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자본과 돌봄의 모순
낸시 프레이저 Nancy Fraser
정치철학자, 미국 뉴스쿨(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교수. 국내 번역된 저서로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분배냐, 인정이냐?』(이상 공저) 『지구화 시대의 정의』 등이 있음.
‘돌봄의 위기’(crisis of care)는 현재 공적인 토론에서 주요한 주제 중 하나로,1) ‘시간 빈곤’(time poverty) ‘일-가정 양립’ ‘사회적 소진’(social depletion) 개념과 맞물려 있다. 이처럼 돌봄 위기는 사회적 역할에 관한 여러 핵심 요소를 다방면에서 압박하는 압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압박당하는 부문에는 출산하고 자녀를 돌보는 일, 친구나 가족을 돌보는 일, 가족 혹은 이보다 넓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을 비롯해서 일반적으로 관계망을 유지하는 것도 포함된다.2) 역사적으로 이런 ‘사회 재생산’(social reproduction) 과정은 언제나 남성이 일부 담당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일로 간주되어왔다. 보살핌(affection)과 물질노동으로 구성되며 종종 임금도 지급되지 않는 이 노동은 사회적으로 필수불가결하다. 이 노동 없이는 문화도 경제도 정치구조도 있을 수 없다. 사회 재생산을 체계적으로 약화시키는 사회는 결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런데 오늘날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 사회가 바로 그렇게 하고 있다. 그 결과 주요한 위기, 즉 단순한 돌봄 위기에 국한되지 않는 폭넓은 의미에서 사회 재생산의 위기가 닥친 것이다.
나는 이 위기를 경제·환경·정치 여러 부문을 아우르는 ‘일반 위기’의 한 측면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며 서로를 악화한다. 사회 재생산 부문은 일반 위기의 중요한 차원을 구성함에도 불구하고 주로 경제나 환경적 위험에만 초점을 맞추는 현재 토론의 장에서는 종종 간과된다. 이같은 ‘비판적 분리주의’는 문제적이다. 사회 부문은 광범위한 위기에서 너무도 큰 핵심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 부문 없이는 다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적절히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 역도 성립한다. 즉, 사회 재생산 위기는 홀로 생긴 것도 아니고 그 자체만으로 전체를 제대로 다 파악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한다는 건가? 나는 ‘돌봄 위기’를 금융화 자본주의(financialized capitalism)에서 다소 첨예하게 표출된 사회 재생산적 모순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주장을 펼치려 한다. 이 공식은 두가지 생각으로 이어진다. 첫째, 돌봄에 대한 압박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처한 사회질서 구조, 즉 내가 금융화 자본주의로 특화하는 구조의 체계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리고 두번째는 역설적이게도 현행 사회 재생산의 위기가 자본주의의 현재적 형태인 금융화 자본주의에서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배태한 썩은 고리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나는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 사회가 사회 재생산의 ‘위기 경향’이나 고질적 모순을 담지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회 재생산은 한편으로는 자본축적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조건이 되지만, 무제한 축적을 향한 자본주의의 경향으로 인해 자본은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사회 재생산 과정을 다른 한편으로는 와해하려 한다. 바로 이 자본주의의 사회 재생산 모순이 이른바 돌봄 위기의 뿌리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에 내재되어 있긴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특정한 역사적 형태에 맞추어 그 모양은 다른 형태로 구별되어 나타난다. 즉 19세기의 자유주의적 경쟁 자본주의, 전후 시기의 국가관리 자본주의,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의 신자유주의적 금융화 자본주의 형태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돌봄 결핍은 바로 이 세번째, 가장 최근 자본주의 발전단계의 국면에 나타난 모순의 형태다.
이 논지를 발전시키기 위해 먼저 일반적 형태로서 자본주의 그 자체가 지닌 사회모순을 설명하려 한다. 이어서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두 단계에서 전개된 역사를 대략 설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끝부분에서 현행 금융화 자본주의하에서 자본주의적 사회모순의 표출로서 오늘날의 ‘돌봄 결핍’을 독해해보려고 한다.
생활세계에서의 무임승차
현시대 위기에 관한 대부분의 분석은 자본주의 경제체계에 내재한 모순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문제의 핵심에 자기와해(self-destabilization) 경향이 내재되어 있고, 이것이 주기적 경제위기로 표출된다. 이 관점은 어느 정도까지는 타당하다. 그러나 이 관점으로는 자본주의의 내재적 위기 경향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경제주의 관점을 택함에 따라 여기서 자본주의는 너무 협소하게, 절대적으로 경제체계로서만 접근된다. 이와 달리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를 조금 확대하면, 자본주의의 공식경제와 이에 대한 ‘비경제적’인 배경조건을 아울러 포착할 수 있다. 이렇게 바라보면 사회 재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위기 경향을 포함해서 자본주의의 모든 위기 경향을 전체적으로 개념화하고 비판할 수 있다.
나는 자본주의 경제의 하부체계가 이에 외재하는 사회 재생산 활동에 의존하며, 이것이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배경조건의 하나로 형성된다는 주장을 펼치려고 한다. 다른 배경조건에는 공권력이 수행하는 거버넌스 기능과, ‘생산적 투입’의 원천이자 제품 낭비를 위한 ‘처리시설’로서 자연의 활용성이 포함될 수 있다.3) 그러나 여기서는 자본주의 경제가 사회유대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공급관리, 돌봄제공 및 상호작용 행위에 의존(누군가는 무임승차로 표현할 테지만)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활동에 화폐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은 채 마치 무료인 듯 취급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돌봄’ ‘보살핌 노동’ ‘주체화’(subjectivation)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이 활동은 자본주의식 인간주체를 형성해서 이들을 자연스러운 존재로 체화하도록 유지하는 한편, 이들을 움직임에 따라 하비투스(habitus)와 문화적 에토스를 만들어가는 사회적 존재로도 구성한다. 노인을 돌보고 집을 관리하며 공동체를 이뤄 사회적 협력의 근간이 되는 공통의 가치, 보살핌 경향, 가치의 지평을 지켜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출산해서 아이를 사회화하는 노동도 이 과정에서 핵심을 이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활동의 대부분(전부 다는 아닐지라도)이 시장의 바깥 영역, 즉 집·이웃·시민사회단체·비공식 네트워크나 학교 같은 공공기관에서 실행되며, 임금노동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임금으로 책정되지 않는 사회 재생산 활동은 임금노동, 잉여가치의 축적, 그리고 이런 식의 자본주의 기능에 필수적이다. 사회유대를 유지하고 이해기반을 공유하며, 또 새로운 노동자 세대를 기르거나 기존 노동자를 보충하도록 하는 여러 행위를 비롯해 가사노동, 아동양육, 학교교육, 정서적 돌봄 없이는 위의 그 어느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사회 재생산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배경조건인 것이다.4)
그러나 적어도 산업시대 이후로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 재생산 노동을 경제 생산으로부터 분리했다. 사회 재생산 노동은 여성과, 경제 생산은 남성과 연계하면서 ‘생산노동’은 화폐로 지불된 반면, ‘재생산’ 활동은 ‘사랑’이나 ‘선행’으로 주조되어 보상되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런 식으로 근대적 형태의 새로운 여성 종속화의 제도적 기초를 닦았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활동이 벌어지는 좀더 큰 틀(이 틀에서는 기존의 여성 노동이 나름의 영역으로 인정되었다)에서 재생산 노동을 떼어내 사회적 중요성이 애매한 ‘가내 영역’(domestic sphere)을 새롭게 만들고 이 영역으로 재생산 노동을 떠넘겼다. 그리고 화폐가 권력의 중요한 매개로 활약하는 이 새로운 세계에서 사회 재생산 쟁점은 무임금으로 처리되었다. 이 일이 임금노동을 위한 필수 전제가 됨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하는 사람은 임금노동자에게 구조적으로 종속된다. 더 나아가 이 노동은 새로운 가내 여성성이라는 이상형(ideal)으로 강력하게 신비화된다.
