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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중심으로 역사를 쓴다는 것: 킴 닐슨 『장애의 역사』

‘장애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킴 닐슨(Kim Nielsen)의 『미국의 장애사』(A Disabilit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2012, 김승섭 옮김, 동아시아 2020)는 우리가 지금 장애라고 부르는 개념, 장애인이라 불리는 범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삶의 경험이 만들어져온 역사적 과정을 추적하는 동시에, 그것이 미국이라는 국가가 만들어져온 과정과 어떤 방식으로 얽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300면이 조금 넘는 이 책은 유럽인이 이주하기 전부터 북아메리카에 살고 있던 토착민들에게 ‘장애는 무엇이었나’를 묻는 데서 출발해 정착한 유럽인들에 의한 식민화, 노예제, 산업화, 2차 세계대전, 민권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역사적 국면들에서 장애라는 개념, 장애를 가진 몸, 장애인의 권리라는 문제가 만들어지고 개정되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그려낸다. 이 작업을 통해 닐슨은 우리에게 장애가 무엇인지를 다시 질문하게 하는 한편, 장애를 둘러싼 제도와 담론, 실천들이 ‘장애를 가진 몸’이 살아가는 방식을 규정했을 뿐 아니라 인종, 계급, 젠더 등에 따르는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장치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장애에 대한 차별과 억압의 역사는 미국이라는 국가를 만들어낸 부정의의 역사로 다시 쓰이며, 그에 따라 장애인권운동은 장애인의 권리를 위한 투쟁일 뿐 아니라 이 역사적 부정의를 바로잡는 기획이 되기도 한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성립하기 전의 북아메리카 토착민 이야기로 본문을 열면서 닐슨은 장애라는 말에서 신체적·정신적인 ‘결핍’을 연상할 독자들에게 그 개념 자체가 매우 특수한 역사적·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닐슨에 따르면 토착민들은 오늘날 흔히 장애로 분류되는 다양한 감각과 인지, 움직임의 방식을 그 자체로 장애라고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장애는 어떤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호혜적인 활동에 참여할 수 없을 때 ‘발생’하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과 다른 몸을 가진 사람이 자동적으로 장애인 혹은 장애를 ‘가진’ 사람이 되지 않는 토착민들의 세계를 살펴본 후, 닐슨은 폭력적인 정착식민화 과정이 그들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들려준다. 그 과정에서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많은 이들이 전염병으로 죽음을 맞으면서 약화된 토착민 공동체는 그전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할 수 없었기에 손상된 몸을 가진 이들의 삶의 경험도 상당히 달라졌다. 손상된 몸을 생산하는 동시에 그 몸이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관계망으로서의 공동체를 파괴함으로써, 식민화는 그전과는 전혀 다른 ‘장애’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한편 닐슨은 당대의 유럽인들이라고 해서 오늘날과 일치하는 장애 개념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식민지 공동체의 유럽인들에게 장애를 식별하는 일차적 기준이 노동할 능력이 있는지 여부이기는 했지만, 비규범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능력있는 몸(able-bodied)의 범주에서 배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노동할 수 있는 한 신체적 비규범성은 큰 문제가 아니었으며, 가족의 돌봄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한 노동할 수 없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미국에서 신체적·정신적 ‘결함’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독립혁명 이후였다. 닐슨은 미국의 성립 시기에 이르러 비장애중심주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적인 방식으로 온전한 시민권을 가질 수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하고 부적절한 몸을 가진 이들을 분별해내는 작업이 의사 등 전문가의 영역이 되었음을 지적한다. 장애를 개인의 몸에 부착된, 표준화된 척도에 의해 측정 가능한 ‘결함’이라고 보는 관점은 상당히 최근의 것이며 그것이 특정한 정치경제적 맥락 안에서 힘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을 드러냄으로써 이 책은 장애 개념을 역사화하는 동시에 역사를 장애의 관점에서 새롭게 볼 수 있게 한다.


장애 개념이 어떻게 변화해왔으며 미국사회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담론들 속에서 장애라는 기호가 어떻게 동원되는지, 노예제나 산업화와 같은 생산양식의 변화가 장애를 문제화하는 방식 혹은 장애가 정의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서술하면서 이 책은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과정들이 오히려 ‘장애’를 생산해내기도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자본주의는 장애를 가진 몸을 ‘무능’한 것으로 배제할 뿐 아니라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손상된 신체들을 만들어냈고, 표준화된 작업장을 포함한 비장애중심적 환경은 그렇게 손상된 몸을 가진 이들이 작업장에 접근해 노동자로서의 삶을 영위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닐슨의 『장애의 역사』는 장애의 개념과 그를 둘러싼 담론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분석하는 동시에 장애를 가진 몸이 생산되는 역사적 과정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특수한 경험을 살펴봄으로써 장애를 보다 다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닐슨은 그러한 담론에 의해 스스로의 삶이 규정되었고 자신의 몸으로 미국이라는 국가의 부정의를 살아내야 했던 장애인들의 운동과 그로써 가능해진 변화들을 다루면서 이 책을 마무리한다. 미국이라는 정치체의 성립 과정에서 장애인이라는 범주, 손상된 몸, 장애에 대한 배제와 차별의 생산이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앞선 논의에 수긍하는 독자들이라면, 이 시점에서 장애인 인권운동이 단지 장애인의 존엄이나 인권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배제되어야 했던 이들이 국가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동시에 바로 그 국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난 부정의를 시정하는 기획임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 이 글은 세교연구소의 서평웹진 <잔다리서가>에 소개된 서평입니다.


이지은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2024.4.23. ⓒ창비주간논평·잔다리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