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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자본주의 악천후와 이행의 감각

미래를 사유하는 시의 역량에 대하여

 

 

오연경 吳姸鏡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김수영, 신화인가 현재인가」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지구생활자의 시」 등이 있음.

korin2@hanmail.net

 

 

 

시의 자명종,

세계사의 푹신한 침대 위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그런 아침이 올까

—진은영 「시인 만세」 부분

 

 

평균적 현실과 총체성

 

우리는 암묵적으로 합의된 것처럼 작동하는 ‘평균적 현실’이라는 감각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를 목격하고 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일련의 문단 내 성폭력 폭로는 항상적 재난과 불안의 상태인 여성의 일상이 또다른 ‘현실’임을 드러냈고, 이십년 넘게 계속된 장애인이동권 투쟁은 대중교통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일상이 모든 시민의 당연한 ‘현실’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이는 단지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지 못하는 사회제도의 미흡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라는 시스템 자체가 애초에 특정 부분을 누락한 바로 그 구멍 난 토대 위에서만 작동 가능하다는 것을 폭로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 유효성을 획득하는 지점이 여기다. 개인이 겪는 차별과 불평등은 부조리한 사회구조의 결과일 뿐 아니라 그 사회의 병폐와 모순을 드러내는 일종의 증상이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적 현실은 공동의 정치적 현실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고 개인적인 것의 정치성은 소수자 프레임과 함께 배제냐 포함이냐의 정치로 축소되었다. 이 파편화된 싸움 속에서 현실에 대한 공통감각을 ‘자본주의 리얼리즘’1이 대체하면서 세상이 망하더라도 자본주의 바깥은 없다는 패배감이 지배적인 정서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시대에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진은영은 시가 “세계의 푹신한 침대 위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자명종이 될 수 있을지 묻는다. 자본주의가 펼쳐놓은 푹신한 세계감이 현실인식과 변화의지를 마비시킬 때 문학은 어두운 잠을 깨워 아침을 여는 종을 울릴 수 있을 것인가. 문학에 대한 이러한 기대는 밖에서는 물론 안에서조차 희미해진 듯 보이지만, 현실의 조각난 파편을 맞추면서 세계에 대한 감각과 인식을 통합하고 미래를 그려보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근 ‘총체성’ 개념과 함께 전체에 대한 사유가 다시 요청되는 맥락2에서 현실에 대한 시적 재현의 양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팬데믹과 기후위기는 너무나 오랫동안 보편적 성공을 거두어온 것처럼 보였던 자본주의가 그것의 실패와 위기를 드러내는 광범위한 증상으로서 “새로운 보편성”3을 경험하게 하고 있다. 삶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위기의 보편성을 현실의 전모를 파악하고 바깥을 상상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다양한 행위자들의 개별적 경험을 매개하는 세계의 총체적 윤곽이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무엇을 사유하든 거의 불가피하게 거대담론으로 연결되며, 사유의 실험과 삶의 실험 사이의 거리도 부쩍 가까워진”4 이때, 문학은 스스로 가장 통렬하게 의심하고 뼈아프게 거두어들였던 자신의 역량, 세계에 대한 총체적 사유와 바깥을 상상하는 힘을 회복하도록 요청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인용한 진은영의 시 제목 ‘시인 만세’는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한 진지한 시인의 고뇌’5에서 시작된 질문은 이제 자본주의 악천후를 뚫고 아침의 빛을 끌어올 시의 역량을 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당사자성을 넘어서는 일인칭의 역량

 

