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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벽사 이우성의 삶과 학문

 

 

임형택 林熒澤

성균관대 명예교수. 저서 『실사구시의 한국학』 『이조시대 서사시』 『한국문학사의 논리와 체계』 『한국학의 동아시아적 지평』, 편서 『이조한문단편집』(이우성과 공편) 『신편 백호전집』 등이 있음. lim1767@skku.edu

 

 

1

 

벽사(碧史) 이우성(佑成)이라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름은 아니다. 학자·지식인으로서 한평생 살아오면서 명성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를 아는 이들은 대체로 경외의 마음을 품고 있다.

이우성 선생은 창비와 인연이 깊은 편이다. 『창작과비평』에 일찍이 사론적 성격의 글들이 실리고 좌담에도 몇차례 참여해서 지적 감명을 불러일으킨 바 있으며, 『이우성 저작집』 전8권이 간행된 곳도 창비다. 그 존재가 일반 독서대중에게는 창비를 통해서 많이 알려졌던 것 같다.

그는 『창작과비평』 30주년을 기념하는 휘호로 ‘법고창신(法古刱新)’이라는 네 글자를 써주셨다. 이를 도예품으로 제작하여 당시 축하연에 온 사람들에게 기증해서, 벌써 오래전 일이지만 기억하는 분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법고창신’은 본디 연암 박지원이 박제가의 문집에 붙인 말로, 옛을 본받되 새로움을 창조한다는 의미다. 새로운 창조는 옛에 근본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뒷날 창비는 기본방향을 ‘한결같되 날로 새롭게’로 표방한바 이는 ‘법고창신’과 통한다고 보겠다.

선생은 금년 512일에 92세로 영면하셨다. 지금 세상을 떠나신 선생의 삶의 발자취 및 인간자세를 짚어보면서 그가 어떤 학문을 추구했던가를 대략 정리해보려고 한다.1 후세에 이우성이라는 학자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지는 데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곁들어 있다.

 

 

2

 

“사람은 관뚜껑을 덮어야 안다.” 속담이지만 나는 여러모로 음미해볼 말로 생각하고 있다. 인간이란 그 생애가 마감된 뒤에라야 판정이 나게 된다는 뜻이겠는데 그것은 공정한 평가를 전제하고 있다. 예전에는 장례시 관 위를 덮는 명정(銘旌)에 무엇이라고 쓰느냐, 그리고 후일 묘비에 무슨 말을 새기느냐에 의해서 평가가 정해졌다. 이때 정해지는 평가는 공론을 듣고 정론을 도출하는 절차가 따랐던 것이다. 예전이라고 요즘 비아냥거리는 말로 오르내리는 ‘주례사 비평’처럼 과장된 평가도 없지 않았을 터이니, 유명한 시인 석주(石洲) 권필(權韠)은 묘비에 부풀려진 문구가 새겨지는 작태를 두고 “빗돌이 입이 없어 다행이지 입이 있다면 왜 말이 없겠느냐”는 풍자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래도 그 시절엔 공론으로 정평을 도출하는 사회기반이 있었다. 그것이 관행으로 지켜졌기에 장례문화는 그런대로 격조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근대사회로 넘어와서 우리가 지금 늘 경험하듯 전통적인 공론장은 해체되었고 물질주의가 만연하여 제대로 된 평가는 원천적으로 기대하기조차 어렵게 된 상황이다.

벽사 선생의 경우 우리가 알다시피 일생을 단 한순간도 다른 길로 나간 일이 없이, 학자로서 올곧게 살아오셨다. 선생의 위상은 오로지 그 자신의 학자적 자세와 학문적 성취로 이루어질 것임이 물론이다. 나는 선생을 논평하기에는 제자 된 입장에서 외람스럽고 그럴 역량을 갖추지도 못했다. 다만 선생이 평소 하시는 말씀을 듣고 쓰신 글을 읽은 처지에서 소회를 이야기해 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벽사 선생과 제도상에서 사제관계를 맺지는 못했다. 내가 대학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성균관대의 교수연구실로 불쑥 찾아간 것이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우리 문학사에서 한문학을 연구해보기로 딴에 결심을 했는데, 그 시절에 한문학은 대학의 제도에서 완전히 배제되어서 이쪽으로는 아무도 눈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 한문학 분야는 황무지처럼 방치된 상태였으므로, 도대체 이런 것도 연구대상이 될 수 있는지, 하자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도무지 막막한 상태였다. 선생님은 길을 묻기 위해 찾아온 풋내기를 대해서 참으로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연구실에서 나와 명륜동 길을 함께 걸으면서 시내버스를 탈 때까지 말씀이 끊이지 않았다. 하신 말씀을 지금 복원할 도리는 없지만 그날 해주신 말씀으로 나는 한문학을 전공으로 택하는 데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지금 회상해보면 그날 선생님과의 첫 대면이 학문하는 자로서 임 아무개가 형성되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어언 52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3

