경련은 해체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할 일이 별로 없어요. 있다 해도 경총이나 무역협회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뒷구멍으로 관변단체 도와주는 거 말고 사실 이렇다 할 정책을 가지고 자기 목소리 내는 걸 못 봤습니다. 회원사들끼리도 이해관계가 분화된 만큼 공통의 이익을 추출하기가 어려울 거예요. 1961년에 설립됐는데 그때 취지하고 많이 달라졌습니다. 수명을 다했다고 봐요.
송원근 여러가지 측면에서 이번 사태를 볼 수 있겠지만, 재벌들의 상납은 단순히 재벌이 권력에 기생하는 것을 넘어 정치권력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겉으로 드러나기로는 정부가 강요하고 기업들이 따라준 것 같지만 비선실세를 이용해 재벌들이 권력을 행사한 것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요? 전경련은 십여년 전에 발전적 해체 얘기가 나오다가 다시 사라져버렸다고 합니다. 그때 얘기가 보수진영의 싱크탱크로 남는 거였다는데, 제대로만 일한다면 저는 그런 단체가 존재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요.
삼성이 망하면 한국이 망한다?
이일영 지금 재벌경제의 실상을 어떻게 파악하고 계신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최근 삼성전자의 갤럭시노트7 사태와 현대자동차 리콜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경제가 큰일나게 생겼다는 거지요. 아까 송교수님도 말씀하셨지만 지금은 재벌이라 하면 삼성하고 현대기아차만 주로 거론하지 않습니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통계도 그래요. 찾아보니까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이 국내총생산, 즉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5%나 되고, 법인세 세수에서 21%, 증권시장 시가총액에서 37%, 순이익에서도 35%나 차지했다는 기사가 나와요.(동아일보 2014.1.14) 이번에 기획재정부 차관이 “삼성과 현대차의 경제 비중이 GDP 대비 5%가 넘고 투자의 14%, 수출의 23%를 차지한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고요. 이게 숫자적으로도 대단하지만, 이 기업들이 네트워크를 통해서 발휘하는 힘은 그보다 더 크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요새 갑자기 비선실세가 이들보다 더 위에 있는 게 아니냐는 얘기들이 나오긴 합니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건 그것대로 논의될 거라고 보고요. 지표로 나타나는 것과, 또 지표로 나타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이원재 저는 이들의 매출이 GDP의 몇 퍼센트다 하는 얘기는 언론이 과장한 측면이 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숫자라는 게 원래 함정이 많잖아요. 매출액과 GDP를 비교하면 안 됩니다. 영업이익이나 부가가치 가지고 얘기해야죠. 제가 대충 계산해보니까 국내 부가가치 생산에서 삼성전자의 비중이 1.7%로 나오더라고요. 수출액에서 삼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년 기준 20% 정도입니다. 오늘 발표된 삼성전자 영업이익을 보니까 작년보다 4분기가 30% 줄었다는데, 단순계산을 해보면 방금 말한 1.7%에서 약 0.6%p가 빠지는 거죠. GDP 전체에서 0.6%p면 큰 액수다, 영향이 상당히 크다, 이렇게 볼 순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이들이 무너진다고 가령 경제의 3분의 1이 사라진다거나 할 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송원근 삼성전자의 경제력 비중에 대해서는 착시 현상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인식과 대응이 꼬이기도 하지요. 이번에 엘리엇 매니지먼트(Elliot Management)는 삼성의 지주회사 체제를 염두에 두고 삼성전자를 분할해서 자기들에게 특별배당해주고 주주들에게 더 책임지는 경영을 해보라고 제안했어요. 그런데 작년에 이미 엘리엇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에 반대했을 때, 보수주의자들은 민족주의 정서를 동원해 합병에 찬성했거든요. 이제 와서 보면 너무 무지한 소치였습니다. 삼성을 포함한 재벌 대기업들이 주주들의 이익을 위한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삼성이 망하면 우리나라가 망한다는데, 사실 조선일보가 2014년 1월 8일자(기획 ‘삼성전자 없는 대한민국’)에 이미 삼성전자를 분할해야 된다는 기사를 썼습니다. 물론 그 기사의 목적은 삼성전자 위기론을 자꾸 조장해가지고 오히려 삼성의 지배구조나 이재용의 지배력을 좀더 확실히 하기 위한 겁박용이었습니다만. 문제는 일반인들의 인식에서는 지배구조가 어떻든 간에 그냥 경제가 걱정이라는 거예요. 게다가 삼성의 성장이 곧 한국경제의 성장이라는 등식을 합리화하려고 면죄부를 쉽게 줘버린 정부관료, 정치인, 언론인 모두가 이런 걱정을 확대 재생산하고 그런 인식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신학림 삼성이라는 기업과, 삼성을 실질적으로 소유·지배하고 있는 이재용 일가가 얽혀 있거나 저지르는 문제를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기업이든 영원히 지속되는 곳은 없겠지만, 삼성그룹의 주력기업인 삼성전자는 글로벌 기업이지 꼭 ‘한국의 기업’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 관점에서 삼성이 추락한다는 전제는 현재로서는 비현실적인 가정이라 생각하고요. 설사 삼성전자가 망한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망할 거라고 보지 않습니다. 특정기업 하나 망했다고 GDP 세계 11위 국가의 경제 전체가 주저앉는다는 건 말이 안 되지요. 우리 경제규모나 국민들의 저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주장이나 질문 자체가 삼성을 지나치게 신화화하는 언행이라 봅니다.
