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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루이스 세풀베다 『역사의 끝까지』, 열린책들 2020

행동의 끝, 역사의 의미를 묻는 방법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myosu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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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아옌데 혁명이 좌절된 뒤 볼리비아, 니까라과 등 라틴아메리카 해방투쟁의 전선에서 싸우다 유럽으로 망명한 ‘혁명전사’ 후안 벨몬테는 이념과 혁명이 구문이 된 세상에서 그의 이력과 능력을 탈/신냉전 정보전쟁 시대의 수단으로 제공하며 연명한다. 그가 동독 슈타지 출신의 국제적 모사꾼에게 돈의 댓가로 지불한 것에는 구소련 군사학교에서 배양한 뛰어난 저격수의 능력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퇴역 혁명전사’의 구차하고 굴욕적인 전업에서도 물러난 뒤 지금 조국 칠레 남부의 해안가로 돌아와 삐노체뜨 군부 ‘추악한 전쟁’의 희생자인 연인 베로니카를 돌보며 ‘인생의 끝’을 준비하고 있다.

2016년에 나온 루이스 쎄뿔베다(Luis Sepúlveda, 1949~2020)의 장편 『역사의 끝까지』(El fin de la Historia, 엄지영 옮김)는 전작 『귀향』(1994) 『우리였던 그림자』(2009)에 이어지는 연작 성격의 작품으로 보이며, ‘혁명의 끝’ 이후를 사는 직업적 전사들의 삶을 독특한 누아르식 스릴러 서사의 문법으로 그려나간다. 작가의 이름을 크게 알린 『연애 소설 읽는 노인』(1989)에서 알 수 있듯, 쎄뿔베다는 역사나 이념, 혹은 생태 같은 주제의 무거움을 잊지는 않되 그것들이 이야기 안에서 풀어지고 가벼워지고 좀더 자유롭게 움직이기를 원하는 것 같다. 문학적 엄숙주의는 가급적 그의 이야기가 벗어나고픈 낡은 압력인 듯하며, 그 점에서는 중남미 문학의 휘황한 자산이라 할 수 있는 ‘마술적 리얼리즘’조차 소수의 고급한 문학적 취향일 수 있다. 그는 좀더 대중적이고 편한 이야기의 문법을 통해서도 그 자신의 실존적 굴레이기도 했던 ‘역사/역사 이후’라는 고압적이고 관념적인 이분법을 비껴나 활달하고 창의적인 이야기의 공간을 창출해낼 수 있다고 믿는 작가인 듯하다.

‘우리였던 그림자’라는 전작의 제목이 명확히 가리키고 있는 대로, 『역사의 끝까지』의 인물들을 끝까지 따라다니는 바로 그 ‘과거의 그림자’는 떨쳐지거나 제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작가는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림자의 무게를 다루는 방식은 과거로부터 돌발적으로(사실은 필연적으로) 도착한 사건이 일으키는 파장을 서사적으로 흥미롭게 엮고 따라가는 데 강조점이 있으며, 그 과정에서 비정한 배경으로 화한 역사와 세계의 무대에서 인간 행동의 소극과 비극을 뒤섞어 보여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역사철학적 이념’을 지탱할 만한 역사의 공간이 남아 있는지는 별개의 질문으로 하더라도, 작가는 그런 여지의 탐구에 침묵하는 방식으로 물화된 세계에 구속된 인간 행동에 집중한다. 이 서늘한 단념은 그의 소설의 한계이면서, 그의 소설을 더 많은 사람이 읽게 만드는 힘이기도 한 것 같다.

