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평론
운명을 모르는 페넬로페(들)
김유담 소설 속 회상의 형식
임정균 林貞均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마음의 리얼리즘: 김금희론」 등이 있음.
wolverine10@naver.com
그의 회상과 깨달음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모험담을 오디세우스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오디세우스는 험난했던 여정을 떠올리며 격정적으로 이야기한 끝에 느닷없이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내가 왜 그 일들에 관해 그대에게 이야기하고 있죠? 어제 이미 나는 그대의 집에서 그대와 그대의 강력한 아내에게 그 일들에 관해 이야기했고 그리고 분명하게 말한 것을 재차 말한다는 것은 내 성미에도 맞지 않는데 말이오.”1 루카치(G. Lukács)가 그리스 영웅들은 회상이라는 시간 체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던 건 오디세우스의 이같은 성미가 한몫했음이 틀림없다. 신들이 정해놓은 운명을 알고 있고, 삶의 의미를 의심치 않는 그리스의 영웅에게 회상은 어떤 내적 변화도 주지 못한다. 지혜로운 오디세우스에게 무가치한 회상을 재차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회상은 운명을 모르는 평범한 인간에게나 유용하다. 인간은 운명을 알고 싶어하고, 동경하며, 그같은 갈망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한다. 그리고 삶이 구체적 형상을 띠기 시작했을 때에야 뒤를 돌아보고, 비로소 깨닫는다. 아, 운명을 너무 늦게 알았구나. 깨달음은 언제나 한발 늦다.
여기 회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한 남자가 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이 어째 좀 미심쩍다. 그의 회상은 밤늦은 시각에 걸려온 전화로부터 시작된다. 육개월 전 헤어진 여자친구 피티의 언니 소냐는 동생이 실종된 것 같다고 전한다. “오늘이 사흘째야. 이럴 애가 아닌데…… 네가 알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해서.” 피티의 실종 소식을 들은 남자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피티가 사라지다니, 그것도 소냐를 혼자 두고? 내가 아는 피티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김유담 「영국산 찻잔이 있는 집」, 『탬버린』, 창비 2020, 278면, 이하 「영국산 찻잔」.)
남자의 이같은 확신은 피티와 헤어진 이유와 관련 있다. 학창 시절 따돌림을 당했던 소냐를 피티가 지나치게 보호해왔던 것. “그녀가 그렇게까지 소냐에게 신경을 쏟지 않았다면, 나에게 좀더 집중해주었다면 우리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 어긋나지는 않았을 것이다.”(308면) 그런데 피티가 언니를 두고 사라졌으니, 그는 피티가 스스로 사라졌다고는 믿지 못한다. 곧장 소냐의 집으로 향한 남자는 그녀의 횡설수설을 들으며 집 안을 둘러본다. 곧 단서 하나를 발견한다. 피티가 평소 아끼던 영국산 5인조 찻잔 세트 가운데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그 찻잔은 “나중에, 소냐가 지금보다 훨씬 좋아졌을 때 네 자매가 함께 피크닉을 가서 차를 마시고 싶다”(302면)라고 한 그녀에게 큰언니가 사다 준 것이다. 소냐가 마음을 열길 기다리며 장식장에 진열되어 있던 찻잔이 피티와 함께 사라졌음을 알게 된 남자는 비로소 피티에 관한 ‘새로운 앎’에 도달한다. “오지 않을 티타임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피티, 어떤 갈망은 삶을 견디는 힘이 되는 동시에 삶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던 걸까. 그제야 나는 피티가 가장 좋아하는 찻잔으로는 단 한번도 차를 마셔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314면)
분명 이 깨달음은 독자로 하여금 피티의 행방을 낙관하도록 추동한다. 그렇지만 뒷맛이 영 개운치 않은 것은 어째서일까. 피티에 관한 그의 새로운 앎은 기존에 그가 확신하던 앎을 수정하라 요구한다. 그러니까 ‘피티는 소냐를 두고 떠날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확신이 ‘피티는 제 삶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라는 새로운 추측에 의해 번복된 것. 일관된 주장을 번복하고 깨달음을 얻은, 그리하여 어떤 변화를 맞이한 이 남자를 우리는 긍정해야 할까.