이렇게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 재생산과 경제 생산을 분리해서 전자를 여성으로 연결해 이 노동의 중요성과 가치를 애매하게 감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 사회는 그 가치를 부정하는 사회 재생산의 동일한 바로 그 과정에 공식 경제가 의존하도록 만든다. 분리 겸 의존 겸 부정(separation-cum-dependence-cum-disavowal)라는 이 독특한 관계가 불안정성의 내재적 원천이다. 한편으로 자본주의 경제 생산은 자생적이지 않고 오히려 사회 재생산에 의존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무제한의 축적을 향한 자본주의의 충동은 자본(및 우리 모두)이 필요로 하는 재생산 과정과 역할 자체를 와해하는 위협이 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목도하고 있듯, 그 결과로 자본주의 경제에 필요한 사회조건의 파멸이 야기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자본주의 사회에 깊이 내재한 ‘사회모순’이 자리한다. 맑스주의자들이 강조한 경제모순과 마찬가지로 사회모순도 위기 경향을 담지한다. 그러나 이때의 모순은 자본주의 경제의 ‘내부’가 아닌 경계에 자리잡는다. 그 경계에서 생산과 재생산은 동시적으로 분리와 연결을 거듭한다. 경제 내적이지도, 가내 내적이지도 않은 이 모순은 자본주의 사회의 두가지 구성요소로 인해 발생한다. 물론 이 모순은 때때로 묻힌 상태로, 관련된 위기 경향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축적을 확대하는 자본의 충동이 사회기반의 제약이라는 고리를 끊고, 거꾸로 사회기반을 공격하는 것으로 뒤바뀌면 그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되면 경제생산 논리가 사회 재생산을 압도해서 자본이 의존하는 바로 그 과정을 와해시켜 장기간 축적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가내 영역이나 공공 영역 모두의 사회적 역할을 위태롭게 만든다. 그 결과, 자본축적의 동력은 자체 가능성의 조건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잠식해 들어간다.
역사적 현실화
이는 ‘통상 이야기되는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사회적 위기 경향의 구조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축적 형태나 레짐으로 존재했다. 사실 사회 재생산의 자본주의적 구성은, 특히 위기 시에 사회주체가 ‘경제’와 ‘사회’ 간, ‘생산’과 ‘재생산’ 간, ‘일’과 ‘가정’ 간의 범위를 정하거나 바꾸는 투쟁을 벌이며 진행된 정치적 논쟁의 결과를 통해 종종 중요한 역사적 변화를 거쳤다. 내가 ‘범주투쟁’(boundary struggles)이라 부르는 이 논쟁은 맑스(K. Marx)가 분석한 계급투쟁만큼이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핵심을 차지하며, 이로 인해 생겨난 변동이 시대적 전환의 구분점이 된다.5) 이 변동을 설명하는 관점은 자본주의 역사를 고려할 때 최소 세가지의 사회 재생산 겸 경제 생산 레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19세기 자유주의적 경쟁 자본주의 레짐이다. 이 레짐은 중심부 유럽의 산업 착취와 주변부의 식민적 징발을 결합한 것으로, 국가가 열외로 비껴서 관망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노동자는 ‘자율적으로’, 즉 화폐화되는 가치의 순환 밖에서 스스로를 재생산하도록 내버려두는 경향을 보인다. 더불어 이 레짐은 다른 한편으로 새롭게 부르주아적 상상력을 통한 가내생활(domesticity)을 창출한다. 이 레짐은 사회 재생산을 사적인 가족 내 여성의 분야로 만들어 ‘분리된 영역’(separate sphere)이라는 이상형을 정교화한다. 이것이 이상형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이 현실에서 이를 갖출 조건조차 박탈당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둘째 레짐은 20세기 국가관리 자본주의다. 이 레짐은 중심부의 대규모 산업생산과 국내 소비주의를 전제로 하면서, 주변부에서는 계속된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의 징발을 버팀목으로 해서 국가와 기업이 지원하는 사회복지를 통해 사회 재생산을 내재화한다. 이 레짐은 빅토리아식의 분리된 영역 모델을 수정해서 더 현대화된 형태로 ‘가족임금’(family wage)이라는 이상형을 도모한다. 다시 언급하지만, 이 이상형을 현실화할 수 있는 가족은 상대적으로 매우 드물다.
셋째 레짐은 현시대에서 세계화하는 금융화 자본주의다. 이 레짐은 제조업을 저임금 지역으로 이전하고 여성을 유급노동력으로 충원하면서 사회복지에 대한 국가와 기업의 투자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이 레짐은 돌봄노동을 가족과 공동체로 외화하는 동시에 돌봄노동을 수행할 이들의 역할을 축소하고 있다. 그 결과 불평등이 커지는 속에서 사회 재생산의 이중 조직화가 일어난다. 즉 지불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상품화하고,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민영화되는 방식이 자리잡는다. 이런 식으로 ‘맞벌이 가족’이라는 더 현대적인 이상형이 펼쳐진다.
이렇게 각각의 레짐에서 자본주의 생산을 위한 사회 재생산 조건은 상이한 제도적 형태를 전제하는 상이한 규범질서를 구체화한다. 먼저 ‘분리된 영역’이더니 다음에는 ‘가족임금’이 되고 이제는 ‘맞벌이 가족’이 된 것이다. 물론 개별 사례마다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모순도 상이한 외형으로 전제되고 위기 현상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표현이 적용된다. 그렇게 마침내 각 레짐에서 자본주의의 사회모순은 상이한 형태의 사회투쟁(물론 계급투쟁, 그리고 범주투쟁)을 야기한다. 둘 모두 여성, 노예, 식민지민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다른 투쟁들과 뒤얽힌다.