『역사의 끝까지』는 그러므로 역사철학적 이념의 끝이 아니라 행동의 끝에서 혁명전사들의 시간을 마무리하는 길을 택한다. 꿈꿀 능력을 잃은 혁명전사에게 남은 것은 전투 기계의 기억을 담지하고 있는 늙은 몸과 소진되지 않은 복수의 정념이다. 2010년을 배경으로 쎄뿔베다는 푸틴의 러시아 정부가 칠레에서 벌이는 국제적 음모의 현장에서 옛 혁명동지들을 마주치게 한다. 후안 벨몬테는 과거의 그림자로부터 소환을 받고 음모전에 말려든다. 이 첩보 스릴러 서사에는 동독 슈타지 출신의 모사꾼 에이전트와 러시아 신흥 재벌이 된 전직 소비에트 군사학교 교관이 등장하고, 러시아 혁명기부터 이어져온 ‘카자흐인’들의 기구한 역사가 교직된다. 볼셰비끼혁명에 반기를 든 카자흐 백군운동의 지도자 크라스노프 가문의 역사는 나치 협력의 어두운 경로로 이어지고, 패전 후 남미로 숨어든 나치 잔당의 길을 따라 칠레의 민주화 역사에도 얼룩으로 침투한다. 크라스노프의 손자는 삐노체뜨 군부가 벌인 ‘추악한 전쟁’에서 참혹한 고문을 주도하는바, 벨몬테의 연인 베로니카를 비롯해 음모전의 상대방으로 마주친 혁명동지 두 사람 모두 그의 손에 가족을 잃었다. 미겔 크라스노프 준장은 지금 120년형을 받고 수감 중인데 국제적 음모전은 그의 구출에 나선 카자흐인들의 엉뚱하고 무모한 시도를 둘러싸고 일어난다. 한 세기에 걸친 역사의 시간을 정교하게 직조하는 가운데 ‘혁명적 행동’의 끝이라는 현재의 소실점으로 서사의 긴장을 모아가고 극적 재미를 고조하는 작가의 솜씨는 노련하며, 쎄뿔베다 소설의 대중적 인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역사에서 패배한 자들의 자리를 잊지 않으려는 쎄뿔베다의 시선은 삐노체뜨 군부와 시민사회의 타협 및 공모에 의해 진행된 어정쩡한 칠레 민주화의 도정에서 ‘신자유주의’라는 세상의 대세에 기생해버린 혁명세력의 굴절과 타락을 비판하는 힘이 된다. 『역사의 끝까지』의 옛 혁명전사들이 자신의 손으로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행동에 나서는 것도 이 때문인데, 이때의 ‘마침점’이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미 종결된 ‘역사의 끝’을 반복 확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상징적 죽음’의 제의적 수행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작가가 소설의 결말에 마련해둔 극적인 반전은 그 텅 빈 행동을 어떻게든 구제하려는 시도이며, ‘역사의 끝’이라는 문제가 실은 잘못 제출된 질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는 아이러니한 순간이기도 한 것 같다.

산띠아고로 돌아온 벨몬테는 ‘박사님’, 그러니까 아옌데 대통령의 집 앞에서 깊은 회한에 젖는다. “약관의 나이에 불과하던 나는 그 사람, 우리의 꿈과 열망을 가장 잘 대변한 ‘박사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그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 과거 나의 그림자는 그때처럼 자연스럽게 그 집 안으로 들어갔다.”(104면) 쎄뿔베다의 동세대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은 1973년 9월 11일의 참사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뒤(그는 심한 죄의식에 시달린다) 망명길에 경찰 호송차에 실려 아옌데 대통령이 최후를 맞이한 모데나궁을 지나며 발코니(이 발코니는 한때 뜨거운 환희와 타오르는 희망의 장소였다)의 텅 빈 어둠과 마주한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이 순간을 길게 성찰하는데, 이 대목은 특별히 아프다. “삐노체뜨가 준비하고 있었던 세상은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혁명’이라는 말이 조깅화의 선전문구로 전락하고 탐욕이 선으로 선포되고 이윤이 가치판단의 유일한 기준이 되고 냉소주의가 지배적인 태도로 군림하며 기억상실증이 과거의 모든 고통에 대한 해결책으로 치켜세워지며 정당화되는 세상을 벌써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저 발코니의 검은 구멍이 내게 전하는 궁극적인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 이 가련한 지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지 못하는 한층 더 심각한 눈멂이야말로—진정한 맹목이 아니었을까?”(『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 아리엘 도르프만 회고록』, 한기욱·강미숙 옮김, 창비 2003, 367면) 그러나 그 맹목을 포함한 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도르프만은 자신이 발코니의 환희에 동참한 젊은이였던 사실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쓴다. 그리고 그는 참혹한 고문의 순간에도 스스로의 존엄을 잃지 않음으로써 살아남은 한 여인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이 세상에 그녀와 같은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는 한, 나는 그녀의 투쟁할 권리와 우리의 기억할 의무 양자를 옹호할 것이다”(370~71면)라고 쓴다.

『역사의 끝까지』의 마지막 순간, 폭력의 복수를 저지하며 깊은 침묵에서 솟구치는 고문 희생자 베로니카의 목소리 또한 그 인간 존엄의 이야기와 이어져 있다는 걸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깨어나게 하는 쎄뿔베다의 소설적 방식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이야기를 활성화하기 위한 장르적 관습의 손쉬운 전유는 그 댓가로 이야기의 틀과 인간 탐구의 깊이를 스스로 제한한다는 점에서 양날의 칼이 된다. 그렇긴 해도 역사에 대한 쉼 없는 투신과 참여로 점철된 작가의 이력이 새로운 역사 전망을 장착한 풍성한 소설세계로 이어질 가능성을 충분히 품고 있었던 만큼, 코로나19로 중단된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한 아쉬움은 크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