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일본 자민당정권의 이중성과 피단협의 노벨평화상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2024년 평화상을 ‘일본피단협’(니혼히단꾜오, 日本原水爆被害者団体協議会)에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우끄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 전쟁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수상자 선정을 보류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핵보유국의 핵무기 현대화와 고도화, 비보유국의 핵무장 시도, 전시 핵무기 사용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현실 등 핵을 둘러싼 국제질서가 엄중해지고 있는 지금 피단협의 평화상 수상은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핵무기 비확산이나 금지활동을 해온 개인과 단체는 여러차례 이 상을 받아왔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09년 1월 20일에 임기를 시작했는데, 평화상 후보 추천 최종 시한이 그해 2월 1일이었음에도 수상자로 선정됐다. 사실상 핵 비확산 실적이 없었지만 후보 시절 비핵화 비전을 제시했다는 이유였다. 1974년에는 1967년 비핵 3원칙(핵무기의 개발, 보유, 반입 금지)을 선언한 사또오 에이사꾸 총리가, 2017년에는 일본 피단협을 비롯해 여러 반핵단체가 지지하고 있는 핵무기폐기국제운동(ICAN)이 유엔의 핵무기금지조약 체결을 이끈 공로로 평화상을 받았다. 그런 면에서 원폭투하 80주년을 한 해 앞둔 지금에야 반핵평화를 위해 힘써온 생존자단체가 수상하게 된 것은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사실 피단협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투하된 원폭에 피폭된 이들이 1956년에 결성한 여러 생존자단체 중 하나다. 패전 후 10여년이 흘러 뒤늦게 생존자들의 존재가 주목받은 건 1954년 미국이 태평양의 비키니환초에서 행한 수소폭탄 실험으로 일본 어선의 어부가 사망한 사건이 계기였다. 미군의 점령 당시 원폭 관련 보도가 금지되기도 했고, 여러 다른 전쟁피해자들도 많았기에 원폭생존자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던 일본사회에서 피폭 위험에 대한 경각심이 커졌고 전국 단위로 반핵평화운동이 확산되었다. 미국은 이런 움직임이 반미운동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피폭된 어부들과의 보상 협상에 빠르게 착수했다. 원폭생존자 구호에 미온적이던 일본정부도 ‘피폭자’(히바꾸샤, 被爆者)라는 용어를 만들어 의료 등 복지 지원을 시작했다. 피단협이 1970년대부터 일본정부를 상대로 투쟁하던 한국 원폭생존자들과 별다른 연대활동을 하지 않았다거나 아시아태평양 전쟁과 식민지 침탈행위 등 역사적인 맥락을 소거한 채 피해만을 내세운다는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원폭의 참상을 직접 겪은 반핵평화의 메시지가 주는 호소력은 컸다.
한편 피단협의 평화상 수상 소식을 즈음해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미국 허드슨연구소에 게재한 “미국과의 핵공유·핵반입”을 포함한 아시아판 나토 설립 주장을 담은 글이 화제가 되었다. 기고문에서 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전쟁을 개시한 것을 유엔의 집단안보체제에 내재한 한계라고 말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우끄라이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회원국이 아니기 때문에 방어할 의무가 없다”라고 한 점도 눈여겨봤다. 유엔에서 러시아와 동일한 지위에 있으며 전략 핵무기를 확보한 상태에서 대만과 대립하고 있는 중국, 이전보다 러시아와 군사적으로 더욱 밀착한 가운데 핵과 장거리 미사일능력을 강화하고 있는 북한을 지척에 둔 상황에서 이시바의 아시아판 나토 구상은 그렇게 구체화되었다. 그의 주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10월 말 중의원 선거의 당대표 토론회에서 밝혔듯 “우끄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핵 억지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인식은 확고했다.
야스꾸니 신사에 참배하지 않고 정치성향이 비교적 온건하다고 평가받던 그가 유독 방위문제에만 강경한 입장인 것을 개인 견해로만 보기는 어렵다. 비핵 3원칙 합의 당시에도 오끼나와에 한해서는 유사시 미군의 전술핵을 반입한다거나 미군의 핵항공모함을 오끼나와에 정박시킨다는 등, 핵우산에 대한 이면 합의가 존재했다. 하지만 자민당정권이 전쟁할 수 있는 나라와 핵문제를 정치 공론장 전면에 등장시킨 것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 직후 재해부흥이라는 국가주의적 재건서사로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되찾은 이후다.