주부화(housewifization)
먼저 19세기 자유주의적 경쟁 자본주의부터 살펴보자. 이 시기에 생산과 재생산 요소는 서로 직접 모순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 중심부의 초기 제조업 부문에서 산업가들은 여성과 아이들을 강제로 공장과 광산으로 끌어들이며 이들의 값싼 노동과 순종성을 칭송해 마지않았다. 턱없이 부족한 보수를 받으며 유해한 조건에서 장기간 노동하는 이 노동자들은 자본 생산성을 지탱하는 사회관계나 사회역량에 대한 자본의 무시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6) 그 결과 두가지 수준에서 위기가 닥쳤다. 한편으로 가난한 노동계급의 사회 재생산 위기가 생겼다. 생계를 유지하고 노동력을 보충하는 이들의 역량이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끊어지고 만 것이다. 다른 한편의 위기는 중간계급에 도덕적 공황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가족의 파괴’와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탈성차’(de-sexing)로 충격에 빠졌다. 사태가 너무 심각해서 맑스나 엥겔스(F. Engels) 같은 빈틈없는 비판가들조차 경제 생산과 사회 재생산이 정면으로 충돌한 이런 초기 형태를 최종 국면으로 잘못 파악하고 말았다. 이들은 자본주의가 노동계급 가족을 제거하고 최종 위기로 진입한 것처럼 여겼기 때문에 체계를 통해 여성억압의 기반도 뿌리 뽑혔다고 간주했다.7) 그러나 실상은 거꾸로였다. 오랜 기간에 걸쳐 자본주의 사회는 이 모순을 관리하는 자원을 발굴했다. 즉 부분적으로는 현대화된 제한적 형태로 ‘가족’을 창출하는 방식, 또 새롭고도 강화된 의미로 젠더 차이를 고안하는 방식, 그리고 남성지배를 현대화하는 방식을 발굴했다.
중심부 유럽에서는 보호법 제도(protective legislation)를 통해 조정 과정이 시작되었다. 공장노동에서 여성과 아동에 대한 착취를 제한해서 사회 재생산을 안정화할 생각이었다.8) 중간계급 개혁가들이 앞장서고 초기 노동자 조직이 연대한 이 ‘해결책’은 상이한 동기가 어떤 식으로 복잡하게 결합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한쪽의 목표는 칼 폴라니(Karl Polanyi)가 제대로 설명하듯, ‘경제’에 맞서 ‘사회’를 옹호하는 것이었다.9) 다른 쪽의 목표는 ‘젠더 평준화’(gender levelling,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여성이 같은 수준의 지위로 조정되는 평준화—옮긴이)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두가지 동기는 다시 가족 내 여성이나 아동에 대한 남성적 권위에 대한 집착과 뒤섞였다.10) 그 결과 사회 재생산의 통합성을 보장하기 위한 투쟁은 남성지배의 옹호와 맞물리게 된다.
비록 노예제도와 식민주의가 주변부에서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이긴 했지만, 이 개혁이 의도한 결과는 자본주의 중심부에 놓인 사회모순을 덮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적 경쟁 자본주의는 마리아 미즈(Maria Mies)가 식민화의 이면으로 설명한 ‘주부화’11)를 만들어내면서 분리된 영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젠더 상상계를 고안했다. 여기에서 여성은 ‘집안의 수호천사’로 그려졌고 그 천사들은 변덕스러운 경제에 맞서 균형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치열한 생산의 세계는 ‘무자비한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와 나란히 옆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12) 각자 할당된 자리를 지키며 상대방을 보완하는 역할에 충실히 복무하는 한, 둘 사이의 잠재적 갈등은 표면화되지 않는 상태로 남는다.
현실에서 이 ‘해결책’은 오히려 휘청댔다. 보호법 제도는 임금이 가족 유지에 필요한 수준 이하에 머물면, 노동 재생산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오염된 공기로 그득한 곳에서는 프라이버시도 보장받지 못하고 폐도 손상되어 보호법이 제대로 작동한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또 보호법 제도는 고용이 (제대로 보장된다 해도) 파산이나 시장붕괴, 금융공황 등으로 요동치는 상황에서는 노동 재생산을 보장하지 못한다. 더욱이 이런 상황이라면 노동자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만족하지 못하면 더 높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조건을 선동하며 노동조합을 결성해 파업하고 노동당이나 사회주의 정당에 가입할 것이다. 이렇게 첨예하면서도 폭넓게 번진 계급갈등 상황에 직면한 자본주의는 그 미래를 결코 보장받지 못한다.
분리된 영역도 마찬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가난하며 인종차별 받는 노동계급 여성에게 빅토리아시대의 가정생활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보호법 제도로 직접 착취는 완화될지 모르지만 잃어버린 임금을 보상할 물적 지원은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중간계급 여성의 경우에도 빅토리아시대의 이상형에 맞추는 것이 언제나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물적 안정과 도덕적 위세를 누리는 댓가로 법적 약자로서 제도화된 종속을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분리된 영역이라는 ‘해결책’은 두 집단 모두에 대체로 여성의 희생을 댓가로 요구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두 집단은 서로 반대편 입장에 놓이기도 했다. 19세기 매춘을 둘러싼 투쟁이 그 사례로, 빅토리아적 중간계급 여성은 박애주의 관심의 측면에, 반대편에는 ‘타락한 자매들’의 물적 이해관계가 배치되었다.13)
주변부에서는 이와 조금 다른 양상이 전개되었다. 약탈적 식민지배로 인해 피식민지인들이 황폐화됨에 따라, 분리된 영역도, 사회보호 정책도 제대로 자리잡고 통용되지 못했다. 중심부 권력은 토착적 사회 재생산 관계를 보호하려 애쓰기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파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값싼 식료품, 의류, 광물·광석이나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농민은 약탈당하고 농민 공동체는 붕괴되었다. 이런 약탈 없이 중심부 산업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이윤축적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미대륙에서는 플랜테이션 경영자들이 여성의 재생산 능력을 노예화하는 이윤 추구를 제도화해 노예가족들은 서로 다른 농장주에게 가족원이 팔려나가는 고통을 계속 견뎌야 했다.14) 토착민 자녀들도 비슷하게, 공동체를 강제로 떠나 기독교 학교로 편입되어 동화라는 규율에 강제 종속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15) 이런 상황을 합리화하는 데 ‘후진적이며 가부장적인’ 전자본주의적 토착민 친족관계는 잘 들어맞았다. 이와 맞물려 식민주의자로서, 박애주의자라 주장하는 여성들은 ‘백인 남성이 갈색 남성에 맞서 갈색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하는 식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했다.16)
페미니즘운동은 주변부나 중심부 모두에서 마치 정치적 지뢰밭을 걷는 듯한 상황이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투표권, 섹스 거부권, 재산 소유권, 계약 주체로 참여할 권리를 요구하며 직업을 갖고 임금을 관리하는 한편, 남편의 보호를 받는 아내의 신분이나 분리된 영역 개념은 거부하는 식으로 양육이라는 ‘여성적’ 이상에 대한 자율성을 행사하기 위한 ‘남성적’ 염원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점은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대응관계에 있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미약하나마 동의한 부분이다. 즉 임금노동으로의 여성진출을 해방의 일환으로 간주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도 재생산보다 생산과 결합된 ‘남성’ 가치를 선호했다. 이 결합은 물론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나름의 깊은 직관이 자리하고 있다. 즉 새로운 형태의 지배관계가 생기긴 했지만 전통적인 친족관계를 잠식한 자본주의로 인해 일종의 해방의 순간이 가능해진 측면도 있는 것이다.
