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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숨을 쉴 수 없어”
체제적 인종주의와 미국문학의 현장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저서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21세기의 한반도 구상』(공저), 역서 『필경사 바틀비』 『우리 집에 불났어』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공역) 등이 있음.
kiwookh@gmail.com
플로이드의 죽음이 촉발한 것
2020년 5월 25일,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의 충격적인 죽음에 항의하여 미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코로나19 사태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된 데는 백인 경찰 데릭 쇼빈(Derek Chauvin)에게 짓눌려 죽어가는 플로이드의 모습이 현재 흑인의 처지를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쇼빈은 수갑을 채우고 바닥에 눕힌 플로이드의 목을 총 8분 46초 동안 무릎으로 짓눌렀는데, 미동조차 없어진 뒤로도 2분 53초간 더 눌렀다. 20달러짜리 위조지폐 사용 혐의로 체포된 플로이드는 경찰 검문을 받을 때부터 공포에 질려 있었으며, “숨을 쉴 수 없어요”(I can’t breathe)라는 말을 스무차례 이상 되풀이했고 “엄마, 사랑해요.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 나 죽어요”라는 유언 같은 말을 남겼다.1
이 사건을 통해 충격적으로 드러난 것은 노예해방(1863년) 이래 150년, 시민권 쟁취(1965년)로부터 50년이 지났고, 게다가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8년 집권을 거쳤음에도 현재 대다수 흑인들의 삶은 참담하고 그들을 대하는 공권력의 태도 역시 더없이 가혹하다는 것이다. 이번 시위에서 두각을 나타낸 운동단체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이하 BLM)와 운동연합체인 ‘흑인생명운동’(Movement for Black Lives, 이하 M4BL)은 모두 오바마 시절에 결성된 것이고, 그 명칭이 일러주듯 흑인의 생명 보호를 일차적인 목표로 내걸었다.2
플로이드뿐 아니라 근년에 터무니없는 이유로 죽은 상당수 흑인들의 마지막 장면에는 그들이 아메리카 땅에서 겪은 온갖 형태의 차별과 냉대, 모멸과 예속이 응축된 듯하다. 가깝게는 1950~60년대 시민권운동 당시 인종격리와 차별에 저항하며 평등한 시민권을 요구한 흑인들로부터 멀리는 노예제 시대 백인 주인의 어떤 처벌에도 복종해야 했던 흑인 노예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20세기 초반 남부에서 북부 대도시로 이주하여 백인 주류 사회의 또다른 형태의 차별과 착취에 시달리던 흑인 노동자, 빈민들의 모습도 떠오른다. 특이한 것은 최근 죽임을 당한 흑인들의 삶과 죽음이 짐 크로우(Jim Crow)3 시대나 시민권운동 시기보다 오히려 남북전쟁 이전의 노예들의 모습에 더 가까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는 점이다. 사실 플로이드 살해사건이 의미심장한 것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경찰폭력의 야만성보다 그런 야만적 폭력을 공권력의 이름으로 버젓이 행사하는 방식이다. 경찰은 만약 혐의자가 백인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과도한 폭력을 가난한 흑인들에게 행사했다. 백주의 거리에서 행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천연덕스럽게 자행된 공권력의 이런 폭력행위는 제도적인 지지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플로이드 죽음 이래 ‘체제적 인종주의’(systemic racism)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논의들이 쏟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체제적 인종주의’ 철폐/극복의 주장에서 ‘체제’를 어떤 범위와 차원으로 상정하느냐에 따라 문제의 틀과 해결책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가령 ‘체제’를 법무부와 경찰국, 사법제도처럼 국가기구의 부분적인 제도와 관행에 한정한다면 경찰폭력과 부당한 형사법 제도를 고치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진전이 이뤄지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차원에서 제도와 관행이 개선된다고 해서 미국사회에서 인종주의가 종식될 가능성은 없다. 인종주의의 뿌리는 미국이라는 다인종 국가의 여러 사회적 관계 안에 속속들이 뻗어 있고, 사실은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밑바탕에까지 닿아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처음부터 자본주의체제로 시작했고 북부 산업지역의 공장제 임금노동 외에도 흑인 노예제를 주요하게 활용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해서는 또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는데, 노예화하는 대신 학살하거나 인디언 보호구역에 가두어놓는 ‘정착식민주의’(settler colonialism)를 택했다. 미국의 백인 지배세력은 두 인종에 대해 다른 방식의 지배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이 글은 이런 논점들을 염두에 두고 플로이드 항의시위를 계기로 제기된 인종주의 극복의 과제를 ‘체제적’ 관점에서 짚고자 한다. 그 일환으로 아메리카 땅에서 흑인 삶의 조건과 인종주의 문제를 천착한 몇몇 문학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인종주의 극복의 과제를 인종 간 평등과 정의, 시민권과 선거제도 등을 기준으로 사회정치적으로 따져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노예화와 인종적 격리·차별이 개별 흑인들의 구체적인 삶에 어떻게 와닿았는가를 살펴보는 가운데 인종주의의 본질적 면모를 탐구하는 데는 문학 텍스트 논의가 요긴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차원에서 플로이드가 죽어가며 되풀이한 ‘숨을 쉴 수 없어요’라는 말이 노예제 때부터 지금까지 흑인들 대다수에게 절절히 닿는 언어라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이 코로나19와 기후위기 시대에 갖는 특별한 호소력도 상기하게 된다.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었거나 그 때문에 실직한 사람들—흑인들이 인구비례 다수인—에게도 플로이드의 마지막 말은 더없이 아프게 느껴질 것이다. 자본주의 말기로 가면서, 한국을 포함한 세계 곳곳의 노동자들 상당수가 착취당할 뿐 아니라 ‘불완전 고용’(underemployment) 상태에 놓이고 여차하면 ‘폐기처분’되기도 하니, 생존의 위기에 몰린 이들은 제대로 ‘숨을 쉴 수 없’다. 이것이 아마도 이번 플로이드 항의시위에 전지구적으로 다양한 인종이 참여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노예로 산다는 것
플로이드가 죽임을 당하는 장면은 미국 흑인문학, 특히 ‘노예 이야기’(slave narrative)라 불리는 자전적 서사장르의 잔인한 폭력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장르의 고전인 『미국인 노예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삶 이야기』(1845, 이하 더글러스 자서전)4의 여러 폭력 장면 중에서 가장 강렬한 것은 어린 화자가 처음으로 목격하는 채찍질 장면(1장)이다. 더글러스는 유아기 때부터 자신의 주인인 앤서니 선장—그는 그 지역의 최대 농장주이자 노예주인 로이드 대령 농장의 서기이자 총감독이다—의 가족이 사는 로이드 대농장의 외곽에서 외할머니의 손에 컸기 때문에 자신이 일곱살 때 죽은 어머니와는 평생 네댓번 보았을 뿐이다. 아버지가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소문에 의하면 자신의 주인이 바로 아버지라는 것이다. 노예의 생부가 노예주인 경우는 실로 허다했다.5
어린 더글러스는 주인집에 와서 산 이후 새벽녘에 헤스터 이모의 “가슴이 찢어지는 비명”(heart-rending shrieks) 소리에 깨어나곤 했는데, 이모가 채찍질당하는 장면을 이렇게 서술한다.
