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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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분단체제를 다시 생각할 때

 

분단체제에서 ‘사회’ 만들기

 

 

김성경 金聖敬

북한대학원대 교수, 사회학. 공저 『분단된 마음의 지도』 『탈북의 경험과 표상』 등이 있음. ksksocio@kyungnam.ac.kr

 

 

1. 분단에 대한 무감각과 무관심

 

얼마 전 서울의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특강 기회를 얻었다. 열정으로 가득한 사회과학도들과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하니, 설레는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젊고 비판적인 이들의 연구주제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가장 최신의 이론과 방법론으로 무장한 이들이 주목하는 현상이야말로 바로 이 사회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겠다는 기대감과 이들의 연구주제가 바로 ‘지금 여기’를 탐구하는 사회과학 연구 지형을 증언하리라는 예측이 교차했기 때문이다.

연구 관심사로 젠더 문제와 페미니즘, 우울증이나 신경증 같은 심리적 이슈와 의료와 범죄 영역에서 규율화의 문제, 촛불혁명시대의 국가 역할 등이 언급되었다. 여성혐오 논란이 분출된 최근 상황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폭발적 관심이야 예상 가능했지만, 개인 심리적 불안을 사회병리학의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시도가 상당수를 차지한다는 점과 전통적인 주제인 국가와 관련된 논의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한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발견이었다. 어쩌면 이들의 관심주제 면면이 ‘사회’ 없이 국가와 개인으로 양분된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가리키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사회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국가·일상·개인의 삶을 뒤흔드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사람들이 모여 협력하는 공간이자 결속체인 ‘사회’의 위기를 만들어냈다. 이제 한국사회는 ‘사회’ 없는 사회로서 개인과 국가로만 특징되기에 이르렀다.1

이러한 상황에서 예비 사회과학자들이 ‘개인적인 것’, 특히 개인의 행동이나 인식 혹은 감정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문제는 개인의 문제를 너무나 천착한 나머지 ‘사회’라는 실재의 작동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회’를 만들어가는 문제까지 논의가 확장되지 못하는 데 있다. 사회학이 살피고자 하는 것이 ‘사회적인 것’이라면 이는 결국 더 나은 ‘사회’, 즉 협력과 공존의 유기체에 대한 가치론적 질문과 깊이 연관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작금의 학문 논의는 그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듯하다.

주목해야 할 또다른 특징은 바로 젊은 사회과학도들의 ‘분단’문제에 대한 무감각과 무관심이다. 당장 전쟁이 난다 해도 놀랄 것이 없는 현 상황에서 분단은 어쩌면 가장 긴박한 문제이자 한국사회의 수많은 사회문제의 근간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은 바로 왜 우리는 ‘분단’에 무감각해졌는가 하는 것이다. 백낙청()의 표현을 빌려오면 한국사회는 ‘후천성 분단인식결핍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는데, ‘분단’이라는 비정상적인 사회구조를 ‘정상적’인 것으로 인지하게 하는 분단효과가 우리의 인식체계 자체를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2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분단을 천착한 몇몇 연구는 주류 학계에서 ‘분단환원론’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고, 분단극복을 위해 통일을 주장하는 것 또한 뜬구름 잡는 이상주의로 폄하되기도 한다.

하긴 분단과 통일에 대해서 사회 전반적인 인식이 낮을 뿐만 아니라, 그 관심 또한 점차 줄어드는 현 상황을 감안할 필요도 있겠다. 예컨대 최근 평창올림픽 남북단일팀 구성을 두고 여론이 상당히 부정적이었다는 것은 분단과 통일 문제에 대한 한국사회의 의식 변화를 확인하게 한다. 과거에는 민족공동체 회복이라는 이유에서 통일의 정당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면, 이제 상당수의 남한주민은 통일의 필요성을 공감하지 못한다. 게다가 남한주민에게는 더이상 합의되거나 공통된 통일의 상이 없고, 각자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통일을 전혀 다르게 감각하기도 한다. 특히 젊은 세대의 경우 통일이나 민족공동체를 고민하기보다 당장 자신들의 삶을 감당해내기에 바쁘고, 아무리 정치적 효과가 높은 남북 사이의 합의라 할지라도 경쟁의 공정함과 배치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젊은 층에게 분단과 통일은 삶과 동떨어져 있으며, 극한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당장 자신의 이해관계를 지켜내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성의 맥락에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현대사회의 가장 도드라진 현상이다. 바우만(Z. Bauman)이 ‘액체근대’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개인들은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현대사회 속에서 상시적인 불안감에 노출되어버렸다. 직업, 미래, 계획 등이 쓸모없어져버린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틀어쥐고 있다는 확실성조차 놓쳐버리게 된 것이다.3 이런 상황에서 과거를 반추하며 동시에 미래라는 지향을 두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은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 하루하루 그 순간만을 살아가는 현대인은 냉전과 분단이 현재의 삶을 제약하는 근원적 병폐라는 것도, 미래를 위해서는 분단극복이라는 역사적 과제가 중요하다는 것도 파악하기 어렵다.4

