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특집│문학, 정치, 민주주의

 

진실의 습격

민주주의와 문학 그리고 자본주의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민족문학의 ‘정전 형성’과 3·1운동: 미당 퍼즐」 「우리들의 일그러진 ‘리버럴’: 비평이 하는 일에 관한 메모」 등이 있음.

netka@hanmail.net

 

 

1. 해체의 역설

 

발단은 서정시였다. “시를 일인칭 독백의 형식으로 간주하거나, 시 장르가 자아와 세계의 동일시를 통해 구성된다는 가정”1을 토대로 수립된 서정시론은 2000년대 들어 ‘미래파’ 담론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고 당시 등장한 많은 시인들이 이 ‘새로운’ 물결에 호응했다. 미래파 기치의 최초 고안자였던 권혁웅은 이 사태를 “시는 더이상 일인칭 독백의 형식이 아니”2라는 말로 요약했는데 2000년대의 시적 유산에 대한 신형철의 관찰 또한 다르지 않았다. “2000년대의 어떤 시인들 덕분에 한국시는 ‘시인(일인칭)의 내면 고백으로서의 시’라는 일면적이면서도 지배적인 통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이제 시는 누구도 될 수 있고 무엇이건 말할 수 있다.”3 그런데 최근에 등장한 한 신예비평가는 2000년대 시 비평담론을 두고 “개개인의 자아가 젠더, 계급, 지역, 인종 등 다양한 위치성이 가로지르는 복합적인 장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면밀한 관찰 없이 자아는 그 자체로 해체되어야 마땅한 권능함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데 일조”함으로써 ‘자아의 해체’를 마치 “좀더 윤리적이거나 혹은 미적인 것”4처럼 호도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주목할 만한 견해다. 왜냐하면 미래파의 출현 이후 지금까지 진행된 시와 정치(또는 윤리), 페미니즘 ‘리부트’ 그리고 최근의 ‘일인칭의 역습’ 논의 등을 고려할 때 원칙적 수준에서 전제되는 자아의 해체는 자칫 다양한 소수자 ‘나’들의 목소리마저 일괄 배제해버릴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결론적으로 제시되는 새로운 자아의 면모 또한 의문을 낳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정체성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며 관계 속에서 구축되고 허물어지고 새롭게 그려질 수 있는, 일종의 지도와 같은 것”5이라는 인식 아래 여성, 동물, 기계의 자리를 ‘새로이’ 마련하는 것과 “발언권을 거의 가져본 적이 없는 존재들이 입을 열었다는 사실, 그것이 중요하다”6는 이전 비평담론의 강조 사이에는 보기보다 차이가 거의 없는 듯하기 때문이다. “폭력의 구조 안에서 여성은 자신을 재현할 언어를 갖지 못하는 위치에 자리하기도 한다”7는 있는 그대로 타당한 예시와 “요컨대 대의불충분성과 대의불가능성, 이것이 2000년대의 한국의 정치적 조건이고 바로 그 무렵에 2000년대 시들이 쓰이고 읽히기 시작했다”8는 ‘포착’ 사이에서도 본질적 거리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탈서정에서 여성으로, 퀴어로, 동물로, 기계로 강세의 위치를 조금씩 옮겨왔을 뿐 끊임없이 다른 듯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있는 게 아닐까.

미래파의 탈서정이 서정의 지속적인 부활 없이 자립할 수 없고 이른바 포스트휴먼의 동물, 사이보그 또한 인간 중심주의의 반복적 재생 없이는 정치적으로 의미화되기 어려운 것처럼 ‘나’라는 의제의 과도한 중심성은 그에 대한 해체주의적 열정이 낳은 역설에 의해 오히려 불식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니 ‘나’의 ‘정체’나 ‘위치’보다 그 존재 조건들로 물음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들이 크게 보아 ‘문학과 정치’라는 범주에 속해 있는 만큼 그 조건들 중에서도 민주주의가 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갈수록 빈틈없이 규정해오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계기와의 관련 속에서일 것이다. 당연히 문제는 시에 한정되지 않는다.

 

 

2. 자아의 민주화: 이장욱의 소설론과 「복화술사」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장욱의 산문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9(이하 「그러나」)는 일종의 소설창작론이다. 그 자신이 미래파 관련 논의에 참여했던 비평가이기도 했기에10 더욱 주목되는 측면이 있는데 그는 우선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1인칭을 벗어날 수 없지만 동시에 무수한 1인칭들의 교차와 충돌과 이합집산에서도 역시 벗어날 수 없다”(173면)고 선언한 다음, 한걸음 더 나아간다.

