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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해방/종전 70년,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
임형택 林熒澤
성균관대 명예교수. 민족문학사연구소 공동대표, 실학박물관 석좌교수 등 역임. 최근 저서로 『한국학의 동아시아적 지평』 『21세기에 실학을 읽는다』 등이 있음.
미야지마 히로시 宮嶋博史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특임교수, 토오꾜오대학 명예교수. 저서 『일본의 역사관을 비판한다』 『나의 한국사 공부』 등이 있음.
백영서 白永瑞
연세대 사학과 교수, 창비 편집주간. 최근 저서로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 『사회인문학의 길』 등이 있음.
백영서 무더위에 어려운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두분을 모신 대화를 어떻게 준비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미야지마 선생님께서 임형택 선생님이 작년에 내신 두권의 책에 대한 긴 서평논문을 본지에 쓰셨죠(「근대극복의 실학연구란 무엇인가: 학인(學人) 임형택, 그 배움의 궤적」, 『창작과비평』 2014년 겨울호). 임선생님의 학문적 업적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은근한 비판을 곁들인 격조있는 글이었습니다. 나중에 두분이 더 깊이있는 논의를 할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고, 격의없는 학술적 토론의 장을 만들어서 독자들께 선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만 그것이 오늘의 현실 문제를 보는 데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그리고 학술적·사상적인 문제를 둘러싼 토론이 너무 어렵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한편으로 듭니다. 그런 걱정 속에서 돌아보니까 올해가 아시다시피 종전 70주년, 또는 한국에서 쓰는 용어로 하면 해방 70주년이고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 50주년입니다. 이런 중요한 역사적 계기도 있는 만큼 학술적·사상적인 문제의 토론이 결국 오늘의 현실 문제를 바라보고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다시 세우는 데도 어떤 암시를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서 이 좌담을 열게 됐습니다.
한일관계는 요즘 아주 나쁜 상태에 가 있죠. 한일 언론의 공동여론조사에 의하면, 상대방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최악의 상태가 됐다고 해요(한국일보 2015.6.9. 참조). 다들 실감하듯이, 동아시아에서는 경제 영역의 상호의존이 심화되는 것과 달리 정치·안보 영역에서 국가주의가 위세를 떨치는 불일치를 보이고 있지요. 그와 중첩되어 정체성의 영역에서 집합적 역사기억의 유산이 작동하고 있어 커다란 혼동을 겪고 있어요. 더욱이 그 혼동이 지역 밖의 미국에 의한 균형잡기로 유지되고 있으므로 이런 지역구조를 동아시아 국가들은 각자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계산해서 현상을 타파하려 나서지 않는다고 해요. 그래서 특히 역사와 영토를 둘러싼 분쟁, 그리고 상호불신은 날로 커지고 거세지고 있지요. 이런 우려스러운 상황에 처한 만큼 오늘의 한일관계에 대한 인상이나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먼저 간단히 말씀 듣고 본격적인 얘기를 풀어가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해방/종전 70년, 동아시아 지식인의 현주소
임형택 종전과 함께 해방을 맞은 지난 70년 이래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돌아보면 한마디로 말해서 외형적인 반일, 내면적인 친일의 구도를 그려왔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재 악화된 양국관계는 지금까지 쭉 그려왔던 그림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다만 중국의 전지구적 부상이 현 상태를 초래한 근본요인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종래와 같이 볼 수 없겠지요. 옛날 우리 조상들은 중국을 가리켜 대국(大國)이라고 불렀습니다. 중국이란 나라는 우리와 아주 가까이에 거대한 위협적 존재로 있었을 뿐 아니라 전지구적으로도 상대가 없는 대국이었던 것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그런 중국이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말에 이르는 동안에 형편없이 쇠퇴해서 서방세계와 일본에 유린당했던 것 또한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21세기로 들어오는 이 지점에 거대 중국으로 다시 돌아온 꼴이지요. 이에 따라 세계질서의 재편이 일어나는 중인데,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역사적으로 긴밀한 동아시아의 중국과 한국과 일본, 세 나라가 상호관계를 어떻게 진전시킬 것인가 하는 중대한 기로에 지금 서 있다고 봅니다. 아마도 현재 한일 간의 악화된 관계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다시 또 내면의 친밀한 관계로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본다면 지금은 미봉을 하고 넘어갈 때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근원적인 성찰, 역사적 반성이 필히 요망되는 때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사고하고 인식함에 당해서는 주체적 자세가 필수요건이지만 동시에 역지사지를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일본인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는 미야지마 선생의 고견을 듣게 되어 매우 소중한 기회라고 하겠습니다.
미야지마 제가 일본에서 서울로 직장을 옮긴 2002년은 한일월드컵 공동개최가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한일관계가 어느 때보다도 제일 좋은 상태였다고 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앞으로도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만 현실은 반대로 점점 나빠졌습니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만 지금까지 십몇년 동안 계속 나빠지는 것을 보면 쉽게 해결하기 힘든 문제로서,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임선생님은 주로 세계질서 같은 객관적인 상황 속에서 한일관계의 현실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저는 한편으로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양국 지식인들의 책임도 상당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80년대말에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일본에서는 맑스주의의 영향력이 크게 쇠퇴했는데 특히 일본 역사학계는 맑스주의의 영향이 아주 컸기 때문에 그후 일본의 역사학계 전체가 표류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 상황 속에서 현실에 대항하는 비판적인 의식, 그리고 일본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보려고 하는 연구들이 많이 약해졌다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에서도 80년대 후반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 지식인들이 방향상실이라고 할까요, 민주화된 이후 한국사회가 장기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제시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졌습니다. 민주화 이전에 한국의 지식인들이 현실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면서 그런 현실 문제와 연구가 아주 깊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지식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는데요. 민주화 이후 일본도 한국도 지식인들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이 약해지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이른바 내셔널리즘이 점점 커지게 됐고 그것에 대해 적실하게 비판할 수 없는 상황이 오늘날의 한일관계를 이렇게 악화시킨 큰 원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백영서 임선생님은 객관적인 동아시아 질서 변화의 중요성을 말씀하셨고 미야지마 선생님은 한일 양국 지식인의 주체적인 역할을 지적하셨는데요, 미야지마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창비’의 역할을 되돌아보게 되고 오늘의 대화가 갖는 의미의 핵심도 그쪽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한일 양국 지식인들이 더이상 비판의식을 유지하기 힘든, 즉 비판의식을 끌고 가는 동력을 약화시키는 데는 지식인들의 사고를 규정하고 있는 패러다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미야지마 선생님이 서구 중심적인 역사인식이야말로 한일 역사인식의 대립을 낳는 요인이라고 쓰신 글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과연 그런 건지, 또 그게 양국의 이른바 비판적인 지식인한테도 여전히 적용되는 건지 궁금합니다. 특히 한국의 비판적인 역사학자나 지식인에 대한 경각, 경고의 의미도 담으신 것 같은데요.
서구중심성을 넘는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
미야지마 서구 중심적인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안된다는 생각은 학계에서도 공통된 시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제일 큰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일본과 한국의 지식인들이 아까 말씀드린 상황에 놓이게 된 큰 원인 중의 하나가 역시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 되는지, 어떤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되는지가 불분명하고 애매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요새는 아마 한국도 그런 것 같습니다만, 큰 패러다임에 대해 토론하는 것 자체를 기피한다고 할까요. 그런 자리 자체가 별로 없고 학술논문에서도 개별 실증적인 연구가 대부분입니다. 제가 ‘유교적 근대’라는 개념을 제기한 것도,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를 떠나서 아무래도 서구중심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해 활발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려면, 아까 임선생님도 지적하셨습니다만, 중국을 어떻게 보는가가 하나의 핵심적인 주제로, 지금까지의 중국, 지금의 중국, 미래의 중국을 어떻게 보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서구중심적인 패러다임으로는 중국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는 중국의 위치가 아주 중요하다는 겁니다.
백영서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얘기인데 그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해체주의에 그치고 있죠. 그럼 그다음에 무엇을 세울 거냐에 대해서는 얘기를 잘 안하는 분위기라고 지적하신 데 저도 동의하는데, 그에 반해 중국 지식계에서는 요즘 오히려 큰 얘기를 하고 있어요. 중국모델론뿐 아니라 새로운 보편성, 대안적 보편성을 찾아보고 싶다는 거죠. 한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그런 논의가 적은 편이죠. 독자인 제가 보기에 두분 선생님은 그 나름대로의 대안적 보편성이랄까 패러다임을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전통사상 속에서 찾아내서 부각하려는 노력을 하고 계신 것 같아요. 미야지마 선생님은 동아시아적 근대, 유교적 근대, 그리고 중국적 근대와 통한다고 보이는 일련의 체계를 소농사회라는 물적 기반 위에서 세우려 하셨고, 임선생님은 신실학(新實學)이라고 해서 실학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하셨으니까 그런 걸 점검하는 가운데 필요할 경우 중국과 비교해보면 한결 생산적인 논의가 될 것 같습니다. 먼저 임선생님의 그동안의 학술적인 성과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실학을 둘러싼 논의로 얘기를 옮겨볼까 합니다.
