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과 기본소득
김현우 金賢雨
『탈핵신문』 운영위원장,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저서 『정의로운 전환』 『안토니오 그람시』, 역서 『국가를 되찾자』 『GDP의 정치학』 등이 있음.
양재진 梁在振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복지국가연구센터장.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 역임. 저서 『복지의 원리』,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Small Welfare State in South Korea, 공저 『복지국가의 조세와 정치』 등이 있음.
윤홍식 尹洪植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한국사회정책학회장. 저서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 편저 『평화복지국가』 등이 있음.
이일영 李日榮
한신대 교수(경제학), (사)창비학당 교장. 저서 『뉴노멀 시대의 한반도경제』 『혁신가 경제학』 『새로운 진보의 대안, 한반도 경제』 『개방화 속의 동아시아』 등이 있음.
이일영(사회) 한국경제 상황이 현재 상당히 어렵습니다. 코로나19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간 안고 있던 구조적인 문제가 발현되는 탓이 더 큰 듯한데, 그래서 더 우울한 전망을 하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 최근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졌습니다. 지금이 처음은 아니고 2008년 세계금융위기에 자극을 받아서 한국에서도 이러한 논의가 떠오르기 시작했죠. 『창작과비평』도 꾸준히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를 소개해왔는데, 이번호 대화에서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의 상황과 접목해 이야기를 이어가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학계와 현장에서 한국 경제와 복지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온 세분을 모셨습니다. 각자 기본소득 논의를 만나게 된 계기를 포함해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양재진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복지국가, 복지정치, 연금정치를 공부했습니다. 거시적인 측면에서 복지국가론을 연구하고 가르치다보니 기본소득 논의도 일찍 접하게 되었죠. 우리나라에서는 이재명 경기지사가 성남시장 시절에, 성남시에 3년 이상 거주한 만 24세 청년에게 ‘청년배당’이라는 이름의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지급했고, 2017년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에서 총 43조원 규모의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나눠주자고 주장하더군요. 정치적 계산 감각이 탁월하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저에게는 이런 게 합법적인 유권자 매표행위이면서 자영업자의 지지를 동원하는 정치전략으로 보였습니다. 성남시든 경기도든 기본소득의 명분은 그럴듯해도 지역화폐 방식은 국고를 지역에 쏟아붓는 ‘구유통 정치’(pork barrel politics)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지요. 지역개발을 명분으로 국고를 유치해 토목공사를 벌이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은 기본소득이 사회보장제도의 사각지대를 보완하는 제도로 소개되고 있지만 저는 그 실효성에도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전국민에게 한달에 1만원씩만 줘도 1년에 약 6조 2400억원이 소요되는데, 개인에게는 소득보장효과가 미미한 푼돈이지만, 국가적으로 막대한 재원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기존 사회보장이 위축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기본소득보다 사회보장이 우선」(한겨레 2017. 2. 2)이라는 칼럼도 썼고, 그러다보니 기본소득 반대론자가 되어버렸네요.(웃음)
윤홍식 사회정책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젠더 관점으로 가족정책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가족정책으로 세상을 바꾸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복지국가로 공부의 영역을 확장했죠. 그런데 온통 서구의 이론이었습니다. 한국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서 한국 복지국가에 대해 공부했고, 작년에 18세기부터 2016년까지를 다룬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사회평론아카데미)이라는 세권짜리 단행본을 출간했습니다. 요즘은 복지국가로의 이행 전략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2002년부터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에서 활동했는데, 거기서 2005년 무렵에 기본소득 논의를 처음 접했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다소 황당했지만, 공부해보니까 전통적 방식으로는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이 대안담론으로서 제기되는 맥락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사회적으로는 제가 기본소득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본소득에 대해 처음 논문을 쓴 2016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비판적인 지지 입장입니다. 기본소득이 진정한 대안체제가 되려면 이것이 사회의 생산체제와 어떻게 결합하는지, 또 기본소득을 추진하는 주체는 누구여야 하는지 등 아직 설명되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봅니다.
김현우 저는 밥벌이가 안 되는 직함이 많은데(웃음)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비상임 연구기획위원, 기후위기비상행동이라는 연대 단체의 집행위원, 미디어협동조합 『탈핵신문』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에릭 올린 라이트(Erik Olin Wright)가 주도한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보고 기본소득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시간상으로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제 관심 분야인 기후정의나 에너지·생태가 불필요한 생산과 소비를 조절하는 것, 결국 탈성장 담론과 연결되는데 그 유력한 대안으로 기본소득이 제시되는 걸 발견했어요. 기본소득이 한국 상황에는 어떻게 접목될 수 있을까 하다가, ‘탄소세와 연동한 기본소득’ 같은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2009년에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BIKN)가 만들어졌고 그 무렵부터 이론적으로도 많은 진전이 있었어요. 사회복지학 같은 이론과의 연결고리도 생겨나고 정책적인 집행방향이 세워지기도 했죠. 물론 그만큼 반박 논거도 다양해지고 깊어졌지만요. 현장 활동가 사이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한 입장 차는 첨예합니다. 선거, 정책, 재정, 세금 같은 큰 문제가 아니라, 장애인·환경·농민 운동을 보면 몇만원 몇십만원 때문에 울고 웃는데, 그런 걸 생각해보면 기본소득 문제에 대한 토론도 찬반이 치열하죠.