 

진실은 발언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 시선 사이에서 마치 에피파니처럼 자신을 힐끗, 보여주는 것이라고 배웠다. 이 경우 진실은 아름답거나 올바르거나 매력적인 문장으로 재현되지 않으며 대표되지도 않는다. 진실은 언제나 1인칭으로 재현 가능한 세계 너머에서, 건조하고 잔인하며 아름다운 방식으로 우리를 습격한다.(174면)

 

‘진실’이라는 의제가 추가되었거니와 이것이 단순한 일인칭 부정론 또는 그와 연동하는 재현 부정론과 차별된다는 점은 분명히 감지된다. 진실이 “이질적 시선 사이에서” 문득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말은 진실이 서로 다른 “재현”과 “대표”들의 “교차와 충돌과 이합집산” 가운데서야 ‘비로소’ 드러난다는 뜻일 것이다. ‘진실을 재현한다’는 것과 ‘재현을 통해서 또는 재현 가운데 진실이 드러난다’는 것은 명백히 다른 차원이다. 전자가 동일성의 원리라면 후자는 매개의 원리이기 때문인데 그는 “재현”과 “대표”라는 두 낱말을 은근히 겹쳐 씀으로써 자신의 창작론을 민주주의의 문제로 확장한다. 알다시피 두 낱말은 모두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의 역어이며 동시에 정치적 대의(代議)를 의미한다. 글의 시작과 끝에 작가 자신이 실제로 체험한 “소규모 공동주택에서 벌어진 이웃 간의 소송전”(178면, 이하 같은 면에서 인용)을 예화로 배치한 것 또한 이와 긴밀히 호응한다. 그 경험을 통해 그가 오늘날 소설 쓰기의 의미에 대해 새삼 성찰하지 않을 수 없었던 본질적 의문은 그러니까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오늘날의 ‘공동’은 ‘코뮨’이 아니고 ‘커뮤니티’도 아니고 심지어 ‘커먼’도 아닌 것 같다. 이제 우리의 ‘공동’은 진영 논리와 확증편향과 적대적 공존의 재생산 속에서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때 인문학에서 회자되었던 ‘공통체’나 ‘다중’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우리는 공동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합당한 결론으로 사태의 윤리적 봉합을 서두르지만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더 밀고 나가보기로 한다. 진실의 드러남을 가로막고 은폐하는 “진영 논리와 확증편향과 적대적 공존의 재생산”의 근거지 또한 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일인칭’이고 그에 기초한 ‘민주주의’이되 우리가 그것을 벗어날 수도 없는 운명이라면 도대체 그것은 어떤 ‘일인칭’이고 ‘민주주의’인가.

종종 거론되듯 정체성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어서 얼마든지 재구성할 수 있다면 이때의 일인칭 ‘나’는 늘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그렇다면 ‘나’의 내부에 거주하거나 그곳을 드나드는 무수한 ‘나’들 사이에서의 민주주의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나 공동체의 통치술로서 민주주의는 많은 경우 자명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거나 이따금 의심되기도 하지만 개별자의 ‘자아통치’라는 차원에 대한 조명은 충분치 않았던 것 같다. ‘민주(民主)’를 글자 그대로 ‘저마다의 주인됨’이라고 푼다면 그야말로 비유에 지나지 않는 얘기일지는 몰라도 그 주인됨의 다양한 양식에조차 모종의 통치철학이 요구되는 셈이다. 거기서도 독재와 전제(專制)뿐 아니라 직접이든 대의든 하물며 숙의와 추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민주 정체(政體)가 존재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까 관건은 자아 그 자체라기보다 어떤 ‘자아화’인가, 주체라는 관념 그 자체가 아니라 자아통치의 양식으로서 그것은 어떤 ‘주체화’인가이다. 고정된 자아에 대한 그릇된 집착을 일컫는 아상(我相)이나 배타적 자기애로서 나르시시즘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모두가 저마다의 참된 주인됨을 가로막고 진실의 드러남을 은폐하는 일종의 ‘자아독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의 ‘공동’이 “진영 논리와 확증편향과 적대적 공존의 재생산 속에서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그만큼 우리 삶의 경험구조가 더 많은 자아독재를 요청하고 단련하는 방향으로 조형되어 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때의 자아독재란 그것의 경제적 표현인 사적 소유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자아를 하나의 사유재산으로 전락시키는 한편 사유재산은 자아의 반영으로 의미화하는 메커니즘을 작동시킨다.

산문 「그러나」의 논리를 염두에 두건대, 이러한 조건 가운데 문학과 예술의 역할은 그러한 경험구조의 고의적 교란이나 재배치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만나고 사랑하고 충돌하고 파산하고 재생”되는 “소설 내부의 벡터들”이 “자신도 모르게 다른 가치들을 도입하고 다른 세계의 인간들을 소환하며 다른 종류의 사랑을 수립한다”(174면)는 진술은 그밖의 다른 뜻이기 어렵다. 이것이 작가 이장욱의 ‘문학의 정치’라면 그 가장 탁월한 소설화 사례로는 「복화술사」11를 들 수 있다.