진퇴양난에 처한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폴라니의 이중 운동(double movement) 중 어느 것에서도 안정감을 느끼지 못했다. 남성지배와 연결된 사회보호도 불만스러웠고 사회 재생산을 무시한 시장화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유질서를 간단히 거부할 수도, 온전히 받아안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해방을 안겨줄 제3의 대안이었다. 페미니스트들이 체화할 수 있는 범위의 용어를 위해, 폴라니식 이중 묘사를 해체한 대신 ‘3중 운동’(triple movement) 개념이 등장했다. 세 측면을 갖는 이 갈등에서는 보호와 시장화 요소만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의 측면과도 또 서로 충돌한다. 즉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페미니스트와 사회주의자, 폐지론자, 반식민주의자들도 충돌한다. 다시 말해 심지어 폴라니식 두개의 힘을 제어하기 위해 서로 노력하던 집단들 사이에서도 충돌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이론의 예측과 달리 그리 쉽게 실천으로 옮겨지지 못했다. ‘경제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노력이 젠더위계를 옹호하는 것으로 통용되면서, 남성지배를 반대하는 페미니스트 입장이 노동계급과 주변부 공동체를 약탈하는 경제권력을 지지하는 것처럼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이 결합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어 다층적 모순(제국주의 사이의 전쟁, 경제불황, 국제적 금융 혼란의 진통)의 무게에 눌려 자유주의적 경쟁 자본주의가 붕괴되고 20세기 중반에 국가관리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레짐이 등장할 때까지 이어졌다.
포드주의와 가족임금
대공황과 2차대전의 폐허에서 부상한 국가관리 자본주의는 경제 생산과 사회 재생산의 모순을 다른 방법, 즉 국가권력을 재생산에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 이 시기 국가는 ‘사회복지’를 공적 책임으로 전제하면서 사회 재생산의 부식효과를 막기 위해 착취뿐 아니라 대량 실업도 고려했다. 이 목표는 실현 능력에서는 차이가 있었지만, 중심부 자본주의의 민주적 복지국가와 주변부의 신생 독립 개발도상국 모두 채택한 것이었다.
또다시 동기가 뒤섞였다. 계몽 엘리트는 이윤 극대화를 위한 자본주의의 단기 이익이 지속적인 이윤축적이라는 장기적 요구사안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국가자본주의 레짐은 대중동원이 가능한 시대에 혁명이라는 유령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체계를 자체파멸적인 성향으로부터도 구해야 하는 맥락에서 탄생했다. 생산성과 이윤율은 누더기 같은 혁명적 폭도들이 아닌, 자본주의와 이해관계가 맞물린 건강하고 교육받은 노동력의 ‘생명정치적’ 개발을 필요로 했다.17) 기업지원으로 보충되는 보건의료, 학교, 보육, 노후연금의 공적 투자는 이 시기에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자본주의 관계가 사회생활에 침투함으로써 노동계급은 더이상 스스로에 의존해 자기를 재생산하는 존재로 간주되지 않았다. 이 조건에서 사회 재생산은 자본주의 질서의 관리 영역으로 공식화되어 편입되고 내재화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새롭게 문제시된 경제적 ‘수요’와 딱 맞아 들어갔다. 자본주의의 태생적인 성장-불황 주기를 완화하기 위해 경제개혁가들은 지속성장을 보장할 방도를 모색했고 이를 위해 자본주의 중심부의 노동자들이 소비자로서 이중 의무를 지니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노동조합을 용인해서 고임금을 보장하고 공공부문 지출을 통해 직업을 창출하는 식으로 정책입안자들은 가구를 사적인 공간, 대량생산된 제품이 일상용품으로 가내에서 소비될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18) 한편으로는 조립라인을 노동계급 가족의 소비주의와 연계하고, 다른 한편으로 국가지원 재생산과 연계하는 이같은 포드주의 모델로 시장화와 사회보호의 신 종합판이 주조되었다. 폴라니가 안티테제로 고려했던 바로 그 프로젝트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여성과 남성 모두가, 스스로를 위한다는 이유를 바탕으로 공적 제공을 위한 투쟁을 선봉에서 지지했다. 이들에게는 민주시민으로서 사회의 온전한 구성원이 되는 것이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이를 통해 존엄, 권리, 존중, 물적 안녕 등의 모든 것들이 안전한 가족생활의 필수요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사회민주주의를 받아안게 된 노동계급은 모든 것을 소비하는 경제생산의 역동성에 맞서 사회 재생산의 가치를 드높여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들은 공장, 제도, 기계가 아닌 가족, 국가, 생활세계를 위해 투표권을 행사했다. 자유주의 레짐의 보호 법안과 달리 국가자본주의 방식은 계급 타협을 통해 도출되었고 민주적 진전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또 이전 시기의 자유주의 레짐과 달리 새롭게 자리잡은 제도로 인해 사회 재생산이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안정세를 유지했다. 중심부 자본주의에서 다수 민족에 속하는(majority-ethnicity) 노동자는 가족생활에 가해지는 물적 압력을 완화하면서 정치적 통합을 증진할 수 있었다.