2020년 한국의 재난지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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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영 1980년대 활발했던 사회구성체논쟁이 90년대 초반에 중단되었다가 지금 다시 새로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80년대 내내 사회의 비전을 내놓으며 경합하던 운동권이 87년체제가 들어서며 정치적·제도적 참여의 차원으로 돌연 바뀌었거든요. 이론 차원에서는 진보진영의 대세가 사회민주주의적 경향으로 통합되었지만, 저같이 민족경제론 흐름을 글로벌체제론에 접목하는 작업을 하는 등 다양한 흐름이 사라지진 않았죠. 기본소득론은 사회민주주의 또는 사회주의적 흐름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로 볼 수 있는데,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같은 형태로 집결이 되었습니다. 저는 사회의 비전을 둘러싼 논쟁이 사회운동과 정치운동 영역에서 다시 불붙은 시점을 2016년경으로 봅니다. 이때 한가지 역전현상이 나타났는데, 전통적인 복지국가 담론들이 그 이전에는 공세적 입장이었다면 이때부터 수세적이 됩니다. 기본소득 같은 더욱 급진적인 담론들이 공세적 태도를 취하면서 기존의 복지국가론이 오히려 보수적이 된 셈이죠. 2020년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재난지원금 문제가 기본소득 논의로 일순 도약했는데, 이 문제는 좀더 특별하게 또 세심하게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2020년, 기본소득 논의가 동력을 얻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김현우 이번에 지급된 재난지원금이나, 앞으로 지급하자고 논의되는 것에 기본소득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게 맞는지 틀린지부터 의견이 분분합니다. 코로나19 재난지원금에 총선이 큰 변수였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그런데 어떤 개념과 정책도 그것을 고안한 사람의 뜻대로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이번에도 예기치 않은 나비효과가 있었는데, 국가로부터 현금을 받아본 경험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국가가 지급한 현금을 어떻게 쓸지 계획하고 지출해본 경험은 구호물품을 받거나 복지제도의 수혜를 입는 것과는 또다른 차원이에요. 또 코로나19에 국한해서 생각할 일도 아닌 게, 이번 팬데믹 사태가 기후위기와 그 양상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찾아올 위기의 양태가 생산을 멈추게 하고, 그로 인해 임금노동과 납세가 어려워지고, 또 연쇄적으로 사회의 복지제도 전반이 흔들리는 일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지금의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가능성, 또는 혼란과 시행착오를 그냥 넘기지 말고 더 깊이 생각하고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윤홍식 기본소득 논의가 불거지며 복지국가론자들이 수세에 몰렸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이것이 한국적 특성, 특히 포디즘(Fordism)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구의 복지국가들이 제조업에 기반한 완전고용, 즉 포디즘에 기반해서 설계되었고 한국의 복지시스템도 이를 본떠서 만들어졌죠. 그런데 한국에서는 포디즘이 북서유럽처럼 전면화된 적이 단 한차례도 없습니다. 최정점이던 1988년을 전후로 10년 정도를 제외하면 노동시장은 늘 극심하게 불안했죠. 1997년 이후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사회보장체제를 확대해나가는데, 명목상으로는 ‘보편적 확대’였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정작 사회보장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은 배제되기 십상이었습니다. 이런 문제가 자유주의 정부(김대중, 노무현 정부) 보수 정부(이명박, 박근혜 정부) 가릴 것 없이 이어지다보니 사회보장체제의 보편성 확대는 아주 미약한 성과밖에 내지 못했어요. 그 실패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 대안으로 나온 기본소득이 이번에 폭발력을 보였다고 봅니다. 기존의 복지제도가 한국에서 시민들이 직면한 불안정한 고용, 실업, 노령 같은 사회적 위험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서 기본소득 등 다른 대안에 대한 열망이 큰 상황이었던 거죠. 그리고 한가지 흥미로운 결과가 있는데 경기도 조사에 따르면 국가의 재난지원금, 경기도 재난기본소득, 기초 지자체가 주는 지원금을 합친 금액을 제외하더라도 사람들이 전년 동월 대비 더 많은 지출을 했다는 거예요. 이는 김현우 위원장 말씀처럼 심리적 안정감에 기인한 소비로 볼 수도 있을 텐데, 국가가 시민의 삶을 보장해주는 제도가 거의 없는 한국사회에서 재난지원금이 제공한 ‘보살핌’의 역할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한국 복지국가 발전에서 어떻게 봐야 할지도 깊이 생각할 문제라고 봐요.
양재진 저는 이번 재난지원금이 사회적·경제적 문제 때문에 주어진 거라고 보지 않습니다. 총선이 다가오면서 정치적으로 주어진 면이 훨씬 크죠. 지금도 고용보험하에서 실업급여, 고용유지지원금 등 사회안전망의 보호는 작동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중위소득 이하, 고용보험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이고 재난지원금도 그들에게 집중되어야 맞는데, 그것이 총선과 맞물리며 당정협의회에서 전국민 지급으로 슬쩍 바뀌었죠. 처음에 이재명 지사가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어젠다를 설정하며 정치적인 기회의 창을 냈고 정치인들이 그 창으로 뛰어들며 일어난 일인데, 말하자면 정치적인 셈법에 의한 결정이지 사회적·경제적 배경까지 논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윤홍식 그 기회의 창이라는 것도 사람들의 불만이 쌓여 있고, 또 기존의 담론이나 운동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에 열릴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양재진 하지만 재난지원금으로 인해 방금 말씀드린 ‘사각지대’의 사람들이 결과적으로는 더욱 힘들어진다는 점도 직시해야 합니다. 1997년 외환위기 때나 2008년 세계금융위기 때도 보았지만, 실업자가 되고 생계에 위협을 받는 건 취약계층이지 모든 국민이 아닙니다. 이번 코로나 경제위기에도 고용유지지원금 같은 사회보장 덕분에 실업률은 4퍼센트 정도에 머무르잖아요. 그러니까 정책 수요 대상도 200만명 정도여야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재난지원금은 실효성이 낮습니다. 정말로 사회적·경제적 숙고를 했다면 취약계층을 위한 더 나은 방안이 나왔을 텐데 이번에는 총선과 맞물려 재난지원금이라는 정치적 기획이 등장한 거죠. 총선이 없었다면 전국민 지급까지는 안 갔을 것이고 좀더 적절한 수준을 찾았을 거라고 봅니다.
윤홍식 정치의 기본이 자원을 분배하는 거니까 어떤 선거든 사회적·경제적 문제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공약과 정책은 표를 통해 심판받는 거고 그러한 어젠다를 사회적인 맥락 없이 제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재명 지사가 촉매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성장과 고용의 디커플링(decoupling)이라는 세계적인 현상과 그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대안 중 하나로 기본소득이 제기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도 안 되겠죠. 실제로 코로나19를 맞아 재난지원금을 지급한 나라는 미국, 일본, 한국 등 얼마 되지 않습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춰진 북유럽은 재난지원금이 필요 없었던 것이죠. 사회보장제도가 미흡하기 때문에 자산·소득 조사 등 선별 작업을 하려면 들어가는 비용도 커지고, 대처하는 속도도 늦어질 수밖에 없어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빠른 시기에 전국민에게 지급하자는 판단이 정치적으로 이뤄진 면이 있습니다.