실마리는 앞서 본 첫 장면에 있다. 언뜻 두 사람은 ‘피티는 ~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동일한 형태의 판단을 내리고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소냐의 판단은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이런 적이 없었거든”(283면)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이전 행위들의 경향성에 근거한 단순하고 확신 없는 추측이다. 거기엔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지만, 이럴 수도 있는 애’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반면 남자는 피티가 소냐를 혼자 두고 떠났을 경우의 수를 확신에 차 배제한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피티가 자신과 헤어진 이유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동생이 스스로 떠났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소냐가 “설마 나쁜 일이라도 당한 건 아니겠지”(303면)라며 최악의 경우까지 고려하는 것과 달리, 수상쩍게도 단순 가출을 배제한 남자의 태도는 지나치게 태평하다. 유사한 판단 이면의 상반된 태도는 피티의 실종 뒤에 숨겨진 내막이 있음을 은연중에 내비친다.
그 내막은 남자의 과거 회상을 통해 드러난다. 그런데 그 방식이 문제다. 회상은 소냐의 집에서 그녀와 나눈 짤막한 대화 사이에 일어난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과거의 일들을 차례로 떠올리고, 마침내 두 사람이 헤어졌던 육개월 전의 사건에 다다른다. 두건의 폭력이 있다. 그는 자매가 키우던 개에게 줄넘기 줄을 휘두르며 아버지가 자신에게 가했던 폭력을 재연한다. “이렇게 말을 잘 들어야 착한 어린이지.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의 아들이 줄넘기 줄을 휘두른 후에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했던 말을 헥헥거리는 개새끼에게도 들려주었다.”(299면) 그는 폭력을 합리화했던 아버지의 논리를 답습하며 가정폭력의 피해자라는 자의식을 표출한다. 이어서 소냐에게 가한 폭력을 “내가 발끝으로 소냐의 팔꿈치를 툭 건드리자 그녀의 상체가 휘청하면서 냉장고 문과 맞붙은 홈바에 머리를 부딪쳤다”(309면)라고 묘사하면서 그것이 우발적 사고였다고 슬그머니 주장하기에 이른다.
겉으로는 사라진 피티의 행방을 걱정하며 소냐의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지만, 그의 의식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을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이 회상의 목적은 과거의 사건들에서 일관된 의미를 발견하는 데 있지 않고, 의도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피티의 실종과 ‘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야 한다. 만일 두 사람이 헤어진 결정적인 이유가 폭력임을 인정한다면, 피티에게 나쁜 일이 생겼을 때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될 사람은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깨달음은 ‘피티는 제 삶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라는 희망적인 추측이 아니라, 오히려 ‘피티가 제 삶을 찾아 떠나야지만 그녀의 실종과 나는 전적으로 무관해진다’라는 일관된 자기변호의 완성이 아닐까.
그녀의 동경과 그의 욕망
사건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는, 혹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거나 변명하려는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가 낯선 것은 아니다. 가령 임현의 ‘문제작’ 「고두叩頭」(『그 개와 같은 말』, 현대문학 2017)의 서술자가 나름의 합리적 논리를 구축해가며 진술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결국 자기변명에 불과한 기만적 언술이며, 나아가 자기모순의 계시적 장치임을 많은 독자들이 예리하게 간파했던 것도 이런 유형의 서술자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소설을 한국문학의 ‘문제작’으로 만든 것은 피해여성의 삶과 행동, 의식을 가해자의 목소리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형식상의 한계였다.2 「영국산 찻잔」의 서술자 역시 피티의 삶을 재현하는 매개로는 불충분하다는 문제를 제기해볼 수 있다.