실학을 새삼 지금 얘기한다는 것은 한국 학술계의 지형에서 보면 소수의 의견이 아닌가 싶어요. 실학이라는 게 보통명사냐 역사적 개념이냐 하는 논란이 있는데요. 실학은 말 그대로 헛된 학문이 아니고 쓸모있는 학문이라는 뜻인데 그동안 한국 학계에서는 실학에 특별한 의미를 둬왔단 말이에요. 보통명사가 아니고 역사적 개념으로 써왔는데, 임선생님도 어느 글에서 말씀하셨지만 ‘실학을 무화하려는 여러 학술공작에 맞서서 외롭게 싸워’오셨다고 얘기할 수 있지요. 여기서 실학 개념과 그 의의에 대해 잠깐 짚어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지금, 실학을 다시 고민하는 까닭
임형택 사실 실학이 보통명사인지 역사적 개념인지는 백선생 말씀처럼 논의할 필요도 없는 문제입니다. 역사적 개념일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임이 물론이죠.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실학은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일어난 새로운 학풍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유독 한국에만 존재했던 게 아니고 동시기 중국, 그리고 양상을 좀 달리해서 일본에도 공존했습니다. 중국의 경우 명대에서 청대로 넘어오면서부터 발달한 학문인데 고거학(考據學, 고증학) 혹은 실사구시 학풍, 흔히 박학(樸學)이란 말로 일컬었던 겁니다. 우리의 실학과 기본적으로 성격이 상통하는 것인데 이를 실학이란 개념으로 파악하지는 않았지요. 그러다가 근래 실학이란 개념을 도입해서 『명청실학사조사』(전3권, 齊魯書社, 1988~89) 같은 책도 발간됐지요. 일본도 대략 비슷해서 주로 고학파의 학문에 실학 개념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아시아실학이란 개념이 성립하게 되는데 한국학술사에서 세운 인식틀이 중일 양국에 도입된 셈입니다. 문제는 중국 학계와 일본 학계에선 실학이란 용어가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폐기할 것이 아니고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실학이란 인식틀을 적용해서 연구하고 이론화하는 학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백영서 1960년대 후반 학계가 부각한 실학을 일반인들도 관심 갖게 만든 데는 창비의 역할이 컸죠. 창비가 1967년 여름호부터 관련된 글을 계속 실었으니까요. 그때 그렇게 했던 중요한 이유는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사관을 정립하는 시대적 과제를 선도하려 한 것이지요. 그 핵심이 한국사의 타율성과 정체성(停滯性)을 비판하고 내재적 발전론을 주장하는 것인데 사상사적 차원의 노력이 일제하 1930년대 조선학운동에서 발굴한 실학을 불러낸 거예요. 그런데 60년대 후반부터 80년대까지 진행했던 방식의 논의가 아니고 그것의 연장이자 발전된 형태로 21세기인 지금에 실학을 다시 얘기할 필요가 있다면 꼭 짚어봐야 할 쟁점 중의 하나가 내재적 발전론과의 관련성일 테지요. 이 문제는 미야지마 선생님과의 토론의 여지도 있는 쟁점일 겁니다.
또 하나의 쟁점은 과연 그것이 동아시아 삼국에서 그 당시에 동시에 나타났다고 파악하는 것이, 즉 선생님이 말씀하신 이른바 동아시아적 실학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이고,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신실학’이라고 하는 게 지금 21세기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얘기할 때 얼마나 필요한 자원일까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첫째 쟁점인 내재적 발전론과 관련해서는, 그 당시 다분히 근대지향적이었잖아요. 그런데 지금 선생님이 신실학 얘기하실 때는 탈근대 지향까지 아우르는 건데, 그런 쟁점을 갖고 얘기하면 좀더 이야기가 풀려가지 않을까 싶어요. 이에 대해서는 미야지마 선생님이 먼저 말씀해주시죠.
미야지마 저는 실학 연구에서 한가지 문제점이 유학과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실학 연구가 시작됐을 때 지금 백선생이 지적하신 대로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의 시각과 깊은 관계를 가지면서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유학이라는 것이 극복대상으로 인식되었고, 실학도 유학을 극복할 가능성을 가진 사상으로서 주목받게 된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저는 전부터 유학이 정말 극복대상인지, 유학을 극복해야 근대가 가능한지 하는 면에 있어서 실학 연구에 대해 좀 회의적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데, 최근의 젊은 연구자들 중에는 실학도 유학이다 성리학이다, 그렇게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유학이라는 것이 그러면 무엇이고 실학은 유학의 어떤 부분을 비판해서 극복하려고 했는지가 애매하고요. 특히 유학사상의 철학적인 부분이라고 할 경학(經學)이 유학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되는데, 실학이 성리학의 경학을 어떻게 파악했는지, 유학과 실학의 관계에 대해서 임선생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임형택 실학을 유학과 분리해서 인식하려는 견해들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유교는 근대화의 장애물이다, 또 심지어는 유교 때문에 우리가 망했다는 의식이 실학 인식과 결부돼서 실학은 유학과는 다른 것이라는 식으로 나아갔죠. 물론 모두가 그랬다고는 볼 수 없지만 주류적인 논리는 탈유교·반유교적인 방향에서 실학을 파악하려는 견해였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저는 기본적으로 실학도 유교의 한 양상이라고 봅니다. 유학사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변화된 시대의 요구에 응답해서 실학이라는 신학풍이 대두한 겁니다. 유학은 근본성격이 치국·치민, 그리고 평천하에 달려 있습니다. 이를 떠나서는 유교가 설 자리가 없거든요. 요컨대 17세기 이래 당면한 시대현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이 다름 아닌 실학입니다.
백영서 이쯤에서 독자를 위해서 용어를 정리하고 들어갔으면 싶어요. 실학, 성리학, 유학, 이 세 층위를 어떻게 가를지. 선생님께서는 은연중에 성리학과 유학을 같이 보고 말씀하신단 말이에요.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서는 유교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그런데 중국에서는 유교라는 말보다는 유학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유학이 관학화(官學化)되거나 종교화된 형태를 유교라고 하는 경향이 있지요. 유학과 유교의 구별은 학술적 논란의 대상이니 접어두더라도 말씀 중에 성리학과 유학, 실학의 관계에 대해 다듬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임형택 유학이나 유교는 내나 같은 말입니다. 현대 중국은 종교를 내심 탐탁잖게 여기기 때문에 유교란 말을 기피하는 듯싶네요. 유학은 전체를 통괄하는 개념인데, 역사적으로 구분하자면 고전유학이 있었고 이후 12, 13세기를 경과하면서 성리학이 등장하며, 17세기로 내려와서 실학이 등장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성리학에 관한 용어 문제도 언급해두지요. 성리학은 이학(理學), 주자학 혹은 정주학(程朱學), 송학(宋學) 등 여러가지로 부릅니다. 성리학이나 이학은 철학적인 면을, 주자학 혹은 정주학은 창도한 학자를, 송학은 성립된 시대를 지칭하는 것인데 가리키는 대상은 다 같습니다. 성리학을 ‘신유학’이라 한다면 실학은 ‘개신유학’이라 불러도 좋겠습니다.
방금 미야지마 선생이 제기하신 문제의 하나는 성리학과 실학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경학을 어떻게 볼 것이냐지요. 성리학은 실학의 기반입니다. 그 비판적 극복의 결과물이 실학이라고 정리해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 경학에 대해 언급하지요. 한국학술사에서 중요한 사실의 하나는 17세기 말경에서 18~19세기에 이르는 동안에 경학의 저술이 무척 많이 쏟아집니다. 방대한 경학저술을 대략적으로 구분하자면 주자의 경전해석 틀에서 추구된 경학과 그렇지 않은 경학, 이렇게 양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주자학적 경학과 탈주자학적 경학이지요. 실학자들 또한 경학에 학적 관심을 기울이는데 대체로 탈주자학적인 성격을 띱니다. 주자의 경전해석을 당연히 존중하되 여러 경전해석 중의 하나로 상대화시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필독서로서 가장 널리 읽었던 책이 사서삼경(四書三經)이지요. 사서삼경은 주자의 해석을 표준으로 삼은 것이었고요. 주자의 해석까지 아울러 경전적으로 대하게 된 거예요. 그런 주자의 경전해석을 상대화한 태도는 그야말로 사상적 반역입니다. 이런 실학적 경학의 성과를 이룩한 학자로서는 성호 이익(星湖 李瀷)이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을 들 수 있겠는데 비판적인 경전해석을 통해서 자신이 실현하고자 하는 국정개혁, 사회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셈이지요. 사실 경전이란 게 뭡니까? 공자를 비롯한 옛 성현들의 실천과 말씀이 담긴, 그야말로 고대적이고 고전적인 것이잖아요. 실학은 경전에 이론적 근거를 삼았다는 측면에서 상고주의(尙古主義)입니다. 곧 복고주의인데 르네상스가 그랬던 것처럼 주자학에 대한 극복적 의미를 갖고 있죠.