김현우 그런데 책임 있는 정책이었고 실효성이 분명했다면 2차, 3차 재난지원금 논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총선이 지나면서 재난지원금이나 기본소득 이야기가 정치권에서는 물밑으로 가라앉은 듯해서 양재진 교수 말씀이 타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업률 4퍼센트, 약 200만명이라는 숫자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힘듭니다. 이번 정책에 쏟아진 호응도를 봐도 통계로는 측정되지 않는 정책 수요가 있는 듯싶고요. 복지의 사각지대라는 것이 제도가 포착하지 못하는 점이적인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고, 코로나19로 인한 전국민적 불안의 상황에서 보편적인 현금 지급에 대한 심리적·정서적인 호응 요인도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기본소득, 대안이 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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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영 한번 지급된 이후 재난지원금이 이전만큼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게 선거 국면이 지나서인지 아니면 정말 위험했던 시기가 지나서인지는 좀더 두고 볼 문제예요. 3월에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두번이나 큰 폭으로 금리를 인하하는 ‘빅컷’을 단행했는데 효과가 없었습니다. 세계 금융시스템이 무너지며 대공황이 올 거라는 두려움이 팽배했던 상황에서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이 힘을 합쳐 모든 일을 다 하겠다는 신호를 주며 대응해나갔어요. 트럼프 대통령과도 관계없이 정책을 밀어붙였는데, 아마 1930년대 대공황을 겪은 학습효과도 한몫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미국의 소비·생산 시스템은 심각한 충격을 입었지만 강력한 금융 완화를 통해 금융시스템이 무너지는 것은 막았습니다. 그리고 소비와 생산이 중단되다보니 기업, 실업자, 일정 소득 기준 이하의 개인에게는 재정으로 직접 지원했어요. 코로나19에 대응함에 있어 산업정책적 고려가 강한 동아시아 국가들과는 차이가 있었죠. 기본소득 담론의 원래 핵심은 사회정의와 자유 관념입니다. 국가 가부장주의에 반대한다는 것도 중요하고요. 재난지원금은 그러한 논의가 개입할 틈이 없이 위기에 대응하면서 실행된 면이 있습니다.
윤홍식 국제통화기금(IMF)이 인플레이션과 재정건전성 유지를 위한 통화정책 중심의 신자유주의 정책기조에서, 2010년부터 확장적 재정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고용·임금 보장이라는 정책기조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지난 30년간 시행해온 신자유주의 정책의 폐해를 스스로 인정한 것이죠. 각국의 은행이 여기에 보조를 맞춰가는 과정에서 코로나19 위기에 직면하자 각국의 재량이 더욱 폭넓었던 게 사실입니다. 한국은 선거가 있었다지만, 그렇지 않았던 다른 나라들이 재난지원금 같은 정책을 시행할 수 있었던 배경을 입체적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일영 저는 ‘2010년대부터 뉴노멀 시대이고, 코로나19는 그 위기를 심화시켰다’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2008년경부터 세계체제의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씀하신 디커플링, 즉 탈동조화라는 단어가 핵심이 될 수 있겠네요. 가장 힘센 나라들의 협조에 의한 공동 통치(condominium)가 종식되었고, 성장과 고용도 따로 돌아가게 되었어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문제죠. 그런데 세계 각국이 처해 있는 상황은 비슷한데 이에 대응하는 해법은 합의되고 있지 못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전통적인 복지국가를 강화하자는 주장과 그래도 기본소득이 의미 있다는 주장이 맞부딪치잖아요?(웃음)
양재진 과거보다 성장이 고용을 창출하지 못한다는 진단은 정확하지만, 그렇다고 그 현상을 너무 과장해서는 안 됩니다. 왜곡되거나 과장된 현실인식은 잘못된 정책과 대안의 논거가 되거든요. 사회보장제도가 부실했던 20여년 전 외환위기 때와 비교하더라도 복지국가의 자동안정화 장치가 작동하고 있고, 그것이 기본소득보다 훨씬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장해야 그나마 고용이 창출되니 당연히 성장정책이 필요하고, 전통적인 소득보장 정책도 작동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고용보험 같은 소득보장 정책이 불완전한 게 사실이니까 이번 기회에 손을 봐야겠죠. 전국민 고용안전망 같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지, 일회성 ‘돈 뿌리기 식’의 재난지원금이 사회보장 시스템을 대신할 수 있다는 믿음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일영 청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괜찮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세계시장의 압박은 기정사실로 보입니다. 그래서 청년층의 불안정 노동 상태가 점차 확산되고 있고, 이제 전통적 방식으로 다루기 힘든 지경이 된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큰 상황입니다. 물론 그 해법이 꼭 기본소득만은 아니겠습니다만 기본소득 담론이 주로 제기하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 즉 불안정한 노동자계급의 문제는 기존 복지제도의 균열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듯합니다.