이원재 한국의 재벌은 두 단계의 미션을 수행해왔습니다. 60년대 말, 70년대 초부터 차관을 비롯해 어떤 형식으로든 국가가 끌어온 돈을 재벌이 정경유착을 통해서, 달리 말하면 국가의 명령을 받아서 사업을 추진하고 그 댓가로 국가의 보호 속에서 독점사업권을 받아 쭉 성장한 단계가 하나고요, 그다음에는 IMF 구제금융 전후 이른바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시장화가 이루어지면서 스스로의 경쟁력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세계로 던져졌습니다. 삼성에 대해 상징적인 사건이 하나 생각나는데, 2006년 제가 삼성경제연구소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삼성이 1998년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을 크게 한 다음에 완전히 시장주의적으로 돌아섰는데, 삼성전자가 특히 그랬습니다.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들이 삼성전자에 컨설팅차 다녀와서 하는 얘기가, 거기 전무가 지시를 내리니까 대리가 막 개기더래요. 내용인즉 “전무님 말씀대로 하면 돈이 안 됩니다”라는 거예요. 그때까지의 정경유착과 명령의 논리를 이윤극대화 논리가 뒤집는 순간이 온 거예요. 그게 신자유주의고 나쁜 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재벌의 그간 작동방식에서 보면 한 단계 진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이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더 넓히면 이명박정부 초기까지의 일이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보수정부 들어 다시 퇴행한 것 같아요. 특히 최근의 K스포츠, 미르 재단 사태를 보면 명령의 단계로 다시 돌아간 거죠.
정리하면, 한국경제가 예전에 독재와 관치라는 지저분한 상황에서 그 과정은 나빴지만 결과적으로 기업을 성장시켜 글로벌 기업으로까지 키워냈다는, 성장 면에서 완결된 듯한 이야기를 흔히 하는데, 실은 완결이 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퇴행을 겪으며 몰락하고 있다는 느낌을 저는 많이 받습니다. 일련의 과정이 두가지 위기로 압축됩니다. 하나는 ‘최순실 사태’가 상징하듯이 관치와 명령의 구조가 다시 등장했다는 것과, 갤럭시노트7과 현대차 문제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나마 확고했던 글로벌 경쟁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박근혜정부가 더 완전히 시장주의적인 상태로 재벌기업들을 독립적으로 만들어주고 임무를 끝냈으면 한국경제 한 단계가 어쨌든 잘 마무리되면서 그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될 수 있었는데 비극적으로 끝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일영 말씀하신 삼성전자 에피소드가 벌어졌을 무렵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을 하기도 했죠. 송교수님 생각은 어떠세요?
송원근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을 저는 기존의 정부 역할, 그러니까 이원재 이사님 표현으로는 관치, 재벌과의 유착관계에서 정부의 주도권이 사라졌다는 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렇다면 정부가 무슨 역할을 할 거냐는 문제가 새로 제기된 건데, 이명박정부 이후로 기업친화,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하면서 규제 완화하고 민영화하겠다고 한 것은 정부가 주도권을 행사하기보다는 기업활동을 지원하는 정도의 역할을 하려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박근혜정부 들어서 예전처럼 다시 국가가 뭔가를 주도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전경련이 정부가 시키는 대로 안 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하니까 만들어졌듯이 우리나라 보수라는 게 실은 늘 정부의 입김에 따라 움직여온 세력이거든요. 재벌들의 정치적인 견해를 실제로 제대로 대변해주는 정당이 없었던 측면도 있습니다. 현재 새누리당을 포함한 보수세력들은 종북 얘기만으로도 정권을 잡을 수 있었지요.
정치권력은 다시 재벌 위에 선 것인가
이일영 정부 주도권은 약해졌는데 또 정부의 입김으로 돈을 거두고 했다면… 미르, K스포츠 재단 같은 것은 정부가 실제로 시장으로부터 권력을 회수해 관치를 했다기보다는 그냥 골목에서 ‘삥 뜯은’ 정도로 봐야 한다는 말씀 같습니다.(웃음)
신학림 삥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지요. 그리고 규모야 어떻든 그저 돈만 뜯어간 거라면 문제가 단순할 수도 있겠는데 지금 이건 국가경영 시스템 전체를 완전히 말아먹은 거라 문제가 훨씬 심각합니다. 국가, 정부의 역할 부분만 놓고 봐도 역할을 늘리건 줄이건 간에 시장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는 행태잖아요. 정치권력과 재벌권력의 역학관계에 있어서 저는 그 변곡점이 김영삼정부 때라고 봅니다. 그 이전에는 대통령 당선되는 순간에 말 안 해도 재벌들이 당선 축하금을 흔한 말로 트럭으로 갖다 바쳤습니다. 정치자금법, 선거공영제 같은 것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재벌들이 대통령을 포함해 정치권에 천문학적인 돈을 뜯겼어요. 정치권력이 위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부정한 돈을 한푼도 안 받겠다 하고서 임기 첫해 8월에 바로 금융실명제를 도입했죠. 그리고 관련법이 갖추어지기 전에 이미 특유의 정치력으로 공직자 재산신고를 하게 만들었어요. 정치도 깨끗해져야 한다면서 정치자금을 함부로 주고받지 못하게 했고요. 재벌들이 정치권력자한테 상시적으로 막대한 돈을 줄 필요가 없어진 건데 그러면서 외려 재벌이 정치인들을 소액으로 매수하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이회창(李會昌) 후보가 출마하자 또 ‘차떼기’가 있었습니다만. 아무튼 YS의 주도로 정치인들이 눈먼 돈을 받기 어려워진 제도와 환경이 조성되니까 재벌들이, 예를 들어서 그전에는 한사람에게 줄 오천만원을 이제는 국회의원 열명에게 오백만원씩만 주면, 그 의원들은 자기한테 오백 주는 기업이 엄청 고마운 거예요. 그러면서 재벌권력과 정치권력의 관계가 역전됐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걸 다시 되돌린 사람이 박근혜 대통령이고요. 다만 정치권력이 다시 우위에 서긴 했는데 경제적으로는 아무것도 살리지 못하면서 삥이나 뜯는 최악의 상태가 된 거죠. 창조경제를 내세우면서 창조경제와 가장 먼 행태를 보인 겁니다.
