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대담
2025년체제, 어떻게 만들 것인가
백낙청 白樂晴
서울대 명예교수,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저서 『민족문학과 세계문학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합본 개정판) 『백낙청 회화록』(1~8권)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좌담집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세계적 K사상을 위하여』 등이 있음.
이남주 李南周
정치학자, 성공회대 교수, 『창작과비평』 편집주간. 저서 『중국 시민사회의 형성과 특징』, 공저서 『21세기의 한반도 구상』 『동아시아의 지역질서』 『중국, 새로운 패러다임』 『백년의 변혁』, 편서 『이중과제론』 등이 있음.
이남주 안녕하세요. 『창작과비평』 편집주간 이남주입니다. 지난 12·3 비상계엄 선포부터 대통령 탄핵선고까지 한국사회에 커다란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습니다. 곧 대통령선거(2025.6.3)가 예정되어 있는데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새 정부의 할 일과 한반도 대전환 과제에 대해 백낙청 선생님과 이야기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왼쪽부터 백낙청 이남주 © 신나라
백낙청 창비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줘서 고맙습니다. 대선 결과가 나온 뒤에 이런저런 분석을 하는 것은 더 잘하는 분도 많을 것이고 계간지보다 훨씬 기동성 있게 할 터이니 우리가 다른 데서 잘 안 하는 이야기를 미리 해두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군요.
이남주 촛불혁명이 시작된 이래 낡은 것을 극복하고 인간적인 삶이 보장되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열망들이 끊임없이 표출되어왔습니다. 그 열망들을 실현시킬 좋은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어제(2025.5.1) 대법원에서 있었던 황당무계한 판결을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데요.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사건을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했습니다. 많은 시민들을 분노케 했고 기득권세력의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일입니다. 민심은 분명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데 법조문을 편협하게 해석하며 민심을 교란하려는 모습이에요. 사법적 판결로 민주주의를 흩뜨리고 막는 행태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보셨는지요?
백낙청 우선 나는 파기환송이 대선에 별 영향은 못 미친다고 보고요. 법률적으로도 그렇고,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이재명 후보에게 플러스가 될지도 모르죠. 저들이 왜 저러나 싶은데, 말씀처럼 낡은 것들을 극복할 시기에 대법관들이 ‘우리도 낡았어요, 기억해주세요’ 하는 거 같아요. 우리나라 최고 엘리트라는 이들이 두뇌기능이 좀 저하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절차상 위법한 재판을 했다든가 정치개입의 의도가 확인된다면 대법원 판결이라도 문제삼을 수 있겠지요. 그럴 경우 민주당과 입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리라 믿습니다. 다음 대통령 권한대행(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임무수행을 어떻게 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이미 윤석열이 파면됐고 내란 가담자임이 확실시되는 두 권한대행이 물러났으니 좀 다른 모습일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이남주 이번 판결이 시민들의 변화의지에 더 불을 지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이 윤석열정부의 출범을 두고 ‘변칙적 사건’이라 하셨는데(신년칼럼 「살던 대로 살지 맙시다」, 창비주간논평 및 백낙청TV 2022.12.30; 「2023년에 할 일들: 살던 대로 살지 맙시다」, 『창작과비평』 2023년 봄호) 이번 판결로 ‘변칙적인 행태’가 하나 더 보태어진 것 같습니다.
혼란의 궐위시대,
왜 2025년체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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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오늘 대담에서 중요하게 논의해보고 싶은 내용은 낡은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대전환의 길을 열어갈 ‘2025년체제 만들기’입니다. 2012년에 선생님이 ‘2013년체제’론을 제기하셨죠. 그 구체적 내용이 『2013년체제 만들기』(창비 2012)에 담겼고, 최근 유튜브 ‘백낙청TV’를 통해서도 그에 대한 평가를 하셨습니다(「백낙청 공부길 175」, 2025.4.25 등 정현곤편 참조). 한가지 주목할 점은 2013년체제가 선거일정에 기초해 논의되었다면, 그후엔 기존 헌법상의 선거일정을 넘어서는 대전환 기획을 말씀해오셨다는 겁니다. 이미 「2023년에 할 일들」에서 윤석열정부의 조기퇴진이 불가피하고 또 퇴진시켜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하셨고, 실제 윤석열정부가 2년 반 만에 끝을 맞았습니다. 저는 선거일정에 따르지 않는 이같은 새로운 기획에 ‘87년체제의 시효가 다됐다’는 인식이 더 명확해진 점이 주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도 “87년체제가 수명을 다했고 현행 87년 헌법은 정상적인 작동을 멈추었다는 판단”(신년칼럼 「2기 촛불정부와 22대 총선」, 창비주간논평 및 백낙청TV 2023.12.29; 「2024년 새해를 맞으며」, 『창작과비평』 2024년 봄호)을 하셨는데, 윤석열정부 출범과 이후 나타난 행태들에서 87년체제가 끝났음이 분명히 드러나니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을 하루빨리 추진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했습니다. 그것이 지금 2025년체제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백낙청
백낙청 윤석열정부를 빨리 퇴진시켜야 한다는 얘기를 정부출범 초기부터 했어요. 처음에는 조심조심 했고 나중에는 좀더 대놓고 했는데, 그건 내가 성질이 급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말씀하셨듯 윤석열정권의 등장은 변칙적인 사태이지 87년체제 속에서의 정상적인 정권교체가 아니라는 인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87년체제가 그전 체제와 뚜렷하게 차이나는 두가지가 하나는 직선제 개헌이고, 또 하나는 직선제를 통한 수평적인 정권교체가 가능해진 점입니다. 그런데 87년체제를 통해 1961년 박정희의 5·16쿠데타 이래의 군사독재를 청산했는데, 그 토대가 되는 분단체제는 청산하지 못했어요. 61년체제와 87년체제 모두 분단체제라는 토대를 공유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다음 과제가 분단체제를 (완전히 허물지는 못하더라도) 완화하고 개선하는 일이라고 봤는데, 그게 뜻대로 안 됐습니다. 2013년체제는 2012년 이명박정권하에서 치러지는 두개의 선거—4월 국회의원선거와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해 우리가 87년체제라고 불렀듯 2013년체제라고 부름직한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자는 제안이었지만, 총선과 대선에 둘 다 지면서 실패했죠. 그런데 87년체제를 통해 평화적·수평적인 정권교체들을 경험하고 나서는 저들도 깨달은 바가 있었어요. 이대로는 우리가 계속 해먹을 수 없지 않냐 하는 인식이 생겨서 창비에서 ‘신종 쿠데타’ 내지는 ‘점진 쿠데타’라고 부르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이남주 「역사쿠데타가 아니라 신종 쿠데타 국면이다」, 『창작과비평』 2015년 겨울호 ‘책머리에’; 이남주 「수구의 ‘롤백 전략’과 시민사회의 ‘대전환’ 기획」 『창작과비평』 2016년 봄호 참조). 이명박에 이어 박근혜가 집권하며 점진 쿠데타에 해당하는 작업들이 계속됐고, 결국 최순실 국정농단이 알려지며 2016년 우리 민중이 폭발한 거 아닙니까. 2017년에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지만, 87년 헌법을 뒷받침하던 사회체제는 거의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에 시한이 다했다고 봤습니다.
