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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K-담론을 모색한다 ③
‘나라 만들기’를 향한 서사적 도정
황석영 『철도원 삼대』로 보는 ‘K-문학’의 현재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 『사소한 이야기의 자유』 등이 있음.
cyndi89@naver.com
1. K-문학과 ‘나라 만들기’의 상상력
황석영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창비 2020)는 한달째 발전소 공장 굴뚝 위에서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 ‘이진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굴뚝 위 좁은 공간에서 아슬아슬하게 용변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그의 눈앞에 빌딩과 아파트로 가득한 도시의 풍경이 펼쳐진다. 지상의 동료들이 함께 돕는 농성이지만, 하늘 위에서 보내는 길고 긴 시간은 오로지 그가 홀로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지난 25년간의 생활을 돌아보는 노동자 이진오의 모습은 한편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거대한 장벽에 맞서는 전면적인 싸움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 것은 불합리한 노동조건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절실한 분투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지속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스스로 밝혔듯이 『철도원 삼대』의 구상은 “근대 산업노동자들의 삶”을 그리려는 기획에서 출발한다(‘작가의 말’ 616면, 이하 『철도원 삼대』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기). 20세기 한국사의 흐름과 전개를 통해 당시 민중의 삶을 풍부하게 담아낸 이 작품은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를 독자들 앞에 펼쳐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이 올해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 후보작에 선정된 소식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1 『철도원 삼대』의 소개는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과 영향력을 실감하게 하는 반가운 일인 동시에 최근 활발히 논의되는 ‘K-문학’의 자산과 전통을 여러모로 곱씹게 한다. 직접적으로는 문화적 한류 현상이 촉매 역할을 했지만, 세계적으로 한국의 역사와 정치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확장되는 분위기에서 우리의 문학적 자산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그 성취를 점검할 필요성이 새롭게 환기되는 시점이다.
『철도원 삼대』는 20세기 한반도의 역사를 재현하며 평범한 민중이 어떤 꿈을 품고 새로운 세상을 그렸는가를 생생히 보여줌으로써 고유한 개별적 삶의 경험이 공동체의 보편적 지향점과 만나는 순간을 포착한다. 근대 산업노동자의 역사를 통해 ‘나라 만들기’로 요약되는 민중의 분투를 들여다보는 이 소설은 식민지시기 항일노동운동의 출발점에 서 있는 사회주의 이념과 정치성을 부각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혁명과 이념의 꿈이 담긴 문학의 존재를 지난 시대의 기억으로만 고착시키려는 타성적인 현실 읽기에 맹렬히 저항함으로써 세계를 너른 시야에서 설계하려는 장편서사의 저력을 입증한다.
한편 이 소설이 서사적 실험으로 활용하는 구전서사는 기존의 장편양식을 쇄신하고 확장하는 중요한 성취로 음미해볼 만하다. 전통적인 구전문학 양식을 친숙하게 가다듬은 서사형식은 긴 연대기를 압축하는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을 통해 현재의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특히 이야기 속에 유려하게 녹아 들어간 고전설화와 민담은 환상과 소망의 형식을 통해 소설이 발굴한 역사적 기록과 사실에 풍부하게 색채를 더한다. 이렇듯 고전을 현대적으로 가공하여 전달하는 문학적 자산에는 오랜 시간 여러 사람이 열망해온 세계가 녹아 있다. 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내면에 간직된 ‘좋은 세상’에 대한 희망이 문학의 공동영역에 어떻게 축적되어왔는가를 보여준다.