만일 피티의 행방에 관해 조금이라도 낙관한 독자라면, 이 소설이 그녀를 불충분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데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비록 미덥지 않더라도 그는 피티에 관해 많은 말을 하고, 결과적으로 피티의 현재를 긍정적으로 그려볼 여지까지 마련해준다. 하지만 이 소설이 ‘한’이라는 남성의 주관적인 목소리로 서술되고 있는 한 피티의 행방에 관해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은 하나도 없다. 거기에 더해 이 남성 서술자가 여성작가에 의해 고안된 소설적 장치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타 펠스키(Rita Felski)가 지적하듯 작가의 “성별은 텍스트적 의미의 유통과 수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3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의 남성 서술자가 이와 유사한 문학적 판례일 것이다. 이 서술자는 처음엔 미학적 결함으로 종종 지적되며 소설의 외적 성과에 견주어 일종의 골칫거리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후 ‘여성 작가의 남장 서사’라는 형식상의 특징에 주목한 결과 그동안 ‘남성’의 ‘앎’이 얼마나 수세적인 것이었는지를 폭로하는 동시에 “실상 그의 앎이 가져온 변화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현실을 고발하는 가장 전복적인 소설적 장치로 재해석되기에 이른다.4
마찬가지로 김유담이 「영국산 찻잔」의 남성 서술자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확인할 수 없는 피티의 행방이 아니라, 그가 앎을 얻는 방식과 그 내용에서 찾아야 한다. 제목에서부터 강조되듯 한의 마지막 깨달음은 “피티는 예쁜 찻잔을 동경했다”(301면)라는 ‘기억’에서 비롯하고 있다. 무언가를 향한 갈망과 그리움은 현재 그 대상의 결핍과 상실을 의미한다. 찻잔은 동경의 직접적 대상이 아니다. 피티가 동경하는 것은 네 자매가 함께하는 피크닉이다. 그 소박한 바람이 그녀에게는 요원하기만 하다. 당장의 그리움을 달래는 대체물에 불과한 찻잔은 갈망을 온전히 만족시키지 못한다.
흥미롭게도 한은 이같은 피티의 동경을 동경했다. “피티가 꿈꾸는 미래에 나도 포함되어 있는지 궁금”(301면)해했고, 심지어 “내가 갖고 싶었던 이 모델은 4인조가 아니라 5인조 세트밖에 나오지 않는대. 지금 생각하면 잘된 일이야. 너도 함께 가자. 그런 날이 가능하다면 말이야”(302면)라는 피티의 말에 눈물까지 흘린다. 한의 불우한 가정사를 떠올리면 이 눈물을 이해 못할 것도 없다. 부모에게 버림받다시피 해서 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할머니가 이루지 못한 음악가의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 재능도 없는 음악을 전공했다. “상상된 미래는 그에 대응하는 상상된 과거를 갖고 있다.”5 말하자면 한은 자신의 가족사로부터 밝은 미래를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상태다. 아마 그는 피티에게서 가족적 유대감을 처음 느껴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 유대감이 견고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훼손되지 않고 지속되길 욕망한다. 한은 할머니의 꿈을 대신 욕망했던 것처럼 피티의 동경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다.
하지만 한과 달리 피티가 꿈꾸는 미래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지속되어온 네 자매의 애정과 유대관계에 기반하고 있고, 피티에게 피크닉이 요원한 것은 소냐의 상황 때문이지 네 자매의 유대가 끊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피티와 언니들의 관계는 상상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피티가 찻잔을 동경했다는 것은 한의 욕망이 만들어낸 기억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심은 그가 찻잔 하나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 직후 피티의 동경을 “오지 않을 티타임”(314면)으로 간단히 요약해버리는 데서 확신으로 바뀐다. 그것도 모자라 이 상상된 미래가 삶의 동력인 동시에 족쇄임을 피티는 모르고 있었다고 말한다. 피티의 5인조 찻잔 세트 중 자기 몫을 갖고 싶었던 그가 나중에 가서는 ‘그런 날’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사라진 찻잔이 가져온 인식의 변화 이면에는 불리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찻잔 하나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기 전에 그는 “기념일에 피티와 함께 커플로 맞춘 컵”을 누군가 “치워버린”(313면) 것을 먼저 알게 된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커플 컵을 (피티가) 치운 것이라고 진술한 것과 달리, 찻잔은 사라졌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두 서술어의 간극에는 사라진 찻잔이 피티의 몫이 아니라 실은 그의 몫이었다는 사실이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실제로 그가 깨달은 것은 자신이 피티에게 완전히 버림받았으며, 동시에 욕망을 폐기당했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같은 환멸의 순간을 현실을 왜곡함으로써 피해간다. 피티가 자기 몫의 찻잔을 들고 떠났다고 믿는 것은 남겨진 네개의 찻잔 가운데 하나가 여전히 자신의 것임을 스스로 믿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방의 해안도시에서 K시로 올라온 것을 상경이라 말했던, 자신을 불쌍하다고 여겨달라던 “피티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312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소설에서 피티의 행방에 관해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은 하나도 없다.
