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백승욱 『생각하는 마르크스』, 북콤마 2017

절망의 시대에 맑스의 비판정신을 다시 음미하다

 

 

김동수 金仝洙

문학평론가 donnard@hanmail.net

 

 

176-474_1

어쩌면 옛날이야기처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왕년에 ‘서사연’(서울사회과학연구소)이 있었노라고. 변혁의 열기가 뜨거웠던 80년대 말, 총명한 젊은 사회과학도들이 근 40년 만에 이 땅에 맑스주의의 이론적 전통을 복원하기 위해 진지한 열정을 불태웠다. 그들이 사숙(私淑)했던 인물은 프랑스의 유명한 맑스주의자 루이 알뛰세르(Louis Althusser)였는데, 그는 60년대에 ‘맑스로 돌아가자’며 교조적 맑스주의를 타파하려 했고, 70년대에는 맑스주의 위기의 근원을 추적하며 그 갱신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맑스주의의 복원과 갱신을 향한 서사연의 엄밀한 이론적 탐구를 두고 당시에는 실천을 외면한 한가한 ‘강단 좌파’라는 비난도 일었지만, 그후에 밀어닥친 일련의 사태는 한국 맑스주의의 이론적 기반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여실히 증명했다. 동구권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새로운 사상의 물결이 밀려들자 사람들은 손쉽게 맑스를 잊었고 발 빠른 이들은 ‘맑스를 넘어선’ 출구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런데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서사연의 주요 멤버였던 백승욱(白承旭) 교수가 오랜만에 맑스에 대한 자신의 여전한 관심을 책으로 엮어냈다.

저자는 이 책의 출발점이 된 강연(7장)에서 「포이어바흐 테제」를 거론하면서 맑스를 비판적인 사유의 탁월한 모범으로 제시한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11번 테제로 유명한 이 짧은 텍스트는 청년 맑스가 어떻게 이중의 비판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사유를 정립해나갔는지를 보여준다(관련하여 이 테제를 상세하게 풀이한 2장은 맑스의 사상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로서 모자람이 없다). 프랑스대혁명의 사상적 총괄이라 할 수 있던 헤겔(G. Hegel)의 철학이 보수적으로 굴절된 상황에서 청년헤겔학파들은 포이어바흐(L. Feuerbach)의 소외이론에서 돌파구를 발견했다. 하지만 맑스는 관조적인 유물론의 한계를 깨닫고 인간활동의 능동적인 측면을 포착하기 위해서 “차라리 유물론보다는 관념론의 배를 타고 가다가 그 배를 버리는 것이 현명하다”(446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얻게 되는 것은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인바, 이제 인간은 추상적인 유적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로 규정된다. 알뛰세르는 이때 이루어진 맑스의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을 ‘인식론적인 단절’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주목할 점은 맑스의 이론적 단절은 단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자본』(Das Kapital)을 집필하는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글을 고치면서 자본의 실제적인 운동 과정을 담기 위해 고투했는데, 백승욱은 맑스가 ‘전도(顚倒)’라는 포이어바흐적인 이미지를 활용하면서도 그 정태성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세가지 시간성을 복합적으로 활용하는지 설명한다(1장).

하지만 맑스를 다시 거론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그가 비판적 사유의 역사에서 ‘불귀(不歸)의 점’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맑스에 대한 허다한 비판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실상 맑스 이전의 사유로 되돌아가버리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 점에서 『자본』의 부제이기도 한 ‘정치경제학 비판’의 의미를 제대로 음미할 필요가 있다. 맑스가 『자본』에서 행한 자본주의의 구조 분석은 좌파의 경제학이나 대안적 경제학이 아니다! “경제라는 현상을 그 자체의 자연성의 세계로, 모순 없이 주어진 세계로, 대등한 개인들 사이의 평등한 계약의 세계로 그려내는 경제학”(160면)은 실상 자본주의의 ‘전도된’ 물신숭배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경제의 자연적인 재생산이란 착시 효과이고 거기에는 이미 국가의 개입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하여 화폐와 노동력이라는 독특한 상품들이 안고 있는 모순들은 자율적인 시장의 법칙에서가 아니라 계급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생산양식’의 관점에서만 제대로 해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투적인 오해와 달리 맑스는 사회를 경제로 환원시키는 경제결정론자가 아니었다. 흔히 토대와 상부구조로 일컬어지는 맑스의 위상학적인 비유는 각각 고유한 심급들의 복합적인 얽힘을 사유하기 위한 장치였고, 알뛰세르는 ‘과잉결정’(흔히 ‘중층결정’이라고 번역되는 이 용어의 함의에 대해서는 6장을 참조하라) 개념을 통해 이 점을 강조했다.

맑스의 저서에서 나타나는 ‘사회적인 것’의 이중적 함의를 정교하게 분석한 이 책의 4장에서도 맑스의 사유가 가진 독자성은 잘 드러난다. 그는 경제와 사회를 구분해서 사고했던 주류적인 사회학의 전통(그 원천은 ‘시민사회’와 ‘국가’라는 헤겔의 구분법이다)과 달리 사회적인 것이 어떻게 경제구조에서 발생하지만 동시에 은폐되는가, 역으로 흔히 사회적인 것으로 표상되는 국가의 정책들은 어떻게 허구적인 가상에 기초하는가를 보여주었다. 바로 이 때문에 맑스적인 의미에서의 정치는 통상적인 경제나 정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자율성이라는 환상이 깨어지는 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맑스를 다시 사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잊힌 옛것을 발굴하는 일이 아니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가 기세등등하던 20여년간 거의 잊혔던 맑스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이 일거에 폭발하면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맑스주의를 추종하던 조직과 운동들은 와해된 상태고, 돌아가 안온하게 의지할 맑스주의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전 지구적 경제위기라 이를 만큼 체계 자체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음에도, 그에 도전하는 조직적 대응이 매우 미약하고 도전들 모두 분할되고 흩어져 있다”(302면)는 게 차라리 정직한 현실진단이다.

이 책의 5장에서 소개하는 에띠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의 ‘인권의 정치’ 내지 ‘시빌리떼(civilité)의 정치’는 이같은 정치의 위기 속에서 저항의 정치를 다시 사유하려는 이론적 시도라 할 수 있다. 과도한 폭력이 정치를 봉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극단적 폭력의 제어를 목표로 하는 시빌리떼의 정치는 대중정치의 영원한 화두에 속한다 할 것이며, 저자가 7장에서 언급하는 ‘억압받는 자의 위엄’은 아마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이어받는 논지이리라 여겨진다. 피억압자는 권력과 재산에 의해서 평가되는 존재가 아니라 비판적 사유의 주체로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읽히는데, 매력적임에도 아직은 해명해야 할 지점들이 많은 것 같다. 최근에 국내에서 벌어진 ‘촛불집회’는 독자성과 자기규율을 갖춘 대중의 연대가 얼마나 위력적인지를 보여주었지만, 사안의 특수성을 간과하고 일반화할 때 자칫 막연한 윤리적 당위로 떨어질 수 있다. 알뛰세르는 맑스주의의 비극적 역사를 직시하도록 요구하면서도, 항상 변화하는 대중운동과 융합함으로써 맑스주의가 회생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한국의 자생적 맑스주의 전통에 요구되는 첫번째 과제는 아마도 우리의 눈앞에서 진행되는 거대한 대중운동을 일체의 환상과 편견 없이 분석하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