2. 철도의 역사와 근대의 삶
‘철도원 삼대’ 가족의 역사는 이진오에게 “노동자 이외의 다른 존재로는 살아갈 수 없”(133면)는 운명을 지워주었다. “할아버지는 월북했고 아버지는 그를 따라갔다가 부상당하여 반공포로가 되어서 돌아왔다. 그리고 일찍이 그의 작은할아버지는 공산주의자로 일제강점기에 해방을 맞지도 못하고 옥사”(같은 면)했다. 이러한 가문의 이력은 한반도 근대사를 통과해 현재 고공농성을 하는 이진오의 삶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삼대’의 가족사라는 플롯과 더불어 이 소설의 서사를 추동하는 동력은 단연 ‘철도’이다. 근대 생활세계와 도시개발 과정을 재현한다는 점에서도 철도는 흥미롭고 대중적인 스토리텔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소설이 배경으로 삼는 식민지근대 철도 건설 과정은 일본에게 국토와 자원을 징발당하는 고통스러운 착취의 역사이기도 하다. 더불어 소설의 연재 당시 제목이었던 ‘마터2-10’의 시대적 의미도 주목된다. “산악형 기관차로서 지금은 통일공원에 분단의 화석처럼 놓여 있는 기관차의 제작번호”(‘작가의 말’, 618면)가 되어버린 ‘마터2-10’은 한때 만주대륙까지 뻗어나갔던 식민지시기 철도의 역사를 분단체제라는 현재에 환기한다.
소설은 근대적 삶을 재현하는 구체적인 공간으로 영등포지역에 초점을 맞춘다. “수십호 정도가 채소를 기르며 살던 가난한 농촌”(45면)이었던 영등포는 경인선과 경부선이 갈리는 요지가 되면서 빠른 속도로 근대화되기 시작했다. 문학평론가 구모룡의 평대로 영등포라는 구체적 지역공간을 기반으로 한 문학적 형상화는 우리 문학사에서 “로컬리티의 지속과 변화를 매우 중층적인 시각으로써 구체적으로 그려”낸다는 큰 의의를 지닌다.2
소설의 도입부에서 강화-인천-영등포를 거치는 큰할아버지 ‘이백만’의 공간적 이동도 이야기의 얼개를 이루는 중요한 설정이 된다. 어려운 집안 환경 때문에 고향을 떠나 일본인이 운영하는 정미소에 취직했던 이백만은 근대문명의 상징인 기차에 매혹되어 경인철도 선반부로 이직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내 일본이 주도한 철도 건설이 곧 조선 민중의 삶을 착취하는 과정이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백만은 대처로 나가고 싶은 꿈으로 기차를 선망했지만, 훗날 철도 건설이 “조선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맹글어진”(44면) 참혹한 착취의 역사임을 손자에게 담담하게 회고한다. “철로가 지나는 곳마다 땅을 빼앗긴 백성이 수만명에 이르”(50면)고 무상몰수에 가까운 철도 부지 수용으로 토지와 집, 삼림, 조상의 무덤까지 송두리째 헐값에 넘어가는 과정과 농민과 의병이 강제적으로 추진되는 철도 건설에 맞서는 과정이 도입부에서 간결하게 묘사된다.
이렇듯 근대 자본주의의 서막을 알리는 철도 건설이 가져온 도시발달은 한편으로는 산업노동자라는 새로운 직업군을 모여들게 하는 역할을 한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들 역시 이러한 로컬리티의 변화와 함께 생겨나며 변혁을 일으키고자 한다. 『철도원 삼대』의 산업노동자 이야기가 이진오의 현재적 서사로 연결되는 중요한 지점이 여기에 있다. 이 소설은 억압과 착취의 공간만이 아니라 혁명의 씨앗이 움트는 생산적인 공간으로서의 도시를 역동적으로 그려낸다. 특히 다음과 같은 대목은 노동자와 활동가들이 어떻게 영등포지역에 모이게 되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설명한다.