그녀의 회상과 전도되는 온기
단순한 사실이지만, 여성 스스로 자기 삶을 되돌아보며 역사화하고 의미화하는 것만큼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의 삶을 재현하는 방식은 없다. 김유담이 발표한 소설들 가운데 어떤 것을 읽더라도 피티가 살았을 법한, 혹은 살게 될 삶을 보게 되는 건 우연이 아니다. 특히 「멀고도 가벼운」(『탬버린』)은 여성 서술자가 남자친구와 헤어진 이유를 회상한다는 점에서 「영국산 찻잔」과 짝을 이룬다. 그뿐 아니라 형식상의 한계로 제대로 다루어질 수 없었던 “지방-청년-여성이 경험하는 입사”6라는 테마를 중산층 의식을 가진 남성인물, 전통적 가치관을 고수하는 어머니, 고향을 떠나는 이모와의 상호관계를 통해 다각도로 조망한다.
지방의 집성촌에서 대학 입학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서술자 ‘지연’은 서울 중산층 출신의 남자친구 은호와 엄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과거의 일을 떠올린다. 지연이 열한살이었을 무렵 엄마는 집에서 도자기에 전사지를 붙이는 부업을 했다. 그녀는 마을 여자들이 마루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일하는 풍경을 매일같이 보곤 했다. 그 장면을 지연은 “방석을 깔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전사지 작업을 하는 사람들 덕에 차가운 마룻바닥에 온기가 돌았다”(166면)라고 기억한다. 이 온기는 고향의 기억이 주는 막연한 안온함과 향수이기도 하지만, 점심으로 나눠 먹던 뜨끈한 수제비와 마을 여자들이 “명랑하게 떠드는 말소리”(168면) 속에 깃들어 있는 집성촌 마을의 강한 유대관계와도 무관하지 않다.
지연이 이 온기의 존재를 깨달은 것은 정작 피부로 느꼈을 과거의 순간이 아니다. 서울의 대학에 합격해 상경한 뒤에야 그녀는 “좁고 누추한 방에서” 몸서리치며 “특별히 좋은 것을 누리고 살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서울에 온 이후 과거에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 중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됐다”라고 온기의 부재를 암담하게 인식한다. 지연은 뒤늦게 깨달은 온기에서 “고집을 피워 서울로 왔지만 결국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우울감”을 느낀다.(181면) 스무살의 그녀가 고향의 온기를 느낌과 동시에 얻은 상실감은 이내 보배 이모가 대학입학 선물로 보내온 양모 이불의 온기로 대체된다. 이불의 온기는 그녀가 서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동력을 보탠다. 그런 점에서 이불은 피티의 찻잔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한편 훨씬 더 적극적으로 서사에 개입하고 있다. 지연이 은호에게 엄마의 이야기를 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양모 이불의 내력이지만, 더 정확히는 온기의 기원을 말하기 위해서다. 엄마에 관한 이야기는 이모에 관한 이야기로 자연스레 흘러가고, ‘온기의 전도(傳導)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는 플롯을 따라 각기 다른 온기들이 은유하는 가치들의 전도(顚倒)가 시작된다.