이 소설은 화자인 복화술사가 숨은 청자인 소설가를 상대로 전하는 이야기다. “복화술은 배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에요. 그를 둘러싼 세상의 공기를 몸 깊은 곳에 모아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86면, 이하 86~87면에서 인용)라는 화자의 발언에서 연상할 수 있듯 복화술사는 소설가의 은유다. 따라서 이 작품은 소설로 쓴 소설론인 셈이다. 초점은 자연히 “세상의 공기”로 옮아간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이를테면 화자가 자신의 아버지(집안 3대가 모두 복화술사다)를 회고하는 장면에서 우회적으로 드러난다. 1980년 5월항쟁의 비극이 광주를 휩쓸고 지나간 어느 겨울, 충장로우체국 앞에서 화자의 아버지는 전래동화 ‘금도끼 은도끼’를 구연하다 산신령이 등장해 나무꾼을 만나는,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웃음이 터져야 할 대목”에서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린다. 더 놀라운 것은 “마치 전염이라도 된 듯” 구경꾼과 행인들이 함께 울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희극이 아니라 비극을 공연하는 복화술사라는 것이 가능할까요?” 화자는 짐짓 능청을 부려보지만 희극과 비극을 가르는 것은 정작 복화술사(소설가)나 구경꾼(독자)들이 아니라 “세상의 공기”라는 점을 이 소설은 전한다. “세상의 공기”가 울고 있었으니 “그 울음바다를 아무도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은 “세상의 공기”가 무엇인지를 직접 말하는 대신 복화술사와 청중들의 모습을 충실히 재현함으로써 그 가운데 “세상의 공기”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게 한다. 일반적인 일인칭 소설에서와 달리 이 작품의 화자는 그가 제공하는 정보와 전언들에 관한 한 독자들이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운 인물이다. 그의 목소리는 복화술사답게 이미 여럿이고 전하는 이야기는 대개 허구적 우연과 현실적 개연성 사이를 위태롭게 오간다. 그러나 화자에게 의미의 독점권을 부여하지 않는 바로 그러한 선택을 통해 “세상의 공기”는 한 시대의 분위기를 막연하게 가리키는 기호로서가 아니라 진실의 공유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선량한 자본주의 주체들의 우주: 김초엽과 오선영의 단편

 

하지만 복화술사와 청중들이 함께 울었던 그 거리는 명백히 과거에 속한다. 작품이 끝나갈 쯤, “이제 자신은 더이상 사람의 목소리에는 관심이 없다”(115면)는 어느 은퇴한 원로 복화술사의 일화가 끼어드는 것도 어쩌면 과거와 현재 사이의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을 드러내기 위함일 것이다. 80년대 광주에서라면 글자 그대로의 ‘민주’가 문제될지언정 ‘자본’은 아직 흐릿한 배경이었겠지만 이제 상황은 거의 정반대다. 이제는 세상의 공기가 희박해지는 곳으로 나가 앞서 말한 간극의 정체를 추적해보기로 한다. 예컨대 외계나 우주공간 같은 곳.

김초엽의 「최후의 라이오니」12(이하 「라이오니」)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SF 재난서사이자 생존서사다. 태생적으로 고통과 두려움을 모르고 성장 과정에서도 오직 강인함을 요구받는 ‘로몬’이라는 존재들은 일종의 복제인간인데 ‘나’ 또한 그들의 일족이다. 그들은 주로 멸망한 행성에서 가용자원을 회수해 유통하는 사업을 담당하기에 ‘회수인’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복제와 성장 과정에서 빚어진 어떤 시스템 오류로 인해 ‘나’는 다른 로몬들과 달리 불안과 공포에 민감하다. 멸망과 죽음을 상시적으로 목도해야 하는 로몬으로서 그것은 치명적 결함일 수밖에 없다. “평균은커녕 바닥에 밟히며 좌절하는 경험을 늘 하”던 ‘나’는 행성 ‘3420ED’의 의뢰를 받고 자신이 “가진 결함의 근원”(24면)을 찾아 그리고 동료들에게 스스로를 입증하기 위해 단신으로 회수 임무에 나선다. 작품의 주요배경이 되는 ‘3420ED’는 한때 번성했으나 지금은 폐허가 된 행성으로 이곳에 살던 인간들은 모두 감염병으로 죽거나 떠났으며 현재는 소수의 기계들만이 “그들만의 소박한 문명을 구축하고 있”(15면)다. 거기서 ‘나’는 지능과 자의식을 갖춘 기계이자 ‘3420ED’의 시스템 오퍼레이터인 ‘셀’을 만나는데 ‘셀’은 ‘나’를 라이오니라는 인간으로 오인한다. 라이오니는 ‘3420ED’의 불멸인들이 이곳을 버리고 떠날 무렵 기계들을 인도해 함께 탈출하려 했던 인간 소녀의 이름이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면 ‘나’가 라이오니의 복제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에필로그로 들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대목을 가져오기로 한다. ‘3420ED’에 가까스로 잔존한 기계문명과 함께 ‘셀’ 또한 최후를 앞두고 있다.