이 지역은 각종 공장이 삼십여개나 밀집해 있으며 노동자도 이만여명이고 자유노동자까지 합치면 수만명에 가까운 산업지대였다. 노동자들은 거의 토착 원주민이 드물고 거의가 전국 각지에서 일을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 영등포는 서울에서 운동의 중심이자 지하조직의 근거지였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활동가들에게 좋은 도피처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철도를 따라 이어진 서해안의 가장 큰 항구 인천을 불과 한나절 안에 내왕할 수 있었고, 그곳 역시 부두 하역장과 공장이 밀집해 있어서 노동자가 수만명이었다. 영등포는 사실 인천을 배후 기지로 두고 경성을 앞에 둔 전선이었다.(167면)
영등포-인천-경성을 오가는 노동자와 활동가에 대한 재현은 『철도원 삼대』의 혁명서사를 박진감 넘치게 전달한다. 특히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사상에 경도되어 노조 활동에 참여하는 이백만의 차남 ‘이이철’의 삶은 역사의 실존인물들과 연결되는 흥미로움을 준다. 당시 조선공산주의 활동사와 얽히는 이이철의 노동운동은 영등포 로컬이 품은 정치적 서사를 확장시킨다. 활동가였던 이이철과 달리 이백만과 장남 ‘이일철’은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했으나, 결국 이들도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이이철의 뜻을 존중하고 그가 벌이는 운동들에 동참하게 된다. 일본 철도국에 소속된 기관수로 충실한 직장생활을 영위하는 이일철은 음지에서 이이철과 활동가 조직을 돕고 기관수라는 직업을 활용해 주요 활동가를 기차로 이동시키는 위험한 임무도 완수한다. 이처럼 철도와 영등포라는 공간적 상징은 근대적 도시화의 맥락과 더불어 사회주의혁명을 꿈꾸는 노동자와 운동가가 모여드는 활로로서 재현된다.
철도 이야기가 특별하게 전달하는 또 하나의 서사적 공간은 디아스포라적 상징을 품은 만주이다. 소설은 후반부에서 만주 신경까지 달리는 특급열차를 운전하는 이일철의 이야기를 통해 해방 전후의 시대적 풍경을 인상적으로 전달한다. 대륙적 상상을 확장하는 이 에피소드는 주로 유이민의 척박한 삶으로만 다루어져온 만주의 또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한때 조선에서 만주까지 연결되는 기차가 운행되었던 그 시절은 이일철의 부인 ‘신금이’에게 해방 후의 분열과 혼란에 휩싸인 아득한 꿈으로 남아 있다.
황혼녘이 되자 넓고 푸른 수수밭이 펼쳐진 들판 끝으로 세숫대야만 한 발간 저녁 해가 천천히 저물었다. 바람에 날리는 옥수수 잎들은 바다의 물결처럼 끊임없이 흔들리며 저무는 햇빛을 받은 부분들이 반짝거렸다. 큰 새 한마리가 너른 들판 위의 어둑한 하늘가녘으로 부지런히 날개를 치면서 날아갔다. 잠깐 창문을 열면 열차 지붕 위로 날아 들어온 석탄 연기가 매캐하게 유황 냄새를 풍기며 실내에 머물다 사라진다. 신금이는 잠든 이지산을 무릎베개하여 누이고 졸다 깨다 하였다. 어째서 그맘때 주위의 몇몇 아는 사람들이 사라질 때마다 찾아보면 모두 만주로 가버렸던 걸까.(508면)
아들 ‘이지산’을 데리고 남편이 운행하는 기차에 탄 신금이가 바라보는 바깥 풍경이 서정적으로 묘사된다. 이일철과 신금이는 아들을 데리고 만주에 사는 고모를 만나러 여행을 떠난다. 이일철 가족이 만주에서 만난 ‘이막음’은 신문물을 누리며 풍족한 생활을 했는데, 해방이 되자마자 고모네 일가의 소식이 끊겨버린다. 조직이 적발되며 결국 구속된 이이철은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옥중에서 병사하고, 이이철의 아내 ‘한여옥’은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떠난다. 그렇게 만주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해방 후 이일철은 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본격적인 활동가로 거듭난다. 더 나은 세계를 향한 꿈이 이이철의 서사에서 이일철의 서사로 옮겨진 것이다. 특급열차의 조선인 기관수였던 이일철이 영등포 철도공작창의 기사로 취업하여 노조지부장에 당선되고 전평준비위의 영등포 준비위원장이 되는 이 전개는 이들이 꿈꾸던 혁명이 자리한 이념적 바탕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선명하게 각인한다.
