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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죽음의 밑바닥에서 숨쉬는 삶

김숨 소설집 『간과 쓸개』

 

 

윤인로 尹仁魯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꼬뮌의 조건」 「오염에 관하여—생태론의 의지가 끝장낸 것」이 있음. inro@naver.com

 
 

3541(棺)에 이끌리는 작가, 김숨. 내게 그녀의 『간과 쓸개』(문학과지성사 2011)는 관에 관한 소설들의 교집합으로 읽힌다. 그녀의 인물들은 오늘내일 하는 사람들의 죽지 못해 사는 삶, 죽어서도 잊지 못할 고된 삶을 산다. 관 밖에 있지만 이미 관 안에 있는 사람들. 그들은 끝내 견뎌내야 하고 끝끝내 부여잡아야 되는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김숨은 그런 선택의 불가피와 불가항력을, 그 내몰림을 돌보려 한다. 그것은 저 선택에 서려 있는 삶의 구차함에 대한 사려이며 징글맞음에 대한 염려이다.

예순일곱의 간암환자인 ‘나’는 튀김옷을 입은 미꾸라지에게서 “필사(必死)(26면)라는 말의 의미를 직감하고, 지구과학교사로 정년퇴임한 ‘곽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필멸(必滅)(134면)을 예감한다. 필사와 필멸, 그것은 관에 이끌린다는 증거다. 내장이 썩는 ‘나’는 병원로비의 뚜껑 닫힌 그랜드피아노를 관으로 여기고 그 안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북쪽 방에 스스로를 유폐한 곽노는 자개 십장생으로 수놓아진 관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환영을 본다. 껌과 담배를 파는 ‘엄마’에게 “매표소는 요람이자, 침대와도 같은 곳이었으며 관구(棺柩)와도 같은 곳이었다.”(98면) ‘남편’이 데려온 ‘여자’는 “석관 속에 매장된 시체처럼 누워 있”(246면)고 그런 남편과 여자의 동침을 허락한 아내는 나체의 그들에게서 함께 입관된 사람들의 다정함을 느낀다. 연탄불에 전어를 굽는 ‘아버지’는 ‘삼촌’의 방을 쇠못으로 박아 연옥을 만들었고, 88서울올림픽을 보며 소주에 절어 사는 또 한명의 ‘아버지’는 럭키슈퍼의 쪽방이라는 관에서 잠든다. 이들은 모두 “산송장”(144면)이며 “안치”(244면)된 자들이고, 그런 한에서 방부(防腐)된 “박제들”(309면)이다. 김숨은 그들 곁에서 이렇게 질문하려 한다. 삶의 자리는 결국 어디입니까. 앞질러 답하자면, 빈사(瀕死).

먼저 「육(肉)의 시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 박물관 직원인 남편, 그가 데려온 미라 같은 여자. 그들의 동거. ‘나’는 그녀에게서 오래전에 “죽은 사람의 냄새”를 맡는다. 그러면서도 역겨워하거나 공포에 떨지 않는다. 소금을 국자로 퍼먹으며 스스로를 방부하는, 안치된 산송장이자 유령 같은 그녀에게서 ‘나’는 오히려 “야릇한 위안과 평안”(228면)을 얻는다. ‘나’는 나침반, 삽, 망치, 줄자를 든 광기 어린 학자들에 의해 그녀가 발각되거나 측량되는 것을 단호히 거절함으로써 그녀를 감싼다. ‘나’로 하여금 삶을 더 견디고 부여잡게 하는 힘은 그녀를 향한 환대와 교감에의 의지에서 나온다. 다음, 「간과 쓸개」. 간암을 앓고 있는 나이든 ‘나’, 그런 ‘나’에게 표고를 키워보라는 친구 ‘정’. ‘나’는 표고 종균을 심는 골목(木)이 뿌리와 가지가 모조리 잘린 죽은 나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정’은 표고를 키워내는 동안 골목은 결코 죽지 않은 것이라고 답한다. 그 말을 완강히 거부했던 ‘나’는 일주일 뒤, 집 안에 진동하는 버섯 냄새를 맡으며 자신의 몸뚱이가 골목이 되어가고 있다고 여긴다. 자신의 등과 가슴에서 표고들이 자라나고 있다는 느낌. 달리 말해, 생의 감각. 피아노를 관으로 여겼던 ‘나’라는 산송장이 생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닌 골목”(48면)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은(undead) 산송장의 상태, 바로 빈사상태라는 점에 ‘나’와 골목의 공통점이 있다. ‘나’라는 산송장의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밑바탕에 골목이라는 또다른 산송장이 있다는 것. 어떤 아이러니.

빈사란 무엇인가. 임박한(濱) 죽음(死)이며 죽음의 끝(濱)이다. 다시 말해, dead end. 죽음의 맨 밑바닥, 그 끝간데에서 생의 감각은 가까스로 분비된다. 그것은 필사적인 역설인바, 어쩌면 김숨은 빈사 혹은 데드엔드가 가져온 바로 그 역설의 자리에 삶이 깃든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숨막힘의 극한에서 숨쉼의 조건을 찾으려는 김숨이라는 숨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