 

시간이 흐른 후에 나는 그 순간들을, 셀이 나에게 들려주던 이야기들을 다시 복기해본다. 셀은 정말로 내가 라이오니라고 믿었던 것일까, 아니면 믿지 않았지만 믿는 척 흉내 낸 것일까. 후자라면 그렇게 우스운 일도 없었던 셈이다. 나는 셀이 나를 라이오니라고 믿으리라 생각하며 라이오니를 연기하고, 셀은 그런 내가 라이오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라이오니라고 믿는 척 연기하는 이중의 연기가 우리 사이에 존재했던 것이니까.(46~47면)

 

‘나’는 “제대로 된 임무라고는 하나도 수행하지 못하는 형편없는 회수인이었던 시절, 생계를 위해 네트워크에 여러 글을 기고했던 적이 있”(19면)을 뿐 아니라 어느 누구 못지않은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나는 열흘간 셀의 옆에 머물렀다. 셀에게 내가 셀을 만나기 위해서 했던 수많은 일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도시를 탈출한 이후에 어떤 무시무시한 멸망들을 마주했는지, 어떻게 터널을 넘었고 새로운 문명과 행성을 발견했는지, 그곳에서 셀과 기계들을 구할 방법을 찾기 위해 얼마나 분투했는지 (…) 대부분은 거짓말이었지만 나는 마치 그 일들을 직접 겪은 것처럼 말해줄 수 있었다. 적어도 나의 고통, 혼란, 슬픔과 두려움은 모두 실재하는 것이었다. (…) 셀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나는 그를 다독여줄 수 있었다.”(46면) 화자와 청자가 모두 소수자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이 결말은 불가항력의 재난 앞에 선 소수자들 또는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왜소화되고 위축된 주체들 사이의 공감과 연대를 초점화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조그마한 위로의 공동체를 에워싸고 있으면서 그들의 최후를 무심히 지켜보고만 있는 우주의 정체에 대해서도 한번쯤 물음을 던져볼 만하다. 예컨대 이런 대목 때문이다. “행성 생태계에서 미생물들이 죽음을 다시 삶의 원료로 되돌리듯이 우리(로몬—인용자)는 전 우주적 규모에서 순환의 매개체를 자처하며, 이러한 삶의 방식에 자부심을 가진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기생하여 살아가지만, 그것은 우주의 모든 삶에 적용되는 것이다.”(20면) 또다른 진술을 참고할 수도 있다. “인공 생태계의 동물과 식물이 모두 죽었다. 기계들이 간과했던 것은, 라이오니에게는 다른 생물이, 그리고 다른 생물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유기체의 존재 조건이었다.”(41면) 이것은 “사회 형태와 무관한 인간생존의 조건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 따라서 인간생활 자체를 매개하는 영원한 자연적 필연성”13이라는 일반원리의 재천명이 아니다. 기계가 인간노동을 반영하는 데서 인간이 기계를 반영하는 단계(로몬, 불멸인 등)로 일찌감치 도약한, 난숙한 기계문명을 배경으로 상품 형태의 물질순환이 마치 ‘제2의 자연’처럼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주’는 자본주의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14 “우주에는 두 종류의 멸망”, 즉 “가치 있는 멸망과 가치 없는 멸망”(19면)이 있다고도 했거니와 여기서 말하는 ‘가치’는 따라서 상품가치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아울러 로몬으로서 ‘나’가 무한히 팽창하는 이 ‘우주적’ 자본주의 시스템(작중 “시스템”의 역할은 언제나 결정적이다) 안에서 어떤 계급적 위치에 놓여 있는가도 흥미로운 주제이다. 맥락상 그는 자신의 생산수단을 어느정도로는 스스로 소유한 소(小)자본가에 가깝다. 하지만 그는 태생적 조건(공포와 불안, 연민을 느낌) 때문에 자기 일족들의 무정한 이윤추구에 동조하지 못할 뿐 아니라 “로몬들에게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21면) 요컨대 그는 ‘선량한’ 소자본가다. 그러므로 ‘나’가 자의식을 지닌 기계들(노동계급)과 함께 우주(자본주의 시스템) 가운데로 소멸하는 대신 가족과 동료들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어 “나에게 주어진 이 태생적 결함(선량함의 원천들—인용자)이, 사실은 결함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48면) 하게 된다는 작품의 에필로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모순의 로맨스적 봉합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문명의 위기를 자본의 도덕화를 통해 완화 또는 저지하려는 몽상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앞서 살핀 대로라면 이 소설에서 자본주의는 우주 그 자체이며 곧 ‘제2의 자연’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자연은 처음부터 도덕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외계행성 ‘3420ED’와 같은 곳에서라면 자의식을 지닌 주체나 그들 간의 민주적 연대 역시 난숙한 자본주의의 왜소한 반영물(수많은 복제인간들!)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며 예의 소자본가들의 운명 또한 그들 자신의 주관적 선의와 무관하게 소설을 시종일관 지배하는 파국의 예감 속으로 해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령 ‘셀’의 죽음 이후에는 다음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수탈의 대상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다수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다. 이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의 내재적 법칙의 작용을 통해, 자본의 집중을 통해 수행된다. 항상 하나의 자본가가 많은 자본가를 파멸시킨다.”15 그러므로 「라이오니」에서 주목할 점은 작품이 표면적으로 제시하는 약자들 사이의 공감과 연대라는 비전보다 그러한 비전의 제시를 위해 구축된 하나의 가상이 자본주의 메커니즘과 맺은 적나라한 상동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이러한 작동원리들은 외계행성 ‘3420ED’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의 부산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는 듯하다. 오선영의 단편 「호텔 해운대」16의 결말이다.