송원근 저는 그걸 꼭 역전이라 말하긴 어렵다고 봅니다. 독재정권 시절에는 어떤 분명한 목표와 지향이 있었어요. 물론 그걸 추진하는 방식이 굉장히 권위적이고 폭압적이었지만.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특별한 정책적 목표 없이 그저 가지고 있는 행정권, 검찰 같은 걸 앞세워서 정말 다른 사람들 삥이나 뜯는 식인 거예요. 대통령만 놓고 얘기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이명박(李明博)이 시장 안에서 자기 사익을 철저히 추구하는 대통령이었다면, 박근혜는 시장을 과거 아버지 시절과 같은 권위주의적 통치로 억누르려 한 것 같아요. 권력은 이미 시장에 있는데.
신학림 제가 정작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정부가 국리민복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어떤 정책을 수립하고 그걸 재벌에도 따르라고 할 수 있게 됐음에도 그러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명박정부가 법인세를 깎아주는 바람에 나라의 곳간이 비었다고들 하는데, 저는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풍겼던 이미지가 이명박과 좀 달랐기 때문에, 이명박이 텅 비게 만든 곳간을 박대통령이 채우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사실 조금 가졌어요.
송원근 채웠잖아요, 담뱃값 올려서.(웃음)
신학림 담뱃값도 그렇고 교통범칙금도 올리긴 했죠. 그런데 결국 ‘이명박근혜’정부라고 묶여서 불릴 만한 게, 경제정책 측면에서도 바뀐 게 없어요. 어느 경제학자는 이명박정권 5년 동안 200조의 곳간이 비었다고 하던데 저는 거기서 100조, 50조만 다시 채웠어도 박근혜 대통령 인기가 확 올라갔을 거라고 봅니다.
이원재 우리가 흔히 글로벌 기업들이 처음에는 보호 속에서 성장하다가 어느 순간 글로벌 시장으로 나가면서 경쟁력을 가진 시장주의자로 변신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 시점에 법인세 인하나 규제완화 같은 시장주의적인 정책수단이 새로 들어가는 겁니다. 저는 한국에서도 그게 시도됐다고 보고요. 앞서도 말했지만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는 그런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저는 국가가 더 강한가 재벌이 더 강한가의 문제로 갈라서 보기보다는 50년간 한국의 주류 경제 패러다임이 갖고 있었던 하나의 계열이 이어져왔다는 관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박근혜정부가 시장주의적이지 않을 이유는 없는 거죠. 요즘 나오는 여러 사건들을 보면 이제 그조차도 흔들린 게 아닌가 하는 말씀을 드렸던 거고요. 이 상황에서 눈여겨볼 것이, 오늘 삼성전자 주주총회를 통해 이재용이 등기이사가 됐습니다(2016.10.27). 이것도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지요. 과거 편법으로 그 많은 재산을 만들어서 주주 지위를 획득한 사람인데 우리 사회가 그걸 다 잊어버리고 이 사람을 글로벌 기업의 경영자로 추인해주는 모양새가 된 거예요. 그러면 아까 말씀드린 성장 스토리가 완성된 셈입니다. 다만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이제 낡은 기업이 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렇게 됐다는 게 이 스토리로서는 불행한 일인데요, 저는 아무튼 이 공백을 채울 대안이 빨리 나와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일영 신대표님이 김영삼정부 때가 변곡점이었다고 하신 데 상당히 공감되는 바가 있습니다. 국내적으로 국가가 재벌로부터 대량의 약탈을 하던 게 중단되었다는 사실이, 그때쯤부터 대외적으로 형성된 글로벌화 속에서 기업의 경쟁조건이 중요해지니까 국가도 일정정도 성격 변화를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 현실과 연결된다는 생각입니다. 그와 더불어 저는 또 하나의 변곡점으로 2008년에서 2012년 정도에 이르기까지 국제환경이 다시 변했다는 점, 즉 글로벌 플레이어가 된 한국의 기업들이 새로운 표준을 확립해야 하는 상황이 됐는데 그때 길을 못 찾은 상황을 거론하고 싶습니다. 지금 모색 중이라고 볼 수도 있을 텐데 그러는 사이 국가가 상당히 퇴행한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박근혜정부가 겉으로 보였던 것처럼 정말 70년대식으로 갈 수 있느냐 하면 이미 외부적 환경이 그걸 불가능하게 만들었지요. 결국 지금 박근혜정부가 처한 곤경은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가려고 했던 데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좀 어이가 없지만, 박대통령이 워낙 강공하는 스타일이고 여기에 야당이 끌려다니면서 이 정권이 정국 주도력을 놓치지 않았어요. 이런 상황이 뒤집어진 데는 정권 스스로 내부에서 붕괴한 측면이 있고, 또다른 한편에서는 언론의 분투가 큰 역할을 했지요. 또 이화여대생들의 투쟁도 중요했다는 생각입니다. 종래의 운동권 방식과는 다르게 하겠다는 자의식이 보였어요. 몇년 전부터 느끼던 바인데, 지역활동을 하는 청년들 만나보면 자신들을 소위 ‘꿘’, 그러니까 종래의 진보운동권 선배들과는 구분되는 존재로 생각해요. 아직 확연하지는 않지만, 기존의 보수와 진보를 한꺼번에 낡은 것으로 만들고, 또 국가가 과거처럼 작동해서는 그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구조나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재벌에도 ‘클래스’가 있다
신학림 시스템들을 말씀하시는데, 저는 이 정부를 운용하거나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이들이 전부 기득권 세력, 즉 대한민국의 돈과 권력과 명예를 거의 독과점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박근혜정부가 더더욱 무언가를 하려야 할 수 없었던 면이 있다고 해석하는 편입니다.