김현우 양재진 윤홍식 두분의 차이도 거기서 오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총고용률이 지속적으로 증가한 것이 사실이고, 또 중간 수준의 일자리가 줄어든 것도 사실이니 두분이 강조하는 바가 다른 것 아닐까요. 저는 디커플링보다는 성장 자체가 구조적 정체에 들어섰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봅니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환경운동가 가운데 코로나19의 긍정적 결과에 주목하는 이들이 있는 이유도 바로 탈성장 때문인데, 이동과 생산이 줄어들어도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어서예요. 그렇게 ‘죽을 만큼’ 일하지 않아도 ‘사는 게’ 가능하잖아요. 지난달 이딸리아 소식을 전하는 기사를 봤는데, 도시는 엄청난 실업 상태고 농촌은 이주노동자가 없어 엄청난 고용난이라 도시의 청년들이 농촌에 작물을 수확하러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농촌에도 활력이 생겼다고 하고요. 이때 농촌으로 간 청년들에게 국가가 기본소득이 되었든 다른 형태가 되었든 지원을 해준다면 제조업이나 첨단산업보다 농업에서 또다른 차원의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디커플링보다 지금의 저성장, 역성장을 관리하는 수단으로서 기본소득을 바라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양재진 프레카리아트가 문제라면 거기에 안전망을 치는 일에 집중해야죠. 그리고 말씀하신 상황에서도 기본소득이 대안이 되기는 힘듭니다. 농민기본소득이나 청년기본소득 이야기도 나오는데, 농민과 청년 집단이 어렵더라도 그 안에서 각자 처지가 다 다릅니다. 돈 잘 버는 농가와 일자리를 얻은 청년들에게 왜 무작정 돈을 더 줘야 하나요? 거기다 고임금 일자리를 차지한 청년들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이 과연 정의로울까요? 변하는 노동시장의 수요에 맞춰 직업역량을 키울 수 있게 교육과 훈련에 공적투자를 하는 게 복지국가인데, 현금을 얼마 쥐여주며 문제를 덮고 넘어가려는 점이 아쉽습니다. ‘내가만드는복지국가’의 오건호 공동운영위원장이 “기본소득은 기존 복지체제가 사람들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고발한다. 하지만 그것이 대안인지는 엄격히 따져봐야 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중요한 지적입니다. 모든 대안이 기본소득으로 수렴하는 지금 상황은 문제죠. 찬찬히 따져보면 복지국가의 틀 안에서 제도를 보완하고 개선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제 생각인데, 그러다보니 제가 졸지에 전통주의자·보수주의자가 돼버린 것 같은 요즘입니다.(웃음)
윤홍식 전국민에게 지급하는 게 적절한지는 사실 저도 어느정도 의문입니다. 전통적인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 통하지 않기 시작했고, GDP 대비 민간소비 비중이 2000년대 이후 계속 감소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술변화로 인해 ‘괜찮은’ 일자리가 계속 줄어드는 상황과 관련이 있죠. 디지털 시대에 일이년 교육으로는 고소득 일자리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교육훈련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도 여러모로 효용성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본소득이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본소득론자들도 의견이 동일하지는 않고 세가지 버전 정도가 있어요.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급여를 제공하는 ‘완전기본소득’이 있고 또 그에 못 미치지만 아주 적은 금액을 전국민에게 꾸준히 지급하는 ‘부분기본소득’이 있는데, 저도 이 두 방식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는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환적 기본소득’이라고 노인, 아동, 청년 혹은 인구학적 특성에 따라 농민 등에게 보편적 사회수당을 지급하는 방식이 있는데 이는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만합니다. 아까 이딸리아 청년 노동자의 예처럼 소득보전 효과를 낼 수도 있고, 또 기본소득이 최소한의 소득을 제공해주면 수혜자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시도해볼 수 있는 등 부수적인 효과도 거둘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기본소득에 대해 비판할 때도 정말 ‘실질적 자유’를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금액을 지급하는 기본소득, 중위소득 30퍼센트 수준의 금액을 전국민에게 지급하는 완전기본소득, 완전기본소득보다 더 낮은 금액의 부분기본소득, 인구사회학적 특성에 따라 지급하는 보편적 사회수당 등의 여러 수준 중 어떤 기본소득을 비판하는지 정확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지금은 높은 수준의 기본소득을 비판하다가, 부분기본소득을 비판하고, 전환적 기본소득을 비판하는 등 초점이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아요.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수용할 면은 수용할 수도 있어야 할 것 같고요.
실패한 사회주의 기획 vs 새로운 사회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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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도 기본소득이 보수의 어젠다가 되는 것을 경계하는 듯합니다. 동시에 기존 복지국가론과 대립하지 않는 선에서 대중운동의 흐름으로 이 논의를 이어가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초래되는 혼란도 있죠. 기본소득이 원래 정의대로 작동하게 하려면 음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처럼 차등적 징세가 함께 논의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빠져 있거든요. 지금은 “재원이 감당되는 수준부터 일단 시작하자”는 식의 이야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윤교수께서 말씀하신 ‘전환적 기본소득’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바가 있습니다. 제도를 시행하려면 보편적 기준으로 특정 집단을 나누는 일은 불가피할 수도 있겠습니다. 경제학이 필요한 이유도 그렇지만 정책을 수립할 때는 선택이 중요한데, 종전의 방식대로 연령을 기반으로 설계할지 아니면 다른 어떤 방식을 택할지 논의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기본소득 논의는 너무 일반적이고 원론적인 수준에서 공회전하는 면이 있죠.
윤홍식 『독식 비판』(Unjust Deserts, 한국어판 민음사 2011)을 보면 미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한 이유가 개인이나 기업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과거의 유산 덕분이고, 따라서 부(富)도 지금처럼 일부가 독차지해서는 안 되고 80퍼센트는 사회 전체가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Robert Dahl)도 부의 사회적 배분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했죠. 우리나라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특정 기업이 독차지하고 있는 부의 일정 정도는 사회적으로 공동 소유할 근거가 있고, 그래서 기본소득이 사후적이 아니라 사전적으로 얼마간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면이 있다는 주장도 나오죠. 물론 이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또다른 문제겠지만요.
이일영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의 『기본소득』(Basic Income, 한국어판 창비 2018)을 봐도 기본소득의 제일 중요한 원칙이 사회정의로 제시되죠. 이른바 공유부(共有富) 개념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윤홍식 그런 것을 고려하면 지금은 기본소득이 복지국가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전락해버린 듯합니다. 기본소득론자들이 대안적 분배체계로서의 기본소득을 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일단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듯한데, 그러나 사회적 목표로서 대안사회를 담아내지 못하면 기본소득 논쟁은 재정건전성 프레임에 갇히고, 그러면 전통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한 싸움이 되는 거죠.
김현우 그런 점에서 기본소득론자들이 주류적 복지국가체제를 지지하는 사회복지학자들이나 경제학자들의 비판에 너무 순응하며 일대일로 대응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기본소득은 복지국가와 연관이 크지만 복지정책이 아닌, 또는 소비 회복과 경제 동력 유지 정책이 아닌 차원도 있다는 이야기도 중요하거든요. 현실성을 담보하는 정책 대안을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기본소득의 넓은 스펙트럼이 갖는 강점이랄까 파괴력이랄까 그런 게 무뎌지는 게 아쉽기도 합니다.
