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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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서로 돌봄을 어떻게 실천해가야 할까



김중미

우리 공동체는 해마다 12월 31일에는 강화 굴암돈대에서 해넘이를 하고, 1월 1일에는 황산도에서 해돋이를 함께 한다. 해가 지고 뜨는 일,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일을 그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결과로 보지 않고 애써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은 그렇게라도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택하려는 인간의 안간힘일 것이다. 2024년에도 변함없이 첫 일출을 보며 희망을 꿈꿔보지만 좀처럼 힘이 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공동체 식구들이 함께 먹을 떡국을 준비하는데 공부방 상근교사로 일하는 K가 스마트폰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올해부터는 협력교사로 일하지 못할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2024년부터 기초학력 향상 지원사업 예산이 삭감된다는 것은 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K는 공부방 상근자로 일하며 몇년 전부터 기초학력 향상 지원사업의 일환인 협력교사로 일했다. K는 당장 월 1백만원의 수입이 끊어지게 된 것보다 자신이 맡았던 파키스탄,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아이가 겪을 학습 곤란을 걱정했다. 또한 한 학급에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아이들을 돌봐야 할 담임선생님들이 겪을 어려움도 떠올렸다.


대한민국만큼 ‘교육’에 관심이 많은 나라가 또 있을까. 그러면서도 ‘교육’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백년지대계인 교육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 정책 저 정책을 기워 써 누더기가 된 지 오래다. 윤석열정부 역시 ‘늘봄학교’라는 정책을 도입했다. ‘늘봄학교’는 학부모가 원한다면 자녀를 아침 7시부터 저녁 8시까지 최대 13시간 동안 학교에 맡길 수 있는 정책이다. 점심급식뿐 아니라 아침, 저녁에도 간식과 간편식으로 삼시 세끼를 제공하고, 양과 질이 보장되는 교육적인 돌봄을 제공하겠다며 2023년에 시범 운영했다. 


1년 동안 시범 운영된 ‘늘봄학교’는 여러가지 문제가 드러났지만 교육당국은 제대로 된 평가 없이 해당 정책을 2024년부터 모든 초등학교로 전면 확대했다. 정부는 교사에게 부담·피해를 주지 않는 정책이 될 거라고 장담했지만, 일부 시도교육청에서는 당장 올해부터 ‘늘봄학교’ 담당자를 구하지 못해 현직교사나 기간제교사를 배치하겠다고 했다. 맞벌이 부부 자녀를 위한 ‘돌봄교실’, 사교육비 절감을 위해 만들어진 ‘방과후 학교’가 주먹구구로 학교에 들어오면서 생긴 문제들을 ‘늘봄학교’ 역시 그대로 되풀이할 우려가 크다. 돌봄교실과 방과후 학교가 지닌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학교 공동체 안에서 계속 갈등을 일으킨 까닭은 정책이 장기적인 교육적 비전에 따라 만들어진 게 아니라 정권의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급조되었기 때문이다. 교육주체인 교사와 학생들의 목소리는 배제한 채 만들어진 교육정책이 현장에서 제 역할을 하기는 힘들다.


‘늘봄학교’를 도입할 때도 성장기 아동을 13시간씩 학교에 머물게 하는 것은 아동학대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정부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들으려 하지 않고 정책을 강행했다. 무엇보다 13시간 동안 학교에 있어야 하는 아동에게 미칠 정서적·심리적인 영향, 발달단계에 맞는 신체활동·사회활동에 미칠 영향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없었다. 그저 아이를 맡길 데가 필요한 학부모를 위해 뚝딱 만들어진 정책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할는지 모르겠다. 하긴 어차피 대한민국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지금의 행복을 누릴 권리가 없다.


방과후 돌봄의 시작은 1980, 90년대 빈민지역에서 시작한 공부방이었다. 그때 공부방은 돌봄의 역할만 한 것이 아니다. 공부방은 아동 청소년들이 지역사회 안에서 ‘민주주의와 공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고, 다양한 문화예술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또한 보호자들에게는 공부방에서 만난 이웃들과 고된 노동과 가난의 설움을 나누고 목소리를 내는 곳이기도 했다.