전통적으로 시는 일인칭 발화에 가까운 장르로 인식되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을 통해 일인칭 화자와 자연인 시인 사이의 거리, 일인칭 화자와 그에 의해 재현되는 세계 사이의 거리를 놓고 첨예한 미학적·정치적 쟁점이 던져졌다. 2000년대 이후에는 서정시의 일인칭 화자가 자기충족적 정원의 주인이라는 비판에 힘입어 분열적 주체나 다양한 인칭의 실험이 확산되면서 한국시의 미학적 가능성이 갱신되기도 했다. 그러나 거리를 두기 어려운 참사가 터져나오는 현실 앞에서 일인칭 화자는 다시금 전경화됐고 공동체의 현실에 닻을 내리고 ‘시인’과 ‘시민’이 만나는 주체성을 타진하도록 요청받았다. 그런데 시인과 시민과 화자가 하나로 수렴되는 자리는 경험의 진정성이 강하게 요청되는 자리로, ‘나’의 당사자성을 정체화할수록 ‘우리’에 대해 말하기 어려워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6 일인칭적 재현 속에서 타자와 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 오만과 위선으로 여겨지며 지나치게 검열될 때, 스스로 살아낸 삶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경험이 닿는 사적 영역으로 협소해지거나 때론 개인의 정치적 올바름을 보장받는 데 그치고 만다. 현실의 경험적 단편을 포착하거나 자기 정당성을 증명하는 데에서 나아가 개인의 경험을 매개하는 세계의 윤곽을 그리며 현실의 균열을 발견하는 일인칭의 시선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 인공호수는 32년간 물을 간 적이 없다

사람이 죽어도 떠오르는 것만 건졌다

 

원형으로 이루어진 인공호수 주변을 걷다가 갈피를 잃었다

그런 일은 나에게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지나쳐 뛰어가는 사람들처럼

나도 종종 그랬다

 

길고양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길에 고양이가 없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들도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새들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컨베이어 벨트에 사람이 끼어서 죽었다는 기사를

수십번 보아도

컨베이어 벨트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지 못했다

 

사람을 저렇게 많이 그것도 여러번 죽인 것은

어떻게 생겼을까

얼마나 강한 이빨을 가졌을까

 

그렇지만 내가 아직도 컨베이어 벨트의 생김새를 모르는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조깅을 하는 트랙 옆

인공호수에 32년간 무엇이 빠지고 또 건져졌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아무것도 믿기지 않았다

—김상희 「어떻게 생겼나요?」 부분(『창작과비평』 2022년 가을호)

 

인공호수는 도시 속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자연으로, 비자연화를 추구하는 도시 시스템과 사회화된 자연의 시스템이 얽혀 있는 공간이다. 도시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이 함께 살고 있지만 인간 편의적으로 설계된 이곳에서 차와 유리창의 필요는 고양이와 새의 생존을 돌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생산성과 효율 중심으로 설계된 컨베이어 벨트는 일하는 사람의 생존을 돌보지 않는다. 하지만 “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들”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새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사람을 저렇게 많이” 죽인 컨베이어 벨트 역시 본 적이 없다.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자꾸만 죽고 다치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보거나 경험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고 “앞서서 달리던 누군가 인공호수로 뛰어”드는 것을 목격하더라도 금세 잊고 만다. 시인은 타인의 죽음에 대한 무관심을 고백하거나 죽음을 조장하고 방치하는 세상을 폭로하려는 것일까?

그런데 “어떻게 생겼을까”라는 질문이 개입하는 순간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이 질문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일상적인 것과 비일상적인 것,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를 흔들며, 경험을 넘어 사유와 상상으로 닿을 수 있는 지점까지 우리를 데려간다. 표면적으로는 본 적 없는 컨베이어 벨트의 생김새(부분적 현상)를 묻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생각해본 적 없는 자본의 작동방식(총체적 원인)을 캐묻는 저 질문의 힘으로 인공호수의 거대한 지도가 서서히 드러난다. “무엇이 빠지고 또 건져졌는지/알 수 없는” 인공호수가 온갖 모순과 부조리를 은폐하며 지속되어온 이 세계의 축소판이라면, 호수를 둘러싼 트랙은 우리 모두가 그 위에서 달리고 있는, 누가 또 죽어도 이상할 것 없지만 “그런 일은 나에게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멈추지 않는 일상의 컨베이어 벨트인 것이다.