그[앤서니 선장]는 헤스터 이모에게 채찍질을 시작하기 전에 그녀를 부엌으로 데려가, 목에서 허리까지 발가벗겨 목과 어깨와 등이 완전히 드러나게 했다. (…) 그는 그녀의 양손을 교차시킨 후, 튼튼한 밧줄로 양손을 묶고, 그런 용도로 들보에 설치한 커다란 갈고리 밑의 스툴 의자로 그녀를 끌어갔다. 그는 그녀를 의자에 올라가게 하고 그녀의 손을 갈고리에 묶었다. 그녀는 이제 그의 흉측한 의도에 맞춰 똑바로 섰다. 그녀의 팔은 최대한으로 뻗쳐졌고 그녀는 발가락 끝으로 겨우 섰다. 그러자 그는 그녀에게 “자, 이 **년, 내 명령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주겠어!”라고 말했고, 소매를 걷어붙인 후 무거운 소가죽으로 가격하기 시작했으며, (그녀에게선 가슴 찢어지는 비명이, 그로부턴 무시무시한 욕설이 터져 나오는 와중에) 곧 따뜻하고 붉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너무 무섭고 공포에 질려 옷장 속에 숨었으며, 그 피비린내 나는 일이 끝난 지 한참 지나도록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음 차례는 내가 될 줄 알았다.(42~43면)
이모가 채찍 맞는 이 광경은 선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고 읽기 불편하지만, 노예제의 폭력적 현실을 논하려면 건너뛰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노예제를 포함한 인종주의에는 인종적인 폭력만이 아니라 성적인 폭력도 중요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마도 더글러스가 “내가 뭔가를 기억하는 한 그건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 장면이 인종적이자 성적인 폭력의 현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 광경을 “내가 곧 통과하게 될 노예제라는 지옥의 입구, 피로 얼룩진 관문”이라고 평하는데, 이 표현에서 암시되듯—자신이 채찍질당할 때가 아니라—이모가 채찍질당하는 광경을 최초로 목격한 것이 어린 화자에게는 일종의 노예제 ‘입문’ 경험이었던 것이다.(42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화자 자신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겠다고 하지만, 이 대목에서 ‘노예 됨’의 관건적인 특징 몇가지는 짚을 수 있다.
노예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다른 사람(주인)에게 넘겨주고 그 사람의 처분에 자신의 몸을 맡긴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이 노예 됨의 전제조건이라면 노예화된 몸의 두드러진 특징은 고통과 공포, 그리고 수치, 특히 성적인 수치가 아닐까 싶다. 이 세 요소의 경계가 뚜렷한 것은 아니고, 당사자(이모)와 목격자(더글러스)의 느낌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어린 화자가 “그 광경을 보았을 때의 느낌을 종이에 쓸 수 있으면 좋으련만”(42면)이라고 했듯이 세 요소가 뒤섞이면서 형언하기 힘든 정동을 자아낸다. 그런 가운데 확실하게 감지되는 것은 노예제하에서 절대 권력자인 백인 주인이 흑인 여성 노예를 신체적·정신적으로 최대한 학대하려는 의지를 관철시킨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통과 공포뿐 아니라 성적인 수치심까지 동원한다는 것이다.
플로이드가 짓눌림을 당하는 모습에서 꼼짝없이 채찍질당하는 흑인 노예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은 양자가 엄연히 다른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노예화된 몸의 두드러진 특징인 고통과 공포, 수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경찰은 수갑을 채워 플로이드를 꼼짝 못하게 해놓은 상태에서 땅바닥에 쓰러뜨리고는,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무릎으로 그의 목을 짓눌렀는데, 9분 가까이 계속된 이 동작은 신체적 고통과 죽음의 공포뿐 아니라 한 남자/인간으로서 존엄이 짓밟히는 수치심까지 유발한다. 이 동작은 경찰이 흑인을 제압할 때 애용하는 ‘목 조르기’(chokehold) 관행의 일종이다. 고통, 공포, 수치의 정동에 주목하면 현재의 ‘목 조르기’는 노예제 시대의 채찍질에 해당한다.
앤서니 선장이 잔인한 것은 맞지만 그가 행사한 폭력은 당시 흑인 노예를 대하는 일반적인 관행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더글러스의 두번째 주인 토마스 올드—앤서니 선장의 사위—는 야비하기 짝이 없는 위인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에 오히려 더 잔인해졌다. 그는 어릴 때 화재를 당해 심한 흉터를 지닌 장애인 여성 헤니를 한번에 네댓시간씩 묶어두고 소가죽채찍으로 어깨를 후려쳐 피를 흘리게 했는데, 종종 아침식사 전에 후려치고 가게에 나갔다가 점심 먹으러 집으로 돌아와서 같은 자리를 또 후려치곤 했다. 그러고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라는 성경 구절(누가복음 12 : 47)을 훈계랍시고 인용하곤 했다. 여성이자 장애인에 대한 폭력의 현시인 이 대목은 노예제가 노예 가운데서도 약자에게 더 가혹했음을 일러준다.
