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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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금희 錦姬

1979년 중국 길림성 구태시 출생. 2007년 『연변문학』 주관 윤동주신인문학상을 받고, 2014년 『창작과비평』으로 국내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세상에 없는 나의 집』, 장편소설 『천진 시절』 등이 있음.

jinjinji79@naver.com

 

 

 

무한오리부위집

 

 

아파트 입구의 게시판이 바뀌었다.

같은 색상과 디자인의 직원복을 입은 여덟 사람의 사진이 사라진 것이다. 사진이 붙어 있을 때 그들의 위쪽에는 붉은색 고딕체 글씨가, 아래에는 인물의 이름, 직함과 더불어 간단한 이력이 더 작은 서체로 타이핑돼 있었다.

소홍(蕭紅)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늘 오후 그녀는 만능 요리기계로 서리태 콩물을 만들 거라고 했다. 더운 날은 지나갔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깨지 못한 꿈속 같은 허망한 나날을 반년 이상 보낸 것이다. 나는 수학 연습지와 어문 훈련 문제집을 가방에 챙겼다. 문을 나서기 전 책장을 한번 더 보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곁다리로 읽을 책 한권을 꺼내 챙겼다.

 

오개월 전의 늦은 봄, 바로 그 유리장 안 게시판에 새 사진들이 붙은 것을 보고 소홍은 머리를 옆으로 살짝 틀었다. 파란 일회용 마스크 위에 빼꼼 드러난 그녀의 두 눈은 웃는 듯 아닌 듯 했다. 미끄럼틀이 있는 놀이터에서부터 운동기구가 배치된 작은 쉼터, 파란 잔디밭 가운데 지어진 정자를 지나 동문 쪽으로 돌아오면서 우리는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몇개월 묵은 스트레스를 방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집이 있는 동문 가까이의 2호 아파트 아래에 와서 우리는 잠시 멈췄다. 게시판은 맞은편에 있었고 스무보폭 정도 떨어진 곳에 까만 철창으로 만들어진 동문이 있었다. 사람이 드나드는 작고 좁은 문과 차량이 드나드는 넓고 큰 문.

소홍은 내게 철문 너머의 하늘을 턱짓해 보였다. “하늘이 얼마나 파래졌니. 최소한 한가지 좋은 일은 일어난 셈이지.”

철문 위로 둥그러니 드리워진 하늘은 확실히 파랬다. 여러 나라의 인공위성에 장착된 카메라도 이 부분은 인정한다는 사진을 찍어 보냈으니 그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었다.

“어떻게든 지나가겠지, 안 그래?” 소홍은 하늘에서 무상으로 쏟아지는 청정한 공기를 맞받기라도 하듯 두 팔을 살짝 앞으로 뻗었다. 철문 위쪽에 솟은 뾰족한 창끝에 구름덩어리 한조각이 걸려 할딱거렸다. 나는 3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매일 점심, 칸막이 삼아 세워놓은 종이박스를 마주한 채 도시락을 먹는 남편을 생각했다. 출근이 회복되었지만 회사 식당에서 도시락을 먹는 직원들은 삼분지 일가량 줄었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번은 닭다리도 나오니까, 그만한 도시락이면 얼마나 행운이냐고 남편은 ‘위챗’ 채팅방에 사진과 함께 메모를 남겼다. 반찬값이라도 벌려고 초등학생 네명을 받았던 나의 ‘숙제반’(방과 후 아이들의 숙제를 돕는 과외반)은 긴 방학 중이었다. 우리 부부에겐 ‘어떻게든 지나갈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히 소홍은 그 느낌을 본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난 뭐, 캥거루족이니까.” 사이가 점차 가까워지면서 소홍은 내가 생활난으로 어려움을 호소할 때마다 자조와 무심함이 잘 섞인 어투로 나를 위로했다. 나는 그녀의 솔직함이 마음 편했다.

그녀와 알고 지낸 지는 오년. 일년에 한번씩 열리는 전교 학부모회의에서 어느 한번 우리는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딸과 내 아들 채건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던 여름학기였다. 딱히 적을 것은 없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펜을 빌려줬고 그녀는 내게 노트 두장을 찢어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홍 모녀는 시종 우리 모자 앞에서 걸었는데 아파트단지까지 들어와서야 같은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로 아파트 주위 슈퍼와 국숫집과 주차장에서 가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새로 생긴 요가학원에 무료 체험수업을 받으러 간 날, 내 앞줄에 파란 매트를 펴고 앉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신기하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도 나를 보고 맑게 웃었다. 서로에게 이해관계가 없었으므로 우리는 훨씬 단순하게 친해질 수 있었다. 아이들은 같은 중학교에 들어갔고 이로써 소홍과 나에게는 한 학교 학부모로서 공동의 화제가 육년은 더 보장됐다. 자연히 다른 화제도 하나둘 추가되었다. 그녀는 착하고 배려심 많은, 접촉하기 편한 스타일이었다. 요가를 끝내고 때로 같이 국숫집에 들르면 그녀는 늘 내게 물었다. “난 괜찮아, 넌 뭐 먹을 건데?”

 

소홍은 외동이었고 부모 모두 시급 도시의 공무원이라 별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다. 평범한 이력에 겉으로 봐서 큰 곡절도 없는 결혼생활이었다. 삼년제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회계사무소에 출근하다가 남편이 일회용 용기 생산기계를 들여오면서부터 남편 회사의 장부를 봐주었다. 출산하기 전에는 가끔 사무실에 나가 돕기도 했지만 그렇게 보낸 시간이 많지는 않았고 대체로 한달에 일주일만 출근하는 여유로운 일상을 보냈다.

출근을 드문드문 해온 원인을 육아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따지고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소홍의 딸아이는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품을 번갈아 옮겨가다시피 하며 컸다. 방 안에서 뒹굴며 크던 돌 전에는 거의 외할머니가, 놀이터에 가는 것을 하루 일과 삼던 유치원 전까지는 주로 할머니가, 공식적인 교육기구에 들어가면서부터 여태까지는 양가 어른들 중 시간 편한 쪽이 소홍을 도왔다. 애 하나 키울 뿐인데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어릴 때는 먹이고 입히고 놀아주는 일만 해도 노동량이 상당했고 좀더 커서는 영어반, 미술반, 피아노반, 무용반, 사회자반에 수학반과 서예반…… 각종 과외반에 다니느라 항상 스케줄이 빡빡했다. 소홍은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과외 네개쯤은 견지했는데 또래 엄마들 사이에서 그 정도는 극성에 속하지도 않았다. 그녀처럼 집안 어른들이 도울 수 있다면 나도 아마 태권도반이랑 서예반을 채건의 과외에 추가했을 것이다.

소홍의 시간이 여의치 않은 날 시댁이나 친정 어른이 아이를 마중해 저녁을 해 먹였고, 그녀가 저녁 늦게까지 아이와 함께 과외를 다녀오고 숙제를 하고 복습을 하는 동안 당번 어르신들은 집을 치우고 쌓여 있는 택배 박스를 접어두고 침대커버를 빨고 베란다의 화분과 감자, 무 따위를 돌아보고 냉장고를 정리하고 아침거리를 준비해두었다. 모두 안주인이 해야 하는 일이지만 소홍이 며칠 미루는 사이, 또는 그녀의 솜씨가 영 아닌 것을 넘어갈 수 없어 조부모들은 습관처럼 했다.

처음에는 연로한 부모님을 부려먹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에 명절이나 생일, 또는 아이를 봐주러 올 때마다 용돈을 챙겨드렸지만 유동자금이 늘 빠듯한 회사 사정을 잘 아는 부모님들은 오히려 만날 때마다 손녀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명분으로 두세배의 돈을 얹어주고 갔다. 뭔가 옳지 않다는 건 알겠는데 같은 과정이 오년이고 십년이고 되풀이되다보니 송구스러운 마음, 감사한 마음은 점점 희미해지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당연한 마음으로 바뀌게 되더라고 소홍은 털어놓았다. 이제 소홍은 춘절 외에 부모님께 따로 용돈을 챙겨드리지 않았다. 게다가 올해는 연초부터 남편 회사의 기계마저 작동을 멈춘 것이었다.