죽음을 삼킨 채 잠잠한, “32년간 물을 간 적이 없”는 호수처럼 이 세계가 얼마나 잔인하고 무심한지를 알아챈 화자는 다시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생겼나요?” “당신 어디에 있나요?” 컨베이어 벨트의 생김새를 묻는 질문은 보이는 것의 아래에 잠겨 보이지 않는 당신들의 존재와 안녕을 염려하는 질문으로, 생명을 모른 척하고 이윤과 효율 중심으로 세차게 돌아가는 세상을 의심하는 질문으로 두터워진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런 질문이 호수 아래 오랫동안 잠겨 있다”는 말이지만, 시는 나의 좁은 시야와 경험으로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끈질기게 질문하며 감춰진 세계의 지도를 그려내는 데까지 도달한다. 일인칭의 시야는 제한적일지라도 바로 그 한계이자 조건인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세계의 심연을 건드리는 파문(波紋)이 시작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시가 그토록 의심하고 실험하면서 갱신해온 일인칭의 역량일 것이다.

 

 

최일선의 감각과 지속가능한 ‘우리’

 

그렇다면 전지구적 기후-생태 위기와 함께 거대담론의 귀환, 총체적 사유가 요청되는 이 시점에 시의 일인칭 역량은 어떤 파문을 시작하고 있는가. 2010년대 이후의 시에 대해 시적 주체가 왜소화되었다거나 분노 없는 무기력이 지배적이라는 진단이 갑론을박을 불러온 이래 더욱 거세진 현실의 위력 앞에서 시는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근거리의 시적 경향을 성급하게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최근 시에서 ‘여름’이나 ‘빛’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는 지적이 곳곳에서 들려온다.7 어째서 다른 계절이 아닌 여름이고 어둠이 아닌 빛인가에 대해서는 섬세한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세계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기운을 계절이나 날씨로 감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계절이나 빛은 변화무쌍하고 광범위한 영역에 두루 영향을 미치지만 그 변화가 인간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 특히 여름은 왕성한 번식활동과 부패작용이 동시에 일어나는 기후로, 여름이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면 그것은 피할 수도 손쓸 수도 없이 덮쳐온 상태,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번성하는 듯하면서 상해가는 비정상적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8

실제로 우리가 겪고 있는 기후위기는 정상성과 비정상성이 뒤섞인 상태로 경험되며, 지금 누리는 편리와 앞으로 닥쳐올 위기를 연결할 수 있는 전체에 대한 사유를 요구한다. 그러니까 시에 나타난 시대적 계절감은 지금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인식한 감각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들에서 여전히 분노나 파토스를 찾아보기 어렵다면 그 이유는 “분노가 충분히 효과적 선택지가 아니게 된 사정”9에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필요한 선택지는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특정 대상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그 모든 파편적 증상들의 집합체로서 전체에 대한 차가운 통찰, 나아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허상을 깨트리고 다른 현실을 꿈꾸게 해줄 시적 인식이 아닐까?

 

멀다를 비싸다로 이해하곤 했다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정말 먼 곳은 상상도 어려웠다

 

그 절벽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어서

언제 사라질지 몰라 빨리 가 봐야 해

 

정말 먼 곳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었다

돌이 떨어지고 흙이 바스러지고

뿌리는 튀어나오고 견디지 못한 풀들은

툭툭 바다로 떨어지고

매일 무언가 사라지는 소리는

파도에 파묻혀 들리지 않을 거야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면 불안해졌다

우리가 상상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상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었고

거짓에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 정말 가까운 곳은

상상을 벗어났다 우리는

돌부리에 걸리고 흙을 잃었으며 뿌리를 의심했다

견디는 일은 떨어지는 일이었다

떨어지는 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정말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래야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박은지 「정말 먼 곳」 전문(『여름 상설 공연』, 민음사 2021)

 

