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아직 끝나지 않은 내란과 ‘변혁적 중도’
이태호
극우의 혐오선동과 그 세력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할지가 뜨거운 관심사다. 이것이 전지구적 양상이고 심각한 문제이므로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는 데는 광장 및 시민사회 토론장에서 일치된 견해를 보인다. 하지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구체적 의견이 모이지 않고 있다. 실천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전지구적 수준에서 일어나는 전환의 지체만 아니라, 극우의 세력화가 한반도와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어떤 특징과 양상으로 전개되는지 따져봐야 한다. 특히 내란사태 전후 한반도 분단체제와 안보지상주의가 작동하는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위협’을 구실로 삼은 극우세력
계엄선포의 공식적인 명분은 “북한 공산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긴급 대국민 특별담화, 2024.12.3). 심지어 내란세력들이 ‘북한의 위협’을 실제상황으로 만들기 위해 국지전을 유도했던 정황도 각종 제보로 드러났다. 윤석열정권이 9·19군사합의 파기를 선언할 때부터 이미 쿠데타가 준비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를 주적으로 선포하고 유사시 핵을 사용한 선제공격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공언하기 시작한 상황이 한국을 쿠데타 또는 이와 유사한 국가공권력의 폭력적 사용에 취약하게 만들었음은 자명하다.
내란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윤석열은 ‘국내에서 암약하는 주사파 5만명 이상을 죽여야 대한민국이 산다’는 식의 주장을 펼쳐온 극우세력과 손잡았다. 실제로 내란세력이 일부 정치인과 시민사회인사에 대해 체포와 살해를 준비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혐오선동은 웬만한 나라에서는 용납되기 어렵지만, 그간 한국사회에서는 ‘빨갱이’나 ‘간첩’에 관한 한 그러한 행태가 관대하게 처리되어왔다. 극우세력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자양분으로 삼고 반공주의를 축으로 삼아서 외국인(특히 중국인), 성소수자, 여성에 대한 혐오를 연결시키며 힘을 키우고 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끈질기게 힘을 발휘해왔고 탈냉전기에도 살아남아 이제는 새로운 혐오의 축으로 부상하고 있는 분단·냉전 극우의 진화하는 지배력이다.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이 한가한 일이 아닌 이유다.
혐오정치에 맞서는 연합정치를 위해
한국의 정치시스템은 극우 혐오정치의 세력화에 맞서 효과적인 대항연합을 구축하기에는 약점이 많다. 1등이 당선되는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는 ‘선거혁명’을 용이하게 하는 장점은 있지만, 공직선출의 비례성과 대표성을 크게 약화시킨다. 거대정당이 지지율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는 반면 소수정당은 원내에 진출하기 어려워져 양당정치 혹은 몇몇 거대정당의 과두정치로 귀결된다. 극우세력이 1당으로까지 부상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면 이 제도의 한계는 더 치명적이다. 다당제에 기초한 선거제도를 유지해온 국가들은 정치연합을 통해 극우의 세력화에 대항해왔다. 2024년 총선 1차 투표에서 1당을 차지한 국민연합(RN)에 대항해 2차 투표에서 반극우연합 신인민전선(NFP)을 형성하여 극우의 집권에 제동을 걸었던 프랑스의 사례, 우파의 집권을 진보중도파의 연정으로 막아낸 2023년 스페인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제도 정비가 단시일 내에 어렵다면 극우의 세력화에 맞서려는 정치세력들이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재명 대표는 더불어민주당이 ‘중도보수 정당’이라고 표명했다. 보수를 자처해온 국민의힘이 스스로 중도보수를 버리고 극우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온건하고 합리적인 보수와 중도층까지 포용하려는 신호라고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한국정치 역사에서 ‘중도’의 천명이 역사적으로 단순히 기회주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진보 역시 중도나 ‘합리적 보수’와 더불어 성장하며 숨 쉴 공간을 확보해왔다는 점을 고려함직하다.