3. 민중의 정치,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
『철도원 삼대』가 관통하는 노동자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당대 사람들이 열망해온 ‘나라 만들기’의 꿈이 무엇인지 질문한다.3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인물들은 일상을 충실히 사는 것을 기반으로 삶을 바꾸는 혁명을 소망한다. 황석영의 소설이 지닌 문학적 의의가 “현실을 사실 그대로 재현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비관념적인 태도로 관념적 세계에 참여하고 그것을 재구성하는 데 있”으며 그의 작품에서 ‘민중’ 역시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시각 그 자체이다”라는 평을 받는 것도 이런 맥락에 있다.4
한반도 역사의 가장 예민한 정치적 쟁점을 문학적으로 포착해온 황석영 소설은 그의 문학이 촉발하고 함께 협동해온 리얼리즘 비평담론의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특히 방북과 수감 이후 오랜 공백을 깨고 2000년대 이후 발표된 작품들은 그간의 문학적 리얼리즘 담론을 쇄신하는 해석들도 함께 이끌어왔다. 5 그중에서도 『철도원 삼대』가 복원하는 산업노동자들의 사회운동사는 분단체제의 기원과 형성을 역사적으로 탐색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건을 다룬 전작 『손님』(창작과비평사 2001)이 지닌 문제의식과 비교해볼 만하다.6 『손님』이 황해도 신천 학살사건을 소재로 분단체제의 형성과정과 구성요인을 탐사했다면 『철도원 삼대』는 식민지시기와 해방 직후 사회주의 정치운동과 대중적 노동운동의 역사를 현재와 연결 지으며 우리 문학의 정치적 분기점들을 새롭게 사유하고자 한다. 백낙청은 『손님』이 “분단현실을 직접 다루면서 화해와 평화를 추구한 소설로”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고 평하며, 이 작품이 지닌 문학적 성취를 자상하게 논한 바 있다.7 분단체제의 형성과정에 대한 자각과 근대적 삶을 바라보는 복합적인 시야는 『손님』에 이어 『철도원 삼대』가 복원하는 노동운동사의 재현에서도 선명한 지향점으로 표출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이 민중의 노동운동과 연결해 부각하는 역사적 실존인물은 ‘이재유’다.8 이재유가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자주적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구상하는 산업노동자의 서사에 중요한 기반이 된다. 소설의 서사적 박진감 역시 이재유와 연결되는 이이철의 서사를 통해 경성 트로이카와 조선공선당 재건 그룹의 활동을 구현하는 데서 나온다. 작가는 노동자 농민에 대한 헌신과 경의를 중시했던 운동노선이 어떻게 존재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파헤치는 데 초점을 둔다. 이재유의 전기와 교차하는 이이철의 이야기는 그간 왜곡되고 구조화돼온 이념적 이데올로기가 어디서 기원했는지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계급운동과 노동운동의 연결과 공존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당대의 세부적 역사가 강제적으로 지워진 채 기득권세력에 맞선 모든 노동운동이 ‘빨갱이’운동으로 묶여 검열되는 분단체제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통찰을 담고 있다.9
이이철이 이러한 노동운동에 가담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서술된다. 이이철이 공작창에서 만난 동료인 ‘방우창’에게 끌린 것도 그가 인부들 간의 갈등을 헌신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조선사람이라는 자부심과 동지애를 일깨우는 그의 모습에 감명받은 이이철은 공장파업에 동참하게 되고, 이는 그의 가족과 주변 인물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노동 대중의 자율성과 지도력에 기반하여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이재유의 정치적 주장을 작가가 부각하고 있는 셈이다.