 

학인으로서의 생을 마감하신 선생의 학자적 상()은 어떤 한 면모로 그려내기는 불가능하다. 우선 글쓰기 방식을 두고 말해보자면 그는 한문으로 시를 짓고 각체의 산문을 구사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서두에서 거명했던 『이우성 저작집』에서 『벽사관문존(碧史館文存)』 상·2책이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여러 저술에서는 진보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근대학문의 높은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그와 동세대에서 한문 글쓰기에 능숙한 인물들이 드물긴 하지만 아주 없지 않았다. 그런데 벽사처럼 한문교양에 기반해서 근대학문의 높은 경지에 올라선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학자로서 독보적인 존재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어떻게 이처럼 개성적인 자질이 형성되고 빼어난 역량이 길러질 수 있었을까 궁금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경상남도 밀양의 퇴로(退老)라는 마을에서 일제식민지시기인 1925년에 태어났다. 가계는 ‘문한(文翰)과 부()’를 함께 누리는 양반가문이었다. 부친은 ‘개명적 지주형’의 인물이었다 한다. ‘개명적 지주’란 “근대초에 전진적 지주들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이분이 “일제하 한국인으로 가장 큰 규모의 잠종(蠶種, 누에종자) 제조업을 경영”했다. 그럼에도 “조부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그리고 집안 어른들의 분위기를 존중하여 나를 끝내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고 그 자신이 술회한 바 있다.2 그는 일제가 제정, 강요했던 교육과정을 일절 이수하지 않고 가문에서 어른들의 각별한 관심하에 ‘독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특기할 사실이 있다. 증조부 항재공(恒齋公) 이익구(翊九), 1838~1912)와 조부 성헌공(省軒公) 이병희(炳熹), 1859~1938)는 유학자로서 다같이 역사가였다. 항재공은 사론적 성격의 『서고 독사차기(西皐讀史箚記)3를 저술했고 성헌공은 조선조의 역사를 강목체(綱目體)로 기술한 『조선사강목(朝鮮史綱目)4을 저술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사강목』은 숙종에서 중단된 미완성의 대작이었다. 『조선사강목』을 완성하는 것이 그 손자에게 부여된 임무였다. 문중에서 설립, 운영하는 정진의숙(正進義塾)이라는 근대적인 학교가 있었으며, 서울이나 토오꾜오로 유학을 떠난 지친들이 여럿이었음에도 유독 이 손자만은 전통적인 한문공부에 매여 있어야 했다. 조부께서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말씀이 “글공부를 중단하지 말도록, 그리고 방향을 바꾸지 말도록” 하라는 것이었다.5 다름 아닌 ‘조부의 유훈’이다.