주자학적 근대의 구조, 변혁사상인 실학의 주체
백영서 말씀 들으면서 생각나는 게, 저도 이 대목을 강의할 때는 늘 그렇게 얘기하거든요. 기독교에서 원시 기독교의 복음서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다양한 신학사조가 나오잖아요. 그 급진적인 형태로 해방신학까지 나왔던 것처럼, 늘 옛날로 돌아가서 새롭게 해석을 하는데 그때 상고사상의 ‘古’라는 것은 이상으로서의 옛날이겠죠. 자연 그대로의 옛날이 아니라. 그러나 그렇게 정리하더라도 역시 두분의 견해 차이는 있는 것 같아요. 주자학에 대한 이해 차이 말이죠. 미야지마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동아시아 근대는 곧 유교적 근대이고 유교적 근대의 핵심은 주자학에 대한 해석이잖아요. 반면 임선생님이 개신유학이라고 하신 것은 탈주자학이고요. 그 점에서는 확실히 차이가 있어 보이는데 미야지마 선생님이 말씀 이어주시면 쟁점이 분명해질 것 같아요.
미야지마 어려운 문제입니다. 아까 유학과 실학의 관계가 애매하다고 했는데, 조선 후기의 사상가나 학자 중에서 보통 실학자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쪽이 오히려 수적으로는 압도적으로 많죠. 주자학적 틀 속에서 경학을 연구했던 방대한 문헌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쪽에 들여다볼 것이 정말 없는지, 또한 그보다 조금 앞 시대입니다만 퇴계 선생 같은 분의 성리학은 어떻게 볼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퇴계 선생의 학풍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유학사상, 물론 그게 주자학 틀 속에서의 경학이라고 할 수 있지만 거기에 뭔가 새로운 부분이라고 할까요, 실학 연구자들이 그런 부분에 대해서 전혀 연구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정말 의미가 없었는지, 무시해도 되는지……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임형택 실학이 다인가 또는 좁혀서 실학이 그 시대에 주류적인 학문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했는가? 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봅니다. 실학은 당시 상황에서 실제로 소수자죠. 그럼에도 실학을 부각시켜 의미를 크게 잡은 것은 대면한 시대, 즉 17세기에서 19세기의 상황을 심각하게 고려해섭니다.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대륙의 명청 교체, 일본열도의 에도막부 등장 같은 큰 변화가 일어났던 터인데 시야를 전지구적으로 돌려보면 서세동점의 물결이 파고를 높여서 밀려듭니다. 당시의 동아시아를 저는 ‘흔들린 조공체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조선이 처한 현실에서 이런 정세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개혁논리가 절실히 요망됐습니다. 이것이 실학이 등장한 배경입니다. 정통 성리학은 보수적인 노선을 고집해서 시대의 요구에 답하는 담론을 생산하지 못합니다. 성리학은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의미를 찾기 어렵게 된 것이지요. 그럼 실학 이외의 학문들은 아주 거들떠볼 것도 없느냐 하면 저는 절대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당시 여러 경향의 학적 성과를 두루 파악하고 깊이 연구해서 사상의 지형도를 그려내야 합니다. 가령 경학의 성과를 두고 말하더라도 외형적으로 주자 경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해도 그런 가운데 오히려 창조적 고뇌가 서려 있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실학을 특권화할 일은 아니고 균형을 잡아 전체를 아우르는 시각을 열어야지요. 저 자신 지나치게 실학 위주로 보아왔다는 혐의가 없지 않다는 반성을 하기도 합니다.
백영서 임선생님이 어느 글에서 사용하신 용어로 제가 바꿔서 설명해도 되는지 여쭤보고 싶은데, 개신유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다른 글에서는 그게 ‘운동으로서의 학문’이었다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실학을 실천적·비판적인 운동으로서의 학문이라고 당시 유학의 한 계보를 정리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21세기에는 신실학이라고 얘기하시면서 신실학도 운동으로서의 학문, 비판적인 학문이라고 말씀하신 건데 통하는 거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임형택 그렇습니다. 근본적으로 말해서 운동성을 상실하면 학문으로서의 존재의미를 상실하는 거지요. 물론 운동성을 상실한 채 학문을 위한 학문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지만요. 실학은 운동성을 자체의 생명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실학으로서 의미를 갖게 된 겁니다. 그렇다고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니 운동성이 없다고 단정해버릴 수는 없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세기 중엽의 학자 이항로(李恒老)를 들어보지요. 당시 서양 제국주의에 문호 개방이 강요된 위기 상황에서 그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논리를 수립합니다. 의병항쟁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지요. 그야말로 운동적 의미가 확실한 학문이고 사상입니다. 위정척사론의 수구보수적인 논리는 시대의 진운에 역행하는 사상이란 점에서는 부정적 평가가 내려지겠으나 당면한 시대현실에 학적인 사명감으로 투철했다는 점에서, 구국적이라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도 가능합니다. 운동성이라 해도 어떤 방향이냐는 측면을 아무래도 간과할 수 없겠지요.
백영서 역시 선생님은 실학을 이야기하시면서도 실학이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실천적·개혁적인 측면, 또는 아까 말씀하신대로 운동이라고 해도 좋을 그것을 추구하는 주체로서의 지식인들에 대해 많이 강조하시는 것 같아요. 그에 비하면 저뿐 아니라 많은 독자들이 보기에 미야지마 선생님이 유교적 근대, 동아시아적 근대, 더 좁혀 말하면 주자학적 근대라고 하면서 주자학을 강조하실 때는 동아시아의 긴 시간대의 구조 자체를 설명하려는 데 방점이 있는 것 같다는 인상입니다. 이러한 개념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얘기하면 두분 말씀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크게 보면 동아시아의 사상적 자원에서 오늘에 필요한 걸 찾아내겠다는 점에서는 같은데 그 안에 들어가면 어떤 것이 중요한 자원인가, 어떤 각도에서 그것을 파악할지에서 좀 차이가 있는 듯해요. 미야지마 선생님 논의로 넘어가 볼까요?
동아시아의 독자적 역사상을 그릴 수 있을까
미야지마 저는 이른바 서구 중심적인 동아시아 역사 이해를 비판하면서 그 과정에서 소농사회론이나 최근에는 유교적 근대 개념을 제기하게 되었는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서구의 역사모델을 동아시아 지역에 적용하는 게 아니고 동아시아의 독자적인 역사상을 어떻게 구상할 수 있는지를 오랫동안 고민하면서 하나의 가설로 제시한 겁니다. 특히 유교적 근대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중국을 어떻게 봐야 되는지의 문제입니다. 중국은 지금 경제력으로 세계 두번째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정치나 사회의 모습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와 많이 다르고 오히려 상당히 전통적인 부분이 여전히 강하게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중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들지요. 제가 보기에 중국은 적어도 16~17세기 명나라 시대 이후 지금까지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아요. 특히 사회적인 결합이라든가 인간관계 측면에서 그렇지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중국에 전근대적인 부분이 남아 있다는 식이 아니라 명나라 시대 이후 지금까지의 중국을 지속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것을 유교적 근대, 중국적인 근대라고 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서구적 근대와는 다른 유형이라고 할까요. 그렇다면 한국이나 일본도 중국적인 근대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 동아시아 전체를 유교적 근대라는 개념으로 볼 수 있겠다는 거죠. 물론 한국, 일본의 경우는 중국이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다 중국과 똑같이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도저히 못 따라가는 부분도 있었는데, 아무튼 그후에 한국과 일본의 역사도 유교적 근대와의 관계 속에서 봐야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현대의 한국이나 일본 사회를 볼 때 19세기 중반의 이른바 ‘웨스턴 임팩트’(western impact, 서구의 충격) 이후, 혹은 근대 이후 유럽과의 관계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전에 중국의 유교적 근대의 영향을 받았고 그다음에 서구적 근대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 겁니다.
제가 유교적 근대라는 것을 제기하기 전에는 중국사회를 ‘초기 근대’라는 애매한 개념으로 얘기한 바 있습니다. 그때는 주자학, 성리학을 보는 시각에 제 나름대로 납득이 안 가는 면이 있었는데 유교적 근대라고 할 때 성리학의 문제는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알게 된 일본의 키노시따 테쯔야(木下鐵矢)라는 분의 주희 연구에서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희의 사상은 결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이해되어왔던 그런 것이 아니다, 상당히 동태적인 것이며, 항상 자기 마음을 열어 다른 사람과 소통해야 한다는 열린 사상이자, 사회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사상이었다는 주장입니다. 지금까지 연구에서는 대부분 주희가 죽은 다음에 제자나 후세 사람들이 만든 것을 주희의 사상이라고 보았는데 키노시따는 당시 중국사회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주희가 어떤 사상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보면서 주희 개인의 사상을 아주 깊이 연구했습니다. 그 연구를 보면서 주희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해는 다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됐습니다. 중국·한국·일본에서 모두 주희의 사상이 오해를 많이 받았고 그 오해를 기초로 비판이 거듭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항상 성리학, 주자학은 극복 대상이 되고, 극복되었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키노시따에 따르면 양명학의 왕양명(王陽明)이 전형적인 예인데 그가 완전히 주희를 오해해서 비판했고, 그가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 사실 주희의 사상과 그렇게 큰 차이가 없습니다. 간단하게 봐도 주희 사후 800년 이상 지났는데 적어도 19세기 전반까지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주희는 많은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배워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과거시험에서 주희에 대해 잘 알아야 급제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저작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공부 대상이 되었고 그러면서 비판 대상도 된 거죠. 19세기말까지 한국이나 중국에서 몇백년 동안 주희의 텍스트가 과거시험의 기본 텍스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희라는 사람의 사상이 그렇게 쉽게 극복할 수 없을뿐더러 상당히 깊이있는 사상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주희의 사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주희의 사상과 ‘전통시대’ 중국의 사회현실에 상당히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교적 근대라는 것을 제기하게 됐지요.