송원근 저는 거기에 더해서 박근혜정부가 규제든 용인이든 어떤 정책으로 재벌을 이끌기 어려웠던 데는 재벌 간의 격차 문제도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30대 재벌이든 10대 재벌이든 이들이 공통성을 가졌을 때는 서로 이해관계로 뭉칠 수가 있었고, 그런 걸로 정부와 연합도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데 묶이기가 어려워졌어요. 박근혜정부가 왜 재벌 규제를 제대로 못했느냐를 이런 면에서 조금 편들어준다면, 삼성을 규제하려고 어떤 정책을 펼 경우 다른 재벌은 거의 존폐 위기에 처할 정도로 센 규제가 돼버립니다. 마찬가지로 그보다 낮은 수준의 규제로는 삼성 같은 최상위재벌은 빠져나가게 되고요. 이런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일영 재벌 안에서 격차가 많이 생기고 양상도 다양해진 것은 사실인데 재벌이라는 시스템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 않나요? 거기에 어떤 요소들이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보십니까? 일단 신학림 대표님이 주목하시는 혈연, 혼맥 등을 거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학림 송교수님 말씀처럼 지금 5위 재벌하고 30위 재벌은 그 규모가 거의 하늘과 땅 차이일 겁니다. 그렇지만 또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삼성, 신세계, CJ, 한솔 등의 그룹은 어찌 보면 범 삼성그룹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삼성은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삼남인 이건희 회장 가족, 한솔은 이병철의 큰딸(이인희) 가족, CJ는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장남이 이재현) 가족, 신세계는 이병철의 5녀 이명희(장남이 정용진) 가족이 소유·지배하는 그룹입니다. 이렇게 분화한 것이지요. 예전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 쪽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정주영 창업주의 장남이 일찍 작고하는 바람에 사실상 장남 역할을 한 차남 정몽구 가족이 현대기아차그룹, 삼남 정몽근 가족이 현대백화점그룹, 4남 정몽우(작고) 가족들이 B&G스틸(구 인천제철), 5남 정몽헌의 부인 현정은 회장 가족이 현대그룹, 6남 정몽준이 현대중공업그룹, 7남 정몽윤 가족이 현대해상화재, 8남 정몽일 가족이 현대기업금융을 각각 소유·지배했거나 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정주영 회장의 동생 가족들이 소유·지배하고 있는 그룹이 한라그룹(정인영), 성우그룹(정순영), 한국프렌지공업(정주영의 매제 김영주 가족), 현대산업개발(정세영), KCC(정상영) 등입니다. 이런 몇개의 ‘가문 클러스터’가 대한민국 경제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이, 이들 기업집단은 별개로 되어 있긴 하지만 특수관계자의 범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지금 두산그룹은 창업주의 4세인 박정원씨가 회장으로 있습니다. 3세, 4세들이 각 계열사, 자회사를 가지고 있고, 게다가 5세인 10대, 20대들이 또 상당수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지요. 창업주의 형제들, 손자들을 다 생각하면 벌써 6촌, 7촌으로 막 퍼져나가는 거예요. 그럼 이건 특수관계자 범위에 넣을 수가 없어요. 상법에 따라 부당 내부거래를 규제해야 하는데 지금의 법제도 가지고는 못 막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자산규모가 일정수준 이상인 기업집단군을 실질적으로 소유 혹은 지배하는 경우에는 특별법으로 특수관계자의 범위를 대폭(8촌 이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부당내부거래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습니다.
이일영 보통 후발산업국들의 발전과정에서 기업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가족기업집단을 말합니다. 선진국의 경우 이런 집단이 분산되면서 전문경영인 체제로 넘어간 건데 한국의 경우 그런 과정이 딱 막혀 있는 거죠. 그러다보니 글로벌 체제가 변동하고, 4차 산업혁명의 파도가 다가오는 지금 현실에서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문제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요?