 

민우가 9급 공무원이 되어도 특급호텔에 편하게 올 수 없을 것이다. 민우도 나처럼 매달 카드값에 힘들어할 거고, 퇴직과 이직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월요일이 오면 꾸역꾸역 출근을 하겠지. 우리가 잡을 수 있는 건 서로의 마른 손이지 호텔 카드키가 아닐 것이다. (…) 수정이 민우에게 팔짱을 껴도 반응이 없었다. 그 순간, 수정은 보았다. 민우의 눈이 어떤 욕망과 야망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바다보다 더 멀리, 바벨탑보다 높게 솟아올랐다. 제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눈. 수정은 자신이 한 생각을 민우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짧은 순간 깨달았다. 그리고 민우가 원하는 것을 자신이 줄 수 없다는 것도. 수정의 손바닥이 얼음 덩어리를 움켜 쥔 것처럼 차가워졌다. 팔짱을 빼면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럼에도 민우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 소설의 뼈대는 간단한 편이다. 부산의 한 소규모 출판사에 다니는 주인공 수정은 어느날 라디오의 퀴즈 이벤트에 당첨돼 공짜로 호텔숙박권을 얻게 된다. 주말에는 추가요금이 붙기에 그는 어느 평일 하루 동안 취업준비생 신분인 오랜 연인 민우와 함께 ‘호캉스’를 즐기기로 한다. 그런데 “공부에 지친 민우에게 휴식과 힐링의 시간을 주고 싶”어 계획한 이벤트 주위에는 당첨의 행운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난관들이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다. 그런 까닭에 정작 이 소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1박 2일의 행운이 아니라 그로 인해 오히려 도드라지는 수정과 민우의 환경적 제약들이다. 그것들은 “능숙하고 세련되게, 모든 것이 익숙한 단골손님처럼 행동하고 싶었”던 수정의 몽상을 사사건건 교란하거니와 그들의 본질, 그들이 지방도시에 거주하는 가난한 청춘들이라는 사실을 거듭 드러낸다. “평균은커녕 바닥에 밟히며 좌절하는 경험을 늘 하”(「라이오니」 24면)던 ‘나’들이 여기서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다. “부산에 출판사도 있어요? (…) 그때마다 수정은 지역문화예술계의 상황과 작은 출판사의 중요성, 문화의 획일화와 대형화에 저항하기 위한 여러 사례들을 나열하면서 제가 하고 있는 일의 필요성과 중요도에 대해 말하곤 했다. (…) 수정은 질문자의 변화된 태도를 보며 뿌듯해하다가, 문득 회사명 하나로 제 존재를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 그러니까 이 땅의 콜라 역사를 바꾸기 위해 태어난 815콜라의 가치와 의의는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815콜라가 코카콜라나 펩시가 되기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앞서 인용한 소설의 결말에서 보듯 작품 안에서 시종 부차적인 위치에 놓여 있던 민우의 욕망이 어느새 수정의 현실타협적인 태도와 분열하며 한순간 비약한다. “바다보다 더 멀리, 바벨탑보다 높게 솟아”오른 그것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in서울”이나 수도권 진출은 고사하고 “in부산”, 그러니까 “살아온 터전에서 추방”되지 않으려는 경쟁에서조차 열세를 면치 못하는 듯 보였던 민우에게 그것은 당면 현실의 조건을 초과하는 무엇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민우를 충격한 모종의 각성이 아무리 강도 높은 것이었다 해도 그것이 나아갈 방향은 아직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오히려 두드러지는 것은 지금까지 민우를 지탱해왔던 비전, 즉 “in부산”에 대한 부정의 에너지다. 말하자면 그는 “in부산”의 현실원칙들을 폐기함으로써 그것을 연료로 삼아 “바다보다 더 멀리, 바벨탑보다 높게” 타오르고 있는 중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in부산”의 현실원칙들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조건, 이를테면 자본주의적 질서 그 자체의 부정으로 향한 것은 아니다.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유한계급(leisure class)의 이미지를 모방하게 함으로써 한시적 만족감을 부여하는 ‘호텔 해운대’의 본질에 대해서는 소설 속에서 더이상 질문되지 않기 때문이다. 관점에 따라 이는 작품의 한계로 보일 수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815콜라가 코카콜라나 펩시가 되”지 못하는,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내재화가 아직은 불완전한 단계의 심성구조를 비교적 정확히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 불완전성이란 계급, 지역 간의 상이한 발전 속도로 인해 만들어지거니와 어쩌면 그 낙차들의 생산과 재생산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본질적 기능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in부산”의 현실원칙을 폐기한 댓가로 얻어낸 초월의 몽상은 그것을 글자 그대로의 몽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같은 논거에 의해 거꾸로 현실의 누추함을 환기한다.