다만 유교적 근대나 소농사회에 대한 이제까지의 제 연구는 결정적으로 동아시아 국가 간의 국제관계에 대해 소홀했습니다. 특히 청나라 시대는 단순히 소농사회라는 농업사회뿐 아니라 몽골이나 만주족, 유목·수렵민족까지 구성원이 되었는데 그러면 그런 사회와 본래 중국(China proper)이라고 할 지역과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앞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에서 제국 개념이라는 것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평가하려는 논의가 많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는 단순히 소농사회라고 보거나, 유교적 근대라는 것을 일국사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안된다, 그렇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백영서 중간에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선생님의 그간 성취를 아주 압축적으로 설명해주셨네요. 제가 정리를 해보자면, 몇개의 층위가 중첩돼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첫째는 우리가 논의해온 실학사상과의 차이점도 되는데, 유학사상에서 주자학의 위치나 역할에 관한 문제예요. 임선생님의 표현을 빌리면 17세기 이래 18세기는 ‘흔들린 조공체제’라는 질서 변동기거든요. 이런 변동기에 조선, 중국, 일본 각자 주자학적인 걸 받아들여서 유지하는 게 타당했는가 아니면 실학식으로 바꿔야 했는가는 따져볼 필요가 있겠어요. 미야지마 선생님은 주자 개인의 사상과 사상체계로서의 주자학을 구별하셨습니다만 주자학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시면서 주자의 사상이 계속 활용될 여지가 있다고 보시는 거고요. 또 하나는 중국적 근대라는 개념에 대해서입니다. 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근대를 중국적 근대라고 하시는데 그게 또 하나의 층위인 것 같아요.
이건 셋째 층위와도 연결되는데 서구중심사관을 극복한다는 지점이 있죠. 그런데 서구중심사관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요즘 다양하잖아요. 여기서 길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새로운 세계사 그룹’은 유럽 중심의 역사발전이 보편적 역사발전의 패턴이 아니라고 주장하지요. 18세기 후반이나 19세기초까지 아시아가 유럽 못지않은 생산력, 인구증가, 과학기술을 지녔고 오히려 세계시장을 주도했다고 본다든가, 유럽 산업혁명의 기술적 혁신은 내재적 발전의 산물이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발전된 성과에 힘입어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요. 한마디로 반주변부였던 유럽의 후발성의 비교우위가 당시 이미 형성된 세계체제와 밀접한 연관 속에서 잘 발휘된 결과라는 거예요. 이렇게 새로운 세계사를 구성하려는 그룹이 있는 것처럼 유럽 중심의 역사관을 비판하면서 내세울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 다양한데 문제는 왜 하필 중국적 근대냐는 겁니다. 이슬람적 근대도 있고 다원적 근대가 있음직한데 그중에 중국적 근대를 얘기하는 사람들은 대개는 송 이후(또는 명 이후)의 역사에서 그 시발을 찾아내 오늘날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거든요. 선생님도 그런 맥락이시고요. 일본만 해도 미조구찌 유우조오(溝口雄三)가 향리공간이라는 분권적이고 민간적인 지방 공론의 원리랄까 질서가 계속 유지돼왔다고 하면서 그런 경향을 보이죠. 또 요즘 일본에서 잘 팔리는 책인 요나하 쥰(與那覇潤)의 『중국화하는 일본』(페이퍼로드 2013)이라는 책에서도 송 이래 근세질서의 기본구조가 계속 유지되어 오늘에 이르러도 변함이 없고 이것은 세계의 누구든 사용할 수 있는 범용성이 높은 시스템이라고까지 얘기한단 말이에요. 중국에서도 그런 논의들이 많죠. 예를 들면 거 자오광(葛兆光, 『이 중국에 거하라』, 글항아리 2012)도 송 이래 중국에는 ‘전통적인 제국식 국가’이자 ‘근대적 민족국가’에 가까운 것이 지속되어왔다고 얘기합니다. 임선생님께 발언 기회를 드려야 되는데 이 층위들 중에서 먼저 주자학에 대한 평가 문제를 간단하게 정리하고 둘째 층위, 즉 오늘의 중국을 보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중국적 근대에 대한 미야지마 선생님의 이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주자학에 대한 평가와 역사경험의 차이
임형택 주자에 대해 그가 위대한 학자고 사상가였다는 얘기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봅니다. 주희와 주자학을 구분해서 보자는 견해는 경청할 만합니다. 맑스와 맑시즘을 구별해 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과 통하는 것도 같군요. 원래 주희의 사상, 학문을 제대로 깊이 공부해 이해해야 하고 또 평가를 해도 해야 된다는 말씀은 저 역시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산도 사람들이 주자를 폭넓게 제대로 읽지 않고 추상적인 이론에 편중해서 얘기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특히 주자의 실무·실사에 절실한 내용과 함께 사회정책적인 면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지요. 저는 주희로 돌아가서 그 실체를 보자, 후세에 덧칠된 색깔을 걷어내자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작용했던 주자학은 또 그것대로 따지고 밝히는 작업을 그만둘 수 없다고 봅니다. 명대 이후, 조선으로 와서는 17세기 주자학이 체제의 교학(敎學)으로서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역할한 엄연한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 제 관점입니다.
미야지마 한국의 경우도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뀔 때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데 주자학이 상당히 혁신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자학이라는 것도 현실을 비판하고 이상적인 현실을 만들기 위한 사상으로서의 역할이 가능한 것이죠. 그러나 일단 그 이념에 맞는 체제가 만들어졌다고 하면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측면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는 17세기 이후에 도꾸가와(德川) 시대에 들면서 주자학이 본격적으로 수용됐는데 그때는 처음부터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는 면이 강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일본에서는 주자학이 상당히 보수적이고 체제유지적인 것이라는 이해가 많았는데 최근에 와서 새로운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9세기 들어 주자학의 보급 현상이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배울 수 있게 되었고 특히 그때까지는 학문을 전혀 접하지 못했던 중하급 무사들이 주자학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정치에 관심이 생기고 결국은 명치유신으로 이어진 게 아닌가 합니다.
백영서 두분께서 말씀하신 역사적 맥락의 차이가 참 재미있네요. 조선의 유학사에서는 주자학이 체제이념이 이미 되어버린 상태의 경험을 갖고 실학이 나왔기 때문에 주자학의 그런 측면이 더 강조되고, 일본은 주자학이 체제이념이 된 적이 없기 때문에 혁신이랄까 개혁적인 측면에 대한 기대 내지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자 개인에 대해서는 평가가 일치하지만 그것이 체계화된 이념인 주자학에 대한 견해 차이는 일본과 조선의 역사적 경험의 차이에서 나온다 싶어요.
임형택 맞습니다. 저와 미야지마 선생 사이에 보인 주자학에 대한 견해차는 결국 한일 양국의 역사경험이 달랐던 데서 비롯된 입장차이죠. 그런데 주목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일본의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주자학이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설이 제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자학에 한정하지 말고 폭을 넓혀서 봐야지 않을까요? ‘유학 학습이 사무라이를 정치화’했다는 지적처럼 한학의 확대가 메이지시기 일본사회의 변화·발전에 정신적 기초가 됐다고 봐야 옳지 않을까요? 일본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런 생각이 듭니다.
미야지마 저도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깊이 알진 못합니다만 18세기말 이후로는 도꾸가와 막부가 만든 쑈오헤이꼬오(昌平黌)라는 학교에서 주자학 외에는 가르칠 수 없게 됐고, 각 다이묘(大名)들이 만들었던 번교(藩校)라는 학교에서도 많은 부분 주자학밖에 가르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유학이 다 주자학이 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유학사상 중에서도 주자학이 특히 정치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할까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그래서 주자학은 배우는 이에게 당연히 정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을 양명학이나 다른 학문보다 일으키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에서 오규우 소라이(荻生徂徠)라는 학자는 일반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아주 특별한 사람만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 된다고 주장했는데, 주자학이 보급되면서 지금까지 전혀 그러지 못했던 하급 무사까지도 정치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천황과 도꾸가와 장군 어느 쪽이 주군인가 하는 점입니다. 천황이 주권자인데 지금 도꾸가와 체제는 잘못된 체제라는 의식이 강해진 거죠.
백영서 이쯤하고 둘째 층위인 중국적 근대에 대한 임선생님 말씀 듣기로 하죠.