이외에도 ‘더글러스 자서전’에는 채찍질 장면이 숱하게 등장한다. 주인뿐 아니라 주인의 농장을 관리하는 농장 감독도 흑인 노예를 길들이고 고된 농장노동을 독려하기 위해 채찍질을 수시로 사용한다. 더글러스도 이런 채찍질에서 면제될 수 없었다. 토마스 올드는 반항기가 있는 더글러스를 악명 높은 ‘검둥이 조련사’(negro-breaker) 코비에게 맡겨 순종적인 노예로 길들이려고 했다. 더글러스는 6개월간의 힘든 노동과 가혹한 채찍질 끝에 자신이 완전히 무너져 노예로 길들여졌음을 깨닫는다. 그러다가 한 사건을 계기로 코비가 그를 단단히 혼내주려고 하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지만 싸우기로 결심한다. 거의 두시간 동안의 싸움 끝에 더글러스는 코비에게서 놓여난다. 이에 대한 더글러스의 서술은 이렇다.
코비씨와의 이 싸움은 노예로서의 내 이력에서 전환점이었다. 이 싸움은 몇개 안 되는 꺼져가던 자유의 불씨에 다시 불을 지폈고 내 속에 있던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되살려놓았다. (…) 나는 그후로도 수년간을 노예로 있었지만, 이 시간부터 다시는 이를테면 제대로 채찍질당하는 일은 없었다. 몇차례 싸움은 했지만 결코 채찍질을 당하지는 않았다.(79면)
정신적인 차원에서 보면, 앞서 인용한 헤스터 이모의 채찍질 장면이 더글러스가 노예제로 들어가는 입구였다면 코비와의 싸움은 노예제로부터 벗어나는 출구였다. 여기서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남자로서의 자존심’이라는 표현이다. 흑인 남자의 남자다움은 백인, 특히 백인 남자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지며 바로 그렇기에 남자 노예를 길들이는 관건은 그의 남자다움 혹은 남성성을 꺾어버리는 것이다. 더글러스가 코비와의 싸움에서 선제공격으로 “양손으로 코비의 목덜미를 세게 움켜잡았다”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코비는 “사시나무처럼 떨었”는데(79면) 그것은 노예인 더글러스가 자신을 공격하니 놀라기도 했겠지만 공격 부위가 하필 숨쉬기를 담당하는 목이라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더글러스는 코비와의 싸움에서 노예 주인이 남자 노예를 굴복시킬 때 취할 법한 동작으로 공격한 것이다. 그의 동작은 최근에 백인 경찰이 흑인 남자들을 제압할 때 사용하는 ‘목 조르기’에 가깝다.
더글러스가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계기는 코비와의 싸움이 결정적이지만 그가 일고여덟살 무렵에 볼티모어에 가서 휴 올드—주인 사위의 동생—의 가족과 함께 살면서 휴의 부인 소피아로부터 글을 배운 일도 빠뜨릴 수 없다. 이때의 경험에서 부각되는 것은 서로 연관된 두가지다. 하나는 선량한 소피아가 노예를 갖게 됨으로써 보여주는 변화, 다른 하나는 더글러스가 글을 배우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중요한 깨달음이다. 소피아를 처음 만났을 때, 더글러스는 다정한 감정으로 함박 미소를 짓는 백인의 얼굴을 처음 보고 “영혼을 관통하는 황홀”을 느꼈다. 그만큼 “새롭고도 낯선 광경”이었는데(56면) 그것은 노예제의 영향을 받지 않은 그녀가 처음에는 더글러스를 노예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글러스가 온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서 소피아가 그에게 글자를 가르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알아차린 남편은 “노예에게 글 읽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위험할뿐더러 불법”이라고 하면서 글공부를 중단시키고 아내에게 강력한 주의를 준다.
“검둥이한테 한치를 주면 한자를 달라고 해. 검둥이는 오로지 자기 주인에게 복종하는 법—시키는 대로 하는 것—만 알아야 하거든. 배움은 이 세상에서 최상의 검둥이도 망칠 거야”라고 그가 말했다. “당신이 저 검둥이(나를 말함)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면 저 애를 붙잡아둘 길이 없어. 쟤는 노예가 되기는 영영 틀린 거야. 다루기 힘들게 되는 동시에 주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게 돼(…).”(57면, 강조는 저자)
휴 올드의 이 말이 의도와는 정반대로 더글러스에게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 그가 여태껏 이해하려고 버둥거려보았지만 성공하지 못한 난제, 즉 “흑인을 노예화하는 백인의 힘”(58면)의 신비를 알아차린 것이다. 더글러스는 흑백 인종 간의 관계를 도덕적 올바름의 차원과 별개로 권력관계로 파악하여 백인이 흑인을 노예화하는 힘 자체는 대단한 ‘성취’로 평가한다. 그는 휴 올드가 우려한 바로 그 행로—문자를 깨치고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지적 능력을 갖추는 것—로 나아감으로써 “노예제로부터 자유로 가는 길”(58면)을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한편 소피아는 친절한 태도와 선량한 마음씨를 지녔지만 남편의 지적을 받고는 더글러스의 감시자가 된다. 2년간 함께 지내는 동안 휴는 알코올에, 소피아는 노예제에 서서히 찌들어가 더글러스가 그의 집을 떠날 때는 그들에 대한 미련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휴와 소피아 부부는 청년이 되어 다시 볼티모어로 돌아온 더글러스를 반갑게 맞아들인다. 휴는 더글러스에게 조선소에서 선박 방수 일을 익히게 하여 그가 받은 임금을 가로챌 수 있다는 데 흡족해한다. 더글러스는 휴의 속내를 간파하고는 자신이 벌어줄 돈과 행동의 자유를 놓고 협상을 벌이기도 하는데, 그가 마침내 북부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협상을 통해 휴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더글러스가 휴 -소피아 부부와의 관계를 통해 배운 것은 문자뿐 아니라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을 버는 것의 중요성이고, 노예제가 영구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백인과 흑인의 권력관계—그리고 협상력—를 통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들 부부는 백인 중산층 자유주의자의 자질과 성향을 미리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눈여겨볼 만하다.