그가 유년 시절부터 독선생을 모시고 공부했던 처소는 퇴로 본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산장인 서고정사(西皐精舍)였다. 증조부의 『서고 독사차기』라는 책이름의 ‘서고’ 또한 이 산장에서 저술작업이 진행되었던 까닭에 붙여진 것이다. 서고정사에서 그는 오로지 전통적인 방식으로 유가의 경전을 읽고 한문교양을 쌓았다. ‘일본어·일본문화와 격절된 환경’, 그것은 근대와 격절된 환경이기도 했다. 그 스스로 이 글공부의 틀에서 이탈할 생각을 품었던 것 같지 않다. ‘가학의 계승’이 중차대한 사명감으로 작동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문제는 이 유훈을 지켜나가는 일이 도저히 어려운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이었다. 식민통제가 강화되고 압박이 날로 가중되는 일제 말로 다가오면서 조용히 독선생을 모시고 하는 글공부조차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 암흑기’로 일컬어지는 시기다. 조부의 『조선사강목』 초고가 압수를 당했으며, 급기야 형사들이 산장으로 들이닥쳐 그의 한시문 습작물까지 탈취해간 것이다. “드디어 산장의 문을 걸어 잠그고 집으로 거처를 옮”길 도리밖에 없었다 한다. 1944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시점에서 그는 근대적 지식을 접수하게 되는데 맨 처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량 치차오(啓超), 1873~1929)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이었다고 한다. 만권에 가까운 한적(漢籍)이 쌓여 있는 한구석에서 『음빙실문집』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집안 어른들이 순수 정통의 공부를 하는 손자의 눈에 닿지 않도록 치워두었다는 말씀을 선생에게서 들은 바 있다. 이 책에 “크게 흥미를 느껴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읽었다”는 것이다. 『음빙실문집』은 20세기 초 동아시아의 근대계몽기 지식인들에게 영향력이 지대했던 책이다. 중국에서만이 아니고 구한국시기 우리나라에서도 량 치차오의 저술 여러종이 번역, 출간되었는가 하면, 『음빙실문집』이 수입되어 널리 읽혔다.6 그에게 있어서 『음빙실문집』의 발견은 근대의 발견이기도 했다. 그는 ‘근대’를 한 세대 반 정도나 뒤늦게 접수한 셈이다. 그런데 곧이어 근대적 지식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의 친척 사이에 서울이나 일본으로 유학을 간 분들이 여럿이었다. 이들과 대화를 할 때 책을 통해 입력된 (중국식의 한문표기인) 서양의 인명이나 개념을 맞추느라고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도 있다. 일본 유학생 중의 한분이 학병으로 끌려가면서 자기가 보던 철학과 역사학 관련의 책들을 보내와서 “서양에 관한 지식, 현대에 관한 지식을 나름대로 많이 섭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지식의 섭취과정에서 필시 사회주의 사상 및 유물론적 사관에 대한 이해도 점차 갖게 되었을 터이다. 그로부터 몇년 지난 시점에서 “나는 유물변증법 이론에 상당히 심취”하게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1945년, 해방을 맞은 이후에 전개된 시대현실 또한 조부의 유훈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 자체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갈수록 더욱 그런 상황이 발전하는 추세였다. 강목체 역사서술은 이미 멀리 흘러간 물이었다. 그 자신 시대현실을 온몸으로 부딪치고 근대 지식에 개안이 되면서 이 점을 뚜렷이 느끼게 된다. 이에 심각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진로수정을 하게 되는바 새로 잡은 방향은 근대적 의미의 역사학이다. 전통적인 역사학으로부터 근대적인 역사학으로 방향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4

 

강목체는 역사의 인식 틀의 하나다. 주지하다시피 한자문화권에 있어서 역사서술은 편년체(編年體)와 기전체(紀傳體)가 대표적인 방식이다. 강목체는 편년체에 속하는 것으로 그 변용이다. 북송대에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저술, 편년체 방식으로 중국의 전사를 체계화한 것이다. 남송대로 와서 주희(朱熹)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내놓았다. 시순에 따라 사실을 배열하는 편년체를 기조로 하되 주요 사실(史實)을 표출하는데 이것이 ‘강’이고 그 아래 전후 맥락을 서술하는데 이것이 ‘목’이다. 따라서 강목체는 역사에 대한 평가, 즉 가치관을 전면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인식 틀로 볼 수 있다. 『자치통감』에 이르러 장구한 시공간에서 진행된 중국을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꿰어낸 위대한 인식체계를 이룩했던바 주희는 거기에 강목체를 도입, 역사의 진로상에 정통(正統)을 확고하게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서로 말하면 기전체로 『삼국사기』와 『고려사』가 있으며, 편년체로 『동국통감』을 들 수 있다. 17세기 이래 강목체가 출현한바 임상덕(象德)의 『동사회강(東史會綱)』,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이 그것이다. 강목체를 역사서술에 도입한 것은 주자학을 숭상하는 정신풍토와도 무관하지 않겠으나, 민족의 과거를 하나의 역사권으로 체계화하려는 자아의식이 투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조부의 『조선사강목』은 특히 『동사강목』을 계승하겠다는 뜻이 담긴 저술이었다. 『동사강목』은 고려시대로 끝나고 조선시대로 내려오지 못했다. 『조선사강목』은 『동사강목』에 이어진 모양이지만 연장선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서술 내용이 조선에 국한되지 않고 중국·일본 나아가서 구미제국으로까지 시야를 확대시킨 점이 무엇보다 주목된다. ‘조선을 중심으로 한 세계사’로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강목체는 아무래도 근대적인 역사인식의 틀로서는 부적절한 것이다. 일찍이 중국에서 신문학운동의 주장이었고 근대학술을 선도했던 후스(胡適)는 이전엔 “교사자(校史者)만 있었고 역사가는 없었다”고 하면서 ‘역사가의 안광(眼光)’이 결여되었음을 지적했다.7 역사가의 안광이 통할 수 있는 투철하고도 자유로운 역사서술의 형식이 요망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벽사는 해방 이후에 진출한 제2세대 역사학자군으로 합류하게 된다. 제도교육의 밖에 있었던 그가 어떻게 근대교육과 근대학문의 길로 진입할 수 있었을까? 관련된 일화를 들어보면서 대략의 경위를 알아볼까 한다.

