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김종엽 『분단체제와 87년체제』, 창비 2017
우리 시대를 체제론으로 톺아보다
신진욱 申晋旭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socioshin@cau.ac.kr
오늘날 한국 사회과학계의 연구들은 세분화된 전문영역들로 점점 좁혀지고 있고 전문학술지에 게재될 수 있는 분량으로 그 호흡이 짧아지고 있다. 많은 흥미로운 학문적 발견들이 학술논문 데이터베이스에 갇혀 사회적 공론장으로 나오지 못하고,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성을 거시적 수준에서 이론화하려는 시도는 학문적 엄밀성이 떨어지는 사변적 글쓰기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이런 풍토 속에서 사회학자 김종엽(金鐘曄)이 최근 출간한 『분단체제와 87년체제』는 특별한 의의가 있다.
이 저작은 제목이 말해주듯 ‘체제’의 문제를 다룬다. 저자가 여기서 입론하려는 것은 사회의 특정 부분체계가 아니라 정치·군사·경제·문화 등 여러 차원 간의 관계의 총체다. 또한 일국적 수준과 한반도, 세계체제를 잇는 관계구조를 규명하려 한다. 연구의 차원과 단위의 측면에서 이만한 범위의 이론적 시도는 1980년대의 사회구성체 논쟁 이후 매우 드물었다. 최장집, 손호철, 조희연, 김동춘 등 대표적 이론가들을 잇는 다음 세대 학자들 가운데 김종엽은 매우 주목할 만한 시도를 하고 있다.
『분단체제와 87년체제』는 저자가 2천년대의 다양한 시점에 발표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서로 다른 맥락, 주제, 대상을 갖고 있는 각 장의 내용을 재구성해보면, 저자는 크게 체제론과 습속론이라는 두 측면에서 이론적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체제론의 구조는 ‘세계체제-분단체제-87년체제의 삼중조망’으로 집약되며, 습속론은 분단체제하의 ‘사회적 에토스’의 기원, 특성, 결과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체제론의 영역에서 저자의 주요 관심은 일찍이 백낙청이 인문학적으로 제기한 분단체제론의 문제의식을 사회과학의 개념, 이론, 경험분석을 통해 더욱 발전시키는 데 있다. 근대성 전반을 규명할 이론적 자원으로 세계체제론을 도입하고, 남북한 분단체제를 미국 헤게모니하 세계체제의 한 하위체제로 자리매김한다. 분단체제는 남북한 지배층 간의 적대적 상호의존을 특징으로 하는 관계체계로서, 그것은 그 하위체제인 남북한 사회를 규정하면서 동시에 남북한 사회의 변화에 의해 영향받는다.
분단체제론이 분단결정론, 분단환원론에 빠져 있다는 일각의 비판이 있지만, 저자는 분단체제의 변화 과정을 밖으로는 세계체제, 안으로는 남북한 사회 변화와 연결시켜 추적하고 있다. 여기서 ‘87년체제’가 분단체제 동요기를 여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등장한다. 1987년 민주화와 더불어 남한사회는 더이상 단지 분단체제의 재생산 요인이 아니라, 그것을 유지시키려는 힘과 약화시키려는 힘이 경합하는 장이 된다. 87년체제의 등장에 의해 분단체제의 역동성이 개시되었다는 것이다.
습속론의 관점에서 저자는 분단체제하에서 한국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사회적 에토스를 섬세하게 읽어낸다. ‘현재주의’ ‘연대 없는 평등주의’ ‘상처 입은 민족주의’ ‘사유와 심성의 우경화’가 그것을 응축하는 대표 개념이다. 저자는 이러한 에토스를 식민통치, 분단, 전쟁, 독재 같은 집단적 체험의 산물로 설명하지만, 일단 그것이 정립된 후에는 한국사회 역동성의 원천이자 동시에 분단체제 극복을 저해하기도 하는 양가성을 갖는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이 책에는 양자를 결합시켜 교육문제와 사회운동이라는 구체적 사회현상을 분석한 글도 포함되어 있다. 저자는 한편으론 분단체제하의 반공권위주의·발전주의 지배구조와 무규범적이고 경쟁적인 심성구조가 어떻게 서로를 강화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87년체제의 불안정성과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의 정치적 에너지가 민주주의와 사회적 정의라는 미완의 프로젝트를 완성시켜가는, 혹은 완성을 위한 문을 열어젖히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그려낸다.
이처럼 한국사회의 거시적 지배구조와 문화적 심성구조를 이론화하고 이를 경험분석에 일관성 있게 적용하려는 김종엽의 시도는 한국의 사회과학 지성계에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것은 오늘날 각 전문분야에 갇혀 있는 부분적 지식들을 종합하여 한국사회의 구조와 변동을 이론화하는 노력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며, 그와 동시에 비평가적 시대진단에 만족하지 않고 경험세계에 대한 분석에 기초한 개념과 이론체계를 제시할 것을 요구한다.
이 저작은 물론 결함이 없지 않다. 세계체제론 및 그 비판자들과의 이론적 대결은 충분히 치열하지 않았고, 세계체제와 분단체제를 잇는 고리인 동아시아론은 여전히 괄호 안에 있다. 분단체제가 본질적으로 남북한 관계체계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체제론은 전무한 상태다. 저자는 분단체제의 주요모순이 남북한 지배계급과 민중 부문의 대립이라고 했지만, 이 주요모순의 전개가 남북한 각각의 사회체제와 분단체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을 소홀히 했다. 또한 국민국가의 능력과 경계를 약화시키는 세계화 과정을 ‘세계도시’나 ‘탈민족화’를 다루는 장에서 언급했지만, 그처럼 중대한 근대성의 변동이 분단체제와 민족주의의 위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대답은 아직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제를 이 책의 저자가 모두 채워야 했다거나 앞으로 채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학문발전이 근본적으로 집단적 과정이며 집단적인 지적 운동의 결과임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처사가 될 것이다. 백낙청과 마찬가지로 김종엽 역시 분단체제론과 그에 연계된 87년체제론이 모든 것을 품는 이론의 거탑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 땅의 사회과학자들이 분단체제론과 87년체제론의 문제의식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함께 기여해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 호소에 응하는 독자라면 이 저작의 여러 공백을 메우는 공동의 작업에 기꺼이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협력을 위한 출발점의 하나로서 충분한 가치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