사실 분단을 의식하고 바라보면 한국사회에서 이상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국경이 점차 사라지는 지구화시대에 ‘죽었다 깨어나도’ 넘을 수 없는 국경 아닌 국경이 바로 지척에 존재한다는 것, 정부의 허가 없이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 말 한마디에 ‘빨갱이’와 ‘종북’으로 몰려 인격살해를 당할 수 있다는 것 등을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다. ‘정상적’인 것으로 둔갑해버린 분단은 논의의 지평에서 자취를 감추고, 분단을 배태한 비정상적인 인식과 감각 체계는 그 어떤 도전에도 직면하지 않은 채 세대를 넘어 확산되기까지 한다. 이런 맥락에서 젊은 사회과학도들의 분단에 대한 무감각과 무관심은 단순히 이 ‘세대’의 문제가 아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광폭해지는 분단효과를 짐작게 한다.

 

 

2. 분단체제론과 분단분열증

 

분단체제론은 남북한의 분단을 유동적이며 세계체제와 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체제’(system)로 설명한다. 남북한은 분단으로 분리된 다른 정치·경제 체제가 아니라 ‘독특한 상호적대/상호결합의 굳건한 결합구조’를 공유한다.5 백낙청은 남북한의 체제는 각기 완결성을 띠지 못한 채, 세계체제의 하위 단위로 작동하면서도 동시에 분단체제라는 또다른 체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즉 분단체제론은 남북한 사회를 논의할 때 세계체제의 일부로서의 측면과 분단체제 수준, 그리고 남한과 북한 체제 한쪽에 집중할 때 부상하는 문제를 다층적으로 살펴보자는 제안을 담고 있다.6 백낙청은 세계체제-분단체제-남/북한체제가 중첩된 현 상황에서 남북한 국가 단위만의 문제와 모순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남북의 진정한 사회변혁은 분단체제의 극복을 통해서만이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분단체제론의 이러한 시각은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실천적 문제를 남북 단위와 지역, 그리고 세계체제와의 연관성이라는 맥락에서 새롭게 사유하게 한다.7

백낙청은 여러 기고문에서 경험적 연구의 축적을 통해 분단체제론에 대한 논의가 좀더 풍부해졌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한 바 있다. 사실 분단체제론은 사회과학계에서 개념이나 이론적 측면에서 논쟁된 적은 있지만, 세 층위의 유기적 작동 메커니즘을 실제 경험적 수준에서 분석한 연구는 아직은 찾아보기 어렵다. 남북한 사회문제를 다루면서 분단문제와 권역 그리고 세계체제까지 아우르는 스케일의 연구가 벅찬 학문적 풍토 때문이기도 하고,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실천적 목표와 전략에 대한 상이한 해석과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분단체제론이 남/북의 지배층이 분단을 활용하여 기층민중을 억압해왔다는 사실을 적실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판단과, 분단체제의 극복 없이는 진정한 사회변혁이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이 87년체제를 거치면서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이론이 갖는 설명력과 개념적 유효성은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분단체제론은 좀더 많은 경험적 연구를 바탕으로 이론적 논의가 세밀화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분단현장에 대한 두터운 분석과 해석이다. 지금까지 분단체제론과 관련된 대부분의 연구가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정치학적 접근이나 담론적 논의에 치중해왔다면 이제는 일상과 주체의 차원에서 분단이 어떤 효과를 만들어내는지를 면밀하게 추적하는 작업 또한 병행되어야 한다. 분단체제론이 명확하게 밝히고 있듯이 분단은 단순히 구조의 수준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분단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사적 영역’까지 규율해왔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분단체제의 작동이 포착되는 다양한 영역을 분석하는 일은 분단‘극복’의 필요성을 확인하여 그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탈분단의 다양한 전략 수립을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작업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분단적 인식체계와 감정 등은 어떤 양태일까? 주지하듯 분단은 이 체제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제약하고 구속해왔으며, 특정한 분단적 주체를 생산하고, 분단을 배태한 인식과 감정체계, 감각, 그리고 정동을 구성해왔다. 분단체제가 만들어내는 분단효과 중에서도 분단으로 인한 인식과 감정체계의 비틀어짐, 즉 필자의 개념으로는 ‘분단분열증’의 작동은 다양한 현상에서 포착된다. 특히 분단으로 인한 분열증적 인식과 감정 등은 주체와 타자 사이의 적절한 관계 맺기를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확인된다. 여기서 ‘분열증’은 사회심리학자인 케네스 거겐(K. Gergen)이 현대사회의 심리적 징후로써 분열적 주체의 등장을 주목하면서 제안한 포화된 주체(the saturated self)라는 개념에서 착안한 것이다.8 거겐에 따르면 기술과 미디어의 발전에 따라 주체는 분열적 다중성(multiphrenia)을 지니게 되었는데, 문제는 각 정체성 간의 연관성이나 관계성을 찾기 어려워지면서 발생한다. 단일한 정체성을 강조했던 근대적 주체라는 허상은 해체되고, 파편적이며 지리멸렬한 주체가 등장하면서 주체들 간의 적절한 관계 구축이 어려워지고 결국 공동체의 근간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분열적 다중성은 어쩌면 현대사회에서 피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각각의 정체성이 서로 반대항을 이룬다거나 논리적으로 모순관계에 있는 경우 주체는 혼란과 불안을 경험할 확률이 높고, 이 때문에 분열증적인 상태까지 치달을 위험이 있다. 특히 분단체제 내에서 상대방을 민족이자 동시에 적으로 인지하는 것과 동맹과 민족 사이에서 줄타기해야만 하는 상황이 만들어낸 모순적 인식체계는 상대편을 향한 분열증적 시각과 감정을 구성하게 하는 것이다.

