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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다시, 문제는 근대다

황종연 평론집 『탕아를 위한 비평』

 

 

고봉준 高奉準

문학평론가. 평론집으로 『반대자의 윤리』 『다른 목소리들』 『유령들』 등이 있음.

bj0611@hanmail.net

 

 

2031황종연(黃鍾淵)의 두번째 평론집 『탕아를 위한 비평』(문학동네 2012)은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를 비평적으로 전유하여 “근대문학 이후에도 문학이 존재할 이유”를 사유하는 것과, 근대문학의 성과와 한계를 모더니티-모더니즘에 근거하여 정당화하는 것을 핵심적인 문제로 설정하고 있다. 황종연은 코오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느슨하게 동의를 표하면서도 “근대문학이 끝났다고 해서 문학적 글쓰기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모든 이유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러한 태도가 곧 “근대문학 이후의 문학”, 즉 “근대문학과는 다른 문학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오해하지 말자. 황종연이 말하는 “근대문학 이후의 문학”이라는 표현은 탈근대 담론과는 관련이 없다. 그는 마샬 버먼(Marshall Berman)과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에 기대어 탈근대론이 실상은 “새로운 버전의 근대임을, 스스로를 성찰하는 근대임을, 또 하나의 근대임”을 주장한다. 그것은 그가 ‘근대성의 경험’을 아이러니, 즉 “천국의 약속과 지옥의 저주가, 성취의 영웅시와 상실의 엘레지가 함께 있는 세계를 우리 자신의 유일한 세계로 삼는 것”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황종연은 ‘모더니즘’을 둘러싸고 동시대의 비평가들과 치열한 논쟁을 펼쳤다. 이 논쟁에서 그는 최원식・임규찬・윤지관 등의 모더니즘 이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모더니즘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모더니즘의 업적을 리얼리즘의 이념으로 흡수하여 리얼리즘의 판도를 넓히는 일종의 제국주의적 팽창”이거나 “리얼리즘의 영토 확장에 나선 원정대장이 베푸는 자선”이라는 것이다. 사실 모더니즘을 둘러싼 이 논쟁의 핵심은 근대문학의 근본적 성격에 관한 것이었다. 즉 리얼리즘의 옹호자와 모더니즘의 옹호자 각각에게 근대문학의 정통성은 각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있다고 인식되기 때문에 이 논쟁의 간극은 결코 채워질 수 없었고, 그러한 공전은 근대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이것이 바로 코오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황종연의 동의(?)를 마냥 ‘쿨’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이유이다.

『탕아를 위한 비평』의 서문에서 그는 “사실,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실천으로서의 문학은 진작에 효력을 상실했다. 오늘날의 문학이 뭔가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역사 이후에 남아도는 인간 특유의 욕망, 바따유가 말한 의미에서 쓸데없는 부정성을 포용하기 시작한 덕분일지 모른다”라고 썼다. 황종연에게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모더니즘의 종언이 아니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실천으로서의 문학”의 종언이다. 이것은 “근대문학 이후의 문학” “역사 이후에 남아도는 인간 특유의 욕망” “쓸데없는 부정성”을 포용할 수 있는 문학적 가능성이 리얼리즘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전유의 과정은 코오진이 주장한, 아니 한국의 리얼리즘론자들의 근대문학과는 ‘다른’ 근대문학의 가능성을 도출해내는 탈구축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가능성을 지탱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아이러니로서의 근대경험이다. 그 때문에 「민주화 이후의 정치와 문학」에서의 고은(高銀) 비판은 한 개인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근대문학을 ‘민중’이나 ‘민족’ 같은 집단적 주체표상과 연계시켜 사고하는 입장에 대한 총체적 문제제기다. 이 글에서 황종연은 민중・민족주의적 민중관의 반대쪽에 근대적 주체로서의 ‘개인’을 위치시킨다. 이는 결국 근대문학의 핵심이 ‘집단’이 아니라 ‘개인’에 있다는 것, 그러므로 근대문학의 중핵은 리얼리즘이 아니라 모더니즘이라는 주장과 맥락을 같이한다. 실제로 백낙청()과의 대화 「무엇이 한국문학의 보람인가」(『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에서 근대문학과 민족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백낙청과 근대문학을 ‘자유주의’ ‘개인’과 연계해 설명하는 황종연의 논법이 대립하는 장면은 근대문학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결국 황종연이 말하는 “근대문학 이후의 문학” “근대문학과는 다른 문학의 가능성”이란 ‘새로운 버전’의 모더니즘일 뿐이라는 말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그가 근대문학의 한계보다는 가능성에 비중을 두고 있고, 그때의 근대문학이란 리얼리즘이 아닌 개인의 아이덴티티와 욕망을 천착한 모더니즘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마샬 버먼의 모더니즘 개념이 우리가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 모더니즘을 초과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리얼리즘이냐 모더니즘이냐’라는 물음이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는 이유는 모더니즘에 대한 근본적 질문과 합의가 부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