1947년의 일인데 그는 22세 청년으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을 만난다. 심산은 성균관대가 근대대학으로 출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초대 총장으로 있었다. 동양철학을 담당할 적임자를 찾는 중에 ‘이 아무가 재주 있고 공부가 대단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불렀다. 심산은 “자네가 이우성인가” 하더니 자못 실망스런 표정으로 “자네, 교수가 되기에 나이가 너무 어리니 우선 우리 대학에 학생으로 입학해두게”라고 말했다. 나이도 나이인데 대학 학력도 없었으니 심산의 반응은 당연했다고 보겠으나 그 또한 교수가 아닌 학생이 되라는 데 반발하여 내려와버렸다. 심산이 그뒤에 “우성 군을 올려 보내라”고 집안 어른에게 서신을 보내와서 대학에 학적을 갖게 된 것이다. 그의 성균관대 입학은 19499월, 졸업은 19533월 말로 학적부상에 나와 있다. 소속은 ‘문학과 국문학전공’(사학史學이라고 썼다가 국문학國文學으로 수정되어 있음)으로 되어 있다.

그는 말하자면 교수 대신 학생으로 특채된 형국이었다. 게다가 대학이 제공하는 강의에 영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내 공부 내가 하는 거다”라는 생각을 가져서 부산으로 내려와 교사 노릇을 했다. 그즈음 6·25전쟁이 일어나서 임시수도가 부산에 와 있었다. 전쟁은 사람들에게 큰 고난이고 허다한 불행을 안겨주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의외의 행운이 생길 수도 있다. 성균관대는 부산고등학교에 더부살이하는 형편이었는데 그는 때마침 부산고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한 건물에서 낮에는 교사, 밤에는 학생 노릇을 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때 부산고는 김하득(夏得)이라는 분이 교장으로 있었다. 이분은 청렴결백하고도 훌륭한 교육자로서 학교를 일약 명문으로 키웠다 한다. 봉급만 해도 성균관대 교수가 20원을 받는데 부산고 교사는 80원이나 받았다는 것이다. 부산고에는 후일 학자로서 대성한 분들이 피난을 내려와서 기라성처럼 포진해 있었다. 김하득 교장이 교감에게 이 선생님들은 장차 우리나라의 보배로운 학자가 될 것이니 잘 대우하라고 당부하곤 했다는 이야기를 벽사 선생에게 들은 바 있다. 벽사는 역사학자 한우근(韓㳓劤)·전해종(全海宗) 등과 함께 근무하면서 역사학의 방법론에 대해서 곧잘 토론을 벌였다.

