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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의 정신승리: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정용숙

꽤 오랫동안 고기를 입에 대지 못했다. 2011년 구제역과 조류 인플루엔자 사태 당시 아직 살아 있는 돼지들을 포클레인으로 매몰 구덩이에 밀어 넣는 장면을 본 순간부터였다. 구역질이 밀려들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고기를 먹을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다. 2003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도발적인 전시 ‘밥상의 홀로코스트’(Holocaust on Your Plate)는 효율을 추구하는 공장식 축산과 도축 시스템이 나치의 체계적 대량학살과 닮았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흥분하고 항의했다. ‘고통 포르노’ ‘동물과 인간이 같냐’ ‘유대인을 가축으로 격하해 그들의 고통을 조롱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나치 수용소가 현대식 도축장을 본떴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유대인 관리의 신속성과 효율성을 위해, 가축 사육과 운송 및 도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공장식 포드 시스템을 도입한 미국의 계류장과 도축장을 모델로 가져왔다. 유대인들은 가축용 화차에 구겨 넣어져 수용소로 끌려갔고, 가축처럼 식별번호가 몸에 새겨졌고, 수용소 막사는 사실상 인간 우리였다. 가스실의 독가스 치클론 B는 원래 쥐약으로 개발된 화학제품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자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의 실제 모델인 루돌프 회스는 아우슈비츠를 “역사적으로 가장 거대한 인간 도축장”이라고 말했다. 


매몰 현장에 투입된 작업자들은 그날 밤 잠들 수 있었을까? 그들이 겪어내야 했던 트라우마를 우리는 안다. 그러면 이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값싼 고기를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은 공장식 축산과 도축 시스템 덕분이고, 마음 편하게 고기를 씹을 수 있는 것은 그 시스템의 끔찍함을 보고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 시스템을 관리하는 일이 직업이고 삶이라면? 그것과 함께 사는 법을 익혀야 할 것이다. 어떻게? 무사유를 넘어 무감의 벽을 치는 것이다. 관사와 수용소를 가르는 벽을 보지 않으려고 포도나무를 심은, 루돌프 회스의 아내 헤드비히처럼 말이다.


유대계 영국인 감독 조너선 글래이저의 화제작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한나 아렌트의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을 정말이지 ‘평범’한 화면과 음향으로 관객에게 들이댄다. 이런 특별한 연출을 위해 동원한 비범한 기법들을 수많은 비평이 찬사를 담아 설명한다. 영화잡지 『씨네21』은 이 영화에 대한 각계 전문가들의 분석과 비평 특집을 제공한다. 세부 장면들의 의미에 대한 해석도 넘쳐난다. 그러니 이 짧은 글은 독일현대사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의 감상이다. 


역사물로서 이 영화는 팩트와 픽션을 조합한 ‘팩션’에 속하고, 그럼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넘어 ‘진실’의 심해로 내려간다. 아우슈비츠, 유대인 살해, 수용소장 회스와 그 가족의 존재는 사실이지만 영화에 묘사되는 회스 가족의 일상은 사료를 토대로 세심하게 구성된 픽션이다. 감독과 관객의 감정과 상상력을 허용하고 자극하는 이런 연출은 엄격한 사실 재현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진실을 매개한다. 이것은 지난 수십년 동안 계속해서 새롭게 시도되어온 홀로코스트의 영화적 재현이 현재 도달한 지점이며 감독에게 찬사가 쏟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래이저 감독은 이 영화를 위해 3년 동안 홀로코스트 역사와 아우슈비츠 기록을 연구했고, 회스 가족사진과 증언을 토대로 수용소장 관사와 정원과 회스 일가의 일상을 재현했다. 2013년 『워싱턴포스트』는 미국 버지니아에 이름을 바꿔 숨어 살던 브리기테 회스의 인터뷰를 실었다. 회스 부부의 다섯 자녀 중 셋째였던 그는 ‘아름다운 어린 시절’과 ‘다정했던 아빠’를 기억했다. 질서 강박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고 엄하게 꾸짖고, 함께 식사하고 정원에서 놀고 『헨젤과 그레텔』 동화를 읽어준 아빠. “우리에게 정말 잘해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 


