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우리 시대의 현장
백영경 (白英瓊)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위원. 대담집 『다른 의료는 가능하다』 및 공저서『돌봄이 돌보는 세계』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배틀그라운드』『고독한 나에서 함께하는 우리로』 『프랑켄슈타인의 일상』, 역서 『유토피스틱스』 등이 있음.
박누리
지역 언론가, 활동가. 『옥천신문』 기자 및 『월간 옥이네』 편집장 역임. 공저서 『뉴 로컬 컬처 키워드』 등이 있음.
전준 (全準)
과학기술사회학자, 카이스트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인공지능과사회공진화연구센터장,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주요 논문으로 「민주적인 과학기술과 상징폭력」 「질적연구는 인공지능으로 인해 진보할 것인가?」 등이 있음.
주현우
제주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 지역소멸 위기론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으로 박사논문을 썼으며, 그밖에 주요 논문으로는 「사회적 고통의 의료화와 한국 사회의 트라우마 담론」 등이 있음.
백영경(사회) 안녕하세요. 저는 사회를 맡은 백영경입니다.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이자 인류학자이고 『창작과비평』 상임편집위원으로 있습니다. 본지 50주년에 ‘운동성’과 ‘현장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목표를 내세운 바 있는데, 창간 60주년을 맞아 한국 현실에 천착하는 민주주의 담론과 실천을 모색하는 시점에서도 운동성과 현장성이라는 이 화두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대화는 어느새인가 주로 사회문제로만 등장하는 ‘지역’을 우리 시대의 주목해야 할 주요한 현장으로 볼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려고 합니다. 지역과 현장에 대해 연구하고 활동해온 분들을 모셨는데 간략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박누리 저는 경북 구미 출생으로 2010년부터 옥천에 살고 있는 박누리라고 합니다. 옥천신문사 취재기자가 되면서 옥천에 정착했고, 이후 『월간 옥이네』라는 지역잡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지역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지금은 활동을 잠시 쉬고 있는데, 앞으로 인터뷰를 기반으로 한 지역 프로젝트를 기획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스스로를 ‘소멸하는 농촌’이 아닌 ‘가능성을 만드는 농촌’을 기록하는 시민이라고 소개하기도 하는데요. 농촌지역에 사는 주민으로서, 읍면 단위에서 만나는 주민들의 언어를 대신 전할 기회라고 생각해 함께하게 됐습니다.
전준 저는 카이스트 디지털 인문사회과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연구하고 있는 전준입니다. 과학기술사회학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특히 인공지능과 사회가 어떻게 서로를 변화시키며 나아가는지를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검증하는 인공지능사회공진화연구센터를 만들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자랐고, 현재도 서울이 아닌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역이라는 단어가 의미있는 말이라고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요. 그런 맥락을 오늘 이 자리에서도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주현우 반갑습니다. 저는 최근 지역소멸문제 위기론을 주제로 제주대에서 박사논문을 쓴 주현우라고 합니다. 서울 출신으로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사회운동을 했고 국가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 등에서도 활동했습니다. 개념의 사용과 실제 현실이 괴리되는 지점에 대한 비판, 이론적 논쟁보다는 구체적 삶의 현장에 기초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 시대 현장으로서의 지역
―
백영경
백영경 각자 이해하시는 지역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로 물꼬를 트면 좋겠습니다. 사실 지역이라는 말은 한국에서 독특한 용법으로 사용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일정한 특징을 공유하는 장소를 뜻할 뿐이지만, 우리 현실에서는 주로 지역소멸이나 불평등과 같은 사회문제와 결부되어 이 단어가 소환되곤 하지요. 그런 차원에서 요즘 지역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지역의 현실을 통해서 본다면 현장의 의미는 어떻게 재구성되어야 할지 연결해서 논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주현우 우선 이 자리에서 쓰이는 지역이 어떤 의미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는데요. 예전에는 지역보다 ‘지방(地方)’이라는 말을 썼고, 지금도 제도나 정책에서는 ‘지방소멸대응기금’ 등 지방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지방이 서울 중심에 종속된 구조를 전제하는 수직적 언어라는 비판 속에 지역이라는 말이 대안적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서울이 아닌 주변부’가 아니라 ‘특정 경계로 구획된 공간’이라는 좀더 수평적 의미로 이해되는, 그 자체의 역사·문화와 정체성이 있는 곳으로 보자는 의도로 사용되는 용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박누리
박누리 지역이 지금 같은 의미로 본격적으로 호명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중반부터로, 도시재생사업이며 ‘로컬 크리에이터’ 열풍이 불면서 지역이 자본의 새로운 시장으로서 조명된 측면이 큽니다. ‘원주민’ ‘선주민’이라는 말처럼 원래부터 그곳에 살아온 이들이 있고 생태·환경이나 문화도 있어왔는데, 마치 새롭게 발견된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호명되었던 거죠. 지역소멸 담론과 결합해 온갖 사업이 벌어지는 최근엔 그 이익을 노리고 ‘헌터’들이 몰려들기도 하는데, 지역사회 입장에서는 이런 것들이 잠깐 들어왔다가 나가버린 뒤 굉장히 공허해져요. 지역이라는 말을 ‘우리가 살아온, 살아가는 공간’으로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준 당장 10년만 지나도 거주민이 한명도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지역도 있으니 지역에서 인구감소는 당연히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에 대한 대책을 현재는 지역으로 ‘돈이 들어가는’ 사업을 만드는 것 말고는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역에서의 삶은 단지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 이를테면 보건·의료 문제 등과도 얽혀 있습니다. 지역에서 의미있게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데, 국가적 차원의 사업으로 해결하자는 것 이상으로는 이야기가 나아가지 못하곤 합니다.