내게는 소홍처럼 가까운 곳에 살면서 나를 도와줄 어른들이 없었다. 친정아버지는 고등학교 시절 지병으로 돌아가셨고 몸이 약한 어머니가 식당을 전전하며 나와 언니의 뒷바라지를 했다. 혼자 애를 키우고 집안을 돌보고 여가시간을 이용해 반나절 타임의 일이라도 찾아 하는 나를 보며 소홍은 불가사의해했다. “넌 진짜 유전변이야, 바링허우(중국에서 1980년대에 태어난 세대를 가리키는 말)가 아닌 것 같애.” 소홍이 상상하는 중국의 바링허우는 그녀 같은 도시 중산층의 자녀들이었지만 농촌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녀 상상과는 다른 우리 또래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홍이 보기에 ‘생활력 짱’인 나도 엄마에게는 ‘옛날 우리 때와 다르다’라는 핀잔을 무시로 듣는 게 사실이었다. 엄마는 우리가 모두 너무 약해 터졌다고, 우리의 아이들은 더 물러 터졌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아파트 입구 가까이로 가는데 철문 바깥 먼발치에서 택배 상자를 포개 들고 마주 오는 아가씨가 보였다. 무인 택배 보관함이나 택배슈퍼(택배 발송과 대신 받기를 취급하는 곳)에서 금방 찾은 것 같았다. 내가 안쪽에서 자석 여닫이 단추를 누르기 전에 입구 쪽에 앉아 있던 경비 아저씨가 먼저 카드를 식별기에 대는 소리가 들렸다. 삐— 철컥.

잠금이 풀렸고 경비 아저씨가 철문을 열어 붙들고 섰다. 나는 택배 상자 아가씨가 먼저 들어오도록 비켜섰다. 금방 머리를 감았는지 샴푸 냄새가 진했다.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랑하게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경비원들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인사말이었다.

경비원들의 카드는 만능카드로, 근무하는 아파트단지 내 모든 출입문과 엘리베이터 가동에 유효했다. 그들의 주 임무는 보안이었지만 실제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도움이 필요한 주민을 위해 카드를 찍어주는 것이었다. 전동자전거를 탄 남자들, 어린 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젊은 엄마 또는 할머니들, 양손 가득 장을 보고 돌아오는 직장인들, 그리고 여러개의 택배 상자를 든 주부들. 경비원들은 이 도시에서 이름난 아파트 관리회사의 교육을 받는 직원들이었다. 이 단지의 관리비용은 평균가의 두배였다.

그들은 비싼 값을 했다. 단지 내에는 원칙상 차량을 들여보내지 않았고 건물마다 매일 깨끗이 물걸레질을 했으며 놀이터와 잔디밭과 배드민턴장, 길가에는 늘 쓰레기 한점 없었다. 봄에는 새로 꽃모종을 심었고 여름에는 시원한 분수를 틀었으며 겨울에는 주민들이 불편하지 않게 제때 눈을 치웠다. 키를 잃어버렸거나 물건을 맡겨야 하거나 수도꼭지 따위가 고장 나면 여러가지로 도왔다. 그들은 분공(分功)이 명확했고 비교적 효율적이었고 친절했다. 아침마다 제복을 입고 허리띠를 찬 건장한 모습으로 달리기와 몸풀이 운동을 했고 업체 사무실 앞, 아파트 입구 주위에는 늘 그들과 한담하는 주민들이 있었다.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는 경비실을 지나치며 나는 흘끗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 사람이 더 있었지만 키다리 풍아저씨는 아니었다. 그를 본 지 꽤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위덕, 5개월 전 소홍과 같이 유리장 앞에 섰을 때 여덟장의 사진 중에 그가 있었다. 소홍도 풍아저씨를 알았다.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거구의 아저씨는 이 아파트의 경비원들 중 주민들의 상황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주민들과 제일 많은 소통을 하는 경비팀장이었다. 그의 사진이 유리장 안에 붙은 것은 의아해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게시판의 새 사진들을 본 오후, 채건의 인터넷수업 답안지를 체크하는데 소홍에게서 문자가 왔다. “요 아래 세탁소 곁에 무한오리부위집 세놨더라. 목이 그닥 좋지는 않지만.” 문자를 보고 나는 피씩 허구프게 웃었다. 하필이면 ‘무한(武漢, 중국 우한시)’오리인가, 그 가게는 십중팔구 이름 때문에 ‘매운오리집’에 밀린 것 같았다. 가게가 개장하고 한창 흥성했던 작년 겨울 나와 소홍은 그 집에서 독특하게 매운 향의 오리 머리와 혀, 발을 사 먹었다. 가게주인 부부의 농후한 동북 사투리로 봐서는 단언컨대 호북 사람이 아니었다.

메인 메뉴는 물론 오리 목이었으나 내가 제일 좋아한 것은 쫀득쫀득한 창자였고 소홍은 같은 양념으로 무친 연근을 좋아했다. 이제 다시 비슷한 맛을 느끼려면 한 블록 건너 큰길가에 있는 ‘매운오리집’으로 가야 할 것이다. 아파트에서는 일자를 찍은 출입증을 더이상 나눠주지 않았고 길거리에 오다니는 사람들도 서서히 많아졌지만 ‘세 줌’을 붙인 가게는 서너집 건너 하나꼴로 눈에 들어왔다. 셔터를 내린 녹슨 문, 먼지 쌓인 유리창, 재개장 허락을 기다리는 과외반, 학교, 극장…… 삶은 계속되고 있는 듯했지만 모든 게 된 풍을 맞은 환자의 몸처럼 예전 같지 않았다.

“그래서? 건물 주인이랑 연락했어? 정말 해보려고?” 나는 소홍에게 음성메시지를 보냈다. 이 시점에 분식집을 내보겠다는 소홍의 계획은 그녀 남편 회사의 창고 구석에 높이 쌓인 일회용 용기들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어 보였다. 세는 좀 싸졌을지 모르지만 경기가 바닥을 치고 있었고 무엇보다 소홍은 요리에 기질이 없었다.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일이 급하다면 차라리 원래의 전공을 살려서 회계사무소에 출근하는 편이 더 현실적이라고 두어번 권했지만 그녀는 ‘틱톡’에서 김밥이며 샌드위치며 마라탕 만드는 영상을 열심히 뒤졌다.

어떤 일에 그만큼 열성을 보이는 모습은 그녀를 알고 나서 처음이었다. “겨우 삼사천 봉급을 가지고 세 식구 어떻게 살겠니? 아무리 캥거루족이래도 부모 도움 받는 데 한도가 있지.” 나름 비장한 각오로 한 말이었겠지만 그간 소홍의 여유만만한 삶을 봐왔으므로 믿음이 덥석 가지는 않았다. “글쎄다, 생각은 좋은데, 현실적으로 승산이 있어야 말이지. 고생할 준비는 됐고?” 소홍은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다. 비록 여태 부모님 후원 받아가며 살았지만 마음 편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순 없는 거고 이제는 딸내미도 중학생이 되었으니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났으며 가게는 처음이지만 밥이 되든 죽이 되든 도전을 해봐야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게 아니겠냐 하는 논조였다. 이번엔 정말 단단히 결심한 모양이었다.

소홍은 총기가 있고 공감 능력도 좋았지만 몸이 썩 든든한 편이 아니었다. 양가 어른들이 며칠 들르지 못한 사이 그녀의 집에 가보면 미처 씻지 못한 그릇들과 여기저기 널브러진 물건들이 주방과 거실을 도배했다. 그녀가 자주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피곤해”였다. 봄이면 봄이라서 피곤하고 여름이면 더워서 노곤하고 가을이면 가을 타느라 우울하다는 식이었다. 그런 무기력함은 대체 어디서 그토록 줄기차게 오는 건지, 나는 그게 참 궁금했다.