이이철의 사회주의 참여는 가족들에게도 일정한 정치적 선택을 고민하게 한다. 이백만은 둘째아들의 정치활동에 대해 “니가 정 하겠다면 좋아, 우리 식구 중에 너 같은 사람도 하나쯤 나와야겠지. 하지만 내가 찬성은 안 할 테고 이제 와서 반대두 안 할 거다”(131면)라는 태도를 보이지만, 결국 그는 나름의 소신으로 아들의 세계를 뒷받침한다. 아우 대신 집안의 생계를 떠맡은 이일철 역시 아우를 가족으로서 지지하고 사랑하며, 또 아우를 통해 알게 된 신금이를 아내로 맞게 된다. 이일철이 해방 후 노동운동가가 된 것은 아우의 억울한 죽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일상에서 실천적 활동가의 면모를 다져왔음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철도원 삼대』가 품은 정치적 전망은 당대 민중의 구체적인 삶에서 길러진 현실감각과 연동된다. 특히 이일철의 변모는 “해방된 나라에서 이전처럼 살지는 않겠다”라는 자각, “이철이가 꿈꾸던 세상을 이루는 쪽의 편이 되겠다”(529면)라는 결심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결심은 낡은 세상이 지나가고 새 세상이 돌아온다는 소망과 더불어 새 세상의 주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마음의 변혁을 표현한 것으로 ‘개벽세상’을 향한 의지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전망과 지향이 문학적 구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서사적인 긴장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주요 인물들의 적대세력으로 형상화된 ‘야마시타 최달영’의 묘사가 여간 뛰어나지 않다. 전형적인 출세주의자인 최달영은 그야말로 소름끼치게 실감 나는 현실적 ‘악당’으로 그려진다. 이이철의 고향 친우였던 최달영은 ‘돼지치기’를 했던 가난하고 고달픈 삶을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는 교활한 일제 앞잡이로 수년에 걸쳐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검거한 공로로 고등계 형사로 승진했고 해방 후에는 ‘빨갱이 검거’ 전력을 내세워 출세가도를 달린다. 소설에서 그는 전평조직원들에 의해 처단되지만, 그가 살아 있었다면 훗날 분단체제 공고화 과정의 악랄한 기득권세력이 되었을 것이 자명하다.
식민지시기에는 노동자조직을 탄압한 일제 경찰로, 미국이 주도하는 남한 단독정부 아래서는 오히려 “공산주의자 때려잡는 기술자”(532면)로 용산경찰서장으로까지 승진한 최달영이 이일철과 나누는 대화 역시 분단현실에서 구축되는 이념적 왜곡의 한 출발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일철에게 “자네가 특급열차를 몰았듯이 나두 생계를 위해 경찰 일을 한 거라구”(554면)라고 우기는 최달영은 해방이 되어도 바뀐 것은 없다고 강변한다. “이봐, 일본 놈들이 돌아간 것 말고는 달라진 게 하나두 없다. 이제는 결국 빨갱이들이 문제인 거야. 나 같은 사람들을 뭐라구 하는지 아나? 나는 자네처럼 기술자라구. 빨갱이 잡는 전문가란 말이지. 미국도 우리 같은 사람이 필요하고 힘 있는 조선인들도 우리가 필요하단 말이야.”(554~55면) 역사의 실존인물이나 공산주의 운동사의 기록이 관념적인 방식으로 소모될 수 있는 국면에서 최달영의 존재는 역동적 형상화로 다가온다.