한편, 서둘러 황금기를 선포하기 전에 이런 업적을 가능하게 한 구조적 배제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중심부에서 사회 재생산의 옹호는 (신)제국주의와 뒤얽혔다. 포드주의 레짐의 사회적 재정지원은 일부 주변부(‘중심부 내의 주변부’도 포함)를 전유하는 방식, 즉 탈식민 이후 구식 혹은 신식 형태로 계속 이어진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19) 한편 탈식민 국가들은 냉전의 핵심으로 포획돼 이미 제국주의의 약탈에 더해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라는 이름하에 많은 자원을 빼앗기는 상황에 처했다. 게다가 개발 프로젝트들은 종종 ‘탈식민지 자국민’에 대한 전유를 포함하는 수준까지 치달았다. 농촌 인구는 홀로 자립을 모색하는 처지에 놓여, 주변부 대다수에게 사회 재생산은 외부 부문으로 남게 되었다. 또 이전과 마찬가지로 국가관리 레짐도 인종적 위계와 뒤얽혔다. 미국 사회보험은 가내 노동자와 농업노동자를 배제함으로써 사회적 재정지원 혜택에서 대다수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제외했다.20) 그뿐 아니라 노예제 시기에 시작된 재생산 노동의 인종분업이 흑인 차별 정책하에 새로운 외양으로 탈바꿈한 뒤, 유색인 여성은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백인’ 가족의 집을 청소하고 아이를 양육하는 저임금 일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21)
젠더 위계 역시 이 제도에 잔존했다. 대략 1930년대부터 1950년대 말, 페미니즘운동이 대중의 시선을 많이 사로잡을 정도로 성장하기 전까지는 노동계급의 품위를 위해 ‘가족임금’이, 가구 내 남성 권위가, 엄격한 의미에서 젠더 차별이 필요하다는 관점이 거의 문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그 결과 중심부 국가의 국가관리 자본주의는 이성애 규범,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 젠더화된 가족 내 여성 전업주부 모델을 대체로 유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사회 재생산에 대한 공적 투자가 이런 규범을 더 강화했다. 미국에서 복지제도는 이중화된 형태로 전개되었다. 즉 남성 임금에 접근하지 못하는 (‘백인’) 여성이나 아이들을 위한 낙인찍기식 빈민 구제, 그리고 ‘노동자’로 구성되는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사회보험으로 이분화되었다.22) 이와 달리 유럽에서는 남성중심적 위계가 상이하게 자리잡았다. 출산촉진론자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또 국가 간 경쟁 구도하에 모성연금 그리고 임금노동과 연계된 재정지원 두 갈래로 나뉘었다.23) 두 모델 모두 가족임금제를 전제하고 지지했다. 이렇게 가족과 노동을 남성중심적 이해를 토대로 제도화함으로써 이성애 규범성과 젠더 위계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고 결국 정치적 문제의 소지가 되지 못하도록 밀려났다.
수십년간 자본주의의 사회모순이 이로 인해 완화된 측면도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결국 사회민주주의는 해방을 댓가로 치르면서 사회보호와 시장화 사이의 동맹을 만들었다. 그러나 국가관리 레짐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첫째는 정치적 이유다. 1960년대에 관료적 가부장제뿐 아니라 제국적·젠더적·인종적 배제에 맞서 해방의 이름으로 신좌파가 전지구적으로 도전장을 내밀며 봉기를 일으킴에 따라 레짐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둘째로, 1970년대에 경제적으로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생산위기’로 인한 경기침체와 제조업 부문의 이윤율 하락이 신자유주의의 노력에 힘을 더해 시장화의 고삐가 풀렸다. 두개의 요소가 힘을 합쳤던 상황에서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것은 사회보호였다.
맞벌이 가구
이전 시기의 자유주의 레짐과 마찬가지로 국가관리 자본주의 질서도 장기간의 위기가 이어지면서 파경을 맞았다. 미래를 잘 전망하는 관찰자들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레짐, 즉 지금 이 시대 금융화된 자본주의라는 레짐의 출현 기미를 알아차렸다. 세계화하면서 신자유주의적인 이 레짐은 국가와 기업이 사회복지로부터 투자를 철회하도록 독려하는 한편으로 여성은 유급노동력으로 충원하고 돌봄노동은 가족과 공동체로 외부화하여 이들이 실제로 돌봄노동을 수행할 역량을 감소시킨다. 그 결과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을 위한 상품화된 조직과 지불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개인화된 조직으로 이중화되어, 후자 가운데 일부가 (저)임금으로 전자를 위해 돌봄노동을 제공하는 새로운 재생산 조직이 나타났다. 이와 더불어 페미니즘의 연이은 비판과 탈산업화로 인해 ‘가족임금’은 더이상 신뢰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기존의 이상형은 오늘날 ‘맞벌이 가족’ 규범으로 대체된다.
이런 발전의 주요 추동요인이면서 이 레짐을 규정하는 특징은 부채를 새롭게 중심에 두는 것이다. 부채는 글로벌 금융기관이 국가를 압박해 사회지출을 삭감하게 하고, 긴축을 강요하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방어할 능력이 없는 집단들로부터 가치를 뽑아내는 데서는 투자자들과 한통속이기도 했다. 기업이 에너지, 물, 경작 가능한 토지, ‘온실가스 감축’을 지원할 자원에 대한 매점매석을 목표로, 토지수탈 방식을 새롭게 편성해 남반구 농민들의 수확물을 약탈하는 것도 대체로 이 부채를 통해서다. 역사적으로 중심부를 차지하던 곳에서 축적이 진행되는 것도 역시 이 부채를 통해 지속된다. 저임금의 불안정한 서비스 노동이 노동조합에 가입한 산업노동자를 대체함에 따라 임금은 재생산을 위한 사회적 필수비용 이하로 떨어진다. 이같은 ‘임시변통식 경제’(gig economy)에서 소비자의 지출은 그들의 신용 확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신용 부문이 큰 폭으로 확대된다.24) 다시 정리하면, 자본이 노동을 떼어내고 국가를 길들이고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부를 이전하고 가구, 가족, 공동체와 자연으로부터 가치를 뽑아 흡수하는 이런 모든 일이 점차 부채를 통해 진행된다는 의미다.