주현우 지역소멸 위기론에서 실제 빠져나가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모두가 떠나는 와중에도 남아 있는 사람들의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을 살리는 일은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인식을 필요로 합니다. 지역을 소멸이라는 위기로만, 행정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로만 여기면 주민들의 삶과 괴리되고 ‘지원금이 얼마나 필요한가’ ‘무엇을 만들면 되나’ 따 위의 접근법에만 갇히게 됩니다. 현실에서 구체적인 위기가 무엇인지 고민 하지 않는 위기론은 허공에 뜬 공허한 말이 되고 말겁니다.
백영경 지역이 사람들의 구체적 삶의 현장으로 인식되지 못하는 문제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 사회의 ‘현장’은 무엇이며 어디인가를 다시 이해하는 문제로도 연결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누리 이벤트로 소비되는 현장이냐, 일상으로서의 현장이냐의 차이일 텐데요. 미디어와 중앙의 시선에서 지역 현장은 사건사고나 투쟁이 벌어지거나 기이한 일이 일어나는 ‘비상상황’일 때만 호명됩니다. 하지만 주민들에게 현장은 밥을 먹고, 이웃을 만나고, 병원을 가는 일상의 공간이에요. 외부에서는 인구소멸지수 같은 숫자로 지역을 진단하지만, 진짜 현장의 위기는 ‘버스가 없어 읍내 병원에 못 가는 할머니의 하루’나 ‘아이에게 친구가 없어 전학을 고민하는 양육자의 저녁’ 같은 아주 조용한 일상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구가 적으니 학교를 폐교시키고 보건지소를 줄이자는 식의 효용성의 논리는 주민들에게 ‘당신은 여기서 늙고 아플 자격이 없다’는 메시지처럼 들립니다. 지역위기론에선 정작 놓치고 있는 이 조용한 붕괴, 그럼에도 삶을 지탱해나가는 구체적인 얼굴을 ‘현장’이라는 단어로 복원해내야 해요.
전준
전준 제가 지역이라는 말을 의미있게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것도 ‘과연 지역이 아닌 곳이 있는가’ 하는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수도권이든 아니든 결국 각자 살아가는 곳이 지역이고, 모든 곳은 각각의 고유한 현장으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이때 현장은 단일한 장소가 아니라 수많은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또다른 현장들과 다층적으로 얽혀서 움직이는 곳입니다. 그 현장의 의미는 그곳을 관찰하는 시선이 보고자 하는 범위 내에서 부상하기 때문에, 지역을 볼 때도 단순히 이슈를 따라다니는 방식으로는 곤란합니다. 가령 ‘소멸 중인 현장’ 프레임으로만 보면, 지역이 사회적·문화적으로 복잡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공간이라는 점을 간과하게 됩니다. 지역이 가진 현장성을 더 확장하고 조립해내고 재구성할 필요가 있는 거죠.
주현우
주현우 어떤 의미에서 지역은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보자’는 말이 가장 살아 있어야 하는 자리인데, 역설적으로 지역의 복잡한 사정을 이야기하면 ‘복잡하니까 간단하게 보자’는 반응을 접하곤 합니다. 작년에 안동 산불이 났을 때 현장에 다녀왔는데요. 정부와 지자체의 접근방식은 보상을 해주겠다, 보상을 위해 특별법도 필요하다 등 주로 보상을 중심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보상 문제에 한정한다고 하더라도 현장의 이야기는 훨씬 복잡했어요. 살던 마을이 불타고 나면 연세나 형편에 따라 또는 피해상황에 따라 이참에 마을을 떠나고 싶은 분들도 있고, 마을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가옥이 마을 입구에 있느냐 산 밑에 있느냐에 따라 새로 지을 수 있는 보상 가옥의 형태도 다를 수밖에 없고요. 피해에 따라 보상금 액수가 다른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전소되지 않고 반만 탄 집이라고 해도 허물고 새로 지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농기계가 오래되었다고 쓸모가 덜한 것도 아닌데 연식에 따라 보상금이 달라지고, 농공단지의 경우에는 소유주의 주민등록지가 다른 곳에 있어 피해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도 했습니다. 재해의 수습과 복구는 시급한 보상을 필요로 하지만 구체적인 방식은 복잡할 수밖에 없는데, 기존 제도의 틀에 갇힌 방식이 피해주민 입장에서 대단히 부당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거죠. 수도권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대책에서는 지역의 세부적 상황이 제대로 반영되지를 않습니다. 지역의 복잡한 사정을 전달하면, 딱하지만 다 반영할 수 없는 개인사가 되어버려요. 대형 산불처럼 삶의 조건을 뒤흔드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거나 감당하게 해서는 안 되는 문제들이 그 사람의 불운처럼 취급되고, 해결 역시 개인의 몫이 되는 상황들이 지역에서 사람들을 떠나게 하는 원심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산불의 여파가 지역소멸을 가속화할 거라는 얘기는 지역 현장에서 자주 들은 말이기도 합니다. 지역을 현장으로서 조명할 때는 지금의 지역 담론이 사람들의 사는 모습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 또는 맞닿게 할 수 있는지를 의식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서 어떻게 살아?
지역에 대한 편견과 공포를 부추기는 논리들"
―
백영경 .지역이라고 하면 일단 불편하고 살기 어려운 곳으로 인식되는 경향도 있습니다. 지역은 살기 어려운 곳이고, 특히 젊은 사람들은 살고 싶어하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이 거의 당연시되다시피 하는 것 같은데요. 왜, 어떤점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한번 짚어볼 필요도 있겠습니다
박누리 .일종의 ‘로컬 리터러시’가 너무나도 낮아져 있는 상황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역에 대해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잖아요. 한곳에서 나고 자라더라도 그 지역에 대한 이해가 낮고, 그곳에서 할 수 있는 활동에 대한 상상도 결핍된 채 지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자주 듣는 말이 “그 동네에서 뭐 하고 살아?”입니다. 16년 전 옥천에 왔을 때부터 그랬지만 최근에는 특히 “비혼여성 혼자 농촌에 산다고? 너무 위험한 짓이야”라는 염려를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농촌에서의 삶을 지나치게 납작하게 표현하는 말이거든요. 이곳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비혼여성이든 혼자가 되신 할머니든 혼자서 살아가는 여성이 많습니다. 농촌과 연결고리가 없는 사람들은 농촌을 계속 낯선 공간으로 상상하고 공포감을 조성하는데, 이는 공동체의 성원이자 건강한 민주시민으로서의 정체성까지 분리시키는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전준 지금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말은 ‘지역에 일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인구를 유입시키고 정주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일종의 ‘국가-시장 연합’으로서의 뉴딜이 동원되는 상황이에요. 일자리 문제는 지역대학들도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때문에 대학이 지역 일자리 연계의 거점이 되어야 한다, 지역 착근성을 갖는 인재를 양성해서 지역의 산업체에서 일하며 정착해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해결의 전부처럼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고등교육 구조개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역대학들마다 경제유발효과를 계산해서 교육부에 제출하고 있고요.