그 예로 문재인 대통령의 신베를린선언과 김정은 위원장의 2018년 신년사 일부를 비교해보자. 우선 신베를린선언은 적대적 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하는 ‘제재’와 ‘대화를 통한 평화’는 전혀 다른 수준에 존재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이 둘은 한반도의 상황을 감안할 때 동시에 작동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최근 한미 양국은 제재는 외교적 수단이며, 평화적인 방식으로 한반도 비핵화를 달성한다는 큰 방향에 합의했습니다. 북한에 대해 적대시 정책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천명했습니다. (…) 그러나 만일, 북한이 핵 도발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더욱 강한 제재와 압박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북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2017.7.6)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은 북한을 ‘적대시’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곧이어 북한의 항복을 요구하기도 한다. 선언문의 절반 정도는 북한에 대한 강력한 응징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설파하다가, 뒷부분에 가서는 남북교류와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모순은 어쩌면 남과 북의 관계, 즉 적이면서도 같은 민족이고, 분단으로 대치하면서도 공존해야만 하는 이중적 위치에 기원을 두며, 이는 북한에 대한 남한사회의 분열증적 인식 전반을 함축한다. 게다가 미국이라는 동맹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도 동시에 북한이라는 특수한 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 또다른 층위의 분열증적 위치 또한 일관되지 못한 시각과 감정을 생산해낼 수밖에 없다.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남북대화의 물꼬를 튼 선언으로 환영받은 김정은의 2018년 신년사의 일부는 아래와 같다.

 

우리 국가의 핵무력은 미국의 그 어떤 핵 위협도 분쇄하고 대응할 수 있으며 미국이 모험적인 불장난을 할 수 없게 제압하는 강력한 억제력으로 됩니다. (…) 오히려 남조선 당국은 온 겨레의 통일지향에 역행하여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에 추종함으로써 정세를 험악한 지경에 몰아넣고 북남 사이의 불신과 대결을 더욱 격화시켰으며 북남관계는 풀기 어려운 경색국면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책임있는 핵강국으로서 침략적인 적대세력이 우리 국가의 자주권과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나라나 위협도 핵으로 위협하지 않을 것입니다.(2018.1.1)

 

북한은 스스로를 ‘평화를 사랑하는 핵강국’으로 칭하고, 미국을 위시한 국가를 ‘침략적인 적대세력’이라 부른다. 자신들의 생존이 보장되는 상태를 ‘평화’로 정의하며, 이에 ‘평화’를 위해서 ‘핵무력’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규정한다. 누구든 자신들의 핵무력을 통한 ‘평화’를 위협하면 ‘침략적’이고 반평화적인 세력이 되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서는 비핵화를 주장하는 남한 또한 평화를 위협하는 적대적 세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같은 ‘민족’의 남한은 화해와 공존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이중적 존재로 정의되기도 한다.