박은지의 시집에는 절벽이나 낭떠러지나 계단이 종종 등장한다. 기후위기 시대의 새로운 보편성을 “지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의 공유”10로 설명한 라뚜르를 참조하지 않더라도, 현재의 위기상황에 대한 공간적 비유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절벽이라는 공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먼 곳”과 “가까운 곳”이라는 거리감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멀다는 것과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것은 경험의 희소성에 비례하여 상품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먼 곳까지 이동하고 먼 곳을 방문하는 사람들 때문에 먼 곳의 절벽은 매일 허물어진다. 먼 거리로의 이동가치를 높이고 먼 곳의 소멸 가능성을 홍보한 후 기어이 먼 곳까지 오게 해서 끝내 소멸을 가속화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모순적 체제 유지 방식이다.

그런데 직접 가볼 수 있는 먼 곳이 아니라 상상하기도 어려운 “정말 먼 곳”은 어디일까? 그곳이 ‘자본주의 바깥’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자본주의 바깥은 이곳으로부터 너무 멀어서, 하지만 이곳으로부터 상상해내야 하는 바깥이라서, 아무리 노력해도 그 “상상이/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다. 게다가 문제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매일 넘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말 가까운 곳”, 지금 발 딛고 살아가는 이곳은 상상을 벗어날 정도로 견디기 힘든 곳, 견디다가 넘어지고 떨어지는 곳이다. 자본주의 바깥은 아무리 상상해도 매일 허물어지고 자본주의 내부에서는 아무리 견뎌도 매일 떨어진다면, 이 난국을 타개할 해법은 어디에 있을까?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우리가 계속해왔던 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일을 담담한 목소리로 제시한다.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정말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는 문장은 “정말 먼 곳”에 대한 상상과 “정말 가까운 곳”에서의 삶이 동시적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절벽은 먼 곳에도 있고 가까운 발밑에도 있다. 상상할 수 없다면 견딜 수 없고 견딜 수 없다면 상상할 수 없으므로 이중의 위기를 품은 절벽은 우리가 붙들고 있어야 할 삶의 최전선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를 딛고 선 괴로움은 어떻게 바닥으로 가라앉지 않고 미래를 꿈꾸는 성실함을 견인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세계도, 세계 속의 삶도 이미 다 망가졌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런 느낌을 공유하고 있다면, 이제 그 느낌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이 날씨를 다 망쳐버렸어

이렇게 말하면 아직 더 망칠 수 있는 날씨가 있는 것 같다

 

말간 햇빛이 정수리로 부드럽게 쏟아지고 엉덩이에 풀물이 들도록 잔디밭에 앉아 있을 법한 날씨 벤치에 앉아 개가 참 많다 저 많은 개들이 모두 행복해 보인다 감탄하게 되고 개들은 바쁘고 바쁜 개들의 까맣고 촉촉한 코 위로 미끄러지는 햇빛을 하염없이 쫓아가고 싶은 날씨

 

우리는 어두운 카페에 나란히 앉아 창밖을 본다

물이 찬 두 쌍의 신발 속에서

허옇게 붓고 있는 발을 나란히 하고

눅눅한 티셔츠를 입고

 

함께 있다고 느끼면

모든 거리를 초월해 가까이 있는 유령처럼

아직 더 망칠 날씨가 있다는 느낌 속에서

 

주어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망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생각

준비된 솜씨를 숨기기 위한 노력이 데려오는 시간과

나란히 앉아 창문 밖 스크린을 본다

 

조감도 속의 완벽한 날씨를 봐

저렇게 결정된 풍경은 도무지 풍경처럼 보이질 않고

날씨를 모르는 사람이 상상한 날씨가

구현된 날씨의 이미지가 날씨를 덮고 있는 것 같지

덮인 날씨 위로 쌓인 먼지가 풀풀 날리는 것 같지

 

어제는 종이로 무엇이든 접을 수 있다는 사람의 영상을 뭐에 홀린 것처럼 봤어 종이접기의 신이라는 사람 얇고 평평한 물성 접힐수록 더욱 자라나는 부피 열 개의 손가락에서 시작되는 세계

