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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다카다 리에코 『문학가라는 병』, 이마 2017
근대일본과 순수/문학이라는 질병
김항 金杭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ssanai73@gmail.com
비판에는 재능에 대한 시기가, 연민에는 처지에 대한 경멸이, 그리고 연대에는 소외에 대한 공포가 종종 깃들어 있다. 또한 정의를 복수와 구분 짓기 위해 장대한 법률체계를 만들어낸 소심함을 상기할 때, 이성을 광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칸트의 어처구니없는 시도를 생각할 때, 인간의 선행, 미덕, 능력 등이 모두 그 자체로 순수하게 자족적이란 발상은 막무가내의 고집이거나 물정 모르는 순진함의 발로이다. 이것이 타까다 리에꼬(高田里惠子)의 『문학가라는 병: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엘리트들의 체제 순응과 남성 동맹』(김경원 옮김)에 등장하는 근대일본 (독문학 전공) 문학가들의 군상이다.
작가, 비평가, 문학연구자 들을 통틀어 문학가라고 부른다면 이들에게 ‘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많이 읽고 쓰는 것? 그런데 생각해보라. 다작하는 문학가들에게 암암리에 쏟아져온 비난을, 즉 “깊이가……”라는 우려와 조소를 말이다. 그렇다면 ‘좋은’ 작품, 비평, 논문을 쓰는 것? 하지만 ‘좋은’이라는 형용사는 문학에서만큼은 ‘열심히’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글쓴이의 ‘천재’에 달린 것이지 ‘노력’에 달린 것은 아니라는 전제가 문학을 지탱해왔기에 그렇다. 그런 까닭에 문학에서는 ‘열심히’ ‘노력’한다는 평가 기준이 무의미하거나 안타까움의 표시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런 글쓴이들이 문학의 이름을 얹은 역사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천부의 재능을 뽐낸 이들의 삶과 고뇌를 증언하는 조연이나 단역으로 만족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조연이나 단역이 주인공의 자리를 꿰찬다. 나쯔메 소오세끼, 모리 오오가이, 코바야시 히데오, 카와바따 야스나리 등 일본 근대문학을 빛낸 주옥같은 이름들이 아니라, 지금은 잊힌 타까하시 켄지(高橋健二)나 하가 마유미(芳賀檀) 등이 서사의 중심에 자리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잊혔다고 하지만 타까하시나 하가가 아예 알려지지 않은 작가는 아니었다. 타까하시는 일본펜클럽(일본 최대 규모의 작가조직) 회장을 역임한 저명한 독문학자였고, 하가도 전시와 전후를 통틀어 꽤나 이름이 알려진 비평가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구제(舊制) 제1고등학교와 토오꾜오제국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고, 학계나 문단에서 나름의 지위를 획득할 정도로 성공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이들을 왜 ‘열일’한 ‘이류’로 명명하는가? 비록 앞에서 열거한 기라성 같은 이름들에는 못 미치지만 나름 일가를 이룬 문학가들을 말이다. 그것은 이들이 근대일본을 사로잡은 질병을 온몸으로 체화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질병의 이름은 바로 ‘문학’이었다. 이들 주인공은 문학이라는 질병에 시달리며 삶을 영위했고, 고스란히 일본의 이른바 엘리트 남성들의 삶을 표상한다. 이 질병이 가장 고약한 것은 자각 증세가 지극히 미약했다는 것인데 저자는 여기에 메스를 들이댄다. 자각하지 못한 채 시달리는 질병으로 인해 일본의 엘리트 남성들은 과연 어떻게 망가졌을까?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사회 전 영역에 걸쳐 ‘묻지 마’ 서양 추종이 대세가 된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그 선봉에 선 것은 1886년에 설립된 구제 제1고등학교와 제국대학이었다. 1877년에 설립된 토오꾜오대학이 1886년 제국대학으로 개칭된 것은 제국대학령에 따른 것이다. 이 때 토오꾜오대학예비문이 제1고등중학교로 개편되었고, 1896년의 고등학교령에 따라 제1고등학교로 개칭된다. 이로써 제1고등학교는 제국대학에서의 수학(受學)을 위한 어학과 교양 중심의 교육기구가 되었고, 전국에 이른바 ‘넘버링’(numbering) 고등학교가 차례로 설립되면서 예비 제국대학생을 길러낸다. 이 체제는 전후 고등교육제도 개혁까지 이어져 일본의 엘리트 양성 코스로 자리 잡는다.