한문학자 연민(淵民) 이가원(家源)은 벽사와 같이 김창숙 총장의 ‘특채’ 학생으로 한 학년 위였는데 부산고에서도 같이 교사로 근무했다. 이 두분은 도남(陶南, 국문학의 개척자인 조윤제) 선생의 강의는 들을 만하다 하여 같이 수강을 했다. 도남은 이 두 학생이 없으면 마냥 기다리고 있다가 들어오면 신나서 열강을 했다고 한다. 이때 도남의 민족사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수도가 부산에 내려와 있었던 전시 상황에서 부산고는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 갖춰진데다가 도남이라는 학자를 만난 것이다. 그는 그의 유일한 제도권 학력인 학부 4년을 마칠 수 있었고 도남의 권유로 학문의 방향을 잡게 된다. 불안정하고 열악한 형편임에도 학부의 졸업논문을 중시하는 학풍은 유지되고 있었다. 도남이 그에게 “자네, 실학계통에 속한 가문이니까8 실학에 대해서 써보게”라고 권하여 실학의 개념 문제를 주제로 잡아서 졸업논문을 쓰게 된다. 후일에 발표되어 실학인식의 지침이 되었던 「실학연구서설」의 초고이다.

 

 

5

 

실학은 그의 학문 도정상에서 출발지점이었다. 학계에 선보인 첫 논문 역시 「실학파의 문학: 박연암의 경우」(『국어국문학』 16, 1957. 후일 실학파의 문학과 한문학으로 개고하여 『한국의 역사상』에 실려 있음)이다. 그런데 이 실학에서 맨 처음 부딪친 의문이 있었다. 실학자들 역시 다 양반인데 왜 비판의 칼날이 양반을 향했던가라는 문제였다. 이에 재야지식인, 즉 사()를 실학의 주체로 파악하면서 사대부(=양반)의 역사적 기원을 규명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그래서 관심이 고려사회로 소급되기에 이르렀다.

근대적인 연구자로서 그의 주 전공은 고려시대가 되었다. 그는 드디어 역사학자로 자신을 정립한 것이다. 인간의 삶의 기초인 토지 소유관계나 신분제도 등 사회구조의 고찰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또 문제의식이 따랐다. 일제 관학자들이 구축해놓은 “식민지사관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극복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의 사학이 성립될 수 없다”는 지론이다. 그것은 주관적 애국심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자료에 근거해서 논지를 전개했던바 편편이 문제작으로 발표할 적마다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진보적인 사관에 서 있으면서 실증적으로 탄탄한 미덕을 지녔기 때문인데 한문원전을 정확히 해독할 역량을 갖추었기에 설득력을 갖게 되었음이 물론이다.

그리고 애초에 고려시대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던 그 주제 역시 고려사회 의 분석을 통해서 사대부의 역사적 기원을 규명해냈다. 나아가서 사대부의 생활세계 및 의식세계의 형성 및 진로를 고찰하게 되었다. 거기서 ‘사대부문학’이라는 개념이 도출되고 자연스럽게 조선조의 문학사를 인식하는 시야가 열릴 수 있었다. 『이우성 저작집』 제2권의 『한국중세사회연구』는 바로 그 결산서이다. 모두 1960년대의 성과인데 역사학자 이우성의 학문연구의 진수가 담긴 내용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1970년에 발표된 「실학연구서설」(『문화비평』 7·8호, 『한국의 역사상』에 수록)은 실학의 개념과 체계를 이론적으로 정립한 논문이다. 실학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고조되면서 실학론이 일종의 유행담론처럼 되어, 개념상 혼선이 빚어지고 속화되는 경향이 다분히 있었다. 이에 그 인식의 방향을 바로 세워서 세상에 경종을 울리고 후학들을 각성케 하려는 숨은 뜻이 담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학적 생애에서 전반기에는 관심이 고려사로 집중되었고 후반기에는 실학으로 집중되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실학연구는 그 자신의 학적 출발지점으로의 회귀였던 셈이다.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추구된 학문세계는 여러 분야에 걸쳐 있는데다가 넓고 깊어서 전부를 가늠하기는 실로 난감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지금 그의 학자적인 상()을 염두에 두면서 몇가지 특징적인 면모를 표출해본다.