자본주의 풍요 속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
더글러스는 북부로 도망하여 개인적으로 자유를 찾았고, 미국 흑인들은 1863년 노예해방선언으로 노예제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미국의 인종주의가 종식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노예해방으로부터 13년 동안 남부 주들에서 노예제와 인종격리를 철폐하고, 흑인 시민권을 확립하려는 ‘재건’(Reconstruction)이 추진되었지만 곧 거기에 반발하여 인종격리를 법제화하고 흑인의 투표권을 제한하는 ‘짐 크로우 법’이 제정·시행됨으로써 흑인들은 “노예제 쪽으로 다시”6 밀어붙여졌다. 짐 크로우 법은 1954년 공립학교에서의 인종격리가 위헌이라는 대법원 판결 이후 해체되기 시작해 1960년대 시민권운동을 통해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동안 북부의 흑인은 어땠을까? 산업화시대 남부의 짐 크로우 법을 피해 북부로 대거 이주한 흑인들은 풍요롭고 자유로운 도시의 풍경을 목격했으나 정작 그들에게는 그런 풍요와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리처드 라이트(Richard Wright)의 『미국의 아들』(Native Son, 1940, 1991)7은 자본주의의 풍요 속에서 백인들과는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1930년대 시카고의 한 흑인 청년, 비거 토마스(Bigger Thomas)의 격정적인 삶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비거가 운전수로 자신을 고용한 주인집 딸을 베개로 짓눌러 죽이는 사건이 놓여 있다. 이 살해 장면에서 ‘숨을 쉴 수 없어’서 죽는 쪽은 흑인 남자가 아니라 백인 여자지만, 죽인 자에게 가해자 못지않게 피해자의 측면이 있다는 데 아이러니가 있다. 이 중심사건이 지닌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자면 비거라는 인물이 어떤 존재인지부터 감지할 필요가 있다.
비거가 친구 거스와 나누는 다음 대화는 그들의 상태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 비거가 거스에게 백인들이 사는 곳을 묻자 거스는 백인거주지역 쪽을 가리킨다. 당시 시카고는 흑인과 백인의 거주지역이 분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비거는 거스의 대답이 틀렸다고 하면서, 자신의 명치께를 치고는 “바로 여기 내 뱃속에” 산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백인들 생각만 하면, 여기서 그놈들이 느껴져.” 비거가 말했다.
“알아. 그리고 가슴에서도 목구멍에서도.” 거스가 말했다.
“꼭 불덩이 같아.”
“그리고 어떨 때는 숨 쉬기도 힘들고……”
허공을 응시하는 비거의 눈은 크고 담담했다.
“바로 그럴 때, 엄청난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비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냐,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게 아니라, 마치…… 마치 내가 뭔가를 어쩔 수 없이 저지를 것만 같은 거야……”(38면)
이 대목에서 비거에게는 더글러스와 구분되는 특징들이 발견된다. 하나는 백인의 존재가 자신의 내부에 들어와 박혀 이미 몸으로 느껴진다는 것, 그리고 그에 따라 바깥 백인에 대한 두려움 못지않게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 두려움이 크다는 점이다.8 또 하나는 이런 상황에서 거스가 ‘숨 쉬기 힘들어’(can’t hardly breathe)하면서도 두려움을 견디는 쪽이라면 비거는 자기 안팎의 두려움에 대해 분노와 폭력으로 대응하는 쪽인 것이다. 그는 흑인차별적인 현실을 그러려니 하면서 체념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누가 목구멍 속으로 시뻘겋게 달군 인두를 쑥 집어넣는 느낌이야. (…) 우리는 여기 살고 그놈들은 저기 살아. 우리는 검고 그놈들은 희고. 그놈들한텐 이것저것 없는 게 없지만 우린 아냐. 그놈들은 뭔가 해내지만 우린 못해. 이거야 꼭 감옥살이지. 세상 밖에서 울타리에 뚫린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 때가 태반이야……”(35~36면)
지적이고 신실한 더글러스와 대조를 이루는 비거의 이런 반란자적인 면모는 ‘더글러스 자서전’에는 노예제를 매개로 나타났던 자본주의체제가 『미국의 아들』에서 본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한 것과 관련이 있다. 라이트는 이 소설의 ‘서문’으로 덧붙인 「‘비거’는 어떻게 태어났는가」에서 “눈물의 위안 없이 직시해야 할 만큼 냉엄하고 깊은 책을 쓰”고자(635면) 했다고 밝혔는데, 그러자면 인종적 억압체계를 장착한 자본주의‘체제’에 뼛속까지 저항하는 인물이 필요했다. 사실 라이트는 비거를 모든 억압적 체제에 생래적으로 저항하는 존재들의 통칭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비거의 이런 이중적인 두려움과 분노, 폭력은 백만장자 돌턴씨의 대학생 딸 메리를 죽이는 장면에서 정점에 달하지만, 그전부터 전조가 나타난다. 단칸방에 세 들어 사는 비거의 가족(비거와 비거의 어머니, 남동생과 여동생)이 쥐를 잡는 첫 장면과, 친구들에게 백인 가게를 털자고 부추겼다가 그에 따른 두려움을 못 견뎌 거스한테 싸움을 걸어 강도 계획을 망쳐버리는 당구장 장면 등에서 두려움과 분노를 오가면서 폭력적으로 변하는 비거의 이런 특질이 드러나는 것이다. 비거의 실제적인 삶을 핍진하게 묘사하는 이 사실적인 장면들은 흑인의 존재적 조건과 불안한 심리를 압축하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문제의 장면 역시 그렇다.
비거가 메리를 죽이게 된 것은 일견 우발적인 사건으로 보인다. 비거는 돌턴가(家)에 운전수로 고용된 날 메리를 대학교에 데려다주기로 되어 있었지만 메리는 학교에 가지 않고 남자친구인 공산주의자 잰과 만난다. 백인인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비거에게 얼마나 고역인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들은 자신들이 평소 해보고 싶었던 대로 비거를 이끌고 흑인지역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헤어졌고, 비거는 만취한 메리를 부축해서 그녀의 침실까지 어렵사리 데려간다. 자신에게 완전히 몸을 맡긴 메리에게 자극된 비거는 그녀에게 키스를 하는데, 문간에 유령처럼 나타난 돌턴 부인이 “메리!”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눈이 보이지 않는 돌턴 부인이 심상치 않은 기색을 감지하고 점점 침대가로 다가오자 공포에 질린 비거는 메리가 기척을 못 내도록 베개로 그녀의 머리를 덮고 내리누른다.