지배구조 개선이냐 업종 규제냐
송원근 과거 재벌의 핵심전략은 다른 회사, 다른 계열사로부터 지원을 받아가면서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는 거였는데, 이제는 수익극대화 전략으로 넘어가다보니 가지고 있는 것들을 활용해 알뜰하게 부를 뽑아내는 구조를 갖추는 게 중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일감 몰아주기, 내부거래 같은 것들이 많이 활용되고 있죠. 글로벌 경영, 주주가치 경영 한다고 외치면서 과거처럼 부실계열사 지원한다고 하면 주주들이 가만있겠어요? 그렇지만 재벌 2,3세가 대주주인 계열사가 일감 몰아주기로 이익을 얻으면 그 회사 주주들도 좋아요. 거기서 일종의 연합 같은 게 형성되기도 하고요. 신대표님 말씀처럼 더 큰 틀에서의 집단을 유지하고 그 속에서 기득권을 잘 보전하는 것이 그들 입장에서 물론 기본적으론 중요하겠지요. 그러나 같은 재벌 안에서도 형제간에 재산이나 경영권을 놓고 싸우는 모습을 우리가 많이 보고 있고, 또 상위재벌들 간에도 이해관계가 많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뭘 하자고 해도 쉽게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전경련 같은 경우도 언제부턴가 회장을 서로 안 하려고 한다거나, 여러 사안에서 마찰음을 빚는 이유도 이에 대한 방증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이번 미르재단 사태는, 다른 재벌들이 돈을 냈기도 했거니와 원샷법(기업활력제고를 위한 특별법)같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려는 동일한 이해관계가 있었고, 정부에 ‘보험’ 든다는 계산도 있었겠지요. 아무튼 제가 주목하는 것은 재벌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합종연횡을 한다는 사실이에요. 이재용의 지배력 확대를 위해서 삼성의 방산 분야 계열사를 한화가 받았잖아요. 삼성과 롯데 간의 화학계열사 매각이 그렇고 삼성물산이 자사주를 KCC에 넘기고 제일모직하고 합병하는 과정에서 KCC가 삼성 편을 들어준 것도 그렇고요. 그런 식으로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는 거죠. 재벌 간의 관계가 과거와 많이 달라진 건데, 문제는 개별집단에서 그런 총수지배를 어떻게 해결할지입니다. 이 점에서 여전히 정부가 중요합니다. 구체적으로, 저는 제조업뿐 아니라 금융계열사를 포함해 이들에 계열분리 명령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전에 순환출자부터 금지해야 하고요. 그런 게 있어야 중소기업, 하청기업하고의 관계도 그렇고, 산업구조도 바꿀 수 있다고 봐요. 지금은 이재용이 언제든지 시장의 규칙을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잖아요, 정부는 아무 말 못하고. 2014년에 식약처가 삼성의 갤럭시기어를 의료기기가 아니라면서 규칙을 바꿔버린 게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심박수를 잴 수 있는 기기인데, 의료기기로 지정되면 여러가지로 복잡해지고 휴대폰 대리점에서 팔기도 어려워지거든요. 삼성의 로비로 시장규칙이 달라졌다는 의혹이 짙은데, 아무튼 이를 이용해 삼성은 과거 성공적이지 못했던 이재용의 경영능력을 검증하려 했던 것이죠. 결국 정부가 확고한 의지를 가져야만 행정관료들 사이에서도 이런 일들을 막을 수 있는 단초가 생기지 않을까 합니다.
이일영 여전히 정부가 중요하다는 말씀이네요. 정부가 바람직한 규칙을 제정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작동하도록 사회가 뒷받침해줘야 할 텐데, 아까 신대표님께서는 90년대 이후로 재벌의 힘이 다른 세력을 각개격파하는 게 가능해진 상황이라 하셨습니다.
신학림 네, 포섭하는 거죠. 정치인도 그렇지만 법조계가 또 그렇습니다. 이건 검찰 쪽에서 들은 얘긴데, 검사들은 각자 어느 시점에 진학반, 취업반으로 나뉜답니다. 진학반은 승진하는 거고 취업반은 로펌이나 대기업 전속 변호사로 가는 거래요. 이런 상황에서 특정 재벌이 연루된 사건이 들어오면, 취업 생각하는 검사들은 계산이 서겠죠. 얽힌 금액이 엄청난 이런 사건을 잘 봐주면 재벌 회장에게 보고되지 않겠어요? 잘 수습하고 나면 나중에 실제로 취업이 되고요. 이런 분위기가 검찰만이 아니고 우리나라의 정책을 주무르는 고위 관료들 사이에 대단히 팽배해 있습니다.
이일영 노무현정부 때 나온 얘긴데, 여러 제도를 바꿀 때 삼성을 위한 조항은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찾을 수 없도록 저 밑에 묻어 들어온다는 거예요. 김용철 변호사 폭로에 따르면 이렇게 저렇게 오가는 거래가 건당 1억이라는 말도 있었다 하고요.
신학림 특히 삼성의 경우 정계, 정치인, 경제 부처를 비롯한 정부 고위직, 금감원, 검찰, 경찰, 국세청 등을 전부 평소에 관리한다고 했죠. 그렇다면 이런 관리를 삼성만 했을까요? 그런 시스템이 사실상 국가나 정부 정책의 입안에서부터 시행까지 여러 단계에서 작동한다, 그것이 위험한 수준이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이원재 아까 송교수님이 말씀하셨다시피 재벌 사이에도 차이가 크다보니 삼성 지배구조 문제 해결처럼 어떤 하나의 재벌개혁정책을 추진하기가 애매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역설적으로 이제 지배구조를 중심으로 재벌 문제를 논하는 게 어쩌면 시효를 다한 면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럼 어디에 집중해야 할 것인가 했을 때 저는 업종규제가 무척 중요해졌다는 생각입니다. 가령 반도체 만드는 대기업이 반도체 팔아서 이윤을 많이 남기는 것 자체에는 일단 문제가 없습니다. 거기서 낙수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요. 이 기업에서 노동 문제가 불거진다면 그건 노동정책으로 해결할 일이고, 이 기업이 성장하면서도 고용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복지 차원에서 접근할 일이지 재벌대책으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지금 구조에서 더 큰 문제는 반도체 팔아서 번 돈의 일부로 예컨대 빵집을 열어서 기존에 빵집 하던 사람들이 망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이런 건 재벌들이 지배구조를 지키기 위해서 관료를 매수한다거나 하는 문제와 다른 차원이라고 봐요. 그런 면에서 업종규제, 예를 들면 글로벌 기업과 내수 로컬 기업 사이에 어떻게 벽을 쳐서 산업을 배분할 것인지 등이 중요합니다. 또 금융과 관련된 대책도 필요합니다. 금융권에서 글로벌 대기업에 펀딩하는 데 쓰이는 자본을 어떻게 하면 새로 창업한 기업이나 자영업자에게 지원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두가지가 지금 가장 중요한 정책이라고 봅니다.