 

한주쯤 지나 소홍은 내게 가게로 내려와보라는 문자를 보냈다. 설마 이렇게 빨리 일이 추진됐을까, 마스크를 쓰고 내려가면서도 나는 의심 반이었다. 가게는 소홍과 내가 사는 단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우리 아파트가 서쪽 최남단에 있으니 큰길가에서 멀리 떨어진 위치였다. 간판 자리가 텅 빈 ‘무한오리부위집’은 그와 같은 본새로 곧 망할 것 같은 야채가게와 세탁소 사이에 있었다. 이 단지 상가 중에서 큰 규모에 속하는 평안슈퍼 근처만 돼도 오다니는 손님 수에 기대를 걸 만했지만 소홍이 선택한 자리는 내가 봐도 답답했다.

가구가 거의 빠져나간 가게는 먼지투성이였다. 점점 따뜻해지는 바깥 날씨에 비해 가게 안 공기는 썰렁했다. 파란 마스크에 검은 야구모자를 눌러쓴 소홍은 회색 작업복을 입은 남자와 대화 중이었다. 길가에서 마주쳤더라면 그녀인 줄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칠 것 같았다. 중키에 허리가 약간 구부정한 남자는 머리카락이 까치둥지처럼 더부룩했다. 소홍의 얘기로는 친구가 소개한 인테리어 회사의 설계사라고 했다. 소홍은 남자에게 조리대의 위치와 크기, 진열대처럼 쓸 작은 냉장고와 큰 냉장고의 위치, 그리고 창턱 아래 벽에 새로 만들어 넣을 붙박이장의 모양 같은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이쪽에 길게 바 같은 탁자를 만들려고요. 중간에 앉은 높이만큼의 긴 장식대를 놓고. 그러려면 이 정도 넓이는 돼야겠죠?” 소홍은 하얀 운동화를 신은 발로 타일 가장자리를 따라 선을 그었다. 오십 센티 너비 타일이니 세장이면 일 미터 반이었다.

“좀 넓지 않나? 이삼십 센티 줄여도 될 것 같아. 다른 공간이 줄어드니까” 하고 내가 참녜(참견)했다. 설계사가 줄자를 꺼내 일 미터 반과 일 미터 삼십 센티의 차이를 시각효과로 보여주었다. “길이는 아마 여기까지가 좋을 겁니다. 사람이 지나다닐 공간이 있어야 하고요, 여기에 작은 냉장고도 놓겠다면서요, 넓이는 보세요, 어느 정도가 적당할지. 완성품이 되면 아마 지금 보는 것보다 넓어 보일 거예요.”

주방과 조리대 설계가 얼추 끝나고 소홍이 말했다. “나 말이지, 퓨전 분식집을 할 거야. 이래 봬도 주변 상가에 출근하는 젊은 직장인들이 많단 말이야. 그 사람들 점심때만 되면 매일 뭐 먹을까 고민하더라고. 깔끔하면서도 간편하고 영양도 대강 갖춘, 좀 색다르다 싶은 메뉴를 생각 중이거든. 어떠니, 괜찮지 않아?” 그녀는 자신이 상상해온 콘셉트를 띄엄띄엄 설명했다. 아직 뭔가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기본 색조는 어렴풋이 짐작 가는 이미지였다. 아이디어는 크게 나쁘지 않아 보였다. 나는 조리대와 수납장의 컬러 선택에 의견을 냈고 우중충한 천장 인테리어를 바꾸면 좋겠다는 조언을 했으며 바 탁자 아래에는 기둥만 박지 말고 전체를 수납장으로 만들어 써야 실용적일 것이라고 충고했다. “가게가 크지 않잖아. 주방, 카운터 빼고 이렇게 긴 탁자까지 만들어버리면 남는 공간 별로 없거든. 장사를 하다보면 필요한 물건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질 거야. 수납장이 많아야 전체 공간이 깔끔해질 수 있어.”

그외에도 상의하고 결정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이 너무 많았다. 인테리어는 회사에 맡기더라도 번거로운 여러 수속과 절차는 소홍이 다니면서 하나하나 밟아야 했다. 전세계가 코로나 무기력증에 하염없이 빠져들고 있을 때 여직까지 소침 속에 절어 살던 소홍은 갑자기 외계 행성의 특이한 에너지를 주입받은 사람처럼 의기충천해졌다. 예상 밖의 추진력에 놀랐지만 여전히 나는 소홍이 걱정되었다. 한 며칠 열심히 뛰어다니다 갑자기 힘들다고 주저앉지는 않을지, 인테리어는 큰 문제가 아닐지 몰라도 메뉴는 어떻게 할 건지, 투자에 비해 수익은 보장할 수 없을 텐데 적자를 얼마나 인내할 수 있을 건지 등등. 사실은 이 모든 것보다 내가 더 믿기 힘든 것은 체력과 부지런함으로 버텨야 하는 음식장사를 소홍이 과연 소화해낼 수 있을까 그것이었다.

 

남자가 떠나고 소홍과 나도 가게 문을 나섰다. 소홍은 몇주 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 같다고 했다. 서류와 인테리어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은 짬짬이 요리학원에 다닐 예정이었다. 나는 착잡한 표정을 마스크 뒤에 감추고 머리를 끄덕이면서 한편으로 소홍네 집의 어지러운 주방과 종종 태워버리던 그녀의 계란후라이를 생각했다. 어쩌면 나의 선입견이 너무 강한 것일 수도 있었다. 태산도 사람 마음먹기에 달렸으니 소홍의 의지가 어느 정도의 비등점에 도달했다면 그녀에게도 기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숙제반이 아직 재개될 수 없었으므로 나는 소홍의 개장 준비를 얼마간 돕기로 했다.

아파트 입구까지 와서 소홍이 가방 속을 뒤적거려 키를 찾고 있는데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우리 뒤에서 들렸다. 위압적인 큰 체구에 주름 하나 없는 곤색 점퍼를 입은 점잖은 노신사였다. 소홍은 키를 꺼내 들고 대수롭지 않게 뒤쪽을 흘낏 쳐다보았다. “어, 왔어요?” 노인은 손에 묵직해 보이는 깨끗한 천가방을 들고 있었다. 허리는 곧았고 걸음걸이도 기품 있었다. 마스크 때문에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젊은 시절엔 미남이었을 것 같다는 상상이 들었다. 나는 소홍에게 눈짓했다. “누구?” 소홍은 철문을 열고 노인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어, 아빠.” 그녀는 노인의 천가방을 받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노인에게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소홍 친구예요. 이리 주세요.” 거구의 노인은 침착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 그런가요, 가까이 사나보네.” 노인은 천가방을 내게 넘겨주지 않았다. 그는 고맙다고, 괜찮다고 예절 바르게 눈웃음 지으며 소홍이 열어준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집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그들 부녀는 소홍네 아파트 현관에 다다랐다. 굽이를 틀기 전 피끗 돌아보니 소홍은 머리를 숙인 채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뭔가를 확인하고 있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딸에게서 키를 받아 현관문을 열었다. “저번에 가져온 거 아직 있는데 뭐 하러 또 갖고 와.” 소홍은 아버지가 열어준 문 안에 발을 들여놓으며 푸념했다.

 

소홍의 가게는 점점 모양새를 갖춰갔다. 천장 타일을 바꾸고 벽에 따뜻한 색조의 페인트칠을 새로 하고 기존의 일광등을 식탁 위까지 드리워진 둥근 등으로 바꿨을 뿐인데 벌써 분위기가 달라졌다. 주방은 전기배선과 수도 공사를 새로 했다. 큰 개수대를 하나 더 들였고 낡은 싱크대는 전부 스테인리스로 교체했다. 바 탁자와 구석구석에 들어갈 수납장은 현장에서 제작했다. 인테리어 회사가 재료까지 맡았으므로 일거리가 많이 줄었지만 비용은 그만큼 늘었다. 고급스럽고 예뻐 보인다고 좀더 비싼 재질을 선택하고 싶어할 때마다 나는 소홍을 말렸다. “적당한 걸로 하자, 인테리어는 나중에 한푼도 건지지 못하는 투자니까. 장사가 잘되면 더 좋은 걸로 조금씩 바꿔.” 소홍은 내 말을 감안해서 몇가지는 타협했다. 그러나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가는 바 탁자의 상판은 기어이 고집대로 했다. 두꺼운 원목 가운데에 대리석을 깐 것이었다. 이 부근은 물론 웬만한 레스토랑에서도 보기 힘든 인테리어였다.

