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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중’ 현상의 또다른 접근법



박동찬



12·3 계엄사태 이후 한국사회에 만연해 있던 소수자 혐오가 특히 혐중(嫌中)이라는 형태로 발현하고 있다. 탄핵 국면 초기에는 ‘탄핵 찬성집회 절반이 중국인’이라는 거짓주장을 통한 혐오선동이 난무했다면, 나중에는 거리의 중국인 관광객을 향한 욕설과 신체적 가해로까지 이어졌다. 혐중이 갈수록 더 노골적이고 조직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은 최근 보도된 사건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4월 19일, 서울 경복궁역 교차로에는 ‘중국 유학생은 100% 잠재적 간첩’이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게시되었으며, 이틀 전인 4월 17일 밤에는 ‘윤어게인’을 외치는 수백명 규모의 극우세력이 광진구 자양동 양꼬치거리에 난입해 중국계 이주민들 앞에서 ‘짱깨 북괴 빨갱이는 대한민국에서 빨리 꺼져라’라는 노골화된 구호를 외치며 위력행사를 벌였다.


‘중국’의 문제인가, ‘혐오’의 문제인가


혐중은 ‘중국’을 ‘혐오’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둘 중 어느 하나를 빼놓고는 이 현상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여전히 일각에서는 혐오보다는 중국에만 착목하여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이는 극우는 왜 중국을 그토록 싫어하나, 나아가 중국이 어떤 혐오의 근거를 제공하였는가 하는 질문을 가능케 한다. 중국을 일종의 원인 제공자로 위치시키는 구도는 중국에 대한 혐오를 ‘합리화’하여 재생산하고, ‘혐오의 주류화’라는 한국사회 내부의 문제를 간과하게끔 한다.


한국의 보수개신교는 계엄 한달여 전 ‘건강한 가정, 거룩한 나라’를 슬로건으로 100만명을 동원한 10·27 연합예배를 성사시킨 바 있다. 탄핵 반대파의 한축인 손현보 목사가 당시 대회의 실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슬로건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날의 광장 예배는 동성결혼 합법화와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가 핵심이었고, 작년 7월 대법원의 동성 배우자에 대한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판결에서 비롯된 위기의식의 발로였다.


극우와 일부 보수개신교가 공모하는 혐오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그렇기에 계엄 이후 확산한 혐중은 대통령후보 시절부터 꾸준히 반중·반공을 공공연히 선동한 윤석열의 탄핵이라는 특수한 정치적 국면 앞에서 혐오의 표적과 주전장이 일시적으로 이동한 결과일 수도 있다. 최근의 흐름을 보아 이러한 혐중이 단기간 내 수그러들 기미는 없지만, 중국이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더 가성비 좋은 ‘혐오 장사’가 부상하면 타깃은 얼마든지 또다른 집단으로 옮겨갈지 모른다.


언론은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그동안 노골적인 혐오발언과 혐오범죄는 ‘일간베스트’(일베)와 같은 비주류집단의 전유물로 여겨져왔다. 그런데 이전에는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던 혐오와 차별이 은연중에 스며들어 일상적으로 발현되는 게 곧 혐오의 주류화다. 문제적 발화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하고 동조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내용은 ‘정상’처럼 보인다. 탄핵정국에서 일부 국민의힘 정치인은 극우 커뮤니티의 혐중여론에 편승해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시키려 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온라인에서 확산하는 혐중 콘텐츠를 그대로 옮기는 언론에 있다. 구체적인 맥락이 소거된 혐중 보도는 그 의도가 어떠하든 혐중이 마치 주류의 여론인 양 대중을 오도할 여지가 충분하다.


특정 이슈가 사건으로서 공론화될지 여부는 얼마간 기자의 시선에 달려 있다. 최근 들어 많은 언론에서 혐중문제를 포착하고 기사화했는데, 한편으로 기자들 사이에서 ‘피해당사자’ 인터뷰에 대한 갈증과 강박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 전해진다. 사건의 해악을 객관적으로 드러내고,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 당사자의 증언은 더없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기사에 의해 생산되는 중국(인) 이미지는 연민과 구제의 대상으로 고착화될 위험이 있다. 혐중문제는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적 구도가 확실하면서도 그 구도를 해체하지 않는 한 해결도 난망하다.