구제고등학교에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전공의 세개 과가 있었고, 졸업 후에는 어학에 상관없이 제국대학에서의 전공을 선택했다. 이때 문학부에 진학하는 경우 대부분 구제고등학교에서의 전공에 따라 학과를 택했는데, 문학부를 선택한다는 일 자체가 하나의 결단으로 여겨졌다. 대개의 고등학생들이 법학, 의학, 공학, 경제학 등 ‘실용학문’을 익혀 국가와 사회를 견인하는 역할을 기꺼이 떠맡았던 데 반해, 문학부를 선택한 학생들은 그런 속세의 실용으로부터 벗어나 순수한 자유를 추구한다는 신화가 널리 수용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실용/순수의 구분은 문학부 내부에서도 그어졌는데, 영문과와 독문과에 비하여 불문과가 신격화된다. 그 까닭은 영어와 독어가 상업과 법률을 위한 실용언어였던 반면, 프랑스어는 사회에서 쓸모없는 ‘문학의 언어’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문학은 불순물을 거르고 거른 순수의 결정체로 신격화된다. 프랑스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쓸모없음’의 표상이 중요했던 셈이다. 이제 순수/실용의 구분은 ‘문학’이라는 바이러스를 타고 퍼져나간다. 기꺼이 속세에서의 출세를 버리고 문학을 택한 이들이 칭송받는다. 그 안에서 또 대학에 남아 연구하는 자와 대학을 떠나 야인으로 사는 이들이 구분된다. 야인 중에서도 시류에 영합한 자로부터 고고하게 스스로를 지킨 자가 걸러진다. 무한반복.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문학부를 선택하기는 했지만 대학 졸업 이후 순수의 사다리에서 내려온 이들이다. 문학과 관련된 일을 하지만 결코 순수의 결정체라 할 수 없는 자신의 작업에 한없이 겸허한 이들이다. 주로 독문학을 전공한 주인공들은 1930년대 나치 문학을 소개하면서 나치를 피해 망명을 떠난 헤르만 헤세를 번역한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주인공들에겐 내적 모순이 없다. 나치 문학의 소개는 정치에 매몰되었던 일본 당대의 나치 독일 수용을 정신적으로 순화하기 위해서였고, 헤세는 말할 필요도 없이 문학의 순수 결정체였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은 그렇게 ‘열일’에 나섰다. 정치와 전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문학을 통해 저항하려 했다는 자의식은 그렇게 생겨난다. 천재와 인연이 먼 ‘이류’들에게는 문학이라는 순수를 위한 노력이 본분이었다. 그래서 전후에도 끄떡없이 문학을 사랑하며 교양을 입에 담는다. 전시의 문화인 총동원 조직이었던 대정익찬회(大政翼賛會) 문화부 부장을 역임한 것도 타까하시에게는 과오가 아니다. 순수와 자유가 짓밟히는 시대에 그나마 문화를 설파할 수 있었던 자리였기에 그렇다. 과연 질병이다. 온갖 속세의 오염에서 벗어난 순수문학을 전제하는 한 이들 주인공이 부끄러워할 것은 스스로의 재능 없음뿐이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가늠할 능력은 그렇게 마비되었다.
그렇게 읽기 수월한 책은 아니다. 20세기 전반기 일본지성사에 대한 일정 정도의 지식 없이는 저자의 속도감 있고 압축적인 문체를 따라가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운운하는 부끄러운 환상을 되돌아보기 위해서는 필독서이다. 여기서의 ‘순수/문학’이 근대일본의 남성 엘리트가 예외없이 앓아왔고 앓고 있는 질병이라면, 이른바 ‘전후 민주주의’의 양심도 의심의 여지 없이 감염된 것이기에 그렇다. 전후 민주주의가 교양을 갖춘 시민들을 길러내는 것을 하나의 이상으로 삼았다면, 그 교양은 일본헌법 전문에 등장하는 인류 보편의 이념과 가치에 뿌리내린 것이다. 그래서 전후 일본은 과거를 반성하고 부끄럽지 않은 민주주의를 구축해왔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질병은 다른 식의 부작용을 낳는다. 보편이념에 호소하는 나머지, 살이 뜯겨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 잃은 실제 아시아의 피해자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성과 성찰은 그런 속세의 육체와 생명이 아니라 순수한 인류에 대해서 이뤄져야 했다. 문학이 인류로, 순수가 양심으로 변모하면서 전후 일본은 질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전후 일본이 여전히 엘리트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였음을 감안할 때 이 진단에 큰 오류는 없을 것이다. 이류의 열일하는 엘리트 남성들의 사회와 그 안에서 만연하는 순수와 양심과 자유라는 질병. 이 책이 근대일본에 대한 일급의 임상보고서인 까닭은 그 환부를 들춰내어 대결했다는 점에 있다. 간간이 눈에 띄는 고유명사의 오기를 빼고는 번역도 흠잡을 데가 없다. 페미니즘이 하나의 화두가 된 한국사회에서 남성 비판의 새로운 문법으로 읽혀도 좋겠다는 말을 덧붙이며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