중국적 근대론은 동아시아 역사경험의 특화인가
임형택 소농사회론의 이론구성은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왈가왈부할 내용이 아닙니다만, 유교적 근대 문제에 저는 특히 비상한 관심을 갖습니다. 미야지마 선생의 학적 노력을 높이 사고 견해의 많은 부분에 동의하면서도 결정적인 대목에서 의문이 듭니다. 그것이 왜 꼭 근대냐? 동아시아 국가들에 있어서도 조기에 괄목할 발전이 이루어졌고 거기에 주자학이 관계되었던 역사현상을 해명하는 학적 작업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렇다 해서 굳이 근대라는 개념을 부여할 필요가 있느냐는 거죠. 아까 백선생 말씀대로 근대라고 할 때 세계 각처에 근대가 출현했고 그중의 하나로서 중국에도 있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면 가능하겠죠. 그러나 세계사적으로 의미있는 근대, 오늘의 우리 현실과 긴밀하게 연계를 맺고 있는 근대는 서구적 근대 아니냐, 서구적 근대를 떠나서 21세기 오늘에 이르는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느냐, 이런 점에서 솔직히 회의감을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백영서 거기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중국적 근대라고 할 경우 그럼 근대 자체란 뭐냐는 문제로, 다원적 근대라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측면이죠. 서구에서 발원한 자본주의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근대는 자본주의를 빼고는 논의하기 어렵지 않나, 그게 오늘 실감하고 있는 세계의 작동원리와 통한다, 그런데 그걸 중국적 근대라고 해서 따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거겠고요. 다른 하나는 중국적 근대라는 것이, 미야지마 선생님은 명 이후를 강조하셨습니다만 대체로 중국과 일본 학계의 분위기를 보면 송 이래로 생긴 체제가 유지돼서 오늘의 중국까지 온다고 하거든요. 아무튼 그게 일시적으로 축소되고 후퇴했지만 다시 나타나고 있다면서 오늘까지 다 설명해요. 거대해진 중국특색적 사회주의에 대한 실감이 작용하고 있지요. 그런 실감에서 보면 자본주의의 문제라고 얘기할 필요가 없게 되는 거죠. 두가지 다 무척 흥미로운 쟁점이니 더 깊이 따져보고 싶네요.
미야지마 근대라는 말을 쓸 때 근대라고 할 수 있는 지표는 무엇일까요?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인 것들이 있겠죠. 근대와 근대 이전을 구분할 때 보통 몇가지 조건을 들어서 거기에 맞는지 안 맞는지 따지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렇게 하면 아무래도 서구적 근대의 지표를 의식해서 거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겠다 싶어요. 그래서 다원적인 근대라고 할 때도 유럽에서 근대에 와서 생긴 요소 중에 어떤 것은 다른 사회에서 그 이전부터 있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 같은데 저는 그런 방식에 반대합니다. 근대를 뜻하는 ‘모던’의 어원이 된 모데르누스(modérnus)라는 라틴어가 로마에서 5세기쯤 처음 등장했다고 하는데 로마제국의 역사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이전과 이후를 구분해서 후자를 모데르누스라고 한 거죠. 그래서 모던은 원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가리키는 말로, 역사를 두 시기로 나누어서 보는 가운데 생긴 개념입니다. 제가 말하는 근대란 그것입니다.
중국이나 동아시아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직결되는 시대는 언제부터인가 할 때 물론 19세기 전반 이후라고 볼 수 있겠죠. 그후 새로운 것들이 많이 생겼고 특히 과학기술이라든가 자본주의 면에서요.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는 부분, 예를 들어 인간관계에서 아주 핵심적인 가족제도, 아니면 마을 같은 지역공동체는 훨씬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던 것이고 19세기 이후 물론 부분적으로 변화가 있었지만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조선시대의 가족제도는 지금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제도지만 고려시대까지 올라가면 당시 가족제도나 친족제도는 지금 한국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싶은데요. 일본에서도 16세기에 경계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런 측면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언제부터 생겼는가, 그후를 근대, 그전을 근대 이전이라고 보자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구분을 위한 여러가지 지표를 만드는 건 자의적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죠. 물론 이 시대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누군가 다르게 생각해도 저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언제부터 근대인가는 사람마다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는 거죠. 그것이 지금까지와 같이 배타적으로 서구 근대가 유일한 모델이고 그밖에는 근대가 아니라는 식이 아니라 사회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근대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견해도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유교적 근대나 중국적 근대라고 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동아시아 사회를 연구하고 동아시아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서 제가 실감에 바탕해 말할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인도라든가 이슬람 사람들이 지금 같은 사회가 언제 생겼는가,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는 실감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뿐이에요. 그건 그 지역 사람들이 나름대로 생각해서 이야기하면 되지요. 제가 유교적 근대라든가 중국적 근대라고 주장할 때 동아시아나 중국을 특권화하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런 오해를 많이 받았지만요.
서구중심성과 중국중심성의 함정 사이에서
백영서 지금 우리의 실감에 가장 가까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걸 근대라고 하는 명명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겠죠. 다만 지금 삶의 실감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는 논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럴 때 무엇이 우리 삶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힘인지 꼽는다면 그건 근대성이죠. 흔히 다소간 혼란을 일으키는 것 같은데, 영어 모더니티(modernity)를 한자어권에서는 근대라는 시대와, 근대의 표지나 특징인 근대성으로 구별해서 사용할 수 있지요. 근대성의 지표들이 여러가지 거론될 수 있는데 그중에 무엇이 우리의 전지구화된 삶을 가장 강하게 규정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얘기해본다면, 그와 관련해서 자본주의라는 것, 일국 내의 생산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전지구를 통합해가는 과정을 간과하고 동아시아적 근대의 특성을 얘기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제기가 나오게 되지요. 바로 이런 점을 서양사 연구자 유재건(柳在建) 교수가 창비 지면에서 두어차례 지적한 적이 있어요. 근대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미야지마 선생님 글에서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단 한번도 안 나오는 게 이상하다면서, ‘동아시아적 근대성’을 자본주의적 근대와 복합적으로 결합된 동아시아 특유의 전근대적 유산으로 볼 때 오히려 근대극복의 길을 여는 통찰이 될 수 있으리라고 말하지요.
임형택 오늘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돌아보면 서구 주도의 근대, 자본주의적 근대를 빼놓고 다른 근대를 얘기할 수 없다고 봐요. 우리가 서구적 논리에 빠져들지 않고 우리의 근대를 어떻게 인식할 것이냐는 문제는 따로 논해야겠지요.
백영서 서구 주도라고 단순히 말해버리면 오해가 생기지 않을까요? 지금의 우리 삶을 규정하는 원리랄지 작동방식을 자본주의라고 본다면 그것이 유럽에서 시작되었더라도 그 세계체제가 전지구를 통합해가는 과정에 주목해야지 그 기원이 문제는 아니라는 거지요. 그 자본주의적인 작동방식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 제일 실감으로 다가오기에 문제 삼는 것이지, 그게 서구에서 왔다고 문제가 되는 건 아니죠. 중국적 근대라고 하지만 오늘의 중국도 이미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서 작동하고 있거든요. 그중에서 서구에서 기원한, 흔히 근대성의 지표로 얘기할 수 있는 몇가지 특징이 있잖아요. 국민국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의 편입, 정치적 민주주의, 근대과학, 개인주의, 국민문화(또는 민족문화) 등이 그렇지요. 중국이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건 분명하잖아요. 그런데 그밖의 몇개 지표들은 독자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요. 국민국가? 자기들의 역사와 현실은 국민국가라는 틀로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하고요. 개인주의나 정치적 민주주의 역시 중국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해요. 그러다보니 중국적 근대를 설정하고 그 기원을 찾아서 송대까지 올라가거든요. 그런 중국적 근대를 어떻게 봐야 되는가? 두가지 문제인 것 같아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작동방식 안에 들어 있는 중국과 그걸 넘어서려는 중국. 후자의 지향을 쉽게 인정해버린다면 자칫 중국중심주의로 흐른다고 어떤 학자는 얘기하더라고요. 미야지마 선생님에 대해서도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중국중심주의로 가는 게 아니냐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런 문제에 대한 토론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어요.
미야지마 제가 아까 근대인지 아닌지를 생각할 때 몇가지 지표를 만들어서 하면 안된다고 했는데, 결국은 제 이야기도 뭔가 지표를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지적이신 것 같은데요, 지금까지는 서구 근대를 모델로 삼아 그 몇가지 요인들을 근대 혹은 근대성의 지표로 설정해온 거지요. 그렇게 하면 서구를 보편으로, 다른 지역은 특수로 보는, 그러니까 다른 지역의 근대/근대성은 불철저한, 왜곡된 것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구모델이 실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과 구별하기 위해 만들었던 이념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중국이나 동아시아 각국의 근대를 서구모델을 기준으로 파악해도 그 전체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유교적 근대를 제기하게 된 이유입니다.
백영서 일종의 부조적(浮彫的)인 수법으로요.