이번에 윤석열 내란을 수습하는 과정을 보면서도 87년체제가 작동을 안 하는구나 싶었어요. 우선은 윤석열이 대통령 직선제와 수평적인 정권교체를 불가능하게 하려고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것 아닙니까. 그리고 87년체제의 부수적인 성과랄까, 이때 새로 만들어진 제도가 헌법재판소예요. 사법부도 군사정권에서처럼 검찰이나 안기부가 불러주는 대로 판결하는 게 아니라 독립된 사법부를 만들려고 했는데, 실제 사법부도 훨씬 사법부다워졌고 헌법재판소는 2017년 박근혜 탄핵심판에서 시험대에 올라 그 시험을 잘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내란사태에서 보면 87년체제의 산물인 헌법재판소도 고장이 났구나 싶었어요. 결국은 8 대 0 판결을 내렸지만 국민이 원하는 대로 잘 치른 시험은 아니었어요. 사람들이 얼마나 속 타고 피 마르고 그랬나요. 게다가 이번에 대법원이 하는 걸 보면 사법부가 완전히 87년 이전으로 돌아간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87년체제가 시효를 다한 시점이 일찍 잡으면 노무현정권 말기부터인데, 그럼 그때부터 지금까지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서양사에 인터레그넘(interregnum)이라는 개념이 있잖아요. 왕이 죽었는데 다음 왕이 등극하지 못했을 때의 공백기, 궐위(闕位)시대라고도 하는데 그런 시기가 적어도 박근혜 퇴출 이후로 시작된 것 같아요. 이제 드디어 궐위시대를 끝내고 2013년에 이루고자 했던 꿈을 2025년에 이뤄보자는 생각입니다.
이남주
이남주 말씀처럼 분단체제가 작동하며 대전환을 제약하는 요인이 되지만, 그래도 87년체제 내의 변화의 동력들을 잘 활용하면 분단체제극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촛불대항쟁을 거치면서 수구세력의 태도와 상황이 크게 변했습니다. 이미 박근혜정부 때부터 점진 쿠데타를 비롯해 87년체제를 붕괴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2016~17년 촛불대항쟁을 통해 수구기득권 세력이 87년체제를 더이상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이끌어갈 수 없다는 점을 더욱 명확하게 인식하게 됐어요.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더 극단적인 발상에 집착하게 된 것 같습니다.
백낙청 87년체제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더 나쁜 체제를 만들려는 기획이었죠. 그걸 우리 국민들이 2016~17년 촛불대항쟁으로 궐기해 막은 겁니다. 새로운 정부는 그 열망을 받아 87년체제보다 나은 체제를 만들어야 했는데 제대로 못했어요. 그러다보니 윤석열정부의 등장이라는 변칙적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남주 이번 내란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보면 저들은 87년체제 내에서 점점 흔들리고 약화되는 분단체제의 구조를 되살리려는 프로젝트를 시도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기획을 ‘분단체제 재공고화 기획’으로 설명한 바 있는데(「문명 전환 시대, ‘한국’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남북관계를 후퇴시킨 것도 분단체제 재공고화를 통해 기득권을 다시 강화하려고 한 일이라 봅니다. 미중 전략경쟁과 신냉전구도가 새로운 기회를 주리라고 판단했을 텐데, 그게 뜻대로 안 되자 내란까지 일으키게 된 거죠. 지금은 분단체제를 활용하는 기득권세력의 의도가 여실하게 드러난 상태지만 앞으로도 그런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백낙청 내란세력이 아직도 완전히 포기 안 했다는 점은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남주 주간이 분단체제 재공고화 기획을 말할 때 그런 기획이 ‘잘 안 될 것이다’라고 지적하지 않았나요? 나는 그때도 거기 동의했고, 지금은 잘 안 된다는 게 거의 입증됐다고 봅니다. 신냉전구도만 해도 북중러와 한미일 관계가 국제질서의 전부가 아니거든요. 다른 플레이어들이 워낙 많은데다가, 특히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냉전시대 미소관계처럼 될 수는 없다고 봐요. 그때는 미국과 소련 간에 경제적인 교류가 없었고, 두 진영이 대립을 하더라도 서로 기득권을 어느정도 인정해주는 구도였어요. 지금 북중러와 한미일은 그런 양립구도가 아닙니다. 중국의 전략은 신냉전구도로 미국을 압도하겠다는 게 아니라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신흥경제국 협력기구)나 동남아와의 관계를 긴밀히 해 미국의 일극체제를 다극체제로 바꾸겠다는 것인데, 그게 얼마간 성공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적인 신냉전구도 형성이 어렵게 됐어요. 게다가 신냉전구도에서 가장 약한 고리는 역시 한국인데 한국 민중이 옛날처럼 냉전체제에 기반한 독재정권의 성립을 용납 안 합니다. 2025년체제가 세계체제 속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게 될지는 더 두고 봐야 하지만, 미국이 주인 노릇하고 일본이 상머슴 노릇하고 한국이 속된 말로 시다바리 노릇하는 3자구도가 이번 ‘빛의 혁명’으로 깨진 겁니다. 그래서 분단체제 재공고화 노력이 잘 안 됐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남북대결의 강화와 분단체제의 재공고화는 구별할 필요가 있어요. 분단체제는 남북대결만 아니라 여러 요인이 합쳐져 있는데, 분단체제가 고착화됐던 시기는 북도 핵개발을 안 했고 양쪽 체제가 비교적 안정된 때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남북대결을 강화해서 양쪽 체제가 안정되고 분단체제도 다시 공고화될 수 있는 시기는 아니라고 봐요. 오히려 남북대결이 강화될수록 한반도·동북아시아의 리스크가 훨씬 커지기 때문에 우리가 남북대결을 완화하는 것이 동북아나 세계의 안정에도 기여를 하리라고 봅니다.
이남주 선생님 말씀처럼 신냉전이 구조화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전망이 최근에 더 우세합니다. 오히려 지금 세계질서에서는 기존의 강대국이 훨씬 큰 불안요소이기 때문에 G0(G제로)나 G-(G마이너스)라는 말까지 나오죠. 국내적 차원과 한반도 차원에서, 그리고 세계적 차원에서도 궐위의 시대라 할 수 있고 불확실성이 높아졌는데, 세계의 새로운 변화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의 역할이 굉장히 커졌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백낙청 세계체제 차원에서도 궐위의 시대라는 말씀이 맞습니다. 세계체제가 안정적일 때는 대개 패권국가 하나가 힘이 빠지면 새로운 패권국가가 등장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그런 경우인데, 독일과 미국이 영국이 비운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다가 미국이 승리해 패권국이 됐어요. 어떤 이들은 이제 미국이 몰락하고 중국이 패권국가가 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전엔 일본을 얘기한 사람이 있었고요. 이건 중국이나 일본의 실력에 대한 과대평가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새로운 패권국가가 등장해 세계질서를 재건할 수 있다는 판단이죠. 하지만 지금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말기 국면에 와 있고 그게 끝나면 다음에 뭐가 올지 앞길이 안 보이는 궐위의 시대로 봐야 하고, 신·구 패권국의 통상적인 ‘세력 전이’가 불가능한 시기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일반시민을 포함한 개별 주체들의 영향력이 더 커져요. 그래서 우리가 한반도에서 2025년체제를 만들면 세계적으로도 큰 역할을 하고 비전을 제시할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변화의 동력을 이끄는 ‘변혁적 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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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올해 선생님이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라는 제목의 신년칼럼을 쓰셨고(창비주간논평 및 백낙청TV 2024.12.30) 덧글을 보충한 같은 제목의 글을 본지 봄호에도 게재했습니다. 체제의 지속불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현시점에서 대전환의 가능성과 이를 위해 가져야 할 태도에 방점을 찍은 글로 이해했습니다. 저는 두가지를 중요하게 봤어요. 우선 정치권에서도 마침 이재명 후보가 더불어민주당의 이념을 ‘중도보수’로 규정한 것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중도라는 점을 강조하는 식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과거 정치권에서 소위 ‘사쿠라’(5·16 이후 ‘변절자’ ‘내통자’ 등의 뜻으로 정계에서 유행. 쇠고기인 줄 알았더니 말고기 ‘사쿠라니꾸’였다는 일화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이 있음—편집자)로 치부되던 ‘중도’가 정치권의 진지한 화두로 논의된 것이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변화에 대한 우리의 지향을 서구의 진보/보수라는 틀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인식도 꽤 확산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변혁적 중도론에서도 계속 강조한 점이지요. 다만 ‘적당한 개혁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식의 관습적 중도 논의로 흐르면 그러한 개혁도 어려워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변혁적 중도는 한국사회 그리고 한반도 차원에서 전환을 지향해야 하고 그 핵심과제인 분단체제극복을 추구해야 하며, 그래야 각 시기에 필요한 개혁과제도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다는 점을 밝혀주는 이념입니다. 동시에 변혁을 위해서 중도가 필요하고요. 그간에는 변혁과 중도가 서로 상충되는 것 아니냐는 형식논리에 갇힌 시각도 있었지만 이제는 변혁을 위해 중도적인 길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이 모이고 있고, 현실적 의미가 더욱 커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번째로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는 말에서 중요한 것은 ‘때가 왔다’는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방향 제시가 아니라, 지금이 우리가 대전환을 만들어갈 수 있는 중요한 변곡점에 있고 구체적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며 이를 위한 공부가 절실한 시점이라는 뜻이죠. 변화에 대한 기대와 함께 시대적 과제에 대한 절실함, 절박함이 담겨 있는 것 아닌가 하고 해석했습니다.