그 아빠는 항상 두통에 시달렸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다. 눈앞의 지옥도 앞에 무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영화에서 회스는 70만명 규모의 헝가리 유대인 이송과 절멸 계획 ‘회스 작전’을 위해 집(아우슈비츠)으로 돌아간다며 기뻐한다. 그는 시큰둥해하는 아내와의 통화를 끝내고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구역질한다. 연회장을 가득 채운 독일인들을 내려다보며 효율적인 가스실을 습관처럼 상상하는 스스로가 조금은 역겨워졌을지도 모른다. 첫번째 구역질에서는 침 몇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만, 두번째 구토는 헛구역질로 끝난다. 이 장면은 추모관이 된 현재의 아우슈비츠로 이어지고, 직원들이 시체 소각로와 희생자 유품이 전시된 진열장을 청소한다. 루돌프 회스는 이제 42만 4천명의 헝가리 유대인을 가스실에 처넣는 일을 단 56일 만에 해낼 것이다.


구토 장면에서 「액트 오브 킬링」(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 2012)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이 기록영화에서, 1965년 인도네시아 쿠데타 당시 반공을 명분으로 100만명 이상의 학살을 주도한 안와르 콩고는 자기가 한 짓을 자랑스레 떠벌리며 어떻게 사람을 죽였는지 직접 보여주기까지 한다. 그러다 사람 목을 와이어로 졸라 죽인 행위를 재연하면서 느닷없이 토한다. 가해자가 자기 몸의 감각을 통해 비로소 피해자의 고통을 느끼고 지금껏 아무렇지 않았던 자기 행동이 갑자기 역겨워진 것이다. 반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회스는 구역질에 ‘실패’한다. 그래서 헝가리 유대인 절멸이라는 ‘과업’을 이뤄낼 수 있었고, 그 결과가 아우슈비츠 추모관의 전시품이다. 


그런데 나는 구토에 이어지는 현재 아우슈비츠의 청소 장면이 생경했다. 수용소 내부는 영화 전체에서 이 장면에만 나온다. 전시실 관리와 청소는 직원들의 일상이겠지만, 방문객은 그 광경을 볼 일이 없다. 고통과 죽음의 장소였던 당시의 아우슈비츠는 지금처럼 정성껏 관리되는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헤드비히 회스는 담 뒤편을 외면하고 그 안쪽 자신의 왕국을 청소하고 가꿨다. 80년 후 지금은 담 뒤편의 수용소가 소중히 다뤄진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아우슈비츠는 진본(authentic)이지만 ‘진본’이 아니다. 희생자 유품 진열장의 커다란 유리를 스프레이를 뿌려가며 닦고 또 닦는 행위를 지켜보면서, 말하기 어렵고 재현하기 어려운 끔찍함을 기억하는 일의 본질적 한계에 생각이 미쳤다. 지금 아우슈비츠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말끔히 ‘청소’된 과거인가? 


작년 여름 독일을 방문했을 때, 홀로코스트에 기반해 제도화된 독일의 정치교육(우리의 ‘시민교육’)이 현재 마주한 문제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80년 전 과거를 현재와 연결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시간의 간격은 점점 벌어지고, 독일사회는 그동안 이주민들로 다양화되었다. 이들이 홀로코스트의 무엇을 공유할 수 있을까? 독일 영화평 사이트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 관객 평점은 별 하나 아니면 다섯이고 중간이 거의 없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홀로코스트와 그 영화적 재현의 역사를 알면 알수록 흥미롭지만, 그렇지 않으면 불쾌한 느낌만 남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 영화에 별점 몇개를 줄 수 있을까? 


이 영화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을 관객이 지켜보도록 한다. 여기서 시종일관 꿋꿋한 사람은 헤드비히 회스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가 영화의 주인공이다. 우리 시대에 홀로코스트의 범죄성을 이야기하기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 정치적으로도 안전하다. 과거에 일어난 일들의 개별성을 탐구하는 역사가는 역사적 특수성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엄격하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기억과 재현은 현재와 연결되는 보편성에 관심 두는 공공역사의 발전을 추동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를 픽션으로 재현함으로써 ‘타자의 고통’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 것 같다. 지옥의 뒷마당도 낙원이 될 수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스스로를 가두고 오감을 잘라낼 수 있다면.


정용숙 / 춘천교육대 사회과교육과 조교수

2024.7.9.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