이제 이 이야기는 회상의 논리를 따라 온기의 원체험이 갖고 있던 위상을 양모 이불에 부여하면서 기억의 총체화를 시도하게 될 것이다. 지연의 회상 속에서 엄마와 이모는 온기의 근원을 두고 서사적 경합을 벌이게 된다. “엄마는 태어난 동네를 한번도 떠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고, 이모는 대도시로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164면)이라는 대립 구도는 가치 전도의 적절한 시작점이다. 가부장제의 수호자 격으로 묘사되는 엄마와 “집성촌을 벗어난 새로운 삶의 방식”(198면)을 추구하는 이모는 서로 대척점에 있는 가치들을 표상한다. 그런데 지연은 서사를 통해 두 가치를 곧장 저울질하기 전에 은호가 양모 이불을 무겁고 거추장스러워했던 장면을 먼저 보여준다. 양모 이불은 은호의 구스 이불에 의해 돌연 그 무게가 평가절하된다. 그제야 지연은 이모와 엄마가 돌이킬 수 없는 감정싸움을 벌이게 되는 사건으로 진입한다. 이같은 우회는 상반된 두 가치가 서로 평형상태에서 공정한 경합을 벌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온기의 전도 과정에 있어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할 중심사건으로 제대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와 이모가 전사지 작업의 임금 지급 문제로 다툰 사건은 “1990년대 후반”(167면) 한국의 평범한 가족사적 갈등을 상징적으로 재현한다. 한국의 뿌리 깊은 가부장적 전통은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정상가족’7과 긴밀하게 결속하면서 단기간의 산업화를 가능케 한 요인이기도 했다. 이 시기 아버지의 권위는 가족을 위한 희생적인 노동, 나아가 국가발전에 기여한다는 사명감과 동일시되었다. 하지만 “ IMF 이후”(같은 면) 실직한 아버지의 권위는 실추되고,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선 어머니가 가장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가부장제의 모순이 갈등의 양상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이는 김유담의 여러 소설에서 반복되는 테마이기도 하다. 갈등의 무대인 집성촌은 “여자가 그악스럽게 돈을 벌러 다니는 건 남편의 체면을 깎는 일이라는 분위기”(185면)가 지배적인 곳이다.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엄마는 전사지 작업을 ‘부업’이라 여긴다. 반면 이모에게 그 일은 “생업”(184면)이다. 두 사람의 갈등은 불가피하다. 가부장적 전통의 근거지에서 벌어진 상반된 가치의 대립과 전복의 시도는 간단히 진압되고, 패배자인 이모는 추방당하듯 고향을 떠난다.
이 에피소드 직후 은호와의 다툼과 이별이 이어지면서 서울에서 겪은 남자친구와의 갈등과 집성촌에서 본 엄마와 이모의 갈등이 유비 관계를 이룬다. 그 공간적 대립과 구조적 상동성을 발견하고 인식하는 것이 최종 결말이라는 듯한 회상의 몸짓에도 지연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리고 문득 삼년을 건너뛰어 “나는 올해 서른이 되었고, 삼년 차 직장인이 되었다. 은호와 헤어진 후에도 나는 무수히 많은 회사로부터 불합격 통지를 받다가 겨우 지금의 회사에 취업했다”(194~95면)라며 현재에 이른다. 이제 최종적인 서술 시점이 밝혀진다. 양모 이불의 온기로 열한살 무렵의 온기를 떠올렸던 스무살의 지연, 이를 재서술하는 스물일곱의 지연, 다시 이 모든 기억을 재구성하는 서른의 지연. 세번에 걸친 회상의 한가운데에 네 인물의 다툼과 헤어짐, 그리고 각 인물이 표상하는 가치들의 전도가 자리하고 있다.
운명을 알고 싶지 않은 여성
회상은 ‘행동하는 주체’를 대상으로 한 ‘말하는 주체’의 해석 행위다.8 회상의 일차적 효과가 미처 거두어들이지 못한 지난 삶의 의미들을 되짚어 거기서 어떤 가치들을 추수하는 것이라면, 이 거듭된 회상은 오디세우스의 빈정거림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다. 죽음 직전이 아니라면, 회상은 결코 삶을 완결된 형태로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는 순간 완결은 다시 미완으로 퇴행하고, 이해는 불가해로 역전된다. 지연의 거듭된 회상은 해석을 통해 앎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앎을 의문에 부치며 이해와 불가해 사이를 끊임없이 유동한다. 그렇다면 지연이 회상하는 목적은 인식론적 완결에 도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미완의 상태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자기해석의 갱신에 있는 것이 아닐까.