백낙청 그렇죠. 우리가 변혁적 중도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어느정도 열렸던 게 2016~17년 촛불대항쟁 때예요. 나는 촛불대항쟁이 촛불혁명이라는 더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사건의 시발점이라고 봐요. 그때 촛불시민들이 변혁적 중도라는 개념은 안 썼지마는 낡은 이념에 사로잡힌 정치는 그만하고 변혁적 중도다운 새로운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는 열망이 있었다고 봅니다. 문재인정부가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지만 그 열망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면서 윤석열정부가 출현했죠. 그런 실패가 또다시 되풀이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과 절박함이 있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국민들이 문정부 실패에 대한 여러가지 고민과 반성을 했을 것이고, 이재명의 민주당도 각오가 상당히 되어 있다고 봅니다. 처음에 반윤석열정부 투쟁이 힘을 못 받았던 것도 국민들이 기껏 애써서 정권 바꿔봐야 또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있어서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변혁적 중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어떤 꼴인가 하는 점이 더 명확해졌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제가 윤석열을 두고 하늘이 보내준 사람이라 주장한 바도 있지요.(웃음)
이재명이 민주당의 정체성을 중도보수로 말했던 것은 국민의힘에 불의의 일격을 가한 거죠. 너희가 보수 사칭이나 하고 있지 무슨 보수냐, 차라리 내가 보수를 해주겠다 한 것이니 저쪽에서 거세게 반발했잖아요. 어떤 이들은 이재명의 중도보수 주장을 ‘빈집털이’라고도 하더군요. 보수 간판 걸고 수구 짓이나 하던 사람들이 내란에 가담하느라 아예 집을 비워버렸으니까 빈집에 들어가서 그나마 쓸 만한 물건을 챙겨 나왔다는 거죠. 이후 이재명 후보는 민주당의 성격을 중도로 규정했어요. 민주당은 원래가 중도 정당이니까 필요할 땐 보수도 하고 진보도 한다는 거지요. 변혁적 중도라는 말은 안 쓰지만, 이후보의 간판공약이 ‘먹사니즘’을 기반으로 한 ‘잘사니즘’이잖아요. 잘사니즘이라는 것을 그는 모두가 함께 잘 사는 대동세상으로 규정하기도 했어요. 그가 창비의 변혁적 중도론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의 중도론에는 변혁적 중도론이 상당히 포함돼 있거나 적어도 상통하는 바가 있지 싶어요.
이남주 변화에 대한 열망과 기대가 실패로 향한 것이 1차로는 박근혜가 당선된 2012년이고, 2차는—선생님 말씀처럼 완전한 실패는 아니지만—문재인정부 시기입니다. 2017년 문재인정부가 출범하고 2018년에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진행되며 변혁적 중도에 부합하는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커졌습니다. 하지만 수구의 저항도 그만큼 더 극렬해졌습니다. 외부적으로는 미국 네오콘(neoconservatives, 조지 부시 집권 이후 미국 내에서 강화되어온 신보수주의) 세력을 끌어들이고 내부적으로는 검찰·언론 등 수구기득권을 전면적으로 동원하면서 변화의 흐름을 가로막았죠. 윤석열정부 집권기는 수구의 본면목을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통치를 위한 최소한의 윤리와 능력도 없이 혐오정서를 동원해 제 기득권만 지키려고 했는데, 그 정점이 내란사태였습니다. 저는 수구가 선거에서 이기고 보자는 발상에서 윤석열을 선택한 것이 제 무덤을 판 결과로 이어졌다고 생각하고, 우리 국민이 이제는 수구와 보수가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됐다고 봐요. 단순히 보수로 설명해서는 안 될 집단이 우리를 통치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다는 이 인식을 더 분명하게 만드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백낙청 나는 일찍부터 지금의 국민의힘 또 그 전신인 당들에 대해서 ‘보수정당’이라는 말을 안 썼어요. 조·중·동 신문에 대해서도 보수언론이라 부르는 데 반대합니다. 수구언론이고, 조선일보 경우는 그냥 ‘찌라시’ 수준일 때도 많죠. 보수와 수구를 구분해야 한다는 인식이 지금에 와서 확실해졌는데, 사실은 진작부터 우리 사회가 배웠어야 할 교훈이라고 봐요.
이남주 우리가 변혁적 중도를 어떻게 실현해갈 것인가 할 때, 민주당이 변화를 위한 강한 정치 플랫폼이 되었다는 점도 주목됩니다. 2016~17년 촛불대항쟁 때 광장에 출현한 다양한 목소리를 변화의 동력으로 모으는 데에는 사실 어려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 목소리들을 정책화하고 실행시키는 과정에서 혼란스럽고 취약한 점이 있었어요. 당시 시민사회에서 민주당의 역할을 폄하하는 경향도 강했고, 민주당 역시 정치 기득권에 안주하는 경향이 커져 있었습니다. 지금은 민주당이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민주당의 책임이 커졌다는 뜻인데, 주어진 역할을 잘할 것인가는 남아 있는 문제이지만 변화의 동력이 강화되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토대가 마련된 것 같아요.