 

··철의 유기적 통합체

그의 학문은 역사학이 중심에 있었지만 위에서 보았듯 역사학에 국한되지 않았다. 근대학문의 분과적 경계 너머에 있다. 근래 와서 허다히 거론되는 ‘학제 연구’라든가 ‘융합학문’이라든가 하는 등과는 다른 차원으로 문··철이 그의 학문작업에서 통합을 이루고 있다. 이는 전통적 교양의 기반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것이 일차적 요인이긴 해도 다는 아니다. 근대적 지식인으로서의 자아각성이 결합된 형태이다. 유교적 선비와 근대적 지식인, 이 양자는 한국의 근대현실에서 상호 불상통의 상반된 양상으로 나타났지만 오직 그의 정신활동에서는 근대 속에 전근대가 창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문··철의 유기적 통합체가 곧 그의 학문세계라고 규정지어도 좋겠다.

 

주체와 민족

그의 학문세계에서 열쇠말을 하나 들라면 나는 ‘주체’라고 답하겠다. 그의 생애는 주권을 상실했던 식민지시대, 민족과 국토가 갈라진 분단시대에 걸쳐 있다. 이런 시대를 살면서 학문은 어떤 방향으로 추구해야 할 것인가. 그가 가장 고민했던 과제였다. 그의 역사론집인 『한국의 역사상』(『저작집』 1)의 머리말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의 ‘나’의 주체가 역사의 주체로 통일되어야 하며, ‘나’의 주체가 역사의 주체로서의 위치에 서게 될 때 그 역사기술은 개인의 것이 아닌 역사 그 자체의 하나의 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그렇게 되어야 ‘민족의 역사학’으로서 의미를 갖는다는 주장이다. 한국의 역사학은 실증사학과 민족사학, 사회경제사학의 세 유파로 구별해볼 수 있다. 그의 입지는 ‘민족사학’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의 학문은 언제고 실증성을 중시했으며, 민족사학이 관념적·국수적으로 흐를 우려가 있음을 경계하여, 사회경제사학의 “구체적인 사회관계분석, 과학적인 분석방법을 도입해서 그 성과 위에서 민족사의 방향을 정립”9해야 할 것임을 역설했다. 민족사의 진취적·역동적 향방을 염두에 둔 사고이다.

 

학적사고와 현실성

학문은 ‘나’의 주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에 확고했기에 현실을 떠나서는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지금’ ‘이곳’의 현실을 여하히 인식, 여하히 파악하느냐 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이 땅의 역사학도에게 주어진 가장 절실한 과제다.”10 우선 ‘이 땅의 역사학도’로서의 학적 사고를 대변한 발언을 들어보자. 박정희정권이 한일협정을 성급히 체결한 이후의 시점이었다. “자유세계의 일원이라는 관념만으로는 오늘의 국제사회 속에서 생존할 수 없으며 우리 민족은 우리 민족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살길을 찾아야겠다는 절박한 현실을 직감하게 되었다.”11 한일협정을 반대했던 입장에서 감정적 차원에서의 반일을 넘어 세계 대국(大局)에서 민족 주체를 어떻게 세워야 할 것인가를 고민한 발언이다. 그리고 학적 작업에 현실성이 어떻게 투영되는가에 대해 하나의 사례를 들어서 보자. 「남북국시대와 최치원」은 『창작과비평』 1975년 겨울호에 실려서 당시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문제작이다. 신라와 발해가 남북으로 대립한 상황에서 양쪽은 서로 불화하고 갈등해서 마침내 멸망했는데 최치원 같은 최고 지식인도 당나라의 동방정책에 이용만 당하고 말았다는 논지였다. 비록 까마득한 옛날의 역사를 논한 것임에도 오늘의 분단현실에 그대로 와닿아서 깨닫고 반성하도록 했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글을 읽더라도 여전히 눈앞에 벌어지는 분단현실에 비분감을 일으키게 만들지 싶다.