4. ‘민담적 리얼리즘’의 역사적 의미
소설의 첫 장면에서 이진오가 가족의 역사를 환기하는 환상의 서술방식은 이 소설의 서사원리로 작동하는 구전서사의 가공방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 시인이자 소설가 김형수는 황석영과의 대담에서 『철도원 삼대』의 창작방법론을 규명할 핵심으로 ‘민담적 리얼리즘’을 꼽는다. 황석영 소설이 활용하는 민담적 입담의 세계를 넓은 의미에서 규정한 말인데 “우리 나름대로 역사를 간직하는 민간 기억법으로서의 민담을 소설의 그릇으로 삼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10 주목할 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서사’를 시각화하는 장치로서 출현한 근대적 묘사가 ‘스펙터클’ 때문에 오히려 이야기의 본질을 흐리는 폐단을 극복할 실마리를 ‘민담적 리얼리즘’에서 찾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방점이 ‘민담’보다 ‘리얼리즘’에 찍힌다는 데 있다”라는 대목이다.11
민담서사와 환상이 교차하는 서술방식은 사실적인 기록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서사적 장치가 된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신기하고 풍부한 민담과 전설들이 청자와 화자를 둔 연행적인 ‘이야기’를 구성하며 사건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특히 등장인물들을 설명할 때 서두에 등장하는 민담과 설화는 우리 소설의 전통에서 흥미롭게 활용되는 방식이다.12 가령 이백만이 ‘주안댁’과 결혼하게 된 사연을 밝히며 소개하는 기묘하고 오싹한 환상담은 이야기성을 강화한다. ‘목 잘린 닭이 사흘이나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이야기’와 ‘물텀벙이가 저승사자 역할을 한 이야기’는 주안댁의 등장을 신비롭게 예고한다. 어린 시절 돼지치기를 했던 악당 최달영을 동물과 대화하는 능력을 지녔다는 소문을 통해 묘사하는 것도 캐릭터의 입체성을 부여한다.
『철도원 삼대』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를 향한 믿음과 소망은 이러한 ‘민담적 리얼리즘’을 강화하는 중요한 기반이다. 고공농성을 하는 이진오가 고독한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허공에서 불러낸 가족과 동지들에 대한 기억의 힘 덕분이다. 환상의 힘은 실제 역사를 생생하게 소환하면서 삶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더불어 이 작품의 도입부는 환상과 소문을 경유하는 철도의 역사를 그림으로써 민중이 겪은 고초와 억압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어느 마을은 칠백여호나 사는 큰 동네였는데 일본 군대가 노력 동원을 하러 나가서 강간하고 살인을 저질러 주민들이 모두 달아난 뒤에 무인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철도공사판에서 죽은 것들이 모여들어 그 마을을 차지하고 머물러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밤길이라도 걷다가 보면 집집마다 불이 켜져 있고, 사람들이 두런대면서 왁자지껄 웃는 소리도 들리고, 연기인지 안개인지 모를 허엽스레한 것이 초가지붕 위에 떠 있더라고 했다. 철도가 개통된 이후에도 그 마을은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고 어차피 인근 토지는 모두 징발되어 못 쓸 땅이 되어버렸다.(57면)
철도공사장 근처에 나타나는 귀신 이야기는 근대적 개발과 식민지 작업이 남긴 상흔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백낙청의 논의대로 리얼리즘 소설의 형식적·기법적 다양성을 인정한다면 소설에서 유령을 등장시키는 방식 자체가 특별히 새롭지는 않다. “산 사람이 죽은 자의 헛것을 보는 경험 자체는 자연과학자나 극단적 자연주의 작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성질인바, 그런 경험이 실제로 얼마나 핍진하게 그려졌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며, 헛것들의 발언이 얼마나 진실에 부합하느냐라거나 그런 부합현상이 얼마나 독자의 동의를 얻어내느냐는 것은 또다른 문제”13라는 대목을 상기한다면, 일제의 침탈로 혹독하게 파괴되어버린 마을에 억울한 이들의 흔적이 머무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럼에도 작품 속 귀신 일화가 생생하게 와닿는 것은 삶의 터전을 빼앗긴 민중의 참담한 현실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유령으로 등장하면서도 실존인물들을 압도하는 무게를 지닌 존재로 이백만의 부인인 주안댁을 들 수 있다. 셋째를 임신한 상태로 앓다가 세상을 떴다고도 하고, 고구마를 먹다가 목이 막혀 죽었다고도 하는 주안댁은 ‘산 자’들의 세계에 ‘죽은 자’로서 계속 동행하며 심지어 가족과 공동체의 위기를 마술적인 힘으로 해결하기도 한다. 특히 을축년 조선에 큰 홍수가 발생했을 때 주안댁의 유령이 나타나 “돼지 수십마리를 물속에서 건져”(85면)내고 “뗏목을 만들고 홍수를 헤쳐나가 수십명을 구했”(88면)다는 일화가 믿거나 말거나 전해져오는 것이다.