가령 데이트 비용을 두고 서울 중산층 출신 은호와 지방에서 올라온 자신이 전혀 다른 입장임을 의식한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는 대목이 그러하다. “연애라는 것이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간의 부담을 지우고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는 일이라는 걸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173면) 어째서 지연은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라며 현재의 앎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것일까. 부정판단은 술어가 부정하는 주체만을 배제하고, 나머지는 가능태로 둔다. 따라서 ‘그때의 나’가 모른다는 것만이 확실할 뿐, ‘지금의 나’가 알고 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이러한 진술 방식은 과거를 재해석하는 한편, 현재의 ‘앎’을 확정하지 않음으로써 미래를 여러 가능성 속에 열어둔다. 이같은 회상의 형식이 은호와 헤어진 이유를 회고하는 대목에 이르면 그녀가 부정하는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은호가 취업에 성공하고서 내뱉은 무신경한 말에 지연은 ‘지방-청년-여성’이라는 자의식을 강하게 느낀다. “나는 은호 같은 타입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서울 중산층 가정 출신에 서울 소재의 사년제 대학을 나온 남자 사원. 애초부터 그곳에 내 자리는 없었다.”(193면) 이어서 은호가 지방 출신 여성의 높은 취업 문턱을 당연시하며 지연의 자격지심을 건드렸을 때 두 사람은 심하게 다투었고 오래지 않아 헤어지게 되었다. 언뜻 두 사람의 다툼은 헤어짐의 직접적 원인으로 보이지만, 지연은 “그 일 때문에 우리가 헤어진 것은 아니다”라며 둘 사이의 인과를 단정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더이상 복구가 어려운 수준으로 관계가 망가졌을 때 이별이라는 수순을 밟았을 뿐이다”(194면)라며 이별을 ‘운명적 순간’으로 인식한다.
그녀에게 운명은 ‘타입’, ‘출신’ 같이 선택할 수 없는 선험적인 배경들이 ‘애초’부터 상수로 ‘자리’하고 있는 미래와 같다. 운명의 공식에는 우연적 사건과 후천적 노력들이 변수로 작용할 자리가 없다. 은호의 중산층 의식과 모나지 않은 성격, 무신경함에서 두 사람의 뻔한 결말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서로 다른 조건과 배경의 남녀가 만나 겪게 되는 일들 역시 새드엔딩이든 해피엔딩이든 그녀에게는 모두 뻔한 이야기인 셈이다. 이러한 운명의 목록에는 전통과 도덕, 생애주기마다 강요되는 통과의례들처럼 오랫동안 이어져온 관습화된 서사들 역시 포함된다. 집성촌이라는 공간에서 엄마와 이모의 갈등이 불가피했듯 이모가 집성촌을 쫓기듯 떠난 것 역시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이다. 엄마가 “그런 일이 아예 없었다고”(189면) 말하게 되는 것도 그러한 일들이 일상적이고 관습적이어서 특별한 사건으로 인식되지 못했던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운명적 체념’의 정서를 띠지 않는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 모든 회상이 그로부터 삼년 후 “야근 중에 충동적으로 ‘해외이민’을 검색창에 쳐보던 순간”(195면)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이모에 관한 기억으로부터 시작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게 거슬러 간 시간이 현재를 회복하면 그녀가 도달해 있는 자기인식이 드러난다. 그녀는 지금 다른 사람들이 “여기에서는 비전이 없어”라고 말하는 유통회사에서 버티는 중이다. “하지만 버티다보니 버텨졌고, 시간이 흘렀다.”(같은 면) 버티기만 해도 시간은 흐른다. 이것이 그녀가 이 시간 체험을 통해 유일하게 인정하는 현재의 앎이다. 비전 없음을 버티는 시간. 혹은 비전 없이도 흐르는 시간. 이 미래와 무관한 시간이 그녀가 체험하는 시간의 형식이다. 운명이 과거로부터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미래와 같은 말이라면, 그녀는 운명을 모른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 그녀에게 과거로부터 도착한 앎은 어떤 미래도 예시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운명을 아는 것이 아니다. 허황된 미래보다 지금 이 순간, 현재의 시간이 절실하다.
이향하는 여성(에 대한)의 동경과 환멸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고향의 온기. 그 아래 도사리고 있는 무겁고 강한 유대관계. 상실한 온기를 대체한 양모 이불. 은호의 가벼운 구스 이불. 가벼운 이불이 역설적으로 지시하는 무거운 유대관계. 거듭된 회상을 통해 전도되는 가치들은 서울과 지방이라는 도체의 운명적 상수에 따라 열역학 법칙을 따르듯이 자연스레 우세한 쪽으로 기운다. 지연의 시간 인식은 그러한 운명적 서사에 대한 인식과 거부로 나아간다. 그 중심에 보배 이모가 있다. 오래전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남편이 뉴질랜드로 유학을 떠나면서 고향으로 내려온 이모는 엄마와 갈등을 겪고 얼마 후 다시 고향을 떠나 뉴질랜드에 정착한다. 지연은 SNS를 통해 본 이모의 모습을 “트랙터를 몰며 너른 들판을 누비”(196면)는 명랑한 초록빛으로 묘사한다. 이 명랑함은 김유담의 다른 여성인물들이 이향과 귀향으로 겪게 되는 곤경과 대조를 보인다. 그렇다면 보배 이모의 서사는 여성의 이향/귀향 서사 혹은 서울로의 입사기의 성공담일까.