미야지마 맞는 말씀인데요, 그러면 지금 사회에서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생각할 때 저는 사람들의 사회적 결합의 문제가 역시 인간의 역사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만드는 건가?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요. 동아시아 지역의 경우, 저는 중국사회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진 못합니다만, 한국사회나 일본사회를 볼 때 저는 지금의 한국, 일본의 사회적인 결합 방식이 19세기 후반을 전후해서 크게 바뀌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들어와서 기업이 생겼는데 그 기업이라는 조직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라고 할 때 일본은 유럽과 전혀 다른 형태로 기업을 만들었고 한국 역시 일본과도 또 다르게 만들었지요. 일본의 기업은 ‘이에’(家)적인 성격이 강해서 경영자와 고용자가 가족같이 의식되게 되었고, 한국은 재벌의 경우처럼 경영주체가 가족에 의해 구성된 것이 그 상징적인 예입니다. 그렇게 기업이 만들어지는 원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유럽의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그때 처음 생긴 게 아니고 그전에 있었던 사회적인 결합의 형태를 기본으로 해서 기업도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이른바 신자유주의라고 해서 인간의 개별화·개체화(個體化)가 진행되고 있는데, 앞으로는 인간의 사회적인 결합의 새로운 형태를 어떻게 만드는가가 핵심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그럴 때 동아시아 지역의 사회적인 결합의 기본적인 틀이 만들어졌던 시대를 근대라고 보는 겁니다.
임형택 아까 제가 서구 주도의 근대라고 한 것은 우리 입장에서 근대 인식의 문제를 거론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동서의 만남의 과정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 대해 지금도 논자들 대부분 영향론 내지 수용론으로 보는데 저의 관점은 대응론입니다. 19세기로 진입하기까지는 중국이 오히려 서양국가들보다 우위에 섰고 이쪽에서 저쪽에 영향을 미친 바도 많았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으며, 서세(西勢)가 압도해서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더라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대응하여 창조적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지요. 이 전 과정을 동서를 아울러 인식하되 우리로서는 대응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실학 또한 이러한 입장에서 서세, 서양문화를 만나 대응책을 강구한 것이라고 규정했던 터입니다.
현실 비판과 미래 전망의 사상적 자원
백영서 좌담의 처음에 얘기했듯이 동아시아의 사상적 자원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했던 건 바람직한 동아시아의 미래는 무엇인가 하는 일종의 미래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겠습니다.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기 위해서 이런 논의를 하는 건데 미야지마 선생님이 말씀하신 인간 결합관계의 새로운 원리, 그리고 그것에 관한 새로운 제도를 만들 때 참고할 수 있는 동아시아적 사상 자원에 대한 기대를 두분 선생님이 가지고 계시고 저도 기본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무엇일지를 정리해봤으면 합니다. 임형택 선생님은 그게 신실학이며, 이것이 동아시아 차원에서도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얘기하시는 것 같고요. 미야지마 선생님은 그 자원이 중국적 근대, 동아시아 근대라는 식으로 말씀하시고 그중에서 주자학에서 제시했던 송대의 결합의 원리가 결국은 오늘날에도 시사점이 많은 걸로 얘기하시는 것 같아요. 이 부분이 우리 인문학 연구자들이 현실 문제에 발언할 수 있는 입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임형택 실상 신실학이란 용어는 제가 처음부터 쓰고 싶어 쓴 게 아니었어요. 동아시아실학 국제학술대회를 한·중·일이 3년 주기로 돌아가며 여는데 2011년에 중국 측이 개최하면서 내건 주제가 마침 ‘신실학의 구축’이었습니다. 거기에 참여해 기조발제를 맡았으므로 주최측 주문에 따를 수밖에 없었지요. ‘신실학의 구축’이란 주제는 생경하다는 느낌이 들긴 했어도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신실학이라면 두 방향으로 모색할 수 있겠는데, 하나는 과거의 실학을 획기적으로 변모된 현시대의 요구에 호응해서 해석하는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구실학을 파탈해서 신학문으로 재구성하는 차원입니다. 원론적으로 보아 현실성 없는 학문, 오늘의 현실을 해결하는 데 기여하지 못하는 학문은 죽은 학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실학은 신실학으로 거듭나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왜 그게 실학이어야 하느냐는 의문을 당연히 제기할 수 있습니다. 왜 꼭 실학인가? 저는 한국학을 하는 입장에서 우리의 긴요한 사상적 자원이 뭐냐는 질문에 독점적인 것은 아니라도 우리의 사상적 자원으로 내용이 어느 무엇보다 풍부하고 오늘의 시대에 가까이 와닿는 건 역시 실학이 아니냐, 이렇게 답을 하죠.
백영서 물론 신실학이라는 용어가 중국에서 제기됐는데 그게 과연 ‘동아시아실학’으로까지 될 수 있는지는 따로 논의해야겠죠. 저 개인적으로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별 관심이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실학이 한국에서 발신한 독특한 학문적 특징이었기 때문에 그걸 확산하려는 것은 좋은데 그게 과연 내실을 가질 수 있을까는 별개의 문제겠죠. 그런데 신실학으로 표현하신 동아시아의 21세기 실학을 중요한 사상적 자원으로 미래의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생각할 때 선생님은 그게 예전의 근대지향적인 실학연구와는 달리 탈근대적인 지향이 있다는 걸 강조하시잖아요. 그래서 구체적으로 다산이나 심대윤(沈大允, 1806~1872)의 얘기도 하신 걸 재미있게 읽었어요. 예컨대 경학에 기반을 둔 심대윤의 이(利)와 공(公)을 결합한 사고, 속무(俗務)를 중시하되 맑은 취향〔淸雅〕을 지향한 다산의 사유 같은 것이지요. 거기서 말씀하시는 탈근대적인 지향이 무엇인지 설명을 해주셔야 설득력이 강해지지 않을까 싶은데요.
임형택 실학은 한국의 학술사에서 정립된 용어인 만큼 하나의 인식틀이기도 합니다. 거듭 말하게 됩니다만, 근대 한국의 주요한 지적 전통으로서 발전적으로 계승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의 학술사 인식에 실학 개념이 도입된 것은 우리로서는 대단히 반가운 일입니다. 이런 유례는 찾아보기 어렵거든요. 그런데 실학 개념이 일본이나 중국 학계에서 확실히 ‘시민권’을 얻었느냐 하면 아직 그렇지 못합니다. 하지만 실학에 해당하는 내용이 양국에도 실존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그걸 뭐라고 호명하든 상관없겠지요. 동아시아적 시각으로 관심을 공유해서 연구를 수행해나가면 되겠고요. 다만 실학 개념을 먼저 제기한 한국 학계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실학’을 확실히 부각시키기 위한 적극적 노력이 요망된다는 점을 역설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실학의 탈근대 지향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셨는데 답변하기 쉽지 않은 문제네요. 저는 실학과 관련해서 근대라는 말을 잘 안 쓰지만 탈근대도 잘 안 씁니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자본주의적 근대를 넘어서자는 소리가 주변에서 심심찮게 들립니다. 동양의 사상전통을 끌어와서 발전논리를 부정한다거나 근대극복의 길을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 사유나 지혜의 차원에서는 지당하고 경청할 필요가 있겠지만 당면한 현실의 비약 아니면 도피여서 실천적 의미는 별로인 것 같습니다. 반면에 실학은 다르다고 봅니다. 실학은 서양 근대에 대한 지적 대응의 산물이므로 거기에는 근대적응의 의미와 함께 근대에 포섭될 수 없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기 마련입니다. 창비의 이중과제론과도 통할지 모르겠습니다.
근대 적응과 극복은 동시적 과제라는 관점
백영서 창비에서 제기한 이중과제론은 근대에 대한 적응과 극복이 이중과제로서 동시에 진행되는 하나의 과제라는 의미입니다. 근대에는 성취할 만한 좋은 것들과 극복해야 될 나쁜 것들이 섞여 있으므로 그 둘이 혼재하는 근대에 적응하되 성취와 부정을 아우르는 이러한 적응 노력은 극복의 노력과 일치함으로써만 실질적으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거예요. 선별적으로 어떤 건 받아들이고 어떤 건 안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죠. 제대로 적응하려고 해도 극복의 의지가 있어야 되고 극복하려고 해도 성취할 건 성취해야 한다는 점에 철저해야 한다는 논리예요. 이런 관점을 조선 실학자들에게 적용하는 게 무리일지 모르겠으나, 과연 그들이 보여주는 탈근대적 지향이란 것이 그 이중과제의 긴장을 의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자본주의를 겪어보지 않았고 서구와 충분히 만나지 않았지만 17세기 이래 ‘흔들린 조공체제’라고 할 때는 이미 서세동점의 추세 속에 서구와의 접촉이 있었잖아요. 그럴 때 그 긴장을 얼마나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기준으로 봐야지, 그렇지 않고 탈근대적인 면, 서구의 것을 넘어서려는 경향, 자본주의적 요소를 넘어서려는 요소가 있었다는 것만 강조하면 부조적인 수법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달리 얘기하면 중국은 근대의 부정적인 특성을 극복하는 쪽에 강했다가 그에 걸맞은 근대적응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고 있어요. 그에 비하면 일본은 적응에 치중하다보니까 극복에 소홀했기 때문에 적응에도 실패한 결과 요즘 같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이렇게 선별이나 단계가 아니라 동시적인 과제로 보는 관점을 가지는 것이 오늘의 중국에서 유행하는 주요 담론을 판단하는 데도 유용해요. 거기에는 방법론적으로 부조적 수법이 동원되고 있는 거 같아요. 중국의 어떤 역사적 경험이나 유학의 어떤 가치 같은 문명적 특질을 부각해 그게 오늘까지 이어진다는 거지요. 그런 사례의 하나가 천하주의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그게 서구의 억압적 보편주의를 넘어설 새로운 또는 대안적 보편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대국화하는 중국의 현실에서 관방(官方)의 수요를 충족할 뿐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도 공감을 얻지 않나 싶어요. 이런 현상을 보면서, 이중과제론을 견지해야 부조적 수법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중국중심주의의 혐의도 벗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한국에서는 이중과제 수행의 긴장을 어떻게 잘 유지하고 있는가, 그런 성과를 사상적인 차원에서 얼마나 찾을 수 있고 지금은 얼마나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되어야겠죠.
