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신년칼럼] 하늘을 본 뒤에 무엇을 할까
신동엽 시인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구름이나 지붕을 덮은 쇠항아리를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산다는 것이다(「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4월혁명의 경험은 시인에게 그런 확신을 주었을 것이다. 김수영 시인 또한 「저 하늘 열릴 때」라는 산문에서 “4·19 때에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통일을” 느꼈노라고 했다.
우리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길거리에 나와 하늘을 보았다. 물론 촛불이 한창일 때도 집회 후 일상으로 돌아갈 때마다 먹구름과 쇠항아리가 여전함에 힘들어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동료 시민들과 함께 하늘을 보며 자신도 바뀌는 것을 느꼈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시민들은 엄혹한 추위를 뚫고 항쟁을 이어갔고 마침내 박근혜 퇴진과 ‘촛불정부’의 탄생을 이루어냈다.
촛불정부와 촛불시민
그렇게 탄생한 정부가 곧 3년차를 맞는다. 그사이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최근의 어느 여론조사에서는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긍정 평가를 처음으로 앞질렀다고 한다. 부정적인 평가가 모두 세상이 안 달라졌다는 평가만은 아니고 너무 달라져서 싫다는 반응도 포함됐겠지만, 아무튼 촛불정부로서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성찰할 지점에 도달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달라져야 할 것이 별로 안 달라진 현실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직장이 없거나 빚에 허덕여온 젊은이들 중 다수가 여전히 실업과 부채에 시달리고 있다. 위험한 작업환경이나 부실한 시설들에서의 안전사고도 끊일 줄을 모른다. 자신들의 절박한 호소에 정부가 귀를 닫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먹구름과 쇠항아리 아래서 너무나 안락했던 세력들의 총공세까지 더해진다면 문재인정부 또한 노무현정부처럼 양면의 협공으로 위태로워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럴 때 하늘을 본 시민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정부가 스스로 촛불정부를 표방한다고 해서 일체의 비판과 투쟁을 자제할 일은 아니다. 다만 비판하고 투쟁하면서도 촛불혁명의 주체라는 자기인식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촛불 이전의 타성으로 정부가 자신의 요구사항을 안 들어주면 곧바로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규탄하며 다음에 더 나은 정권이 나타나기를 기대한다면 촛불정신을 누가 지켜줄 것이며 입맛에 맞는 정권이 다음에 들어설 확률은 얼마나 될까.
촛불혁명은 헌법이 안 지켜지던 나라를 헌법을 지키는 나라로 만드는 혁명이기 때문에 초헌법적 비상수단을 동원하지 못한다. 통상적인 혁명이라면 당장에 국회의원 선거부터 다시 했을 것이다. 바꿀 것을 제때 못 바꾼 게 그밖에도 너무나 많다. 그러나 바꿀 게 이렇게도 많이 쌓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촛불 덕이다. 예컨대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행위가 요즘 갑자기 늘어났다기보다 촛불시대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드러난 면이 없지 않다. 최저임금과 노동시간 제한의 후퇴로 야기된 노동계와의 갈등 역시 애당초 이 정부가 ‘소득주도성장’이라는 패러다임 전환을 선택했기에 발생했다. 정책의 작명이 적절하며 개념이 잘 정리되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대기업 이윤 위주의 과거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시도는 촛불정신을 반영한 것이며,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복직이라든가 KTX 승무원들의 복귀 같은 노동운동의 국지적 승리도 그 과정에서 가능했다. 최근 정부에 의한 일부 정책 수정이 단순한 ‘속도조절’인지 소득주도정책 포기의 시작인지는 시간이 말해줄 터이다. 관건은 경제사정이 너무 어려우니 잠시 숨을 돌려 정치개혁의 공간을 확보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반대세력에 밀려서 후퇴하는 것인지일 것이다.
한반도정세의 변화, 되돌릴 수 있는 성질인가
2018년에 가장 극적으로 바뀐 것은 남북관계다. 평창올림픽에 북측이 선수단과 고위급 대표단을 파견한 데 이어 4·27 판문점선언은 그야말로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뒤이어 북한정권 성립 이래 최초의 북미정상회담이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렸고, 이후 9월의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설치와 평양공동선언,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한 별도의 합의문과 그에 따른 후속조치들, 서해수역에서의 공동 고기잡이, 남북 철도·도로 연결 착공식 등 획기적인 사건들을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더구나 이 모든 일이 유엔의 대북제재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 이 분야에서는 바뀐 게 없다는 말이 나오기 어렵다. 다만 북미관계의 진전이 예상보다 느려져 제2차 북미정상회담과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미뤄지면서 기껏 시작된 변화가 원점으로 되돌아갈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그런데 이런 정당한 걱정도 도가 지나치면 촛불시대의 주인답지 못하다. 2017년의 전쟁위기를 ‘원점’으로 친다면 2018년의 변화는 실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수준인데, 분단체제에 길들여져 살면서 위험의 뿌리를 탐구하려 하지 않았듯이 2018년의 변화에 대해서도 그 내용과 역학관계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자세인 셈이다.