혐중이 가시화하기 이전 언론의 중국 재현방식을 상기해보자. 중국에 대한 보도는 대부분 자극적이거나 엽기적인 사건에 대한 조명이 주를 이루었다. 방송 생태계가 급속하게 변화하자 레거시 미디어조차 대중의 이목 집중, 결국 트래픽 장사를 위한 자극적인 뉴스거리만 의도적으로 선정해왔던 것이다. 언론은 ‘해괴하고 이해 불가한 중국’의 이미지를 생산한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혐중 관련 보도 역시 그에 못지않게 위험하다. 중국인을 단순히 수동적인 피해자의 자리에 위치 짓는다면 저항하고 목소리를 내는, 다양한 결의 중국인은 지워지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야 할 동료 시민이자 연대 대상으로서의 중국인도 실종된다.


‘인종주의’라는 진단이 최선인가


최근 혐중의 원인을 인종주의의 인식틀 속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한국의 혐중문제는 상당히 복잡다단할뿐더러 그 원인을 인종주의 하나로 환원시킬 경우 수많은 맥락이 누락된다. 보통 인종은 ‘신체적 특성에 기초해서 사회적으로 규정된 집단’을 말한다. 다시 말해 피부색, 이목구비 등 선명한 신체적 차이에 근거해 발현되는 게 인종주의이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중국인은 물론, 혐오의 대상이 되는 한국사회 내 이주민 태반이 한국인과 인종적으로 이질적이지 않다.


이는 ‘한국에 인종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혐중을 인종주의 문제로만 판정한다면 더 큰 딜레마에 봉착하고 만다. 인종주의가 아니더라도 개개인을 집단화하여 낙인찍는 행태는 얼마든지 또다른 차별과 혐오를 야기할 수 있다. 또 한국사회에서 제노포비아와 인종주의는 종종 혼용되고 동일시되는데, 두 개념은 비슷하면서 다르다. 전자는 두 집단 간의 접촉 부족에서 오는 이해의 결여가 주원인이어서 상대방을 알아가다보면 어느정도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구조화된 인종주의는 타자 집단을 일괄하여 열등하거나 적대해야 할 존재로 규정한다. 따져보면 그간 한중 양국의 교류가 양적으로 부족했다고 할 수 없다. 한국에 100만여명의 중국계 이주민이, 중국에 20만여명의 한국인이 체류하고 있다. 요우커(중국인 관광객)는 한때 한국에서 크게 환대받았고, 최근 중국의 한국방문객 무비자정책 시행 이후 상하이 등지의 주요 관광지가 한국인들에게 점령당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돌고 있다. 그럼에도 혐중이 누그러들지 않는 건 다소 절망적인 일이다.


혐중에서 ‘중(中)’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느냐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것은 국민국가 중국을 지칭할 수도 있고, 중국을 통치하는 지배집단(공산당)을 가리킬 수도 있고, 그 속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중국인이 될 수도 있다. 멀리 볼 것 없이, 한국에 나와 있는 중국인은 단일한가 생각해보자. 한국화교, 중국동포(조선족), 중국인(한족) 등 이들의 정체성조차도 획일적이지 않다.


혐중문제에는 인종주의뿐 아니라 계급의 문제, 젠더의 문제, 포퓰리즘, 국제관계 등 다양한 변수가 교차한다. 이러한 변수는 중국인에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혐중의 극복은 중국인만의 과제도, 중국인만을 위한 과제도 아니다. 차별과 혐오는 구별과 정의에서 기인한다. 이는 국민국가 시스템의 핵심적인 작동원리이기도 한데, 이상적이고 건강한 ‘우리’가 있고, 열등한 ‘타자’가 있다는 구별은 혐오를 정당화하는 기득권의 주요 전략으로 이용되어왔다. 그리고 타자가 열등하고 위협적이라는 주장은 늘 소위 ‘우리’에 의하여 유포되었다.


기득권세력은 중국의 자리에 끊임없이 타자 집단을 대입하며 혐오와 폭력으로서 존재를 지우려고 할 것이다. 외상을 치료하는 한시 처방보다, 과정이 더디더라도 근원적인 질문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차별과 혐오를 양산하는 국가적·국민적 틀에 관한 질문 말이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민이란 무엇인가? 누가 ‘진짜 국민’으로 여겨지고, 무엇이 ‘정상적인 시민’을 규정하는가? 혐중문제를 궁구해야 할 당위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박동찬 / 경계인의몫소리연구소 소장

2025.5.13.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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