백낙청 변화의 동력을 우리 국민이 얼마나 성장했고 민주당이 얼마나 변했는가 하는 측면에서 볼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무엇이고 우리가 그걸 얼마나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는가에 따라서도 동력에 차이가 날 겁니다. 윤석열정부가 나라를 총체적으로 망가뜨려놨기 때문에 이것을 감당하는 일은 국민으로서도 당으로서도 또 차기 대통령으로서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문재인정부도 망가진 나라를 다시 만들자는 생각을 가지고 출범했지만, 그러려면 소위 적폐청산을 안 할 수 없었거든요. 그럼 적폐청산을 누가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걸 윤석열 같은 정치검사들에게 맡겼다는 데서 첫번째 문제점이 생겼고, 또 하나는 적폐청산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실은 참 모호하다는 거예요. 우리나라에 적폐 아닌 게 얼마나 돼요?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지금은 ‘적폐청산’이 구호가 아니에요. 내란세력 청산과 응징 문제는 법률적으로도 아주 명확하고, 정치검사 부대를 끌어들일 필요 없이 공수처를 강화하고 제대로 된 사람들로 특검을 해야죠. 내란세력에 해당하는 사람들만 처벌해도 엄청난 적폐청산이 저절로 되는 겁니다. 이 과제는 명분이 뚜렷하고 국민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사안이에요. 지금 이재명 후보가 민주당 선대위(선거대책위원회)를 빅텐트로 구성한 걸 두고 언론에서는 대개 ‘중도 확장’으로 이야기하고, 나쁘게 보는 이들은 우파와의 타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기준이 확실하다고 봐요. 내란세력을 청산해야 한다, 윤석열의 내란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하는 사람들이 모인 거죠. 그런 힘과 대통령이 갖게 될 권한을 통해서 내란세력을 청산하고 응징하면, 거기서 저절로 새로운 동력을 또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이남주 이번 계엄사태는 방송 중계도 돼서 전국민이 지켜봤습니다. 말씀처럼 명확한 기준 속에서 내란을 처벌하고 극복해나간다면 변화를 위한 좋은 동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25년체제 건설의 핵심의제
민생과 한반도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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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2025년체제의 내용을 어떻게 채울지, 사회적·정치적·경제적으로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 이야기 나누고자 합니다. 최근 객관적인 환경은 무척 어렵습니다. 국제질서의 불확실성이 높고, 남북관계와 경제문제도 부담이 큽니다. 의제 하나하나가 단기간 내에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인데, 새 정부 출범 전에 어떤 일부터 시작하고 어디까지 달성할 것인지를 점검해봤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민생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해요. 서민과 중산층의 생활이 어려워졌고, 경제성장률도 상당히 심각합니다. 내란사태에 의해 경제가 더 나빠졌지만, 실은 윤석열정부 내내 안 좋았어요. 작년 2분기에 역성장(-0.2%)을 했고, 3분기와 4분기에도 0.1% 성장밖에 안 됐습니다. 2025년 경제성장률 전망도 밝지 않습니다. 한국은행이 작년 하반기만 해도 1.9% 성장을 예상했다가 지난 2월에 1.5%로 하향했습니다. IMF도 마찬가지로 하향조정했고(2%→1%) 1% 이하로 더 낮춰 보는 견해도 많습니다. 실제 올해 1분기 한국 경제성장률은 –0.2%였죠. 지난 2년간 윤석열정부의 세수 결손도 정말 심각했습니다. ‘보수가 경제는 잘한다’라는 통념이 얼마나 그릇됐나 확인되고, 이 점은 앞으로도 강조해야 할 부분입니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는 경제가 이미 망가져 있던 상황이라는 점을 명확히 공유할 필요가 있고, 재정지출을 확대해 경기 하방압력에 대응해야 합니다. 최근 13.8조 규모의 추경(추가경정예산)을 했지만 현 비상상황에 대응하기에는 형편없이 적습니다. 선거과정에서부터 재정지출 확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해서 정부출범 이후 혼란을 줄이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백낙청 선거과정에서 이재명 후보가 두가지는 확실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먹고살게 해줘야 된다, 재정지출을 확대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대외 여건이 불리하고 우리 재정도 워낙 부족하지만 대통령이 되면 긴급재정명령 발동도 가능해요. 다른 하나는 내란 청산이죠. 내란 청산을 내걸고 선거에 압승을 하면 영어로 맨데이트(mandate, 명령·권한부여)라고 하는 ‘민심의 명령’이 딱 내려지는 거니까 그다음에는 그야말로 본인의 능력에 달린 문제입니다. 보수가 경제는 잘한다는 신화는 완전히 깨졌고, 그동안 나는 이재명 후보를 수많은 유튜브 자료 등 여러모로 관찰하면서 저 사람이 다른 건 몰라도 살림은 잘하겠다는 확신을 가졌어요. 경험도 많고요. 한 사람의 힘으로 다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잘하리라는 일종의 신뢰가 있습니다. 그 두가지 외에 이재명 후보가 또 하나 얘기하는 게 한반도평화예요.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한데, 평화하고 민생이 같이 가야지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 굶어 죽고 있는데 혼자만 평화를 들먹이는 거룩한 말씀을 하면 공허해지는 거고, 그렇다고 민생만 열심히 하면서 한반도평화가 개선되지 않으면 한계가 있어요. 남북관계가 괜찮았을 때는 남북 경제협력이야말로 한반도경제의 블루오션이라는 얘기도 있었는데, 그런 봄날이 다시 오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지금 같은 엄동설한을 우선 넘기기만 해도 확실히 달라지는 게 있으리라고 봅니다.
이남주 변혁적 중도론에서도 민생을 비롯한 국내 개혁과제들을 제대로 실현해 힘을 모음으로써 한반도평화를 함께 해결해가야 한다는 점을 계속 강조해왔죠. 중기적인 관점에서 2025년체제의 성공 수준도 한반도평화를 위한 작업이 얼마나 진전되느냐에 따라 결정되리라고 봅니다. 객관적 상황이 어려워졌어도 포기할 수 없는 과제예요. 이재명 후보가 대선후보 수락연설(2025.4.27)에서 “개벽 같은 변화”를 이야기한 것이 그런 꿈을 담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재인정부 시기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언급하고, 선대위 내에 평화번영위원회를 구성한 것도 의지를 보인 것이고요. 다만 해당 연설에서 나라 건설의 구체적 의제를 말할 때는 평화 얘기가 없고 ‘안보 강국’ 얘기를 했습니다. 책임있는 대통령이라면 국민들의 안보 불안과 염려를 해소시켜줄 의무가 있지만, 우리 같은 분단구조 속에서 안보담론을 앞세우다보면 분단체제에 기대어 살던 사람들의 기득권을 다시 강화해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직면한 안보문제의 성격이 어떤 것이냐, 어느 정도의 위협이냐 하는 점을 구체적으로 살피면서 안보정책의 목표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같은 작업을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마 내란 극복과정에서 더 명백히 밝혀지겠지만 윤석열정부에서 북쪽으로 드론을 보내서 충돌을 유도하려는 정황이 있었는데, 새 정부에서도 한반도 평화정책과 흐름을 가로막는 저들의 행태가 언제든 다시 등장할 수 있다고 봐요. 어떤 이념 때문이 아니라, 2025년체제 건설 차원에서 지금 시점부터 분단체제극복의 의지가 좀더 명료하게 표현될 필요가 있습니다.
