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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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朴哲

1960년 서울 출생. 1987년 『창비 1987』에 「김포」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김포행 막차』 『밤거리의 갑과 을』 『새의 전부』 『너무 멀리 걸어왔다』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험준한 사랑』 『불을 지펴야겠다』 등이 있음. bch2475@hanafos.com

 

 

 

 

 

다리 저는 금택씨가

축구공을 산 건 2주전이란다

근린공원 안에 새로 생긴 미니 축구장 인조잔디를 보고

벌초 끝난 묏등 보듯 곱다 곱다 하며

고개를 외로 꼬기 석달 만이란다

평생 다리를 절고 늙마에 홀로된 금택씨가

문구점에 들어설 때 하늘도 놀랐단다

보는 이 없어 사람만 빼고 동네 만물은 모두

그가 의정부 사는 조카 생일선물 사는 줄 알았단다

삭망 지나 구름도 집으로 간 여느 가을밤

금택씨는 새벽 세시 넘어 축구공을 끼고 공원으로 가더란다

열시면 눈 감는 가등 대신 하현달에 불을 키더란다

금택씨 빈 공원 빈 운동장을 몇번 살피다가

골대를 향해 냅다 발길질을 하더란다

골이 들어가면 주워다 차고 또 차고 또 차더란다

그렇게 남들 사십년 차는 공을 삼십분 만에 다 차넣더란다

하현달이 벼린 칼처럼 맑은 스무하루

숨이 턱턱 걸려 잠시 쉴 때 공원 옆 5단지 아파트의

앉은뱅이 재분씨가 난간을 잡고 내려보더란다

어둠 속의 노처녀 재분씨를 하현달이 내려다보더란다

하현달을 금택씨 아버지가 내려다보며

보다 보다 보름보다 훤한 하현은 처음이라고

달처럼 중얼거리더란다

 

 

 

일렁이다

화정공원에서

 

 

이렇게 잘생긴 나무들만 뽑아다

공원을 꾸리면 병들고 비루먹은 나무들은

뭐 할까 종산(宗山)을 지킬까

 

종산엔 종중(宗中)들이 자주 올까

찾아오면 뭔 생각을 하며 산허리를 돌까

멀리 아파트를 바라보며 빠른 계산을 할까

 

어느 조경원서 자란 나무라 해도

인척들 등쌀에 고향 떠나온 이들처럼

 

성씨 다른 것들이 모여 푸른빛을 자랑하는 근린공원

여기도 그렇게 물빛은 흐르고 넘쳐

땀 냄새 킁킁대며 고향으로 가는 고수머리 솔봉이

무릎 걷고 논길로 들어서는 눈딱부리 시시덕이

빙하처럼 떠돌다 순백으로 녹아버린 가납사니 신건이

장이야 멍이야 목청 높여 손 내미는 졸때기 경난꾼

누구는 낮잠 자다 일어서 허방에 단장(短杖)을 찾고

몇은 인생이 길다 소주잔에 가는 세월 밀며 당기며

한 시절 이발소에 걸린 듯 종산을 이룬다

그러면 정말 그림처럼 잘생긴 나무들 저쯤 물러앉아

석양을 배경 삼아 따라지들 머릿수를 세고

화정 모()씨들 자랑도 없이 후회도 없이 일렁이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