탁자와 의자를 들여오는 날, 나는 소홍을 도와 청소를 했다. 쓸고 닦고 유리창까지 깨끗이 하는 대청소였다. 점심때가 훨씬 넘어서 소홍은 오리구이 한마리를 배달시켰다. 우리는 마스크를 벗고 손을 씻고 아직 비닐도 뜯지 않은 새 탁자 앞에 나란히 앉았다. “오늘도 수고했어, 정말 고마워.” 소홍이 말했다. 나는 집에서 만들어온 깍두기를 꺼냈다. 가게 냉장고에 두고 먹으라고 일회용 반찬통에 넉넉히 담아온 것을 보고 소홍은 환성을 질렀다. “이거면 열흘 점심은 버틸 수 있겠어! 비주얼도 괜찮은데? 웬만한 식당 밑반찬 못지않아.”

소홍은 요즘 파스타를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근년에 한창 유행인 닭도리덮밥이랑 갈비덮밥을 알아봤는데 가맹비용이 너무 비쌌고 추가로 들어가는 재료비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라고 했다. 소홍은 요리학원의 중식, 양식, 한식 메뉴 중에서 난도가 낮고 장사가 될 만한 간단한 메뉴로 몇가지 익힐 생각이었다.

내가 걱정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요리의 기본에도 서툰 소홍이 단시간 안에 어떻게 특색 있는 메뉴를 선보일 수 있을지, 나의 상식으론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홍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일단 몇가지 간단한 메뉴만 익혀서 내놓고, 주방 봐줄 일꾼 한 사람 찾든가, 차차 메뉴를 늘리든가 하려고.” 소홍은 열심히 오리고기를 먹으며 주변 지인들 중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일한 적 있거나 중식요리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을 언급했다. 어떤 친구는 메뉴 개발을 도울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친구는 일주일에 이삼일 정도 출근할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근데 너 이 깍두기 정말 맛있다. 가르쳐줄래? 아님 여기 출근할래?” 나는 장난스러운 소홍의 얼굴을 보며 푹 웃었다.

반나마 남은 오리고기는 그대로 두고 나와 소홍은 쯔란에 볶은 오리뼈를 천천히 뜯었다. “요즘 딸내미는 어떻게 하고? 남편이 도와주나?” 그녀 남편의 회사가 운영 중지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내가 물었다. 당장 다른 사업을 벌일 수 없다면 부부가 맞잡고 가정과 일을 돌보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아서였다. 소홍은 작은 쇄골 덩어리를 뜯다가 주춤했다. 그녀는 휴지 한장을 뽑아서 가는 뼛조각 하나를 뱉어버렸다. “응, 그이는 그이대로 바빠.” 나는 토막 낸 오리 목을 마디마디 혀끝으로 야금야금 훑었다. “그럼? 어느 쪽 어른들이 오셔?”

소홍은 휴지에 손을 대충 닦고 종이컵에 따른 따듯한 물을 한모금 마셨다. “우리 엄마 근년에 몸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어. 시댁은 시형네 일도 있고 해서 형편이 좀 그렇고. 그중 젤 건강한 울 아빠가 자주 들르지.” 경미한 뇌졸중을 앓은 뒤 친정어머니는 전보다 행동거지가 많이 느려지고 의식도 깜빡깜빡하는 데 비해 아버지는 매일 새벽 운동을 나가고 균형 잡힌 식사를 하고 라디오로 뉴스를 듣고 친구들과 장기를 떼신다고 했다. 소홍네 집에 와서도 노인은 광이 날 정도로 청소를 하고 밑반찬을 종류대로 만들어놓고 중학생이 된 손녀딸의 역사지리 숙제까지 봐주실 정도로 짱짱하다 했다.

“야, 부럽네, 그렇게 든든한 아빠가 버텨줘서.” 내가 말했다. 진심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잃은 나로서는 사람 인생에 그보다 복스러운 일이 몇가지나 더 있을까 싶었다. 소홍은 휴지를 한장 더 뽑아 입술을 닦았다. “그렇기도 하겠지.” 그녀는 빈 비닐주머니에 다 뜯은 뼈와 휴지를 쓸어 담았다. “이렇게 말하면 넌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일흔도 넘은 노인이 너무 쌩쌩하니까 난 때로 징그러워.”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점점 풀리면서 한동안 나는 숙제반의 재개에 신경을 썼다. 숙제반은 우리 아파트 동쪽 단지의 25층짜리 건물에 있었고 작은 방 세개와 거실 하나로 된 공간이었다. 나와 영어, 수학 선생님 셋이 비용을 분담했다. 원칙적으로 우리의 학생은 공유고객이 아니었다. 그러나 영어를 배우러 왔다가 다른 것까지 고려하는 학생들이 항상 있긴 했다. 인터넷 수업은 끝나지 않았고 등교는 기한 없이 미뤄지고 있었다. 학부모들은 아이에게 지쳐하면서도 거개가 아직은 숙제반에 보내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원하는 아이들을 상대로 방문수업을 하는 영어선생님의 아이디어를 따라 나도 아이들의 집을 전전하며 숙제를 봐주기로 했다. 수입도 줄었고 시간도 많이 걸렸지만 일을 시작하는 게 중요했다. 장시간 아이들과 같이 지낸 부모들은 폭발하기 직전이었고 누군가에게 두시간이나마 골칫거리를 맡겨 스트레스 해소의 맛을 들이게 하는 것이 나의 전략이었다.

아이들과 씨름하고 돌아오는 저녁은 피곤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힘들었다. 전에는 웬만해서 먹지 않던 배달음식도 점점 많이 시키고 있었다. 타인의 스트레스로 번 돈을 다시 나의 스트레스 해소로 쓰고 있는 꼴이었다. 우리 아파트만 보더라도 출입증 취소 이후에 요식업체 배달원들의 출입이 눈에 띄게 늘었다. 두달 남짓 실행된 봉쇄조치 때문에 급성장한 보복소비 심리라는 말도 있었다. 혼란스럽고 정체된 경기 속에서 지금은 오직 요식 배달업의 미래만 찬란해 보였다.

미리 앱으로 쌀국수 두그릇을 배달시켜놓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장에 들러 소고기와 과일, 야채를 두루 샀다. 양손 가득 비닐봉투를 들고 오는 나를 보고 동문 입구에 서서 한담을 하던 경비원 중 한 사람이 허리춤에 매단 키를 꺼냈다. 낯선 얼굴이었다. 나는 문을 잡아주는 아저씨를 향해 피곤한 목소리로 “고마워요” 인사했다. 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사이 자동차용 큰 철문 너머로 환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확 비쳤다. 내게 문을 열어준 경비 아저씨가 다가가 검은 자가용의 번호판을 확인한 뒤 젱그렁거리며 문을 열었다. 차머리가 천천히 방향을 잡는데 노란 헬멧을 쓴 배달원이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와 차를 앞질러 달려 들어왔다.

“뭐야! 좀 보고 다녀!” 철문을 연 경비 아저씨가 배달원 뒤통수에 대고 기분 잡친 소리를 단마디 내질렀다. 아래위로 헐렁한 제복을 입은 약삭빠른 배달원은 못 들은 척 내 앞을 가로 달려갔다. “참 나, 새로 온 놈인가? 저놈들 때문에 아주 그냥 귀찮아 죽겄어.” “내 말이, 그니까 여차하면 오토바이 치워버려.” 젱그렁젱그렁 큰 철문이 등 뒤에서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나는 배달원이 달려가는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다행히 우리 집 쪽은 아니었다.

