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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방역이 돌보지 않은 빈곤의 그늘

김윤영

김윤영

한국의 코로나19 최초 사망자는 청도대남병원 폐쇄병동 장기 입원환자였다. 새로운 바이러스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집에 머물라’는 새로운 규범을 만들었지만, 타인과는 거리를 둘 수 없으면서 사회로부터는 완전히 격리된 사람들의 상황은 여덟명의 사망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병원 안에서 100퍼센트의 감염률을 보인 바이러스는 대남병원 밖으로는 한걸음도 나오지 않았다. 외출한 이도, 면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거리 둘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전가된 위기

 

주지하듯 코로나19로 인한 위기는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 나뉘었다. 재택근무가 가능해서 출근하지 않아도 일자리를 잃을 염려가 없는 사람은 방역지침을 준수하면서 소득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반면 대면 업무를 하는 사람들은 곧장 실직 위기를 겪거나 감염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학교, 유치원, 사회복지관 등 문 닫은 사회의 돌봄을 메꾸기 위해 가족들은 동분서주했고, 3월에는 제주에서 6월에는 광주에서 그리고 전국 곳곳에서 발달장애인과 가족들이 사망했다.

 

머물 집 없는 이들의 시간도 가혹했다. 거리 홈리스에게 코로나19의 첫번째 영향은 강제퇴거였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24시간 문이 열려 있는 역사(驛舍)였던 부산역은 지난해 5월부터 심야시간 대합실을 폐쇄하기 시작했다. 공공장소에서 의자를 치워버리거나 티브이를 꺼버리는 일들이 반복됐다. 곳곳에 비치되어 있던 정수기나 티브이, 전기 콘센트가 사라지는 것은 그 길을 스쳐 지나는 사람들에게는 알아차리기 어려운 작은 변화일지 몰라도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대체재가 없는 암담한 사건이었지만, 이 모든 것은 ‘방역 조치’라는 선언으로 갈음되었다. 급식소가 문을 닫아 배가 고픈 것도, 공공병원이 코로나19 전담병원이 되어 갈 병원이 없어진 것도, 무더위 쉼터가 문을 닫아 창문 없는 방에서 하루하루를 견뎌야 하는 것도 모두 방역의 일환이라면 그 방역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문이 일었지만 신성한 방역 윤리는 이런 질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코로나19와 긴 장마, 혹한을 넘어 다시 불볕 여름을 만난 거리 홈리스의 시간은 코로나19로 인한 손해로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부쩍 상한 각자의 몸과 마음으로 남았다.

 

한국의 빈곤과 신자유주의 방역

 

한국 빈곤의 중요한 특징은 43퍼센트가 넘는 심각한 노인 빈곤율이다. 노인이 되는 순간 절반의 확률로 가난에 처한다는 섬뜩한 통계는 기초연금 확대에 따라 조금씩 개선되는 양상이지만, 극적인 변화는 요원하다. 높은 노인 빈곤율은 노동소득이 사라졌을 때 가난을 피하기 어려운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실업급여나 공적 연금과 같은 사회보장이 안정적인 소득을 가진 사람에게 더욱 친화적이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는 미래의 빈곤을 예고한다. 사람들은 이미 이 경로를 알고 있다. 한국의 아동청소년 빈곤율은 전체 빈곤율보다 낮은 12퍼센트다. 이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튼튼한 사회보장 덕분이 아니라 빈곤층이 출산을 기피한 결과다. 소득이 낮은 청년들은 결혼도, 출산도 꿈꾸지 않는다.

 

IMF 이후 확대된 유연한 노동시장과 한국사회의 비관용적 사회보장제도는 사회의 실패를 모두 개인에게 떠넘겨왔다. 양극화된 노동시장에서 불안정한 고용상태의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이라는 한가지 요인의 영향만 받지 않는다. 임금이 낮기 때문에 추가근무나 부업을 하고, 늘 시간이 부족하다. 임금이 낮을수록 주거비로 지출하는 소비 비중은 더 높고, 임금을 상실했을 때 소득 보장 가능성은 낮다. 반면 완전한 빈곤상태에 빠진 이후에도 복지제도는 부양의무자 여부나 지나치게 낮은 소득인정액 등 까다로운 기준을 들며 ‘진짜 진짜 가난’에 도달할 때까지 빈곤층에게 사회보장의 문을 열지 않는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이는 반복되고 있다. 방역의 개인 책임은 엄격하지만, 방역 참여를 위한 조건을 보장하거나 방역에 따른 손해는 사회화하지 않는 ‘신자유주의 방역’이다.

 

사회로부터 집단적인 보호를 받아본 경험이 없는 개인들의 낙담은 이미 심각한 사회적 상처다. 빈곤층의 죽음이 있을 때마다 정부는 ‘왜 발견하지 못했는가’ 질문하지만, 이 질문은 잘못되었다. 사각지대를 발굴한다고 수선을 떠는 동안 사람들은 각자의 방 안에서 스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리스크를 개인에게 전가해온 우리 사회의 실패가 만든 ‘긴 침묵의 시간’에 대해 우리는 더 알아야 한다.

 

리스크 사회 속 재난

 

돌아보면 ‘전대미문’으로 일컬어지는 지난 시간동안 우리가 외친 구호는 코로나19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모두의 주거권을 보장하라, 공공의료 확대하라, 돌봄과 복지는 가족의 책임이 아니다, 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탈시설 권리를 보장하라. ‘사회보장은 방역의 기초체력’이라는 말처럼 모든 이들의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요구는 방역 이후가 아니라 방역을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이다.

 

그래서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의 꿈이 아니다. 팬데믹을 통해 우리가 배운 것은 새로운 재난이 기존의 차별을 경유해 약자들을 어떻게 수탈하는가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요구는 더욱 갈급한 것이 되었다. 이제 탈시설은 미래의 지향이 아니라 지금 가야 하는 길이 되었고, 홈리스 주거보장은 언젠가 달성할 목표가 아니라 지금 성취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다.

 

공상영화 속 재난은 펑 하고 한번에 일어나는 것이었다. 현실이 된 기후위기와 코로나19를 겪으며 재난이 늘 극적인 모습을 띠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언젠가 있을지 모를 인류의 절멸도 한번의 재앙이 아니라 천천히 하나하나 죽어가는 모습에 가까울지 모른다. 가장 약한 사람과 가난한 이들이 가장 먼저 스러지는 것, 이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침묵으로 이들의 죽음을 승인하는 것이 재난의 진짜 모습 아닌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어떻게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전처럼 살지 않을 것인가이다.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는 환호가 반갑지 않다. 우리는 이전에도 지금도 전혀 괜찮지 않기 때문이다.

 

 

김윤영 /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2021.7.28.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