윤홍식 이론적 문제와 실증적 문제는 확실히 구분될 필요가 있습니다. 부분기본소득이나 전환적 기본소득을 도입해서 완전기본소득으로 가겠다는 방향을 세우려면, 그것은 이론의 영역이 아니라 실증의 영역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머릿속으로 계산할 게 아니라 실제로 시행해봐야 알 수 있는 거죠. 기본소득론자들이 1976년에 설립된 ‘알래스카 영구기금’을 자주 언급하는데, 그 이후에 확장된 기본소득 논의가 사실 별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론이 너무 이론 차원에만 머무는 것도 다소 소모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양재진 기본소득의 철학은 평등주의의 열망을 깔고 있고, 자본주의체제 극복을 꿈꿨던 과거 맑시스트적 대안과도 닮았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공유부에 선뜻 동의가 안 되는 것도 그것이 실패한 사회주의경제 모델 논리와 닿아 있기 때문이에요. 소득세를 정률 70퍼센트로 하자는 허버트 싸이먼(Herbert Simon)의 주장이나 GDP의 25퍼센트를 기본소득으로 분배하자는 필리프 판파레이스(Philippe van Parijs)의 주장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본질은 ‘모두 거둬서 똑같이 나누자’는 겁니다. 사적소유권을 철폐하지 않고 평등주의의 열망을 실현해보고 싶은 마음이 발현되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완전기본소득이 실현되더라도 그 사회가 자유롭고 이상적이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기여한 것 없이도 국가로부터 돈을 받는다는 것인데 그럼 자유로워지나요? 다 커서도 부모에게 용돈을 받는 자식이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이념 차원이 아니라 정책 수준에서도 기본소득은 문제가 많습니다. 복지국가는 근로연령대 인구와 아닌 인구를 구분해서 재원을 투입합니다. 근로가 불가능한 아동과 노인 등에게는 아동수당이나 기초연금 등이 기본소득과 동일한 방식으로 ‘무조건’ 제공되고 있죠. 그런데 생산가능인구에 대해서는 소득활동과 자립이 전제되어 있고, 이들이 실업 등 사회적 위험에 빠지거나 출산·육아·질병치료 등으로 지출이 늘어날 때만 지원해줍니다.
윤홍식 기본소득에 대한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통적 좌파가 주창한 평등보다 자유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실질적 자유를 우선시하고, 기본소득이 그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라는 사실도 생각해야 합니다. 실제로 지금 복지국가 시스템이 올라타고 있는 자본주의체제도 끊임없이 변해왔습니다. 그에 따라 복지국가의 원리 자체도 달라져왔죠. 1954년 윌리엄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가 이야기한 남성 생계부양자 중심의 가족 단위 복지국가가 지금 얼마나 개인 단위로 바뀌었는지, 또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서 중요한 쟁점으로 제기하는 ‘청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최근에 성립된 개념인지만 떠올려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 제조업 기반의 산업이 서비스업으로, 이제 정보통신으로 바뀌며 자본주의의 이름도 인지자본주의로 달라졌고, ‘언택트’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그러니까 기존 체제에 근거해서 사회보장체계를 만들어야 할 부분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포괄하지 못하는 영역이 이미 많이 생겨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특히 급격한 이행기인데, 그렇다면 다양한 정책이 조합될 수도 있고 꼭 하나의 원리를 상정할 필요도 없겠죠. 가령 생산 가능, 근로 가능 유무를 판단하는 논리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근로능력 유무로 수급자를 가려내야 한다는 생각은 1601년 제정된 영국 빈민법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조선시대 구휼제도 또한 이런 원칙에 입각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미 북유럽에서는 근로능력 유무가 공공부조의 조건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것과 관계없이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해주겠다는 게 그 나라들의 철학이니까요. 이제 우리도 그런 식으로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양재진 서구 복지국가가 표면적으로 달라지긴 했지만 원리적으로 바뀐 것은 없습니다. 복지국가는 과거나 지금이나 자본주의 시장경제 위에 건설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완전고용’ ‘일하는 사회’ ‘소득활동 장려’가 기본입니다. 실업, 산업재해 등 사회적 위험에 빠지거나 육아·질병·은퇴 등 생애주기에서 발생하는 문제 때문에 소득활동을 못할 때 소득보장제도가 개입해 보완해주죠. 최저임금제나 근로장려금제도 등을 통해 열심히 일해도 근로빈곤에 머무는 시민들의 가처분 소득을 올려주는 방법도 있습니다. 전혀 일을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초생활보장제도를 통해 생계급여 같은 것이 지급됩니다. 소득이 낮거나 격감한 사람들에게 충분한 급여를 몰아줘서 밑을 떠받쳐 올리는 게 훨씬 평등하지 않나요?
김현우 이 자리에 완고한 기본소득론자가 안 계시니 오히려 토론이 더 치열해지는 것 같습니다.(웃음) 기본소득의 패러다임과 여러 기본소득 정책을 구별하자는 윤홍식 교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전환적 기본소득이든 부분기본소득이든 정책이 지니는 효과, 파급력, 잠재력을 중심으로 생각을 돌려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복지국가의 기본 원리는 사실 지금 논의에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책의 전제보다는 효과가 중요하죠.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의 『도넛 경제학』(Doughnut Economics, 한국어판 학고재 2018)에 두개의 원으로 이루어진 도넛 모양의 흥미로운 그래프가 나오는데 안쪽의 원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하한선이고, 바깥쪽의 원은 생태계 균형 붕괴를 초래하는 상한선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지속성을 추구하는 작동원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저는 주류경제학의 논리를 대체할 수 있다고 봤어요. 수요-공급 균형이 자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논리나, 매년 3~4퍼센트씩 GDP가 성장하지 않으면 사회가 붕괴한다는 논리 같은 것 말이죠. 이 도넛을 실현 가능하게 하는 유효한 수단이 기본소득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수함수적인 성장이 아니라 공유부를 활용해서 사회를 유지하는 식의 주장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윤홍식 확실히 제도가 유연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전통적인 방식으로 대처해야 할 것들도 있지만요. 지금 중요한 것은 조화와 지속 가능성인 것 같습니다.
양재진 그럼에도 기본소득의 타깃이 이미 돈 벌고 있는, 심지어 ‘꽤 잘 벌고 있는’ 유권자 층이라는 생각은 떨칠 수가 없습니다. 보통의 경우 이들은 사회보험료와 세금을 내지만 실제로 받는 것은 거의 없었거든요. 위험에 빠지지 않는 한 복지급여를 받지 못해요. 그런데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이들은 못 받던 현금을 받게 됩니다. 정치적인 셈법은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는 일인데, 사회복지 차원에서는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아요. 복지재원은 한정돼 있고, 복지를 필요로 하는 몹시 긴요한 곳은 여전히 많습니다.