그 결과 자본주의에 내재한, 경제 생산과 사회 재생산 사이의 모순은 더 강화된다. 앞선 레짐은 국가에 힘을 부여해서 공적 제공을 통해 재생산을 안정화하는 방식을 활용해, 민간기업의 단기 이익을 이윤축적 유지를 위한 장기 목표에 종속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이 레짐은 금융자본이 국가와 대중을 길들여 민간투자에서 즉각적 이익을 뽑아낼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특히 사회 재생산에 대한 공공의 투자에 대한 회수를 요구하고 있다. 또 앞선 레짐이 해방에 대항하기 위해 사회보호를 시장화와 연결했다면, 이 레짐은 더 왜곡된 구조를 추진하는 속에서 해방이 시장화와 결합해서 사회보호를 잠식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 새로운 레짐은 두가지 다른 판의 투쟁이 운명적으로 교차하는 상황으로부터 출현하게 되었다. 하나의 투쟁은 자유화·세계화하는 자본주의 경제를 적극 추진하는 성장세의 자유시장주의자들과 중심부 국가들의 쇠락하는 노동운동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 후자는 한때 사회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패배한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수세에 몰려 있다. 다른 하나의 투쟁은 젠더, 성, ‘인종’, 민족과 종교의 위계에 반대하는 ‘신사회운동’과 신(新)경제의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의 위협으로부터 기존의 생활세계와 특권을 지키고자 하는 집단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두가지 투쟁이 충돌하면서 기대하지 못한 결과가 나타났다. 그것은 ‘다양성’, 능력주의(meritocracy), ‘해방’을 칭송하는 한편으로 사회보호를 붕괴하고 사회 재생산을 재-외화(re-externalizing)하는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부상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는 방어벽이 없는 국민을 자본이 약탈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해방을 시장의 방식으로 재정의하는 데까지 이어졌다.25) 해방을 향한 운동들도 이 과정에 참여해, 이를테면 인종차별 반대, 다문화주의, LGBT 해방, 환경운동을 포함한 이 모두가 시장친화적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부화하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가 장기간 젠더와 사회 재생산을 얽어매왔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이런 궤적은 운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앞선 레짐들의 발자취를 따라 금융화 자본주의도 젠더를 기반으로 생산-재생산 분업을 제도화하지만, 이전과 달리 지배적인 이상형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젠더평등이다. 즉 여성은 모든 분야에서 남성과 평등하게, 특히 생산 부문에서 자신의 능력을 현실화할 동등한 기회를 보장받는다고 간주된다. 반대로 재생산은 후진적 잔재로서 진전을 방해하는 것으로, 해방을 위한 길을 다지는 데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된다. 25)
페미니즘적 아우라를 풍기고 있음에도, 혹은 풍긴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이 개념은 자본주의적 사회모순의 현재적 형태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면서 새롭게 강도를 더하고 있다. 공적 재정지원을 줄이고 여성을 임금노동에 충원하는 금융화 자본주의는 이를 통해 실질임금을 축소해서 가구당 가족유지를 위해 필요한 유급노동시간을 늘리고, 돌봄노동을 타인에게 이전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절박한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26) 이 레짐은 ‘돌봄 간극’(care gap)을 메우기 위해 빈국의 이주민을 부국으로 수입한다. 이는 흔히 인종화된 형태, 즉 더 특권을 누리던 이전 세대 여성의 재생산과 돌봄노동을 가난한 지역의 농촌 여성이 대체하던 형태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 이주민은 자신의 가족과 공동체적 책임을 다시 더 가난한 돌봄제공자(caregivers)에게 전가해야만 한다. 더 가난한 돌봄제공자 역시 마찬가지로 또다른 누군가에게 자기 가족과 공동체의 일을 떠넘겨야 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끝없이 ‘글로벌 돌봄사슬’(global care chains)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돌봄의 간극은 이런 식으로 채워지지 않고, 오히려 부유한 가족으로부터 가난한 가족으로, 북반구로부터 남반부로 대체되는 결과로 이어질 뿐이다.27) 이 시나리오는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종속되어 재정난과 부채에 시달리는 탈식민국가가 활용하는 젠더차별적 전략과 딱 들어맞는다. 현찰이 절박하게 필요한 일부 국가는 송금을 빌미로 해외에서 유급 돌봄노동을 수행하라고 여성이주를 적극 장려하고 다른 국가에서는 여성노동자 고용을 선호하는 섬유나 전자조립 회사 설립을 위한 수출가공지대를 통해 해외직접투자를 유치하려 한다.28) 둘 중 어느 방법을 택해도 사회 재생산 역량은 한층 더 압박당할 뿐이다.
최근 미국에서 전개된 두 사례가 사태의 심각성을 잘 드러낸다. 첫째는 급부상하며 유행하는 ‘냉동 난자’(egg-freezing) 현상이다. 통상 1만 달러의 비용이 드는 이 과정은 현재 고숙련 여성 근무자에 대한 일종의 부가혜택처럼 IT 업계에서 무료로 제공된다. 이렇게 능력있는 노동자를 모집하고 고용하려 애쓰는 애플이나 페이스북 같은 기업은 이 여성들에게 임신을 늦출 수 있는 강한 동기를 유발하기 위해 이렇게 제안한다. ‘일단 기다렸다가 40대, 50대, 더 나아가 60대에 자녀를 가지는 걸 생각해봐요. 가장 에너지 왕성하고 생산력이 높은 시절은 우리에게 헌신하세요.’29) 둘째 사안도 비슷한 맥락에서 재생산과 생산 사이의 모순을 단적으로 드러내는데, 값비싸고 높은 기술력을 요하는 모유 압착기의 확산이다. 이는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높으면서도 유급출산휴가나 부모양육휴가가 의무가 아니고 게다가 테크놀로지와 열광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이 나라에서 가장 좋아하는 '해결책'이다. 이 나라는 모유 수유가 관습상 필수라고 여기는데 그것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변화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개인의 젖을 아기에게 물려 빨게 하는 문제는 더이상 개인의 ‘모유 수유’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개인의 모유를 기계적으로 압착해서 보관하고 유모가 나중에 병에 담아 수유하는 식으로 변화된 것이다. 극심한 시간 빈곤의 상황에서 두개의 컵에 핸즈프리 압착기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선호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해야 고속도로를 운전하며 근무지를 향해 가는 여성이 운전 중에도 양쪽 가슴에서 모유를 한번에 압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30)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사회 재생산을 위한 투쟁이 최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그리 새삼스러울 것 없지 않나? 북반구의 페미니스트들은 종종 관심사를 ‘가족과 노동의 균형’에 집중한다.31) 그러나 사회 재생산을 둘러싼 투쟁은 더 큰 맥락을 포괄한다. 이를테면 주택·건강·음식 안전·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위한 지역공동체운동, 이주민·가사노동자·공공 서비스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 영리형 요양시설·병원·보육시설에서 일하는 서비스 부문 노동자의 노동조합 가입을 위한 캠페인, 보육이나 노인돌봄을 위한 공공서비스 확충, 근로시간 단축, 넉넉하게 지급되는 유급모성휴가나 부모양육휴가 등이 포함된다. 이 모든 주장은 생산과 재생산 간의 관계를 대대적으로 재구조화하는 수준에 필적하는 변화를 요구한다. 즉 모든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피부색의 사람들에게 사회 재생산 활동이 안전하고 흥미롭고 보상을 제대로 받는 노동과 결합된 형태로 주어질 수 있는 사회적 배치가 필요한 것이다.
사회 재생산을 둘러싼 범주투쟁은 경제 생산에 대한 계급투쟁이 그렇듯 현재 위기국면의 핵심이다. 무엇보다 범주투쟁은 금융화 자본주의의 구조적 동력의 근저에 놓인 ‘돌봄 위기’에 대한 대응이다. 세계화하면서 부채에 의해 추진되는 이 자본주의는 사회적 연줄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역량을 체계적으로 착취한다. 이 자본주의는 맞벌이 가족이라는 새로운 이상형을 내세우는 식으로 해방을 위한 운동을 복원한다. 사회보호의 잔당들에 맞서 시장화 요소와 결합한 이 존재는 이제 모습을 바꿔 점차 분노를 표출하는 광신적 애국주의자로 변모하고 있다.