주현우 일본은 지방대학 활성화와 지역 일자리 창출 등을 위해 ‘지방창생 1.0’ 정책을 10년간(2014~24) 추진했지만 수도권 집중화나 지역의 노동력 품귀현상은 변하지 않았다고 발표했습니다(일본 내각관방 「地方創生 2.0 の‘基本的な考え方’」 2024.12.24). 지역위기론을 이야기하면서 빠른 해결책을 찾으려 할수록 오히려 위기에 대한 구체적 진단이 소홀해지고 제대로 된 해결책도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지역에 인프라를 확충하고 돈을 쏟아붓는다 한 들 서울 중심의 삶의 기준에 맞출 수 있을까요? 반대로 모두가 서울에서처 럼 산다고 하면 그건 그것대로 지구적 문제가 될 겁니다. 2014년에 마스다 히로야(増田寛也)가 ‘지방소멸’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지역소멸 논의를 부각 시켰을 때(마스다 히로야 『지방소멸』, 와이즈베리 2015 참조) 도시사회학자 야마시따 유우스께(山下祐介)는 도시의 삶의 방식을 왜 모든 곳에 관철시키려고 하느 냐고 반박했죠(야마시타 유스케 『지방회생』, 이상북스 2019 참조). 감당할 수 없는 이 야기와 해서는 안 될 이야기까지 위기라는 언어 속에 뭉뚱그려지고 있어요.
전준 박누리 선생님이 로컬 리터러시가 낮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연히 몸으로 겪고 느껴야 했던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삶의 조건들이 더이상 일상 속에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돌아볼 지점입니다. 사람이 사는 공간을 탈물질화하고, 탈사회화하고, 탈지역화하는 사고체계는 앞으로 더 심해질 거라고 봅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디지털사회가 제공하는 편의성 때문인데,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 가리지 않고 자본과 편의를 맞바꾸고 있어요. 예를 들어 요즘 아이들한테 배추가 어디서 나오냐고 물으면 핸드폰에서 나온다고 답하는 경우까지 있다고 하잖아요 .
박누리 저는 지금의 쿠팡사태 역시 한국사회가 농업과 농촌, 농민을 삭제해온 것과 같은 맥락 속에 있다고 생각해요. 새벽배송의 편리함 뒤에 밤낮없이 일하는 노동자의 고통이 가려져 있듯, 마트 진열대의 농산물에도 흙을 일구고 기후위기를 온몸으로 견뎌낸 농민의 얼굴이 지워져 있죠. 벼가 어디에서 나는지 알지 못하는 채 성장해 쿠팡 노동자가 어떻게 일하는지 알지 못한 채 편리함만 소비하게 되는 구조는 결국 생존에 필수적인 ‘노동’과 ‘생산’을 우리 일상에서 철저히 소멸시킨 결과라고 봅니다. 더구나 최근엔 지역이 관광지로만 인식되거나 나아가 ‘워케이션’(workation, 휴가지에서 업무와 휴식을 함께하는 방식)의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도시 사람들이 잠시 쉬다 갈 수 있는 힐링의 장소이자 소비처로만 지역이 호명되면서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연결감을 되살릴 필요가 있어요.
백영경 지역은 도시에서 가능한 삶이 똑같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 살기 힘든 곳’처럼 인식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보건·의료 문제만 해도 누구나 누려야 할 필수의료와 응급의료, 돌봄지원이 지역에서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는 것과 모두가 근거리에 대형 종합병원을 두고 생애의 끝자락까지 첨단의 치료를 받는 게 당연하고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는 구분을 해야 합니다. 농촌지역에서 소매점들이 사라지면서 신선한 식재료를 구하기 어려워진 문제를 비판하는 것과 빠른 배송과 대형 쇼핑몰이 가까이 있지 않으면 사람 살 곳이 못된다는 생각은 구분해야 하는거죠. 따라서 지역의 현실을 비판할 때도 갈래를 잘 타야지 단지 도시적 삶과 다르다는 이유로 못 살 곳으로 낙인찍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
지역소멸 논의는 어떻게 더 많은 개발로 이어지는가
―
백영경 지역소멸이 강조되다보니 지역이 조용하게 시들어가는 상황에 있는 것처럼 이해하시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실제로는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벌이는 여러 대규모 개발사업이 시행되는 곳이 지역이기도 합니다. 지역소멸 논의가 곧 ‘지역에 개발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전환되는 문제는 어떻게 보시나요?.
주현우 복잡한 지역의 문제를 단순화해서 보게 되는 이유가 무엇보다 지역에 대한 시선이 ‘저발전’이라는 문제의식에만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의 문제는 저발전 때문이고, 저발전의 해결은 개발이라는데에 소위 진보든 보수든 모두 동의하고 있는 것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해요. 발전국가론 등 발전 개념에 대한 주류적 이해는 발전을 가로막거나 촉진하는 요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에 비해 무엇이 실질적 ‘발전’인지, 그것을 뒷받침하는 지식과 실천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어요. 지역의 문제를 저발전으로 규정하고 성장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진단하는 순간 좁게는 국내 지역간 분업이 강제하는 문제, 크게는 국제적 분업관계에서 야기되는 제국주의적 문제 모두를 도외시하게 됩니다.