백낙청 지난 대선 직후에 우리가 대선에는 졌지마는 이재명이라는 걸출한 정치지도자를 건졌다는 얘기를 했어요(「[오연호가 묻다] 백낙청 교수, 이재명을 다시 평가하다 “김대중 이후 최고 정치지도자 천신만고 끝에 한 사람 건졌다”」, 오마이TV 2024.3.19). 앞으로의 기대가 가미된 발언이기도 했고 패배한 국민들을 위로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이미 그와 같은 판단을 내 나름으로 했던 건데 지금 이재명 후보는 그때하고도 또다른 지도자가 됐고, 민주당을 장악하는 과정이나 지난 총선을 승리로 이끄는 과정을 보더라도 어느정도 입증됐다고 봅니다. 나는 이재명 후보가 기본적으로 알 건 다 아는 사람이라고 봐요. 대통령이 되면 또다른 온갖 압력과 조건에 얽매이게 될 테니 어떻게 할지는 두고 볼 수밖에 없는데, 우리 시대에 그만한 지도자가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는 대선후보로 나왔다는 게 큰 복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시민들이 그를 맹종하는 게 아니라 분단체제극복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 공부를 해서 의견을 밝혀주는 게 중요하겠죠. 분단체제극복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의지가 약화됐다는 시각에 대해서는 나는 사실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부르짖던 식의 관심이 희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 때나 수구세력이 남북문제를 일으키고 국내에서 개혁적인 일을 하려고 하면 (그게 남북관계와 관련이 없다 해도) 번번이 친북좌파니 반국가세력이니 하고 몰아가는 세상에서는 못살겠다, 이대론 안 되겠다 하는 확실한 의지와 결심이 서 있다고 봅니다. 그다음에, 한반도 정세가 지금 어려운 건 사실이나 그것도 과장되고 피상적인 판단일 수 있어요. 오히려 좋아진 면을 두고 큰일났다, 너무 어려워졌다 하고 속단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중 하나가 북핵문제죠. 윤석열정부 이전까지는 북쪽이 핵문제에 대해 양면적인 전략을 갖고 있었어요. 물리학자로서 북핵문제에 현장경험이 풍부한 헤커(S. Hecker) 박사의 책(『핵의 변곡점』, 창비 2023)에도 자세히 나오는데, 미국과의 관계가 잘 풀리면 핵을 포기하겠지만 안 될 때에 대비해서 계속 준비하고 핵강국의 길을 가겠다 하는 이원적 전략이었죠. 지금은 그런 전략은 포기했다고 봅니다. 이제는 핵강국으로서 확실한 위상을 확보하겠다는 입장이죠. 그런데 트럼프가 북을 ‘뉴클리어 파워’(핵보유국)로 지칭했잖아요. 북의 몸값이 올라가 있고 그 몸값대로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걸 내비친 거죠. 원래 한반도 비핵화란 남북한 전체의 비핵화를 의미하는데, 그동안 북의 비핵화에만 집중해 너희가 핵을 포기하면 제재를 풀어주겠다는 식으로 접근하면서 해결이 안 됐어요. 이제는 북이 핵보유국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러니까 앞으로 더 만들지는 말고 한반도 전체를 비핵지대로 만들어가자는 얘기를 진지하게 꺼낼 시점이 왔습니다. 트럼프가 거기까지 갈지 안 갈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여건이 마련됐죠.
이남주 일각에서는 북한이 적대적 국가론까지 들고나오는데 남북관계 잘 될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도 적지 않습니다.
백낙청 최근에 북이 통일 얘기 그만하자, 국가 대 국가로 가자고 하니까(2023년 말부터 북한이 제기한 ‘두 국가론’—편집자)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어요. 물론 북이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주적관계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죠. 그러나 적대적인 것으로 치면 윤석열정부가 몇배 더했어요. 이번 내란사태에서 보면 정부가 북을 도발하려고 백령도에서 사격훈련을 했지만(2018년의 9·19 남북군사합의를 깨고 2024년 6월부터 서북도서에서 4차례 해상사격훈련을 진행—편집자) 북이 꼼짝 안 했고, 오물풍선 보내는 것도 멈췄어요. 내란세력의 의도를 다 읽은 거예요. 지금 북한이 우리와의 모든 접촉을 끊고 있는 것은 문제지만, 국가 대 국가로 사고하자는 것은 전부터 우리 남측의 입장이었습니다. 국가 대 국가이되 장기적으로 통일을 지향하기 때문에 보통의 이웃나라하고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간 남쪽 정부에서 남북연합 방안을 얼마나 고민해왔는지는 몰라도 창비 지면에는 줄곧 남북연합 건설을 주장해왔고 그게 노태우 대통령 이래 대한민국의 일관된 방침이도 했습니다. 남북연합은 남이라는 국가와 북이라는 국가의 연합이죠. 그래서 북에서 국가 대 국가 관계를 선언한 것은 반가운 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아요.
통일정책 폐기한다는 선언도 다르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통일하자’는 것은 6·15 남북공동선언 1항의 원론적인 선언이에요. 통일 방안은 2항에 나와 있는데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북은 2항 얘기는 별로 안 하고 1항 얘기만 했지요. 통일지상주의로 보더라도 현실성이 없는 것이지만, 사실은 북한 내부의 통치 이데올로기라는 면이 컸다고 봐요. 우리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백성들이 왜 이렇게 못사냐, 통일하면 잘살 텐데 남쪽의 친미 사대주의자들하고 미 제국주의자들이 자주적인 민족통일을 거부하고 있어서다 하는 주장이죠. 이제 북에서 그런 통치 이데올로기로서의 통일론은 필요없고, 우리는 우리대로 핵을 가진 강국이 되어 잘살겠다고 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진전이라고 봅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것들’하고는 상종을 안 하겠다고 할 때, ‘대한민국 것들’이 윤석열 일당이면 상종 안 하는 게 맞지만 윤석열을 물리친 우리 국민들이나 다음 정부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지는 지켜봐야 합니다. 처음 한동안은 좀 그러다가도 달라지리라고 봅니다.
이남주 저도 정부출범 초기의 북한 반응이 중요하다고 보진 않습니다. 문재인정부 시기에도 2017년에는 남북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죠. 북이 핵실험을 추가 진행했고, 11월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를 했습니다. 그러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대화가 시작되고, 미국 트럼프 대통령도 참여하면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이루어졌습니다.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갈지 새 정부가 지속적이고 일관된 신호를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북관계는 항상 불확실성이 높은 영역인데 상황의 변화에 너무 끌려다니지 않아야 하고, 돌발적인 사태에도 너무 과민반응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북쪽도 더 강하게 나오게 되니까요. 정권 초기부터 신경써서 잘 관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정책에서는 두가지 정도가 시급해 보입니다. 우선 늦어도 내년까지는 적대성을 완화하고 대화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상징적으로라도 정상회담 개최가 필요합니다. 두번째로 협력·교류를 해야 해요. 대북제재 문제가 있어 쉽지 않은 일이고 문재인정부 때도 넘지 못한 부분인데 새 정부가 준비를 잘했으면 합니다. 북한과의 교류에 대해서는 퍼주기식이라는 비판이 늘 나오는데, 지금은 북도 그런 방식을 원하지 않습니다. 트럼프가 북한에 투자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비즈니스가 있다는 의미고, 우리 역시 그런 아이템을 가지고 협력해가면 남북협력에 대한 일각의 부정적 인식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백낙청 시급한 과제는 9·19군사합의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합의를 깼는데, 위험한 국경선을 사이에 둔 국가들로서는 꼭 필요한 장치거든요. 이건 통일에 관련된 문제도 아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봐요. 합의를 깨고 북에 드론 보내고 사격훈련까지 한 것은 윤석열정부고, 민간단체가 미국 북한인권운동가들한테 자금을 받아 대북전단 살포하는 일도 계속됐죠. 정부 혹은 정부 차원에서 뒷받침해주는 민간단체가 해왔던 적대행위를 중단해야 하고, 그건 비교적 간단한 일입니다.
