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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입장에서 현장으로
2015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 회의 참관기
김항 金杭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저서로 『말하는 입과 먹는 입』 『제국 일본의 사상』 등이 있음. ssanai7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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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를 뜻하는 ‘colony’의 어원은 라틴어 ‘colere’이다. 이 어원을 공유하는 단어로는 ‘culture’가 있으며 모두 ‘경작하다’를 원래 뜻으로 갖는다. 영어사전을 펼쳐보면 ‘colony’의 일차적 의미는 경작하는 사람들 혹은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다. 이 맥락에서 카를 슈미트(Carl Schmitt)는 ‘콜로니 창설’(Gründungen von Kolonien)을 법 생성의 ‘근원-행위’(Ur-Akte)인 ‘땅 위의 장소확정’(erdgebundene Ordungen)으로 정의한다.1) 이때 슈미트는 법이 무엇보다도 땅을 획득함으로써 장소를 확정하는 행위에 근거함을 주장한다. 따라서 페니키아인 등 해양세력이 정주 농업지를 획득-개척하는 것이 ‘colony’의 원 이미지이며, 이는 법 정립의 원천(title)을 형성하는 행위다.
그런데 현재 ‘colony’의 번역어로 정착된 ‘植民’이란 한자어가 19세기 일본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1801년에 출간된 『쇄국론(鎖國論)』이었고, 원어는 네덜란드어 ‘volkplanting’ 즉 ‘민(民)의 이식(利殖)’이었다.2) 이 책은 나가사끼(長崎)의 네덜란드 상관(商館)의 통역사였던 시즈끼 타다오(志筑忠雄)가 1690년에서 1692년까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의 의사로 나가사끼에 와 있던 독일인 의사 엥겔베르트 캠퍼(Engelbert Kaempfer)의 저서 『일본의 역사와 특성』(Geschichte und Beschreibung von Japan)의 권말 부록을 번역한 것이다.3) 이후 다른 문헌에서는 ‘殖民’이란 조어도 빈번히 사용되었는데, ‘殖民地’라는 표현은 1868년 『만국신문지(萬國新聞紙)』 5월 상순호가 최초 용례이다. 이때 ‘殖/植民地’는 colony의 번역어로, 해외로 자국민을 이민시켜 정주지를 개척한다는 뜻의 서양에서 확립된 용법을 반영한 것이었다.
따라서 현재 동아시아에서 널리 사용되는 ‘식민/식민지’란 용어는 “사람을 이주시켜 정주시킴으로써 장소를 확정하여 법을 확립한다”는 ‘volkplanting’과 ‘colony’가 중층적으로 결합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즉 ‘식민/식민지’ 혹은 좀더 추상적인 ‘식민화/식민성’까지, 식민을 내포한 개념들은 단순히 이민족에 의한 지배/통치/수탈을 뜻한다기보다는, 땅의 정복, 법의 생성, 사람의 이동을 축으로 전개되는 ‘문화’의 폭력적 형성과정을 뜻한다. 그것은 실정법에서 관습법까지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규범’이 통용되는 장소의 확정이며, 인간이 정주의 땅을 개척하기 위해서만 자연과 만나는 특정한 ‘문명’의 생성이다.
그렇다면 식민의 근대적 전개과정은 어땠을까? 이번 회의의 종합토론에서 백낙청(白樂晴)이 정리한 바처럼 근대는 근원적으로 식민을 내포하는 문명이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서구 대 비서구, 혹은 제국 대 식민지라는 지역/집단 간 지배관계를 축으로 성립했기 때문이다. ‘식민’을 동아시아 차원에서 논구(論究)할 때의 곤란함이 여기에 있다. 식민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보편적 원리하에서 파악되어야 하지만, 한반도, 중국 대륙, 타이완, 오끼나와, 홍콩, 말레이/싱가포르, 베트남 등 식민을 경험한 지역마다 그 전개과정은 도저히 환원 불가능한 고유성을 갖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의 식민’(殖民亞洲)을 아젠다로 삼아 개최된 2015년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 회의의 근원적 어려움은 이렇듯 이미 예견된 셈이었다. 과연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보편성과 각 지역 경험의 고유성을 매개하는 시각은 어떻게 모색되어야 할까? 무더웠던 홍콩 회의의 중심적인 테마는 이 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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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30~31일 양일에 걸쳐 홍콩 링난 대학(嶺南大學)에서 개최된 2015년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 회의에는 홍콩, 한국, 일본, 오끼나와, 타이완, 중국, 싱가포르에서 다수의 연구자, 편집자, 활동가가 참가했다. 2006년도에 『창작과비평』 창간 40주년을 기념해서 처음으로 회의가 개최된 이래,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 회의는 타이베이(臺北), 진먼(金門), 상하이, 서울, 오끼나와를 거쳐 이번 홍콩 회의를 맞이했다. 되돌아보면 거의 10년 동안 동아시아를 순회하며 회의를 개최해온 셈인데, 지금까지 동아시아의 연대와 연동에 초점을 맞춰왔다면 이번에는 ‘아시아에서의 식민’이라는 특화된 주제를 아젠다로 삼았다. 아젠다를 주최 지역에서 선정한다는 원칙에 따라 홍콩 측이 결정한 것이었다. 이 아젠다를 놓고 당장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것은 중국 측 참가자였다. 식민경험이 없는 중국 대륙에서 보자면 ‘아시아에서의 식민’을 이야기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중국 측 참가자가 염두에 둔 식민 개념은 무엇일까?