더 망칠 것도 없을 날씨 한 번이면 곤죽이 될 세계를

 

보호하고 싶은 장소엔 출입통제선 대신 종이로 접은 것들을 두면 된다고

손가락 하나로도 망쳐버릴 수 있는 것

그런 것들을 그냥 밟고 지나갈 수는 없는 법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손을 움직이는 사람을

 

(…)

 

정말 사랑하니까 망치기 쉬운 것을 많이 주고 싶을 거야

우리를 가장 사랑했던 신이 죽기 전 우리 앞으로 남겨준 상자는

종이로 만든 것이고

그 위에는 종이로 만든 꽃 한 송이가 올려져 있어

 

손댈 수 없고 들어갈 수 없다

—김리윤 「사실은 느낌이다」 부분(『투명도 혼합 공간』, 문학과지성사 2022)

 

“우리가 이 날씨를 다 망쳐버렸어”라는 문장은 사실에 대한 진술이지만, 이 문장을 말하고 나면 “아직 더 망칠 수 있는 날씨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생겨난다. “아직 더 망칠 수 있는 날씨”라는 표현은 어딘가 묘하다. ‘망칠 수 있음’은 그 대상의 상처받을 가능성과 연결된다. 그러니까 “아직 더 망칠 수 있는 날씨”는 언제든 더 망가지고 훼손될 수 있는 날씨의 취약함을 의미하며,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인 취약함은 ‘함께 존재함’을 전제한다.11 존재들이 서로 관계 맺을 수 있는 공통의 지평 속에 함께 있기 때문에 상처받을 가능성도 생겨나는 것이다. 가령 “조감도 속의 완벽한 날씨”는 어떤 것과도 관계되지 않은 “결정된 풍경”이자 이미지이기에 상처받을 수 없고, 그래서 영원히 망칠 수 없는 날씨다. 반면 2연에 생동감 있는 촉감으로 묘사된 날씨, 인간과 자연과 동물과 사물이 다정하게 접촉하고 있는 날씨는 우리가 다 망쳐버린 기억 속의 날씨, 어두운 까페에서 떠올리는 “아직 더 망칠 수 있는 날씨”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망쳤고 우리가 더 망칠 수 있는 날씨 속에 살고 있다. 이 말은 인간이 망가진 세계의 주범이라는 의미보다는 우리의 삶이 취약한 세계와의 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처럼 아직 더 망가질 날씨가 아직 더 망칠 수 있는 우리의 삶과 관련된다면 “아직 더 망칠 날씨가 있다는 느낌”은 “주어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망칠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 자신을 감지하는 감각일 것이다. 김리윤은 이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들에게서 어떤 공동체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 시의 ‘우리’는 망가진 날씨의 상태를 가장 먼저, 가장 심각하게 느끼는 이들이며 날씨에 취약해진 이들이다. 이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어두운 카페”, 신발에는 물이 차고 입은 옷은 눅눅하고 젖은 발은 붓고 있는 이곳은 망가지고 있는 나쁜 날씨의 최전선이다. 상처 입기 쉬운 민감한 마음으로 가장 최악의 날씨 속에서 “아직 더 망칠 날씨가 있다는 느낌”을 공유하는 이들은 “함께 있다고 느끼”는 것만으로 가까워지는 ‘우리’다.