메리가 웅얼대며 다시 일어나려 했다. 그는 미친 듯이 베개 모서리를 잡아 그녀의 입술에 갖다댔다. 웅얼대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들킬 것이다. 돌턴 부인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오고, 그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몸이 팽팽해졌다. 메리의 손톱이 그의 손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그는 베개를 들고 그녀의 얼굴 전부를 꽉 덮었다. 메리의 몸이 위로 솟구치고, 그는 그녀가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는 바람에 들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일념에 온 힘을 다해 베개를 눌렀다.(127면)
비거는 버둥거리는 메리를 베개로 짓눌러 결국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데, 그는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돌턴 부인에게 발각되면 끝장이라는 다급한 생각이 공포를 부른 것이겠지만,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쳐다보는 돌턴 부인의 희끗한 형체 자체가 더 큰 공포였다. 나중에 비거가 메리의 시신을 지하실 난방로에 집어넣을 때 돌턴 집의 ‘하얀 고양이’(케이트)가 마치 포우(Edgar Poe)의 ‘검은 고양이’처럼 섬뜩하게 지켜볼 때도 이런 공포가 강조된다.9
돌턴 가족의 면면을 고려하면 이 장면은 더 의미심장하다. 아빠를 “자본가 양반”(Mr. Capitalist)이라고 부르고 비거에게 “노조에 가입했나요?”라고 묻는 메리는 급진적인 언사에도 불구하고 순진한 인물이다. 메리는 마치 소피아가 처음 더글러스를 대할 때처럼 비거를 순수하게 대한다. “그녀는 마치 그가 인간인 것처럼, 자기와 같은 세계에 사는 존재인 것처럼 대했”는데, 비거는 이에 놀라면서도 “그녀가 백인이며 부자라는, 그에게 무엇은 해도 되고 무엇은 안된다고 명령하는 그런 사람들 세계에 속하는 인물이라는 엄연한 사실이 뒤얽혀 마음이 혼란스러웠다.”(99면) 사실 메리와 잰이 비거를 친구로 대하려 할수록 비거는 ‘자신의 검은 피부’와 그 위에 부착된 ‘수치의 표지’를 강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흑인성과 그 속에 박힌 열등감을 의식하는 비거에 비해 메리와 잰은 마치 인종주의에서 벗어나 있는 양 인종적 경계를 헤집고 다닌다.
하지만 이들의 그런 자유로운 언행은 비거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라기보다 흑인의 장소와 언어, 신체를 자유롭게 취할 수 있는 백인의 특권을 누리는 것에 가깝다. 이들은 차 앞좌석에 비거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밀착해서 앉음으로써 비거로 하여금 “우뚝 선 거대한 두개의 흰 벽 사이에 앉아 있”(102면)는 느낌을 준다. 백인 여자와 그렇게 가까이 앉아본 적이 없는 비거로서는 그녀의 몸을 강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함께 들어가고 싶지 않은 ‘어니네 밥집’—흑인들이 가는 식당—에 비거를 억지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도 그렇다. 물론 거기에는 비거를 ‘검둥이’ 운전수처럼 식당 바깥에 대기하도록 하지 않겠다는 배려의 측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술 취한 후에는 둘이 차 뒷좌석에서 진한 스킨십을 버젓이 나눔으로써 비거를 정확히 ‘검둥이’ 운전수로 취급한다. 이처럼 이들은 인종주의가 체질화되어 있는 탓에 의식되지도 않는 ‘맹점’(blind spot)을 드러낸다.
인종주의적 관계에서 흑인은 백인의 막강한 권력에 짓눌려 자신이 처한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다면, 백인은 흑인이 온몸으로 느끼고 인지하는 현실을 자신은 느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잰과 메리의 경우에서 보듯 이런 인종주의적 권력관계에서 생기는 맹점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돌턴 부부는 더더욱 그렇다. 돌턴 부인은 비거의 전임자 그린에게 그랬듯 흑인에게 교육의 기회를 권장하고 진정으로 흑인을 도우려는 인물이며, 돌턴씨도 전국유색인향상협회(NAACP)의 후원자이자 유색인 학교에 오백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돌턴씨는 비거의 셋집이 속해 있는 싸우드사이드 부동산회사의 소유주이다. 돌턴 부부는 자본주의체제의 기득권자로서 권력자인데, 이 경우 인종 문제에서의 그들의 선행과 진보적 입장은 권력관계에서 비롯되는 맹점을 더 확장하여 자기기만 속에 굳어지게 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10 이를테면 ‘맹점’이 ‘눈멂’으로 전화할 수 있는데, 이 지점에서 돌턴 부인의 유령성과 눈멂이 상징적인 차원에서는 인종주의/자본주의체제의 파놉티콘적 현전으로 작동하는 면이 있다. 체제의 감시자가 거기 있건 없건 피감시자는 항상 감시 아래에 놓이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사건은 우발적이지만,11 갑작스러운 돌턴 부인의 출현으로 비거의 의식·무의식에 가해지는 체제적 인종주의의 압력까지 감안하면 필연적이기도 하다. 물론 이 상황에서도 비거가 아닌 거스라면 살인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거스라면 메리의 숨을 막는 대신 자신이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것이며, 현장에서 발각되어 ‘백인 여성을 탐한(강간한) 흑인 남자’로 가혹한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파농이 “마침내 비거는 행동한다. 자신의 긴장을 끝내기 위해 그는 행동하고, 세상의 기대에 반응한다”12라고 비거의 폭력적 행위를 높이 평가한 것은 식민화된 인종주의에 격렬하게 저항할 때만 혁명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비거 자신도 자신의 살인행위를 실수라고 변명하거나 그의 진보주의 변호사 맥스처럼 사회적 모순의 결과라는 식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경찰에 체포되어 구치소에 갇힌 비거는 “내가 살인까지 하게 만든 것, 그게 바로 나입니다!”라고 자신의 행위를 긍정한다. 또한 “살인할 만큼 절실한 느낌이 들기 전까지는, 전 제가 이 세상에 정말 살아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라고 토로한다.(603면) 살인행위에서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꼈다는 비거의 이 도발적인 증언은 ‘미국의 꿈’에 부풀어 있던 풍요의 나라에서 ‘악몽’ 같은 삶을 버텨내야 했던 사람의 육성으로서, 거기에는 시민권적 요구뿐 아니라 온전한 삶에 대한 욕구와 변혁적 열망까지 깃들어 있다. 사실 라이트는 비거를 참된 모습으로 형상화하는 일이 “정치적, 인종적 권리보다 더 깊고 절박한 권리, 즉 인간적 권리, 정직하게 생각하고 느낄 권리가 걸린 문제”(628면)라고 생각했다.