그 공부방이 2000년대에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는 지역아동센터가 되었다. 이후 지역아동센터가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 혹은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을 우선 돌보기 시작하면서 지역아동센터는 가난한 아이들만 다니는 곳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낙인이 찍힌 지역아동센터 대신 ‘보편적인 아동 돌봄’은 학교가 떠맡게 되었다. 반면 자신이 도움을 받을 대상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 미등록 이주 배경 아이들은 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지역공동체의 서로 돌봄은 사라지고, ‘돌봄’의 기능만 지역아동센터와 학교 돌봄교실로 옮겨갔으며, ‘돌봄’은 어른들의 노동문제가 되었다. 돌봄 수혜자인 아동과 청소년은 지역공동체, 시민사회의 구성원이 아니라 돌봄을 받아야 할 수동적인 존재가 되었다. 어디에서도 그들의 행복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팬데믹 이후 세계 곳곳에서 ‘서로 돌봄’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돌봄’에 대한 철학이 아예 없는 것 같다. 정부는 2024년 시·도 사회서비스원 운영 지자체 운영금 148억 3400만원을 전액 삭감했다. 그러면서 서울사회서비스원에서 운영해온 공공어린이집 위탁을 끊고 민간에 넘긴다고 한다. 정부가 돌봄을 민간에 떠넘기려는 데는 돌봄·가사노동이 각 가정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돌봄을 ‘아무나’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돌봄·가사노동을 외국인에게 외주화하는 방안을 저출생 대책이라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노동계는 가사, 돌봄 노동시장의 규율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외국인 돌봄 인력을 들이는 일을 우려하면서도, 돌봄노동을 외주화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라고 본다. 그래서 관련 제도를 손보고 돌봄노동에 대한 가치를 새로 정립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나 역시 돌봄노동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아야 하고, 괜찮은 여성 일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돌봄이 단지 노동의 문제로 축소되는 것에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아동 돌봄은 아주 섬세하고 전문적인 영역이다. 돌봄의 수혜자인 어린이들은 발달단계에 맞게 몸과 마음이 성장하도록 필요한 돌봄과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어린이들은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다. 아동과 청소년들이 한 사회의 주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바탕인 가정이 필요하다. 그 가정이 핏줄로 이루어진 ‘가족’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모든 아이들이 적정한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는 가정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가정 밖에는 그 가정을 지켜줄 지역사회와 공동체, 마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아이들을 맡아줄 곳만 만들기보다 여성의 경력 단절, 남녀의 임금 차이, 여성에게 치우친 육아와 돌봄 책임을 평등하게 바로잡을 정책이 절실하다.


팬데믹을 경험한 인간은 팬데믹 이전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당면한 기후위기, 불평등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 인간들이 서로 협력하고 연대할 것이라고 믿었다. 팬데믹 이전에도 ‘공동체’ ‘함께 살기’는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팬데믹을 겪고 나니 ‘공동체’ ‘함께 살기’는 대안적 삶의 방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생명줄이었다. 타인에게 의존하고 돕고 기대어 사는 것은 반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립된 개인으로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돌봄은 ‘함께 살기’의 시작이며 끝이다. 돌봄을 받는 주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돌봄의 핵심이다. 어린아이들이 언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들이 사랑받고 돌봄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끔, 아이들을 학교 담장 너머 마을로 보내야 한다. 학원과 학원버스 밖에서 타자를 만나고 소통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아동 청소년을 중심으로 놓았지만 ‘서로 돌봄’ ‘함께 살기’는 장애인, 노인, 이주민, 난민, 빈민, 노동자 모두가 누려야 할 권리이다.


김중미 / 작가, 기찻길옆작은학교 큰이모

2024.1.23.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