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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철 朴哲
1960년 서울 출생. 1987년 『창비 1987』에 「김포」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김포행 막차』 『밤거리의 갑과 을』 『새의 전부』 『너무 멀리 걸어왔다』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험준한 사랑』 『불을 지펴야겠다』 『작은 산』 『없는 영원에도 끝은 있으니』 등이 있음.
bch2475@nate.com
빛에 대하여
과자 몇개를 훔치고
나 좀 잡아가세요 하는 노인의
외로움은 쪽빛일 것이다
붙들려 온 노인에게
이렇게는 감옥에 못 보냅니다
고개 숙여 연고자를 찾는
젊은 경찰의 제복은 감자빛일 것이다
시작과 끝이 없는 역사의 겉장은
황토빛일 것이고
등을 맞대고 팔을 가로지른 채
강가에서 맴도는 나룻배의 한숨은
창호빛일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부러 하는 일이나
부러 생기는 빛은 없다
꽃으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것도
빛이 함께 뛰어가기 때문
더듬이처럼 부드러운 말들 속에도
도저히 물리칠 수 없는 빛깔과
감당키 어려운 폭풍이 일고
어제 한 가족의 실종을 지켜보던
그 가슴은 물끄러미빛이었다
나에게 지친 봄
아주 멀리 떠난 아들 내외라든가
내일은 쉬는 날 쉬는 달 쉬는 해라 해도
개미들이 줄지어 장미 줄기를 오르듯
뒷산 모퉁이 돌면 바라뵈는
아직 반듯한 채석장 울타리는 쇳물빛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떠나왔다는 어느 먼 곳으로
시간은 되돌아가지 않고
등불을 켜라 살아내야 하니까
나는 오늘 하나의 빛을 잃은 채
너무 환한 세상 앞에
눈이 부시다
그렇다 해도 이 밤
칠흑빛 속도로 감옥으로 가는 나를
잡는 이 하나 없단 말이냐
새를 따라서
그 모임의 까닭은 이렇다
시베리아를 떠나 멀리 날아온
가창오리 군무를 보겠다는 것
우리는 서산 천수만서 금강 하구로
고창 동림지에서 해남 고천암으로
새를 따라 남하했다
거대한 발자국이 물 위에 남았고
어디든 도착하면 어둠이었다
어둠과 추위에 밀려
줄포서 하루를 묵는 밤
아침엔 베란다 밖으로
반전이 있을 것이라 했다
새들처럼, 새를 따라서
먼 길 가는 것이 예삿일은 아니지만
한번 따라나서면 이 길은
가고 싶지 않아도 가게 되어 있다
원래 어느 한 점이
쓸쓸히 타며 사라지는 것을
월동이라 하듯
잠시 한곳에 나앉았을 뿐
눈물도 결국 마르게 되는 것처럼
아무튼 새를 따라서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이
짝 짓는 곳이라던가
빼도 박도 못할 운명이라던가
떼는 하나라던가
하나가 무한대를 그리는
우주의 면모나 전하려고
그 많은 새가 어둠 속에
진동하진 않았을 것이다
남모르게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알듯
반전을 외면한 채
나는 미명에 그대로 숙소를 나섰다
등을 대고 자던 이들처럼
밤새 앓는 소리로 봐서 호수에
물닭 가족이 사는 것 같았다
그게 반전일까
그들의 단출한 살림을 뒤로하고
지난밤 남몰래
새들이 그리는 무한대를 보았을 때
그 겨울 촛불처럼
천지간
가장 큰 생명체를 보았을 때
나의 생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의문 없이 문을 나섰다
생의 길이를 잴 수 있던 만큼
그 모임이 나에게 전하려는 말
지상에 없는 계절을 날아라
제 몸을 빠져나오듯
그게 뭔지 굳이 묻지 않아도
까맣게 하늘이 다시 멀어지고
돌아오니 오늘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