각 주체는 상대방에 대한 다른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방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때로는 적대적이다가, 또다른 순간과 맥락에서는 특별하면서도 가까운 관계라고 주장하는 것만큼 혼란스러운 일은 없다. 분단체제를 배태한 남북의 인식체계에는 이렇듯 공존 불가능해 보이는 상반된 시각과 입장이 마치 일관된 것인 양 똬리를 틀고 있다. 남북의 분열증적 인식체계는 동아시아 지역의 냉전과 미국이라는 또다른 층위와 복잡하게 얽히면서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게다가 남북한의 분단분열증은 상대방에 대한 시각의 파편화에 머물지 않고, 주체의 혼란, 더 나아가서는 주체의 분열로까지 확장될 수 있기에 더욱 문제적이다.

 

 

3. 분단적 감정과 정동

 

인식의 이중적 구조 혹은 분열증적 징후는 분단체제에서 살고 있는 상당수의 개인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게다가 민주화 이후에는 단순히 북한이라는 타자에 대한 시선뿐만 아니라 남한 내 특정 집단이나 세력을 배제하기 위해 활용된, ‘빨갱이’나 ‘종북’이라는 낙인을 둘러싸고 분열증적 감정체계가 더욱 확산되었다. 예컨대 남한주민의 경우 빨갱이로 명명되는 세력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 북한주민에 대한 우월감과 공포, 그리고 북한을 향한 애증의 감정 등 동일한 대상을 두고 모순적인 감정과 인식체계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특히 빨갱이라는 기표는 시대와 맥락에 따라 끊임없이 확장되거나 재의미화되었고, 이제는 분단 기득권세력에 반기를 드는 모든 집단에 덧씌우는 일종의 주홍글씨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이 기표가 일종의 사상검증의 잣대로 작동해, 모두가 자신이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해야 함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인위적으로 구성된 이러한 기준이 내면까지 잠식하면서 자신의 의식과 표현을 스스로 검열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빨갱이는 엄청난 번식력으로 여전히 한국사회에 뿌리내리고 있고, 이들은 언제라도 한국사회의 근간을 흔들어놓을 수 있는 두려운 존재로 맥락화되기도 한다. 일례로 극우보수 세력들에게는 촛불광장을 메웠던 세력이 바로 빨갱이가 되며, 이들이야말로 한미동맹을 파기하여 한국을 ‘김정은에게 바치려’ 하는 불순세력이 된다. 그만큼 사람들의 인식 속 빨갱이는 혐오의 기표이면서 동시에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근간을 흔들어 오염시킬 수 있는 두려움의 존재다.

분열증적 인식은 복잡한 감정과 정동을 생산해내기도 한다. 감정이 오랫동안 학습되어 공유되는 정서와 느낌 전반을 의미하는 것이고, 정동은 몸과 감정을 아우르며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강렬한 힘이라고 정의할 때, 분단이 생산하는 분열증적 감정과 정동은 그만큼 일상적 수준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규정하고 제한할 확률이 높다. 분단적 감정은 이성의 수준에서 충분히 설명되기는 어렵지만 전쟁과 냉전을 경험한 상당수의 남한주민에게 깊게 각인되며, 이는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을 거치면서 확산되곤 한다. 예컨대 ‘태극기집회’에 참가한 상당수의 시민은 분단적이며 냉전적인 감정을 공유했는데, 이는 결코 이성 수준에서 논리나 경험적 증거 등을 통해 포섭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촛불집회의 규모가 급속하게 확장돼 위협을 느낀 자들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자신들이 평생을 바쳐 성취한 것의 부정으로 감각하게 되고, 태극기를 들고 광장에 모인 이들 사이에서 비슷한 정동과 기운이 확산되면서 빨갱이에 대한 혐오, 두려움, 반감 등이 한층 강력하게 작동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분단적 감정은 태극기집회에 참석한 이들 혹은 전쟁을 경험했던 노년층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젊은 층이나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던 시민들 또한 북한에 대한 적대감에서 자유롭지 않다. 북한주민을 가난하고 더러운 거지로 묘사한 인터넷 풍자그림부터 김정은을 전쟁광이나 미치광이 혹은 탐욕스런 돼지로 이미지화한 것, 거기에 북한주민을 세뇌된 수동적 집단이나 음흉한 공산주의자로 형상화한 것 등이 인터넷과 일상에서 널리 확산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상당수의 시민 사이에서도 북한의 체제와 지도자, 그리고 주민을 향한 적대감이 공유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9