19세기말 이래 중국 대륙이 서구 및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홍콩 및 마카오는 실제로 영국과 뽀르뚜갈의 지배하에 있던 말 그대로의 식민지였다. 그럼에도 중국의 역사경험에 식민과정이 없다는 인식에는 식민이란 민족주권의 전적인 박탈을 뜻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식민화된 도시가 있고 조계지(租界地)가 있었으며 점령당한 지역이 있었음에도, 중국은 민족주권을 빼앗긴 적이 없다는 것이다. 회의 첫날 발표에 나선 상하이의 저명한 문화연구자 왕 샤오밍(王曉明)은 이런 난점을 비껴가며 상하이란 도시의 형성에서 조계지가 어떤 의미를 갖느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는 상하이 사람들의 기질과 습관을 중심으로 조계지의 의미를 되물으며 식민 문제를 다루고자 했다. 하지만 다른 참가자들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특히 홍콩과 싱가포르의 참가자들은 식민의 역사와 개념을 통해 중국이란 거대한 국가가 다르게 읽힐 수 있음에도 발표가 전혀 거기에 가닿지 못했음을 아쉬워했다.
이 불완전연소가 발표자의 책임은 아니다. 왕 샤오밍은 곤혹스러운 아젠다를 받아들고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였다. 또한 중국 지식인의 식민에 대한 인식의 불철저함을 탓할 것만도 아니었다. 중국이란 거대한 국가의 정신적 기초를 위해서는 역사를 식민의 경험 위에서 사념할 수 없는 사정이 있기에 그렇다. 그러나 무언가가 겉돌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 토론에서 중요한 사실을 직접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민족과 주권이란 전제 위에서는 식민이란 주제를 폭넓고 깊이있게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식민은 민족주권의 박탈로 현상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식민이란 주제의 분열적 양상을 다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론 민족주권의 박탈과 이민족 지배라는 틀은 한반도나 중국 대륙의 역사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식민을 논구하기에 충분한 전제로 보인다. 하지만 아시아를 식민과 결합시키자마자 민족과 주권은 비판적 사유에서의 전제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형태 혹은 하위범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사유는 탈식민이나 탈민족 담론이 세련된 논리로 해주었고, 이미 한국사회에서도 어느정도 정착된 사유의 방식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머리가 아니라 몸의 차원에서 이런 사유방식이 녹아든 적은 없었다. 위안부로 대표되는 식민기억의 논란이 언제나 민족과 반민족의 구도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면 이론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왕 샤오밍의 발표와 뒤이은 토론은 아시아로 눈을 넓혀보면 탈식민이나 탈민족 담론이 머리가 아니라 몸 차원의 문제임을 여실히 보여주었고, 한국의 식민담론이 얼마나 일국 중심에 갇혀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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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샤오밍에 앞서 회의의 첫번째 발표는 한국에서 참석한 임형택(林熒澤)의 몫이었다. 임형택은 19세기의 언문(言文)공간을 소재로 삼아 근대전환의 문제를 다루었다. 여기서 임형택은 한·중·일이 어떻게 한자라는 동아시아 공통의 문자세계를 각 국가의 언문일치 체계로 변경했는지, 그 과정에서 각 나라의 특징은 무엇인지를 제시했다. 발표는 중국보다는 한국과 일본의 사례를 중심에 두었는데, 일본의 언문일치가 한자 공동체를 베이징 중심에서 토오꾜오 중심으로 옮겨가며 이뤄졌다는 지적이 참가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즉 일본의 언문일치 과정은 한자 공동체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기보다는, 한자 공동체가 갖는 동아시아의 위계적 질서를 토오꾜오 중심으로 옮겨 유지한 것이었으며, 이는 일본의 근대화가 국민국가화이자 중국을 대신한 아시아의 맹주화였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일본의 언문일치는 결국 아시아 침략의 이데올로기인 대동아공영권 따위를 선취하는 문명적 변환이었다는 지적인 셈이다.