 

고전적 가치

그의 학문작업의 성과들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물론 후진들의 연구에 의해 새롭게 밝혀진 대목이나 부정된 학설도 없지 않다. 또한 고려시대 연구처럼 식민지 사관에 의한 역사왜곡을 바로잡으려는 문제의식이나 민족현실에 대한 고뇌를 담은 주제처럼 관심권 밖으로 돌려진 경우도 있다. 그리고 시대의 추세를 따라 속류적이고 감각적인 취향을 좇는다거나 투입된 사고의 깊이와 표현의 함축미를 해독하기에 힘이 부쳐서 잘 읽히지 않거나 읽히기 어렵게 만든 면도 있다. 그래서 말하기 쉽게 연구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들 한다. 필자는 이 점을 부인하진 않지만 각도를 달리해서 언급하고 싶다. 요컨대 그가 남긴 저작은 고전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학이 업적을 평가하는 제도 때문에 논문이 양산되어 결국 일회용 소모품처럼 되어가는 사태와 원천적으로 다르다. 그가 수행한 연구의 결실 역시 논문 형태로 발표된 것임에도 전혀 다르게 인식되는 까닭은 어디 있을까. 요인 둘을 들어본다. 하나는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현실성이 핍진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 기초한 보편성을 띤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 특유의 글쓰기 방식이다. 논문도 작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의 논문을 찬찬이 읽어보면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성에 주옥처럼 선명하고 정결함이 느껴질 것이다. 이는 단순한 표현형식의 문제를 넘어 인문적 창조의 정신에 맞닿아 있다. 오늘의 한국 대학은 논문의 양산이 기실 학문의 부실화를 촉진하고 있는바 이 점을 반성하자는 뜻에서 지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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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학자로서의 삶을 영위한 선생은 근대 지성으로서의 사명감을 투철히 자각한 인생행로를 걸어오셨다. 때문에 독재가 계속되어 불의와 폭압이 판을 치고 험난하기만 했던 한국현대사에서 선생은 4·19 직후에 부산의 어느 대학에서 학원의 ‘민주화운동’에 가담한 까닭으로 쫓겨나 서울로 올라오게 되며, 1960년대 중반 박정희정권이 졸속하게 추진한 한일협정에 역사학회에서 낸 반대성명을 주도한 바 있었다. 1980년에는 신군부의 재등장을 앞두고 ‘361교수 성명’을 선도한 이유로 구금, 해직되는 고초를 겪게 된다. 그 전후에 있었던 일화 두가지를 들어보자. 옛사람의 이야기처럼 들릴 것도 같다.

유신체제의 막판에서 박정희 군부독재는 민중저항에 극도의 탄압을 가하는 한편 정신문화연구원이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여기에 선생을 끌어들이려 한 것이다. 이를 완강히 거부함에 대통령의 결재가 이미 난 사안이므로 절대 되돌릴 수 없다고 갖은 협박과 회유를 가해왔다. 곤혹스럽기 그지없었으나 끝끝내 굽히지 않았다. 이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다음은 해직교수로 곤란하게 지내던 시기다. 일본의 하따다 타까시(旗田巍) 교수를 비롯한 양심적인 학자들이 선생의 처지를 걱정하여 일본으로 초청해서 선생 내외가 토오꾜오에서 1년 동안 체류하게 된다. 1982년이었다. 선생을 환영하는 모임을 가지려고 선생과 의논, 시일과 장소를 정하고 참석자 모두에게 연락도 취해졌다. 그런 중에 교과서 문제가 일어났다.12 일본의 한국사학자들은 이에 항의집회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미처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때 선생으로부터 환영회에 참석하지 못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교과서 문제를 좌시하는 사람들과는 자리를 함께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따다 교수가 직접 찾아와서 “우리들은 교과서 문제를 묵과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막 항의집회를 열 준비”를 하는 중이라고 간곡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제서야 참석 거부를 철회하여, 환영회는 예정대로 실현될 수 있었다 한다.13

그는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했고 추호도 바르지 않은 자리에는 앉지 않았다. 선비의 ‘직내방외(直內方外, 내면을 곧게 하여 실천을 바르게 한다)’의 자세 그것이다. 하따다 교수는 위 일화를 소개하고 “나는 이우성 선생에 대한 존경의 염()을 한층 더 깊게 하였다”면서 그런 태도를 ‘순수한 한국인의 품격’이라고 표현했다.