쌀국수로 저녁을 때우고 나와 채건은 각자의 방 침대에 기대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채건은 틱톡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었고 나는 위챗방을 뒤적거렸다. 한때 뜨거운 화제가 된 모모의 일기와 그녀에 관한 평론은 더 뜨지 않았다. 내 핸드폰에는 특정한 앱이 없었으므로(사실은 매달 나가는 비용이 아까워) 봉쇄조치로 인한 격리 생활 시절 남편의 핸드폰으로 구경하던 불가사의한 유튜브 동영상들도 이제 볼 수 없었다. 진위를 분별할 수 없는 정보와 영상은 보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때는 너무 많은 골 때리는 소문들이 머리 떨어진 파리처럼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녔다. 나는 그중 일분 십오초짜리 동영상 하나를 녹화해서 소홍과 같이 본 적도 있었다.

 

보름 정도 지나고부터 소홍은 위챗 모멘트에 새로 인테리어한 가게의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벽돌무늬 벽지를 붙인 카운터, 팔걸이가 있는 소파와 낮은 식탁, 고급스러운 접시에 예쁘게 담긴 파스타, 걸쭉한 양념국물의 덮밥과 여러가지 야채를 보기 좋게 썰어 올린 샐러드…… 돈을 많이 들인 홈 바 식탁이 가장 눈에 띄긴 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댓글도 달았다. 소홍은 가게 이름을 딴 위챗방을 따로 만들었다. ‘하말경식(夏末輕食, 늦여름 가벼운 식사)’. 젊고 가볍고 자유스러운 느낌의 이름이었다.

며칠 만에 하말경식 위챗방에는 회원이 80명을 넘었다. 친구가 친구를 초대하고 친구의 친구가 친구의 친구의 친구를 초대하는 식이었다. 무릇 위챗방에 가입하면 자동으로 하말경식의 회원이 되었고 모든 회원은 크고 작게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 개업을 앞두고 소홍은 홍바오(경사를 치르는 집이나 연말을 맞은 가게에서 나눠주는 돈)를 두차례 터뜨렸다. 회원 중 열명이 나머지 사람들을 간발의 차이로 제치고 홍바오를 나눠 가졌다. 제일 많이 가져간 이와 가장 적게 차지한 이가 행운고객으로 당첨되었다. 사진을 캡처해 가면 주스 한잔을 무료로 준다고 소홍은 공지에 썼다. 홍바오의 광고효과는 만족스러웠다. 그걸 뿌린 다음 날은 회원이 십수명 훌쩍 늘었다. 소홍은 매일 위챗방에 축복과 감사랄지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좋은 글귀를 퍼 날랐다. 나는 의무적으로 그녀의 글귀 아래에 엄지 이모티콘을 보냈다. 개업식 이틀 전 소홍은 내게 따로 문자를 보냈다. “그날 시간 돼? 홍보 전단지 돌려줄 사람 필요해.” 나는 “당근 가야지” 하고 답장을 보냈다. 마침 방문과외를 쉬는 날이었고 개업선물로는 미니멀리즘 풍의 벽시계를 샀다.

이틀 후 내려간 가게 문어귀에는 꼭두각시 바람풍선이 긴 허리와 두 팔을 펄럭거리고 있었고 빨간 카펫 양쪽으로 축하화분 네개가 핑크빛 리본을 달고 서 있었다. 나는 소홍이 부탁해둔 다른 친구와 같이 사거리와 큰길가와 아파트 여러 입구를 전전하며 쿠폰이 딸린 전단지를 돌렸다. 점심을 전후해서 손님들이 삼삼오오 가게로 들어왔고 소홍은 주방에서 그들이 주문한 파스타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소홍이 입은 것과 같은 앞치마를 한 여자가 두명 더 있었다. 진녹색 앞치마의 가슴께에는 깔끔한 유백색으로 ‘하말경식’ 넉자가 인쇄돼 있었다. 그녀들은 아침 일찍 야채를 썰고 파스타 양념을 만들고 동파육을 졸였다.

소홍이 일차적으로 선보인 메뉴는 파스타 세 종류, 덮밥류 세가지, 야채샐러드, 닭가슴살샐러드와 오렌지주스, 군것튀김이었다. 오이양파피클과 레몬수는 셀프였다. 동네 음식점치고는 산뜻한 메뉴였다. 소홍의 안목으로 선택한 접시와 컵과 수저도 예뻤다. 나는 소홍에게 개업선물을 건네고 동파육덮밥을 주문했다.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소홍은 하얀 마스크 안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고마워, 근데 좀 기다려야 돼.” 자리를 찾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테이블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방에서는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 파기름이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소리, 그릇과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불안정적으로 들려왔다.

드디어 주문한 파스타가 한그릇씩 나오기 시작했고 나의 동파육덮밥도 완성되었다는 콜이 떴다. 걸쭉한 양념에 검붉은 빛이 감도는 동파육에다 하얀 쌀밥은 공기째 그대로 엎은 듯 동그랗게 나왔고 가운데에는 싱싱한 파슬리 조각으로 장식했다. 아주 세련된 비주얼은 아니지만 넘어갈 만했다. 나는 둥근 스테인리스 숟가락으로 밥을 한술 뜨고 동파육도 한점 입에 넣었다. 조리시간이 좀 짧았는지 고기가 입안에서 질겅질겅 씹혔다. 첫입은 고소했지만 약간 짜고 느끼한 감도 들었다.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웬만한 가정집에서 낼 수 있는, 그다지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평범한 맛이었다.

파스타나 다른 메뉴도 그 정도 실력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주방 동선이 정리되지 않아서인지 음식은 하염없이 늦게 나왔다. 손님들 대부분이 지인인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사람들은 눈치를 봐서 적당히 수다를 떨며 기다렸고 음식이 나오면 적당히 맛있다는 평을 해주었다.

내가 빈 그릇을 반납대로 가져갔을 때는 손님들이 많이 빠지고 난 뒤였다. 소홍의 앞머리는 땀에 절어 이마에 달라붙었다. “개업 축하해. 새벽부터 고생했겠네, 힘들지 않아?” 전에는 출근하지도 않으면서 매일 ‘피곤해’를 입에 달고 살던 소홍의 몸이 나는 걱정됐다. 소홍은 마스크를 잡아당겨 턱에 걸고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카운터로 나왔다. “음식장사 진짜 장난 아니야. 억지로 버티고 있는 중. 맛은 어땠어? 친구 솜씬데 이만하면 훌륭하지?” 그들이 소홍이 언급했던 레스토랑 경험이나 중식 자격증이 있는 친구였다. 나를 바라보는 소홍의 눈에는 자신감과 기대의 빛이 반짝거렸다. 나는 가게 분위기며 그릇이며 바 탁자를 칭찬하는 것으로 맛에 대한 평가를 얼버무려 지나쳤다.

여태 주방에서 분주하던 두 친구도 카운터로 나와 앞치마를 벗었다. “오후엔 시간이 안 돼, 우리 이제 그만 갈게. 다른 날 또 보자.” 그녀들은 겉옷을 찾아 걸치고 가방을 들었다. 소홍과 아직 이렇다 할 계약관계가 성립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리 귀띔한 스케줄이었겠지만 그녀들을 보내는 소홍의 얼굴은 막막했다. 개수대 안에 가득 쌓인 그릇을 얼핏 바라보는 소홍의 눈에는 전에 그녀에게서 자주 발견되던 아이 같은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아마 이렇게 많은 그릇이 쌓여 있는 상황을 처음 경험했을 것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앞치마를 둘렀다. 소홍의 속도대로라면 설거지가 몇시간 지속될 게 뻔했다. “오늘 오후는 잠깐 도울 수 있어. 설거지 내가 할게, 홀을 치워.” 나는 장갑을 끼고 개수대 앞에 서서 수도꼭지를 활활 틀었다. 반나절 타임 식당 알바를 몇년 한 적 있는 내게 이 정도는 거뜬했다. 손님들은 다 빠졌다. 빗자루를 들고 홀 바닥을 쓰는 소홍은 다시 쾌활해졌다. “정말 고마워. 장사 잘되면 너한텐 모든 메뉴 대폭 할인해줄게. 아니, 너 정말 숙제반 그만두고 나랑 동업하는 게 어때?”