임형택은 이와 비교할 때 국한문혼용을 거쳐 한글전용으로 나아간 한국의 언문일치화 과정이 갖는 가능성을 조심스레 평가했다. 그것이 중국을 정점으로 하는 중화세계의 위계성을 허무는 잠재성을 내포했음과 동시에,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화에 대항하는 저항의 거점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즉 중화주의 및 근대적 제국주의와 다른 방향의 가능성을 가진 문명의 방향을 한국의 언문일치에서 읽어내고자 한 것이다. 이렇듯 다소 야심찬 기획에 대해 토론에 나선 이들은 상반된 의견을 제시했다. 한 참가자는 일본의 언문일치와 근대화에서 침략주의를 읽어낸 혜안을 평가하는가 하면, 여전히 한문이 언문생활의 중심을 차지하는 중화권을 염두에 두면 아시아 차원의 이야기로 끌고 나가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시각도 있었다. 또한 한국에서 함께 참여한 백낙청은 둘째날 종합토론에서 한국의 언문전환은 문명전환이기도 하며 제3세계 어문정책의 전형이라 지적하면서, 그러나 아직 불충분한 것 아닌가 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과문한 탓에 발표와 토론에서 이뤄진 여러 이야기를 도저히 평가할 수는 없지만 백낙청의 언급에서 하나의 아이디어를 얻었음을 첨언해본다. 백낙청은 임형택의 발표를 유럽의 라틴어와 지방어의 케이스와 비교했는데, 이런 비교는 결국 ‘정전’(canon)의 번역과 그 정치적 귀결 문제와 연관된다고 느껴졌다.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정전의 형성과 독해와 번역과 전승의 정치학으로 근대문명의 형성사를 세계사적 차원에서 다루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과연 그 안에서 식민의 문제는 어떤 형상으로 드러날까? 앞에서 말했듯 식민이 땅의 획득을 통한 규범과 문명의 형성과정이라면, 세계사적 차원에서 식민과 정전의 역사를 깊게 고민해볼 일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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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핵심현장’4)을 순회하며 동아시아의 역사와 정세가 상호 연동됨을 확인하면서 연대의 가능성을 타진해온 비판적 잡지 회의는 일군의 ‘핵심멤버’ 없이 지속될 수 없었다. 그중 한 사람이 타이완의 천 광싱(陳光興)이다. 쑨 거(孫歌), 이께가미 요시히꼬(池上善彦), 백영서(白永瑞), 와카바야시 치요(若林千代) 등과 더불어 오랫동안 활동해온 그는 아시아에서의 식민을 제3세계와 연관시켜 이야기를 풀어냈다. 천 광싱은 핵심현장 개념을 원용하여 자신이 주도해온 그간의 연대활동을 개괄한 후, 시야를 이슬람과 아프리카로 돌려 식민과 아시아를 말 그대로 세계사적 지평 속에서 사유하려 했다. 타이완, 중국 대륙, 일본 열도, 오끼나와, 한반도를 종횡무진하며 동아시아 지적 연대의 밑불을 당긴 그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를 거쳐 이슬람과 아프리카에 이르는 광활한 ‘아시아’를 새로운 세계적 지평으로 제시하려는 듯했다. 근대의 식민경험이 서구의 규범과 문명을 전지구적으로 확장하고 인류 차원에서 내면화한 것이라 할 때, 천 광싱의 끝을 모르는 공간운동은 서구적 패러다임의 세계 이해가 아닌, 그렇다고 단순히 대안적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는, 모종의 새로운 역사의식과 공간감각의 창출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단순히 새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이동하는 궤적은 오랜 시간 서구의 시선과 폭력으로 자기 역사와 정체성을 부정당한 식민의 땅 위에 새겨진다.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의 말대로 식민이 시스템화된 인간성의 파괴라 할 때, 식민의 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인간성을 파괴당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식민 속에서 사람들은 인간성을 파괴를 통해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서구 주민만의 경험이 아니다. 식민을 주도한 서구의 주민도 자신의 ‘온전한’ 인간성이 비서구인에 대한 폭력과 파괴에 힘입은 한에서 파괴로서의 인간성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천 광싱이 그려낸 궤적은 세계와 인간을 파괴로 경험케 한 근대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이 관념이 아니라 땅을 훑으며 상기된 까닭에 궤적은 근대의 역사서술을 닮지 않았다. 근대의 역사서술이 승리한 자의 영웅서사였다면, 천 광싱의 궤적은 쓰러진 자들과 연대하는 기억의 전투적 공유였기에 그렇다. 그는 먼저 세상을 떠난 오끼나와의 오랜 친구와 제3세계의 이름 모를 희생자들을 함께 기억하면서 서구적 근대의 역사의식을 탈구축(deconstruction)한다. 그가 지속하는 연대의 실천은 먼저 떠난 자들을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로 회수하는 일 없이 현재 속으로 품어 안으며 시공간적 외연을 확장해가는 것이다.