오선영의 또다른 단편 「다시 만난 세계」17에서도 초월의 몽상은 주인공의 선택과 행위를 이끄는 원리가 되는데, 예의 낙차의 감각을 보여주는 데서도 충분한 요령을 얻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학내 성폭력사건에 항의하는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로 학생들에게 페미니스트로 지목되어 강의평가에서 경고를 받을 위기에 처한 “지역 대학의 박사 수료생인 젊은 여자 시간강사”(93면) ‘나’가 학부 시절 자신을 여성주의에 눈뜨게 했던 선배 유리를 회상하는 대목이다. “유리 언니처럼 하늘하늘한 몸매에 프라다 구두를 신고, 샤넬 향수를 뿌린 이도 없었다. 나는 유리 언니가 정말 좋았지만, 도통 언니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언니는 뜻을 모르는 러시아어 같았고,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는 추상화 같았다. 언니를 알지 못한 채 언니를 좋아하는 것만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답인 듯했다.”(99~100면) 이 대목은 결말에서 다시 부연된다. “유리 언니가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프랑스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한 지방 도시에 남아서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책 속 세계와 책 밖 세계를 통해서,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습득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예의 ‘백래시’ 사건에 맞닥뜨려 “그 모든 게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104면)에 빠져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는 추상화”의 진면목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습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처음부터 아니었으며 자신이 발 딛고 있다고 믿었던 민주주의적 토대 또한 본래 균열투성이였던 것이다. 그것은 ‘프랑스’와 ‘대한민국’, 그 각각의 내부에서 다시 또 나뉘는 도시들 사이의 복합적 위계라는 이미 자연스럽지 않은 조건들에 켜켜이 둘러싸여 있어서 그로부터 비롯되는 수많은 제약들과 일일이 마주치는 고통 없이는 초월 불가능한 지평에 놓여 있기도 했다. 따라서 “울지 않게 나를 도와줘”(106면)라는 노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함으로써 그 자체로 충분히 감동적인 결말도 약자들의 연대 이상으로는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4. 호미를 쥔 자들: 정성숙 소설집 『호미』

 

외계행성과 지방 대도시를 거친 만큼 이제는 농촌으로 시선을 돌릴 차례다. 자본주의의 이른바 시초축적(primitive accumulation)이 농촌의 해체를 통한 도시공업 노동자의 확충에서 비롯된다는 고전적 통찰을 염두에 둔다면 농촌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위력을 자신의 트라우마적 본질로 간직한 장소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학의 차원으로 건너오면 그러한 전제들은 농촌을 소외된 정체성이나 위치 바깥에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공식이 되기도 한다. 자본주의적 도시화 속에서 농촌의 사회적 입지가 줄어들수록 그로부터 산출되는 농민문학의 위상이 하강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거니와 작가와 독자의 압도적 대다수가 도시민들로 구성된 오늘날 문학 생산·유통의 구조가 이를 더욱 촉진한다. 어쩌면 농민문학의 실종을 우려하는 목소리조차 실종되어가고 있는 지금, 농촌에 대한 관습적 이해를 가로지르는 소설집을 들고 홀연히 등장한 작가가 바로 정성숙이다. 그의 이름은 아직까지 낯설다. 전남 진도에서 32년째 농사를 짓고 있다는 것 외에 공개된 이력이 없을뿐더러 흔히 말하는 등단이나 공모전 따위의 절차를 거친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십수 년 전에 쓴 소설들”을 서랍에 조용히 묻어두고 “변화무쌍한 요즘과는 시대성이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출판을 포기했었”던 상황이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농민들의 삶의 내용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판단이 들”어 출판을 결심했다고 ‘작가의 말’에서 담담히 밝히고 있다. “드론이나 자율주행트랙터가 등장했지만 호미로 풀을 뽑아야 하는 원시적인 고달픔은 여전합니다. 천한 일은 호미를 쥔 자들의 몫입니다.”18