임형택 중요한 지적입니다. 부조적 방식은 다분히 편의적이고 속류적이며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내지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과도 통합니다. 물질과 정신으로 손쉽게 양분해서 한쪽을 취하고 한쪽을 내버리는, 지금도 곧잘 빠져드는 논리적 함정에서 벗어나야겠지요. 역시 서양과의 만남의 과정에서 대응논리를 어떤 구도로 설계했는가, 이 점이 중요합니다. 사고의 틀을 문제 삼은 거지요. 예컨대 정약용은 경학적 대응, 최한기(崔漢綺)는 기학(氣學)적 대응의 논리를 세웠던 점을 중시했지요. 물론 근대라는 개념은 실학자들 머리에도 들어올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서양과의 만남을 위기라고 표현해왔듯 무력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죠. 그 단계에서 참으로 깊이 고민하며 대책을 강구한 학문이라면 그 속에는 근대에 대한 적응의 의미와 함께 극복의 의미도 다소간 담겨질 겁니다. 해석적인 것으로 말입니다.
미야지마 임선생님은 실학에 대해 신실학이나 동아시아실학이라고 할 때 17~19세기 동아시아의 새로운 학풍이라는 공통점을 주시하시는데, 저는 그런 유학사상 가운데 한국의 유학에서 무엇이 특징적인가 하는 부분에 오히려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요.
백영서 제가 좀 끼어들면 예전에 미야지마 선생님이 쓰신 글(「‘화혼양재’와 ‘중체서용’의 재고」, 『나의 한국사 공부』에 수록)에서 조선 사상의 특징을 ‘매개적인’ 정체성이라고 얘기하신 게 떠오르네요. 19세기 후반 서양을 수용하는 주체적 자세를 가리켜 중국은 중체서용이라 했고 일본은 화혼양재(和魂洋才)라 했는데 한국에서는 동도서기라 했지죠. 그런데 왜 중국의 ‘中’이나 일본의 ‘和’처럼 일국의 입장에서 구미문명에 맞서려 하지 않고 단순히 조선만을 가리키지 않는 동양을 전제한 ‘東’을 내세우면서 자기정체성을 찾으려고 했을까. 그것을 일국의 정체성을 뛰어넘는 ‘매개적인 정체성’을 모색하기 위한 유연한 주체성이라고 표현하셨어요. 이걸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와 연관해서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한국 사상전통의 매개적인 정체성
미야지마 최근에 「천학(天學)에서 천교(天敎)로」라는 글(조성환, 서강대 박사학위논문, 2013)을 봤습니다. ‘하늘의 학문에서 하늘의 가르침으로’라는 말인데, ‘퇴계에서 동학으로, 천관(天觀)의 전환’이라는 부제가 달렸습니다. 한국의 사상적인 전통에서 하늘을 섬기는 전통이 아주 강하다, 퇴계의 하늘에 대한 이해도 중국과 상당히 다른, 어떻게 보면 종교적인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다, 그런 퇴계의 하늘에 대한 감각과, 이후 정약용 같은 사람이 왜 그렇게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동학이라는 종교가 왜 생겼는지, 그런 문제를 한국의 하늘 섬김 전통과 연결해서 파악하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동아시아 유학 중에서도 한국의 유학이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특히 요새 중국은 유학 부흥이라고 할까요, 유학적인 것을 상당히 높이 평가하려고 하는데 그런 문제와도 관련해서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것이 한국의 사상적인 전통으로서 조선시대에 끝나지 않고 형태는 바뀌면서도 근대 이후에도 여러 면에서 이어지는 부분이 있진 않았는지, 지금까지 동아시아 유학이라고 할 때 중국 유학과 일본 유학을 많이 비교해왔습니다만 한국의 유학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그런 관점에서 중국 유학이나 일본 유학을 어떻게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별로 없었는데 앞으로 그런 면에서 연구해야 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임형택 한·중·일 삼국이 유학을 공유하면서 상동성 가운데 상이성이 연출되는 현상은 당연히 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방금 소개하신 ‘천’에 대한 문제는 재미있는데 그 문제를 저는 방향을 달리해서 해석합니다. 하늘〔天〕이란 워낙 보편적인 존재로 원시유학에는 신앙적인 천 개념이 뚜렷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성리학으로 와서 천 개념이 방금 말씀처럼 이(理)로 대치되는데 일부 실학자들이 원시유학의 천관을 부활시킵니다. 상제(〓천)가 너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조심하고 두려워하라는 다분히 종교신앙적인 성격을 띤 것입니다. 다산이 사고의 논리로서 체계를 갖추는데 앞서 순암 안정복(順菴 安鼎福, 1721~91)에게서도 포착이 됩니다. 이에 대해서 저는 안팎의 관계로 보고 있지요. 기독교의 유입은 당장 정치·사회적 파장을 크게 일으키는데 지식인으로서는 저쪽의 천주신앙에 대항하는 방법론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원시유학에 잠재해 있었던 천을 새롭게 불러내기에 이른 것이지요. 이에 경전에 대한 전면적인 재해석이 요망되었던 겁니다. 바로 다산 경학의 출발지점입니다.
백영서 두분 말씀을 좀더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이렇게 질문 드립니다. 지금 중국에서 문화대국을 만들기 위한 소프트파워로 강조하고 있는 유학 부흥의 분위기에 대해서 선생님들은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그런 현상과 미야지마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유교적 근대가 중첩되는지 아니면 차이를 갖고 있는지 얘기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선생님들이 중요하게 지적하신 조선 유학의 또는 일본 유학의 독특한 역할은 그런 중국 만들기에 어떤 작용을 할 수 있는 건지 말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미야지마 연세대 철학과에 계셨던 박동환 선생이 삼표(三表)철학이라는 것을 제기했어요. 일표철학은 서양철학이고 이표철학은 중국철학, 한국철학은 삼표. 이 분의 말로는 서양철학도 중국철학도 결국은 합리성을 추구하는 철학인 데 반해 한국 사람들이 추구해야 하는 철학은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할까요.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퇴계 선생도 하늘이나 이(理)라는 것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회의하면서 미지에 대한 경의(敬意)를 강조하였듯이, 제 나름대로 표현하면 인간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서구적 근대의 잘못이라는 이야기죠. (삼표철학에 대해서는 박동환을 중심으로 한 좌담회 기록인 「가에로의 끝없는 탈주: 박동환의 철학적 문제」, 『동방학지』 151호, 2010 참조). 저는 이 주장과 아까 말씀드린 조성환의 논문이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한국의 사상전통에서 찾을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오히려 앞으로 세계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거죠.
백영서 이번 대담을 준비하는 동안 미야지마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선생님 글이 중국 지식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상상을 해봤어요. 한국에서 중국중심주의라고 비판이 나오는 것처럼 어떻게 보면 중국의 요즘 분위기에 맞아서 그들이 좋아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중국적 근대가 존재하고, 그게 한국 등 동아시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는 견해가 말이에요.
미야지마 저는 그것을 좋다고 하는 게 아니고……(웃음)
백영서 그렇죠. 원래 선생님이 소농사회론을 제기한 것은 동아시아 현황을 비판하기 위한 가설이기 때문이었잖아요. 동아시아에 왕권이나 국가권력을 비판할 주체가 왜 없느냐는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서 연구하신 맥락이 있는데, 저는 이것이 중국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를 염두에 두면서 조선사상과의 대화라는 문제를 좀더 생각해보시면 어떨까 하는 겁니다. 이런 논의가 중국인과의 대화를 하는 과정 속에서 오늘의 중국 또는 역사적 중국을 상대화할 수 있고, 비판도 할 수 있는 긴장관계를 유지하기 좋은 게 한국 사례를 가지고 대화하는 방식이 아닐까 해요. 두분 선생님이 그런 소통을 하는 데 적임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얘기드려봤습니다. 이제 이번 대화의 출발점이기도 한 동아시아의 불안을 조성한 중국 요인 또는 제국담론에 대해 이야기 좀 들려주시지요.
세계사적 전환기에 내다보는 동아시아의 미래
임형택 미야지마 선생의 유교적 근대에 대해서 일본의 어떤 지식인이 송대적 근대를 21세기에 재현하려는 제국담론 아니냐는 조로 비판하더군요.