윤홍식 하지만 ‘은퇴’ ‘정년’ ‘생산 불가능’도 사실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자본의 논리입니다. 65세 이상도 일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에게 주는 수당은 괜찮고 청년에게 주면 안 된다는 것은 달리 생각해볼 수 있죠. 적어도 아까 말씀드린 전환적 기본소득의 관점에서는 충돌하는 면이 없을 것 같습니다. 기초연금이라 부르든, 전환적 기본소득이라 부르든 현실적으로는 비슷한데 철학적 논리와 지향점에 차이가 있죠. 그에 따라 발전 방향이 달라지겠지만 그것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증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청년 문제와 기본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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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영 가장 논쟁이 되는 것은 역시 청년기본소득인 듯합니다. 청년이 생산가능인구 중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청년실업도 많고 생산체제에 잘 들어가지 못하는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양재진 청년을 대상으로 한다면 부분기본소득이라도 아동수당이나 기초연금과 유사한 사회수당이 하나 도입되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청년은 근로연령대 인구거든요. 20대 청년인구만 해도 750만명이고, 이들에게 월 10만원씩만 줘도 1년에 9조원이 소요됩니다. 실망실업자(구직단념자)를 다 포함하면 청년 실업률이 20퍼센트 정도가 됩니다. 나머지 80퍼센트 중에 괜찮은 직장을 얻은 청년이나 중산층 가정의 청년들에게까지 기본소득을 똑같이 주자면, 어려움에 처한 청년들에게 제대로 된 지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청년들에게는 사회에 진출하는 발판이 되는 일자리가 필요합니다. 직업훈련을 받을 때 훈련수당도 충분히 주고, 인적자원도 개발하고, 미래 일자리 창출에도 투자해야죠. 한달에 10만원씩 준다고 청년들 삶이 확 나아질까요?
윤홍식 지금의 기술변화는 1940년대 이후처럼 노동을 보완하는 변화가 아니라 노동을 대체하는 변화라고 생각해요. 노동을 대체한다는 것이 총고용량이 줄어든다는 의미는 아니고, 좋은 일자리와 나쁜 일자리가 늘어나고 중간의 ‘괜찮은’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에게 돈 벌려면 어떤 일자리라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죠. 부자 부모를 둔 청년만이 아니라 중산층과 가난한 청년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생계 걱정 없이 준비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청년수당은 부의 세습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러면 가난한 청년에게만 수당을 지급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이미 2010년에 무상급식 논쟁을 거치며 한국사회에서도 일단락된 것 같아요. 그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결국 선별주의를 선호하는 거죠. 논리적으로는 가난한 사람에게 복지를 집중하는 게 불평등을 줄이는 것 같지만, 현실세계에서는 보편적 급여가 불평등과 빈곤을 줄이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 이미 실증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를 ‘재분배의 역설’이라고 하는데, 미국과 스웨덴의 차이를 보면 알 수 있죠. 부자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고 그것을 모두가 나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급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얼마나 지급할지 그 수준의 문제겠죠. 청년수당이 정말 청년들의 꿈을 뒷받침할 만큼 많을지가요.
이일영 청년 문제를 둘러싼 관점이 역시 어디서나 첨예한 듯합니다. 하지만 지금 복지국가의 큰 틀을 한번에 무너뜨릴 필요는 없다는 데는 세분의 의견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전환적 기본소득도 모두 인정하시고 있고요. 하지만 기본소득을 청년에게 지급할지 말지를 생각해보면 또 상황 및 체제 인식에 대한 차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기본소득이 꼭 과거 사회주의 지향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공유부도 공산주의 개념과는 확실히 다르고요. 특히 생산 부문에서의 공유부 영역을 확보한다는 것이 사유영역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사회주의보다는 혼합경제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장경제가 실패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공유영역은 필수적이죠. 4차 산업혁명이 진전됨에 따라 공유영역의 중요성은 더 부각될 것이고요. 사회적 상속이나 기본자산 같은 아이디어를 차용해서 공유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게 사회에 훨씬 생산적이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많아졌죠. 분배를 위해서도 원활한 생산체제 구축이 필요하고 공유적 인프라를 도외시할 수 없다는 점도 유념해야겠습니다. 복지국가뿐 아니라 기본소득을 위해서도 그렇죠. 지금 청년들의 경제활동 영역 진입이 봉쇄되어 있는데 청년들에게 필요한 공유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게 시급하다고 봅니다.
윤홍식 여태껏 노동시장을 국가나 사회가 설계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2019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배너지(A. Banerjee)·두플로(E. Duflo)·크레이머(M. Kremer)의 연구를 보면 이런 판단을 제일 잘할 수 있는 주체를 개인으로 설정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라는 말도 거기서 나왔죠. 그렇다면 청년 개인의 활동 영역을 열어줄 필요가 있는데, 그런 면에서 현금 직접 지급이 갖는 힘이 있다고 봅니다. 다만 좌파 기본소득이냐 우파 기본소득이냐 이런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논쟁은 접어두자는 겁니다. 사실 현금은 전통적으로 우파 쪽의 것이었고, 좌파는 현물 지급과 완전고용을 강조하는 쪽에 가까웠죠. 개인의 자율성과 정체성 정치가 점점 부각되는 점을 고려해 청년들을 이해할 필요도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청년들에게 너무 세세한 직업교육을 하려 하면 ‘왜 내 삶을 당신들이 설계해?’ 하고 나올 겁니다. 지원만 하고 간섭은 하지 마라는 거죠. 그러니까 청년기본소득이라는 제도도 가능해질 수 있겠다 싶은 거고요.
화폐 지급은 자유를 억압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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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영 하지만 현금 지급이 자유를 가져올지에 대한 의문이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음은 이 시점에서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양한 사회실험의 결과가 있기는 하지만 연역적으로 도출된 결과나 이론으로 검증된 것은 없죠. 기본소득이 사회를 한발 더 화폐화할 것임은 분명한데, 화폐화가 자유를 진전할 것인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회를 활성화하자며 항상 꺼내드는 게 투자와 자본이지만 그런 것들이 실질적 자유를 강화하기보다는 개인 대 개인의 투쟁을 부추기기 십상이거든요. 그래서 기본소득 이전에 뭔가 교두보가 필요하다는 조심스러운 의견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기존 복지국가에서도 어느정도 책임져온 사회적 약자와 아동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교육과 주택 문제가 있잖아요. 기본소득이 이러한 문제에 유효할지를 따져볼 필요도 있겠습니다.