백영경 최근에는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일으킨 사업이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시범사업을 거쳐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일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지기보다 역시 또다른 개발 프로젝트로 흡수된다는 겁니다 .
박누리 지자체 주도의 대규모 관광지 개발이나 대기업 유치 같은 ‘한방’을 노리는 사업, 지역의 자원을 헐값에 넘기는 결과로 이어질 일련의 프로젝트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봅니다. 시범사업 관련해서 제가 걱정스럽게 보는 일은 영농형 태양광입니다. 지난 10여년간 지역에 외부 자본이 들어와 영농형 태양광을 설치하며 마을을 휩쓸고 다녔어요. 그러다 최근에는 마을 스스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협동조합을 만들고 태양광발전을 통한 재생에너지 수익을 마을 소득으로 만들자는 흐름이 생겨났습니다. 좋은 사례로 손꼽히는 것이 여주 세종대왕면 구양리의 ‘햇빛두레발전소’예요. 전국 최초로 1000킬로와트 규모의 마을 단위 태양광발전소를 만들고, 그 수익을 공동체 식당과 버스 등 마을 복지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마을회관·창고·주차장 등 태양광 설비를 할 수 있는 마을의 공동재산이 있었 고, 이장을 비롯한 리더들이 공공성에 대한 확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정부에서는 구양리의 사례를 토대로 ‘햇빛소득마을’ 전국 확산을 시도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저는 우려가 큽니다. 농지와 토지의 금융화·자본화를 부추길 수 있고, 결국 마을에서 농민들이 밀려나게 되는 일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에요. 저는 농촌을 생산기지로만 보는 데 비판적이에요. 게다가 오늘날 농촌은 ‘에너지를 생산하는 곳’으로 인식되는 경 향이 커지고 있죠. 이러한 변화의 과정이 농촌 공동체를 살리기보다 자본의 논리 속에 진행되고 있다는 게 큰 걱정이고요.
백영경 과거 지산지소(地産地消)라 해서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그 지역에서 소비하는 운동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이게 재생에너지 영역으로까지 넘어와 태양광에도 지산지소를 적용해야 한다고들 하잖습니까. 그런데 태양광사업이 커지면서 사업자들만 좋은 일이 될 수도 있고, 마을마다 태양광이든 태양광이 안 되면 다른 무슨 아이템을 개발해서라도 사업을 하고 소득을 창출하라는 압력을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역주민들의 일상적 삶의 문제를 돌보는 과정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지기보다 지역의 소득창출 능력만 주목받게 되는 거죠.
왼쪽부터 전준 백영경 박누리 주현우 ⓒ이영균
전준 마을은 원래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기 때문에 경제활동 역시 마을 사람들의 실존적 삶의 조건 중 하나였는데, 이제는 주민 각자가 알짜배기 중소기업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저희 가족의 경험담인데, 몇년 전 충북 영동에서 포도나무를 갈아엎고 샤인머스캣 품종을 심으라고 장려한 적이 있었어요. 보조금을 주고 가이드북도 주면서 장려하니 품종을 바꾸지 않는 사람이 낙오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마을 전체가 캠벨포도 대신 샤인머스캣을 심었는데 다같이 망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죠. 소득창출을 목표로 했지만 농민들이 빚만 떠안게 되는 이런 문제가 농촌에서 매번 반복됩니다. 이제는 또 스마트팜(농업 기반시설 및 농법에 빅데이터, 인공지능, 로봇 등 원격화·자동화 기술을 도입해 작물과 가축을 관리하는 방식)이 농촌을 휩쓸고 있어요. .
박누리 스마트팜의 가장 큰 문제는 결국 농민들은 빚을 지고 대기업만 배불려주는 사업이라는 겁니다. 지역에 대한 저발전 프레임은 외부 자본과 시설이 들어오기 좋은 구실이 되고, 에너지전환이나 농가소득 증대 등의 포장지를 입고 들어오는 사업들을 보면 사실 농지의 금융상품화일 뿐이에요. 1990년대에는 유리온실 사태가 전국적으로 어마어마했잖아요. 우루과이라운드에 대응해 농업을 현대화하겠다고 정부가 대규모 지원을 했지만, 비닐 하우스에 비해 설치비·난방비가 막대하고 설치 이후 운영·기술 지원도 부족해 폐허화되고 말았어요. 정부의 말만 믿고 막대한 빚을 졌던 농민들이 야반도주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농촌에서는 이것을 한국의 농촌공동체를 무너뜨린 충격적 사건 가운데 하나로 회고하고 있어요. 스마트팜을 보면 그때가 떠오릅니다. 게다가 최첨단기술을 적용한다고 하며 많은 전력량을 소비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기후위기 현실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될 수 없습니다.