선생은 학자로서 상아탑을 고수하는 한편 상아탑에 스스로 갇혀 있지 않았다. 지식인으로서 시대현실에 대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사회참여를 해왔다. 하지만 선생의 사회참여는 학자로서의 입장을 지키는 선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냉전체제하의 분단상황에서 민족의 주체를 중시하였던바 그것이 학문의 논리로 관철된 것이다. 그리하여 학문하는 ‘나’의 주체가 역사의 주체로 통일되어야 함을 분명히 각성하고 확고히 주장했다. ‘나’의 주체를 역사의 주체로 통일시키는 것은 지난한 과제이다. 더구나 권력의 횡포가 부단히 자행된 한국의 정치상황에서는 말할 나위 없다. 그렇기에 선생은 민족현실과 정치현실에 항시 고민하며 종종 허탈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적극적인 자세로 실천의 방도를 사고하였는데 노경에 이르러 노력을 기울이신 사업은 후진 양성과 함께 고전의 정리·번역이었다. 우리 한국학의 기반을 제대로 닦으려는 취지였다. 이를 위한 장으로 연 것이 다름 아닌 실시학사(實是學舍)다. ‘실시’는 실사구시의 준말이다. 실사구시는 선생에게 있어서 학문의 방법론이자 사회적 실천의 방법론이다.

선생은 그 주체에서부터 전통적인 유자요, 한문선비인 동시에 근대적 지식인이다. 요컨대 보수적 생활자세와 진보적 학문의식, 보수와 진보가 통일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벽사 이우성이라는 학자의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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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필자는 지난 5월 14일 거행된 영결식장에서 추도의 말을 했고 그 내용을 정리해서 대한민국학술원에서 발행하는 회보에 실은 바 있다. 지금 이 졸고는 기왕에 발표했던 추도사를 바탕으로 크게 보충한 것이다.
  2. 여기서부터 뒤로 나오는 벽사 선생 자신의 생애에 관한 서술이나 일화 등은 『이우성 저작집』 8에 실린 「자찬년보」를 위주로 하면서 『벽사 이우성선생 년보』(김시업 찬)와 「문·사·철을 겸비한 실천적 지식인」(李離和와의 대담록)에서 원용했다. 그리고 필자가 선생에게서 직접 들었던 말도 포함되어 있다. 모두 출전을 밝히지 않음.
  3. 이 책은 여강출판사에서 1985년에 영인본 1책으로 간행되었는데 해제는 민두기(閔斗基)가 썼다.
  4. 이 책은 아세아문화사에서 1981년에 영인본 3책으로 간행되었는데 서문은 고병익(高炳翊), 해제는 강만길(姜萬吉)이 썼다.
  5. 「자찬년보」, 『이우성저작집』 8, 491면. 창비 2010.
  6. 『음빙실문집』은 상하이 광지서국(廣智書局)에서 발간된 것으로 상・하 2책의 방대한 분량이다. 자서의 연도는 1902년인데 누차 증보 간행되었다. 필자가 소장한 책은 1908년 제5판이며, 서울의 회동서관에서 수입한 것임이 명시되어 있다. 190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에서 단행본으로 발간된 그의 저술로는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1907, 한문본과 국문본이 공존했음), 『음빙실 자유서(飮氷室 自由書)』(1908), 『중국혼(中國魂)』(1908) 등이 있다.
  7. 胡適 「國學季刊 發刊宣言」, 『國學季刊』 창간호, 1923.
  8. 벽사의 증조부인 이익구가 성호(星湖) 우파의 적통인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인이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9. 좌담 「민족의 역사, 그 반성과 전망」, 『창작과비평』 1976년 가을호 46면.
  10. 『한국실학입문』(일조각 1973)의 서문.
  11. 『역사학보(歷史學報)』 49, 「1969~70 한국사학계의 회고와 전망」. 이우성 선생이 역사학회 회장으로서 특집의 총설을 담당해 쓴 것이다.
  12. 일본 당국이 초·중·고교 교과서 개편 작업을 하면서 한국과 관계된 부분을 크게 왜곡하여, 이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한일 간의 외교문제로 확대되고 학계에서도 분분한 논의가 일어났다. 한국에서는 1982년 7월 30일에 이 문제에 대응하는 공청회가 열렸다. 그때는 일본 측으로부터 ‘교과서의 문제된 부분을 정부 책임하에 시정’하겠다는 각서를 받은 바 있다.
  13. 하따다 타까시 「서(序)」,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 벽사 이우성 교수 정년퇴직 기념논총』, 창작과비평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