신학림 중요한 지적입니다. 업종규제, 달리 말하면 업종 전문화는 진작 했어야 할 일이고 더 늦으면 내수에도 악영향을 많이 줄 거예요. 우리나라에 지금 골목상권이라는 게 없습니다. 편의점을 예로 들면, CJ의 CU, 롯데의 세븐일레븐과 바이더웨이, GS의 GS25, 이렇게 3개 재벌이 가진 4개 체인이 전체 편의점 점포의 80퍼센트를 차지합니다. 사실은 이제 CU 편의점은 홍석현 형제 소유거든요. 이쪽도 어떻게 보면 범 삼성 가족인데, 앞서 말씀드린 바와 연관 짓자면, 홍석현 형제가 소유·지배하고 있는 중앙일보와 보광그룹도 애초에 총 자산이 2조원 넘는 기업집단군에 속해 있었어요. 그러다가 기업집단군에 대한 총자산 기준을 높이는 바람에 빠진 거죠. 여전히 사실상의 기업집단군, 즉 재벌이나 다름없어요. 계열사가 100개가 넘거든요. 게다가 신세계 이마트가 위드미로 편의점 시장에 들어왔어요. 이런 식으로 재벌들이 골목상권에 아무런 제한 없이 들어오는 걸 방치한 채로 어떻게 내수를 더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송원근 저도 말씀에 동감하지만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은 여전히 일순위 과제입니다. 재벌 3세, 4세들한테 이미 부가 막 갈라져서 가 있어요. 통계를 보면 이 사람들 중 이사로 등재돼 있는 비율이 6퍼센트 남짓밖에 안 돼요. 등재 안 하고 책임 안 지면서 수익은 극대화하려다보니 빵집처럼 아주 손쉬운 데로만 가려는 거거든요. R&D(연구개발)에 노력하고 리스크를 감당하면서 진출하는 방식이 아니라요. 예전에는 예를 들어 이병철 회장이 밑에 나눠준 계열사들 하는 업종이 비슷하면 총수로서 조정하기도 했는데 요즘에는 삼성뿐 아니라 모든 그룹에서 3세, 4세들이 나눠 가진 계열사들의 사업을 조정 못해준단 말이죠. 그럼 어떻게 직접 규제하느냐가 중요한 과제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책임경영을 하도록 시장을 통해 규율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다음으로 잘못을 저지르면 정부가 벌을 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런 역할까지 폐기해버리면서 오늘날에 이른 건데, 이제는 아예 누구도 규제할 수 없는 거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는 실정이죠. 지역을 보면 이미 재벌기업들이 상권을 다 장악하고 있어요. 이런 구조를 바꿔야 합니다.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한다는 차원에서 도입된 지주회사제도가 오히려 총수의 합법적인 지배를 보장하고 묵인하는 기능을 해요. 다시 강조하지만 총수의 지배력을 견제하려면 순환출자 금지를 강화하고 계열분리 명령제나 기업분할 명령제를 도입하는 수단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들은 ‘을’이 아니다
이일영 이원재 이사님은 경쟁에도 구획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골목에 대기업은 못 들어오게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걸 강조하셨고, 신대표님도 비슷한 입장입니다. 반면 송교수님은 적은 지분을 가지고서 계속 영역을 확대해가는 메커니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시면서 그에 대응할 정책을 강조하셨고요. 강조점은 조금 다르지만 공통적으로는 재벌 견제에 대한 정부 역할을 말씀하셨는데, 그간 보수정부하에서 정책이 지나치게 재벌 프렌들리 쪽으로 치우쳤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이명박정부의 법인세 인하 조치가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조치인 것 같고요. 최순실 사태를 보면, 재벌도 비선실세(정치권력) 앞에 ‘을’이었다는 분위기가 있지만, 꼭 을의 입장만이 아니라 그런 상납을 통해 상당한 혜택을 누린 면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K스포츠재단의 회의록에서는 기부금과 세금을 교환하는 식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세금은 국가가 쥐고 있는 권력이자 정책수단인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신학림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습니다. 이번에 최순실 가족한테 돈을 갖다 바친 재벌들에게 반대급부가 있었거나, 아니면 재벌들이 이번에 제공한 돈보다 몇십배 이상의 이득을 챙겨갔을 거라고 봅니다. 상당한 정황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원재 기업은 철저하게 이익을 좇아 움직입니다. 권력이 위협한다고 해도 이익이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권력의 요구를 받을 때마다 그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이후에 얻을 이익을 적극적으로 계산하고 판단해 의사결정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이건 과거 개발시대에도 마찬가지였지요. 당시의 초기 재벌들은 공장 건설 위치를 지시받을 정도로 정부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런 종속적 지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했던 거예요. 이게 정경유착의 본질입니다. 삼성만 해도 국민연금의 인수합병 관련 투표, 노동개혁 의제 등 기업지배구조를 직접 뒤흔들 수 있는 정책이슈들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롯데처럼 수사를 받던 재벌들은 말할 것도 없겠죠.
송원근 조세정책은 정부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어떻게 잘 운영하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 있다고 봐요. 예를 들면 법인세를 인상해야 한다고 하지만 단순하게 접근하지 말고 촘촘하게 차별화된 정책을 써야 합니다. 지금 법인세율이 지방세를 포함해 24.2퍼센트 정도 되는데,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의 실효법인세율은 16~17퍼센트밖에 안 됩니다. 이명박정부 때는 이보다 더 낮았고요. 이리저리 면세해주면서 세율 올려봐야 별 효과가 없습니다. 일감 몰아주기로 수익을 많이 낸 법인에는 더 높은 법인세율을 적용한다거나,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가 『자본주의를 구하라』(한국어판 김영사 2016)라는 책에서 제시한 것처럼, CEO와 일반노동자 사이에 급여 차이가 많이 나는 기업, 하청기업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를 많이 고용하는 기업에 대해 높은 세율을 적용하는 방안 등을 참고할 만합니다. 이런 것은 정부가 크게 작심하지 않고도 실시할 수 있는 정책 아닌가 싶습니다.