라이트가 비거를 통해 도달한 이 지점은 1960년대 흑인운동이 성취한 최상의 통찰을 앞질러 쟁취한 듯하다. 가령 킹 목사가 미국 민주주의를 위해 극복해야 할 것으로 “인종주의, 극단적인 물질주의, 그리고 군사주의라는 거대한 세쌍둥이”를 거론한 것13이나 인종주의와 자본주의가 쌍생아—“인종주의 없이는 자본주의를 가질 수 없는 것”—라는 말콤 X의 인식14은 체제적 인종주의 극복이 시민권 차원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한 것이다. 흑인민족주의 회교단체 ‘이슬람 국가’(Nation of Islam)에서 탈퇴한 말콤 X가 시민권운동 지도자와 협업할 뜻을 밝히면서 ‘시민권’(civil rights) 대신 ‘인권’(human rights)에 초점을 맞추자고 제안한 것도 그 때문이다.
2,200만 미국 흑인의 공동의 목표는 인간존재로서의 존엄이다. (…) 미국에서 우리의 인권이 먼저 회복되어야 비로소 시민권을 가질 수 있다. 거기에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먼저 인정받아야 시민으로서 인정받을 것이다. (…) 남아프리카와 앙골라에서 우리 형제자매의 인권 침해가 국제적인 이슈이고 그래서 남아프리카와 뽀르뚜갈의 인종주의자들이 유엔의 모든 독립적인 정부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듯이, 2,200만 미국 흑인의 비참한 곤경이 인권의 수준으로 제고되면 그땐 우리의 투쟁이 국제적인 이슈가 되고 모든 문명화된 정부의 직접적인 관심사가 된다.15
BLM 운동과 미국 민주주의의 미래
1960년대 흑인시민권운동은 체제적 인종주의를 근절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지만, 노예해방 이래 뿌리내린 짐 크로우 법을 폐지함으로써 흑인운동사의 큰 진전을 이루었다. 그로부터 50여년,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촉발된 BLM 주도의 인종차별 항의시위와 흑인생명운동은 체제적 인종주의와의 싸움에서 또 한번의 획기적인 진전을 이뤄낸 것으로 보인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 미국 안팎으로 최대 지역적 분포, 흑인뿐 아니라 백인을 비롯한 다양한 인종의 참여 등에서 기대를 모으기에 충분했다.16
현재진행형인 BLM 주도의 인종차별 항의운동이 향후 어떤 결과를 낳을지 단언하기 힘들지만, 분명한 것은 이 운동의 향방에 인종주의 철폐뿐 아니라 미국 민주주의의 많은 과제가 걸려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바이러스 국면을 통과하면서 세계 제일 강국인 미국이 인종차별 문제뿐 아니라 코로나 방역에서도 ‘실패한 국가’(failed state)임이 확연히 드러나고17 보니, 이 운동이 과연 그런 ‘실패한 국가’를 구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묻게 된다.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할 능력이 없는 필자로서는 이번 항의운동을 60년대 시민권운동과 비교함으로써 이 문제들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번 플로이드 항의운동은 1950~60년대 시민권운동과 흑인권력운동(Black Power Movement)의 유산을 계승하되 새로운 양식의 인종주의에 대응하는 새로운 방식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양식의 인종주의’와 관련된 중요한 담론은 크게 세가지다. 하나는 1970년대 이래 ‘마약과의 전쟁’ 등으로 말미암은 ‘대량투옥’(mass incarceration)과 이를 뒷받침하는 형사법·형벌 제도, 그리고 흑인을 하층계급(undercaste)화하는 ‘인종적 카스트제도’(racial caste system)에 주목하고 이런 현상에 ‘새로운 짐 크로우’라는 이름을 붙인 미셸 알렉산더의 연구18가 있다. 현재 미국 인구는 세계 인구의 5퍼센트인데 교도소 수용인원은 전세계의 25퍼센트가량을 차지하고 그중 흑인 비율은 백인의 6배에 달한다.19 게다가 재소자 흑인 중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흑인 남자들은 출소 후에도 낙인효과 때문에 취업을 비롯한 여타 사회활동에서 배제되는 동시에 ‘범죄자’라는 이미지를 떼어버릴 수가 없다.
또 하나는 새로운 양식의 인종주의에 주목하되 그것을 노예제의 연장으로 보는 시각이다. 가령 미셸 알렉산더도 출연한 에바 두버네이(Ava DuVernay) 감독의 다큐멘터리 「수정헌법 13조」(13th, 2016)는 미국에서 수정헌법 13조가 통과됨으로써 노예제가 공식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13조 1항의 단서 “판결로서 확정된 형벌일 경우를 제외하면”이라는 예외조항을 악용해 강제노역과 노예제가 양식을 바꿔가며 계속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레이건의 ‘마약과의 전쟁’ 이후 폭증한 ‘대량투옥’과 교도소의 민영화에 따른 ‘범산복합체’(prison-industrial complex), 그리고 강제적인 ‘교도소 노동’(prison labor) 등은 그 양상은 바뀌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노예제’라는 것이다.