그의 소설집 『호미』에는 문학 수업의 여부나 정도를 따지기가 무색할 정도로 완숙한 단편소설 여덟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우선은 호남 사투리의 일대 보고라고 해도 좋을 만큼 생동감 있는 언어 운용이 눈에 띈다. 가령 화자인 ‘나’(미자)와 동네 친구 창선의 우정을 중심으로 집을 나간 창선의 아내 미애의 사연을 엮은 「기다리는 사람들」은 도입부에서부터 생동감 이상의 상징성까지 획득하고 있어 인상적이다.

 

“참말로 콤피터랑 연애했으끄나?”

“아무리 한다고 그런 기계하고 연애가 되겄소. 나가고 없은께 이 말 저 말 나온 것이제!”

“아따, 자네는 테레비를 건덕굴로 보는갑네. 할 일 없는 여편네덜이 콤피터랑 연애해갖고 서방이랑 갈라서는 것이 한둘이 아니라등마는.”

“그라믄 기계가 암놈 수놈 있다는 말이요?”(51면)

 

살아 있는 언어로 인물들의 성격과 관계, 그들을 둘러싼 환경을 고루 표현해주고 있는 이 작품의 결말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고추 시세의 폭락으로 처지를 비관한 나머지 일년 농사를 모조리 불태우는 창선과 본능적으로 그 불을 끄기 위해 “다람쥐처럼 뛰어다니며 물을 퍼”(83면)붓는 아들 민우의 대조적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아이러니인데 고추가 “불에 타든 물에 젖든 아무짝에도 쓸모없기는 마찬가지”(84면)라는 점에서 그 아이러니는 중첩된다. 이 중첩을 통해 고추 시세와 수매를 둘러싼 농촌 현실의 모순은 그 중요성이 끝내 감소되지는 않은 채 후경으로 물러나고 창선의 비관과 민우의 무구함은 그들 각자가 지닌 한계를 부정당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존중되는 것이다. 이는 앞서 논했던 바대로 현실 또는 진실을 그대로 빼닮은 재현이 아니라 ‘재현하는 가운데 진실의 드러남’이라는 차원의 훌륭한 예증이 된다.

하나하나 별도로 분석, 평가해야 할 작품들이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는 맥락에서 표제작 「호미」에 집중하기로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영산댁이라는 홀몸의 노인이다. “봉제공장 공장장이 되어 중국에 가 있는 큰아들”(23면)과 서울로 분가한 작은아들이 있지만, 그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골짜기의 소출도 형편없는 파밭 한뙈기를 자기 몫으로 일굴 뿐 대부분의 생계를 남의 농사 품팔이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파밭의 사연이 기구하다. 사실 그에게는 지금의 큰아들 위로 아들이 하나 더 있었는데 한센병에 걸리는 바람에 이웃들의 배척을 받았으므로 숨겨둘 수밖에 없었다. 채 성인이 되기도 전에 유명을 달리한 아들이 숨어 사는 동안 그 파밭을 일군 것이다. 이웃들에 대한 원망이 없을 수 없던 만큼 영산댁은 주민들 사이에서도 괴팍한 노인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인근으로 새 도로가 난다는 소문에 파밭을 팔아치우려는 둘째 아들과의 갈등이 있지만 영산댁은 요지부동이다. 거기에는 자기 온 생애의 절실한 그 무엇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산댁은 끝내 파밭에서 쓰러져 죽음의 위기를 맞는다. 영산댁이 마비된 몸을 끌고 산을 기어서 내려오는 예외적으로 긴 장면이 이 소설의 결말이다.