또한 종편을 비롯한 미디어와 쏘셜미디어 플랫폼을 기반으로 확산되는 빨갱이와 종북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 등은 분단이 왜곡해버린 비틀어진 감정과 정동의 자원으로 재생산된다. 최근 한국사회의 병폐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혐오 정동은 분단과 관련된 특정 집단이나 개인을 공격한다. 예를 들어 지상파방송에서 북한에 대해 우호적으로 발언한 탈북 대학생을 향한 싸이버테러,10 선거 국면에서 정치적 입장을 밝힌 탈북자에 대한 인격 모독적 발언들,11 초등학생이 그린 통일 관련 포스터에 인공기가 등장한 것을 두고 정치권에 등장한 종북 논란12까지 분단을 배태한 혐오의 정동은 한국사회의 나약한 고리를 파고들어 사회 곳곳으로 확산된다.

주지하듯 혐오는 원초적 감정으로서, 주체의 고정된 영역의 안과 밖을 흐트러뜨리는 것들에 투영되는 정동이다. 너스바움(M. Nussbaum)에 따르면 혐오의 대상은 사실 그 사회 속에 내재한 속성이지만, 그 사회가 지향하는 순결성 경계 너머의 성격을 지녔다는 이유에서 추방되는 것이다.13 예컨대 여성이나 성소수자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자율적 인간이고자 하는 남성이 자신들에게 내재된 동물적 속성을 여성(성소수자)에게 투사해 혐오함으로써 완결성을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특정 사회가 혐오하는 대상의 속성은 사실 그 사회의 일부분이지만, 그 성향을 ‘타자’의 것으로 추방해야만 주체라는 고정되고 확실한 존재의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14 한동안 쏘셜미디어에서 회자되었던 ‘종북게이’라는 혐오적 낙인은 ‘적’인 북한을 ‘친구’로 여기는 성향과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이 한국사회가 유폐하고자 하는 ‘가장’ 불결하며, 비정상적인 성향임을 증명한다. 조금 단순화해서 설명하자면 북한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사실, 즉 종북이나 빨갱이 같은 표지는 분단체제의 공고함에 균열을 내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것이 되며, 비슷한 맥락에서 성소수자 또한 이성애주의 밖에 존재하기에 불결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만큼 북한과 성소수자가 한국사회가 욕망하는 순결성과 확실성의 경계, 즉 비/정상적인 것의 경계를 구축하는 지점이라는 사실은 한국사회가 그토록 지켜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4. 분단체제에서 상호인정의 불/가능성

 

서로에 대한 정당한 관계설정과 의식 자체가 원천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이 바로 분단체제의 효과이다. 물론 법적인 측면에서는 남북기본합의서(1991)에서 이미 상대방을 인정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관계”로 명시한 바 있다. 2000년 이루어진 6·15공동선언은 이보다 진일보한 남북관계를 천명했는데, 즉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을 고려해 통일을 “자주적으로 지향”함을 선언한 것이다. 여기서 ‘연합’이나 ‘연방’이 의미하는 것은 남북 간 “공존의 원칙”과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통일과정을 의미한다.15 하지만 이렇게 정치적 결단을 통해 진전되어온 남북관계의 변화는 일상과 인식의 수준에서 작동하는 분단효과로 인해 결코 확산되거나, 실천적 전략과 방안으로 세분화되지 못했다. 보수정권하 분단세력의 반격 때문이라고 단순화하기 어려운 남한사회의 뿌리 깊은 분단적 인식체계가 서로 간의 ‘공존’이나 ‘상호인정’ 자체를 상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더 많은 통일 담론이나 전략 등은 사회 전체의 공진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어쩌면 분단이 만들어낸 인식구조 내에서는 남북이 서로를 공정하게 인정하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호네트(A. Honneth)가 『인정투쟁』에서 주장한 바를 참고해보면, 몰인정의 폭력, 즉 폭행, 무시, 권리와 가치의 부정 등은 공동체를 만들려는 인간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16

하지만 분단체제하에서 남북 사이에는 상호인정이라는 윤리나 사회적 의무 등이 작동하지 못한다. 백낙청이 이면헌법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것처럼, 분단이라는 맥락에서 개인의 정치적 자유나 권리는 언제라도 쉽게 포기되거나 무시될 수 있다.17 게다가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언급되었던 ‘특수한 관계’는 헌법에 명시된 영토조항과 배치되어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 사이의 공정한 ‘연대’가 가능할 리 없다.