끝으로 로렌조 베라찌니(Lorenzo Veracini)를 비롯한 ‘정착식민주의’론의 관점이 있다. 베라찌니는 흑인들이 ‘대량투옥’되는 오늘날의 미국 교정시설들을 아메리카 원주민 보호구역과 유사한 흑인 보호구역 혹은 수용소로 본다. 그는 흑인들을 대거 교도소에 가둬두는 것은 두버네이의 ‘노예제’ 관점과는 달리 강제노역을 통한 착취가 주된 목적이 아니라 ‘정착식민주의’의 특징인 ‘재생산 없는 축적’에 동반되는 ‘봉쇄와 제거’(containment and elimination)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의 글을 논평하는 다음 대목은 그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
이 ‘국가’의 결정적인 특징은 이 국가가 과거에 한때 그랬던 것처럼 불평등한 관계의 유지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국가는 이제 그런 관계의 단절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 국가(즉 미국)는 더이상 식민주의 국가(예컨대 일종의 내부 식민지를 감독하는 국가)가 아니라, 정착식민지 국가인 것이다. 물론 미국은 언제나 정착식민지 국가였지만 일차적으로 그리고 건국할 때부터 원주민들에 대해서 그랬던 것이다. 이제 미국은 다른 구성원들과의 관계들을 단절하는 것도 노리고 있으며 흑인들을 점점 더 아메리카인디언들처럼 취급하고 있다.(강조는 저자)20
이번 항의운동을 주도한 BLM과 BLM이 소속된 연합운동체 M4BL이 이 세가지 관점 중에 어느 쪽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흑백 간의 평등이나 시민권보다는 흑인생명의 수호를 전면에 내걸고 있다는 점에서는 흑인들이 ‘봉쇄되거나 제거되는’ 측면을 강조하는 정착식민주의 논리와 가장 잘 맞아떨어진다. 베라찌니도 “마침내 우리는 흑인 생명이 소중한지 아니면 흑인 생명이 물질(matter)인지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21라고 BLM의 명칭을 정착식민주의의 논지에 맞게 재해석한다. 플로이드의 죽음 장면은 짐 크로우 시대의 흑인보다 노예의 모습을 방불케 하지만, 따지고 보면 재산인 까닭에 죽이지는 않았던 노예와 달리 최근의 흑인들은 너무 빈번하게 죽임을 당한다. 그것도 ‘물질’인 것처럼 ‘폐기처분’되는 방식으로!
이렇게 보면 ‘제거의 논리’를 내장한 새로운 양식의 인종주의 앞에서 이전 세대 흑인운동처럼 ‘평등’의 요구가 아닌 ‘생명’의 돌봄으로 대응하는 BLM의 방식은 적절할뿐더러 불가피한 것 같다.22 이때 ‘생명’은 단지 ‘생존’의 차원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생존’의 차원으로 내몰리기를 거부하는 저항적 행위이다. BLM의 창립자 중 한명인 앨리시아 가자(Alicia Garza)는 ‘왜 흑인 생명은 소중한가’라는 연설23에서 흑인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미국의 현실에 적응하기보다 당당하게 맞서 싸우겠다는 패기를 보여준다. 더글러스의 글을 인용하면서 ‘정책의 변화’가 아니라 ‘저항’만이 현재의 인종적 질서를 바꿔놓을 수 있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현재 교도소에 갇혀 있는 비거의 수많은 후예들이 BLM의 더글러스 후예들과 만나서 큰일을 낼 것 같은 기대를 갖게 된다.
BLM 운동이 그간 성취한 것도 적잖다. 질식사를 유발하는 ‘목 조르기’ 관행을 폐지시키고 ‘경찰예산 철회’(Defund the Police)와 코로나바이러스 기간 동안의 ‘집세 철회’(Cancel the Rent)를 구체적인 요구안으로 제시한 것도 생명 돌봄의 일환이자 풀뿌리운동다운 성격을 일러준다. 교도소 폐지와 이민정책 개혁도 흑인 및 소수민족의 당사자성에 입각한 생명 돌봄 요구의 일환이라 하겠다. 또한 젠더, 트랜스젠더, LGBTQ 등 페미니즘과 퀴어운동에 적극적이며, SNS 활동을 통한 대중과의 소통에도 능하다. BLM 주도의 항의운동이 노예제/식민주의 위인들의 동상을 대거 철거하고 미시시피 주기(州旗)에서 남부연합의 깃발을 금지한 것도 획기적인 ‘역사 다시쓰기’로 평가할 만하다. 그중에서도 BLM 운동의 무엇보다 큰 공로는 지금 우리가 어떤 가혹한 양식의 인종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지를 일깨워준 점이 아닐까 싶다.
우려되는 바도 없지는 않다. 가령 이번 인종차별 항의운동이 미국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지만, 미국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고 11월 3일 대통령선거를 앞둔 상태에서 큰 시야로 향후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체제적 인종주의를 극복하는 일과 미국 민주주의를 새롭게 재건하는 일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변혁을 요구할 터인데, 이런 큰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킹 목사와 말콤 X처럼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인종주의 외에도 물질주의와 군사주의에 찌든 미국문명 자체까지 고심하는 경우는 드물다.24 하지만 BLM 운동 이후 미국의 수많은 소도시에서 백인 주민들이 유례없이 침묵을 깨고 흑인 주민들에게 다가와 말을 걸거나 BLM 지지 집회 및 토론회에 참여하는 모습에서 작지만 소중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절감한다. 인종주의 극복의 길이 험난하고 요원하더라도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감과 작은 변화를 밑바탕으로 삼아 나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 밑바탕은 지금 넓어지고 단단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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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4일 『데일리메일』(Daily Mail) 웹사이트에 공개된 경찰의 보디캠 영상에서 경찰관이 처음 총을 들이대는 순간부터 플로이드는 연신 “쏘지 마세요, 제발요”라고 애걸한다. https://www.dailymail.co.uk/news/article-8576371/Police-bodycam-footage-shows-moment-moment-arrest-George-Floyd-time.html 참조. ↩
- 오바마 정부 때 유행한 ‘탈인종 시대’(post-racial period)나 ‘인종불문주의’(colorblindness) 담론은 백인 경찰의 잇따른 흑인 살해사건들을 통해 기만적인 이데올로기임이 드러났다. 2012년 흑인 청년 마틴(T. Martin)이 백인 자경단 지머만(G. Zimmerman)의 총에 죽었고, 2014년 에릭 가너(Eric Garner)는 ‘개비 담배’ 불법판매 혐의로 경찰에게 목졸림을 당해 죽었다. 그는 “숨을 쉴 수 없다”는 말을 열한차례 되풀이했다. 브라운(M. Brown)은 백인 경찰 윌슨(D. Wilson)에게 여섯발의 총을 맞고 죽었으나, 윌슨은 기소중지로 풀려났다. 이에 대한 흑인들의 분노로 ‘퍼거슨 소요’(Ferguson Unrest)가 일어났다. BLM은 지머만의 기소중지 결정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M4BL은 퍼거슨 소요 동안 각각 결성되었다. ↩
- 노예해방에 대한 백래시(backlash)로 남부 대부분 지역에서 1880년대에 제정된 인종격리·차별의 법과 관행을 뜻함. ↩