토론에 나선 토오꾜오의 이께가미 요시히꼬는 천 광싱의 이 기묘한 궤적을 제3세계론의 계보와 연관시켰다.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의 제3세계론은 주지하다시피 신생국가의 민족해방론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그런 한에서 제3세계론은 서구 근대에서 발원한 국민, 주권, 자주/독립 등 국민국가의 패러다임 속에서 개념과 용어를 차용했고, 탈식민의 과정을 국민국가화와 민족자주로 귀결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둥회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제3세계의 등장은 단순히 새로운 국민국가의 탄생을 알리는 계기가 아니었다. 신생국가가 탄생하여 국민국가로 이뤄진 서구적 세계에 국가의 수만 늘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사실은 새로이 태어난 이들 국가들이 하나의 세계, 즉 제3세계라는 새로운 세계를 개시했다는 점이며, 이는 아시스 난디(Ashis Nandy)가 말한 바 있는 “비서구 세계가 겪은 고통의 관점에서 비서구인들에게 이해되는 서구 개념”5)같이 비서구인의 관점에서 새로운 세계상을 제시하는 실천이었다.
오끼나와의 신죠오 이꾸오(新城郁夫)는 이와 관련해서 백낙청이 1970년대말에 발표한 제3세계론을 언급하면서 동아시아의 제3세계론을 재독해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현재 한국에서 읽히는 일이 드문 텍스트를 오끼나와의 참가자가 인용하며 자기 주장을 펼치는 광경은 진귀한 것이었다. 천 광싱이 말한 먼저 떠난 이들과의 연대, 이께가미가 제안한 제3세계론의 세계상, 그리고 신죠오가 제기한 제3세계론의 재독해 등은 식민과 탈식민 사이의 아시아에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란 참신한 개념과 기획이라기보다는 지나간 시간을 면밀하게 다시 읽고 품는 일을 통해 가능한 것임을 간절히 실감케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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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는 이번 회의를 주최한 홍콩의 뤄 융성(羅永生)이었다. 그는 홍콩의 경험을 바탕으로 식민을 통해 역사, 세계,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복잡하고 분열적인 작업인지를 담담히 제시했다. 여기서 그의 발표가 이야기해준 홍콩의 역사를 세세하게 복기할 여유는 없다. 영국 통치와 중국 복귀 등 세계사의 굴곡을 체현한 역사의 스케일 때문이라기보다는, 교과서에 등장할 법한 역사적 사건 이면에 무엇 하나 근대의 개념으로 포착될 수 없는 주민의 정체성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identity)이 무언가에 대한 동일화(identifying)를 통한 자기정립이라면, 홍콩 주민의 정체성은 국가와도 민족과도 세계시민과도 동일화할 수 없는, 혹은 그 모두와 동일화할 수 있는 유동적인 무언가였다. 그 안에서 홍콩의 주민은 영국의 영토 안에 거주하며 중국말을 하는 유색인종이었다가 중국의 영토 안에 거주하고 중국말을 하며 본토의 통치 바깥에 있는 누군가였다. 과소하거나 과잉된 정체성이야말로 홍콩 주민의 자기정립인 셈이다.