김현우 기본소득론자들도 필수 서비스에 대해서는 유지 내지 확대를 주장하고 있죠. 그런데 그 논쟁이 가능성의 영역으로 끌려 들어가는 순간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아무도 검증해볼 수 없으니까요. 특히 한국은 필수 서비스 가운데 개인이 주택을 위해 감당해야 할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에 기존의 사회 서비스나 복지급여가 모두 기본소득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에서 거부감과 의구심이 더 큰 것 같아요. 그럼에도 화폐로 지급하는 기본소득이 왜 의미가 있냐면 어떤 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어서입니다. 현물이나 특정 서비스로 제공하면 조건과 결과를 따져야 하죠. 좌파들이 화폐 지급을 내심 싫어하는 것은 기존에 투쟁으로 기껏 얻어낸 공공 서비스들이 후퇴할까봐 걱정하는 것도 있고, 화폐 자체에 대한 거부감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맥락도 있죠. 그런데 증식을 위한 탐욕적 자본이 아니라 ‘교환의 매개’로서 화폐의 본래 위상을 좀 찾아줄 필요도 있을 것 같아요. 화폐를 탈물신화함으로써 그것을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무언가로 여기게끔 해야 하는데, 그런 역발상을 위해서도 기본소득은 중요할 듯합니다.
윤홍식 19세기 말, 20세기 초 평균적인 GDP 대비 공적 지출은 5퍼센트 미만이었습니다. 지금은 OECD 국가는 평균 20.1퍼센트(2018년)고 많은 경우 30퍼센트가 넘죠. 재정의 제한성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정치적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재정건전성이라는 문제도 그렇게 유의미하지는 않아요. 사회 구성원들이 동의하면 할 수 있는 거고, 반대하면 못하는 거죠.
양재진 그래도 따지자면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자유를 줄 만큼의 돈은 도대체 얼마큼일까요? 지금 상황에서 20대에게 10만원씩 주는 것도 어마어마한 부담인데 그것도 솔직히 부족한 액수니까요. 물론 자유롭게 쓸 수 있고 소비자의 주권을 높인다는 점에서 현금은 장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복지국가에서 현금 대신 현물이나 서비스 지급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현금을 국가가 의도한 대로 쓰지 않거든요. 아동수당으로 100만원을 주지 않고 10만원씩만 주면서 공공보육에 90만원씩 예산을 투입하는 이유는, 부모들이 아이를 위해 100만원을 다 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비스와 현금의 장단점은 예전 복지국가에서부터 있어온 오래된 논쟁입니다. 왜 과거에 현금으로만 지급하지 않았는지를 이전 논쟁에 비춰 생각해볼 필요도 있어요.
이일영 물론 기본소득론자들도 다른 서비스를 전면 중단하고 기본소득으로 일원화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자면 재정 문제가 나오고 또 이야기가 길어지겠죠?(웃음) 하지만 중요한 문제이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고, 각자 생각하시는 바를 짧게만 언급하고 지나가도록 할까요.
윤홍식 재정을 감당할 수 있느냐, 증세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이런 논쟁보다 지금 벌어지는 사회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논의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재원 조달은 그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 수준에 따라 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재정 감당의 수준도 시장마다 다르고, 정치적 결정의 정도에 따라서도 달라지니까요.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그래왔으니까 유연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재진 사회 문제가 있다면 정책을 마련해야 하고, 그 정책은 비용 대비 효과가 클수록 좋겠죠. 저는 기본소득의 비용 대비 효과가 매우 낮아 문제라고 봅니다. 막대한 재원이 들어가는데 개인에게는 푼돈이 돌아갑니다. 그래서 반복해서, 진짜 문제인 곳에 더 많은 재원을 투입하자는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자원이 무한정일 수는 없는데 증세도 쉽지 않으니까요.
김현우 재정건전성을 너무 의식할 필요 없다는 생각에는 공감합니다. 이미 많이 낭비되고 있는 국방비나 해외 자원개발 등 조절 가능한 영역도 많다고 생각하고요. 핵심은 기본소득이 요술방망이는 아니라는 거겠죠. 모든 문제가 이 제도로 뚝딱 해결될 거라는 기대는 버리고, 이 또한 자원 배분의 한가지 차원이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겠습니다. 합의를 위한 논의의 방식을 돈 문제에서 벗어나 다각화하려는 시도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 어디인지, 어떤 복지국가의 형태로 바뀌어야 하는지로 시각을 넓혀야 이 문제에 대한 해답도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야 경제 패러다임도 바뀌고 증세든 배분이든 가능해지겠죠.
생태적 전환과 농민기본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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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영 경제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보면 두가지 제약 조건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는 세계체제론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금융 시스템이 국제화·세계화되어 있는데, 사실은 미국의 시스템에 묶여 있는 측면이 강해요. 그래서 그 범위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 차원의 제약이 있습니다. 발전국가라는 자본주의 특성인데, 후발 자본주의국가로서 성장주의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여건이 있었고 그 경로의존성을 쉽게 지울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만약 어떤 합의를 도출하고 선택을 한다면 그러한 제약을 어떻게 극복할지도 염두에 둬야겠습니다. 아까 잠깐 농촌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런 맥락에서 생태적 전환과 관련한 농민기본소득도 짚어볼 만한 문제입니다.
김현우 단순히 ‘농촌과 농민이 어렵다’는 시각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되겠죠. 『베이비부머가 떠나야 모두가 산다』(마강래 지음, 개마고원 2020)에 전략적인 귀농·귀촌을 통한 농촌 변화 방안이 제시되는데 아까 말씀드린 이딸리아의 사례에 견줘보자면 확실히 농촌은 기본소득을 실험해볼 만한 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전라남도 해남 등 조례를 만들어 농민수당을 지급하는 곳도 있고요. 얼마 전 작고하신 김종철 선생님이 이끌어온 『녹색평론』이 한국에서 기본소득을 가장 오래 다룬 매체일 텐데, 특히 농민기본소득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주목했죠.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시행되는 농민수당에는 두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수혜자가 남성 가장만 해당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농민수당의 근거가 되는 공익적 기능을 증명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농업은 생태계 보전, 식량주권 등 산업적 가치로만 환원되지 않는 공익적 기능이 있어서 그것이 수당 지급의 근거가 되는데, 그렇다면 그 혜택을 어디까지 받을 수 있는지가 굉장히 모호해집니다. 또 가구당 지급이라는 기준 때문에 여성 농민은 제외되는 실정이고요. 그래서 농민수당을 농민기본소득으로 전환하자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데 이는 기존에 여러 명목으로 농민과 농촌에 투입되었던 재원이 전환되는 것이라 부담도 적죠. 물론 이게 진짜 기본소득인지 아닌지 따져볼 여지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지금 사회적 효과를 발휘하고 정책가들의 동의도 확보하기에 가장 좋은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양재진 농민기본소득이 시행되면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보호 필요성이 낮은 어민이나 축산인까지 그 혜택을 누리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어민과 축산인 스스로는 기본소득을 요구하지 않더라도 지자체장이나 지역구 의원들은 확실히 먼저 주겠다고 할 것 같습니다.(웃음) 진짜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농민기본소득을 도입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정리를 해두고 시행해야겠네요.
