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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보리스 그로이스 『코뮤니스트 후기』, 문학과지성사 2017
역설로 스딸린주의를 철학하기
변현태 卞鉉台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smex36@snu.ac.kr
소련 출신의 러시아어·독일어권 미학자이자 철학자인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의 책 두권이 작년 말에 번역되었다. 『새로움에 대하여』(1992, 한국어판 김남시 옮김, 현실문화 2017)와 여기서 다룰 『코뮤니스트 후기』(2005, 한국어판 김수환 옮김)가 그것이다. 『새로움에 대하여』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책 『총체적 예술작품 스딸린』(1988, 한국어판 『아방가르드와 현대성』, 최문규 옮김, 문예마당 1995)과 함께 현대예술의 전문가, 특히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70~80년대 모스끄바 개념주의의 연구자이자 미학자로서 그로이스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면, 『코뮤니스트 후기』는 전시기획자이자 모스끄바 개념주의자로서 그로이스의 일종의 ‘수행 발화’로 읽힌다.
짧은 글에서 70~80년대 모스끄바 개념주의의 전모를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들의 작품이 종종 ‘소쯔-아트’(Sots-Art)로 불렸다는 사실로 개요해보기로 하자. ‘소쯔-아트’는 사회주의리얼리즘을 가리키는 러시아어 소쯔레알리즘과 팝아트 두 단어를 결합한 것이다. 서구의 팝아트가 소비자본주의의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이자 그 대중문화가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동시적으로 드러내는 전략을 구사한 것처럼 ‘소쯔-아트’는 소련의 사회주의리얼리즘을 일종의 대중문화로 간주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다양한 기호들(가령 낫과 망치, 붉은 깃발, 별, 스딸린 석상 등)을 팝아트적 양식으로 재구성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여기서 소쯔레알리즘의 다양한 기호들은 이를테면 소련이라는 신체를 구성하는 것이고 ‘소련에서 태어난 자들’(1997년 발표된, 러시아 록그룹 DDT의 유행곡 제목이다)의 삶과 사유와 밀착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 『코뮤니스트 후기』에서 이야기되는 ‘역설’이야말로 스딸린 신화로 대표되는 소련의 의미를 한편으로는 해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긍정하는, 모스끄바 개념주의의 주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총체적 예술작품 스딸린』에서 그로이스는 첫째, 소련은 일종의 총체적 예술작품이었고 스딸린은 이 예술작품의 무대총감독, 요컨대 예술가였으며 둘째, 총체적 예술작품을 구성하는 미적 원칙으로서의 사회주의리얼리즘이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계승이라고 주장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주장했던 ‘삶 속에서의 예술의 용해’의 실천이 곧 소련 사회이며, 그 주체로서 설정되었던 아방가르드적 작가 ‘데미우르고스’(demiurgos, 조물주)는 곧 스딸린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도발적이지만, 1988년이라는 시점을 고려해본다면 특히 이 두번째 주장의 도발성은 두드러지는데, 소련 말기와 포스트소비에뜨 초기 러시아의 예술계와 인문학계의 주요 고민은 사회주의리얼리즘을 대체할 수 있는 예술전통을 구축하는 것이었고 꽤 많은 사람들이 혁명 전후의 러시아 아방가르드에서 그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이스의 주장은 러시아 학계에서 격렬한 비판적 반응을 끌어냈고, 『총체적 예술작품 스딸린』의 러시아어본(1993) 서문에서 그는 이 격렬한 반응에 대해 놀랍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사실 이는 단순히 제스처가 아닌데 스딸린주의에 대한 그의 접근 자체가 역설로 대표되는 양가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정치의 미학화’(벤야민)나 ‘스펙터클의 사회’(기 드보르)로 비판받을 수 있는 ‘총체적 예술작품’, 요컨대 정치의 원리를 미적 원리로 대체함으로써 만들어지는 미적 가상의 사회를 그로이스는 한편으로 비판하면서 동시에 서구사회와 구별되는 ‘유니크한 실험’으로 긍정한 것이다.