최근 여성인물의 이향/귀향 서사를 오디세우스의 남성적 플롯에 대한 ‘대항서사’9로 읽는 독법을 따르자면, 이모의 서사는 행동과 플롯을 변주한 ‘귀향하지 않는 오디세우스와 바다로 간 페넬로페’10라고 요약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배 이모에게는 결정적인 의문점 하나가 남아 있다. 이모는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 대한 동경과 향수를 품고 있는 인물이다. 피티의 동경과 마찬가지로 향수 역시 이미 상실한 곳에 대한 그리움이다. 달성될 수 없음에도 시도하고 결과적으로 패배하고 마는 것이 소설 속 주인공의 운명이라면, 이모의 이향은 실패로 끝나야 한다. 이모의 서사가 성공담이라면, 이모는 정해진 운명을 현실화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서사시의 주인공이다. 내처 이모의 딸 보배는 “엄마 우린 뉴질랜드 언제 가요?”(176면)라고 하는 데서 이 기묘한 향수를 물려받은 듯 보인다. 모계유전을 넘어 이 향수는 오촌 조카인 지연에게까지 전염되어 “한번도 만난 적 없는 뉴질랜드 이모부에 대한” 일기를 쓰도록 부추긴다. “크고 넓은 세계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포부”가 담긴 일기를 “완성한 순간부터” 어린 지연은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가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169면)
하지만 어린 날의 일기를 곧이곧대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일기를 쓴 어린 지연과, 뉴질랜드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모를 두고 “마치 그곳에서 오래 살다 온 사람처럼 이야기했다”(176면)라고 새삼 느끼는 대목 사이에는 인식상의 단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린 날의 일기에는 미래에 대한 낙관적 비전이 담겨 있다. 하지만 한낱 일기를 ‘완성’이라 표현한 것은 어린 지연이 아니라 서술적 자아인 서른의 지연이다. 경험 많은 현재의 지연은 완성된 일기 속 포부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에서 비롯한 낭만적 동경임을 이미 알고 있다. 말하자면 저 일기는 어린아이의 협소한 세계관과 그 영혼(자아)이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서사시의 일종인 것이다.
물론 이모를 향한 어린 지연의 동경은 그녀가 고향을 떠나게 되는 직접적인 동인이었다. 때를 맞춰 이모가 보내온 양모 이불은 “새로운 세상에서 눈감고 눈뜨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었”(181면)고, 서울 생활의 삭막함을 견디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이 대목을 거듭된 회상의 형식에 비추어 보면 그 안에 도사린 환멸이 고개를 내민다. 분명 저 새로운 세상에의 ‘실감’은 실재가 아니라 이불의 온기가 불러온 환상이다. 하지만 서른의 지연에게 그 환상은 유효하지 않다. 이모가 뉴질랜드에서 자신의 싸움을 벌이는 동안 그녀는 남자친구와 만나 헤어지고 수차례 취업에 실패한 뒤 비전 없는 회사에서 버티는 중이다. 스무살에 체감했던 것보다 훨씬 더 녹록지 않은 현실을 경험하며 환상의 장막은 벗겨진다. 환멸. 환상이 실재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은 늦은 감이 있다. 엄마와 이모의 다툼은 그 자체로 두 인물이 상징하는 가치들의 힘겨루기였고, 엄마가 상징하는 강력한 가치에 이모가 패배하고 밀려났을 때 그 현실은 제 모습을 이미 드러냈던 것이다. 어린 지연은 현실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모의 처지가 자신의 운명임을 모르는 어린 지연은 엄마가 아니라 이모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상징적 싸움의 의미를 지금의 지연은 명확히 안다. 그러므로 “이모가 고향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떠올리면 절대 그곳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198면)라고 서른이 된 그녀는 단호히 말할 수 있다.