‘주안댁’의 영웅적인 일화는 소설 속 인물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통해 확장되고 전승된다. 주안댁의 서사가 소설에서 힘을 발휘하는 요인은 그를 둘러싼 여성 가족들의 믿음과 관련이 있다. 아내의 유령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는 이백만과 달리 막음이 고모와 며느리 신금이, 그리고 이이철의 아내 한여옥은 주안댁의 설화를 믿고 전한다.
민담적 유산과 결합된 『철도원 삼대』의 환상적 서술은 전작인 『손님』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주안댁의 유령이 압도성을 지니는 이유는 그녀가 한 일가의 어머니에 그치지 않고 마을과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타나 사람들을 위로하고 거두어 먹이는 상상적인 수호신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14 이때 주안댁 유령은 조상의 덕을 실감하게 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정홍수의 해석대로 이러한 환상이 읽는 이에게 생동감있게 와닿는 이유도 “이런 일이 우리가 언제든 명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살이의 음덕 같은 것이겠거니 짐작하게” 되는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15 이러한 환상의 표현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세계의 구분을 넘어 소중한 대상을 갈구하고 공동으로 일구어온 세계에 대한 존중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16
다양한 민담과 기록이 어우러진 『철도원 삼대』가 전략적으로 압축한 분단 이후의 정치적 질곡과 노동운동사는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지산의 아들 이진오를 통해 상징적으로 연결된다. 400여일의 농성을 마치고 내려온 그의 앞에는 앞으로도 길고 긴 싸움이 계속되리라는 암시가 주어진다. 이 소설이 현재적으로 일깨우는 ‘삶과 노동’의 관계는 촛불혁명을 통과하면서 나라를 만들어온 주체로서의 우리 시민들이 간직해온 변혁적 상상력에 대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철도원 삼대』는 한국문학의 현재적 성취로서 큰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민중의 정치와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이 오늘날 어떻게 우리의 자산으로 상속될 수 있는가에 대한 보편적 문제제기를 던진다. 이 소설이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민중의 삶과 노동운동의 역사는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우리가 이끌어온 변혁적 운동과 새로운 가능성을 세계적인 시야에서 조망할 수 있는 물꼬를 터주고 있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각종 사회적 퇴행, 역사 왜곡과 망각, 불평등 심화와 기후위기를 겪으면서 정치적 회의와 방관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체제전환의 절박한 시점에서 이 작품은 새로운 정치적 상상의 세계를 회복하고자 한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 소설의 생생한 분투는 한 지역, 한 나라의 이야기를 넘어 세계적인 지평에서 미래적 삶의 과제를 환기한다. 『철도원 삼대』는 한국사회의 고유한 역사적 투쟁을 바라보는 문학적인 통찰이 어떻게 세계서사의 활로를 모색하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귀한 사례이다. 지금 ‘K-문학’으로 명명되는 고유함과 성취 역시 이를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는 개혁적 흐름들과 새로운 문명비판의 가능성들을 타진할 수 있는 데서 그 진정한 위상이 입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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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서구에서는 보기 드문, 한국에 관한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책”으로 “한 나라의 역사적 서사와 개인의 정의를 향한 탐구를 결합”시켜 “점령과 자유의 복잡한 민족사를 함께한 노동계급의 정치 투쟁을 강조한다”며 최종 후보작 선정 경위를 밝히고 있다. 「황석영 ‘철도원 삼대’로 부커상 최종 후보 올라」, 한겨레 2024.4.10.↩