주현우 저는 농어촌 주민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우리 사회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해 되묻고 싶습니다. 지역의 먹고사는 문제는 수도권의 먹고사는 문제와 떨어져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완도나 진도에서 전복양식을 하는 어민들, 그리고 지역에서 환금작물을 재배하는 분들을 만나보면 실제로 자신은 그때그때 고소득을 보장한다고 하는 그리고 나라에서 권장하는 것들을 보고 배우면서 일했을 뿐이라고 하는데요. 문제는 그 결과가 단순히 노력 대비 성과가 안 나오는 차원이 아니라 큰 빚이 되고, 이제는 일할 사람조차 없어 하던 일도 그만둬야 하고, 여기에 기후위기까지 겹치면서 쌓여온 경험들이 쓸모없어지게 된 겁니다. 지역이 감당하고 있는 위기란 그런 종류인 거죠. 사회 일반적인 논의는 소수 성공사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계속 도전하길 바라고 각종 보조금 및 제도를 고안하겠다는 것이지만, 그건 개별 농어촌이 처한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가상의 출발선을 그은 것뿐입니다. 사회 전체적인 분업적 구조 속에서 농어촌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고 말하기엔 부족함이 있습니다. 심지어 수도권 소비자들의 변덕스러운 취향 변화까지 농어촌이 감당하기란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반도체 클러스터 논란이 놓치고 있는 것들
―
백영경 현재 정부의 개발 드라이브가 특히 집중되고 있는 분야가 AI 같습니다. AI 클러스터 건설 예정지가 수도권인 용인이고, 첨단 혁신산업이라는 AI가 농어촌지역과 무슨 연관이 있겠냐고 생각하기 쉬울 듯합니다. 하지만 지역을 다니다보면 전국 방방곡곡에 AI와 관련된 플래카드가 붙은 걸 발견하게 됩니다. 실제로 전남 해남부터 경북 포항, 울산 등에서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제주도 마찬가지고요.
전준 전사회적으로 AI 산업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이 강한 것 같습니다. 경제정책에서만 아니라 학술·담론장에서도 ‘인공지능’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으면 주목받질 못합니다. 그런데 정작 AI 산업이 기반 할 수밖에 없는 물질적 인프라에 대한 논의는 쓸모없는 것처럼 취급받는 경 향이 있어요. 예를 들어 AI 데이터센터를 유지하는 데 얼마만큼의 전기와 물이 들어가는지를 따져 묻는 일이 무식한 소리처럼 취급받는 거죠. 수치만 놓고 봤을 때 AI 인프라에 들어가는 전력량은 국제에너지기구(IEA) 기준 약 415테라와트시(TWh)로 전세계 전력생산량의 1.5% 남짓이고, 그에 비 해 농축산업에 들어가는 에너지는 유엔식량농업기구 기준 연간 2,000테라와트시로 훨씬 많습니다. 그러니 단순 비교로는 그리 크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I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전력량은 전체 대비 수치가 아니라 해당 지역 안에서의 소비밀도로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의 데이터센터의 소비전력량이 그 센터가 설치될 지역 전체의 소비량과 맞먹게 돼요. 전라남도 전체가 소비해온 에너지를 데이터센터 하나가 사용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도 지역이 그 정도의 에너지 공급망·소비망을 감당할 수 있는지 제대로 검토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사업이 추진되고 있어요 .
주현우 윤석열정부 때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산업생태계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이걸 호남지역으로 이전하자는 논의가 있어요. 그리고 여기서 등장한 말 중에 ‘남방한계선’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반도체 클러스터를 경기도 용인·평택 이남 지역으로 옮기면 고급인력 유치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인데요. 이런 주장이 지역차별적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라는 자본주의체제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지역에 산업단지를 만들고 자본을 쏟아붓는 것만으로 수도권 집중이 해결되긴 어렵다고 봅니다. 더 많은 이윤의 창출을 위한 자본 이동의 자유, 또는 선택과 집중을 통한 성장이라는 자본주의 논리가 그대로 작동하는 가운데 지역에 투하된 재원이 그 목적대로 사용될 것이라 바랄 수도 없고요. 대기업 중심의 데이터센터 건설이 이익은 유출시키고 피해는 지역에 전가할 거라는 우려가 이미 여러 곳에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물론 지역에 투하된 자본을 토대로 형성된 산업의 경제적 효과와 지역경제 활성화가 있긴 할 겁니다. 하지만 그 효과와 폐해가 등가라고 할만한 수준인가에 대해서는 따져봐야 합니다. 강준만 교수가 ‘내부 식민지 체제’라고 짚었던(강준만 「지방이 지방을 죽인다」,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구조적인 종속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공염불이 될 수 있습니다.
전준 무엇보다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기만 하면 지역균형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주장하는 게 문제입니다. 반도체 클러스터를 위한 물리적 공간과 인프라, 그곳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원재료가 캐내어지고 그곳까지 운반되는 모든 과정, 온도가 올라가면서 증발할 물과 새로 발생하는 쓰레기 등 여러 문제가 다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는 거죠. 경제적 효과에 대한 논의가 이 모든 것을 시시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말들로 만들어버리는데, 이는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의 한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본주의 질서 유지의 과정에서 사회, 돌봄, 연대와 같은 가치들과 특히 지구 생태가 희생되는 구조라는 겁니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의 말대로 자신의 꼬리를 잡아먹는 뱀처럼, 사회의 근간과 지구를 희생시키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지역에 대한 개발 자체에 회의적인 건 아닙니다. 어쩌면 반도체 클러스터를 호남으로 옮기는 일이 정말로 그 지역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요. 개발사업이 거둘 수 있는 성취와 한계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 이익과 손실을 비대칭적으로 감당하는 지역의 구성원들이 있을 텐데, 훨씬 더 사려깊고 촘촘한 여러 정책이 함께 적용되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
백영경 지역에 보탬이 될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반도체 클러스터 논의가 개발 만능주의의 매우 강한 자장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지역에 대한 지원이 모두 개발로만 쏠려 있고, 각 지역이 저마다의 생태적 조건이나 한계를 돌아보지 않고 경쟁적으로 개발사업을 유치할 수밖에 없는 구도는 더 비판적으로 봐야 할 것 같아요. 가령 반도체 클러스터 호남이전론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지역의 전력량으로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게 정격용량(최대 생산 가능량)으로 계산해서 그렇지 실제 발전량은 거기에 못 미쳐서 결국 발전소를 더 짓고 송전 인프라를 추가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현재 전남 지역에서 일어나는 송전탑 건설 반대운동은 단지 수도권에서 사용될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지역이 희생된다는 점만 아니라, 전라남도가 추진하는 에너지와 AI 산업의 동시개발이 농업용수 부족을 심화시키고 기온상승을 부추길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현우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 문제는 특정 입지에서 비롯한 것만은 아닙니다. 어디에 건설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봐야 할 텐데요. 환경단체에서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기후영향평가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계획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냈지만, 지난 1월 15일 패소했습니다. 환경운동 진영에서 지적한 건 온실가스 배출 문제지만, 전력량을 어떻게 감당할지도 계획이 제대로 서지 않았어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16기가와트의 전력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대한민국 최대 부하(2024년)의 16.5%에 해당하는 수준입니다(「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 공급 리스크 진단」, 국회입법조사처 2025.8.21). LNG발전소 6기를 지어서 3기가와트를 생산한다고는 하지만 나머지는 전국 각지에서 끌어오겠다는 말만 있지 실제로 그 과정에서 생길 지역 송전탑 건설 등의 문제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거든요. 이렇게가면 추가 원전 건설계획도 반드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려의 핵심은 이러한 논의 자체가 무엇을 희생하고 그 댓가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질 것처럼 본다는 데 있습니다.