이 시에서 줄곧 사용되고 있는 인칭 ‘우리’는 최일선의 감각을 지닌 일인칭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12 ‘최일선’이라는 위치는 전체에 대한 파악 속에서 결정될 수 있는 것으로 현실의 취약한 지점을 느끼는 민감함이 부조리한 세계의 최일선을 찾게 한다. 최일선의 감각은 개인의 구체적 삶으로부터 유인되고 나날의 경험적 날씨로부터 활성화되므로 이러한 감각을 지닌 이들이 집합적 주체를 이룬다면 지속가능한 ‘우리’가 탄생할 수 있다. 망치기 쉬운 자신의 취약함(“부드럽게 물러가는 발 허물어지는 발”)을 끌어안고 아직 더 망칠 수 있는 세계의 취약함(“곤죽이 될 세계”)에 끌려온 최일선의 우리는 이제 ‘더 취약해지기’의 방식으로 세계를 돌본다. 더 취약해지기는 더 망칠 수 있는 가능성을 더이상 망치지 않는 실천으로 전환해내는 역설적 저항의 방식이다. “보호하고 싶은 장소”에 “출입통제선 대신 종이로 접은 것들을” 둘 때 “그냥 밟고 지나갈 수는 없는 법”, 현실의 법과는 다른 마음의 법을 작동시킬 수 있다. 신이 우리를 사랑해서 망치기 쉬운 세계를 준 것처럼, “종이접기의 신”인 시인은 “종이로 만든 꽃 한 송이”, 아직 더 망칠 수 있는 시를 우리에게 준다. 시인은 이것을 “망치기 쉬운 것을 많이 주고 싶”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손가락 하나로도 망쳐버릴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아끼고 돌보는 마음, 더 취약해지기를 선택한 사랑의 실천이 우리가 다 망쳤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이행의 감각을 깨우는 현대의 종

 

황정아는 “현실의 변화를 꿈꾸는 문학이란 정확히 변화의 경로를 사유하고 상상하는 ‘이행의 문학’이기를 지향해야 하리라”고 제안하면서 “이미 일어난 이행만이 대안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13 그간 우리는 자본주의 바깥은 없다는 패배감의 압력 아래, 현실의 변화를 메시아적으로 도래할 미래로 넘겨버린 채 정작 이곳에서 시작해야 할 한걸음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닌가. 지금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경고하는 팬데믹과 기후위기가 바깥에서 우리를 끌어당기는 변화의 한쪽 극이라면 이제 우리의 삶의 내부으로부터 일어나 적극적으로 끌려갈 변화의 다른 한쪽 극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이행의 감각’이라고 부른다면 그를 벼리는 일이야말로 문학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다. 감각은 인식이나 사상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된 인식 또는 경험으로 번역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른 새벽에 일어난 시인의 감각은 시대의 사상을 깨울 것이다.

 

스스로 우는 이 시계는

어쩐지 자명하다

자명한 이치처럼 자명해서

그 울림이 맑고 깊어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도

자명한 일이라지만

생각만으로도 벌써

이제 막 빛이 번지기 시작한 어느 호수

언저리처럼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자명한 일이어서

나는 오늘도 이 자명종을 내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놓고

일을 하거나 잠시 기지개를 펴기도 하며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원하는 시간에 자명종을 맞춰놓으면

갑자기 지금 이 시간으로부터 그

시간까지 하나의 긴

문장이 적히기 시작하는 것 같고

나는 이제부터 그 시간 속으로 걸어들어가

그 문장에 형광색 밑줄을 천천히 긋기

시작하는 것 같아

자명종

미리 정해놓은 시각이 되면 저절로

소리가 울리도록 장치가 되어 있는

현대의 종아

커다란 종도 좋겠지만

커다란 종이 있는 종탑이 있는 성당을

가질 수 있어도 좋겠지만

나는 너 하나로 만족하련다

자명종

자명한 나의

사랑 같은 종아

—황유원 「자명종」 전문(『현대문학』 2022년 7월호)

 