시민참여형 개헌의 길을 열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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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내년으로 촛불혁명 10년이 됩니다. 특히 이번 내란 극복과정에서 K민주주의가 굉장히 주목을 받았고 의미도 커졌습니다. 지난 2016~17년의 촛불대항쟁 때만 해도 서구에서는 이를 민주주의의 진전이나 확대로 평가하기보다 정상적 정치과정에 대한 교란이나 정치적 불안정성으로 보는 견해가 적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서구 민주주의가 큰 위기에 직면해 있고 자기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없는 상황이죠. 한국이 시민의 힘으로 질서정연하게 내란을 진압하고 민주주의의 퇴행을 막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K민주주의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상당히 높아졌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외부의 평가가 아니라, 실제 내용적으로도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해가고 있습니다. 서구의 대의민주주의는 어떤 면에서는 진전된 질서이지만 최근 20~30년 동안은 기득권에 포획되는 문제가 커졌습니다. 우리가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모습이, 선생님이 죽 말씀해오셨고 저희도 강조해온 ‘개벽’에 값하는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백낙청 이주간이 지난 『창작과비평』 봄호에 김대중사상에 대한 글(「김대중사상과 K민주주의」)을 발표했죠. 그 글에서 1994년 김대중과 당시 싱가포르 총리 리 콴유(李光耀)의 논쟁을 평하는 대목이 있어요. 자신의 독재를 옹호하기 위해 ‘서구와는 다른 아시아적 가치’를 끌어들인 리 콴유와 김대중 사이의 이 논쟁을 두고, 흔히들 김대중이 서구적 민주주의 개념을 옹호했다고 평가해왔어요. 그런데 이주간은 김대중 선생이 동학 이래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그게 그야말로 K민주주의이지요—를 인식하고 있었고, 민주주의라는 게 꼭 서구의 것이 아니며 민주주의를 아시아적 가치와 위배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게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했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그 대목에 무척 공감했어요. K민주주의라는 게 꼭 2016년에 출발한 것도 아니고 면면한 전통을 가진 흐름입니다. 그것이 21세기에 와서 꽃피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2025년체제를 만들려고 하면 제도화 차원에서는 개헌문제가 중요하지요. 개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남주 개헌은 상당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다만 개헌 논의는 항상 정치적으로 오염될 가능성이 높고, 최근에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예컨대 선거날 개헌 투표도 같이 하자는 주장은 정치적 의도가 반영돼 있죠. 권력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구조 문제를 앞세워 개헌을 말하는 사람들이 정작 선거법 개정은 얘기하지 않으니, 권력 나눠먹기식이 되기 십상입니다. 모두 정치적으로 불순한 의도에 의한 개헌론이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한번의 개헌에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고 하는 시민사회의 경향도 문제이고요.
이와 관련해서 최근 선생님께서 명료하게 설명하신 내용을 봤습니다. ‘시민의회 전국포럼’ 창립대회(2025.3.29) 격려사를 통해 ‘투포인트 개헌’이라는 구체적인 시각을 제시하셨는데요. “포인트 하나는 헌법의 전문이든 본문이든 국회의 동의를 얻어내기 수월한 조항을 택하여 (개헌을 위한—인용자) 원내 동력을 확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개헌하기 쉬운 나라’를 만드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두번째 포인트가 중요하고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첫번째 포인트에 대해서는 선생님 말씀을 좀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어떤 내용이 원내의 동력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개헌을 쉽게 하는 절차에 동의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합니다.
백낙청 개헌을 쉽게 만드는 헌법개정 자체도 200석 이상이 필요한데 그 의석을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은 의문이죠. 그래서 첫번째 포인트로 200석 이상이 쉽게 동의할 만한 개정 조항을 하나 놓고, 끼워팔기식으로 개헌절차 수정도 해내자고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번째 포인트지 첫번째의 그 조항이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에요. 가령 내란세력에 대한 처벌이 어느정도 이루어지고 난 뒤에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자 하면, 예전에 국힘당도 주장했던 일이니 큰 반대 없이 할 수 있을 겁니다. 대통령 권한을 다소 축소하는 조항도 그렇고요. 그런데 여기다 두번째 포인트, 국회에서 200석 이상이 찬성해야만 국민투표를 하게 되어 있는 현재의 개헌 요건을 완화하거나 다른 통로를 겸해서 개헌하기 쉬운 나라를 만들려 하면 기득권세력들의 반대가 거세고 심지어 민주당 안에서도 이견이 있을 겁니다. 의원들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일로 생각할 테니까요.
물론 87년 헌법을 만든 이후로 옛날처럼 권력자가 자기 권력을 확대하기 위해 개헌을 일삼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왔다는 것, 그래서 87년 헌법이 30년 가까이 지속되어왔다는 것은 우리 국민의 자랑입니다. 그러나 개헌하기 이렇게 어려운 나라가 좋은 나라는 아니거든요. 대표적으로 미국은 개헌이 엄청 어렵습니다. 대통령 간접선거 제도를 비롯해 여러 문제가 많은데 전혀 손을 못 대고 있고 앞으로도 바꾸기 쉽지 않을 거예요. 미국은 개헌을 하려면 우선 상·하원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통과된 다음에, 4분의 3 이상의 주(州)에서 비준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의회에서 통과되고도 주에서 비준될 때까지 몇년씩 기다렸다가 발효되는 경우도 있는데(예컨대 의원 급여와 관련한 수정헌법 제27조는 1789년 발의된 뒤 1992년 비준되기까지 203년이 소요되었으며, 성평등권 조항은 1972년 발의된 이래 지속적으로 비준운동을 전개해오고 있음—편집자), 최근에는 그런 시도마저 없어요. 미국의 개헌방식은 국민투표도 아니죠. 미국은 원래 직접민주주의를 안 하기로 작심한 나라예요. 그러니 오늘 미국이 저 모양입니다. 대조적으로 직접민주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있는 스위스는 국민 스스로 상시적으로 개헌 발의를 합니다. 시민들 사이에 어느정도 합의하고 세력을 이루어서 발의하는데, 국민투표를 통해 가결되기도 하고 부결되기도 합니다. 부결되면 그다음에 또 발의하면 돼요. 최근 시민의회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런 사례연구를 많이 하는 모양인데, 개헌 발의조차 대통령과 국회가 독점하고 개헌이 너무 어려운 것은 비민주적이에요. 일정한 숫자 이상의 국민들이 동참하면 발의할 수 있고, 그다음에 의회에서 심의하고 표결할 수 있도록 권한을 줘야죠. 그때는 꼭 200석이라야 할 필요는 없고 정족수를 좀 낮출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국민투표로 가는데 안건이 단순하면 국민의 의사가 정확히 반영될 가능성도 높아져요.
이남주 사회가 워낙 빨리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때그때의 시민적 요구가 헌법개정에 잘 반영되는 일이 중요해 보입니다. 사회적 변화와 시민들의 요구가 헌법에 잘 반영되어야 국가운영도 좀더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고요.
백낙청 헌법은 사회의 변화를 반영할 때 힘을 갖는 거지 시민 다수의 지지가 없는 헌법은 그냥 흰 종잇장에 검은 활자 인쇄해놓은 것에 불과해요. 지금 우리는 새 헌법이 필요하죠. 87년 헌법이 작동했던 데는 87년체제라는 더 큰 사회체제의 뒷받침이 있었던 건데, 궐위시대라는 표현도 썼듯 지금은 그 기반이 사라지고 새로운 헌법은 아직 없는 상황입니다. 국민들도 새로운 헌법에 대한 욕구가 있고 좋은 개헌을 하면 지원해줄 거라고 봅니다. 다만 한번의 개헌으로 한꺼번에 다 이루려는 생각은 버려야 하고, 대선 전에 개헌하자는 얘기도 물 건너갔습니다. 나는 그런 얘기를 하는 분들 중 일부는 책상에서 연구만 하다보니까 현실감각이 떨어진 경우가 있고, 또 일부는 이주간 말대로 불순한 의도가 내포돼 있었다고 봐요. 개헌은 선거과정에서도 논의되겠지만, 서두를 수는 없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리고 하나 덧붙이면 그렇게 개헌해서 만들 나라를 ‘제7공화국’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건 지식인이나 학자의 언어지 대중의 언어가 아니고, 안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1~6공화국이 각기 뭐였는지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어요? 물론 ‘2025년체제’도 지식인의 언어지 대중의 언어는 아니에요. 그러나 올해가 2025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왜 올해를 이렇게 특별한 해로 보느냐 하는 것도 다들 알아요. 2024년 말 이래의 격변의 과정을 사람들이 다 실감하고 있기 때문에 2025년체제라는 표현이 훨씬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선한 기운을 일으키는 것이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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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2025년체제에서 주요하게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데, 중요하다고 보시는 의제에 대해서 더 들려주셔도 좋겠습니다.