박누리 AI든 어떤 개발사업이든 ‘지역이 소멸 중이니 뭐라도 들어오면 감지덕지해야 한다’는 논리로, 받아들이라는 강요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이런 논리가 지역을 수도권을 위한 에너지 생산기지 내지는 폐기물처리장으로 전락시키는 것 같아요. 이것은 발전이 아니라 착취이고, 주민들의 자치권을 돈 몇푼과 맞바꾸게 만드는 폭력적인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주현우 독재정권에서도 국토균형발전은 이야기되었기 때문에 지역균형 문제는 어제오늘 일은 아닙니다. 요즘 일각에서는 국토가 이미 수도권 중심이니 지역을 끌어올리려면 압도적인 ‘불균형발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 역시 개발 담론에 기대고 있죠. 복잡한 문제를 복잡하게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큰 개발만 있으면 지역의 삶이 나아질 거라는 환상이 계속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개발의 효과를 두고 옳다 그르다 이분법적으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그것이 어떤 개발이고 그 과정에서 정작 지역과 지역민이 들러리가 되진 않는지에 대해 잘 살펴야 할 것 같아요 .
지역의 '먹고사는 문제'와 커먼즈
―
백영경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결국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먹고사는 문제와 돌보며 연대하며 살아가는 삶이 따로 논다면 지역소멸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지는 더 많은 개발을 막기는 어려울 거라고 봅니다. 더 많은 개발이 답이 아니라면, 지역에서는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 어떤 다른 이야기가 가능할까요?
주현우 먹고사는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한국사회에서 발전·성장과 동일한 문제로 상상되어왔습니다. 발전과 성장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다거나 먹고살려면 발전과 성장이 필요하다는 식의 순환구조를 만들어왔죠. 이제는 어떤 ‘먹고사니즘’인지, 어떤 발전과 성장인지를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에서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어떤 실천이 제기되고 실제 수행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다만 그 실천을 바라볼 때도 특정 개념으로만 틀 짓지 않는 것, 그리고 어떤 실천도 완전무결한 대안이 아니며 끊임없는 시행착오 속에 변화하는 작업이자 노동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겠습니다.
박누리 농업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 중요한 것은 ‘유기농’이나 ‘고소득’ 같은 문제가 아니라, ‘거리의 회복’입니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무한정 늘어난 생산과 소비 사이의 비정상적인 간극을 줄이고 그 사이에 ‘사람의 얼굴’을 다시 끼워넣어야 하는 거죠. 지금처럼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서울 가락시장을 거쳐 다시 지역으로 내려오는 기형적인 유통구조에서는 농민도 소비자도 소외될 뿐입니다. 이건 단순히 물류의 비효율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지난 수십년간 효율성과 저곡가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농촌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농민의 노동을 비가시화해온 것, 다시 말해 ‘농치’의 부재가 낳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농업을 단지 값싼 식자재 공급처로만 천대하며 생산현장의 고통을 도시 소비자의 안락함과 맞바꾼 ‘책임의 외주화’이기도 하고요. 우선은 지역 내에서 생산된 먹거리를 학교급식이나 공공급식으로 소비하는 ‘먹거리 전략’(food plan)을 통해 이 끊어진 회로를 복원해야 할 겁니다. 소비자가 생산현장의 어려움과 기후변화를 체감하고, 생산자는 이웃의 밥상을 책임진다는 자부심을 되찾아야 해요. 이런 감각을 바탕으로 농업과 농촌을 사회유지의 필수 공공재로 대우하고 농민을 존엄한 주체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농촌은 착취의 대상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지속가능한 삶의 현장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백영경 실제 현실 속에서는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더 바람직하고 낫다고 생각한 조치가 예상치 않은 효과를 연쇄적으로 불러일으킨다는 점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풍력발전은 그 자체가 나쁜 개발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렇다 해서 피해가 생기지 않는 건 아닙니다. 경관이나 소음 피해, 혹은 어장 피해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풍력이 친환경 에너지라는 사실이나 발전수익이 지역재정에 큰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사실만 강조하다보면, 다른 여러 문제를 따져보기 어렵게 됩니다. 앞서 나온 태양광과 마을 소득의 사례와도 연결되지만, 저는 이게 결국 마사회기금이나 로또기금과도 비슷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마사회가 경마를 통한 사업이익의 70%를 축산발전기금으로 출연하고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지방세나 사회복지기금 등을 지원하는 사회환원 활동을 하다보니, 사행성 조장을 염려하고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조차 경마 수익이 줄어 기금 지원도 줄어드는 상황을 걱정합니다. 카지노나 로또도 마찬가지고요. 결국 기금이 조성된 과정과 상관없이, 어디선가에서 재원이 나오고 그걸 ‘사회적으로’ 나눌 수 있으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인식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시대의 커먼즈(commons, 공동영역) 운동은 자본주의적 시장과 국가 중심의 공적 관리를 넘어서 돌봄과 공생 등의 가치에 뿌리를 두고 삶의 전환을 모색하는 담론과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현실에서는 ‘공동의 재산을 기반으로 수익을 만들어서 나누는 일’ 정도의 차원으로 인식되는 모습도 종종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구조가 만들어지고, 우리의 삶이 무엇에 종속되는지를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시점입니다 .
