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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2025년 4월 4일,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



양경언

“탄핵 사건이므로 선고 시각을 확인하겠습니다. 지금 시각은 오전 11시 22분입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2025년 4월 4일,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탄핵 인용 선고문이 낭독된 후에 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 글만큼은 어느 시기에 쓰였는지 분명히 기록하고 싶다. 이 글이 일분일초를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들의 ‘역사창조 능력’을 실감하면서 쓰이고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서울 광화문, 광주 구(舊) 도청, 대구 동성로, 제주시청 앞 등 전국 각지의 광장에서 또는 학교, 회사, 집 등 다양한 사람이 자신의 일상을 영위하는 자리에서 따로 또 같이 한날한시에 접한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 소식은 많은 이로 하여금 저절로 환호를 하게 만들었다. 계엄이 선포되었다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대통령 윤석열 탄핵 선고 결정문)에 해제되었던 2024년 12월 3일과 4일 사이 밤에서부터 탄핵이 인용되기까지 장장 4개월여간 지속됐던 두려움과 긴장, 근심에서 벗어나 찾아온 기쁨과 안도감이었다.


외신에서는 그 순간의 광장을 일컬어 “마치 월드컵에서 결승골이 터진 것 같다”(영국 BBC)고 표현했지만, 우리는 그를 단지 축제의 한복판에서 느끼는 즐거움에만 빗댈 순 없을 듯하다. 오랜 기다림과 노력 끝에 밀려드는 감격과 성취감, 고생스러웠던 날들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한 이들에 대한 고마움 등 하나만 골라 부를 수 없는 깊이가 우리의 기쁨과 안도감엔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각자가 맞이한 그때의 감정을 무엇이라 뭉뚱그려 표현하기에도 적절치 않은 것 같아서 ‘기쁨’과 ‘안도감’이라는 말도 부족하게 느껴진다. 함께 맞이한 그 순간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승리의 순간’이라 불러볼까. 탄핵이 선고되기까지 “고통을 느끼되 희망과 기억을 잃지 않고, 이 고통의 시간을 일순이라도 단축하기 위해 희망과 기억의 시킴에 따라 그날그날의 할 일을 하고 싸움을 싸우는 것만이 올바른 기다림의 자세”(백낙청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창비 2011, 467면)임을 품은 채 실천한 이들이 다다른 순간이므로 여기에 해당하는 모두에게 ‘승리의 순간’이라는 말을 돌려주는 건 마땅하다. 이는 비단 4개월여의 시간뿐 아니라 윤석열정부의 숱한 반(反)시민적 행태가 이어졌던 근 3년여의 시간, 나아가 ‘참다운 삶’에의 희구를 한순간의 정치적 구호로 소비하지 않고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실현하고자 간절히 바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으로 확장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극우’세력이 분단체제의 강력한 작동을 방증이라도 하듯 선동했던 온갖 혐오표현과 역사 개념의 오용, 사실의 왜곡, 폭력적 행태로부터 우리 손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다시금 오늘의 기준을 세워냈으므로, ‘승리’라는 표현이 쓰일 자격이 누구에게 주어져야 하는지는 자명해 보인다.


광장은 날마다 새롭게 태어났다. 기존에 있던 깃발들과 이번에 등장한 깃발들이 어울려 파도처럼 몰아칠 때는 한편의 시(詩)가 허공을 배경 삼아 탄생하는 것 같았다. 또한 다양한 정체성의 사람들이 자신이 어떻게 ‘방’ 밖으로 나오게 되었는지, 지금을 통해 우리 자신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인 얼굴로 전할 때는 한편의 이야기가 빛의 긍지를 입고 다시 쓰이는 것 같았다. 광장은 이전보다 더 나아갔다. 여의도 국회 앞에서, 남태령에서, 한남동에서, 광화문에서 이어진 기다림의 도정 하나하나는 앞으로 그 누구도 함부로 폄하할 수 없을 다수 대중의 주체적인 노력이 창조한 순간의 합이므로, 2025년 4월 4일의 순간을 승리의 이름으로 새기지 않을 이유가 없는 듯하다.


혹은 ‘역사의 순간’이라 부르면 어떨까. 12월 3일 선포된 ‘계엄’은 탄핵 선고문에 언급된 그대로 “국가긴급권 남용의 역사를 재현하여 국민을 충격에 빠트”렸다. 내란을 일으킨 위정자가 반복되기를 바랐던 과거는 군인이 시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권력이 초법적으로 군림해 온갖 자유와 권리를 폭력적으로 통제하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진행은 전혀 막막하기만 하던 곳에서 홀연히 길을 뚫는 일은 있어도 한번 지나온 길로 되돌아가는 법은 없다”(백낙청, 같은 책 220면). 피로 얼룩진 과거가 반복되기를 바라지 않는 이들이 나서서 이전의 역사를 통해 배운 바를 광장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회에서 낭독한 문장인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빛과 실」 2024.12.8)를 준엄한 질문으로 받아 과거의 이야기를 능동적으로 전수받는 현재를, 죽은 자의 부름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산 자의 현장을 열고자 했다. 10·29참사와 ‘채상병사건’, 요 근래 발생했던 산불사건 등 너무 많은 사람을 잃었음에도 지금껏 그에 대한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 과정은 절실하게 이어졌다.


이번 광장에서 유난히 광주의 오월과 87년 6월을 불러내고 그 기억과의 연결을 소중히 여긴 바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고정된 역사를 통해 오늘을 가두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탐색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 역사가 품고 있는 결핍과 상처로부터 오늘 너머에 대한 상상력의 지평을 확장하는 계기를 얻을 수 있음을, 지금 이 순간을 역사적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몸으로 깨우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2025년 4월 4일의 순간을 역사의 한 순간으로 새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황정은의 중편소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디디의 우산』, 창비 2019)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선고한 “2017년 3월 10일”을 두고 “오늘은 어떻게 기억될까”(313면)라는 문장을 여러번 쓴다. 이 문장은 일견 야릇하다. ‘오늘’은 살아내고 겪어가는 것이지 ‘기억’으로 일찌감치 수렴될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소박하다고 여기는 하루하루가 거대한 역사적 흐름의 일부임을 잊지 않기 위해 쓰인 것으로 여긴다면 달리 읽히기 시작한다. 저 문장은 오늘에 대한 급진적인 요청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어 자리에 ‘오늘’이 놓인 수동태 문장 ‘오늘은 어떻게 기억될까’의 2017년을 거쳐, 주어 자리에 ‘우리’가 놓인 능동태 문장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의 2025년에 이르렀다. 2025년 4월 4일,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 이 글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맞이한 그 순간을 무엇으로든 불러보자고 제안했던 까닭에는, 주어진 세상의 조건으로부터 더 나아가는 일을 포기할 수 없는 이들이 오늘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제 우리는 안다. 그리고 이 글이 처음 독자들과 마주할 시기는 제주에 동백꽃이 지는 4월 3일과 우리가 저마다 2014년 그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4월 16일 사이 즈음이다.


양경언 / 문학평론가

2025.4.8.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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