- 구모룡 「소설이 로컬을 말하는 방법」,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318면. 소설에 생생하게 묘사되는 영등포지역에 대한 작가의 기억도 참고할 만하다. 황석영 『수인』 1권, 문학동네 2017, 396~401면.↩
- 이 소설과 연결하여 특히 해방 직후 전개된 급진적 조직노동운동이 1950, 60년대 노동운동사에 어떤 족적을 남겼는가를 살피는 연구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화숙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남관숙·남화숙 옮김, 후마니타스 2013.↩
- 쑨 꺼 「극한상황에서의 정치감각」, 최원식·임홍배 엮음 『황석영 문학의 세계』, 창비 2003, 215, 226면.↩
- 그간 황석영 소설에 통상적으로 수행되어온 소설론과 리얼리즘론을 비평적으로 점검하고 현재성을 살피는 평문으로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백낙청 「황석영의 장편소설 『손님』」,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황정아 「소설과 리얼리즘」, 비평동인회 크리티카 엮음 『소설을 생각한다』, 문예출판사 2018; 한기욱 「우리 시대의 「객지」들」, 『문학의 열린 길』, 창비 2021.↩
- 분단체제는 남북 각기의 분단국가가 분단체제의 매개 작용을 거치는 특수한 조건 아래 세계체제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회현상 및 정치현상 역시 분단체제와의 관련을 떠나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인식을 토대로 한다. 백낙청 외 『변화의 시대를 공부하다』, 창비 2018 참조.↩
- 백낙청 「황석영의 장편소설 『손님』」, 354~55면.↩
- 이재유에 대한 심화된 논의로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푸른 역사 2007.↩
- 전위와 대중의 관계를 고민했던 항일노동운동의 역사가 당대 사회운동과 어떤 연계 속에 존재했는지는 별도의 비평적 논의가 필요하다. 특히 항일혁명운동과 농민운동 및 다양한 민중독립운동과 관련되는 노동운동사의 위치를 살피는 것은 문학적 영역의 새로운 과제이다.↩
- 김형수 「미륵의 눈빛이 떨어진 자리」, 『창작과비평』 2020년 가을호, 349면.↩
- 같은 글 352~53면.↩
- 문학평론가 최원식에 따르면 소설 앞머리에 작품세계를 강렬하게 환기하는 전설 또는 우화를 배치하는 방식은 우리 소설사에서 자주 발견되는 방식이다. 강경애의 『인간문제』, 김동리의 『황토기』, 장용학의 『요한시집』, 황석영의 『장길산』 등이 예이다. 이때 등장하는 전설이나 설화는 작품의 주제와 연계되는 강력한 상징이 되는데 때로 근원설화의 재해석이 직접적인 정치적 우화에 머무는 경우도 발생한다. 최원식 「『인간문제』, 사회주의리얼리즘의 성과와 한계」, 『기억의 연금술』, 창비 2021, 213~14면.↩
- 백낙청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352면.↩
- 고전서사로 보면 주안댁은 「박씨전」처럼 난세에 나라를 구하는 국난극복의 서사를 떠오르게 한다. 덧붙여 주안댁과 막음이 고모의 존재가 부여하는 이야기의 활력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신금이는 소략하게 형상화되었다는 한계도 짚어둔다. 배움의 의지도 강하고 공장파업에도 적극 동참했던 신여성 신금이가 귀신을 볼 수 있고 특별한 예지능력도 지녔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설정이다. 그럼에도 ‘신통방통 신금이’라고 불리는 매력적인 이 인물이 작품이 전개될수록 가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위로하는 화자로 한정되는 점은 아쉽게 다가온다.↩
- 정홍수 칼럼 「두 겹의 시간」, 한겨레 2020.6.9.↩
- 영성을 존중하는 마음의 발현은 민중의 삶에 바탕을 둔 공적인 상제의 원리로 우리 삶에 존재해온 것이기도 하다. 백민정 「왜 귀신의 공공성인가?」, 『창작과비평』 2024년 봄호, 32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