황유원의 시는 이 글을 시작할 때 인용했던 진은영의 시와 교감하고 있는 것처럼 읽힌다. 이 시는 저절로 울린다는 뜻(自鳴)과 저절로 알 만큼 명백하다(自明)는 뜻을 절묘하게 운영하여 생각과 변화 사이의 거리를 마술적으로 좁혀놓는다. “원하는 시간에 맞춰놓”는 것은 나의 의지지만 그렇게 하고 나면 “지금 이 시간으로부터 그/시간까지” 이행의 시간이 마련된다. 이 시간에 적히는 “하나의 긴/문장” 그리고 “그 문장에 형광색 밑줄을 천천히 긋”는 시간은 이행의 감각이 벼려지는 시간이다. 그때를 미리 정한 것은 나의 약속이고 그때가 되면 저절로 울리는 것은 약속의 이행이다. 신이 약속하고 인간이 기다리는 것은 종교의 일이지만, 스스로 정하고 때〔時/詩〕를 기다리는 것은 “스스로 우는 이 시계”, “자명한 나의/사랑 같은” 시의 일이다. “미리 정해놓은 시각이 되면 저절로/소리가 울리도록 장치가 되어 있는” (사전적 정의를 그대로 옮긴) 이토록 자명한 것에 대한 믿음이 자본주의 바깥은 없다는 믿음을 이길 것이다. 막연한 먼 미래가 아니라 가까운 시기를 정하고 그곳을 향해 한걸음씩 밑줄을 긋는 실천이 변화된 세계를 가져다놓는다는 자명한 사실을 우리는 오늘도 곳곳의 현장에서 목격하고 있으므로.

