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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오드리 로드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 오월의봄 2025

차이를 넘은 연대, 누가 간단하다고 말했던가

 

 

이주혜 李柱惠

소설가 leesto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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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미국 전미도서상 시상식에서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가 시부문 수상자로 호명되었을 때 리치는 개별 수상을 거부하고 같이 후보에 오른 오드리 로드(Audre Lorde), 앨리스 워커(Alice Walker)와 함께 “가부장적 세계에서 목소리를 잃은” 모든 여성의 이름으로 상을 받겠다고 선언하며, 상금 전액을 흑인 싱글맘 단체에 기부했다. 이 ‘사건’은 미국 문단과 페미니즘 제2물결 역사에 꽤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풍경이 뿜어내는 기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드리 로드와 앨리스 워커의 시집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2020년 미국에서 출간된 리치의 전기 『에이드리언 리치의 힘』(The Power of Adrienne Rich)에 따르면, 당시 오드리 로드는 리치의 공동수상 제안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었지만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의 갈등과 불화가 유난히 과대해석되는 분위기에서 반대할 수 없었다고 한 지인에게 털어놓았다. 앨리스 워커 역시 여러해가 지나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인종차별이 분명한 사회에서 어차피 백인인 리치가 상을 받을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흑인 퀴어 페미니즘의 전지구적 지평을 모색하고 확대한 오드리 로드의 산문집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I Am Your Sister, 1985, 박미선·이향미 옮김)에는 1974년 당시 로드가 다 하지 못했던 말을 보충하는 듯한 산문이 있다. 「레즈비언과 게이 출판의 주요 현안」은 1990년 로드가 퀴어 글쓰기에 평생을 바친 작가들에게 수여하는 빌화이트헤드상을 수상할 당시의 연설문이다. 빌화이트헤드상은 홀수 해는 남성으로 정체화한 작가에게 짝수 해는 여성으로 정체화한 작가에게 수여하는데, 레즈비언 작가로서 백인 여성 리치가 먼저 받고 이어서 로드가 받았다. 로드는 수상 연설에서 한 사람이 상을 받는다고 해서 유색인종 레즈비언과 게이 작가의 지속적인 비가시화 상태를 상쇄하지는 않을 것이라며(208면) 퀴어 출판의 현안에 인종 의제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심사위원단의 구성과 주최사인 트라이앵글출판사의 인종정치를 비판했다.

산문집에는 이렇게 ‘차이’에 관한 로드의 분노와 깊이 팬 골을 메우고자 하는 진지한 모색이 두드러진다.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여성, 백인과 남성이 지배하는 미국 주류문단의 벽을 부순 최초의 흑인 여성시인으로서 로드는 1970~80년대 미국의 흑인 민권, 래디컬 페미니즘, 레즈비언 운동에 적극 뛰어들어 ‘교차성’ 담론을 주도했다. 그러나 로드에게 연대와 운동은 동일성이나 유사성보다 차이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갈등의 길이기도 했다. 흑인 사회에서는 로드의 파트너가 백인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 레즈비언 사회에서는 로드가 백인 게이 남성과 결혼해 딸과 아들을 낳고 키운 ‘엄마’라는 사실이 또다른 소수자성을 강화했다. 로드의 대표적인 산문집 『시스터 아웃사이더』(Sister Outsider, 1984, 한국어판 주해연·박미선 옮김, 후마니타스 2018)에는 어느 레즈비언·페미니스트 모임에 10세 이상의 남성은 참석할 수 없다는 공지를 받은 로드가 당시 열세살이던 아들 조너선의 참석이 개인의 미래를 위해서뿐 아니라 ‘우리’의 비전과 생존에도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하는, 주최측에 보내는 편지가 인용되어 있다. 이렇듯 로드는 자신의 다층적인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온갖 차이를 가시화한다. 그 소수자성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책이 『시스터 아웃사이더』라면, 거기 실리지 않은 글들과 이후 쓴 글을 모아 로드의 퀴어 페미니즘과 차이 페미니즘, 전지구적 지평을 잘 보여주는 책이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이다.

로드가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라고 말을 걸어올 때 그것은 서로의 동일성과 유사성, 혹은 균질성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가 차별로 흐르지 않게 하라는 호소이자 절규이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에 전지구적 고민이 담겨 있다. 특히 2장 ‘아파르트헤이트 미국’과 3장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기’를 통해 아프리카, 중동, 남아프리카 전쟁지역의 재난상황이 미국 시민들의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강조하고, 미국의 흑인과 퀴어 시민 역시 세계 시민사회에 책임이 있음을 역설한다. 실제로 미국의 인종차별이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를 강화하고, 미국의 흑인 아동과 청년들이 약물중독으로 죽어가는 것이 세계적인 대규모 학살과 무관하지 않으며, 핵무기 실험으로 인한 생태파괴, 퀴어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1세계의 폭력 증가 등이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동시에 “개별적인 생존이란 가능하지 않”(184면)으니 함께 행동해야 함을 강조하면서도 로드는 “우리의 목적이 같다는 점뿐만 아니라 서로를, 즉 우리의 차이를 정말로 인식해야”(198면) 한다고 역설한다. “이타주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보존, 즉 생존”(193면)을 위해서다. 이렇듯 한 글자 한 글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새긴 듯한 로드의 문장들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다. 달력은 넘어가도 세계의 폭력은 끊임없이 재생 중이다. 이 폭력의 세계에서 우리가 똑같아서 연대하는 게 아니라 다름에도 혹은 달라서라도 더욱 연대할 수 있음을 우리 역시 지난겨울 남태령시위와 한남동의 ‘키세스단’에게서 배우지 않았던가.

물론 차이와 교차성을 넘은 연대가 말처럼 쉽지는 않다. 로드 역시 이를 알고 「누가 간단하다고 말했던가」(Who Said It Was Simple)라는 시를 썼다. 시는 여성해방행진에 나선 백인 여성들이 음식점 앞에 줄을 서 있던 흑인 남성보다 먼저 주문을 하면서도 누구도 그 ‘미세한 노예제의 쾌락’을 알아채지도 거절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며 인종과 젠더 해방 사이 균열을 드러낸다. 그러나 시의 마지막 문장 “이 자리에 앉아 (나는) 생각한다/이 모든 해방 중에/어떤 내가 살아남을지”는 로드가 자신에게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던지는 묵직한 질문이다.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에는 이처럼 묵직한 질문들과 로드 나름의 진중하고 뜨거운 답변이 담겨 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누가 간단하다고 말했던가」는 1974년 전미도서상 후보로 올랐으나 리치의 수상작만큼 자주 호명되지는 못했던 로드의 세번째 시집 『다른 이들이 사는 땅에서』(From a Land Where Other People Live, 1973)의 수록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