이일영 그렇게 정부가 재벌에 대해서 제대로 역할을 하려면, 정부를 둘러싼 세력이 환경을 만들고 압력을 가해야겠죠. 권력과 재벌, 법조계와 재벌의 유착에 대한 논의가 많습니다만, 언론 쪽은 어떤가요?
신학림 이 문제에 관한 한 언론이 작동 안 된다는 것은 단호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SNS 영역의 가능성이 있지만 전통적 개념의 언론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한겨레, 경향신문을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도 광고주 삼성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일단 신문기업의 경우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문을 잘 안 읽습니다. 신문 발행부수가 20년 전과 비교해 3분의 1로 줄었어요. 그러면서 모든 신문사에 생존이 지상과제가 됐어요. 그러니 광고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요. 일본 아사히신문의 경우 구독료 수입과 광고 수입이 50대 50입니다. 우리나라는 5대 95예요. 어느 신문사나 예외가 없습니다. 그리고 광고 자체만 봐도 옛날에는 ‘벼룩시장’이나 ‘사람을 찾습니다’ 같은 자잘한 광고들의 비중이 꽤 됐는데 지금은 최대광고주 몇개 업종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자·IT, 자동차, 아파트·상가 분양, 여기에 교육시장 광고 약간. 결국 이들 업종에 있는 재벌들이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신문사를 다 먹여 살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기자들이 알아서 자기검열하는 겁니다. 방송의 경우도 크게 다르진 않지요. 국가가 가진 지상파는 논외로 하더라도 케이블부터 종편까지 수백개 채널이 있으니.
이일영 그러니까 딱히 재벌이 포섭했다기보다는 언론산업 기반이 무너진 게 결정적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미디어오늘 예산은 충분한지 모르겠습니다.(웃음)
재벌을 넘어설 대항력, 어디서 찾을까
이일영 말씀들을 듣다보니 결국 정치의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해외의 경우를 돌아보면, 크루그먼( P. Krugman) 같은 사람도 어쨌든 문제는 정치라고 합니다. 라이시는 ‘대항력’이라고 표현했는데, 미국에서 기업지배구조가 분산되고 전문적인 형태로 기업이 발전하는 방향으로 기본제도가 형성됐던 것도 그런 대항력을 가진 반독점세력들이 정치적으로 존재했던 게 큰 기반이 됐습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 시대도 그렇고 그뒤의 뉴딜정책도 그렇고, 미국에서 진보의 시대를 연 게 그런 힘들이었지요. 최근의 주류에 대한 분노나 소위 트럼프( D. Trump) 현상 같은 건 그게 무너진 결과입니다만. 미국뿐 아니라 독일의 경우에는 노동세력이 있어서 경영참가, 노사공동결정제도 같은 것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일본은, 자체적인 힘은 아니었습니다만 미 군정이 재벌을 해체하도록 했지요. 결국 그럼 우리도 무언가 대항력을 갖춰야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마무리 발언을 겸해 그런 걸 어디서 찾아야 할지, 중요하다고 보시는 지점을 짚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원재 세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로, 개인의 권리를 되찾아주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재벌 대기업에 대한 대책을 논할 때 보통 노동조합이 중요하다거나 경영진 견제를 강화한다거나 하는 방식을 많이 얘기하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정보에 대한 접근권을 소비자나 투자자 개인에게 훨씬 강력하게 주는 방안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옥시 사건 같은 것이 벌어지면 소비자가 기업에 정보를 요청해서 받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물론 거기에 그쳐선 안 되고, 개인이 민사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힘이 모자라니까 같이할 수 있도록 집단소송제를 도입해야 하고요. 이런 식으로 개인의 권리를 강화하는 방안들을 재벌 대기업들에 대한 대항력으로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년이나 비정규직처럼 집단적으로 뭘 하기가 어려운 이들에게는 더구나 이런 방식이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개인주의적인 정서에도 잘 맞는 것 같고. 둘째로, 이미 플레이어로 자리 잡은 대기업들에 비해서 훨씬 취약한 상태에 있는 경제행위자들이 있잖아요. 협동조합이라든지 갓 창업한 벤처기업, 사회적기업처럼요. 이런 곳은 지원이 필요한데, 저는 그걸 투자로 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과거에 중소기업은행이나 산업은행이 있었던 것처럼 사회투자를 하는 국책은행을 만드는 식으로 대대적 투자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거죠. 서울시에서 사회투자기금이라는 이름으로 시도하고 있기도 한데요. 은행들이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성과가 나는 일에 투자나 대출을 해주는 분위기가 지금은 안 되거든요. 금융감독 기준을 달리해주는 제도로 투자를 이끌어낼 필요도 있고요. 마지막으로 복지 측면인데, 청년수당이나 기본소득처럼 소득을 만들어주는 복지도 있을 수 있고, 무상의료나 무상교육처럼 비용을 줄여주는 복지도 있지요. 투자가 적극적 의미라면, 복지는 어느 쪽이든 소극적 의미이긴 하지만 개인이 기존 구조에 포섭되지 않고 대항할 힘을 줄 수 있습니다.
