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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머리(수)싸움이 된 공영방송 문제, 돌파구를 찾자

정준희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에 가로막혀 최종적으로 폐기 처리된 이른바 ‘방송 3법’은 방송법, 방송문화진흥회법, 한국교육방송공사법의 개정안을 가리킨다. 이들 개정안은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목표로 했다. 사장을 선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공영방송 이사회 구성이 정파성보다는 전문성과 다양성에 의해 이뤄지도록 함으로써 정부에 의한 공영방송 지배를 막겠다는 의도였다.


방송사의 경영과 편집권은 결국 인사권을 가진 최종 편성책임자인 사장에게로 모인다. KBS, MBC, EBS 등 3대 공영방송사의 명목상 주인은 국민이지만 실질적 지배 주체는 정부다. 사장을 선임하거나 견제할 수 있는 이사회의 다수가 사실상 정부에 의해 지명되기 때문이다. KBS 이사회 규정은 방송법 안에 있다. MBC의 대주주는 정부가 출자한 공익법인인 방송문화진흥회인데, 이를 설치하여 운영하는 법이 방송문화진흥회법이다. EBS 역시 별도의 한국교육방송공사법에 의해 운영된다. 결국 3대 공영방송사의 이사회 구성에서 사장 선임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들 세가지 법의 개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현행 법령은 여권이 KBS 이사 11인 중 7인을, 방송문화진흥회와 EBS 이사 9인 중 6인을 추천하여 대통령 혹은 방송통신위원회가 임명하도록 되어 있다. 실제로 법 규정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법은 추천권을 여권 몇명 야권 몇명으로 나누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략 1/3가량의 이사를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고, 나머지 2/3 이사가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의 여야 구도인 3:2 비율대로 추천되는 ‘관행’이 있다. 사실상 공영방송 이사회의 과반을 늘 대통령과 그 대통령이 속해 있는 정당이 차지할 수 있게 해준 구도라 하겠다. 그러다보니 정부가 교체될 때마다 이사회의 구성비가 정파적으로 바뀌고, 그 결과 집권세력이 공영방송의 색채를 좌우하는 통로가 열리게 된다. 


심지어 법적으로 보장된 이사회와 사장의 임기가 대통령의 임기와 어긋날 때에는 (즉 새 대통령이 선출됐는데 전직 대통령이 임명한 이사회와 그 이사회가 선임한 사장의 임기가 여전히 남아 있을 때에는) 공영방송 전체가 홍역을 앓는다. 사장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명분과 절차가 필요한데, 명분은 대개 ‘경영부실’이고 절차는 해임 의결이 가능한 구도로 이사진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당대 정부와는 결이 다른 이사 몇명을 내쫓고 그 자리에 친정부 인사를 앉혀서 의결과반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명분과 절차가 필요하다. 명분은 ‘법인카드 부정사용’ 등이고 절차는 해임의결권을 가진 방송통신위원회가 움직이는 것이다. 윤석열정부는 거침없이 이 길을 걸었다. KBS가 그렇게 바뀌었고, 최근 EBS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MBC의 경우엔 이 방법이 막혔다.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을 내쫓는 절차에 법원이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 방송문화진흥회의 임기가 올해 8월에 종료된다. 그 이후가 어떨지는 뻔하다. 더욱이 윤석열정부는 각 공영방송은 물론 방송심의위원회와 방송통신위원회에서 공석이 된 야권 추천 이사 혹은 위원을 임명하지 않는 대신 여권 이사 혹은 위원만 임명하는 식으로 기형적인 다수를 확보하는 ‘신기술’까지 장착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통령거부권에 가로막혀 좌절된 방송 3법 개정안은 그간 관행적으로 이어져온 여야 추천권을 줄이고 시청자위원회, 관련 학회, 관련 직능단체의 추천 몫을 키웠다. 이사 수 역시 두배가량 늘렸다. 여기에 이른바 ‘특별다수제’, 즉 사장 선임과 같은 중요한 결정에는 과반수가 아닌 2/3의 동의를 얻도록 하는 규정을 도입했다. 100인의 사장추천국민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들이 3인 이하의 사장 후보를 복수 결정하면, 이사회 2/3 이상의 찬성을 받은 후보가 사장으로 제청되고 대통령이 이를 임명하는 방식이다. 요컨대 공영방송 이사회가 정부여당 주도적으로 구성되어 단순 과반으로 사장을 선임하는 기존 관행을 깨뜨리겠다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되면 정부여당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이사와 사장에 앉히는 과정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어렵고 복잡해진다. 정부가 교체되더라도, 잔여 임기 이전에 이사진을 내쫓는 일 역시 훨씬 더 손이 갈 수밖에 없다. 절차가 다층적으로 구성될수록 정부 의도가 관철될 확률은 낮아진다. 이게 지난 방송 3법 개정안의 취지였던 셈이다.


대통령거부권 행사 당시 정부는 견제받아야 할 집단인 노조 등 이해관계자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강화되어 방송의 공정성을 훼손할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여당은 그보다 더 선명하게 본심을 드러냈는데, 이 법대로 하면 공영방송은 영원히 민주당 방송이 될 거라는 게 이유였다. 말하자면 정권을 가져와도 우리 맘대로 공영방송을 쥐락펴락하지 못한다면 그게 뭐냐는 거다. 결국 소위 ‘표 계산’을 해보면 구조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법을 받아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22대 국회가 개원한다고 해서 이 태도가 달라질 리는 없다. 


게다가 방송 관련 위원회를 구성할 때, 영 석연치 않은 단체와 학회를 내세워 영 석연치 않은 위원을 앉혀 ‘절대 다수’의 힘으로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게 했던 이 정부의 최근 동향으로 볼 때, 혹여 방송 3법이 통과된다고 한들 정부 의도를 관철시킬 기기묘묘한 방법을 못 찾을 것 같지도 않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추천권을 지닌 단체를 더 엄격하게 규정하고, 방송규약을 위반해도 처벌하는 규정이 없어서 무용지물이 된 지금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추가 조치를 취하겠다는 게 언론노조 등의 입장이다. 문제는 그런 ‘강화된 규정’을 정부여당이 반길 이유가 더더욱 없다는 데 있다. 타협안을 찾건 강행을 하건, 거부권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절대 다수의 원군을 국회에서 확보하지 않는 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입법은 난망하다. 결국 ‘표 계산’에서 시작해서 ‘표 계산’으로 끝나는 지루한 문제의 반복이다. 공영방송 개혁의 중요한 시작점이지만 결코 최종 종착지는 아닌 이 지점에서부터 우리 사회는 온갖 장벽을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표 계산’을 넘어서게 해줄 대중적 관심과 압박이 절실한 시점이다.


정준희 /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겸임교수

2024.5.21.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