백영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야지마 선생님이 미조구찌와 마찬가지로 송대 이래 중국을 부조적인 수법으로 무언가를 부각시켜서 동아시아 근대 내지 중국적 근대를 실체화하고 있다고 비판도 하죠.
임형택 유교적 근대론을 제국담론이라고 공박하는 것은 황당한 말인데 왜 일본 지식인에게서 그런 말이 거침없이 나올까요? 지금 목전에 중국의 부상을 보면서 일어난 과민반응 아닌가 싶어요. 중국이 어떤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 미지수지만 분명한 것은 옛날 중국의 책봉-조공체계와 같은 제국이 출현할 가능성은 전무하겠지요. 그렇다고 19~20세기에 인류가 경험했던 제국주의와 유사한 형태로 ‘중화제국’이 등장할까요? 이 역시 가능성이 적습니다. 장차 어떤 중국이 될 것인가의 문제는 유학과 관련지어 유추할 필요도 있겠어요. 적어도 유학의 사상 내면에서 폭력적인 제국은 나오지 않습니다. 유학의 긍정적인 면을 잘 살려서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착한 중국’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중국 자체만 아니라 주변의 한국과 일본, 그리고 태평양 건너 미국이 현 상황을 어떻게 끌고 가느냐가 결정적입니다. 한반도의 분단상태가 더욱 악화되고 일본이 중국과 대립각을 세워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미국-일본-한국의 축에 중국-러시아가 대치하는 모양이 만들어져서 동아시아의 신냉전 구도가 형성되면 중국은 필시 제국을 지향할 것입니다. 우리 분단 한반도는 과거 동서 냉전체제하에서 민감한 접점이 되어 엄청난 상처를 입었는데 만약 다시 신냉전 구도로 짜이게 되면 또 어떤 불행한 사태가 오게 될지 십분 우려됩니다.
백영서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방식으로 하면 중국과 대화하는 자세, 중국에 말 거는 게 중요한데, 그걸 저는 뭐라고 표현하느냐면 중국이 우리한테 무엇이냐고 말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지만, 거꾸로 중국에 우리가 무엇이냐고 질문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란 한국과 일본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중국에 일본의 경험이, 한국의 경험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서로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구조적으로 비대칭 관계지만 그렇게 돼야지요. 거꾸로 중국 사람들한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거죠. 그들이 갖고 있는 자원, 그게 중국적 근대든 유교적 근대든, 당신들이 대안적 보편성도 얘기하는데 그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이러저러한 조건과 시험을 통과해야 그 단계로 갈 수 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서 연동하는 한국이나 일본의 경험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거지요. 오늘 논의의 상당부분은 그런 요소들을 의식하고 얘기한 건데, 두분 나름대로 그동안 학문적 성과에 기반해서 말씀하셨고 또 그것이 갖고 있는 소홀한 면에 대해서도 토론을 한 셈입니다. 이 부분이 오늘 논의의 가장 중요한 게 아닌가 싶어요. 제가 제국담론에 관한 글(「중화제국론의 동아시아적 의미」,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 창비 2013)을 쓰면서 한국의 경험에 대비해서 제국담론을 얘기한 것도 그런 뜻이지요. ‘중국이 한국의 분단체제 극복과정에서 제기된 복합국가론에 대한 논의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어떤 국가를 만들지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하다, 그런 걸 염두에 둔 사유의 훈련을 할 때 자연스럽게 중국 내부의 여러 문제, 주변적 존재에 대해서도 더 관심을 갖게 된다, 그것을 포용해야 중국이 원하는 보편성에 도달할 수 있다.’ 이렇게 그들이 갖고 있는 자원을 존중하면서 그 안에서 우리 나름대로 말을 걸고자 했던 겁니다. 마지막으로 정리발언을 부탁드립니다.
임형택 처음부터 중국의 부상과 관련해서 한일관계 문제를 중점에 두고 우리 지식인들의 역할을 논의했는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오늘의 상황을 대원제국이 해체되는 14세기와 비교해보자고. 대원제국의 해체는 중국대륙에 그친 사태가 아니고 유라시아대륙 전역에 걸친 대대적인 역사운동이어서 실로 세계지도가 달라지기에 이르렀지요. 그 과정에서 고려의 지식인들은 우리가 알다시피 친명파, 친원파로 나뉘어 갈등이 일어났지만 결국 타당한 진로를 찾아 역사의 진운에 보조를 맞췄습니다. 조선왕조의 성립이 그것이지요. 이 역사운동을 주도한 것은 성리학으로 정신무장을 한 사대부 지식인들입니다. 제가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당시 지식인들 다수가 원나라에 유학을 하여 관계도 밀접한 편입니다. 그럼에도 대세의 흐름을 읽어서 시대의 진운에 발빠르게 대응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당면한 상황 역시 세계사적 전환기입니다.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이미 부인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포스트 아메리카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단계에 와 있지요. 1차대전 이후로 영국의 패권이 끝났다고 보듯이 미국의 전지구적 패권도 멀지 않은 장래에 역사의 장으로 사라지겠지요. 지금이 아주 중요한 지점입니다. 오늘의 한국 지식인들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어떤 역사적 선택을 할 것인가, 600년 전의 지식인들을 한번 돌아보라고 소리치고 싶습니다. 한국 지식인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지식인들까지 다 함께 마음의 장벽을 헐고 고민을 하며, 백선생 표현대로 말걸기를 하여 이성적 대화를 나눠야 할 때입니다.
백영서 미야지마 선생님은 동아시아적 근대의 전망, 특히 한일관계에 대해 마지막으로 말씀해주시시 않겠어요? 대화 처음에 제기된 한일관계의 전망을 곁들여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미야지마 지금 임선생님이 지적하셨습니다만 대원제국이 붕괴하는 가운데 한국과 일본은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고 봅니다. 조선시대 한국은 중국 이상으로 중국적이 되려고 했으며 그것을 정체성의 근거로 삼게 되었지요. 반대로 일본은 중국이나 한국과 다르다, 그 근거가 무위(武威) 같은 것이었는데, 그런 방향에서 정체성을 찾으려고 했지요. 그래서 중국을 사이에 두고 한국과 일본은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되고 그것이 지금의 역사인식 문제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표면적으로 볼 때는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눈앞에 둔 나라들로서 중심에 대한 주변부의 대응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중국이 다시 거대한 존재로서 재부상하고 있는데, 주변부에 위치한 한국과 일본이 서로 다투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역사를 냉정하게 되돌아보면서 앞으로의 방향을 고민하는 공통의 과제가 있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백영서 두분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말씀하셨지만 지금 우리가 큰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고 그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여러가지 어려운 점이 한일 간의 갈등, 또는 동아시아 여러 국가 간의 충돌로 나타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에는 정부 간의 외교적인 협상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더 큰 문제들이 있다고 할 수 있고요.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역사관이나 근대관에 대한 근원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공통적으로 얘기해주셨죠. 그러면서 흔히 학계에서 얘기하듯이 기존 패러다임을 해체시키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면서 그것을 제대로 세울 근거를 두분이 찾아주셨고 그것을 최근에 논의되는 중국에서의 새로운 문명담론이라든가 새로운 보편성을 추구하는 노력과 비교도 해본 셈이죠.
사실 지금의 중국인과 일본인의 역사감각을 비교해보면 참으로 대조적이에요. 중국인의 자신감 넘치는 감각과 달리, 일본인은 총체적인 자신감 상실 속에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의 고조되는 상호혐오 감정은 여기서 발생하는 거라고 봐요. 이처럼 대조적인 현상은,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한 ‘우등생’,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은 ‘열등생’, 열강의 분할지배의 위기에 처한 중국은 ‘반(半) 열등생’이라는 종래의 익숙한 도식적 역사이해 방식을 뒤집는 게 아닌가요. 그러나 19세기말 20세기초 이래 위세를 떨친 역사인식이든 그에 대조적인 지금의 새로운 역사감각이든 모두 여전히 성공적인 근대에의 적응, 좀더 노골적으로 말해 부국강병을 기준으로 각국의 우열을 가르는 단선적 역사관에 얽매인 것이 아닌지 따져묻고 그 대안을 추구해야 합니다. 오늘의 대화는 바로 그 답을 찾아본 의의가 있다고 봐요.
다만 이러한 논의들이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 과연 한일관계라는 첨예한 당면 문제에 얼마나 요긴한 해결책을 제기했느냐의 문제는 또 얘기될 수 있겠는데, 저는 창비의 편집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논의도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사적인 문제에 대한 해설 또는 전망은 이미 너무나 많은 매체와 회의에서 하고 있으니 광복/종전 70주년을 맞아서 문학과 정론을 겸하는 비판적 종합지인 창비는 그간 해오던 일, 단기과제를 중장기과제와 결합시켜 파악하는 큰 담론의 차원에서 이런 작업을 했다는 것으로 자위하면서 마치려고 합니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매개적인 정체성’을 가진 한국이 맡을 역할, 특히 21세기 실학운동이라 이름할 만한 과제를 감당하며 쉼없이 자기성찰을 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지요. 여기에 적극 협력해서 더운 여름에 나와주신 두 선생님께 깊이 감사합니다. (2015.7.10. 가톨릭청년회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