거두매(설거지)가 끝나고 나는 소홍에게 한소리 했다. “근데 오늘같이 바쁜 날 너 남편은 뭐 한대니? 좀 와서 돕지.” 나는 아무 감정을 넣지 않은 단순한 물음이라 생각했지만 그 말을 들은 소홍은 쭈밋거렸다. “어, 아니, 그 사람 지금 새 사업 아이템 생겨서 무지 바빠.”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었다. 나는 물을 끓여 커피를 두잔 내려 소홍에게 권했다. 우리는 카운터 앞에 바 의자를 놓고 커피를 마셨다. 눈만 뜨면 핸드폰에 매달리고 싶어하는 채건에 대해 한참 푸념하다가 나는 소홍의 착한 딸과 그 아이를 돌보고 있을 외할아버지 안부를 물었다. “요즘도 아버님이 가끔 오셔?” 소홍은 머리를 수굿하고 커피를 들이켰다. “어, 우리 집에서 주무신 지 며칠 됐어.” “그럼 어머니는? 어머님 몸이 시원치 않다면서?” 소홍은 설탕봉지를 찾아 손으로 찢어 커피잔에 들이부었다. “요 이틀에 우리 집으로 모셔 오려고. 혼자 너무 오래 두면 안 되니까.”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문득 한 사람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까칠한 얼굴에 취기가 가득한 소홍의 남편이었다. 소홍은 깜짝 놀라며 껄끄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야, 왕소홍. 이게 장인어른이 해준 돈나무야? 웃기지 않니. 면발도 제대로 삶지 못하면서 국숫집이라니.” 황황히 남편을 붙잡는 소홍을 보고 나는 잽싸게 앞치마를 벗어 카운터에 걸었다. “나 먼저 갈게, 채건이 숙제도 봐줘야 하고.” 그날 저녁 소홍은 미안하고 고맙다는 문자를 짧게 보내왔다. 나는 괜찮다고, 계속 힘내라고 답장을 보냈다.

 

소파를 안고 게슴츠레한 눈 어질러진 머리에

오히려 영화 주인공처럼 쿨하기를 갈망하는 나

—화진우(華晨宇)의 「참 이 세상을 사랑하고 싶다」(好想爱這個世界啊)

 

요즘 나는 이 노래를 자주 듣던 그때의 소홍을 생각한다. 가게에 틀어놓을 음악을 고르려고 듣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즐겁고 편안한 분위기의 식사와는 거리가 먼 노래였다. 가사의 표현처럼 그때 소홍에겐 우울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럴 만도 했다. 개업날이 지나고 일주일가량은 하루 손님이 들쑥날쑥 네다섯 테이블은 되는가 싶더니 곧 하강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준비한 야채는 시들고 파스타 양념과 동파육도 신선도가 떨어지고 어쩌다 구석진 가게까지 찾아온 손님은 만족스럽지 못해 더이상 오지 않는 악순환이었다.

소홍이 만들어낸 파스타가 너무 늦게 나오고 때로 면발을 덜 익혔거나 양념을 태운다는 것도 문제였다. 손님 없는 가게를 지키면서도 소홍은 매일 파김치가 되어 퇴근했다. 어느 날 아침 하말경식 위챗방에는 일요일 하루와 목요일 오후에 쉰다는 공지가 올랐다. 방문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가게에 들러보면 나른하게 카운터 의자에 혼자 앉아 핸드폰 화면을 넘기고 있는 소홍을 볼 수 있었다. “장사란 게 어디 하루이틀에 대박 나겠니? 난 그렇게 빨리 흑자 보리라고 욕심 안 내. 경험 쌓는 게 중요하니까.” 가겟세를 걱정하는 나를 소홍이 달랬다. 매상을 조금이라도 올려주려고 나는 되도록 가게에 남은 파스타나 덮밥을 포장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고장 난 인터넷도 점검해볼 겸 부탁한 약도 사갈 겸 친정에 들렀다가 이삼일 지나 가게에 가봤는데 영업할 시간에 셔터 문이 내려져 있었다. “새 메뉴 준비 중입니다. 당분간 기다려주십시오”라는 내용의 공지가 붙어 있었다. 나는 집으로 올라와 소홍에게 문자를 넣었고 저녁이 되어서야 답장을 받았다. “별일 아니야. 동창모임 한다고 해서 스트레스 풀 겸 지금 청도에 왔어.”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어딘가 미심쩍은 생각도 들었다. 언제 올 거냐고 묻는 내 말에 소홍은 한참 답이 없었다. 그녀의 모멘트에는 식당과 노래방, 해변 모래사장에서 동창들과 찍은 사진이 여러장 올라왔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어딘가 어색했다. “괜찮은 거니? 일이 힘들어 도망간 게 아니고?” 내 문자에 소홍은 장난스럽게 활짝 웃는 여자아이의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채건을 재우고 나도 잘 준비를 하는데 소홍에게서 음성채팅 요청이 들어왔다. 바람소리가 쉭쉭 들리는 중에 소홍은 혀 짧은 소리로 말했다. “ 너 나랑 동업하지 않을래? 숙제반도 돈이 얼마 되지는 않잖아. 우리 가게 오면 너 주방 맡아라. 너라면 메뉴 개발이고 뭐고 척척 할 수 있을 거 같아.”

나는 그곳의 안전과 검역 문제를 먼저 물어보고 곁에 친구들이 있는지 혼자 나갔는지 재차 물었다. 소홍은 동문서답했다. 다행히 휴대폰 너머로 친구인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시름을 놓으며 말했다. “그런 일은 돌아와서 차차 얘기하자. 밤도 늦었고 술도 꽤 한 거 같은데 그만 호텔로 돌아가, 남편이 걱정하겠다.” 소홍은 내 말에 이상한 톤으로 낄낄 웃었다. “남편? 남편 같은 소리 하네. 우리 아마 헤어질 거야. 나 어쩌면 돌싱이 된다고! 완전 다른 인생 사는 거지……”

 

소홍은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동창모임은 이박 삼일로 끝났지만 그녀는 친구 하나를 붙들고 며칠을 더 버텼다. 나의 숙제반은 드디어 재개됐다. 안전이 걱정되긴 했지만 학생들의 학교 복귀가 이루어졌고 학원 재개도 우리 숙제반이 처음은 아니었다. 원래 있던 학생 한명이 떨어지고 다른 애 둘이 붙었다. 앱으로 아이들의 수학 문제 정답 해설을 검색하고 있는데 소홍에게서 돌아왔다는 문자가 왔다. 가게를 다시 열었고 점심에 파스타 두그릇을 팔았다고 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계속 요리를 배울 것이며 점점 잘될 거라고 소홍은 약간 가벼워진 듯한 어투로 말했다. 남편과는 별거 중이라고 했다. ‘코로나 이혼’이라 하듯 민감하고 힘든 시기라 어떤 문제든 더 크게 느꼈을 수 있었다. 고군분투하는 소홍이 안쓰러워 나는 시간이 되는 만큼 가게에 들러보기로 했다.

여전히 가게는 매일같이 한산했다. 메뉴판에는 예닐곱가지 음식이 적혀 있었지만 실제로 주문할 수 있는 음식은 파스타 두가지와 동파육덮밥, 야채샐러드뿐이었다. 새 가게의 세련된 인테리어에 끌려 들어왔다가 메뉴판을 보고 한숨을 쉬면서 피자나 샌드위치, 스테이크나 소고기국수를 찾는 대책 없는 손님도 있었다.