신학림 저는 우선 지방자치를 중요하게 봅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복지예산을 많이 삭감했잖아요. 심지어 노인정 난방비 지원 예산까지. 반면에 진보적인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청년수당제도처럼 중앙정부와 다른 정책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이 궁핍해지니까 지역에서 조그만 공동체도 생기고 마을기업도 생겨나는데 이런 움직임들은 도외시한 채로 지방정부가 뭘 좀 하려 하면 중앙에서 태클을 건단 말이죠. 사실은 정부가 하는 일 중에서 각종 인허가 사항부터 복지와 서비스 등에 이르기까지 약 80퍼센트는 지방자치단체가 제공하고, 중앙정부는 20퍼센트밖에 못하는데, 예산은 중앙정부가 80퍼센트를 쥐고 있고, 지방정부는 20퍼센트 정도 밖에 못 써요. 그것도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에 지원하는 지방교부세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지방정부를 사실상 예속시키고 있는 실정이지요.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지방정부가 중앙정부에서 시키는 대로만 할 수밖에요. 내수시장을 비롯해서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려면 이제 지방자치제도를 명실상부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람의 문제입니다. 우선 우리나라 관료의 부패가 대단히 심각한 지경입니다. 고위공직자들이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어요. 저는 이게 한국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도 미디어오늘 대표이사로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지금껏 노동과 노동자라고 하는 요소가 제자리, 제값을 인정받은 적이 없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가 지불해야 하는 기회비용의 많은 부분, 지금 계속되는 철도파업만 해도 그런데, 이런 사태의 상당부분이 노동을 제자리에 놓지 않은 잘못된 정책으로 야기된 것이다, 경제가 도약하기 위해서라도 노동과 노동자가 제대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런 가장 기본적인 것들부터 한국사회가 들여다봐야 한다는 거죠. 재벌이 투자나 생산성 제고보다는, 고용 유연성과 비정규직 전환, 하청기업화 등으로 인건비를 줄이고 노동자가 희생하는 것을 전제로 이윤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정치경제 시스템이 작동해온 겁니다.
송원근 재벌을 넘어선 대항력을 말하기 전에 우선 전제되어야 할 것으로 ‘공적(公的)’이라는 개념에 대한 인식이 더 분명하게 확립되고, 확대되어야 한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주식회사는 아주 공적인 존재입니다. 공적이라는 것은 책임을 같이 진다는 뜻이기도 하죠. 현재의 재벌기업들이 형성된 것은 재벌 총수들과 그 일가의 전횡과 무책임을 우리가 묵인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저도 이원재 이사님이 말씀하신 개인의 권리를 더 키우자는 주장에 동의하지만, 개인이 힘을 가진다고 바로 공적 권력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미국을 보면 소비자들 권력이 커지니까 다른 한편으로는 월마트 같은 유통권력도 커졌거든요. 소비자 주권이 생겼다고 해서 시민권이 살아나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개인의 권리에서 더 나아가 시민권 개념이 확립되려면 또다른 공론의 장이 필요합니다. 기본소득이나 청년배당 같은 것을 논의하고 시행하는 것도 의미있는 시도라고 봐요. 이런 공론의 시도를 정치권에서 받아줘야 하는데 기성 정당에서 그게 안 되고 있어요. 미국도 민주당이나 공화당 모두 그런 요구를 받아주지 못하기 때문에 대선을 치러야 하는 미국 유권자들이 현재 굉장히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라고 저는 보거든요. 우리도 비슷하죠. 이런 측면에서, 여러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조직된 노동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재벌집단에 대한 대항력으로서 그룹공동결정제도나, 중소기업 간 담합을 어느정도 인정해주는 제도 등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대항력을 형성하려면 재벌이 지배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금융권력을 어떻게 통제하느냐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예전에는 개인들이 낸 고객자산을 왜 재벌들이 계열사 확장하는 데 쓰느냐 하는 지점이 주로 문제였는데, 이제는 금융산업 자체가 엄청나게 발전하면서 대항세력의 경제력을 형성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게 더 문제적인 지점으로 대두됐다 생각합니다. 금융업 전체를 사실 재벌 계열사 몇개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대응이 더 힘들어지는 구조로 가고 있어요. 특히 삼성생명의 자산만 해도 전체 보험자산의 4분의 1 정도 되고, 삼성계열사들로부터 받은 일감 몰아주기로 모은 퇴직연금 규모도 크거든요. 앞에서 금산분리 얘기가 안 나와서 강조하고 싶네요. 또 사회적 경제 영역 활성화를 위한 금융지원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서울시나 성남시 같은 데서 세금 아끼고 해서 그런 재원을 마련한다는데 그러려면 아까 이원재 이사께서 말씀하셨던 사회투자가 가능한 은행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미국 노스다코타 주의 퍼블릭뱅크 같은 걸 고민해야 한다는 건데, 정부가 지분을 다 가지고 있어서 지역에 투자하고, 고용도 늘리는 이런 은행 사례가 국내에도 보도됐습니다. 그런 것을 하려면 금융산업이 독점화된 지금의 구조를 깨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일영 공통되는 지점이 있지만 묘하게 강조점이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세분 말씀 중에 제 귀에 쏙 들어오는 대항력의 키워드는 개인, 지방, 공공입니다. 이 단어들이 서로를 반박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방식으로 정리해보면, 현재는 약탈의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는데, 이를 균형적인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약탈의 시스템은 갑을관계를 만들어 지대와 이권을 수취하는데, 여기서 재벌이 큰 역할을 합니다. 갑을관계, 지대수취관계, 약탈관계에서 벗어나려면 균형을 맞추려는 대항력이 필요한데, 그 대항력을 가질 수 있는 영역이 선생님들이 말씀해주신 개인, 지방, 정부나 정당 등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항력이 제대로 힘을 쓰려면 뒷받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게 공적자산이라고 봅니다. 이걸 어떻게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중소기업이건 소상공이건, 중앙정부건 지방정부건, 복지가 됐건 기본소득이 됐건 공적자산이 있어야 균형을 잡는 투자를 할 수 있습니다. 이 공적자산에는 물적 재원은 물론 윤리나 도덕적 자산도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세분과 대화하면서 여러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장시간 감사합니다. (2016.10.27.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