지연은 보배 이모를 떠올리며 위로를 받는다. 이 위로는 그녀의 성공이 자신의 성공을 예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먼 곳에 있는 누군가에게 다정한 마음과 응원을 보내는” 자기 자신의 ‘다정함’에서 온다. 다른 사람을 연민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이 작은 위안은 더는 현재를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을 때 요동치는 마음을 다스리는 그녀만의 현실적인 방법이다. 이제 그녀는 “필터링을 거친 인스타그램 사진”(198면)의 낭만적 이미지 이면에 숨겨진 이모의 시행착오와 좌절을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한다. 이모는 이제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모는 과거의 기억에 머물러 있지 않고 여전히 그곳에서 분투 중이고, 자신 역시 이모와 같은 처지에서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아직 성공도 실패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 앞에 놓인 관습적인 서사들을 거부함으로써 “전통적인 (종족, 종교, 인종, 관습 등의) 차이를 점점 중요치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는 능력”11을 갖게 되었다. 페넬로페를 정숙한 여인으로 만든 것은 오디세우스의 부재를 틈탄 숱한 구혼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시아버지의 수의를 밤마다 짜고 풀었던 기지 때문이 아니라, 이미 삶의 의미를 결정지은 ‘정숙한 여인’이라는 운명 때문이다. 지연과 이모는 전혀 다른 입장과 상황에 놓여 있지만, 무겁고 관습적인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점에서는 모두 운명을 알고 싶지 않은 페넬로페들이다. 이제 그녀는 이모에게서 동경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197면)와 가벼운 동질감을 느낀다. 따지고 보면 먼 관계이지만, 약간의 인력이 느껴질 만큼만 멀고, 또 서로에게 무거운 책임이 없는 동시에 무거운 관계로부터 벗어나고자 애쓰고 있음을 공유하는, 지금 나만 애쓰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동류의식에서 오는 가벼운 유대감. 바로 여기에서 그녀는 현재 직면한 연대의 힘겨움과 가능성을 동시에 엿본다.
―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천병희 옮김, 숲 2006, 283면. ↩
- 그런 이유로 「고두」는 누락된 피해여성의 목소리로 서술된 소설과의 겹쳐 읽기가 적극적으로 수행되었다. 서영인(「미투 이후의 문학비평」, 『21세기문학』 2018년 여름호)은 김이설의 「부고」와, 인아영(「답을 주는 소설과 질문하는 소설」, 문장웹진 2018년 9월호)은 김멜라의 「적어도 두 번」과 「고두」를 겹쳐 읽은 바 있다. ↩
- 리타 펠스키 『근대성의 젠더』, 김영찬·>심진경 옮김, 자음과모음 2010, 76면. ↩
- 신샛별 「프레카리아트 페미니스트」, 문장웹진 2017년 7월호. ↩
- “The counterpart to the imagined future is the imagined past.” Malcolm Chase and Christopher Shaw, “ The dimensions of nostalgia,” The Imagined Past: History and Nostalgia, ed. Malcolm Chase and Christopher Shaw,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89, 9면. ↩
- 신샛별 「불평등 서사의 정치적 효능감, 그리고 ‘돌봄 민주주의’를 향하여」, 『창작과비평』 2020년 여름호 37면. ↩
- 낸시 프레이저가 지적하듯 산업자본주의는 남성가장이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고, 여성은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이른바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을 규범적인 가족 이미지로 제시해왔다. 낸시 프레이저 『전진하는 페미니즘』, 임옥희 옮김, 돌베개 2017, 157~58면. ↩
- 폴 리쾨르 『타자로서 자기 자신』,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 34면 참조. ↩
- 가령 신샛별(「지방-여성 서사의 문학사적 반격: 강화길론」,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8년 가을호)은 강화길의 『다른 사람』을 ‘하인숙(들)의 이야기’로 해석하는가 하면, 손정수(「오디세우스 마스터플롯의 여성적 전도 과정: 「무진기행」의 대항서사들을 중심으로」, 『현대소설연구』 78, 2020)는 공지영, 김금희, 강화길, 이주란의 소설을 오디세우스 플롯의 여성적 전도 과정의 통시적 단계로 설정해 읽은 바 있다. ↩
- 세마 시르벤트 라구나의 그림책 『바다로 간 페넬로페』(라울 니에토 구리디 그림, 김미선 옮김, 책과콩나무 2020)에서 힌트를 얻었다. ↩
- 리처드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김동식·>이유선 옮김, 민음사 1996, 349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