윤홍식 ‘보편적으로 지급된다’는 무조건성이 기본소득의 기본 원칙이라면 경기도가 조례안으로 만든 경기도 농민기본소득은 전환적 기본소득의 성격이 있습니다. 다만 농민이라는 정체성이 농업이라는 소득활동을 전제하는데, 그렇다면 ‘관계없이 지급된다’고 하기 애매해져서 기본소득의 기본원리와 충돌할 수도 있겠네요. 물론 기본소득인지 여부보다 농민이라는 단위가 공적 소득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더 중요하겠습니다. 보편적 수당이 직업군에 따라 지급된 전례가 없기 때문에 시행된다면 ‘자영업자 수당’ ‘임금노동자 수당’도 가능해진다는 뜻인데, 왜 농민인지에 대한 생태학적·철학적 고민이 한층 더 요구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수당을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유연하게 바라볼 필요는 있습니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이래 우리는 복지를 포함해 거의 모든 문제를 비용 대비 효율성으로 계산해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팬데믹 상황이 그 효율성이 꼭 효율적이지도 않다는 의외의 사실을 드러냈어요. 프랑스, 이딸리아 등 공적 의료체계가 잘 갖춰진 유럽에서도 비용 대비 효율성이라는 신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공공의료를 운영했습니다. 즉 병상의 공실률을 최소화하는 식으로 비용을 낮추며 이윤을 높였는데, 이번에 아주 크게 화를 입었죠. 이제 비용 대비 효율성 면에서는 비효율적이더라도 위기 상황에 대비하는 방향이 필요할 것 같고, 그렇다면 좀더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정책들이 싹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일영 생태계 전환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거기에 돈을 더 써도 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농민기본소득은 확실히 이 비슷한 철학의 문제와 맞물려 있고요. 농민운동 일각에서는 사용처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행정 편의성이 높고 빠르다는 이유로 기본소득보다 복지정책을 더 선호하기도 합니다. 다른 일부에서는 기본소득이라는 운동의 파급력을 고려해서 농민기본소득을 주장하죠. 그런데 지금 농촌과 농업이 굉장히 상업화·화폐화되어 있어요. 이 문제가 심각합니다. 결국 직불제 같은 논의가 있지만, 직불제의 목표가 무언지 아직 제대로 설정을 못했고요. ‘농민기본소득’이라는 개념은 성립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농민이 누구인지를 선별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별의별 일이 벌어질 거예요. 기본소득 취지에 부합하려면, 그리고 생태적 전환 취지에 좀더 부합하려면 ‘농촌기본소득’으로 가야겠죠.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 상황에서는 상업화의 폐해를 쉽사리 극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생태적 전환, 농지 소유 등 근본적인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의제 설정이 우선시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는 다양한 기본소득에도 마찬가지 메시지를 던지는데, 기본소득이 지향하는 목적에 대해서 깊이 있는 고민이 더욱 필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그래야 기본소득이 부차적인 프로그램으로라도 잘 기능할 수 있겠죠.
윤홍식 기본소득을 지급하느냐 지급하지 않느냐보다 어떤 과정을 통해 지급하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로 보입니다. 그 과정은 기본소득을 포함해 선택 가능한 복지국가의 프로그램을 늘어놓고 그중 하나를 고르는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는 사회가 바뀌지 않겠죠. 가장 바람직한 체계를 만들어가야 할 텐데, 바람직한 분배체계는 사회의 세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먹고사는 문제 즉 안정적인 경제적 재생산을 해내야 하고, 또 그 생산체제가 양산하는 사회 문제를 완화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생산체제의 변화를 추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는 19세기 독일에서 시작된 사회보험이 그런 역할을 해왔죠. 제조업 중심의 생산체제를 안정적으로 재생산하면서, 실업·질병 같은 사회 문제를 적절히 해결했고, 더 나아가 임금노동이 지배적인 생산방식이 되도록 만들었으니까요. 물론 사회보험 중심의 분배체계를 지지하는 광범위한 정치적 지지집단이 형성되었으니까 그것이 실현되었을 텐데, 기본소득도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 위치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재진 대안체제로서 기본소득 논의가 필요한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안적인 사회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시행 중인 사회보장제도를 너무 폄훼하거나 현실을 곡해해서 바라봐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 정책의 효과를 냉정하게 비교분석해서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해결에 진짜 도움이 되는 게 무엇인지를 잘 판단하고 힘을 모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재정 문제도 냉정하게 바라봐야겠고요.
김현우 기본소득 논의가 지금 사회에 주는 시사점이 많은 듯합니다. 처음에 그저 황당한 이야기로 치부되었는데 10년 사이 우호세력이 이만큼이나 늘어난 것도 신기하고요. 특히 저는 기후위기 측면에서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의 지구온난화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2050년 탄소배출 제로 사회를 목표로 해야 하고, 그러면 10년 뒤인 2030년까지 45퍼센트 이상을 감축해야 하거든요. 그렇다는 건 차분히 차곡차곡 진행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뜻인데, 기본소득론에서 동력을 얻는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웃음) 기본소득론이 대안을 제시하는 측면보다 문제를 드러내는 측면을 저는 좀더 높이 평가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발적으로 여러 돌파구를 열어주리라 기대하고요. 실제로 정책이 되고 제도가 되는 것은 또다른 문제겠지만, 아무튼 그 논의가 가진 긍정적인 가능성을 꾸준히 지켜보겠습니다.
이일영 앞에서 기본소득 논쟁이 사회구성체 논쟁의 연장선일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실제로 그렇게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단기적인 정책을 실험해보다가 끝나는 식으로 흘러온 지 오래되었지요. 이제는 장기적인 비전을 세울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불필요한 이념 논쟁으로 흐르지 않고, 지금의 자본주의가 이대로 잘 굴러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생산적인 논의를 촉발하는 기폭제의 역할을 기본소득이 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본주의 요소, 사회주의 요소, 혼합경제적인 요소를 두루 검토할 필요가 있겠죠. 오늘 뜨겁고 진지한 토론 함께해주신 세분 정말 감사합니다. (2020.7.24.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