물론 분단적 인정질서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다양한 투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대북제재와 한반도 긴장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시도되어온 인도적 지원이나 사회문화 및 체육 교류, 평화와 통일 인식 제고를 위한 시민사회의 노력, 북한을 단순히 비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북의 다양한 모습을 알리려는 탈북자 단체, 남북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고자 하는 중국동포와 재일조선인의 노력까지 일상의 수준에서 작지만 큰 울림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이어져온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의 ‘투쟁’을 통해 분단체제에서 인정 불가능한 대상으로 단순화되어온 상대방에게 공정한 자리를 내어주는 수준까지 변화하려면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하고, 북핵 위기로 남북관계가 경색된 현 상황에서 그 길은 더더욱 어렵기만 하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몰인정의 대상이었던 수많은 주체들이 조금씩 인정질서의 구조에서 가시화된 사례는 많다. 노예, 봉건제의 농노, 근대사회의 여성, 성소수자, 유색인종 등이 결코 ‘인정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인정질서에 균열을 내고, 조금씩 권리와 가치를 인정받아왔다. 더군다나 이들의 몸부림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자아실현을 하려는 시도였지만 결국에는 사회의 진보를 만들어내는 힘이 되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너무나 공고해서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분단체제 또한 분단적 주체들이 만들어내는 작은 성찰과 몸부림이 큰 변화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충분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분단이 생산해낸 주체들이 온당하게 인정받지도, 그렇다고 상대방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분단에 대한 무감각과 무지, 그리고 분단적 인지·감정·정동 등으로 인해 분단체제 내 대부분의 개인들은 독립적인 주체로서 자아실현의 가능성 자체가 거세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 개인 스스로 분단이 만들어낸 인식론적 한계 너머 윤리적 개인으로서 타자와의 관계 구축을 모색해야 한다. 타자와 공존할 수 있는 개인은 분단체제의 내부에서 큰 파장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고, 이것이야말로 바로 깨어 있는 시민, 또다른 말로는 탈분단적 주체들이 만들어내는 반란의 시작이다.

한가지만 덧붙인다면 호네트가 인정투쟁을 주목한 이유는 주체와 타자가 만들어가는 공동체 그리고 상호인정을 통한 도덕적 사회발전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의 진보를 끊임없는 인정투쟁을 통한 좀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인정질서의 구축이라고 정의하기까지 한다.18 기존 상호인정의 범위와 방식을 인정투쟁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시켜감으로써, 인류는 모든 구성원이 서로의 존재 그 자체로 공존하고 화해할 수 있는 도덕적으로 진보된 공동체로 발전해나간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분단체제하에서 반쪽짜리로 존재하는 인정질서는 단순히 특정한 집단이나 체제를 배제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분단체제 내 남북 사회의 진보와 변혁의 불가능성의 근원이 된다는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윤리적 상호인정과 도덕적 의무가 작동하지 않는 예외 영역이 전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것은 결국 분단체제로 인해 공동체로서의 ‘사회’, 주체와 타자가 공존하고 협력하는 결속체로서의 ‘사회’가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를 만들어가는 문제는 다시금 자율적이며 도덕적인 주체와 그들의 상호작용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결국 분단이라는 비정상적이며 이질적인 ‘체제’가 흘러들어와 만들어낸 분단적 주체는 분단의 효과임에 분명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분단극복의 가능성을 품은 유일한 자원인 것이다.

 

 

5. 분단체제 너머 ‘사회’ 만들기

 

이제 다시 ‘사회’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서두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한국사회는 ‘사회’ 없는 사회로서 파편화된 개인과 강력한 국가로 양분되어 있다.19 만약 개인들의 공동체로서 ‘사회’가 더이상 존립 가능하지 않다면, 이는 비관적 미래를 가리키는 하나의 징후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사회’의 위기로 고통받는 것이 개인이라도 동시에 개인으로부터 다시금 ‘사회’를 복원하려는 기획이 시작될 수 있다.

사회적인 것과 더불어 도덕적 개인주의를 주창했던 뒤르껨(É. Durkheim)은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지표로서 분업과 연대를 주목한 바 있다. 기술 발전 등으로 경제활동은 점점 더 분업화되고, 이에 사람들은 연대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20 인간은 도덕과 규범을 통해 연대하며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으므로, 도덕적인 개인의 존재는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가장 기본 조건이 된다. 그렇다면 도덕적 개인은 어떻게 등장하는가? 여기서 뒤르껨은 다시금 ‘사회적인 것’, 즉 도덕과 규범을 강조한다. 개인을 뛰어넘는 ‘사회적인 것’이 개인이 이기적인 동물이 되지 않도록 규율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그의 논의는 각 개인이 어떻게 연대를 모색하는지에 대해서 ‘사회적인 것’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한 경향이 있다.