또다른 돌연변이?
이 위기 이후 무엇이 찾아올까? 자본주의 사회는 역사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다양한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일반적인 위기의 순간에 다층적(정치, 경제, 생태, 사회 재생산적) 모순이 뒤엉키고 서로를 악화하는 상황이 되면 자본주의의 구성적인 제도적 분업의 영역(경제가 정치와 접하고, 사회가 자연과 접하고, 생산이 재생산과 접하는 바로 그 영역)에서 범주투쟁이 발발했다. 이런 범주에서 사회적 행위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제도적 지형을 다시 그릴 수 있게 동원되었다. 이런 노력을 통해 변화가 먼저 19세기 자유주의적 경쟁자본주의로부터 20세기 국가관리 자본주의로, 그리고 다시 현재의 금융화 자본주의로 나타났다. 역사적으로도 사회 재생산을 경제 생산과 구분하는 범주가 투쟁의 주요 영역이자 쟁점으로 떠오름에 따라, 자본주의적 사회모순도 위기 촉진에 중요한 흐름을 만들었다. 개별 상황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젠더질서는 경합을 벌였고 그 결과는 세가지 운동(시장화, 사회보호, 해방)의 원칙적 입장 사이에서 동맹이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이런 역동성으로 인해 처음에는 분리된 영역에서 가족임금으로, 그러고 나서는 맞벌이 가족으로의 변화가 도출되었다.
현재의 위기국면 이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금융화 자본주의의 현재 모순은 일반 위기로 고려될 만큼 심각해서 자본주의 사회의 또다른 변이를 기약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는가? 현재의 위기는 투쟁의 규모를 매우 큰 폭으로 확대해서 현행 레짐의 변혁으로 이끌게 될 것인가?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시장화와 밀월관계인 주류 운동과 거리를 두면서 해방과 사회보호라는 새로운 동맹을 구축할 수 있을까? 만일 이렇게 된다면 그 목표는 또 무엇이 되어야 할까? 재생산-생산의 분업은 오늘날 어떤 식으로 재창출될 수 있을까? 또 맞벌이 가족을 대체해서 어떤 유형이 등장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이 위의 질문들에 직접적인 답변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맥락에서 현재 위기국면을 조망한 것이라고 할 수는 있다. 특히 나는 오늘날 ‘돌봄의 위기’가 자본주의에 내재된 사회적 모순에 뿌리내리고 있거나 더 나아가 금융화 자본주의에 전제된 모순이라는 분명한 형태를 띤다고 제언하려 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금의 위기는 사회정책을 손본다고 해결될 사안은 아닌 것이다. 제대로 해결하려면 지금의 사회질서를 뿌리부터 구조적으로 변혁해야만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재생산을 생산에 종속해 폭리를 취하는 금융화 자본주의를 극복해야만 한다. 그것도 해방이나 사회보호 그 어느 것도 희생하지 않고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생산-재생산의 구분을 재고해야 하고 젠더질서도 새롭게 상상해야 한다. 그 결과가 끝내 자본주의와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여부는 지켜볼 수밖에 없다.
번역: 문현아(文賢雅)/건강과 대안 연구위원
- 이 글의 원제는 “Contradictions of Capital and Care”이며, 『뉴레프트리뷰』(New Left Review) 2016년 7-8월호에 발표되었다. ⓒ Nancy Fraser 2016/한국어판 ⓒ 창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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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불어판으로 2016년 6월 14일에 빠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마르끄 블로흐 강연에서 발표했고 연구원 웹사이트에 원고가 있다. 삐에르씨릴 오꾀르(Pierre-Cyrille Hautcœur)의 강연 초청, 요한나 옥살라( Johanna Oksala)의 흥미진진한 토론 유도, 말라 툰(Mala Htun)과 엘리 자레츠키(Eli Zaretsky)의 유익한 논평, 쎌림 헤퍼(Selim Heper)의 연구 지원에 감사를 전한다.
2) 이와 관련한 최근의 다양한 연구사례 가운데 다음을 보라. Ruth Rosen, “The Care Crisis,” The Nation 27 February 2007; Cynthia Hess, “Women and the Care Crisis,” Institute for Women’s Policy Research Briefing Paper no. 401, April 2013; Daniel Boffey, “Half of All Services Now Failing as UK Care Sector Crisis Deepens,” Guardian 26 September 2015. ‘시간 빈곤’에 대해서는 Arlie Hochschild, The Time Bind, New York 2001; Heather Boushey, Finding Time, Cambridge, MA 2016 참고. ‘일-가정 양립’에 대해서는 Boushey and Amy Rees Anderson, “Work-Life Balance,” Forbes 26 July 2013; Martha Beck, “Finding Work-Life Balance,” Huffington Post 10 March 2015 참고. ‘사회적 소진’에 대해서는 Shirin Rai, Catherine Hoskyns and Dania Thomas, “Depletion: The Cost of Social Reproduction,” International Feminist Journal of Politics vol. 16, no. 1, 2013 참고.
3) 자본주의 경제를 위한 정치적 필수 배경조건에 대해서는 Nancy Fraser, “Legitimation Crisis?,” Critical Historical Studies vol. 2, no. 2, 2015 참고. 환경조건에 대해서는 James O’Connor, “Capitalism, Nature, Socialism: A Theoretical Introduction,” Capitalism, Nature, Socialism vol. 1, no. 1, 1988; Jason Moore, Capitalism in the Web of Life, London and New York 2015 참고.
4) 많은 페미니즘 이론가들이 다양한 입장을 토대로 이를 주장했다. 맑스주의 페미니즘의 입장은 Lise Vogel, Marxism and the Oppression of Women, Boston 2013; Silvia Federici, Revolution at Point Zero, New York 2012; Christine Delphy, Close to Home, London and New York 2016 참고. 훌륭하게 잘 다듬어진 Nancy Folbre, The Invisible Heart, New York 2002도 참고. ‘사회 재생산 이론’에 대해서는 Barbara Laslett and Johanna Brenner, “Gender and Social Reproduction,” Annual Review of Sociology vol. 15, 1989; Kate Bezanson and Meg Luxton, eds, Social Reproduction, Montreal 2006; Isabella Bakker, “Social Reproduction and the Constitution of a Gendered Political Economy,” New Political Economy vol. 12, no. 4, 2007; Cinzia Arruzza, “Functionalist, Determinist, Reductionist,” Science & Society vol. 80, no. 1, 2016 참고.
5) 범주투쟁에 대해서나 경제로서의 자본주의라는 관점에 대한 비판은 Nancy Fraser, “Behind Marx’s Hidden Abode,” New Left Review March-April 2014 참고.
6) Louise Tilly and Joan Scott, Women, Work, and Family, London 1987.