이제 예술가 스딸린은 『코뮤니스트 후기』에서 철학가로 변모한다. 여기서 철학가란 돈을 매개로 기능하는 자본주의 경제를, 언어를 매개로 기능하는 정치하에 ‘이상적/이념적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공산주의혁명은 “돈의 매개로부터 언어의 매개로 사회를 번역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실천의 차원에서 행해진 언어로의 전회다.”(7면, 강조는 그로이스) 언어로서의 정치라는 말에서 우리는 랑시에르의 지적처럼, 가령 공동체의 틀 안에 이로움과 해로움의 느낌을 투사하고, 그리하여 정의로운 것과 부정의한 것을 공통으로 인정할 수 있는 길을 여는 말( logos)의 고유한 힘에서 정치가 출발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떠올릴 수 있겠다. 하지만 아마도 그로이스는 이러한 로고스를 일면적인 말로 부정할 것이다. 그에게 언어란 언제나 드러내면서 동시에 가리는 것이고, 그 대표적인 경우가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에 의해 폭로되는 역설, 즉 A와 그 부정으로서의 ~A를 필연적으로 동시에 갖고 있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역설의 말에 의해 실현되는 정치가 꼬뮤니즘의 정치가 된다.
역자 김수환의 말처럼 이 전제에서 출발해 꼬뮤니즘을 설명하는 그로이스의 현란한 논법을 따라가보는 것이 이 책의 독서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다. 여기서는 ‘혁명-스딸린주의-해체’로 이어지는 소련의 74년사와 관련해서 그로이스 식의 해석이 주는 시사점을 몇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그로이스는 사회주의 몰락에 대한 대표적인 해석, 흔히 이론과 실천의 괴리로 묘사되는 해석을 거부한다. 좋은 맑스주의 이론 대 나쁜 실천으로서의 스딸린주의 같은 이분법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로이스는 헤겔의 ‘대립물의 통일’을 A와 ~A를 동시에 갖는 다분히 비역사적인 역설로 대체하면서, 이러한 역설의 철학적 근거를 스딸린에 의해 쓰였다고 알려진 『소비에뜨 공산당(볼셰비끼)의 역사: 단기 코스』나 언어학에 관련된 스딸린 말년의 저작에서 재구성한다. 그리고 소련은 바로 이 철학가 스딸린에 의해 만들어진 ‘역설의 언어공동체’(총체적 예술작품)가 된다.
둘째로, 이 지점에서 그로이스의 공산주의는 다분히 현실주의적이다. 가령 그의 공산주의는 바디우나 지젝의 공산주의, 요컨대 스딸린으로부터 구출된 레닌을 중심으로 ‘재창조/재장전’되어야 할 공산주의, 그러나 ‘미래의’, 즉 아직 도래하지 않은 공산주의와는 완전히 구별된다. 책의 제목이 가리키듯 그로이스의 입장은 ‘공산주의자’의 그것이다. ‘소련에서 태어난 자들’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공산주의는 스딸린을 정점으로 하는 바로 그 공산주의인 것이며, 여기서 ‘역설’은 실제 존재했던 공산주의의 정치전략이자, 모스끄바 개념주의자로서 그로이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서술전략이 된다. 사실 자신의 삶-역사에 대한 긍정이라는 측면에서 그로이스의 이론은 이론적이기보다는 다분히 윤리적이다.
셋째로, 1991년 ‘사회주의 공화국들의 소비에뜨 연방’의 해체는 스딸린 헌법에 기입된, 사회주의 공화국들이 소련에 가입 혹은 탈퇴할 권리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그 해체가 체제경쟁의 실패 혹은 소련을 구성했던 공화국들 민중의 민주주의적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공산주의에 내재한 역설의 완성이라는 그로이스의 주장은 문제적이면서도 1917년과 1991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 있다. 특히 1991년을 1917년 혁명이 갖는 의미의 ‘무효화’ 정도로 해석하는 비관론적 관점과 관련해서 그로이스의 접근법은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내재적인’ 접근이 지닌 문제성을 지나칠 수 없다. 이 대목에서 공산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서구의 이론들을 비판하는 책의 3장, ‘밖에서 본 공산주의’는 시사적이다. 그로이스는 전체주의의 관점에서 스딸린주의를 파시즘과 동일시하는 보수적인 시각도, 스딸린주의로부터 레닌주의를 구출해서 메시아적인 공산주의를 구축하고자 하는 좌파적인 시각도 모두 역설의 A 혹은 ~A의 한면만을 본 일면적인 시각으로 비판한다. 요컨대 ‘너희들은 체험해본 적이 없는’ 바로 그 공산주의의 경험에 입각해서 다시 공산주의를 사유할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역설로 스딸린주의를 철학하는 그의 시도의 ‘유니크함’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