나는 이 글에 인용한 김상희 박은지 김리윤 황유원의 시에서 “울림이 맑고 깊”은 현대의 종소리를 듣고 그것에 공명했다. 이 문장은 이 글에서 처음으로 ‘나’라는 주어가 등장한 순간이다. 어느 글에선가 나는 비평적 주체의 당사자성을 고민하면서 “‘제3자 말하기’로서의 비평은 텍스트에 재현된 고통에 대해 말하면서 어떤 상처를 감내하는가?”14라고 물은 적이 있다. 지금 이 글에는 이곳의 시민이자 인간이자 비평가로서 자본주의의 위력에 대한 심리적·신체적 거부감을 느끼며 피로와 분노와 체념에 시달려온 나의 감정이 투사되어 있다. 이로써 제3자로서 해석하는 행위를 넘어 당사자로서 개입하고 헌신하는 말하기를 수행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시를 읽으면서 동시대 시인들이 투신한 이 세계의 최일선으로 끌려나와 연대하고 싶은 매혹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시를 통한 감각의 이행이 형성해준 이행의 감각이라면, 이 시대의 시는 이미 자본주의 악천후를 뚫고 아침의 빛을 끌어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1.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은 맑시즘 문화비평가 마크 피셔(Mark Fisher)가 사용한 말로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제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을 가리킨다. 최근 자본주의만이 ‘현실’이라고 믿게 하는 자연화된 이데올로기를 언급할 때 문학비평이나 사회비평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18 참조.
  2. 황정아 「리얼리즘과 함께 사라진 것들」, 『개념비평의 인문학』 창비 2015; 서동진 「팬데믹 위기와 총체성」, 『뉴래디컬리뷰』 2021년 가을호; 정홍수 「단절과 침묵, 그리고 ‘이어짐’의 상상력」, 『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 황정아 「미래를 도모하는 문학」, 『창작과비평』 2022년 겨울호 참조.
  3.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28면. 라뚜르(B. Latour)는 기후위기로 인해 이미 오래전부터 정복과 식민지배로 자기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들을 쫓아낸 사람들까지 포함한 전체가 “발아래 아무 세계도 없는 상황”에 도달한 것을 오늘날의 ‘새로운 보편성’이라고 말한다.
  4. 황정아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한국모델’」, 황정아 외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 창비 2021, 20면.
  5. 진은영 「한 진지한 시인의 고뇌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2010년 여름호.
  6. 앞에 인용한 진은영의 글로부터 촉발된 ‘시와 정치’ 논의 이후 시의 일인칭 화자가 ‘우리’를 말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최근 다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양경언의 “‘우리’를 다시 쓰는 실천”(「우리, 살아 있는 언니들의 시」,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송종원의 “‘우리’를 재발명할 기회”(「시인과 시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선우은실의 “우리-당사자성”(「우리가 우리의 문제에 대해 말할 때 필요한 것」, 『문학들』 2021년 여름호), 신형철의 “‘우리’를 향해 열려 있는 ‘나’”(「시적 시민성의 범주론」, 『창작과비평』 2021년 봄호)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7. 최근 2~3년 사이 발간된 시집 제목에 ‘여름’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타나는 경향에 대해 “불분명했던 인간의 감각이 강렬한 계절감과 섞이며 분명해지는 시기”(「서정시가 필요한 시대」, 『창작과비평』 2022년 겨울호 61면)라고 한 양경언의 간략한 논평을 포함하여, 좌담이나 심사평 등에서도 이러한 경향에 대한 지적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8. 다양한 시에 나타난 ‘여름’의 의미를 이렇게 맥락 없이 일반화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다만 여름의 계절감에서 이 세계의 상황을 암시하는 듯한 모순적 속성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후속 글을 기약한다.
  9. 성현아는 “격렬한 감정의 분출은 영악해진 자본주의 앞에서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면서 “치밀해진 자본주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으면서 그것이 우연성에 기대고 있을 뿐임을 짚어내는 유연한 예리함” “세밀한 묘파 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자본주의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창작과비평』 2022년 여름호 374~75면.
  10. 브뤼노 라투르, 앞의 책 38면.
  11. 조태구 「인간적 취약함의 의미」, 『가톨릭철학』 2019년 상반기호 8~9면. 조태구는 취약함의 어원인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에 내포된 세계성, 육체성, 유약성, 감성의 네가지 의미를 분석하면서 그 첫번째 세계성의 의미를 ‘함께 존재함’이라고 설명한다. 조태구의 논문은 ‘인간적 취약함’에 대한 분석지만, 필자는 취약함이 작은 사물부터 온갖 생명체, 나아가 날씨나 영토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존재자들을 설명할 수 있는 속성이라고 보는 광범위한 관점을 취한다.
  12. 이와 관련하여 ‘최일선 공동체’라는 개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최일선 공동체’는 어떤 문제상황에 가장 취약하게 노출된 집단이자 그 문제해결을 위해 최일선에서 저항해온 집단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백영경은 돌봄노동자가 ‘최일선 공동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필요하다고 논의하는 가운데 기후위기와 관련하여 이 용어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최일선 공동체’는 기후위기가 가져오는 위협의 최일선에 있으며 동시에 기후위기를 넘어설 체제전환을 위해 최전선에 나서는 집단이다. 그는 이 개념에서 “취약한 존재”만이 아니라 “투쟁의 주체”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돌봄과 탈식민은 탈성장과 어떻게 만나는가」, 『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 28~29면.
  13. 이와 관련하여 ‘최일선 공동체’라는 개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최일선 공동체’는 어떤 문제상황에 가장 취약하게 노출된 집단이자 그 문제해결을 위해 최일선에서 저항해온 집단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백영경은 돌봄노동자가 ‘최일선 공동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필요하다고 논의하는 가운데 기후위기와 관련하여 이 용어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최일선 공동체’는 기후위기가 가져오는 위협의 최일선에 있으며 동시에 기후위기를 넘어설 체제전환을 위해 최전선에 나서는 집단이다. 그는 이 개념에서 “취약한 존재”만이 아니라 “투쟁의 주체”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돌봄과 탈식민은 탈성장과 어떻게 만나는가」, 『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 28~29면.
  14. 졸고 「비평의 당사자성, 이토록 말할 수 없는 말하기」, 『모:든시』 2020년 봄호 79면. 당시 말했던 “비평의 플랫폼에서 추방되었던 1인칭을 탈환하려는, 이토록 말할 수 없는 말하기를 수행하려는 비평의 각성”은 비평적 관습과 기율에 더 취약해지겠다는 선언이었지만 이후로 실천되지 않았다. 시의 일인칭 역량에 비평의 일인칭 역량을 더해보려는 용기는 아직 내적 검열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