전준 말씀하신 대로 개발 논리가 공공의 이익이라는 모호한 언어로 쉽게 탈바꿈하며 그 정당성을 획득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커먼즈 운동의 진정한 가치와는 무관하게, 경제적 공동분배 혹은 공동관리라는 산술적인 차원에서 커먼즈 개념이 전략적으로 오용되는 것이죠. 그리고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만 오늘 거의 나오지 않은 키워드가 ‘부동산’인데요. 서울 집값이 원체 뜨거운 감자이고 서울이 모두의 욕망이 모이는 장소가 되다보니 그 바깥의 삶은 ‘밀려난’ 것처럼 생각됩니다.
박누리 일각에서는 또 반대로 지역 땅부자들은 좋겠다 하는 인식도 있는데요. 사실 농민 대다수는 임차농입니다. 국내 임차농가와 임차농지 비율은 꾸준히 상승해 2024년 기준 각각 45%, 47%에 달합니다(통계청). 어떤 이들은 지역 땅값이 오르거나 토지보상금을 받는 걸 부러워한다지만 이는 지역에서도 일부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죠. 헌법 제121조에 경자유전(耕者有田, 농사 짓는 사람만이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의 원칙이 명시되어 있지만, 그게 가장 지켜지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일 겁니다. 우리나라는 농지법이 지나치게 허술해 ‘농사짓는 사람’이 아니라 자금과 정보를 가진 사람이 농지를 장악하는 구조가 되어 있습니다. 농지법에는 농업인 취득요건을 회피할 수 있는 예외 조항이 많아, 실제 농사를 짓지 않아도 농지를 보유하거나 임대료 수익만 노리는 ‘가짜농민’이 생겨나는 구조라는 비판이 반복적으로 제기돼왔습니다. 더구나 한국의 농지가격은 선진국 대비 매우 비싸 농민의 접근이 극도로 어렵습니다. 2025년 기준 전국 평균 농지 공시지가는 1㎡당 약 4만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지만, 일부 지역은 20~30만 원을 웃돌고 수도권이나 특별· 광역시는 100만원이 넘기도 합니다. 반면 일본의 농지가는 한국의 5분의 1 수준이고, 미국·유럽 국가들도 한국보다 훨씬 낮습니다. 이 또한 농치의 부재라 할 수 있을 겁니다 .
지역만의 대안은 없다, 하지만
―
백영경 이제까지 해주신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지역의 먹고사는 문제를 단순히 소득이나 인프라의 격차로 이해할 수만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특히 커먼즈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삶의 자율성이기도 한데요. 현대의 커먼즈 운동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서 ‘공공성을 가진 자치’ 혹은 ‘자치적 공공성’을 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공동체’라는 말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공동체의 위계성이나 성차별적 요소들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누리 선생님이 앞서 이야기하셨듯이 지역이 청년들에게, 특히 청년여성들에게 더더욱 살 만한 곳으로 여겨지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맞닿아 있는 것 같고요. 결국 지역이 살 만한 곳으로 여겨지기 위해서는 마을공동체 내의 평등과 자치 문제가 중요할 거 같은데요.
박누리 일제강점기와 독재정권을 지나면서 마을공동체 자치는 사라져버렸고,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어왔어요. 주민자치의 필요성에 대해 이전부터 계속 이야기되어왔기 때문에 지금 왜 새삼스럽게 자치인가 하고 의문을 가지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간의 자치는 말만 그랬을 뿐이지 지역주민들에게 어떤 권한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역의 생활 단위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주민 스스로가 아니라 시·군 단위 혹은 그보다 큰 광역 단위나 국가 차원에서 결정하고 실행되어왔죠. 옥천만 해도 ‘주민자치 1번지’로 알려진 안남면 정도를 제외하고는 지역 자치활동의 역사가 소각장 반대, 비료공장 반대 같은 ‘반대운동’에 그쳐왔습니다. 애초에 주민들에게 권한이 없다보니 새로운 설계나 제안을 해볼 여지가 없었던 겁니다.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주목받거나 공론장에서 발언한 경험도 부족하고요. 그래서 최근 지역운동에서는 주민자치보다도 더 명확하게 ‘읍면 자치’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군 단위가 아닌 내 삶의 반경인 읍이나 면 단위에서 주민들이 직접 일상을 조직하고, 예산을 짜고, 문제를 해결해가는 경험을 쌓아야 해요. 커먼즈의 자치성 역시 어떤 거창한 시스템이 아니라, 아픈 이웃을 위해 반찬을 나누고 병원에 태워다주는 관계망이 살릴 수 있으리 라고 봅니다. 지역소멸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 움직이는 작은 시도들을 주목해야 합니다.
백영경 자치라는 추상적인 구호보다는 구체적으로 실천의 양상들이 중요 할 거 같습니다. 박누리 선생님께서 옥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읍면자치의 좀더 구체적인 사례도 들어볼 수 있을까요?