 

영산댁은 손과 발을 움직여봤다. (…) 오른쪽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여기서는 자신이 죽어서 살이 썩고 뼈만 나뒹굴어도 동네 사람들은 모르리라.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서 사람들 눈에 띄어야 한다. 그래서 서울로 쫓아가서 둘째 아들 기준이 언감생심, 산 너머 밭을 어쩌지 못하도록 오금을 박아놔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 손부리가 몹시 아팠지만 힘을 쓸 만큼의 구멍은 아직 멀었다. 문득 호미만 있으면 깊은 샘이라도 팔 것인데… “호무, 그래 호무!”, 영산댁은 오른발 근처에서 호미를 찾아내자, 어쩔 수 없이 까치밥이 될 모양이다 싶던 두려움을 다 물리칠 수 있었다. (…) 그러고는 호미 자루를 잡고 몸체를 이끌었다. 몸뚱이가 처음으로 산 아래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 반딧불 같은 불빛 두 개가 동네를 향해 날고 있었다. (…) 차가 멈추자 기다리고 있던 일곱 명의 사람들이 차 안으로 들어갔다. 동구댁은 맞춰야 할 사람을 다 채운 모양이었다. (…) 그렇다면 영산댁 자신이 동네에 없음을 아는 사람이 아직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42~47면)

 

영산댁이 이대로 죽음을 맞게 될지 아니면 극적으로 구조되어 목숨을 부지하게 될지는 미지수다. 예측은 읽는 이의 몫이지만 죽음 쪽으로든 삶 쪽으로든 여전히 모든 가능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산댁이 쓰러지는 것부터 산길을 포복으로 내려가 인부들을 태우러 온 승합차를 멀리서 발견하기까지 장면 전환 한번 없이 이어지는 일곱면에 달하는 묘사는 그러한 궁금증이나 예측 자체가 부질없는 것임을 말해주는 가장 뚜렷한 근거다. 왜냐하면 이 장면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영산댁의 살아 있음’ 그 자체이며, 어느 면으로는 세 아들의 어머니이자 동네 사람들의 이웃이고 세상을 떠난 남편의 아내이자 무엇보다 농민이었던 영산댁 자신마저 넘어선 ‘살아 있음’ 그 자체의 감지 가능성까지 열어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동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호미’는 영산댁에 의해 순간적으로 생존을 위한 신체의 연장으로 변모하지만 그렇다고 노동을 위한 도구로서의 본래 목적이 유실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호미라는 사물을 매개로 ‘노동’과 ‘살아 있음’이라는 두 차원이 통합될 가능성이 열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듯 영산댁의 존재는 그 사회적 정체성과 위치를 기각하지 않은 채로도 정체와 위치의 자아 중심적 구심력을 벗어나며 그의 삶을 속속들이 규정해오는 자본주의적 조건들을 부인함이 없이도 ‘저마다의 주인됨’이라는 차원에 고유한 방식으로 도달한다. 만약에 문학의 정치라는 차원이 엄연히 있고 또한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바로 여기가 진정한 출발점일 것이다.

 

 

--

  1. 권혁웅 『시론』, 문학동네 2010, 23면.
  2. 같은 책 24면.
  3. 신형철 「2000년대 시의 유산과 그 상속자들: 2010년대의 시를 읽는 하나의 시각」, 『창작과비평』 2013년 봄호 365면.
  4. 김보경 「인간의 가장자리로 걷기: 여성, 동물, 기계」, 『문학과사회』 2020년 여름호 420~21면. 시에서 ‘나’의 문제를 둘러싼 최근 논의의 흐름을 개관해주는 글로는 조대한 「‘나’의 응답: 2000년대 시를 경유한 1인칭의 진폭」, 『자음과모음』 2021년 봄호를 참조.
  5. 김보경, 같은 글 441면.
  6. 신형철, 같은 글 368면.
  7. 김보경, 같은 글 426면.
  8. 신형철, 같은 글 374면.
  9.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9년 겨울호.
  10. 이장욱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 풍자가 아니라 자살이다」,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창비 2005 참조. 이 글의 핵심은 “요컨대 문제는, 서정 자체가 아니라 서정의 ‘권위’이다”(38면)라는 문장에 담겨 있다.
  11. 이장욱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문학동네 2019. 이 작품에 대한 분석은 졸고 「‘세상의 공기’를 쓰는 복화술사로서의 소설가」, 한국일보(2020.11.19)를 재구성하고 보완한 것이다.
  12. 김초엽 외 『팬데믹: 여섯 개의 세계』, 문학과지성사 2020.
  13.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1권 상편(개역판),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53면.
  14. 이 지점에서 작가의 근작 『지구 끝의 온실』(자이언트북스 2021) 또한 흥미롭다. 여기서 인류문명은 완전한 붕괴 이후 재건되었다는 설정인데 그것이 여전히 자본주의적 사회상에 근사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15. 『자본론』 1권 하편 1045면.
  16. 『문장웹진』 2019년 10월호.
  17. 『실천문학』 2020년 겨울호.
  18. 정성숙 『호미』, 삶창 2021, 27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