실제로 2014년 아베정권은 헌법을 재해석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한다는 계획을 공식 표명했다. 이후 자위대는 자국 영토에 대한 직접 공격에 대응해 최소한의 무력만 사용할 수 있던 데서 나아가 특정 조건이 충족되면 일본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에 대한 공격에 반격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언제라도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춘 셈인데, 사실상 평화주의에 뼈대를 둔 전후체제를 형해화하고 그로부터의 이탈을 본격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후임의 키시다정권은 2022년 안보 관련 3대 문서(국가안전보장전략, 국가방위전략, 방위력정비계획)를 개정하며 그 흐름을 가속했다. 적의 미사일기지 공격능력을 의미하는 ‘반격능력’ 보유와 장거리미사일 전력 향상을 승인했고, GDP의 1%였던 방위비를 2027년까지 2%로 늘린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확정은 아니지만 동일본대지진과 후꾸시마 원전사고 수습을 위해 거두는 부흥세(소득세의 2.1%)를 전용한다는 계획도 검토할 수 있다고 했다.
핵전쟁도 수행할 수 있는 나라로 향하는 자민당의 발걸음은 잰 반면 피단협이 압박해온 핵무기금지조약(TPNW) 발효와 비준국 회의 개최는 한발도 떼지 않았다. 2017년 유엔에서 채택된 이 조약은 핵보유국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기존의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나아가 핵무기의 개발, 시험, 생산, 취득, 소유, 비축, 사용뿐 아니라 핵무기를 사용한다고 위협하는 것도 금지하는 훨씬 더 강화된 조약이다. 2021년 비준국이 50개국을 넘기며 발효됐지만 미국, 중국, 러시아 등 핵무기 보유국, 그리고 나토 회원국과 일본, 한국 등 핵우산을 제공받는 국가들은 참여하지 않고 있다. 이시바 총리는 조약 비준에 대해 “핵금지가 되었을 때 여기저기서 분쟁이 빈발하지 않을까”라며 사실상 거부의사를 피력했다. 어렸을 적 히로시마의 참상에 관한 동영상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고 말한 뒤였다.
이시바의 견해는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넘어 핵전쟁도 수행할 수 있는 나라로 나아가려는 자민당정권이 평화의 이름으로 원폭피해를 소비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6월 히로시마에서 열린 ‘미국의 핵무기 투하에 책임을 묻는 원폭국제민중법정 국제토론회’를 상기하고자 한다. 2026년 뉴욕 민중법정(공동대표 강우일 천주교 제주교구 전 주교, 히라오까 타까시 히로시마 전 시장) 개최를 준비하는 이 토론회는 원폭투하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것과 동시에 현재 개발되거나 배치된 핵무기 사용의 위법성과 핵확장억제정책의 불법성을 헤이그협약의 마르텐스 조항(Martens Clause, 법의 부존재를 이유로 비인도적 행위를 할 수 없다)과 1945년 이후 창설된 국제인도법 등을 통해 해석하고 있다. 이를 위해 뉴질랜드, 미국, 독일, 일본, 한국 등의 관련 분야 학자들, 피단협을 비롯한 여러 생존자단체와 평화운동가가 모인 자리에서 한국원폭협회 합천지부장인 심진태는 “죽기 전에 이런 무기가 지구상에 있으면 안 된다고 알려주고 가야 하는 게 나의 의무”라고 대표발언을 했다. 평생 농사꾼으로 살던 그가 원폭생존자로 2015년 유엔 핵확산금지조약 검토회의에 참가한 뒤 새기고 있는 목표다. 피단협을 비롯해 수많은 원폭생존자가 발신하는 반핵평화의 메시지는 평화의 가면을 쓰고 핵피해만를 전유하려는 국가의 자위권 신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파괴되었던 살로부터 온다. 우경화되어가는 (동시에 부패한) 자민당 정치에서 피단협의 평화상은 마음이 아프다는 수사를 넘어서 핵금지를 위한 실질적인 행동을 촉구한다.
오은정 /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조교수
2024.11.12.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