박누리 제가 사는 옥천군 안남면은 인구가 1,300명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인데요. 자치를 활성화하면서 어르신 문해학교를 열고, 작은도서관을 건립하고, 면 내 모든 마을을 순환하는 공공버스를 만들고, 2024년엔 목욕탕도 문을 열었어요. 제가 기획해서 진행했던 옥천여성영화제를 읍에서만 열지 말고 면 단위에서도 해보자 하고 안남면에서 연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한 스무명이나 오시려나 했는데 옆마을 안내면에서도 오셔서 백명 가까이 관람했어요. 할머니들이 귀한 경험으로 생각해주셔서 무척 기뻤습니다. 다른 사례로 전남 영광군 묘량면에는 ‘여민동락 공동체’가 있는데 2007년에 삼십대 도시 청년들이 내려가서 만든 공동체예요. 생필품을 싣고 다니는 ‘동락 점빵’이라는 이동식 마트를 운영하기도 하고 노인 통합돌봄도 시행하고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 나눴던 구양리 ‘햇빛두레발전소’도 굉장히 뛰어난 자치활동의 결과였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자치로부터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된 좋은 정책들도 지역에 희망이 있다고 믿게 하는데 친환경 무상 학교급식이 생동하는 사례로, 2007년 경남 거창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됐죠. 농촌마을 대부분 고령화율이 40%에 달하거나 이를 넘어서지만 마을 안에서 돌봄공동체를 만들어 활동하는 경우도 꽤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전부터 이어졌던 공동체의 방식에 연구자와 언론이 주목하면서 정부의 지역통합돌봄 정책(2026년 3월부터 ‘의료·요양 등 지역 돌봄의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어 고령자와 장애인이 자택에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지원)으로까지 이어졌다고 봅니다. 지역사회에 이런 사례들이 굉장히 많이 또 분명히 존재한다는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물론 지역의 실천에도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여전히 여성 농민은 잘 가시화되지 않는 존재이고, 이주노동자 문제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그런 문제도 논의하고 해결해나가는 게 공동체의 모습이자 역할 입니다. 예컨대 전남 곡성 죽곡면의 삼태마을에서 성폭력사건이 발생했을 때 마을 전체가 함께 대응했어요. 가해자에게는 실형이 선고됐고, 마을은 성차별 임금 폐지를 선언하는 등 더 나은 변화를 일구었습니다(「명예훼손 벌금4백? 그거 내고, 마을이 성폭력 해결하자!」, 일다 2025.11.19). 지역의 이런 모습을 더 많이 인식하고 공유할 때 지역에 대한 위기감·공포감 조성을 넘어서 진짜로 지역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기초적 토대가 마련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희망적인 자치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주목해주고, 지역마다 살아 있는 고유의 이야기와 서사를 복원해야 하는 거죠.
주현우 자치나 지역이 중요하다고 할 때, 딱히 반대하거나 내놓고 부정할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막상 당신이 생각하는 자치가 뭐냐고 하면 구체적인 방식을 고민하는 사람도 드뭅니다. 실제로 어떤 문제가 ‘나’의 조건에서만, ‘나’의 결정으로만 해결되기 어렵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마을’에서 결정하는 일도 결국 더 큰 사회적·정치적 맥락이 있고, 다른 지역과의 연결성도 있다는 것이죠. 진짜 자치라고 하는 것은 이런 연결성을 계속 발굴해내서 그 연결 속에서 우리의 위치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작업일 것 같습니다. 지식·담론장 역시 그 지식을 만드는 행위 속에 정치성이 있잖아요. 현장에서는 지역을 둘러싼 개념과 담론에 대해 ‘이렇게 봐야 한다’ ‘다르게 볼 수 있다’ 하는 얘기를 끊임없이 하면서 파열을 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연시되는 것을 질문하는 과정이 있어야 그다음으로도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준 저는 ‘지역에 안 살아서 다행이야’ 하는 식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지도 모를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어요. 대화를 시작하며 ‘지역’의 의미를 재구성하고 확장하자는 얘기도 드렸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서울이든 어느 대도시의 한복판이든 그곳 역시 지역이고 현장이라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가령 서울도 한국 내 다른 지역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곳이고, 글로벌한 관계망 속에서 전세계 공간들과도 연결되어 있는 장소예요. 주현우 선생님 말씀처럼 그런 연결성과 거기 얽힌 정치적·사회적 맥락을 인식해야 하고,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일어나는 자치의 사례들이 서울에서도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도시에서도 공공성과 자치성을 지향하는 커먼즈를 상상하고 실천해야 하고, 그렇게 될 때 ‘저들’의 문제라고 고민하고 있는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될 겁니다. 이를 통해 지역의 문제가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할 설득력 있는 의제로 받아들여질 테고요 .
백영경 오늘 대화를 통해 지역과 현장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여러 차원으로 짚어볼 수 있었습니다. 지역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실제 목소리, 살아가는 얼굴을 보아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게 이야기되었지만, 이는 어쩌면 의미있는 논의를 위한 출발점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치권뿐 아니라 비판적인 학계에서도 지역에 더 많은 권한을 주자는 주장이 대안으로 제시되는데요. 언뜻 지역을 존중하는 논의 같지만 잘 들어보면 개중에는 결국 지역이 자체적으로 대규모 개발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식으로만 이야기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역이 위기고 문제라는 논의가 쏟아져나오는 가운데 오늘의 대화는 지역에 대한 질문이 제대로 된 질문인지, 우리가 듣는 해결책들은 과연 진짜 해결책인지에 대해 톺아볼 기회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 큰 문제임을 공유했습니다. 특히 지역을 위한다는 정책이 왜 종종 지역을 죽이는 정책이 되는지 살피면서, 정부의 자본이나 금융으로 개발사업을 진행하게 만드는 권한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생활과 생존이 걸린 문제를 지역주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자치의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역은 수도권 대도시와 동떨어진 공간이 아니기에, 지역만의 대안이나 해답이 존재하기도 어렵고 흥미로운 사례로만 취급받아서도 안 되지만, 그럼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곳에서 계속 삶의 조건을 돌보고 수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지역에 대한 단순한 재정 지원을 넘어, 지역에서 모색되는 대안들을 훼방하고 굴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잘 돕는 정책들이 실시되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창작과비평』에서는 창간 60주년을 맞아 다음 여름호부터 ‘찾아가는 현장’을 연속기획하려고 합니다. 우리 사회의 중요한 현장으로서 지역을 제대로 살피기 위한 기획이고,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의 삶의 양식을 전환해가는 데 작은 보탬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다짐을 하면서 오늘 자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귀한 말씀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2026.1.18.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