이러한 한계는 모스(M. Mauss)가 『증여론』에서 주장한 ‘선물’과 호혜성의 원리로 보완 가능하다. 모스에게 사회란 개인을 뛰어넘어 작동하는 절대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매순간 타자와 만들어가는 관계의 구조이다. 개인 간에 선물을 주고받고, 그리고 답례하는 삼중의 작동원리를 바탕으로 한 호혜적 구조가 모든 사회의 기본인 사회의 총체적 작동원리라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사회’의 위기는 뒤르껨에 따르면 개인에 대한 ‘사회적인 것’의 규정력 약화 혹은 사회적 연대의 약화에서 왔다고 진단할 수 있지만, 그것의 근본 원안은 바로 호혜성 의무의 파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호혜성의 원리가 경제적 계산과 이기심 등에 잠식되고, 거기에 분단으로 인해 주고/받으며/답례하는 것의 의무가 방기되면서 ‘사회’의 위기를 자초하게 된 것이다.

호혜성이라는 ‘사회’ 만들기 원리의 복원이야말로 ‘사회’의 위기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시작점이다. 모스에 따르면 호혜성의 원리는 현대사회에서 제도화된 바 있는데, 사회보장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과 삶을 ‘주고’, 국가와 사업가는 이를 ‘받아’ 이윤을 만들어내고, 이에 국가와 사업가는 단순히 임금뿐만 아니라 생활보장으로 ‘답례’를 하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21 노동자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국가와 사업가는 그만큼 도덕적 관계를 구축할 수밖에 없고, 호혜성의 원리에 기반을 둔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사회’를 유지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호혜성의 구조에서는 노동자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보장이 결코 시혜의 차원이나 경제적 교환만으로 치환될 수 없다. 선물을 주는 노동자는 국가와 자본가로부터 그만큼의 답례를 받을 자격과 권리가 있는 독립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다. 모스의 표현으로 “서로간의 존경과 서로 주고받는 후함 속”22에 각 개인들은 사회를 만들고, 그 울타리에서 선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로 표방되는 자본주의와 분단체제가 중첩되어 ‘사회’를 위협해왔다. 특히 분단체제는 주체와 타자 사이의 적절한 관계 맺음을 원천적으로 왜곡했다. 분단의 작동으로 상호인정은 가능하지 않으며, 주체와 타자 할 것 없이 서로 헐뜯고 미워하며 적대해왔다. 이러한 관계는 불안정하며 자기파괴적이다. 사람들은 불행하며, 서로를 미워하고 혐오한다. 이 전쟁 같은 상황을 끝내기 위해 분단이 파괴한 ‘사회’를 다시금 만들어내야 한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일부를 선물로 내주는 것이야말로 파국을 막기 위한 의무이며, 상대방 또한 받고/답례하는 것을 통해 분단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할까? 다시 『증여론』의 결론 부분을 보자. “교역을 개시하려면 먼저 창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씨족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부족 간·민족 간 그리고특히개인 간에서도 재화와 사람을 교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다음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서로 이익을 만들어주고 충족시키며, 마침내는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그것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씨족·부족·민족은 서로 살육하지 않으면서 대립하고 또 서로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주는 법을 배웠다.”23 총과 칼을 내려놓고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이 답례하리라는 믿음은 순진한 생각이라고 폄하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화해를 원하면 상대방이 먼저 시작해야 한다고 소리치는 이도 많다. 하지만 망설이고 의심하는 사이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법을 잊어버린 채, 외로운 개체로 전락하게 되었다. 홀로 살아갈 수 없다면, 그리고 지금의 삶이 힘겹다면 방법은 하나다. 지금부터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인정하며, 주고받는 선함’을 행하는 것, 그것밖에는 방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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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문영·이승철 「‘사회’의 위기와 ‘사회적인 것’의 범람: 한국과 중국의 ‘사회건설’ 프로젝트에 관한 소고」, 『경제와사회』 2017년 봄호 101~103면.
  2. 백낙청·김성민 대담 「민족문학론, 분단체제론, 변혁적 중도론」, 『백낙청 회화록』 제7권, 창비 2017, 520~21면.
  3.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정일준 옮김, 새물결 2008, 34~35면.