7) 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 in The Marx-Engels Reader, New York 1978, 487~88면; Friedrich Engels, The Origins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 Chicago 1902, 90~100면.
8) Nancy Woloch, A Class by Herself, Princeton 2015.
9) Karl 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 Boston 2001, 87면, 138~39면, 213면.
10) Ava Baron, “Protective Labour Legislation and the Cult of Domesticity,” Journal of Family Issues vol. 2, no. 1, 1981.
11) Maria Mies, Patriarchy and Accumulation on a World Scale, London 2014, 74면.
12) Eli Zaretsky, Capitalism, the Family and Personal Life, New York 1986; Stephanie Coontz, The Social Origins of Private Life, London 1988.
13) Judith Walkowitz, Prostitution and Victorian Society, Cambridge 1980; Barbara Hobson, Uneasy Virtue, Chicago 1990.
14) Angela Davis, “Reflections on the Black Woman’s Role in the Community of Slaves,” The Massachusetts Review vol. 13, no. 2, 1972.
15) David Wallace Adams, Education for Extinction, Kansas 1995; Ward Churchill, Kill the Indian and Save the Man, San Francisco 2004.
16) Gayatri Spivak, “Can the Subaltern Speak?,” in Cary Nelson and Lawrence Grossberg, eds., Marxism and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 London 1988, 305면.
17) Michel Foucault, “Governmentality,” in Graham Burchell, Colin Gordon and Peter Miller, eds., The Foucault Effect, Chicago 1991, 87~104면; Foucault, The Birth of Biopolitics, Lectures at the Collège de France 1978-1979, New York 2010, 64면.
18) Kristin Ross, Fast Cars, Clean Bodies, Cambridge, MA 1996; Dolores Hayden, Building Suburbia, New York 2003; Stuart Ewen, Captains of Consciousness, New York 2008.
19) 이 시기 사회 재생산을 위한 국가지원에 대한 재정은 세제수입, 그리고 해당 국가 내 계급권력관계의 의존도에 따라 대도시 노동자와 자본 모두가 서로 상이한 정도로 기여해 조성된 기금을 통해 충당되었다. 그러나 그 세입의 흐름은 해외투자에 기반한 이윤과 불평등 교환에 기반한 거래를 통해 주변부를 추출하여 얻은 가치로 팽창되었다. Raúl Prebisch, The Economic Development of Latin America and its Principal Problems, New York 1950; Paul Baran, The Political Economy of Growth, New York 1957; Geoffrey Pilling, “Imperialism, Trade and “Unequal Exchange”: The Work of Aghiri Emmanuel,” Economy and Society vol. 2, no. 2, 1973; Gernot Köhler and Arno Tausch, Global Keynesianism, New York 2001.
20) Jill Quadagno, The Color of Welfare, Oxford 1994; Ira Katznelson, When Affirmative Action Was White, New York 2005.
21) Jacqueline Jones, Labor of Love, Labor of Sorrow, New York 1985; and Evelyn Nakano Glenn, Forced to Care, Cambridge, MA 2010.
22) Nancy Fraser, “Women, Welfare, and the Politics of Need Interpretation,” in Fraser, Unruly Practices, Minneapolis 1989; Barbara Nelson, “Women’s Poverty and Women’s Citizenship,” Signs: Journal of Women in Culture and Society vol. 10, no. 2, 1985; Diana Pearce, “Women, Work and Welfare,” in Karen Wolk Feinstein, ed., Working Women and Families, Beverly Hills 1979; Johanna Brenner, “Gender, Social Reproduction, and Women’s Self-Organization,” Gender & Society vol. 5, no. 3, 1991.
23) Hilary Land, “Who Cares for the Family?,” Journal of Social Policy, vol. 7, no. 3, 1978; Harriet Holter, ed., Patriarchy in a Welfare Society, Oslo 1984; Mary Ruggie, The State and Working Women, Princeton 1984; Birte Siim, “Women and the Welfare State,” in Clare Ungerson, ed., Gender and Caring, New York 1990; Ann Shola Orloff, “Gendering the Comparative Analysis of Welfare States,” Sociological Theory, vol. 27, no. 3, 2009.
24) Adrienne Roberts, “Financing Social Reproduction,” New Political Economy vol. 18, no.1, 2013.
25) 자유시장주의자들과 ‘신사회운동’ 사이의 가당치 않은 동맹의 결실로 나타난 새로운 레짐은 기존의 일상적인 정치적 배치를 뒤섞으면서 힐러리 클린턴 같은 ‘진보적’ 신자유주의 페미니스트를 권위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대중추수주의자 도널드 트럼프와 겨루게 만든다.
26) Elizabeth Warren and Amelia Warren Tyagi, The Two-Income Trap, New York 2003.
27) Arlie Hochshild, “Love and Gold,” in Barbara Ehrenreich and Arlie Hochschild, eds., Global Woman, New York 2002, 15~30면; Brigitte Young, “The “Mistress” and the “Maid” in the Globalized Economy,” Socialist Register no. 37, 2001.
28) Jennifer Bair, “On Difference and Capital,” Signs vol. 36, no. 1, 2010.
29) “Apple and Facebook offer to freeze eggs for female employees,” Guardian 15 October 2014. 중요한 건, 이런 혜택이 더이상 전문직·기술직·관리직 계층에만 배타적으로 제공되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제 미국 육군에서도 의무 복무기간 연장을 신청한 여성은 냉동난자를 무료로 활용할 수 있다(“Pentagon to Offer Plan to Store Eggs and Sperm to Retain Young Troops,” New York Times 3 February 2016). 이 경우 군사주의 논리가 사적 이해관계를 압도한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분쟁지역에서 여군이 전사할 경우 그 난자를 어떻게 할지, 향후 문제가 될 이 사안에 대해 말문을 여는 사람은 아직 없다.
30) Courtney Jung, Lactivism, New York 2015, 특히 130~31면 참고. 일명 ‘오바마케어’로 불리는 건강보험개혁법(Affordable Care Act)에는 보험회사가 해당 가입자에게 무료로 펌프를 제공해야 함을 의무사항으로 적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혜택은 더이상 특권적인 여성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되는 특혜가 아니다. 이를 통해 중국의 하청공장에서 대규모로 펌프를 생산하는 제조업 회사를 위한 거대한 시장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Sarah Kliff, “The breast pump industry is booming, thanks to Obamacare,” Washington Post 4 January 2013.
31) Lisa Belkin, “The Opt-Out Revolution,” New York Times 26 October 2003; Judith Warner, Perfect Madness, New York 2006; Lisa Miller, “The Retro Wife,” New York Magazine 17 March 2013; Anne-Marie Slaughter, “Why Women Still Can’t Have It All,” Atlantic July-August 2012, and Unfinished Business, New York 2015; Judith Shulevitz, “How to Fix Feminism,” New York Times 10 June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