무엇보다 변화의 실질적 출발점이 우리의 촛불혁명이었고 지금도 한국정부와 촛불시민의 지속적인 개입 없이는 북미간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고 한반도의 비핵화를 이루어낼 동력이 없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는 또한 미국의 주류사회가 북에 대한 고질적 불신과 적대감을 버리지 못하고 트럼프로 하여금 싱가포르회담 이전으로 돌아가는 또 한번의 ‘변덕’을 부리도록 강제하려 해도, 불가역적인 남북관계 개선을 이미 수행 중인 한국 때문에 그럴 수 없으리라는 말이 된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주전선과 선결과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촛불정부와 촛불시민의 건재 여부가 한반도 평화의 주전선을 이룬다. 문재인정부의 지지율 하락은 주로 경제와 민생 분야의 미흡한 실적 탓으로 돌려진다. 경제와 민생은 어느 정부에나 중요하고 ‘헬조선’을 ‘나라다운 나라’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정부에는 더욱이나 중요하다. 당연히 정부가 더 잘해야 하고 특히 어떤 의미로는 민생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각종 산하기관의 인사와 운영에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
하지만 ‘오로지 경제’라는 프레임은 실은 극도로 정치적인 프레임이다. 남북대결로 엄청난 이득을 누리던 세력이 북의 ‘도발’ 중단으로 실망한 데 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의 평화제의를 일축하지 않는 바람에 절망에까지 이르렀다가 기사회생을 노리며 펼친 어쩌면 마지막 전선이 ‘경제’인 것이다. 이 프레임에서는 빈부격차에 대한 정치적 토론이 사라지고 경제체질 개선을 위한 입법을 막아온 정치권이나 재계의 책임이라든가 민생고의 뿌리에 있는 분단체제와 세계체제의 적폐 같은 것은 모두 논의에서 배제되고 만다.
그러므로 촛불정부의 경제개선 노력도 정치담론의 복원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이는 자유한국당에 대한 비난을 강화해서 될 일은 아니다. 한국당이 바뀌지 않았다고 개탄하는 사람도 많으나 나는 촛불 이후 새누리당-자유한국당이야말로 크게 바뀌었다고 본다. 국민을 속여서 집권하려던 정당에서 목전의 기득권 지키기에 안면몰수하고 골몰하는 정당으로 바뀐 것이다. 오히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덜 바뀐 것 아닌가.
민주당 안에 촛불시대의 주인의식을 가진 정치인이 있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정치의 최대 당면과제인 선거제도 개혁만 하더라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지향한다는 당론을 정한 뒤에도 딴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한국당이 반대해서 어차피 안 될 거라느니, 의원정족수를 늘려야 하는데 ‘국민’이 싫어해서 곤란하다느니 하는 식이다. 그러는 사이 선거연령 낮추기 같은 또 다른 핵심과제는 어느덧 잊혀버리고, 한국당이 요구하는 개헌에 관해서도 의회권력이 개혁되고 나면 대통령 권한을 대폭 제약하는 개헌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더구나 ‘개혁정권 20년 집권’ 운운하는 발상이 기존의 승자독식 틀 안에서 민주당이 오래오래 집권하여 자유한국당을 회생불능으로 만들겠다는 계산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촛불시민들로부터 버림받고 촛불정부의 한반도문제 주도력을 훼손하며 수구적폐세력의 재기를 돕는 길이다. 선거제도 개혁에서 한국당이 몽니를 부릴 수 있는 것도 민주당의 불투명한 태도를 직감한 국민들의 비난이 한국당에만 집중되지 않기 때문이며, 기존의 선거제도를 지켜내기만 하면 국회는 결정적인 대목에서 ‘개혁입법 연대’보다 ‘더불어한국당’ 짬짜미로 운영될 수밖에 없음을 저들이 알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의 주인들이 이 상황을 꿰뚫어보고 한반도 평화의 ‘운전자’를 자임하는 문재인 대통령이 여당 내의 잡음을 확실히 해결함으로써 국회의 민심 대표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개혁을 달성하는 것이야말로 2019년 벽두의 선결과제가 아닐까 한다.
그에 대한 정리가 아직 진행 중인 상태에서는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이 잠시 미뤄진 것도 나쁘달 수 없다. 하늘을 본 시민들은 그의 방문이 늦어지는 동안에도 할 일이 많은 것이다.
* 이 글은 경향신문 2018년 12월 27일자에 동시 게재됩니다―편집자.
백낙청 / 서울대 명예교수,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2018.12.2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