한반도의 맥락에서 중도가 의미를 지니려면, 무엇보다 분단체제와 냉전적 대결구도가 지배적인 현실 속에서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변혁의 공간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를 중도라고 규정하든 보수라고 칭하든, 지금 이재명 대표의 더불어민주당에게 중요한 것은 1기 촛불정부가 왜 시민의 지지를 유지하는 데 실패했는지를 제대로 평가하고 그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주는 일이다.
내란세력 심판과 변혁의 길을 여는 중도
이를 위해 우선, 박근혜 탄핵 당시보다 현격히 줄어든 윤석열 탄핵 연대·연합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한 적극적 노력을 보여줘야 한다. 박근혜 탄핵 당시에는 탄핵 찬성 여론과 국회의 탄핵안 가결 찬성 비율, 그리고 이후 대선에서 탄핵 찬성 정치세력의 득표율이 비교적 동일하고 높게 유지되었다. 반면, 이번 내란 국면에서는 국회의 탄핵안 찬성 의석 비율뿐 아니라 여론조사의 탄핵 찬성 비율도 박근혜 당시보다 낮고, 여당의 주류가 내란을 옹호하고 있음에도 정당 지지율이 더불어민주당과 백중세를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문재인정부 출범 당시에는 더할 나위 없이 압도적이었던 탄핵연합·탄핵연대가 이후 속절없이 해체되고 도리어 5년 만에 반문재인 연합으로 뒤집어지고 말았다. 개혁이 지나쳐서 연합이 해체된 것이 아니다. 연합을 연합으로 유지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민주당의 권력 점유를 개혁과 등치시킨 결과였다.
그런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의 파면과 그후의 정치일정 전반에서 민주주의 수호와 사회개혁을 위한 폭넓은 정치적 연합을 구축하고 유지하는 데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파면 이후에도 내란세력 재집권을 함께 저지하고 대선 이후 개혁정부를 함께 운영해갈 비전과 계획을 동료 야당들과 광장의 시민들에게 제시하고, 그들의 주장을 경청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내란 이후의 정치가 다양성을 존중하고 혐오정치를 배격할 것임을 분명히 천명하고 합의해야 한다.
둘째, 가속화하는 복합위기를 넘어설 사회적 합의의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진행되어왔고 이제는 신분 수준으로 고착되고 있다. 지역간 격차, 성별 격차도 심각한 수준이다. 이미 초고속으로 진행된 저출생 고령화에 대처할 적기를 놓친 상태에서 잠재성장률은 급감하고 정부의 재정 여력도 줄어들고 있다. 수출에 의존하던 재벌중심 경제는 미중 갈등 속에 이중고를 겪고 있다. 경제적 실적으로만 보면 내란과 탄핵이 아니어도 윤석열정부가 큰 곤경을 치르고 정치적 심판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지만, 이 문제들은 앞으로 들어설 정부에게도 큰 도전거리임에 틀림없다. 경제위기, 돌봄위기, 기후변화, 산업기술 전환 등을 한데 묶어 정의로운 전환을 꾀할 만한 사회적 합의의 주체도, 정치적 구상도 아직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과정을 혼자서는 할 수 없다.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마주 앉게 하고 협력하게 도와야 한다. 시민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들이 참여하게 해야 한다.
셋째, 강퍅하고 이념화된 영역에서 진정한 실용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분단체제에서 가장 이념화되고 경직된 영역은 안보의 영역, 동맹의 영역이다. 가장 변화가 더딘 곳도 이 분야이고, 한반도평화 프로세스가 좌초했던 곳도 여기다. 이제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동맹이 성역이 되고 믿음이 되던 시대는 지났다. 북한이 핵을 지니게 되었으니 우리도 핵보유 잠재력을 확보하자거나 군수산업을 미래의 먹거리로 삼자는 것은 실용주의도 현실주의도 아니다. 군사적 대결로 꽉 막힌 곳에서 평화우선 접근을, 통일의 당위가 가로막힌 곳에서 현존하는 두 국가의 평화공존을, 약탈자로 변질된 동맹에 대해서는 명실상부한 실용주의와 다자주의를 감행해야 한다.
이태호 / 시민운동가,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소장
2025.3.4.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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