- David W. Blight, ed. Narrative of the Life of Frederick Douglass, an American Slave, Written by Himself, Bedford Books 1993. 앞으로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를 밝힘. 그밖의 대표적인 ‘도망노예 이야기’로는 Solomon Northup, Twelve Years a Slave, 1855 (Steve McQueen의 동명의 영화 2013); Harriet Jacobs, Incidents in the Life of a Slave Girl, 1861 참조. ↩
- 더글러스는 백인 농장주들이 그렇게 해서 성적 욕망을 채우는 동시에 이익을 늘려나갔다고 꼬집는다.(1장) 포크너(W. Faulkner)의 중편 「곰」(The Bear, 1942)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곰」의 화자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흑인 여자노예를 범해서 낳은 딸을 또다시 범해서 자식을 낳는 패륜적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유산 상속을 포기한다. ↩
- W. E. B. Du Bois, Black Reconstruction,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2006, 27면. ↩
- 이 작품의 인용은 김영희 옮김 『미국의 아들』 개정판(창비 2012)에 따르고 본문에 면수만 밝힌다. 리처드 라이트와 이 소설에 대한 논의로는 김종철 「리처드 라이트와 제3세계 문학의 가능성」, 『大地의 상상력』(녹색평론사 2019) 및 김영희 「리처드 라이트」, 영미문학연구회 엮음 『영미문학의 길잡이 2』(창작과비평사 2001) 참조. ↩
- 이 점은 프란츠 파농이 명료하게 지적한 바 있다. “비거 토마스, 그는 두려워한다, 끔찍하게 두려워한다. 두려워하는데, 대체 뭘 두려워하는 걸까? 바로 그 자신이다.”(“It is Bigger Thomas—he is afraid, he is terribly afraid. He is afraid, but of what is he afraid? Of himself.”) Frantz Fanon, White Skin, Black Masks, tr. Charles Lam Markmann, London: Pluto Press 1967, 107면. ↩
- 「‘비거’는 어떻게 태어났는가」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만일 포우가 살아 있다면, 공포를 발명해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공포가 그를 발명해낼 것이다.”(645면) ↩
-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작품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중편 「베니또 세레노」(Benito Cereno, 1854)다.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아마사 델라노(Amasa Delano) 선장은 자신이 방문한 노예선에서 바보(Babo)가 주동하는 선상반란을 막판까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바보의 지휘하에 노예들이 선원들을 포로로 삼은 채 델라노의 맹점을 노려 흑인 노예의 특징적인 행동을 때맞춰 시연함으로써 그의 합리적인 의심을 해체한다. 하지만 델라노 선장의 자기기만과 허위의식에도 불구하고 결국 반란자들은 제압된다. ↩
- “이 우발성이야말로 비거 토마스가 한 사람의 흑인으로서 자신의 내부에 끊임없이 쌓아온 신경증적 긴장, 공포, 균형의 상실이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를 단적으로 알려준다.” 김종철, 앞의 책 302면. ↩
- Frantz Fanon, 앞의 책 107면. ↩
- Martin Luther King Jr, “A Time To Break Silence,” A Testament of Hope : The Essential Writings of Martin Luther King Jr, Harper & Row Publishers 1986, 240면. ↩
- Malcolm X, speech at the founding rally of the Organization of Afro-American Unity, New York, 1964.6. 28. (http://malcolmxfiles.blogspot.com/2013/07/oaau-founding-rally-june-28-1964.html) ↩
- Malcolm X, “Racism: The Cancer That Is Destroying America,” The Egyptian Gazette, 1964.8. 25. (https://malcolmxfiles.blogspot.com/2015/09/racism-cancer-that-is-destroying.html) ↩
- 시위 시작 후 몇주 동안 1,500만~2,600만명이, 시위가 정점에 달한 6월 6일에는 하루 동안 미국 전역 550곳에서 총 50만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여자 중 백인 비율이 50~75퍼센트로 나타났다. “Black Lives Matter May Be the Largest Movement in U.S. History,” The New York Times, 2020.7. 3. ↩
- George Packer, “We Are Living in a Failed State: The coronavirus didn’t break America. It revealed what was already broken,” The Atlantic, 2020. 6. ↩
- Michelle Alexander, The New Jim Crow : Mass Incarceration in the Age of Colorblindness, Revised Edition, The New Press 2011. ↩
- Keeanga-Yamahtta Taylor, From #BlackLivesMatter to Black Liberation, Haymarket Books 2016, 11면 참조. ↩
- Lorenzo Veracini, “Containment, Elimination, Endogeneity: Settler Colonialism in the Global Present,” Rethinking Marxism, 2019.4, 131면. ↩
- Lorenzo Veracini, 앞의 글 132면. “In the end, one is faced with a choice: either black lives matter or they are matter”. ↩
- 이런 변화는 흑인운동권에서 확실한 세대교체가 이뤄졌음을 시사하는데, 평등에서 생명으로의 초점 이동이 BLM의 창립자 및 주도적인 활동가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
- Alicia Garza, “Why Black Lives Matter,” 2016.3.18. (http://opentranscripts.org/transcript/why-black-lives-matter) ↩
- ‘미국문명의 극복’과 ‘새로운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백낙청의 최근 저서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창비 2020) 참조. 특히 새로운 미국문명을 싹틔우기 위해서는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으로 거듭나는 것이 관건임을 강조하는 제4장 「『쓴트모어』의 사유모험과 소설적 성취」와 ‘평균적인 것’과 평등주의에 바탕한 미국식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모색하는 제10장 「로런스의 민주주의론」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