이런 홍콩의 식민 상황을 한반도나 중국의 경험과 인식에 비추어서는 이해하기 불가능하다. 홍콩의 식민은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기의 것이 아님은 분명한 규범과 문명의 자리잡음이었지만 국가, 민족, 주권 등의 개념과 용어로는 도저히 포착 불가능하다. 홍콩 중심가를 점거한 오큐파이(occupy, 점령) 운동을 자치권 주장이라든가 이념적 목적으로 환원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홍콩 주민의 오큐파이 실천에는 물론 현실정치적으로는 여러 사정이 얽혀 있지만, 조직되지 않은 주민들이 그곳에 모인 것은 서구든 중국이든 홍콩의 삶을 자기의 규범과 문명으로 환원하려는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서였다. 즉 푸꼬(M. Foucault)가 말한 “이렇게는 통치당하려 하지 않을 의지”가 오큐파이의 최대공약수였던 것이다.
뤄 융성의 발표는 홍콩의 현재를 식민 문제와 결부해 역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 안에서 그는 홍콩의 식민이 반드시 탈피되어야 할 부정적 상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이번 회의에서 가장 번득이는 발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반도뿐 아니라 어느 지역에서나 식민 상황은 벗어나야 할 부정적이고 치욕적인 상태로 여긴다. 하지만 그는 홍콩을 식민도시라고 규정하면서, 식민경험에서 일궈온 홍콩 주민의 고유한 역사의식과 공간감각을 미래를 향해 가꿔나가려 한다. 그것은 식민의 폭력을 망각하거나 용서하자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폭력의 기억을 자기정체성의 한 부분으로 끌어안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이를 그는 “홍콩을 사랑하기 위해”라는 아름다운 말로 표현했다. 그가 사랑하려는 홍콩은 국가나 민족이라는 근대적 정체성하에서 포착된 홍콩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가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홍콩은 삭막한 범주적 정체성으로 포착될 수 없는, 수평적이고 생활세계적인 지평에서의 홍콩이다. 외부의 누군가가 호명하는 홍콩이 아니라, 발화하지 않아도 몸과 마음을 통해 실존하는 홍콩이야말로 뤄 융성이 그리는 자기 땅인 것이다.
뤄 융성의 발표는 이번 회의의 아젠다를 왜 ‘아시아에서의 식민’으로 결정했는지를 잘 보여준 것이라 생각된다. 지금까지 동아시아 각 지역에서 모인 참가자들은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고 공감하려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서구적 식민의 모델에서 벗어난 소통의 방식이 아니었다. 입장(立場)이 ‘장을 세우기’나 ‘장 위에 서기’를 의미하는 한에서, 그것은 땅을 획득하여 규범이 통용되는 장을 확립하는 저 근원적 식민행위의 반복이다. 즉 한반도든 오끼나와든 그 장을 내세워 자신을 세우려는 ‘입장’의 패러다임은 여러 땅에 새겨진 복잡다단한 식민의 상처를 무단 전유하는 식민의 폭력을 되풀이하는 일인 것이다.
아마도 백영서가 핵심현장이라는 개념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패러다임이란 이런 ‘입장’일 것이다. 그가 말하는 핵심현장은 근대 동아시아 역사의 폭력이 응축된 장소라는 의미에서는 지도상의 객관적 지명일 수 있다. 하지만 거주민의 주체적인 자각과 실천이 없으면 그 장소는 핵심현장으로 구성될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가 발 딛고 사는 땅에 새겨진 상처와 기억을 타인과 공감/공고(共感/共苦)할 수 있는 장을 열어야 한다. 즉 장을 점거하는 입장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장(場)을 열어 드러내는(現) ‘현장’의 패러다임이 요청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 회의는 짧지 않은 기간에 창비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식운동그룹의 연대가 입장에서 현장의 패러다임으로 이행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식민과 탈식민 사이에서 아시아는 어떤 미래를 모색해야 할지, 어렴풋하지만 자그마한 빛이 보이는 느낌을 받았음을 조심스레 고백하면서 두서없는 보고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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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arl Schmitt, Der Nomos der Erde, Duncker & Humblot 1950, 15면.
2) 『日本国語大辞典』, 小学館.
3) 이 책에 관해서는 배관문 「시즈키 다다오 역, 『쇄국론』」, 『개념과소통』 14호, 2014.12 참조.
4) 백영서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 공생사회를 위한 실천과제』, 창비 2013 참조. 백영서가 주장하는 핵심현장 개념에 관해서는 이 글의 말미에서 언급하겠지만, 비판적 잡지 회의를 포함한 동아시아 연대의 실천이 백영서에게는 이 개념을 주조하는 ‘현장’이었음을 확인해둔다.
5) 아시스 난디 『친밀한 적: 식민주의하의 자아 상실과 회복』, 이옥순·이정진 옮김, 창비 2015, 22~2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