백낙청 앞서 우리가 정당한 과제를 설정하면 거기서 변화의 동력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그 과제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동력이 더 커질 수도 있겠죠. 새로 나온 문제는 아닙니다만 전보다 지금 훨씬 절박하게 느끼는 과제 중 하나는 기후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사회 내 남녀갈등 문제입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옛날부터 있어왔지만 여성차별과 여성혐오가 결합된 사태는 비교적 새로운 현상이에요. 아무 이유 없이 여성이 죽임을 당하고, 꼭 그런 피해사건만이 아니라도 여러 분야에서 남녀간의 입장차이가 있습니다. 심지어 윤석열 내란에 대해서도, 적어도 광장에 나온 군중은 여성들이 훨씬 많았죠.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어쨌든 남자와 여자가 다같이 잘 살고, 그리고 평등하게 살고 평등하게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어야겠죠. 그러려면 여성들도 목표를 거기다 두었으면 하고요. 남자들하고 싸워 전투에 하나둘 이긴다고 해서 전쟁을 이기는 건 아니거든요. 내가 일찍이 “우리 시대의 큰 문제 중 하나가 못난 사내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출판 기자간담회 발언, 2021.11.23)이라고 했는데, 못난 사내라고 그냥 버려두면 되겠어요? 첫째는 못난 사내가 양산되는 기제가 뭔지를 알아서 그 수를 좀 줄여야 할 거고, 또 이미 생산된 못난 남자들에 대해서도 욕만 한다고 해결되지 않죠. 내 이야기도 욕하자는 얘기가 아니에요. 왜 그런 양산현상이 벌어지는가를 분석해야 하고 어떻게 모두들 더 잘 살 수 있을지 함께 모색해보자는 거지요. 흔히 젊은 남성들이 시위에 덜 나오는 이유가 그들이 게임하느라고 정신없다고 하지요. 나는 게임하는 세대하고는 거리가 너무 멀지만, 게임을 남자들만 하는 것도 아니려니와 게임이라고 다 나쁜 건 아니고 게임도 그 나름이겠지요. 듣기로는 온갖 편견과 혐오감을 조장하는 악성 게임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어떤 게임이 개인이나 사회에 더 유익한 게임인가, 그런 연구는 나보다 더 자격있는 사람들이 해야겠지요. 우리 이남주 주간도 나보다는 젊으니까 좀더 알아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웃음)
이남주 새 정부가 출범되면 또 새로운 분위기에서 얘기할 수가 있을 테니 노력해야 할 과제입니다. 사회적 의제에 대해 너무 정체성 충돌로만 이야기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건강한 논의도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 같아요.
백낙청 물론 규제를 할 건 해야 합니다.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너무 약한 건 분명해요. 그러나 처벌과 규제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선한 기운을 확 일으켜서 그 기운으로 덮어버려야 하는데, 촛불혁명이 그런 것이라고 봅니다. 이번에 주목할 만한 현상이 더 있죠. 사회운동을 말하며 노동운동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간 민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국민들의 사랑을 잘 못 받았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반윤석열집회의 양대 동력이 하나는 민주당이고 하나는 민주노총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거기에 시민들, 특히 여성들이 많이 참여했습니다. 여성들하고 기존의 노동운동 사이에 연대감이 깊어지고 어느 대목에 가서는 노조가 사랑을 받기도 했어요. 우리 노동운동으로서도 큰 기회이니 노동운동 쪽에서 지혜롭게 기회를 살려야 하고, 시민사회와 정당도 이 기회를 잘 활용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변혁적 중도’로 써내려갈
새로운 정치, 새로운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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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차기 정부가 정말 잘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잘할지 이야기해봤으면 합니다. 내란세력의 저항도 당분간 계속될 테고 객관적 상황도 결코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차기 정부의 실행능력이 중요해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 지금 이재명 후보에 대한 지지가 높은 이유도 기득권과 잘 싸울 수 있다는 기대는 물론 실행능력에 대한 평가가 높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방정부의 책임자 혹은 야권 지도자라는 위치와 대통령의 위치는 조금 다릅니다. 대통령으로서의 이재명은 어떨까에 관심이 모일 수밖에 없고, 그럼 이분이 잘할 수 있는 것들을 잘하게 만들고 혹 조금 모자란 부분이 있으면 보완해나가는 일이 정부출범 초기에 중요할 것 같아요. 민주당이 현재 국회의 다수당이라는 점이 상당히 좋은 여건이지만, 대통령의 결정은 고려해야 할 변수도 많고 그에 따르는 책임도 훨씬 큽니다. 그 압박감에 위축당하면 정책 결정이 제대로 안 이뤄지거나 너무 지체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을 거예요. 대통령이 되기 전에 자신이 정말 해야 할 일,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확고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백낙청 이미 그 일을 이재명 후보가 누구보다도 많이 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게 대통령 노릇하기에 충분하냐 여부는 그때 닥쳐봐야지 알지 아무도 모르는 거겠지요. 그러나 우리 시민들이 계속 뒷받침을 해주고, 지식인들도 낡은 담론들을 청산해준다면 이재명 후보도 힘을 더 얻을 겁니다. 이재명 후보는 사상과 이념보다 실용을 중시하는 실용주의를 표방하고 있는데, 그것이 내가 오랫동안 변혁적 중도를 얘기하며 강조해온 바와 통합니다. 낡은 언어, 낡은 이념, 낡은 사상에서 벗어나 더 유연하고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발언하자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우리가 그만큼 준비된 대통령 후보를 김대중 이후로는 만나본 적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에 비하면 얼마나 여건이 좋습니까? 김대중 대통령은 DJP연합(1997년 대선에서 이루어진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의 연합)을 하고도 겨우겨우 기적적으로 대통령이 됐어요. 이재명 후보가 그 나름으로 고생도 많았고 생명의 위협도 겪었지만,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우선 표차부터도 클 것이고 국회도 거의 3분의 2에 육박하는 의석을 가지고 있죠. 나는 국회의원 모수(전체 300석 중 더불어민주당 170석, 국민의힘 107석, 조국혁신당 12석, 진보당 3석 등, 2025.5.8 기준)도 전체적으로 변화가 좀 생길 거라고 보는데 그러면 더 강력한 위치에 서게 될 거예요.
이남주 앞서 선생님도 언급해주셨지만 제가 지난 봄호에 김대중사상을 변혁적 중도로 설명하는 글을 실었는데, 사실은 김대중 대통령도 ‘변혁적 중도’라는 표현을 직접 쓴 적은 없습니다.