“종류가 너무 단일한 거야. 한주에 하나씩이라도 늘려가야겠어.” 그러나 나는 문제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 있는 메뉴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서 다른 메뉴를 추가한다니. 한두가지라도 정말 맛있게만 한다면 손님들은 차차 붙게 마련이 아니겠는가. 새 메뉴는 어디서, 얼마 동안 배울 것이며, 그동안 가게는 어떻게 관리해나갈 것인지 등의 현실적인 문제도 물었다.

“요리학원에 계속 다니면 돼. 일주일에 두번 정도. 그래서 말인데, 내가 가게를 비울 동안 나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일당 쳐서 줄 수도 있고.” 소홍은 진지하게 내게 말했다.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게, 나랑 동업하면 좀 좋아? 너 정도면 한두가지 밑반찬도 할 수 있고 요리도 금방 배워 새 메뉴 낼 수 있을 텐데.” 아주 잠깐 나는 그녀의 주방에 서서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다가 곧 머리를 흔들었다. 음식장사는 결코 애들 장난이 아니었다. 섣불리 동업했다가는 친구관계까지 깨질 수 있으므로 나는 일주일에 두번 도와주는 것을 최선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일단 그렇게라도 해주면 고맙겠어. 장사 잘되면 그때 다시 동업해도 돼. 난 사실……” 하고 소홍이 내 눈을 피하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돈보다 같이 상의하고 감당해나갈 친구가 필요하거든. 보험 하나 들고 싶은 거지. 언젠가 너까지 이 가게에 신경 끌까봐.” 찰나 그녀가 공기 빠진 풍선처럼 작고 비들거려 보였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아주었다. 소홍은 내게서 살며시 손을 뽑아 얼굴을 가렸다. “나 말이지, 사는 게 엉망이야. 이 나이 되도록 뭔가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 애도 혼자 못 키웠고 돈도 못 벌었고 부부 사이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어. 지금 나한텐 이 가게밖에 없어. 어떻게든 해나가야 내가 살 거 같아.” 피곤에 전 그녀의 엷은 어깨가 절망 속에서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언제부터, 왜 이렇게 되었을까.

 

‘무한오리’는 영웅의 도시 무한에서 왔다. 무창(武昌), 한구(漢口), 한양(漢陽) 세 진의 합병으로 ‘무한’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93년 전 일이지만 신석기시대는 차치하고 상조(商朝)의 반룡성(盤龍城)부터 계산하더라도 3500년은 족히 된 역사의 도시다. 오래 묵은 고도시들이 그러하듯 그곳에도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철따라 시대따라 겹겹이 낙엽처럼 썩어갔을 것이다. 18년 전의 한 영화 (「라이프 쇼」)가 무한오리의 맛을 전국으로 퍼뜨릴 줄 누가 알았을까. 무한오리는 그 도시의 명실공한 상징 중 하나가 되었고 그 도시는 숙명처럼 중국의 ‘영웅’이 되었다. 말 그대로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76일(2020년 1월 23일~4월 8일) 뒤에 무한오리는 부활을 시도했지만 한때 고속열차 터미널처럼 퍼져나가던 전국 수많은 도시의 무한오리 간판은 이번 재난에서 얼마 살아남지 못했다. 준비도 안 된 채 이름 없이 한줌의 재가 된 그 끔찍하게 많은 간판들의 이야기는 다시 어느 나무의 거름이 되었을까. 일분 십오초짜리 동영상을 보다가 나는 혹시 무한오리의 이야기를 숙제반 학생들의 선전 포스터에 그려 넣어 과제로 제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영상 속 행인들이 겨울 패딩을 입은 것으로 보아 봉쇄 초기였다. 빨간 솜옷을 입은 여자가 악! 소리를 질렀고 그녀의 앞에서 한 남자가 머리를 감싼 채 뒹굴고 있었다. 그 남자는 곤봉에 어깨를 맞고 넘어진 것이었다. 경찰제복을 입은 사람과 다른 제복을 입은 남자가 쓰러진 그의 허리와 배를 걷어찼다. 좋지 않은 화질에 소음 가득한 짧은 영상이 끝난 다음 소홍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상한 영상들은 너무 많았음에도 우리 두 사람 모두 가볍게 넘기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은 ‘무한오리부위집’이라는 간판 때문이었다. 빨간 바탕에 노란 글자를 쓴 그 눈에 익은 간판은 야채가게와 세탁소 사이에 잠깐 호흡을 멈추고 서 있었다.

 

숙제반을 마치고 아이들을 보낸 후 고장 난 복도 전등 때문에 관리업체 사무실에 들렀다가 나는 우연히 풍아저씨가 전근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낯이 익숙한 경비원이 사무실 아가씨한테 손을 홱 저어 보였다. “그건 풍이 있을 때 그가 일 처리하던 방식이고……” 나는 숙제반 복도의 위치를 남기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우리 아파트에서 풍아저씨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안다면 ‘풍아저씨 알레르기’가 있는 소홍은 어떤 반응일까.

소홍과 풍아저씨. 사실 그들 사이에는 이렇다 할 에피소드도 없었다. 풍아저씨에게 소홍은 많은 주민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직책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경비팀장으로서 여러가지 돌발사건을 능숙하게 처리할 줄 알았다. 따지고 보면 일개 경비원일 뿐인데 풍아저씨는 오히려 주민들의 링도우(상사)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그는 항상 입구 근처에 서서 다른 경비원들에게 뭔가를 얘기해주고 있었고 드나드는 주민들의 성씨를 불러가며 가족들 안부까지 묻곤 했다. 오늘은 왜 혼자 나왔어요? 며느리는 아직 안 일어났나보지? 중학교 시험 시즌이라 그 골목 많이 막혀요. 아이고, 무슨 파를 그렇게나 샀대, 둘만 먹을 거면서. 될 수 있으면 차 거기다 세우지 말아요…… 등등.

어떤 차량을 들여보내고 어떤 차량을 바깥에 세워둬야 할지, 어느 택배원과는 어떤 어투로 어느 정도의 선에서 얘기해야 할지, 직업과 성깔과 목적과 기분상태가 각기 다른 주민들을 상대할 때는 어떻게 응수해야 하는지 풍아저씨는 잘 알았다.

“이상하게 나는 그 아저씨가 불편하단 말이야.” 게시판의 사진들을 보기 전에도 소홍은 그런 얘기를 했다. “다들 풍아저씨 풍아저씨 하니까 그런 티도 못 내겠고, 또 실제로 나한테 불이익을 끼친 일은 없는 것 같고. 그런데 왜 그럴까?” 나는 우리가 우연히 목격한 풍아저씨와 어느 요식업체 배달원의 실랑이 장면을 기억했다. 혹시 소홍은 그날의 사건에서 특이한 인상을 받은 걸지도 몰랐다.

출입증 점검 시기가 거의 끝나가던 격리 생활의 막바지였다. 스트레스를 받을 대로 받은 주민들은 여느 때보다 외식을 갈망했고 벌이가 떨어져 생존의 위협을 느낀 배달원들은 목숨 걸고 주문을 받았으며 아파트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경비원의 책임은 사상 최고로 막중해졌다. 특수한 시기만 아니라면 배달원들의 출입을 대충 눈감아주던 풍아저씨였지만 그즈음은 그럴 수 없었다. 배달원은 아파트 진입을 시도하다가 제지당했고 여러번의 청원도 일절 거절당했다. 그럼 여기 입구에 두고 가면 안 되냐, 손님이 내려와 가져가게,라는 제안도 불손한 어투로 튀어나왔고 풍아저씨는 단칼에 맞받아쳤다. 여기는 경비구역이지 배달서비스 구역이 아니라고. 서로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는 중에 경비원 책상 위에 올려둔 음식이 밀려 쏟아졌고 화가 난 배달원이 풍아저씨 코끝에 삿대질과 함께 욕설을 퍼부었다.