  4. 김종엽은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효과로 현재주의와 연대 없는 평등주의를 주장한 바 있다. 특히 현재주의의 경우 과거에 속박되지 않으면서 미래에 대한 기대 좌절에서도 자유로운 신축성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이에 대한 부정적 댓가(사회적 연대의 해체와 연대 없는 평등주의)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종엽 「‘사회를 말하는 사회’와 분단체제론」, 『창작과비평』 2014년 가을호 24~28면.
  5. 백낙청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창작과비평사 1994.
  6.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창작과비평사 1998, 118~23면.
  7. 최원식의 동아시아론은 백낙청에 의해 분단체제론과 결합되어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한반도 중심주의를 탈피하려는 시도로 발전된 바 있다. 동아시아론에 대해서는 최원식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창비 2009; 류준필 「분단체제론과 동아시아론」, 『아세아연구』 제52권 4호, 2009 참고.
  8. Kenneth Gergen, The Saturated Self: Dilemmas of Identity in Contemporary Life, Basic Books 1991; Kenneth Gergen, Relational Being: Beyond Self and Community,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9. 천정환에 따르면 젊은 세대의 이러한 문화적 실천은 일종의 ‘김정은 짤’로 설명되는데, 인터넷을 중심으로 김정은의 이미지를 탐욕스럽고 반인간적이며, 한편으로는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절대적 존재로 풍자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천정환 「냉전문화와 정동: 한국 대중문화와 표상공간에 재현된 북핵위기」, North Korea in Transition: Perspective on Division, Popular’ Culture, and Everyday life,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국제학술회의 자료집, 2017.12.1
  10. SBS 광복 70주년 특집다큐 「남북청년통일실험: 어서 오시라요」(2015.8.9)가 방영되자 인터넷상에서는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탈북 대학생에 대한 악성댓글이 넘쳐났고, 익명의 사람들이 해당 학생의 쏘셜미디어 등으로 몰려가 인신공격을 자행했다.
  11. 지난 대선에서 홍준표 후보를 지지한 탈북자 3000명은 ‘탈북자집단망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면 집단 망명하겠다고 선언했으며, 이에 대응해 또다른 탈북자 300명은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을 했다. 선거가 끝난 후 ‘탈북자집단망명추진위원회’에 대한 집단적 조롱과 공격이 인터넷상에 횡행했고, 탈북자사회도 양쪽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특히 보수집단은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탈북자들이 돈과 이권을 보장받고 지지선언을 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12. 2018년 1월 1일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우리은행이 제작한 달력에 실린 초등학생이 그린 ‘통일나무’라는 제목의 그림에 인공기가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홍대표의 색깔론에 이어 1월 4일에는 보수단체들이 우리은행 본사 앞에 모여 “인공기 달력 규탄대회”를 열기도 했다.
  13. 마사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조계원 옮김, 민음사 2015, 141~42면.
  14. 이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분석은 임옥희 「혐오발언, 혐오감, 타자로서의 이웃」, 『도시인문학』 제8권 2호, 2016 참고.
  15. 이승환 「분단체제 변혁의 전략적 설계를 위하여」, 정현곤 엮음 『변혁적 중도론』, 창비 2016, 205면.
  16. 악셀 호네트 『인정투쟁』, 문성훈·이현재 옮김, 사월의책 2011.
  17. 백낙청 「‘촛불’의 새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18. 문성훈 『인정의 시대』, 사월의책 2014, 90~92면.
  19. 몇몇 사회학자들이 한국사회의 ‘사회’의 위기를 진단하면서도, 분단체제와 분단효과라는 측면에서 ‘사회’ 만들기의 한계에 대해서는 언급한 경우가 드물었다. 대부분의 연구는 주로 이론적인 맥락에서 ‘사회적인 것’에 대한 논의에 집중되어 있다. 백승욱 「마르크스와 사회적인 것」, 『한국사회학』 제49집 5호, 2015; 박치현 「탈콧 파슨스 초기 사회학에서의 ‘사회’ 개념」, 『사회와이론』 29집, 2016; 조은주 「인구의 출현과 사회적인 것의 구성」, 『경제와사회』 105호, 2015; 조주현 「‘사회적인 것’의 위기와 페미니스트 정체성의 정치」, 『사회와이론』 17호, 2010; 김홍중 「사회로 변신한 신과 행위자의 가면을 쓴 메시아의 전투」, 『한국사회학』 제47집 5호, 2013; 김홍중 「사회적인 것의 다섯 가지 문제틀」, 『사회사상과 문화』 20권 3호, 2017 등이 바로 그러한 논의의 예다.
  20. 에밀 뒤르켐 『사회분업론』, 민문홍 옮김, 아카넷 2012.
  21. 마르셀 모스 『증여론』, 이상률 옮김, 한길사 2002, 253면.
  22. 같은 책 282면.
  23. 같은 책 281면.

김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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