백낙청 그래서 저는 그분을 ‘샤이 변혁적 중도주의자’라고 부른 적이 있어요.(웃음)
이남주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이념을 굉장히 다양하게 설명했는데, 어떨 땐 보수라고 하고 어떨 땐 진보라고 하고 나중에는 중도라는 표현을 좀더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어떤 표현을 썼든지 견지했던 방향이 있었음이 확실히 읽힙니다. 계속되는 변화 속에서도 살아남고, 사회에 대한 자신의 실천을 이끌어갈 수 있었던 힘이 거기서 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재명 후보 역시 그때그때 자기의 과제들을 잘 수행해가되 지나고 보면 ‘아, 이분이 이런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구나’ 하는 것들은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정치적 에너지가 축적이 되면서, 그때마다 마주하는 어려움에 굽히지 않고 큰 뜻을 향해 계속 걸어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백낙청 이주간이 이재명 후보에 대해 애정을 갖고 여러 걱정의 말씀을 하시는데, 김대중 대통령 때를 보면 그이에게 국민으로서 이런저런 요구는 했어도 정치를 가지고 코칭을 하려는 경우는 없었어요. 그래서 이재명 후보에 대해서도 이래라저래라 코치할 생각은 없어요. 나도 맹목적인 지지를 할 사람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일정한 신뢰를 가지고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남주 이렇게 새 정부가 들어설 기회가 생긴 것은 좋은 변화이지만, 정부를 이끌어가야 할 입장에서 보면 인수위 없이 출범하는 것이 핸디캡으로 작용할 것 같습니다.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체계를 갖추는 게 실무적으로 중요해 보입니다. 출범 초기 집중해야 할 의제를 잘 실현시키려면 정부부처 개편도 필요할 텐데, 어떻게 해야 새 정부의 출발이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백낙청 인수위 없이 출발하는 게 큰 핸디캡이죠. 앞으로 이런 보궐선거 상황에 대한 법률상의 대비도 있어야 될 것 같아요. 새 정부가 시급히 할 일은 아까 얘기했듯이 민생구제인데, 거기에 대해서 이재명만큼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추경을 통해 재정마련을 하고 여차하면 긴급재정명령권이라도 발동해야 된다고 보고요. 선거과정에서는, 앞서 얘기했던 거지만 내란 완전종식을 중요한 이슈로 삼아서 압승하면 이것은 민심의 명령이 되니까 당연히 따라야겠지요. 좋은 사람을 특검으로 임명해야 하고요.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뒤 조직개편을 완료하는 데 두달 정도 걸렸지요? 이번 정부는 인수위 없이 집권하는 선례를 봤고 학습효과가 있었을 테니 미리부터 훨씬 잘 준비할 거고 의회 여건도 유리하기 때문에 전처럼 두달은 안 걸릴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을 써야죠. 내각도 그렇지만, 청와대의 비서실장·정책실장·안보실장 등 의회절차 없이 당장에 임명할 수 있는 인사를 충성심 있고 지혜도 있는 사람들로 꾸려야 해요.
이남주 실제로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점이 중요한데, 그 점은 이재명 후보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부부처의 경우에 관료들을 잘 장악할 수 있어야 하고요.
백낙청 나도 이주간도 교수지만, 교수 출신을 무조건 배제하지는 않더라도 너무 많이 기용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웃음)
이남주 내란 청산과정에서 상당히 포괄적인 동력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이 동력을 정치적으로 작동시키려면 일종의 연합정치 필요성도 있는 것 같습니다. 서구에서 제도적으로 연합정치가 작동하는 경우는 의원내각제인데, 정당별로 선거를 치른 후에 연합을 통해 다수당을 만들어서 총리를 선출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연합정부가 구성되는 방식이죠. 우리 정치에서 연합정치 논의는 대개 선거 전에, 선거를 이기기 위한 방식으로 얘기되어왔습니다. 선거연합을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그 연장선에서 연립정부가 구성된 대표적인 사례가 DJP연합이지요. 지금 선거 승리 가능성이 높고 의회도 다수당인 민주당으로서는 굳이 연합정치의 필요성을 못 느낄지 모릅니다. 그러나 포괄적 동력들을 활용해 실제 변화를 만들고, 변화를 통해 더 많은 힘을 만들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백낙청 연합정치도 87년체제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아요. 87년체제 아래서 이루어진 연합정치의 두가지 성공적인 사례가 하나는 DJP연합이고, 또 하나는 2010년 지방선거 때 ‘희망과대안’ 활동입니다. 당시에 이명박정부가 천안함사건을 발표하고 여론을 몰아서 지방선거를 크게 이겨보려고 했는데, 시민단체가 주도해 민주당·민주노동당 등의 연합을 이끌어내고 지방선거도 승리했습니다. 지금도 대선 승리를 위한 연합정치가 어느정도 가동되고 있다고 봅니다. 가령 지난번에 야5당의 공동선언(더불어민주당·조국혁신당·진보당·기본소득당·사회민주당의 ‘내란종식 민주헌정수호 새로운 대한민국 원탁회의’ 1차 선언문 2025.2.19 및 2차 선언문 2025.4.15)도 있었고요. 2차 선언문을 보면 다수연합 실현을 위해 교섭단체 요건 완화를 한다는 등의 내용이 있어요. 그게 꼭 연립내각으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중요한 연합정치의 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 민주당 선대위의 구성도 연합정치와 부합되는 면이 있고요. 물론 실제 집권 후에 적재적소에 사람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문제는 그때 가봐야 알 겁니다. 선대위 들어와서 선거 승리에 기여했다며 너도 나도 한자리씩 달라고 하면 다 줄 자리가 없고, 반대로 기존의 민주당 세력이 이재명을 지켜오고 싸워온 건 자신들이라며 권력을 독식하려 해도 다툼이 굉장할 거예요. 현실정치에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한데, 차기 대통령이 적절히 처리하리라고 믿습니다.
다음 정부가 들어서는 순간 한국의 정치지형은 엄청 바뀌게 돼 있어요. 이미 바뀌기 시작했고요. 헌법은 바꾸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 하더라도 선거법이나 정당법, 국회법은 비교적 빨리 개정할 수 있습니다. 연합정치를 강조하는 사람들도 87년체제의 틀 속에서만 사고하지 않아야 하고, 달라진 지형 속에서 다당제를 어느 수준까지 할지 논의해야 합니다. 가령 민주당을 중심으로 반내란 선거가 치러지는 것에 대해 민주당은 진보가 아니지 않냐 하며 진보연합을 따로 만드는 구상도 가능하지만, 그게 지나쳐서는 안 되겠죠. 아까 민주노총에 대해 시민들의 시선이 변화한 점이나 대중집회 현장에서 그들이 사랑을 받기도 한 점을 얘기했는데, 아직까지 그게 범국민적 인식으로 확산되지는 않았거든요. 그러면 노동운동은 노동운동대로,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더 노력하면서 이 연대를 키워나가야죠. 우리가 이번 빛의 혁명에 큰 기여를 했으니 권력을 얼마만큼 나눠달라는 식으로 나오면 시민들의 눈길이 다시 싸늘해질 것 같아요. 그래서 순서로 보면, 역시 내란세력 청산이 우선이에요. 그걸 하면서 동시에 정당법과 선거법 등을 개정해, 현재 다당제가 거의 불가능한 이 체제를 바꿔놓아야 하죠. 대법관 수만 아니라 국회의원 수도 늘려서 다양성과 민심비례성이 훨씬 높아진 입법부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부터는 각자가 자기 세력을 더 순탄하게 키우게 될 겁니다. 바라건대는 그 세력들이 변혁적 중도론에 공감을 해주면 좋겠습니다. 어느 쪽에서는 ‘우리는 노동과 진보를 더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변혁적 중도다’ 말하고, 또 어떤 데서는 ‘민주당은 너무 진보적이다, 우리는 진정한 보수세력이 공감할 수 있는 변혁적 중도 아젠다에 치중하겠다’ 말하면서 여러 당이 분립하면 좋겠죠. 변혁적 중도의 관점을 가진 세력이 전체적으로 커져서 국민통합에 도움이 되고, 변혁적 중도가 사회의 주류 담론이 되는 때가 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남주 오늘 이야기가 그저 희망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미 차기 정부를 위한 좋은 조건들이 다양한 수준에서 마련되고 있다고 봅니다. 후보에 대한 지지와 국민적 열망의 차원이 모이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조금만 더 정신 차리고 힘을 모은다면 좋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겠다 하는 실감을 다시 한번 하게 됩니다. 중요한 말씀 나눠주신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2025.5.2. 창비서교빌딩)
* 특별대담은 유튜브 ‘백낙청TV’(youtube.com/paiknctv) 접속 및 오른쪽 QR코드 스캔을 통해 시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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