나와 소홍이 그녀 집 앞에서 만나 잠깐 수다를 떠는 사이였다. 어, 어, 하는 격한 소리가 들리더니 두 사람은 순식간에 몸싸움이 붙었다. 배달원은 체격부터 풍아저씨 상대가 못되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마냥 친절하기만 하던 풍아저씨의 다른 한 면을 보게 되었다. 그 배달원은 이제 막 고등학교를 나왔을 것 같은, 남방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아이였다. 아이의 마스크는 벗겨졌고 앳된 한쪽 볼에 벌겋게 손자국이 났다. 다른 경비원 한 사람이 말렸고 한참 후 쌍방은 어떤 합의에 동의했는지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배달원이 한 손으로 오토바이를 밀고 가며 부은 얼굴로 손님에게 양해 전화를 걸 때 풍아저씨는 경비실로 들어갔다. 힘있고 곧은 허리로. 엄숙하고 자신있는 얼굴로.

소홍은 풍아저씨의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 아저씨 볼 때마다 난 체한 것처럼, 아니 목구멍에 뭔가 꽉 막혀 있는 느낌이 들었어. 다른 경비원들보다 부탁을 잘 들어줬는데도 말이야, 표정도 늘 자신 넘치고 여유로웠고, 우리 아버지처럼.” 거기까지 하다가 소홍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참, 풍아저씨 어딘가 우리 아버지랑 닮았지 않나?” 나는 황당한 얼굴로 소홍에게 말했다. “아니, 전혀.” 소홍의 ‘풍아저씨’ 과민반응은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전이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그들 부녀 사이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이 엇박자에 불협화음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들어오면 집 안은 너무 무거웠어. 엄마는 요리에 기질이 없었고 아버지는 입맛이 까다로웠지. 엄마는 착했지만 직장일에서나 살림살이에서나 아버지 표준에 늘 미달이었어.” 소홍은 그런 사실을 고백했다. 반찬그릇으로 젓가락을 가져가는 남편 앞에서 곧 야단맞을 하녀처럼 후줄근하게 서 있던 엄마를 지켜보며 살았다고. 소홍 자신도 평생 아버지에게 부족한 딸이었다고.

“넌 혹시 그런 느낌 아니? 도무지 허리에 힘을 줄 수 없는 무력감, 아무리 버둥대도 헤어나올 수 없는 물컹한 진흙탕, 진은 계속 빠지는데 어디서도 채울 수 없는 막연함. 아버지는 목소리가 너무 컸어. 나는 아버지 앞에서 노래를 불러본 적도 소리를 질러본 적도 없었어. 아버지는 내가 마냥 착한 딸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은혜만 아는 사람이기를 바랐지.” 이 말을 하고 소홍은 심호흡을 한번 했다. 우리는 그냥 평범한 중국인이었다.

 

주문한 새 그릇과 새 양념과 새 냄비와 새 요리책들이 하루에도 몇번씩 배달되던 그 뒤의 나날, 이틀에 서너 테이블꼴로 손님을 받으면서 여러가지 실험을 하고 있는 소홍에게 내려갔다가 나는 본의 아니게 부녀 사이의 불화 장면에 맞닥뜨렸다. 통유리로 된 가게 문 가까이 갔는데 바 탁자 앞에 나를 등지고 선 소홍 아버지의 커다란 뒷모습이 보였다. 소홍은 주방에 있는지 아버지의 맞은편에 앉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왠지 내가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시금치며 고추를 진열한 옆집 야채가게 입구 앞에서 서성이는데 소홍의 가게 안에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그만하세요, 아버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요.”

침묵, 혹은 낮은 웅얼거림.

“그만두라니까요, 이거 하고 치울 거라고요.” 딸 집을 광나게 청소한다던 칠십대의 건장한 노신사와 새 가게 주방에 한가득 물건을 늘어놓았을 삼십대 후반의 젊은 여자. 나는 그들을 감싸고 있을 불쾌하고도 팽팽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내가 심한 거니? 너 사는 꼴을 봐라,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아니면 넌 어떻게 될 거 같니?” 노신사의 위엄있는 목소리가 처음으로 내 귀에 또박또박 들려왔다. 나는 작은 묶음의 시금치 한단을 사 들고 돌아왔다. 나중에 소홍이 말했다. “그날 나, 아버지한테 소리 질렀어. 아파트고 차고 가게고 직장이고 결혼이고 다 아버지 덕분이라는 거 알겠는데, 이 나이 되도록 제구실 못하고 살았던 거 인정하는데, 내 말은 내가 어쩌다 이렇게 무능하고 약해빠졌는가 하는 거지.” 소홍은 이렇게 소리쳤다고 했다.

“누가 날 이렇게 만들었는데요? 당신이잖아! 당신의 그 눈빛! 나와 엄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눈빛! 근데 왜 아직도 약해지지 않는 거야?” 내 상상 속에서 소홍은 앞을 볼 수 없는 어둠의 골짜기에 떨어져 손에 든 칼을 허공에 마구 휘두르고 있었다. 부녀는 며칠 동안 화해하지 않았다고 했다.

 

평안슈퍼 근처 난전에 나온 꼬부랑 오이와 가지를 사고 나는 소홍네 가게에 갔다. 소홍은 오후 내내 서리태를 삶아 볶은 참깨를 조금 넣고 곱게 갈아 콩물을 만들었다. 콩물은 약간 걸쭉했지만 구수하고 맛있었다. 이 콩물만큼은 웬만한 분식집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일단 콩이 많이 들어갔으니까.” 소홍은 대견해하는 미소를 지으며 앞치마를 벗고 느슨해진 머리를 풀어 다시 묶었다.

소홍은 이런저런 메뉴에 계속 도전하는 중이었다. ‘하말경식’ 위챗방에도 매일 좋은 글귀를 올렸고 두주에 한번은 홍바오를 뿌리면서 행운손님을 추첨했다. 파스타는 안정적으로 나왔다. 아직 특별히 매력적인 맛은 없었지만. 소리를 질러본 경험 덕분일까, 소홍은 전보다 생기 있어진 것 같았다.

셔터를 내리고 소홍과 함께 아파트로 들어와 게시판 앞에 섰다. 소홍네 베란다 열린 창문으로 언뜻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아버지가 온 모양이었다. 구층 높이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시선이 내게도 느껴졌다. 남보다 큰 키 때문에 그는 항상 내려다보는 자세에 습관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권위는 은혜라는 명목으로 지탱하려 한다는 것을, 그런 것은 어린 자녀의 성장에 유익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그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 부녀가 좀더 좋은 방식으로 타협점을 찾아나가기를 바랐다.

소홍과 헤어지고 내 아파트로 발길을 돌리는데 코스모스 가득 핀 화단 바깥에서 아파트 관리업체 직원들이 가로등 사이에 좁고 긴 국경축하 현수막을 걸고 있었다. “모든 국민은 함께 난관을 극복하고, 화평한 조국은 날로 강대해지기를!” 주민 한 사람이 화단 앞을 지나다가 직원들에게 한마디 참녜했다. “오른쪽이 살짝 올라갔는데요?” 나도 그 사람 곁에 섰다. 오른쪽이 높다는 말이 옳았다. 삐삐, 낮은 경적소리가 들렸고 낙엽을 한무더기 실은 작은 전동 쓰레기차가 우리 앞을 지났다. 낙엽 속에는 파란 일회용 마스크들이 띄엄띄엄 묻혀 있었다. 영상 속의 ‘무한오리부위집’. 경찰과 함께 있던 사람은, 우리 아파트의 경비제복을 입었고 낯익은 뒷모습의 그는 체격이 건장했다. 조잡한 소음 가운데 한마디는 분명히 전해졌다. “그러니까 마스크를 쓰라고! 쓰면 될 거 아니야!”

여덟장의 사진이 붙어 있던 오개월 전의 게시판은 ‘코로나 시기의 평범한 영웅들’이라는 주제로 꾸며진 것이었다. 모범 경비팀장 풍위덕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특유의 표정으로 유리장 너머의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나는 현수막 앞을 지나쳐 집으로 올라갔다. 내일 오전에는 소홍네 가게에 가서 같이 뭔가를 만들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그녀가 결국 자신만의 메뉴를 개발해내기를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